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608a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80608a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3-15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4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예수를 우리가 안 믿는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집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세상, 인간들이 방해해 놓아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차질이 일어났다든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안 된 적이 있어요? 없죠. 만약에 이 집에서 애 돌잔치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 댁에서 돌잔치를 한다고 할 때에, 트럼프하고 김정은하고 평화회담 한다고 해서 이 돌잔치를 취소해야 됩니까? 아니죠. 그쪽은 그쪽에서 하던지 간에 여기에서는 돌잔치를 하잖아요. 인간들이, “나 이제 예수 안 믿을래. 나는 이제 교회 안 나갈래.” 이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차질이 일어나는 겁니까? 차질 없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말씀에서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 안 해도 하나님의 거룩에 지장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차질이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보고 거룩하라고 합니다. 근데 우리가 “나 안 할래. 나 삐졌어.” 이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이고, 너 때문에 속상해서 나도 거룩을 포기했어.” 뭐, 그렇게 되는 겁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일은 그냥 하나님의 일만 꾸준히 해내가면, 하나님은 자기만족이기 때문에 전혀 하나님의 일에 하자나 실수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믿으라는 의미가 뭐냐, 믿으라는 게, 믿어라가, 너희들이 안 믿으면 내가 하는 일을 실패로 간주하겠다, 라는 그런 취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너희들이 안 믿는다고 해서 주의 일이 실패로 끝날 리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믿으라 이 말입니다. 그것을. 그게 거룩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때 하나님은 더욱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가 안 보태면 삐지고, 보태면 하나님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 없이는 일을 못한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게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사욕이라고 합니다. ‘사욕’, 사사로운 욕심이죠. 사사로운 욕심과 반대가 되는 말이 뭐냐 하면 거룩이에요. 거룩. 그러니까 사사로운 욕심이 거룩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내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겁니다. 방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라고 되어 있죠. 여기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한다고 했는데, 마음에 허리를 안 동이고 근신 안 하면 주께서 안 오십니까? 주께서 안 오실 거예요? 허리를 동이든 안 동이든 관계없이 주께서 타이밍 맞춰서 오신다 이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두 사람이 내왕했어요. 천사 두 사람이 할 일은 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실시하고, 그 다음에 심판 가운데서 롯의 가정을 건져내는 일을 천사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의 하는 일은,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천사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때에, 하나님이 “야! 소돔과 고모라 심판해!”라고 했을 때에, 천사가 말리면서 “아니, 좀 지켜봅시다. 심판이 뭐 그리 급합니까? 제가 가서 소돔과 고모라가 악한지 안 악한지 살펴서, 진짜 악하구나 싶으면 제가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확 보내세요. 일단은 유보시킵시다. 제가 실제로 조사해서, 그걸 실사라고 하는데, 이정도면 심판할만한지 감사를 해서, 그 감사결과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 감사결과에 의해서 그때 심판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아니면 아예 심판하기로 작심하고 내려온 겁니까? 심판하기로 작심하고 내려온 거예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있어서 누가 사사로운 욕심을 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말렸죠. 아브라함이 보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이미 결정된 거잖아요. 결정됐는데 아브라함이 말립니다. 