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1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위반자
20180601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위반자(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는 레위기 19장에 화목제 중심으로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신기한 것은 인간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회사 사장이라면 직원들이 일을 할 때 일했다고 사장이 만족한 걸 봤습니까? 사람이 누구한테 지시할 때는 지시하는 사람의 마음을 지시받는 사람이 다 알지 못해요. 문방구라든지 소규모 사업장이나 대기업도 마찬가지로 어떤 지시를 했을 때 그 지시에 담긴 마음가짐을 직원들이 제대로 그걸 알아챕니까? 절대로 모르게 돼있어요. 이것은 인간은 아무리 부모와 함께 산다할지라도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합치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비축된 기억이 달라서 그래요. ‘비축된 기억’이란 말은 사는 환경이 달라서 그래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말을 할지라도 말하는 사람의 본심과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드려라 할 때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화목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같은 인간도 지시를 냈을 때 지시한 사람의 심정을 온전하게 다 알 수 없는 입장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지시를 뭔 뜻인지 알아채서 거기에 하나님이 만족하도록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고 뭘 받을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들이 모르는 제삼자가 개입돼있어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할 때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가 완벽하게 튼튼하게 어떤 경우에라도 완벽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 안에서 구원이 되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설픈 노아의 솜씨를 봐줘서 구원해주는 겁니다. 노아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엄청난 오산이에요. 거기는 우리가 모르는 허술하고 모자라고 엉터리 같은 우리를 용납해주는 중간 절차가 있어요. 그걸 용납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중간에 개입하셔서 용납해주신 분의 헌신, 희생, 그런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분이 신약에서 와서는 자기 정체를 드러나시죠. 고난의 길 가시는 예수님, 십자가 진 예수님으로 정체를 드러냈는데 지금 레위기는 신약이 아니고 구약입니다. 구약에선 하나님이 자기 정체를 다 드러내지 않았어요. 드러내진 않지만 그 징후를 계속해서 던져주시는데 그 던져주시는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레위기 19장이고 그 안에 화목제가 들어있습니다. 5절에. 특히 거룩을 언급하면서 화목제를 거론한다는 말은, 화목제가 마무리 짓는 제사거든요. 화목제 받으면 앞은 것을 다 받은 게 돼요. 처음부터 화목제 드리는 게 아니고 속죄제, 번제 하고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기 때문에 화목제 받는 것은 다 받은 거예요. 로마서 3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화목제물로 간주했습니다. 요한일서에도 마찬가지로 화목제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화목제물로, 이렇게 돼있어요. 화목제를 받았다는 것은 앞의 모든 제사에 대한 최종상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화목제 이야기가 바로 5절에 나와 있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지난 시간에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기 19장은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누굴 대상으로 한 것이냐? 이방민족한테 한 게 아닙니다. 이방민족으로 빠져나온 일단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빠져나온 사람에게 레위기 19장을 언급한 겁니다. 이것은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그냥 보지 말고 출애굽 정신으로 보라는 겁니다. 출애굽할 때 사람만 나온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제사법도 같이 나왔다고 보셔야 됩니다. 그게 바로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받았거든요. 피에 둘러싸였다. 보쌈 당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 연 밥 잡숴보신 적 있습니까? 밥이 연잎에 둘러싸이죠. 출애굽 정신이란 나 홀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뭔가 둘러싸여 있는 게 있어요. 그걸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된 거란 말이죠. 다시 말씀드릴까요? 인간 대 인간도 그 사람의 심정을 평생을 다해도 헤아리지 못해요. 심지어 같이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비축된, 쌓여있는 기억이 달라서 그래요. 기억이란 과거로부터 살아온 모든 체험의 집합이죠. 