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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0611a 부산강의 : [시편]11(5편)-상처에서 상처로자유게시판시편

20180611a 부산강의 : [시편]11(5편)-상처에서 상처로(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편 7절부터.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시편의 내용이 굉장히 사적으로 들릴 겁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내용이 안 나와 있단 말이죠. 사적인 자기 고백을 했다면 나는 나고, 그 사람은 고백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이유가 있느냐? 그럴 이유가 없지요. 미국에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다. 그걸 꼭 한국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똑같이 겪어야 할 이유는 없지요. 그러면 여기 나온 고백이 남의 고백이지 나의 고백이 안 되고. 그렇다면 성경으로선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다. 성경은 진리고, 진리라는 것은 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나에게도 적용돼야 진리거든요. 사람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되면 구태여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단 말이죠. 그러면 내가 관심 가고 내가 신경 쓴 것은 나에게서 나왔던 것이 나한테 회수되는 것, 이 일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깥에 있는 성경 시편 5편을 그다지 갈구할 필요가 없겠지요. 오늘 하루 내 일과만 신경 쓰면 되지 시편 5편까지 걱정할 필욘 없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시편 5편은 나와 상관없단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귀신들린 청년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귀신이 예수한테 한 이야기가 있어요. 유명한 이야기인데,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내 일만 신경 쓴다는 말이에요. 이걸 귀신이 이야기했지요. 결국 귀신의 이런 고백이 오늘날 인간들의 보편적인 고백이 됐어요. 그래서 인간은 귀신들린 거예요. 미친 거예요. 실성했다고 하는데 인간은 미쳤어요. 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진리와 연관성이 끊어져버렸어요. 나는 내 일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고, 당신은 나와 상관있느냐고 했단 말이요. 그 말이 맞는 말이거든요.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는 말을 바로 귀신들린 자, 그것도 귀신이 한두 마리가 아니고 군대 귀신들린 청년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말은 오늘날 입장에서 21세기에 청년들이나 이 시대에 이게 맞는 말이에요. 이 말 외에 아무 것도 안 맞아요. 특히 20대 젊은이들과 같이 살게 되면. 엄마는 밥만 먹여주면 나와 상관없는 거예요. 자식도 심지어 부부도 마찬가지고. 내 일 하기도 바쁜데 당신까지 못 챙긴다는 겁니다. 챙길 경우가 있지. 안 만나는가? 만나지. 돈과 관련되어서 만나죠. 돈과 관련 없는 데 왜 만납니까? 오히려 반문하게 돼요. 이게 귀신들린 자의 고백이라니까요. 이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죠. 왜 모르느냐 하면, 성경을 안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내 일만 신경 쓰지 성경이란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 성경을 안 보니까 성경 안에 귀신이 이런 고백한다는 것도 모르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나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모른단 말이죠. 그렇다면 귀신이, 마귀가 인간에게 계속 작용하는 것은 딱 하나만 노리면 돼요. 뭐냐 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리와 인간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만 하면 마귀 일은 대성공이죠. 끊는 방법은 뭐냐? 네 일은 네가 알아서 살면 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모르지요. 왜 사는데요? 모르죠. 내 존재의 의미를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죽고 난 뒤에 그것도 몰라도 되고. 다만 네 필요에 따라 네가 살면 그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귀신이 끊임없이 심어주고 있습니다. 시편 5편 7절을 하고 있는데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에 구체적 사건이 안 나오죠. 어떤 사건에 맞추어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는지 안 나오지요. 사건이 안 나온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고백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개인적 고백이란 말은 나와 관계없다는 거예요. 나와 관계없으니까 시편 5편에 이런 이야기 나오면, 나는 나 나름대로 살고 너는 네 나름대로 살자. 