의인 50명만 있으면, 의인 50명하고 악인하고 같은 차원에서 멸망시키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에 모순되지 않습니까? 오히려 아브라함 쪽에서 자꾸 심판을 지연시키려고 애를 썼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라는 것은, 누구 건지고 나머지기 몽땅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모조리 심판이에요. 모조리 심판. 모조리 심판이라고요.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만약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나머지기 악인하고 멸망시켜버리면 억울하게 심판받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거는 심판을 정지시켜야 된다는 생각이,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서 지금 아브라함 본인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서서히 느끼기 시작합니다. 50명, 45명, 그 다음에 40명, 30명, 20명, 10명, 10명 단위로 끊어가죠. 마지막 기도가 뭐냐 하면, “10명만 있어도 봐주세요.”라고 했는데, “아니오.”했으니까, 그럼 이거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몇 명 있다는 말입니까? 10명 단위로 끊어가게 되면, 10명 그 다음에 뭡니까? 0이죠. 없죠.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심판받을만해서 심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토 달면 안 돼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자기 조카가 있으니까, 어쨌든 간에 조카를 심판에서 면제시키려고 애썼는데, 아브라함이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언약에 의한 심판 실시는 아브라함이 빽쓴다고 해서 이게 변경될 사항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구원받았죠. 그 구원받았잖아요. 롯을 건지고 자시고 할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준해서 하시는 그 실행자는 하나님 본인이에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구원받은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진다고 그렇게 한 거예요(창19:29).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뭘 맺었습니까? 언약이 있죠. 지금 제 뜻이 무슨 뜻인지 좀 생뚱맞다고 생각을 하는데,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을 건졌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렇다면 소돔의 심판에서 뭘 첫째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구원은 심판하기 이전에는 구원이 아예 성립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심판을 전제로 했을 때만, 그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남은 자, 살아남은 자, 구원자가 나오는 겁니다. 살아남을 때 구원자가 인식이 돼요. 구원자가. 심판과 병행해서 구원자가 생겨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니까, 그럼 오늘날 마지막 때의 심판에서 구원받는다면, ‘누구를 생각하사’가 되겠어요? 옛날에는 아브라함 언약이잖아요. 지금은 뭐가 되겠어요? ‘예수님을 생각하사’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죠. 그러면 예수님을 생각하사에서 뭘 빼야 돼요? 예수님을 생각하사에서 뭐가 얼쩡거리고 방해가 되면 안 됩니까? 사사로운 사욕을 부리면 안 되겠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사 나를 심판에서 빼내 줄 리는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내가 믿었으니까, 내가 교회 다녔으니까, 내가 예수를 의지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걸 봐가지고 나를 구원시킬 것이다. 그게 바로 사사로운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훼방하는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이제는 거룩하라고 명령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내 입장에서 조금씩, 조금씩 거룩에 가까이 가게 되면, 하나님이 거룩하라는 명령대로 한 이 거룩의 집대성, 비축되고 저장된 거룩, 모태신앙부터 해서 20년, 30년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더욱더 누적이 되고 마일리지가 쌓이고 쌓이는 그 거룩.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이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게 바로 비-거룩이에요. 그게 사욕이라니까요. 그게. 지금 누구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예수님을 생각하사 구원하는데, 하나님을 자기가 가로막아버려요. 교회 열심히 다닌 것, 헌금한 것, 전도한 것, 충성한 것, 교회 청소한 것, 꽃꽂이 한 것. 봉사한 것, 선교비 한 것, 내 자식을 위해서 중보 기도한 것, 이런 것을 좀 감안하사, 저를 생각하사 구원해주세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나는 니하고 계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니하고 의논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롯을 생각하사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끄집어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요? 