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 180608
안양20180608a약2장14절(구성)-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이 굉장히 쉬워 보이지요. 쉬워 보이는 이게 이제 함정이 되는 겁니다.
쉬워 보인다면 이건 구원이 안 된 사람이에요. 윤리, 도덕으로 빠져 나갈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이런 본문이 윤리 도덕으로. 쉽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것을 행하면 되지요.” 라는 그것이 쉬운 거예요. 이건 평소에 내가 뭐를 행하면 그 행한 것으로 천국 간다. 이게 평소 하던 것이 되어서 쉬운 거예요. 제가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된다는 말은 뭐를 여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는 게 오늘 강의의 핵심 포인트인데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무엇을? 무엇 행함? 무엇 실천? 무얼 건넴? 성경에서 기본은 믿음의 모든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 믿음 발휘하라고 성경 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야고보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은사를 받아서 야고보서를 썼거든요. 야고보서라는 계시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이 계시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야고보서를 준 겁니다.
그리고서는 실컷 야고보서를 읽고 난 뒤에 “그래, 내가 행하면 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말로만 행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실천을 가미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내 믿음은 가짜 믿음이 아니고 진짜 믿음이다.” 라고 자기 쪽으로 회수를 해버려요.
실천 또는 행함인데. 행함은 방향성을 가집니다. 인간의 실천 행함은 방향성을 가진다는 거예요. 방향성. 만약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방향성이 10개라도 20개, 100개라도 될 수가 있어요. 집에서 설거지할 때의 방향성, 여행 갔을 때의 방향성, 그리고 교회 갔을 때의 나의 실천 방향성, 전부 다 이게 다르다 말이죠. 수영장 갔을 때의 방향성, 내 방향 수천가지 수백 가지 방향성을 내 중심된 나에서 계속 나올 수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 살 때의 나의 방향성, 콩나물 살 때 기도하고 사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콩나물 살 때에 헐값에 맛있는 콩나물을 구입하게 되면 오늘 저녁식사는 굉장히 맛나겠다. 라는 내 쪽으로 방향성을 가집니다. 분명히 제가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방향성으로 가야 될 텐데 인간이 실천을 하게 되면 그 실천한 방향성은 이렇게 가다가 도중에 유턴 해가지고 그 방향성이 나의 실익, 나의 이익으로 되돌아가버려요. “나, 잘났지요? 나, 행함 있는 믿음이니까 진짜 믿음 맞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를 증거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방향성이 어디에 도달하지 못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에게서 나온 행함이라면 그냥 예수님 쪽으로 가야 돼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 점을 이해한다면 오늘 강의는 사실 이해 다한 거예요. 이 두 개의 차이점을 봅시다.
행함. 행함으로 행하자. 행함으로 행하자와 믿음으로 행하자의 차이점은? 행함으로 행하자 하면 방향성이 나에게로 가요. 내가 행함의 주체기 때문에 나에게로 옵니다. 어? 어려운 사람이 있네. 형제가 헐벗었네. 형제가 헐벗고 배고프네. 그럼 누가 도와주나? 내가 도와줘야지. 내가 도와준다. 나에게서 뭐가 나왔습니까? 행함 나왔지요. 나 행함, 나 실천이지요. 행함이 나왔지요. 저 쪽 상대방에게 행함으로 전달된 겁니다. 나의 행함이 저쪽 행함으로 결심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믿음이 필요치 않지요. 믿음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믿음이 가미되게 되면 나에게서 비록 행함이 나왔더라도 믿음의 실천 방향이 나를 제키고 나를 빼먹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가야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증거 돼야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그냥 행함으로 행하라면 믿음이라는 게 필요 없는데 믿음을 보이기 위한 행함이라면, 내가 나를 믿습니까? 내가 나를 믿어서 구원 받습니까? 구원이란 말이 나오거든요. 그럼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늘 강의에 어려운 점이 또 나오는데,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미리 말씀드릴게요.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과 귀신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바로 실체는 있는데 이 땅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림자 없는 실체. 희한하지요?