각자 살자. 이렇게 되면 성경의 보편적 진리성이 없어진다는 말은 했지요. 성경을 볼 필요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 살고 너는 네 인생 살면 되고. 성경 펼치니까 시편 5편 나오고, 5편에 보니까 사적인 이야기 나왔으니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귀신의 권세에서 건짐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출이기 때문에 먼저 우리는 귀신의 권세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어야 돼요. 그다음에 우리론 안 되고 주님이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느냐를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가 속해 사는 이것이 주님과 상관없는 귀신들린 자의 세계가 어떻게 그들은 아무 고민 없이 걱정거리 없이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나한테는 딱 적합해, 딱 내 몸에 맞아, 라는 위기감 없이 사는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 보면 나와요. 그게 자연 속의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끄집어낸 게 물상화, 물체로 이해한다는 거예요. 자연 속에서 물체의 형상으로 변하는 거예요. 이걸 구약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우상이에요. 우상숭배하지 말라 했고, 로마서 1장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형상을 누가 만드느냐? 개가 안 만들어요. 코끼리가 안 만들어요. 인간이 만들지요. 형상을 만들 때 모델케이스가 대자연에서 오죠. 대자연에서 인간이 형상화시킨 겁니다. 인간 주변에 많은 짐승들, 송아지, 염소들 있으니까 출애굽기 32장에서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란 이름으로 뭘 만들 때 주변에 있는 암소의 모양으로 만든 거예요. 그걸 저는 물상화, 물체로 만든 겁니다. 그러면 만든 이유가, 자연 속에서 터 잡기, 인간만을 위한 터 잡기가 물상화란 작업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단 말이죠. 집 보세요. 물상화잖아요. 옷, 물상화 아닙니까. 자동차, 물론이고. 모든 것이 자연에서 가져온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현대인들은 자연스럽다. 자연의 삶이다.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귀신, 마귀 다 빠져요. 처소도 빠지고.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일부를 내 것을 가져왔다. 뭐가 문젠데? 많이 가져온 사람은 부자 되고 조금 가져온 사람은 가난하게 됐다. 나는 부자 되기를 애쓴다. 솜씨 있게 능력 있게 보다 많이. 그런 마음도 못 가지나. 이게 뭐가 문제냐? 그런데 아까 무덤에 있는 귀신들린 청년에게 주님께서 다가갔을 때 귀신이 뭐라 했단 했는가요?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상이 아닌 게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자기 주변을 물상으로 둘둘 감아놨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왔을 때 남들 보기에는,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라고 청년이 이야기한 건데 청년 안에 있는 군대귀신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고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물상화 된 인간들끼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들끼리는 아주 자연스러워요. 부산에 비 온다, 그게 어때서? 선거철이라 시끄럽다, 그게 뭐가 문젠데? 뭐가 빠졌어요? 귀신의 고백이 빠졌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로 봤습니다. 태어난 곳을 베들레헴이고. 나사렛 동네에서 놀다가 유대나라 왔다 갔다 했다. 끝. 그런 판단과 평가가 뭐가 문제냐 말이죠. 여기 교회 있다, 저긴 절이 있다. 그런 판단이 뭐가 잘못됐느냐는 거예요. 귀신 빠졌습니다.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면 된다. 그러나 골로새서에 보면 인간들의 바라봤던 자연을 누가 만들었다? 예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죠. 그러면 자연에서 물체를 끄집어낸 이 조치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이건 분명히 귀신들린 자가 하는 행세라고 지적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 문제없어요. 하나님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구약에서 언약이고 신약에서 새 언약,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인간들은 줄곧 그렇게 살아왔고 전통적으로 그렇게 살아왔고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좀 어려운 말을 하려고 하니까 제가 주저되는데요. 익명적인 것에 굴복되는 마음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익명적인 것에 굴복할 마음 자세가 돼있다는 말은, 좀 나보다 더 힘세면 ‘예’하고 비빌 마음 준비가 돼있어요. 혼자 있을 때는 천하에 자기가 최고라고 하지만 혹시 훅하고 옆에서 누가 뭐라 하면, 빌 준비 돼있어요.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본인을 아무리 분석해도 안 나와요. 