바깥에 있어요? 바깥에 있어요. 그 바깥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로 외재성이라고 합니다. 외재성. made in China, USA하는 그런 외제 아닙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외재성이 왜 중요한가 하면은, 외재성을 모르게 되면 내부적으로 인간은 필연을 만들어내요. 외재성을 모른다 치면 내부적으로 뭘 만드는가 하면 필연을 만들어요. 필연. 필연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들어가면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는 이걸 필연이라고 해요. 외부적인 사항이 없어버리면 내부적으로 내가 나를 구원하는 온갖 몸부림과 아이디어와 그리고 지혜를 창안하고, 그럴싸한 거룩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조작된 도시. 조작해내는 거예요. 누구끼리? 같은 교인들끼리. 같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경쟁적으로. 교회에서 목사가 누구하나 칭찬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마치 디스 당한 느낌이 들죠. 갑자기 밉상 받은 느낌이 들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이 분은 어려운 가운데도, 병들었지만 이렇게 감사헌금을 하는 것을 보세요. 보통 상식적으로는 좋은 일, 기쁜 일, 자기에게 자랑거리가 있을 때나 감사헌금을 하는데, 이 분은 병들었어도, 병든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알았다고 했고, 감사헌금을 하는 것을 보세요. 여러분들도 좀 본받으세요.”라고 목사가 강단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지금 교회 재정이 어려운데 눈치껏 좀 하라는 뜻이에요. 그냥 돈 내라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해요. 간단하게 돈 내세요!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장로들보고 돈 내라는 소리를 못해요. 그 사람들은 옛날에 목돈 냈거든요. 싸가지 없는 것은 젊은 것들이라니까요. 늙은 것들이 목돈내서 벽돌건물 지어놓으니까,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은 지 점심 값만 내고 있어요. 지 밥값만 내고 있는 거예요. 옛날 늙은 교인들이 부흥사한테 속았든지 뭐 속아가지고 에어컨을 떡 해놓으니까, 젊은 교인들은 에어컨 전기 값도 안내는 거예요. 에어컨 켜는데 전기 안 하고 에어컨이 되겠어요. 남 고생한 것에 자기는 숟가락만 얹고 등쳐먹겠다는 거거든요. 그래놓고 헌금 좀 하라고 하면 저는 워낙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있어서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거는 믿음과 관계없이 양심문제로 헌금 내는 거예요. 양심문제로. 어쨌거나 외재성이 없는 것, 내부성, 내부적으로 봤을 때는 모든 것이 우연인데, 우연적인 상황들을 억지로 꿰맞추어가지고 필연을 만들어요. 필연. 필연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이런 기도응답이 나왔다는 것이 나와요. 원인과 결과를, 그 원인에다가 자기 행위를 집어넣고, 이렇게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까. 이게 사욕이에요. 사욕. 이런 원인을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중간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의 은혜로!’ 이렇게 하거든요. 주의 은혜로 이런 결과가 나왔다. 원인은 주의 은혜가 아니에요. 자기 뜻이고 자기 욕심인데, 내 뜻대로 했는데 주의 은혜로 해서 내 뜻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이거는 시작을, 프로젝트를 누가 실시한 거예요? 내가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누가 시다바리에요? 주님이죠. 내가 한 계획을 무조건 주님이 내 지시에 따라야 돼요. 무조건 주님이 내 지시에 따르고, 내 뜻은 무조건 도와줘야 해요. 워낙 본인의 계획이 고상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부하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부터 먼저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사욕이 뭘 막는다? 거룩을 막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라고 했죠.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말은 니가 하나님의 거룩이 되려면 너의 사욕은 걷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걷어내야 해요. 국 끓일 때, 뼈 고아낼 때 둥둥 떠 있는 기름을 국자가지고 걷어내잖아요. 떠내야 뽀얀 국물이 되죠. 사욕을 떠내는 작업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 떠내는 작업을 한다는 말은, 사욕이 지속적으로 계속 올라온다는 말입니까? 얼추 올라오다가 안 올라온다는 이 말입니까? 계속 올라오죠. 계속 올라오고 떠내고, 올라오고 떠내고... 그 작업이 하나님의 거룩한 작업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럼 몇 번 지면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를 안 져도 됩니까? 지고 몇 미터 가면 그 다음부터는 수고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지지마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경우를 한번 봅시다. 