그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단어 하나 던져도 무심코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게 비축된 기억된 단어의 쓰임새, 이런 단어는 어디에 쓰였는지 맥락을 연결해서 이런 뜻이지요,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인생의 맥락과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른데 서로 의견이 맞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하면서도 각자 자기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특히 돌 무렵의 아기들 보세요.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얘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거든요. 24개월이란 아주 긴긴 인생을 살았어요. 인생을 살면서 몸에 스며든 체험이 있어요. 그게 자기가 내뱉을 때 몸짓, 손짓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본인만의 언어에요. 이럴 때 부모에게 먹혀들고, 이럴 때 할아버지에게 먹혀들고 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아이들 클 때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 거기서 나오잖아요.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은, 돈 주고 밥 먹여주고 우유 먹인다고 그 얘가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사료로 되는 것은 개나 되지. 개도 안 그렇다, 참. 사료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둘러싸인 환경이 그 사람의 집안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집안이 다른데 출신환경이 다른데 생각이 같을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죄 많은 지옥 같은 세상에 사는데 하나님이 명령한다고 해서 인간이 알아들어요? 턱도 없는 소리, 못 알아듣지요. 지 마음대로 지킨다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지키고 자기를 의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 할 때 그냥 하지 않고 보쌈, 보자기에 싸이는 겁니다. 제사에 둘러싸여요. 그 제사는 피라고 돼있지요. 어린양의 피를 묻힌 채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애굽은 뭐냐? 애굽은 이방민족이죠. 애굽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이방민족이에요. 애굽에서 나온 것은 히브리인들이 예상 못한 사건에 의해서 강제로 빠져나온 거예요. 사건이란 인간이 예상한 게 아닙니다. 새로움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는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방식은 교양이고 도덕이고 윤리죠. 성경 해석할 때 출애굽 정신으로 하라는 말은 19장 보셨지요. 레위기 19장 해석할 때 윤리도덕은 다 들러내야 되고 빼야 돼요. 인간의 교양 같은 것, 품행은 다 빼야 됩니다. 그것 빼고 해석해야 돼요. 착함으로 승부하면 안 돼요. 착함으로 승부하면 하나님 뜻도 모르고 자기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을 지켰으니까 천국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온다고. 그건 스스로 주제파악도 안 되고 자기를 자꾸 의인으로 변모시키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위기 19장을 해석할 때 여러 가지 명령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단락 지어서 굉장히 많아요. 소설처럼 흐름이 아니고 명령, 계명들이 단락져있어요. 끊어져있거든요. 하지만 그걸 묶을 수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를 지루하더라도 같이 보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헛것을 위하지”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말며” 그 다음에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고 나오지요. 9절에 보면,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10절에 보면,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11절에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이렇게 돼있지요. 13절에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그 다음에 14절에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그 다음에 16절에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그 다음에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그 다음에 23절 끝에 보면,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그 다음에 26절에 보면,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체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29절에 보면,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그 다음에 31절에 보면, “너희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그 다음에 33절에,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그렇게 돼있지요. 