나올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인간은 귀신의 통치를 받고 있고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익명적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 힘을 의식하고 있어요. 초월적 힘에 굴복될 마음의 준비가 돼있다는 말은, 이미 인간이 누구한테 굴복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밖에 없는 세계 안에 종노릇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종교, 신, 그런 단체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요. 어쨌든 간에 시편 5편을 보면서 시편 5편은 언약이니까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만을 챙기기 위해서 물상화하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와버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안 왔다고 본다면, 눈에 보이니까 대자연 있고, 해와 달, 나무, 바람, 불, 땅, 곡식 보이고 집에 가면 나와 내 가족이 보이죠. 그것으로 사는데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게 전부지요.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살다고 그냥 고생 좀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이 이간이 알고 있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편 5편은 쓸데없는 책이 되지요. 그런데 8절에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갑자기 원수가 나왔단 말이죠. 그냥 살면 되는데 그 원수가 바로 주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에 거기 그 동네 아낙네들이 예수님이 가련하고 불쌍하다고 울었지요.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딸들을 위해 울라.” 예루살렘의 딸이란 말입니다. 그 말을 같은 뜻인데 달리 이야기하면, 너는 지금 네 고통이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이에요. 너는 네 입장에서 참 안 됐다, 불쌍하다. 착하게 살았는데 억울하게 잡혔구나. 남 걱정하는데 네가 예루살렘에 산다는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 오히려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임을 모르느냐는 말입니다. 아픔이에요, 상처에요. 인간은 자기 상처 없으면 세상 잘 돌아가고 있는 줄 압니다. 우상의 특징은 상처가 없어요. 왜냐? 자기 좋으라고 만들었기 때문에. 부처 앞에서 자기 하소연할 순 있지만 그 부처 자체의 아픔은 없어요. 아파하려고 우상 만들진 않잖아요. 그러나 성령은 주님의 아픔이고 주님의 상처고 주님의 십자가거든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는 네 몸 아프고 괴롭고 사는 게 힘든 것, 끊어버리고 이제부터 할 일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알란 말이죠. 그게 성령 받은 취지입니다. 예수 너는 너고, 나는 나지, 뭐. 난 바빠. 말씀 볼 시간 없어. 나는 나대로 바빠. 당신은 당신대로 바쁘고. 지금 이렇게 돼버리면 우상화 된다고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고. 예수 자체가 그 사람한테는 우상이 돼버리고. 아픔과 아픔이 교환되지 않아요. 연결되지 않아요. 기껏 지 아플 때나 교회 와서 빌지요. 어찌 이런 일이? 물어내라고. 내 청춘 물어내고, 건강 회복하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땡깡도 그런 땡깡이 없어요. 그러나 다시 약간에 숨쉴만하면 언제 우리가 주님의 아픔을 알았습니까? 십자가 졌던 고통을 알겠어요.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님의 아픔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우리가 굴복하는 힘 속에는 예수님의 상처를 알자, 그런 건 아예 들어있지 않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어떤 고생도 감수하리. 그것만 들어있어요. 지금은 고통이 많지만 고생 덜 하는 조건 하에 내가 필요한 어떤 것이라도 챙기리. 그것만 들어있어요. 늦게 취직해서 돈 번다고 나가시는데, 누굴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님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귀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당신과 나는 무슨 상관있습니까? 당신 인생과 내 인생이 어떻게 엮일 일이 없다는 거예요. 과연 예수님 공생애와 우리가 엮일 일이 없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가 예수님 혼자 좋으라고 가신 길이에요? 주님 가신 길이 주님 가신 길로 끝나는 거예요? 우리와 무관한 겁니까? 주께서 길이란 말이 주님만을 위한 길일까요? 아니지요. 완전히 고등학교 때 머리 길지 말라고 했는데 머리 길면 학생주임이 머리 깎는 기계로 확 밀어서 부끄러움을 주듯이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만의 인생 한복판에 고속도로 내버리는 거예요. 부끄러워하라고, 네 인생 조지라고. 이러한 처방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엮였거든. 