예수님이 가신 그 경로가 15번까지 있어요. 예수님이 피곤해서 벽에 손댄 것은 이게 3번인가 그래요. 고난의 길. 거기에 가봤잖아요. 빌라도 재판장부터 시작해서 골고다까지 열다섯 가지의 경로를 후대사람들이 해놨어요. 해놓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하는데, kbs에 보면 순례의 길이라고 목요일 8시에 했는데, 그 장면이 나와요. 제가 예루살렘 찍은 그 장면도 잠시 나오죠. 주님 가신 이 길을 실제로 밟고 가면 상당히 감격스러워요. 어쨌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언제 끝났습니까? 죽어서 끝났죠. 마지막 열다섯 번째 그 장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염한 그 바위에요. 그 염한 바위를 제가 사진 찍어서 올려놨잖아요. 그 바위에서 사람들은 울고 거기에 키스하고 그렇습니다. 주님 묻었던 그 바위라고. 원래는 그 성묘교회 자체가 지붕도 없죠. 그냥 벌판이죠. 십자가지셨으니까. 지금은 성묘교회로 그럴듯하게 만들어놓고, 동네는 완전히 시장판이고, 대구 서문시장 포목점 같아요. 얼마나 많은지. 시장골목으로 해서 올라가야 해요. 십자가 지고 가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고 가신 그 길은 십자가 한번 질 때마다 사는 길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한 번 질 때마다 길이 점점 좁아져서 이제는 그 길이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어떤 모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요령껏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죠. 그럼 인간의 본성은 사는데 있습니까? 죽는데 있습니까? 사는데 있죠. 사는 게 본성이죠. 살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원인을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내재적으로 하나님한테 이거 해드리겠습니다, 저거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내 인생 끝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해서 좀 더 길게 살아볼랍니다, 볼랍니다, 라는 취지로 원인을 집어넣어요. 아니, 바라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 봤어요? 뭘 안 바라고 교회 나온 사람 봤어요? 뭘 안 바라고? 교회 나오고 기도할 때는 뭔가 다 꿍꿍이속이 있잖아요. 바라는 것이 있잖아요. 자기부터, 자기의 뭔가 포부라든지, 목적이나 소망을 실어서 교회 나오고 한다고요. 그냥 교회 구경하려고, 교회 뭐 하는 동네인가 해서 가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교회는 비는 곳이에요. 그 빌 때에 비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내가, 본인이 빌잖아요. 그 기도내용은 누구 속의 한풀이에요? 내 속에 안고 있는 것을 기도방식으로 이렇게 털어 내놓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거죠. 답답해서. 그 전에 얼마나 기도를 지 맘대로 해봤겠어요. 하다하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가서, ‘에이, 이래도 안 되고 내 수완대로는 안 되니까 이제는 빌어보자.’해서 비는 겁니다. 여러분 구약에 있는 사사기 한번 보세요. 사사기에 사람들이 처음부터 어려울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까? 아니죠. 그 뒤에 열왕기상, 열왕기하에 나오는 왕들 보세요. 외부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하나님께 빌었습니까? 상납할 것 상납하고, 바칠 것 바쳐서, 인간적인 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그래도 점점 더 사태가 궁지에 몰리니까, 아이고, 뭐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만 마지막 선택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잖아요. 마지막 선택으로. 그러니까 사사기나 사무엘서 보게 되면 마지막 선택이 왔을 때 그들의 태도는 어떤 태도였습니까? 더 이상 우리의 할 도리는 다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은 없다. 그렇게 하는데, 뭘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없다는 겁니까? 뭘 위해서? 목적이 뭐예요? 살아보자는 겁니다. 어쨌든 살아보자는 거예요. 왜 살아야 되는데요? 살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바로 이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왜 살아야 되는지. 뭣 땜시? 뭣 때문에? Why? 내가 왜 살아야 되는데? 뭐 어린 자식 때문에 살아야 하고, 남편 때문에 살아야 되고, 뭐 그렇게 자꾸 조작하는데, 거짓말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결국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 거냐? 결국 당신은 이유 없이 살게 된 거죠. 이유 없이 살잖아요. 그럼 이유 없이 산다는 말은 지금 죽어도, 살아온 것이 평생을 이유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군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왜? 이유 없이 살았기 때문에. 사는 게 이유 없으면 죽는 것도 이유가 없어야 돼요. 사는 게 이유가 없는데 죽지는 않아야 된다고 하면, 그거는 앞뒤가 안 맞죠. 결국은 사람들이 사는 이유를 죽음 앞에서 비로소 알게 돼요. 