이 컵에 그림자 있잖아요. 그림자가 있으면 실체가 있잖아요. 그런데 실체는 있는데 그림자가 전혀 없다. 어머, 무서워라! 어떨 때 그런가 하면 유령. 유령은 있는데 그림자는 보이지를 않지요. 여호괴담. 복도에 탁탁! 귀신이면 그림자가 없어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의 그림자가 몇 센티 되던가요? 마귀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은 없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 계시면 마귀도 있지요. 귀신도 있고 마귀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림자가 없다는 거예요. 실체는 있는데. 그래서 그림자 없는 실체를 인간 속에 집어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 인간들이 결정해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에 문을 누가 열었습니까? 옥문을. 천사가 열어주지요. 성경에는 이렇게 그림자 없는 실체, 유령 같은 영적 존재가 계속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들면서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림자 있는 나를 믿는 것에서 더 능가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울을 보면서 백날 나는 왜 이리 완벽해. 이런 거 있잖아요. 거울 보면서 매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은 뭐를 누락시키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집어넣은 믿음이라는 그 관계성을 전부 다 훼방하고 있고 인간이 자기 존재 때문에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집에 와서 “설거지 누가했지?” 딸이 있다가 “엄마, 내가 했어요.” 전혀 믿음 아니지요. 같은 아담이 같은 아담에게. 성경에서는 이 아담이라는 이것이 아담에서 아담에게.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아담에서 아담에게. 같은 아담이 아담에게서 하는 이것은 전혀 믿음의 구성요소로서 미흡한 겁니다. 믿음의 구성요소로서. 오늘 아침에 십자가마을에 딱 들어가니까 누가 질문 하나 던져놨지요. 질문을 했어요. 92페이지 이야기하면서 십자가 피와 그 차이 남에 연관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답변을 제가 해놨어요. 나중에 시간 있거든 답변해 놓은 거 보세요. 그 답변이 이리 되어있어요. 인간보다 언약이 우선이다.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있었다. 에덴동산에. 인간은 인간을 위한 에덴동산 같으면 인간에게 해로운 선악과를 아예 심지를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한다면 죽음이라는 그 부정적 이상한 유해물체를 심어놓지를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아담이 따먹었다 쳐도 그 손상된 선악과 파내고 새롭게 선악과를 심던지 아니면 아예 선악과를 안 심던지 해서 어쨌든 인간이 범죄 하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배려를 다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까지 못 따먹게 만든 추방되었다는 것은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있어요.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뭐냐 하면, 마지막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이에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든 선악과나무든 무슨 나무든 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방해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방해물이 뭐냐는 선악과를 심어놓고 파악을 해주시는 겁니다. 선악과 심어놓고 아담이 따먹으라고 먼저 하지를 않았어요. 여기에 부추긴 자가 있지요. 처음에 부추긴 악마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뱀이라는 것. 그런데 그 뱀을 뒤에서 조종해서 따먹어라. 따먹어라. 했다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뭘 예상했느냐 하면 선악과에 대해서 반발하는 영적인 존재가 하늘에서 전쟁에서 패배해서 지상의 인간들까지 이미 이것이 전투의 자리가, 장소가 확대되었다는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이 요한계시록12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미가엘을 천사를 이기지 못해서 추방되어서 지상에 어디까지 확대되었느냐 하면 인간의 사는 동네까지 확대되었잖아요.
그러면 승리했다는 표시가 하늘에서 확대됐기 때문에 하늘에서 결정된 증거를 찾을 게 아니라 이 지상에서 마귀한테 이겼다는 것을 지상에서 찾아야 돼요. 지상에서 찾을 뿐만이 아니고 지상에서 찾은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악마가 무엇을 중점으로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꼬셔왔는가를 십자가를 통해서 만을 알지 다른 것으로는 몰라요. 교회 갔다고 몰라요. 십자가 복음만큼만 제발 입 다물어라. 그 말은 십자가 피만큼 만이 구원되지 그 외에는 구원의 길을 준적이 없다는 것을 악마는 알고 있어요.
