맞춤 신앙 180619
강남-요한복음 17장 8절(맞춤 신앙)180619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7장 8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지금 여기 누가 누구 보고 대화합니까? 여기 예수님이 아버지 보고 지금 기도하고 있지요. 겟세마네 기도니까. 기도인데 기도 내용에서 누가 빠져있지요. 누가 빠져있죠?
예수님하고 아버지만 남고 누가 빠져있어요? 제자들은 빠져있지요. 제자들은 빠져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저희’라고 집어넣어요. 아버지하고 아들이 이야기 하는데 여기 제자들은 빠져 있다 이 말이죠. 너희들의 의견은 어떠냐 묻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도이기 때문에. 아버지한테 기도하는데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저희’가 ‘저희’라는게 들어가요.
그런데 저희가 누구입니까? 제자들이거든요. 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이야기해도 되나? 물어봤습니까? 물어보지를 않았지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기도하는데 일방적으로 누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방금? 제자들 들어갔지요. 이 제자들한테 사전에 안 물어봤지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일방적이죠. 일방적 조치를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기도 내용 가운데 벌써 무슨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택한 또는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의 자리가 이미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만 이미 마련되어 있는거예요. 지금 제자들은 이 기도 끝나면 제자들은 지금 배신할거예요. 도망칠거라 이 말이죠. 요한복음의 특징이 마태 마가 누가하고 다른 점이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현실을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가 이미 나와있어요 벌써 있다고. 그걸 전제로 했을 때에 이미 했고 그다음에 제자들이 배신한걸 다 안 사이에서 다시 그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일방적으로 하는 일이 뭐였을까를 지금 요한복음을 통해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누가 끼어들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알아서 할께요가 여기에 들어가지 않아요.
제자들이 구원 받는 것은 제자들이 어떻게 살 것이다 그런 문제는 제자들이 전혀 거기에 대해서 자기 의견타진이나 의사를 할 수 있는 기회 조차도 박탈 당합니다. 이걸 요즘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내가 구원받고 내가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 내가 조금도 거기에서 끼어들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곳, 요한복음이에요. 전혀 주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배신하고 다시 돌아오는 그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도 이미 사전에 계획된 코스예요 그게. 배신하고 다시 돌아오는 코스도 사전에 계획된 거예요. 예수님이 배신할 때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육적인 본성을 그대로 발휘하는 겁니다 배신하고. 올 때는 육적인 본성으로 오지를 못해요. 다시 올 때는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부터 해가지고 계속 무슨 이야기 나옵니까? 계속 성령 보혜사 성령 이야기 나오는 거예요. 그래놓고 이야기 합니다. 믿느냐? 그러면 믿느냐 이렇게 했을 때에 결국 뭘 믿느냐 하면은 내 믿는 것이 날 구원한다는걸 믿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지금 요한복음에서 있을 수 없어요. 뭐냐 하면은 내치든지 받아들이던지 간에 이거는 내 소관 아닙니다 라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믿게 되는 그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내가 나를 알기 이전부터 주께서는 이미 나를 알고 계셨고 알고 계셨기에 우리가 제시하는 그 구원받는 방식이나 대안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일체 거부하시고 일방적 조치에 의해서 구원하든 천국가든 조치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대로만 진행될뿐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성령의 하신 일의 결과로서 우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어린아이 보고 부모를 믿느냐 믿으라는 말은 그 믿는 순간부터 믿는게 아니예요. 아이가 어머니의 아버지의 그 노고와 고생한걸 생각할 때는 그 생각하는게 만약에 15살이라면 15살 때부터 이제 믿기 시작한게 아니라 그 믿는 순간 다시 자기가 0살 때부터 1살 2살 살아온 모든 것이 자기의 수고나 자기의 노력이 아니였다는 부모의 희생이였다는 것을 소급해서 다 받아들이는겁니다 소급해서.
과거만 소급할까요? 아닙니다. 미래까지 깡그리 남김없이 미래 천국에 골인해서 사는 것까지 그게 다 내일이 아니고 나를 통한 주의 일인 것을 믿게 되는 거예요. 그걸 저는 미국 서부의 미국 남부에 부는 남부에 보면 허리케인 그 폭풍이 이렇게 오게 되면 태풍이나 폭풍이 오게 되면 이런거 있잖아요. 토네이도. 토네이도를 한번 보세요.