우리는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이 자연스러워요. 왜냐? 마귀에 들린 게 자연스러워요. 귀신에 복종하며 사는 게 자연스럽고. 귀신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이고 내 인생만 보이니까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건드렸고 나와 접촉했고 나로 하여금 강제로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로 질질 끌고 가시니 세상에 이런 혜택이 어디 있어요. 이런 인간이 물상화 작업에는 내게 필요한 힘 모으기와 결부돼있습니다. 많은 힘 모을 때 그걸 부자라 하고 힘이 적을 때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들은 이 자연을 통해서 누가 나한테 힘만 준다면 언제든지 고개 숙일 용의가 돼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가위를 던지든 화분을 던지든 월급만 준다면 까짓 것 가위 맞고 화분 맞고 욕 얻어먹지요. 뭐 중요합니까.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대한항공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려 300:1이 넘어요. 그것도 공부 좀 하는 사람들만 300:1이 넘는다고요. 거기에 힘들게 들어갔으면 퇴직 때까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가위 맞는다고 뭐가 문제입니까? 서류 얼굴에 맞는다고 해서. 욕 얻어먹더라도 오래 붙어있으면 좋겠어. 얼마든지 힘만 모은다면 굴복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뭘 원하느냐?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걸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먼저 이야기하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건 힘 아니죠. 먼저 사랑이란 뭐냐?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70~80%가 사랑이야기일 거예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에 아주 여러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사랑을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기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13장에 안 나와요. 어디서 한 줄기로 나와서 여러 갈래로 퍼지는지는 안 나온다 말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생명을 그냥 주는 게 아니에요. 죽음을 매개로 하여서. 매개란 말은 뭐냐 하면,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 줄게.” 말이죠. “물 다오.” “물 준다니까.” 이러면 매개가 없는 거예요. “물 줄게.” 말에서 ‘물’이 매개가 돼요. 실제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잖아요. 말로서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해야 소용없다고. 반드시 네 자신의 믿음이 매개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매개가 되는 행함을 보이라는 거거든요. 야고보서 2장에서. 매개란 말은, 기침하시는데 물드세요,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실제로 물을 줘야 되잖아요. 예수 믿는 게 왜 엉터리냐 하면, 매개가 없다는 거예요. 사랑이 헛말이 되는 이유가, 사랑이 없을 때는 헛말이 돼버려요. 톱니바퀴가 돌아가려면 이쪽 기계와 저쪽 기계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린다고 하는데 서로 섞여 들어가서 하나가 되면 같이 따라 안 움직일 수 없는 거예요. 샴쌍둥이처럼. 두 사람인데 몸이 붙어서 같이 돌아갈 때 이걸 맞물린다고 하거든요. 물려가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주의 말씀, 사랑이 겉돌아요. 안 물렸어. 주님을 사랑한다, 예수 믿는다는 겁니다. 본인이 매개가 안 돼 있어요. 본인 인생을 통해서 사랑과 희생이 발산이 돼야 되는데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야 되는데 끄덕도 없어. 안 나와. 나오질 않아요. 돈 모아서 미국에 놀러갈까. 애리조나 쪽으로, 그랜드캐년이나. 자기 일에나 자기가 매개하고 있어요. 우리 집안 잘 되고 내 자식 잘 되고. 주님과 아무 상관없어요. 미안하잖아요. 그러니까 믿습니다하고. 미안하니까 기도하고, 미안하니까 사랑하는데 결국은 뭐냐 하면, 주님 내 인생 손대지 마세요. 누가 날 손대면 격분하게 돼있어요. 어제 주일 낮에 이야기한 것처럼 감히, “감히 왜 내게 손대느냐?” 네가 뭔데 감히. 인간이 아니고 완전히 귀신입니다. 주님이 손대도 뭐라 해요. 창조자가 와서 피조물에 손대도 뭐라 한다니까요. 우리를 만드신 부모가 손대도 우린 화를 내고 있어요. 이미 나는 독립했다, 이거거든요. 선악과 따먹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주의 원수가 뭔지 근처도 안 갔어요. 계속 그 이야기하려고 밑에 배경부터 말씀드리고 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그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예수님이 말만 하셨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의 힘 모으기만 생각하는 그 순간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 안에 사랑이 들어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인간이 내 말을 지킬 수 있는가? 