여러 가지 지시와 명령을 하는데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하지 말며”가 연속적으로 나오지요. 이것이 오늘 해석의 열쇠가 되는 말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위반자라는 겁니다. 왜 위반자냐? 하나님 뜻과 인간의 뜻은 속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죄 아래 갇혀있는 인간이 거룩하고 죄 없는 하나님의 뜻을 죄의 막을 뚫고 알아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본인은 인정하지 않으면 이미 죄인이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을 만들기 전에 모든 사람은 이방민족이라고. 이방민족이냐, 이스라엘이냐의 차이점은 얼마나 착하냐, 윤리적이냐, 도덕적이냐, 얼마나 성품이 고우냐에 있는 게 아닙니다. 보자기 둘러싸여져야 돼요. 어린양의 피로. 어떤 사람이 나와 악수를 하는데 그 사람 손에 피가 묻혀있단 말이죠. 이게 뭐야, 하고 빼겠지요. 드라큐라야, 뭐야? 당신 손에 피 묻어있네요.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 죄 때문에 흘린 피고,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흘린 피입니다.”라고 나올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인생의 모든 경험이 나로 하여금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내 죄 때문에 피를 흘린 손을 내밀었다는 말은, 내가 나를 보는 내 모습과 내 앞에 피 묻은 손을 내미는 그분의 안목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에요. 같지 않다는 겁니다. 레위기 19장을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해도 자기 자신이 애초부터 위반자인 걸 모르고 해봤자 자기 자랑밖에 안 나와요. 레위기 19장 읽으면서 화목제는 십자가로 대체하면 되고,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절에 안 가니까 우상숭배 안 하고. 9절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좀 남겨둬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라. 이건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꾸준히 했고. “도적질하지 말며” 내가 도적질한 기억이 있나? 없고. “속이지 말며” 별로 없고.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생각 없이 할 때는 있었지만 자주 하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욕한 적은 없고. 이건 뭐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위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모태신앙이라고 교회 50년, 60년 다니는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전히 이방민족인데. “하나님, 이야기만 하세요. 지켜드릴 테니까. 전에는 못 지켰지만 성령 받았으니까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지키겠습니다.” 레위기 19장이고 20장이고 오라 이 말이죠. 다 지킨다고. 많이 지키면 복 줄 거고 조금 지키면 보너스 약간 적을 거고. 그런 식으로.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본인이 …….” 전두환처럼 맨날 본인 커버하고 있어. 본인 사수하고 있습니다. 새삼 멀리 갈 것도 없어요. 교회 내에서 그래요. 자기 자신의 흠이나 티가 남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긴장 바짝 하고 교회 옵니다. 나중에 그것도 힘들면 아예 교회 나오지도 않아요. 남한테 들키지 않을 능력 있다 싶으면 교회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 네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하느냐? 이걸 알아야 돼요. 왜 명령합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명령했다고 이야기해도 현대인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일단은 한 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지킬만한 하면 하나님과 계속 사귀고 너무 무리한 요구하면 안 들은 걸로 치고. 배짱도 똥배짱도 아니고 대단한 배짱이라. 나중에 퇴직해서 할 일 없을 때 교회 다니지, 뭐.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께서 명령을, 율법을 줄 때는 이미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어떤 것도 하나라도 우리는 위반하는 성질과 본능과 속성을 잔뜩 지니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 주님께서 활을 쏘듯이 자꾸 명령하니까, 명령이 19장만 명령이겠어요. 20장, 계속 명령 아닙니까. 나오니까 우리는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겁니다. 특히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두 가지의 정신병적 현상을 보인다고 지적한 사람이 있어요. 스키조와 파라노. 스키조는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 schizophrenia)이에요. 파라노는 편집증(偏執症, paranoia).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이 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거예요. 들뢰즈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이 현대를 분석하면서 스키노적인 현상, 정신분열증적 현상과 파라노적 현상, 편집증적 현상이 모든 인간이 보인다는 겁니다. 