저 시커먼 먹구름 와가지고 이렇게 큰 범위 내에서 상층부에서 흑먼지를 일으켜도 그 지면에 닿는 것은 어떻습니까? 꼭 레코드 침 같아. 급작스럽게 여기 좁아지죠. 좁아지고 이것이 심지어 만약에 현장에 안 가봤지면 동영상 보게 되면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옆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요. 마지막 닿는 면이 좁아요. 위는 큰 범위지만 난리도 아니예요. 집도 왔다갔다하고 전봇대도 왔다갔다하고 차도 왔다갔다하지만 이 막상 훑고 지나가는 접점 지점은 굉장히 좁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원대한 계획이 아버지와 아들의 원대한 계획이 우리 자기 택한 백성한테는 굉장히 협소하고 굉장히 섬세하고 세밀해요. 굉장히 섬세하고 세밀합니다. 그래서 믿음 있어도 아는 것은 3초밖에 안 된다 하는 이유를 그 많은 24시간 있더라도 3초라면 거기에 비해 굉장히 협소하고 짧잖아요. 짧아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창세 전부터 있던 계획이 그 시간에도 얼마든지 다 담길 수가 있는 거예요. 얼마든지. 이게 신앙을 유지하는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오래 간다 해서 좋아하지 마세요. 오래 가는 것은 토네이도 아닙니다. 뭐 수상한거예요. 그건 자기가 공들인거예요. 맘 먹고 은혜 받겠다고 작심한 자기 공작입니다. 하나의 연출이고 연기에 불과해요. 연극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시간론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 카이로스를 마태복음 그런데 요한복음에 이야기하면 이걸 번역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때, 때는 몇 초입니까 하는게 없어요. 때라고 하는 것은 점은 몇 센티 입니까? 원래 점은 면적이 안되요. 공간적으로 점은 면적이 없는 것처럼 시간적으로 때는 간격이 없어요.
아주 짧은 시간 스쳐 지나가지만 내가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후딱 드는거예요 이게. 지금 이 순간만 주의 일이 아니고 내가 태어난 것도 주님의 계획이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상의 일도 주님의 계획의 토네이도 안에서 휘감아 돈다는 사실을 그걸 순간적으로 아는 겁니다. 이걸 주일 낮 설교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했냐 이거를 바로 언약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이는거.
언약이라 하는 것은 오늘 요한복음 아버지와 누구 사이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아버지는 아버지죠. 아버지 아들, 이걸 구체화한게 아브라함 언약이잖아요. 아브라함 언약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릴 때 그냥 저 깊은 산속에 버리고 오는 겁니까? 버림 받는게 뭐예요? 묶어놓고 아예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을 뭘로? 제물로 바치는거잖아요.
숨겨진 창조의 비밀이 언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레코드 침처럼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방주 나오고 난 뒤에 정결한 짐승을 같이 동승했던 정결한 짐승을 불결한건 놔두고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주께서 흠향 하시는 그 방식, 그 방식에서 피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노아 언약보면 피를 강조해요. 그 때부터 피.
출애굽기 24장이든지 20장에 보게 되면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피를 양푼에 담아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게 돌판이잖아요. 말씀.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게 아니예요. 말씀에 뭔가 덮쳐요. 우리같으면 소스, 카레 같으면 카레가 덮치듯이 소스가 덮친다고요. 뭐가 덮쳐요? 양푼에다가 뭘 담아? 피를 담아서 하나님이 만든 돌판에다가 하나님이 제시한 방식, 피를 거기다가 뿌려버리죠. 그렇게 하는 그 장소를 제단이라고 해요 제단.