사는데 이유 없죠. “그럼 죽어도 괜찮네?” 하면, “아니, 죽으면 안 돼.” 이러거든요. 사는데 이유는 없어도 죽지는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는 이유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으면 안 된다면, 이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사욕이죠. 사욕. 죽으면 안 돼. 누가? 남이? 아니, 남은 죽어도 괜찮아. 내가.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뭡니까? 개인적인 욕심이라니까요. 개인적인 욕심. 그럼 세상을 어떻게 본다? 내 사는데 개인적인 욕심으로 세상을 읽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하는 겁니다. 내가 사는데 어떤 이익이 있는가 싶어서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아직까지 거룩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욕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욕을 해보니까, 나는 무조건 살고 봐야 한다. 나는 무조건 살고 봐야 해요. 그럼 무조건 살고 봐야 한다면, 이러한 자기의 내재성, 자기의 기본이 있다면, 여기에다가 외부에서 예수님이야기, 성경이야기, 성령이야기, 예수님 재림이야기, 십자가이야기, 천국이야기, 이 모든 것이 여기에 찾아오게 되면, 이것을 듣고 있는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 다 뭐로 해석을 해버립니까? 예수님이야기든 뭐든, 전부 다 뭐로 해석을 하느냐 하면, 나는 이것들을 알고 이것들을 소유함으로서 내가 무조건 살아남는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식으로 나오겠죠. 그렇죠. 저의 이 논리가 무리한 논리가 아닙니다. 무리한 논리입니까? 라고 물으면 무리한 논리라고 나오면 곤란하니까. 무리한 논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안 사는 사람이 없는데, 교회에 가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가는 사람이 없다고 했죠. 뭘 바라느냐? 뭘 기대하느냐? 벌써 교회에 나오는 몸 자체가 무조건 나는 살고보자는 식으로 교회에 들어온다 이 말이죠. 무조건 살고보자는 식으로. 교회라는 곳은 거룩하고 뭔가 좋은 게 있으니까. 거룩하면 뭔가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고, 경건해도 이익이 될 것 같고, 뭐 이렇게 열심히 하며 복주니까, 그 복도 나한테 이익이 될 것 같고, 무조건 내가 챙기는 그 모든 것은 누구한테 이득이 온다? 나에게 이익이 오고 나에게 복이 온다는 그런 기대를 은근히 하면서 교회에 간다 이 말이죠. 그게 세상 움직임을 누구 중심으로 본다? 내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았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그게 12절에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중간에 보세요.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무엇에 힘입어? 성령이죠. 이걸 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외재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하늘로부터 뭘 받았어요. 뭘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았어요.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성령 없이 교회 다니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지금 제가 숙제를 주는 거예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성령 없이 교회 다니는 것과 성령 받은 채 교회 다니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을 제가 단박에 숙제로 제시합니다. 숙제라고 해도 답변은 제가 하죠. 첫째, 성령을 안 받고 교회에 가게 되면, 교회 가서 뭘 받으려고 하냐면 성령을 받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미 교회에 갈 때, 아까 제가 한 전제가 뭐냐 하면, 교회에 뭘 기대하고 간다고 했죠. 그걸 기대하는데 왜 기대합니까? 나한테 이익이 되라고 기대하죠. 기대한다 이 말이죠. 기대하는데, 어떤 기대냐 하면 무조건 나는 살고보자의 이익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성령을 요구하게 되면, 이런 자세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매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안전하게 지탱되면서 성령하고 순순히 연결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그러면 성령받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가신 길로 접어들어야 성령이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앞장세우거든요.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하고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예수님이야기를 해요. 예수님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면서 예수님 나라에 간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겁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는 고급호텔에 간다고 늘 자랑하더란 말이죠. 