파라노, 편집증적 현상은 뭐냐 하면, 인생을 살 때 어떤 집단에 속해서 앞서 간 사람을 따라잡으란 식으로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 인간을 잡지요. “너는 저 인간을 따라잡아야 돼. 20등하면 안 돼. 1등해야 돼.” 계속 기존에 구축돼있는 체제에 순복하고 그 체제에서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시늉이라고 해야 된다고 거기에 편집이니까 집중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스키조는 정신분열증인데 기존에 구축돼있는 모든 것을 보였다하면 무조건 거기서 도망치는 거예요. 분열, 갈라지니까 쫙쫙 찢어지니까 갈아 타기하는 거예요. 조금하다가 재미없다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그래서 인간은 편집증 아니면 정신분열증이에요. 요즘 20대 젊은 사람들 보세요. 안정된 장소, 안정된 직장, 공시생이 44만 명입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국가공무원 시험 쳐서 확정된 직업을 얻고자하고 또 가족들도 그렇게 요구하는 그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44만 명입니다. 이것은 수능 준비하는 학생들 수와 거의 비슷해요. 이건 편집증에 속합니다. 진짜 머리 처박고 우선 들어가고 보자는 거예요. 이미 안정된 직장에. 거기에 비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 치는 학과, 연기하는 학과, 래퍼 된다고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학교도 안 가고 돌아다니는 아이들. 걔들은 뭐하라 해도 무조건 안 해. 튕겨나가요. 이건 서핑족, 새로운 파도가 오게 되면 갈아타는 거예요.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보지 말라하면 더 보고, 피우지 말라하면 더 피우고, 마시지 말라하면 더 마시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안정된 직장에서 때려치우고 사표내고 딴 짓한다고. 집 다 팔고 아이 둘과 부부가 해외여행 돌아다니는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돌아다니잖아요. 정신분열증 아닙니까. 돈은 마누라가 벌고 남편은, 아내는 편집증, 남편은 정신분열증. 남편은 친구 만나고 취미생활로 청춘을 다 보내는 거예요. 도박, 낚시, 사냥, 등산. 아내는 죽으라고 돈 벌고. 그런 남편이 아내에게 같이 낚시하고 여행하면서 놀자하면, 아내는 싫어요. 왜? 평생을 편집증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계 안 지키면 굶어죽을 줄 알고 있어. 둘 다 정신병자거든요. 모든 인간은 환자에요. 성경은 모든 인간을 환자로 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 해요. 거룩에 비해서 죄인인 겁니다. 그런데 이 죄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는 처소, 장소 자체가 죄를 유발하는 곳에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이걸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의 초상이에요. 아담이 아무리 많은 새끼를 까도 그 모두를 모으면 딱 하나의 얼굴이 나옵니다. 아담의 얼굴, 아담의 초상, 형상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 지은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dna를 그대로 받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 내외를 쫓아냈잖아요. 어디서 어디로 쫓아냈는지 봐야 돼요.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인간을 내쫓아버린 거예요. 생명나무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행복하든, 얼마나 큰 성공을 이루든 간에 생명이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으면 복이 없는 겁니다. 생명나무에 대조되는 나무가 선악과나무거든요. 죽음이 있어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 자체가 죽음이에요. 몸이 건강해도 죽음이고 아픈 것도 죽음이에요. 요즘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아픈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혹시 안 아픈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안 아픈 사람이 없어요. 지금 나 혼자 안 아파요. 아픈 게 정상인지 안 아픈 게 정상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러나 아프나, 안 아프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선 아프니까 죄 졌고 안 아프니까 의가 아니라 하나님은 병으로 따지는 게 아니고 아프든 안 아프든 전부 다 죄를 앞장세우고 우리한테 쳐들어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안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죄 사함을 주시는 거죠. 아파 죽어서 천당이나 가라 이 말이에요. 고통 속에 허덕이다 천국에 가라 이 말입니다. 안 아프게 되는 게 아니고. 타고난 게 정신병잔데. 그 아픔에 정신병도 포함되겠지요. 들뢰즈란 철학자가 이렇게 분석해놓고 해결책이 없네. 세상은 이렇다. 해결점은? 없어요. 왜 없느냐? 들뢰즈 이 사람은 세상을 복층으로 본 게 아니고 단층으로 봤기 때문에. 세상을 2층 구조로 본 게 아니고 단층구조로 봤어요. 기존의 세력, 기존의 권위, 힘 있는 곳에서 도망치게 되면 정신분열증, 복이 여기 있다 해서, 뭐 공시죠. 기존에 돈 되는 큰 회사, 삼성이나 현대, 거기에 들어가면 나는 살았다는 건 편집증이거든요. 