그게 제단이고 그 제단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레코드 침처럼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해당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름에 해당되는 실체가. 아무것도 없으면 이름 못 짓잖아요. 뭔가 분명히 뭔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완성시키는 그 현장에 다른 데는 안계시고 언약과 관련된 그 장소에 그 사건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어떤 하나님이다? 반드시 언약을 던져놓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는 그 하나님 외에는 절대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니까. 그런 뜻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 17장 8절에 들어가면 좀 어려워요. 지금까지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지금부터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 이게 어려우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오늘 본문이 겟세마네 기도예요. 아버지와 아들만이 기도하는 기도내용인데 우리가 누가 지금 이 성경책을 보고 있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우리가 보고 있으면서 이 기도말씀을 우리가 해석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해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래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현장에 누가 주제넘게 끼어든다는 말입니까? 내가 끼어드는 셈이 되요. 자동적으로. 내가. 인간이.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인간이 끼어들 때는 그냥 빈손으로 끼어들지 않아요. 맹탕으로 끼어들지를 않습니다.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모델을 생각해요. 모델을 염두해두고 끼어들어요. 모델을 염두해두고.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이렇게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해서 나왔던 상황이 기도의 응답이 된 상황이 어떤 상황일까를 인간이 미리 예상을 하고 상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렇게 기도 해가지고 기도하게 되면 뭔가 기도했으니까 뭔간 실적 업적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실적 업적 실적 업적을 성경 보는 우리가 미리 예상을 한다니까요 예상을. 저는 어제 축구 하나도 안봤습니다만은 십자가를 가리기 때문에 안봅니다만은 어제 몇 시부터 시작한지 몰라. 한국하고 스웨덴하고 축구할 때 축구를 그냥 봅니까? 예상되는 결과를 예상하고 봅니까? 1:0으로 이겼으면 좋겠다. 강팀이니까 0:0으로 해도 성공이다. 반드시 예상하고 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보다가 신경질 나서 껐다는 사람 있는데 그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상을 하는 거예요 예상을.
글을 쓴다. 복음적인 글을 쓴다. 예상 안하겠어요? 예상 안 하겠어요? 그 예상한 어떤 모델이 있다니까요. 예상한 어떤 모델이 있어요. 이렇게 쓰게 되면 이렇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고 사람들은 얼마나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이고 그걸 예상한다니까요. 그 예상이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현장에서 본인이 그냥 곱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예상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게 되면 성경 말씀을 끼워넣기 식이 돼요. 끼워넣기 식. 이게 문제예요 이게 문제.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은 나를 위해서 나 구원하라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천국 간다 라는 그것을 미리 예상해요. 내가 원하는 상황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옳다는 것을 우기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적당한 성경말씀을 거기에 전부 다 집어넣는 그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지금 제자들은 지금 배신하는데 우리는 배신할 마음이 없어요. 정말 그 현장에 있다면 이 말씀대로 우리는 어디 가야합니까? 내가 예수 믿으면 개다 뭐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가는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생했던가. 그래 주님 말씀 잘 들어서 내가 이 말씀 은혜로 가슴에 담아야지. 이러고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벌써 요한복음 17장 8절 9절 이 말씀을 가지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나를 상정을 하고 미리 상상을 한다 이 말이죠 구원받은 나. 이거 반칙이죠. 이거는 그 현장성과는 완전히 위배되는 겁니다. 분명히 현장에 제자들은 없고 예수님과 아버지 밖에 없었고 제자들은 자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길게 이야기 하면 어렵다 해가지고 또 중간에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거예요.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하라 이 말이에요. 산 채로. 살아있는 내가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7장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것을 잘 마음에 간직해서 내가 구원받겠다 이런 생각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예요. 얍샵한 짓이지 얍삽한 짓. 오늘 제목을 얍삽한 짓이라고 할까. 정말 얍삽하기 짝이 없어요.
예수를 만나도 하나님을 만나도 성경을 봐도 자기 살 궁리부터 먼저 챙깁니다. 자기 본인이 모델이에요 어디? 이 세상의 모델은 예수님이 모델이지 예수님 외에는 모델이 없어요. 제자들도 모델이 아니예요.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한다 이 죽음은 우리가 죽어도 경험하지 못하는 죽음을 경험해야 되요. 이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된 그 죽음을 우리는 살아있는 그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해야돼요. 왜?
예수님은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서 그들을 산자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바꿔요 죽은 자로. 성령을 받게 되면. 이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잖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로 간주하면서 그러면 남들 보기에 본인 보기에 자기가 거울 보면서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자인데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이게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채로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예수님만이 경험했던 그 죽음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어느 인간도 사전에 미리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예요.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예수님 말씀 듣고 지금도 살아있지만 더 살겠다 이런 이런 생각이지. 그래 나는 죽어야 돼 이런건 없는거예요. 왜 인간은 그런 생각, 나는 죽어야 돼를 왜 못하느냐 하면 그것도 성경에서 나와야돼요. 우리가 뭐 못 되서 그렇다 이런 말 하지 말고 성경에서 찾아야돼요.
예수님께서 내가 죽는다 고난 받고 죽는다 이렇게 했을 때에 베드로가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 이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럴수 없나이다 그럴수 없나이다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했지요.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과 이 12 모임이 조건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사시고 또 사시고 또 살아있다는 그런 조건하에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예요. 계속 살아있어줘야 12 모임이 유지가 된다니까요. 본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따를 수 있는 그런 여지가 계속 돼요. 예수님이 살아있는 한. 그런데 그 중심 되는 스승이 죽어버리면 이 모임이 파토난다니까요. 다 깨지잖아요.