그래서 그 호텔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그 호텔은 아주 럭셔리하고 어떻고, 평수도 넓고, 소파도 잘 되어있고... 하니까, 듣는 사람이 “고마해라! 나 안 들을란다. 호텔이야기 듣기 싫어.” “어디 가는데?” “나 호텔 갈 거야.” 참,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어디 그 사람이 여인숙 갑니까? 화장실도 없는 여인숙 가는 거예요? 여인숙 오랜만에 듣죠. 그런 데가 있어요. 아니, 여인숙 가는 거예요? 호텔 간다면서요? 호텔 간다고 해서 호텔이야기를 했는데 듣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버지이야기 했죠.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달려들어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가서 예수님이야기를 하면 맞아죽을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이야기를 하는 데가 아니고 교회이야기를 하는 데에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커지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데지, 예수님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살라고 왔지, 예수님의 소식이 궁금해서 온 게 아니거든요. 내 사는데 예수가 시다바리가 되어가지고 나한테 뭘 도와줄 것인가, 지금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지, 예수님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 예수이야기 때문에 너희 이야기는 삭제하라 이 말이죠. 너희 이야기는 이제 잊어버리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제 너희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이야기에요. 그게 성령의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앞장세우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이야기만 해요. 성령은. 그게 요한복음 16장인데, 한 번 찾아볼까요? 진도만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그는 성령이죠. ~~하지 않고, ‘않고’가 나와요. 성령은 자기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절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의 영광만을 이야기하죠. 성령께서. 근데 예수님의 영광이 이 지상에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개차반 났잖아요. 밉상 받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영광을 밀쳤죠. 박살냈습니다. 영광 받을 주님께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세 번씩이나 엎어졌죠. 무겁다고. 무거워서. 자빠트렸단 말이죠. 채찍 때렸단 말이죠. 그게 영광스러우면 그런 짓 하겠어요? 안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런 짓 하잖아요. 쓸모 짝에도 없는 것은 빨리 꺼져라 그 말이죠. 누가요? 이 세상의 원리가, 세상 사람들의 원리가, 일반적인 상식이, 예수이야기라고 하면 발작증세를 일으킬 정도로 강하게 밀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고집스럽게 성령은 무슨 이야기를 한다? 인간들이 그 밀치고 듣기 싫어하는 그 분의 영광을,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는 투로 자기 택한 백성에게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사람들을 보면 성령 받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데, 성령 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성령이 뭘 끌고 왔는가를 봐야 해요. 성령이 뭘 끌고 왔는가. “우리 집에 택배기사 왔다.” “뭘 받았는데?” “아무것도 안 받았어. 그냥 택배기사 왔어. 아저씨한테 인사하고, 수고하라고 하고 그냥 돌려보냈어.” “뭐 안 받고?” “안 받았어. 난 택배기사 아저씨가 좋았어.”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광, 인간에게 고난 받은 영광을 주려고 왔는데, 교회마다 성령 받으려고 난리에요. 택배기사만 받아서 뭐 할 건데요? 성령이 오셨네~ 막 박수치면서 성령이 왔다고 하는데, 택배기사가 아무것도 없이 왔는데 성령 받았대요. “뭐 주던데?” “몰라.”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가는 곳이 예수님나라, 천국이라면 그 예수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 때나 그쪽 세계에 관심이 있고 그런 사람만 그쪽 세계에 가는 거예요. 제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대구강의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데, 물감 모양새가 비슷해요. 안에 빨간 물감인지, 파란물감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성질나서 물감을 발로 팍 밟았어요. 그러니까 물감의 옆구리가 툭 터지면서 빨간색이 나왔어요. 그럼 빨간 물감이고. 밟으니까 파란물감이 나왔어요. 그럼 무슨 색입니까? 파란물감이죠. 밟아서 한쪽은 예수님의 피가 나왔으면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예수님 피가 아니고 교회성장이 나오면 그건 뭡니까? 지옥 가는 사람이죠. 우리교회 돈 많이 모았다. 우리교회 교인수 많다. 헌금 많이 나온다. 갈수록 교인수가 점점 더 늘어난다. 이거는 그 튜브 안에 뭐가 들어있는 겁니까? 