이 악마는 교회를 앞장세워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십자가 대신 교회부흥, 이거 대신 니 몸 건강, 계속해서 우리에게 십자가 대신 니 행복, 이리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지요. 마지막 아담과 연결된 아담은 이들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모형. 이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의 모형.
저는 성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추적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예수님의 위치, 추적기. 여러분, 주머니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의 추적기 있나. 이건 무지 무지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 중요한 이야기를 미리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 바로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아담이 다른 아담에게 전달하는 그 전달 실천 속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 미국에 있느냐, 한국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니 실천력 속에 주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 말을 바꿀게요.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주님이 나보고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실천에 어떤 행위에 나서게 하는 그 사건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질문에 바꿔야 돼요.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지 말고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바꿔야 돼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이었어요. 선지자의 삶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의 삶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으면서 자기 고향을 생각했던가요? 만약에 스데반집사가 고향이 평양이라면 얻어맞으면서도 ‘아, 이제 내가 평양냉면 못 먹는구나!’ 걱정했겠습니까? 스데반집사의 고향은 따로 있어요. 얻어맞고 죽게 되니까 거긴 바로 주와 함께 있었던 주님이 서서 스데반집사를 기다렸잖아요. 스데반집사를 죽게 하는 그 사건, 주님의 실천인데, 실천성, 그 사건 속에 스데반집사에 주님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7장에서는 그걸 뭐냐 하면 ‘성령 충만’이라 합니다.
성령을 요한복음14장에서는 이걸 두 자로 이렇게 해요. 처소에요. 처소.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성령이 그냥 개인적으로 만나 버리면 처소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고. 집사님은 집사님 집에 가고 나는 내 집에 가면 되니까요. 처소가 새롭게 형성이 안돼요.
그런데 성령은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니 소속과 니 장소가 현재 니는 아무리 나대보고 도망쳐 봐도 니가 이미 옴팍 뒤집어씌운 처소는 거기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을 통보하고 일러주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소유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는 그 성령이 제시한 처소 안에 소유 당했어요. 그런데 그 처소는 성령만 계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있어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요한복음14장에 계속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성령은 처소라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원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 받았거든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예수님은 꾸준히 어떻게 살으셨냐, 내가 아버지 안에,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신 방식으로 예수님은 움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계신 곳을 하늘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답답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게 일어나는 그것이 곧 내 안에서 아버지가 하신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사람은 계속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누가복음에 보면 17장2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너희들이 하나님나라 가기 위해서 징후를 자꾸 찾는데,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눈 떠봐라. 바로 너희 안에 있잖아. 니가 지금 마주보고 있잖아. 너희와 더불어 함께 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을 아버지와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언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이 사건으로 실천되는 그 현장만 아버지도 거기 있고 아들도 거기에 있고 성령도 거기에 있고 성도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언약사건입니다.
언약 사건은 성령께서 그 자리를 초대하지 않는 한 언약 안에 들어올 수 없어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언약에 유월절이 있었어요. 언약 사건은. 어린양의 피, 그 죽음을 경계로 해석했기 때문에 니가 죽지 아니하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요. 산채로 목숨 바치려고 했던 베드로 실패했습니다. 요한복음14장에 보면 혼자 그 장한 베드로 떼어놓고 그냥 혼자 가셔요.
저나 여러분이 어릴 때 엄마한테 제일 섭섭했던 게 뭐냐 하면 엄마가 시장가서 어린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제일 섭섭했던 것이 평소에 장볼 때 늘 같이 가다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니, 딴 데 가지마라. 여기 있으레이. 딴 데 볼 일 보고 올게. 딴 데 가지 말고. 엄마 후딱 볼일 보고 올게.” 해가지고 엄마가 자기 옷 보러 양품점에 들어가고 난 뒤에 나는 거기 서 있어야 되는 거예요. 혼자서. 줄곧 같이 오다가 고 시간만큼은 서있어요. 한 10초 가격만 볼 줄 알았는데. 1분 지나고 2분 지나고 여자 옷 사는 게 어디 그렇게 간단합니까. 슬슬 짜증나고 막 울음이 터져 나올 그 때, 엄마 금방 나오잖아. 바로. 금방 안 나왔는데. 금방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자녀교육 할 때, 예상 못한 괜찮은 옷이 있을 때, 잠시 애 보류해 놓고 잠시 가는데 있지요. 그 애들이 얼마나 어릴 때 섭섭하겠습니까. 트라우마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나이 서른 넘어도, 장가가도 트라우마 있어요. 엄마 그 때 나를 버렸다. 모든 인간은 주님한테 트라우마가 있어야 돼요. 나를 버린 분이에요. 주님이 나를 버린 분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를 찾아온 사랑하는 분부터 시작하면 이건 완전히 100% 개판이에요. 이건 엉터리에요.
