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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90강-갈 4장 12-16절(변하는 인성)180527-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갈라디아서

290강-갈 4장 12-16절(변하는 인성)1805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12-16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12-16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사도가 옛날 같이 있었던 사람, 그러나 지금은 사도를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상당히 까칠하게 나옵니다. 사람이 친하게 지내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고, ‘빠이빠이’ 할 수도 있는 문제지요. 그런데 사도가 일방적으로, 나를 떠났으니 괘씸하구나, 이렇게 편파적으로 자기생각만 하고, 상대방에게 공개적으로, 그것도 성경책에 이렇게 기록을 해서 떠난 사람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쁘겠어요.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오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이 떠날 때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복음은 언제 실효성이 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살아 있어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가 있느냐 하면, 신자라고 왔다가 떠날 때, 떠나는 것을 통해서 ‘아, 주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그제야 안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정이라든지, 인간적인 공통점을 찾아서 먼저 저쪽에서 손을 내밀고, 친하게 지냅시다, 하다가 사도 쪽에서 계속해서 뭐가 나오냐 하면, 계속해서 복음이 나오거든요. 인간적인 요소가 점점 없어지고 복음적인, 예수님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까 떠나는 쪽에서는 계속 상종할 상대가 아니구나, 하고 떠나 버린 겁니다.

처음에 올 때의 마음은 어떤 마음으로 왔느냐 하는 겁니다. 올 때의 그 마음은 자기 딴에는, 나도 신자입니다, 나도 복음 사랑합니다, 사도와 함께 죽겠어요, 이렇게 나왔는데 그것은 자기가 알고 있던 복음적 내용이 자기 선에서는 감당이 되겠다, 해서 사도하고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겁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도이고, 사도 저 사람은 성령 받았고, 사도가 가는 길이 곧 천국이고 구원의 길이고, 따라서 사도와 친하게 지내고 사도와 같이 한패가 되어 있으면 나도 같이 천국 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사도와 연합했는데 사도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복음적인 내용을 쏟아내니까 나중에 가서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언제 저걸 다 지켜서 구원받지,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사도바울을 떠난 사람은 뭐가 문제냐 하면, 구원받을 때 시험 쳐서 점수 매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데 자기는 지금 사도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려고 하는 겁니다. 사도는 문제 출제하고 자기는 문제 풀어서, 너는 이정도면 합격선이야, 라는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 거예요.

실력발휘해서 자랑질 하려고 사도와 붙어 있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을, 떠나지 아니하면, 사도의 곁에서 떠나는 경우가 아니면 그 점을 알 길이 없어요. 평소에 사도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된, 성령 받은 사도 주변에 많은 사람이 포진되어 있을 때는 자기들의 생각과 사도의 생각이 같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가 자기가 알던 사도가 아니고 계속해서 사도 속에서 그리스도가 작용해서 복음이 나오니까 그 복음에 대해서 자기하고 자꾸 비교해 보는 거예요. ‘이정도면 구원받았겠지.’ 다음 주 가니까, ‘어? 내가 구원되기가 힘든가?’ 다음 주에 가니까 ‘나는 탈락인가?’ 그 다음 주가 되니까 ‘빠이빠이’ 해버리는 거예요.

도저히 자기로서는 사도와 같이 붙어 있기가 난처한 겁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사도의 말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15절에 보면,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사도의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제 눈인데 가져가실래요?” 이렇게 처음부터 나왔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16절에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계속해서 사도가 참된 말, 진리만 말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사도가 하는 말을 오해했기 때문에 사도가 말하는 세계관과 자기가 얼추 같다고 여겼는데 사도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니까 사도가 미워지기 시작하고 싫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사도의 복음이 뭘 건드리느냐 하면, 나만의 고유함, 나만이 갖고 있는 고유함을 해체시키는 쪽으로 복음을 전파한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건지기 위해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사도에게 왔는데 사도가 계속 하는 것이 뭐냐?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는 구원 받아야 해, 나는 구원받고 싶어, 라는 그 자체를 사도가 계속 건드리는 겁니다.