할 수 있거든 해봐라.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거든 해봐. 금식할 때 포마드 바를 수 있거든 해봐라. 기도할 때 중언부언 달라는 기도, 이것저것 달라는 내용이 빠진 기도를 할 수 있거든 해보라는 겁니다. 너를 잊을 수 있거든 잊어보라 이 말입니다. 태생이 나 좋으라고 태어났는데 나를 잊다니요. 어느 정도로 잊어야 하느냐 하면, 참새 봐라. 내가 키운다. 들풀 봐라. 내가 키운다. 따라서 나는 너를 키운다. 그러니까 너는 너에 대해서 잊어라. 이거거든요. 못 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여 버린다. 인간은 심판의 대상. 심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말을 잊어버려요. 고요해요. jtbc에서 하는 <비긴 어게인>이란 프로 있지요. 포르투갈에서 노래 부르는 것. 파두하우스에서 포르투갈 전통음악을 할 때 식당책상에 “조용히 하세요.”라고 붙어있어요. 적어도 고귀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현장에서 잡담이나 사적인 이야기, 당신에 관한 필요한 이야기는 입을 다물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 가수가 주눅이 든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노래한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놓치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 제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평소의 생활과는 안 맞는 겁니다. 힘든 거예요. 굉장히 어려워요. 특히 아플 때는 더욱 더 자길 잊을 수 없어요. 상처를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못 잊지요.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휴우~. 그 현장에 있다는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아주 정신이 나갈 정도였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우릴 심판한다면, 심판대 앞에서 우리 마음가짐이 어떻겠습니까? 꼼짝도 못하지요. 그냥 키우시는 데로 인도하는 데로 살려주는 데로 당해야 되겠지요. 성령을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대자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쪽에서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자기 힘을 키우기 위해서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이란 부처 같은 형상이 없더라도 초월자를 생각한다. 신이죠. 나 좋으라고 하는 신,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5편 8절에 보면, 여기에 주님께서 원하지 않았는데 인간들이 우상의 자리에 우상이 아닌 창조주의 솜씨가 들어오게 돼요. 요청한 게 아니니까 강제로 들어오게 됩니다. 7절에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죠.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우상은 인간 마음속에 있지요. 인간 마음속에 성전이 들어왔다. 그러면 우상과 성전이 싸우겠지요. 적이란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주의 집의 가치를 높이면 하나님 편이고 아군이고, 주의 성전의 가치를 모욕하고 무시하고 배척하게 되면 이건 뭐냐? 곧 주님이 제시한 건데 거기에 대해서 못 마땅한 것은 주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평화로운 자리가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 불교의 불경을 보는 것과 차이가 있어요. 불경은 내게 도움 되라고 마음 평정하라고, 염불 같은 것. 불경에 있는 지시와 명령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지킬 수 있다는 내용들로 꽉 차있어요. 또는 지키지는 못하지만 희망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착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가훈들 있잖아요. 착하게 살자 하니까 생각나는데 우리교회 장로님이 참석한 결혼식, 신랑은 60이라고. 어제 오셨는데 신부는 58살이에요. 환갑잔치가 아니고 자기 결혼식에 아는 사람들 다 끌어 모았어요. 그 사람이 묵호에서 노는 게 직업이에요. 자기 조직패가 열두 명인데 혈맹을 맺었어요. 혈맹의 내용이, 우리는 늙어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는다. 그 오야봉이 이번에 결혼한 거예요. 그들의 평소에 마음가짐이, 영화에도 나와요. 차카게 살자. 맞춤법 다 틀려. 불경은 그런 거예요. 목표를 누가 정했다? 내가 정해놓고 미흡한 나와 목표 사이에 빈칸을 노력해서 마저 채우면 그거는 내가 되고 싶은 나, 훌륭한 나, 이 대자연 밑에서 신의 모습에 근접해가는 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불교라 했지요. 기독교도 있어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신학입니다. 한국교회 신학이 이 신학이에요. 불교와 똑같아요. 하면 된다는 거예요. 기도 빡세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복음은 뭐냐 하면, 너는 나의 원수라는 거예요. 자,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이걸 지킬 수 있나? 헌금 해놓고 안 했다고 할 수 있느냐? 