한진그룹이 살아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 재벌가 이름이 뭐예요? 조양호 입니까? 하여튼 그 재벌가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중심으로 모였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재벌총수가 나는 앞으로 일주일 내에 죽습니다. 우리 가족 다 죽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결국은 닭 쫓던 개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지금껏 총수님이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죽어버리면 나중에 내침을 당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가 이게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예요. 오늘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당한 이야기를 한겁니다. 아버지가 그 회사에 승진해가지고 뭐 하나 부장쯤 임원 되가지고 연봉이 1억쯤 되는데, 아이고 여보 오늘 고생했다 여기 홍삼차 이거 먹고 열심히 일해가지고 가족들한테 월급 많이 갖다 줘. 뭐 이렇게 하게 되면 가족들 모여봐라. 내가 오늘 저녁 죽으련다. 이렇게 되면 그 부인부터가 여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렇게 그런 말 하지마세요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이게 대화 자체가 대화 자체가 이게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대화 자체가.
사람은 그 베드로가 예수님 살아야 된다는 말이 예수님 위해서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어야 될 이유는 베드로 본인이 지금 자아가 망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꼭 필요한거예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제가 두자로 그걸 뭐라고 했느냐 그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우상은 무슨 이미지라 했습니까? 아버지 이미지라고 했지요. 내가 비빌 언덕, 기댈 여지, 그게 우상이에요. 신, 예수, 삼위일체 전부 다 우상입니다. 왜? 본인도 본인이 누구 인지 몰라요. 나 좋아라고 믿는 거예요. 부처하고 예수하고 차이점이 없어 그렇게 되면. 나 좋아라고 나한테 유리하도록 나한테 도움 되도록 나한테 필요하도록 믿는거예요.
아니 글을 쓰면서 저를 죽여 달라고 글을 씁니까? 사람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정말 겁 없이 이 성경 보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 다 기도할 때 저만치 본인 기도하든지 자든지 하고 왜 따로 기도하십니까? 이거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있을 자리입니다. 약간 늦게 오신 분들 위해서 다시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먼저 강의 들은 사람들 답변해 보세요. 뭐 때문에 그렇다 했던가요? 뭐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뭐 때문에 제자들을 내치고 아버지와 아들만 이야기 한다고 하던가요 제가. 세자로 이야기 했는데 일방적. 일방적입니다. 일방적. 주의 일에 방해 받지 않는 방법은 뭐냐? 일방적으로 우리를 내치는 방법이 오직 ‘주의 일’ 다워요. 우리가 같이 협조하면 주의 일이 안 돼요. 나사로가 죽은지 4일 됐잖아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되지 않았습니까. 그 무덤가에 예수님 갔다 이 말이죠. 예수님하고 유대인, 사람들 다 갔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딱 들어보니까 그 돌문 뒤에서 나사로가 살아보려고 손톱가지고 거기서 돌문 갑갑한 그 베옷입고 돌 문 이렇게 막 굵었습니까? 거기서 간절히 주여~기도하고 있었습니까? 거기서 헌신했습니까? 거기서 가슴 두드리면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이러고 있었어요? 그랬습니까?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는 거기에 어떻게 있었어요? 그냥 죽어있었지요. 죽어 있었는데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그냥 아무개야 나오너라 하니까 거기서 나왔잖아요. 얼마나 힘이 없었으면 돌문도 본인이 자동으로 나온게 아니고 외부에서 돌문도 열어줘야 나왔고 베옷도 본인이 풀지를 못하고 외부에서 풀어줬어요. 그게 그걸 가지고 그게 믿음사항이에요 그게. 그게 흔히 말하는 믿음사항이라니까. 믿음사항이라는 것은 할 수 있는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 기도 이 정도 헌금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도 이거는 영 아니야 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것도. 그런데도 자기 나와바리가 있어요. 그런데도 자기 나와바리가 있어요. 살아있을 경우에는 자기 영역이 있어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라면 죽은 자는 일체 자기 그림자 자체도 없어져야 되지요. 성도로 하여금 산 채로 나는 이미 죽었소 하는 그 것을 보여주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찾아오는 겁니다. 성령 오시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다. 이게 믿는 자야.
그렇다면 오늘 요한복음 17장 8절 봅시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