결국 인간의 영광만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런 쪽으로 지금 교회를 만들고 있고, 그런 쪽으로 줄곧 가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북한에 가보세요. 사람 많지. 거기도 사람 많죠. 북한 김일성 동상 앞에서 예수님이야기 해보세요. 아주 칭찬합니까? 목사도 그 앞에서 꼼짝 못하고 지금 절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예수복음 전하는 사람은 아마 다니엘의 세 친구밖에는 없을 걸요. 인간은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인간 스스로는 몰라요. 여기서 사욕이라고 하니까, ‘그래, 나는 원래 개인적인 욕심은 성격상 없어.’라고 하는데, 지금 개인적인 욕심을 줄이라는 말이 아니고, 니 자체가 거룩을 방해하고 있다니까요. 성령이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누가 방해해요? 사적인 자기 기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 교회 올 때 뭔가 바라는 것, 그것들이 성령이 하시는 일을 지금 방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12절에 보면,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뭐로 알게 되었어요? 뭐로? 뭐로 알게 되었다고 돼있어요? 계시죠. 계시가, 뭐 인간이 소설책 쓴 거예요? 인간이 지어낸 것이 계시입니까? 아니죠. 계시는 위에서부터 준 거죠. 하나님이 주신 거죠. 역시 외재성이죠. 외재성. 외부다 이 말이죠. 외재성이 돼버리면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내부적인 자기의 사욕을 원인으로 던져놓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 뜻대로 해달라고 해놓고, 결과 나온 것을 가지고 임의로 기도응답 받았다고 우기는, 이런 내부적인 것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필연이라고 했죠. 필연. 내부적인 필연하고 외부적인 외재성, 계시, 예수님의 확정된 그 계약하고 어디서 싸워요? 내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좀 더 어렵게 해봅시다. 약간 어렵게 했지만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싶어요.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나는 안에 뭐가 들어있다? 살고보자. 뭐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죠. 그건 약간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사람이 일단 숨이 트이면 남을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자기가 긴급 상황이고 자기가 어려울 때는 우선 누구부터 살고 봐야 돼요?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되죠.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 이스라엘 전쟁이라는 것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뭐, 하나님 섬기고 뭐 섬기고 해도 막상 자기보다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이방민족이 포위해서 죽음에 직면하게 되니까, 심지어 엘리사를 선지자라고 인정했던 그 왕마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경악하듯이 화풀이를 엘리사한테 합니다. “내가 내일 엘리사가 살아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죽여 버린다 이 말이거든요. 광야에서 사람들이 초죽음에 이르렀을 때, 광야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끝장을 보여주는 환경이죠. 광야가 사람 죽이는 곳이에요. 사람이 죽기 직전에 갔을 때는 그들이 누굴 원망하던가요? “누구야? 우리를 이런 곳에 보내게 했어?” 광야거든요. 광야 안 가봤죠? 저 가봤거든요. 광야 찍어놨죠. 척박한 땅이에요. 광야라는 그 동네를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군대생활 3년도 아니고, 40년 동안 뺑뺑이 돌립니다. 결국 거기서 다 죽습니다. 다 죽어요. 20세 이하 빼놓고 다 죽잖아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죠. 죽으라고 한 거예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곳이에요.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은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살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약속을 이용해서 자기를 챙기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약속 덕분에 나만 살고보자가 꾸준하게, 그러니까 약속을 살려야 되는데 약속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약속 덕분에 내가 살자는 쪽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드러내자가 아니라 나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전지전능함이 필요한 거예요. 나 이만큼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랑질 하고 싶어서. 그러니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 원망 안 할래 안 할 수가 없죠. 자, 살고보자 이게 기본이에요. 잘 한번 보세요. 살고보자인데, 오늘 살고 내일 안 살 거예요? 오늘 살게 되면 내일도 살고자 하겠죠. 내일 살고자 하는데, 마침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내일은 살아야 되겠고 통장에는 돈이 없다. 