분명히 내가 있는데 내가 있다는 자체를 네가 잊을 수 있나? 내가 여기 있음을 잊어버릴 수 있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 말은 뭐냐? 찔러주는 거예요. 너는 나의 원수의 세계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나는 너를 심판할 거야.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저주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저주 없는 구원은 의미 없어요. “나는 너를 미워한다.” 미워함이 없으면 사랑이란 것도 의미 없어요.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이 빛이 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미워하는 짓거리를 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고 그 미워하는 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는 배운 게 그것 밖에 없고 아는 게 그것 밖에 없고 습성이 그것 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는 걸 그것만 해요. 미움부터 먼저 배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대구강의에서. 미움부터 배우지 않으면 사랑은 겉도는 겁니다. 미움에 사랑이 맞물려야 속속들이 사랑이에요. 내 자신이 미움의 대상인 것을 자체가 사랑이에요. 따라서 미워하는 자가 살아온 것도 복이지 마땅한 게 아니에요. 웬 횡재, 이런 복이 다 있나,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돼요. 시편 1편 우리가 했잖아요. 5절을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됐습니다. 벌써 시편 1편부터 성경 자체가 파고 들어와요. 우리가 원한, 우리가 요구한 불경이 아니란 말이죠. 착하게 살자, 이것 아닙니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뭐가 복이냐? 바로 사태파악이 되는 게 복인 거예요. 우리는 내 힘으로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한 게 시편 5편이에요. 왜 주님한테 우리가 밉상 받아야 됩니까? 내가 너한테 준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그 성전이 고요한데 온 게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물고기 살아있는 것처럼 팔딱거리고 맨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있는 그곳에 주의 성전이 임해버려요. 쳐들어온 겁니다. 이번에 서울 서촌에 궁중족발 사건 아시죠.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이게 돌출된 사건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서 그래요. 가게 월세를 조금 올렸어요. 삼백 만원에서 천이백 만원으로, 네 배밖에 안 올렸다고. 나 같으면 이천 만원 내라고 했을 건데. 그 사람을 내보내서 빨리 몫 돈 챙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궁중족발이 22년 전통의 집이랍니다. 그러니 단골만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장사가 잘 된 거예요. 장사가 빌어먹을 것 같으면 벌써 나갔을 거예요. 장사가 잘 된 게 문제에요. 내 쪽에 힘이 있다는 게 문제에요. 그래서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 안 믿어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안 믿은 거예요. 아쉬울 게 없으니까. 나는 내 힘으로 사니까 누굴 의지해. 기댈 필요 없잖아요.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예수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지요. 부자가 천국 가지 힘든 이유를 아시겠지요. 혼자 사는 자는 내 나라에 오지 말란 말이죠. 니가 그렇게 잘났으면 니 나라 가란 말이죠. 내 주변에 나를 위한 사건들이 있잖아요. 이 사건으론 천국을 못 가요. 왜냐하면 천국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유일한 천국이에요. 유일한 사건이에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모든 사건은 나 살기 위한 사건인 반면에 예수님의 사건은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사건입니다. 이 유일한 사건과 살기 위한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서로 연결돼있어요. 사건이란 말은 그 사람의 존재의 본질이 사건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건을 잃어버리면 자기 인생사가 되니까 그것이 얼마나 자기한테 고귀한 거예요. 앨범사진처럼. 하나하나가 사건이에요. 그 앨범사진을 쭉 연결하면 자기 인생이잖아요. 나를 위한 나를 드러내고 자랑질하기 위한 사건이란 말이죠. 그러나 그건 살기 위한 사건이에요. 아무리 사진 찍는 걸 좋아해도 자기 아파 죽는 걸 사진 찍을 순 없어요. 건강한 모습, 웃을 때 찍지 찡그린 걸 찍는 건 범죄자 사진 아니면 그렇게 안 나오죠. 그러나 주님의 사진은 뭐냐? 죽었던 사진만을 우리 앞에 던지는 거예요. 이 사진이 너와 연관돼있다는 거예요. 너는 너 잘난 맛에 살았잖아. 그래서 니가 나한테 상처 입혔잖아. 이 사진 한 번 봐봐. 예수님 십자가 달린 사진이에요. 그게 유일한 사건입니다. 천국은 유일한 사건에 의해서만 다 이루었다가 되는 나라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지금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잖아요. 