그러나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수평적으로 이동할 뿐이지 절대로 수직적으로 이동하진 않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삼성에 입사한다고 하늘나라 가는 건 아니란 말이죠. 공무원시험 떨어지든 합격하든 지옥 가지만 떨어진 그 자체가 지옥은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에서 이 세상을 단층으로 보는 게 아니고 복층으로 봐요. 아파트 제일 꼭대기에 펜트하우스. 복층, 다락방이잖아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졸지에 아래나라와 위나라로 갈린 거예요. 아래쪽과 위쪽이 새롭게 형성된 겁니다. 예수님은 위에 계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런데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비축된 기억 속에는 그들이 상상한 천사를 날개 달고 와야 되거든요. 예수님을 아무리 360도 카메라로 찍어봐야 어깻죽지에 날개 없어요. 목수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말은 맞지요.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말이야 맞지요. 맞는데 틀렸다니까요. 맞는다는 말은 단층에서 통용되고 소통되는 단어와 개념으로는 맞아요. 이중적인 맥락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흔히 빠진 목수의 아들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 그게 어린양 피의 능력이다.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체험을 했기 때문에 알아요. 그런데 그게 다른 이방민족에게 먹혀들겠어요? 안 먹혀들지요. 왜냐하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은 이미 자기가 경험한 것에서 예상하게 돼있어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면 천사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히브리인들도 예상 못한 거고, 애굽의 왕부터 어떤 인간도 이걸 예상 못한 거예요. 예상 못한 것을 저는 사건으로 봐요. 돌발 사건이거든요. 사건은 인간이 평면으로 알았던 시간의 개념을 중간에 난데없이 뛰어든 거예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을 두 개의 이질적인 층으로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방민족은 그걸 아느냐 이 말입니다. 알 턱이 없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사건입니까, 성경공부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사건이죠. 성경공부는 하나에 교양입니다. 독서모임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서관마다 마을회관에도 독서모임이 있어요. 그 사람들 공부하는 것은 교양을 쌓기 위함입니다. 교양이 구원합니까? 성경공부가 교양 같으면 할 필요 없어요. 심심풀이로 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문제가 되잖아요. 제가 레위기 19장하면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이 왜 우리한테 명령하느냐 하는 겁니다. 막말로 지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하느냐? 왜 하느냐 하면, 네가 있는 장소가 네가 예상한 장소가 아니고 네가 가는 모든 장소도 사건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어디 사십니까? 울산에 사시지요. 울산에 산다는 것을 복음을 모르는 십자가 모르는 성령을 안 받은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요, 이해 못해요? 그 사람들도 이해하죠. 우리는 고개를 저어야 돼요. 나 울산에 산다. 나도 울산에 산다. 그런 뜻이 아니야, 이 바보야. 울산에(처소) 산다. 산다, 상태을 보여주는 동사. 울산, 지명. 울산+에+산다, 이게 뭐냐? 무슨 뜻이냐? 정답은 예상 못한 십자가 사건, 복음 사건이다.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인데 그 사건 이름이 울산이다. 울산이란 이름으로 주와 함께 있는 곳,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그러한 전제를 깔고 레위기 19장을 보셔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울산에 산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의인 척하는 거예요. 주님에게 우리는 이미 위반자에요. 위반자로 간주하고 화목제, 제사를 동반합니다. 보쌈이라 했지요. 연잎에 밥이 싸이듯이 둘러싸여서 우리가 그 안에 위반자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레위기 19장을 보면,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이것 지키면 의인 맞지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이미 위반자인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자기는 위반자가 아닌데 19장에 나오는 말씀을 위반할 경우에만 위반자가 되고 지키면 위반자가 안 되는 그런 중립지역에 본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18절 봅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렇게 원리가 있으니까 응용문제에 들어가 봅시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할 때 어떻게 지킵니까? 정답 드렸어요.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위반자다. 왜? 그래야 우리를 둘러싼 어린양의 피가 빛이 나고 그게 거룩이 되기 때문에. 이제 레위기 19장 읽는 방법을 알려드렸지요. 