베드로를 버렸듯이 가룟유다를 내쳤듯이 일단은 주님은 우리를 내침을 우리가 용납해야 됩니다. 나를 내쳤던 분이에요. 내치지 않고 해버리면 우리는 사랑이란 망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마지막에 그런 대목 했거든요. 미워하는 법을 모르면 사랑하는 법도 모른다고요.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 전에 미워하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말이죠.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100% 그건 사기입니다. 사랑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는 거예요. 미워해도 되는데 사랑할 때 이게 진정 사랑 아니겠어요?
미워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믿음의 주체로서 행함으로 건너올 때 이게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그 행함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우리의 행함의 방향성이 내 쪽으로 쏠리지 않습니다. 도로 유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내쳐도 할 말 없어요. 왜? 우리는 언약 밖에서 놀던 그러한 엉터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모르고 자기 살 궁리만 생각하고 자기 구원받을 궁리만 생각했어요.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언약한 그대로 언약을 회수하거든요. 저보고 볼펜주세요. 하면 여러분이 갖고 있던 볼펜을 던질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볼펜을 던져 놓고 제 볼펜 주세요. 하면 제가 던진 볼펜을 여러분이 찾아줄 거예요.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언약을 던져 놓고, 애들 문방구에서 파는 거 있잖아요. 훅 불면 펴져서 도루룩 감기는 게 있잖아요. 자기가 던져 놓고 던진 콩고물에 묻힌 사람들만 데리고 오는 방식. 그런데 이건 뭐냐, 꿀이 달렸어. 언약 안에 꿀이 있어가지고 꿀을 다 알아보는 언약 회수할 때는 그런 사람만 회수하는 거예요.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분류를 이야기해요. 분류.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전도할 때 상대방을 꼭 미워하세요. 꼭 미워하세요.
남편한테 전도할 때 남편을 밉지 않거든 전도하지 마세요. ‘아이고, 인간아! 예수도 안 믿는 게 인간인가.’ 우리 아까 권사님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는 안 믿는 게 무슨 인간입니까? 주님 안목에서 미워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이게 복음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빛이 나요. 복음이 빛이 나요.
그냥 생뚱맞게 이만한 다이아 적어도 10억내지 20억되는 다이아를 가지고 만약에 아주 못한 어떤 시어머니가 무슨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자기 가보 10억 되는 다이아를 며느리 불러가지고 “자, 나는 다됐다. 니 해라.” 하면 그 며느리가 ‘아이고, 또 유리조각 잘라가지고 참 끝까지 나를 속이는구먼.’ 이리 생각하지. 그걸 다이아몬드로 생각하겠어요? 항상 복음은 예상 밖의 기쁨을 줘야 되지 예상한 기쁨은요, 이건 시큰둥하고 시시해요. 매일같이 예상 밖의 복음이 와야 되지 미리 예측한 복음은 그건 우리의 오만원짜리보다 더 못합니다. 오만원짜리보다.
세상 천하를 얻고도 목숨(복음)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할 비중 그러니까 단층에서 지붕으로 여겨놓고 십자가 복음을 논했을 때 이게 복음 때문에 시국 이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권사님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에 좋은 게 없다고요. 복음 알고. 이 기회에 권사님 믿음 혼자 다 좋은 줄 아는데, 이 때 순간뿐이에요. 내일 되면 또 몰라요. 복음 알고 재미있는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