전쟁을 해야 되고 이 땅에서 난데없는 낯선 전쟁, 예상 못한 하나님 쪽에서 의도한 전쟁, 내가 의도한 전쟁이 아닙니다. 맨날 우리는 나 살기 위한 전쟁밖에 없잖아요. 나를 죽이기 위한 전쟁은 내가 구상하지 않았지요. 주님 쪽에서 구상한 거예요.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요. 자살이란 주님의 상처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 걸 말합니다. 지가 아파서 지가 죽는 거예요. 지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 건 자기 아픔만 끝까지 챙기고 가겠다는 장한 마음이 자살이고, 주님과 상처로 연결돼있으면 자살할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고통스러워도 주님과 연결돼있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죽을 때까지 못 죽지요. 낯선 전쟁을 해야 된단 말이죠. 낯선 전쟁의 기념물이 있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다 이뤘을 때 나오는 것을 시편 5편에서는 미리 뭐라 하느냐 하면, 성전이라 합니다. 다윗이 성전 지을 때는 전쟁을 대충 거의 다 평정했을 때 하나님이 모든 전쟁을 무사히 주님의 이름으로 끝냈음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이에요. 성전 안에 전쟁에서 승리했던 무기가 들어 있겠지요. 성전 안의 무기가 뭘까요? 다 아시잖아요.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들어있지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지요. 사도 요한이 고개 들어 하늘나라 보니까 중앙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있지요.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나오네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그 언약궤에 바로 어린양의 피가 들어있어요. 결국 이걸 종합하면 피로 승리한다. 피로 승리한다니까 피 찍어 바르면 그걸로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피 성분에 아미노산 영양분 들어있는가요, 미백 효과가 있는가요? 피가 온다는 말은 내 쪽에서 찍어 바르는 게 아니고 피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피는 유일한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지상에 있는 모든 사건에서 유일하게 발생된 사건이란 말이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서 파생된 연결된 사건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접수하고 장악한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죄만 짓고 주의 피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이것을 내가 인식하게 되고. 참 어렵다. 나는 죄 짓고 주님은 용서하시고 세 번째, 그걸 내가 인식, 알고.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돼요. 인식하는 건 성령이고 죄 짓고 용서하시는 건 십자가 피고.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저씨가 구두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 아저씨는 총각인데 부동산에 돈 많은 옛날 동창생과 연애중이에요. 그런데 그 여자 아들이 돈 없는 아저씨와 연애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엄마와 그 아저씨를 떼어놓으려고 구둣가게에서 행패를 부립니다. 그걸 아저씨 아들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다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언제 적 일인데 하니까 “나, 지금 알았어.” 하는 순간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게 인식이에요. 십자가 죽은 게 이천 년 전 일이죠. 우리는 이천 년 전 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왔다. 그럼 지금 이야기에요. 옛날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당했다. 참 안 됐다. 다 알아요. 성경이란 이야기책에 나오니까. 유일한 사건이, 날 구원한 사건이 내 인생에 침투한 줄 모르고 주님은 주님 인생, 나는 내 인생으로 끝나는 거예요. 주와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줄곧 이런 식이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왔을 때 나를 통해서 십자가 증거 하라고 주께서 내 허락도 없이 내 인생을 아주 작살을 내버렸어요. 내 고통이 아니고 그게 주님의 고통이에요. 너, 그러다 지옥 가. 그것을 우리에게 계속 반복해서 새겨주면서. 물론 십자가 옛날이야기에요. 그러나 그걸 아는 순간 현실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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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7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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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