20절에 보면,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바람 안 피우면 되지. 이러면 지킨 거예요? 이미 우리는 이 말씀에 위반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뭘 위반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생각하는 울산에 살고 있어요. 울산에 살면서 천국을 사는 울산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냥 울산에 살고 있어요. 평생 울산에 살아라. 천국에 와 있는 울산에 살아야 되는데 울산이란 이름의 천국에 살아야 되는데 그냥 울산에만 살고 있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위반자란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왜 위반자가 아닌가? 자기 혼자 있어요. 뭔가 보쌈이 없어요. 자기를 둘러싼 보쌈이 없어요.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한 그게 없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말하기를, “목사님, 말이 안 통하는 건 좋긴 좋지만 그러면 외롭습니다.”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다이아몬드가 외롭습니까? 옆에 있는 돌처럼 투박스러우면 좋겠다. 이게 다이아몬드의 소원이에요?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재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이아몬드로 만들려는 거예요.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빛이 나는 거룩이 거기서 발산되는 어둠 속에 태양이 있는 것처럼 피부 속을 뚫고 거룩의 빛이 발산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길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뭐 외로워요? 남들이 안 알아줘서 그래요. 내 잘남을.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하는 이것을 잘못 지키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아까 지루하게 이야기했잖아요. ~하지 말며, ~하지 말며. 주께서 명령할 때 ~하지 말며 연속으로 하는 이유가,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를 자극시키는 거예요. 마치 한의학에서 침놓듯이. 손가락 따면 소화가 잘 되고 하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가 있는 곳에 자극하기 위해서는 ~하지 말며, 라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하고 싶다고 나오게 돼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아담의 초상이기 때문에. 아담의 본성이 뭐냐? 따먹지 말라는 그것을 따먹었잖아요. 그 성깔, 그 성질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우리는 아담의 초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제목이, 아담의 초상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돼요. 들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자인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봐주기로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어야 돼요. 월급 타서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울산에 사는 사람이에요. 울산 살다가 지옥이나 가라. 정신병자에요.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잘만하면 복 받겠다는 거예요. <인간극장>인가 아침에 kbs에서 하는 프로에 나오거든요. 91살 먹은 칠갑산 근처에 사는 할머니인데 다래손이란 풀 뜯어서 장에 내다 파는데 제사 지낸다고 두 당 오만 원씩 절에다 내요. 돈 주고 등 달고. 단골인 모양이라. 절에 단골손님이다 보니까 다섯 개에 등 한 개는 공짜로 해주데요. 이게 단층이거든요. 사고방식이 단층이에요. 내가 신에게 잘 보이면 부처한테 잘 보이면 자자손손 대대로 복이 온다는 거예요. 저는 그걸 보면서 절이 저래야 되느냐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교회가 꼭 저래야 되는지 생각했어요. 교회가 저럴 것 같으면 있을 필요가 없다 거예요. 그런데 그 91살 먹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담의 초상이거든요. 모든 인간 내면, 뿌리에 완전히 자리 잡고 있단 말이죠. 교회 다니나 절에 가자 성당 가나 관계없이. 그들이 왜 절에서 비는 겁니까? 왜 교회 나오는 겁니까? 자자손손 복 받고 잘 되라고 나오잖아요. 이득 보려고 나오잖아요. 이득 보려고 안 나왔어요? 그러나 우리가 이득 볼만한 정당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위반자입니까? 뭘 달라고 할 권리가 애초부터 없어요. 그 불교, 절에 다니는 할머니의 잘못은 뭐냐? 뭔가 예상을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등을 달고 제사를 드리고 하면 우리에게 복이 온다는 예상을 하는 반면에 구원은 예상이 아니고 사건이에요. 이건 우리가 교회 가나마나 할 것도 없어요. 주께서 그냥 이끄시는 거예요. 어떻게 이끄는가? 계속해서 명령하고 하는데 하지 말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걸 들은 우리는 이런 걸 하고 싶었지, 라는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거예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전부 절이지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