그러면 원인을 집어넣습니다. 내일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느냐, 아니면 가까운 언니한테 가서 돈을 한 백 만 원을 빌려가지고, 다음 달에 월급타면 갚을 것이냐, 그것도 실패하면 제 3의 경우를 생각해서 사채 빌리는 곳에 가서 백 만 원 빌리면서 선이자 30퍼센트 떼고 칠십 만원만 챙겨가지고 오느냐. 여러 가지의 원인을 만들겠죠. 지금 보세요. 은행대출, 언니한테 빌림, 사채, 몇 가지입니까? 세 가지죠. 이 세상에서 본인이 아는 것이 세 가지에요. 세 가지. 만약에 경제에 더 밝으면 이 가짓수가 세 가지가 아니고 네 가지, 다섯 가지, 열 가지, 스무 가지... 계속 늘어납니다. 근데 무식해서 기껏 아는 것이 이 세 가지 밖에 없어요. 실은 네 번째가 있었는데, 그 네 번째가 뭐냐, 이 사람 몰래 어떤 할머니가 일방적으로 양자 삼아서 자기가 죽기 직전에 유산을 한 백오십억 주겠다고 마음 딱 먹고 있었어요. 있었는데, 이 사실을 이 사람이 모르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하나 나왔죠. 모른다. 뭘? 다를. 영어로 올(All). 다 모른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 다 압니까? 모르죠. 모르니까 자기가 대충 아는 것을 모아서 살고자 해요. 그래서 1번 시도를 했는데 안 되면 좌절합니다. 은행에 갔는데 은행에서 대출이 안 돼요. 이미 대출이 돼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만난 기적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와요. 은행지점장하고 같은 이름이라서 대출이 됐다고 이래 나오잖아요. 그 대출도 안 되고. 세 번째 사채를 하려고 하니까, 이거 뭐 아무 담보도 없이 대출해준다고 선이자 30퍼센트 떼고, 이러니까 그 다음에 간 떼 줄랍니까? 뭘 떼 줄랍니까? 이래 나오고. 신체포기각서 쓰고. 아는 게 이런 종류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런 종류. 사실은 돈 구할 데가 더 많이 있는데. 이런 종류밖에 몰라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안 했어요. 촌에서 올라와가지고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결국은 다는 모르지만 아는 것을 가지고 추슬러서 원인으로 이걸 집어넣는 거예요. 원인에서 뭘 만드느냐, 필연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 가짓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가 아는 것은 이거밖에 없어요. 세상의 그 많은 일들 중에서 눈에 꽂히는 것은 돈 떨어졌다는 것, 내 살고보자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 이것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경우의 수, 1초에 56만 가지가 나오는데, 56만 가지에서 월드컵 예선전 다 떼버리고, 북한 김정은이 다 떼버리고, 오직 내가 사는데 급급한 세 가지만 달랑 떼어가지고, 이것 가지고 필연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교회 가는 원인을 만들었으니까 하나님 도와달라고.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얼마나 일방적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냐면, 사욕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이라고 했죠. 자, 그러면 거룩을 왜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했으니까 거룩하면 내게 이익이 있을 것이다. 거룩 하는 것도 자기가 사는 데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룩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참 아까워서라도 나를 가난하게 안 만들고, 아까워서라도 너 같은 귀한 인간을 내가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 주냐, 동업자인데. 이래서 나에게 축복해가지고, 내 원래의 뜻대로 거룩하다는 그걸 핑계로, 그걸 빌미로 해서 내가 원하는 출세하는 것, 부자 되는 것, 그걸 채워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그 거룩을 목표로 자기가 지금 겸손을 떨고 헌신한다면, 그러면 그 거룩은 무슨 거룩입니까? 역시 무식한 거룩이에요. 자기가 알고 있는 거룩만 거룩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거룩은 뭐냐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다 결부된 거룩이잖아요. 예수님의 거룩은. 그 거룩을 누가 알고 있느냐, 성령도 알고 있고요. 주님의 거룩은 세상의 모든 가지치기, 모든 일어난 일, 웽~하고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도 주님의 거룩과 연결되어 있는데, 인간들은 그 거룩을 내가 사는 데에, 축복 달라고 하는 데에 어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룩만 서너 가지를 뽑은 거예요. 앞으로 십일조 안 떼먹기, 새벽기도 나오기, 성경 꼬박꼬박 읽기,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기도할 때 꿇어앉아서 기도하기.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고, 저녁에 가족모임에서 예배드리면서 잠시 성경보기, 큐티하기, 이거 몇 가지입니까? 몇 가지 안 되죠. 한 여덟 가지 종합해서, 해태종합선물이잖아요. 종합선물. 이렇게 하면 지가 기대하는 거룩이 됩니까?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이런 것 하니까 거룩이라는 거예요. 반칙이죠. 이건 엉터리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