건드리니까 다 내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안에 뭔가 남아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마저 사도가 건드릴 때 인간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와 식사를 한다고 칩시다. 식사라는 것은 본래 밥 먹고 힘을 내서 열심히 살자는 쪽으로 식사를 하잖아요. 식사 중에 사도가 “자 독배를 마십시다.” 이렇게 하면 누가 겁나서 식사 하겠어요?

독이든 음식을 먹고 같이 죽자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저 사람은 계속 상관할 사람이 아니다, 도망치자, 하고 후딱 그 현장에서 도망치고 마는 겁니다. 뭘 건드린 거예요? 자기 고유의 것, 나만의 것, 제가 이것만큼은, 천하의 하나님이고 예수고 사도건 간에 이것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몸이 허술하고 육체가 약하다고 되어 있잖아요. 병든 가운데서 고생고생 하면서 복음 전하니까 ‘저 사람에게 뭔가 있다. 분명히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목숨 바쳐서 전하겠지. 우리가 도와줘야지. 우리가 합세해서 돕게 되면 우리가 도운 그 성과만큼은 하나님께서 배격하지는 않겠지.’라는 마음으로 온 거예요.

내가 당신을 도와주고 당신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게 되면 우리는 그 복음을 받아서 구원받는다. 이런 작전을 가지고 사도와 가까이 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 전하는 현장에서는 반드시 헤어짐, 갈라짐, 찢어짐, 이것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박수쳐야 된다는 말이지요.

왜냐? 안 갈라지게 되면 이것이 인간적인 만남인지 복음을 가운데 두고, 십자가를 두고 서로가 만났는지가 티가 안나요. 표가 안 나잖아요. 사람이 친하게 지내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당시에 열 두 제자가 다 떠나고 말았잖아요. 열 두 제자가 떠났을 때 비로소 십자가가 빛이 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을 만한 의인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예수를 알아보고 믿을만한 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 보편화시키는 겁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험 쳐서 실력발휘해서 합격하는 식으로 구원받는 그런 것이 없어요. 예수님에게 벌어진 그 일, 그 일을 사도를 통해서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겁니다.

복음은 뭐냐? 여러분이 복음은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신다면, 복음이란 예수님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복음이라고 해요. 예수님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믿지를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집착하고 있느냐 하면, 나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현재 집착하고 있으니까 현재 내 일 생각하고 내 몸 추스르기 바쁜데 남의 일에 관심 둘 여유가 어디 있어요. 내 일 바쁜데요.

그 내 일이라 하는 것은 나만의 고유한 일이에요. 이것은 가족도 터치 못하는. 평생토록 내가 꾸준히 모아놓은 어떤 적금 같은 것, 보험 같은 것. 그거 해체되고 그거 날라 가버리면 그야말로 나는 자살할 지경일 만큼 나에게 소중한 것 그것을 꼭 쥐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어디까지 침투하느냐 하면, 도망치는 그 마지막까지 계속 침투하는 거예요.

침투해서 사도가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그겁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죄사함 받고, 성령 받고, 복음 받고, 언약 받으면, 성령과 언약, 이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사도가 복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겁니다.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심지어 너 자신마저 잃는다 할지라도 성령 받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되면……, 성령과 언약의 특징은 소유물이 아니거든요.

계속해서 활동력을 발휘하는 대상입니다. 성령이, 언약이 나에게 왔다는 말은 내가 꾸역꾸역 내 인생 살려고 하지 않더라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과 언약은, 말려도 안돼요, 폭발적으로, 마그마 터지듯이 폭발적으로 나로 하여금 부지런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게 되고 우리는 그 성령의 일에 참여한 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결혼식에 참석해도 주의 일이고, 뭘 해도 주의 일이 돼요. 애 패도 주의 일이 되고요. 농땡이 부려도 주의 일이 돼요. 그렇게 되면 그동안 무엇이 성령의 일, 언약의 일을 방해했느냐 하면, 나만의 것, 내 것 없잖아요, 하는 이런 객기, 짜증부리기, 이게 그동안 얼마나 주의 일을 훼방질해왔습니까?

그냥 막살아도 되는데 내가 브레이크를 걸어요. 저는 이것을 신율법주의라 합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싶은데요. 선악과라는 것이 어떤 나무냐 하면, 따른 것은 다 먹되 이 선악과나무열매는 따먹지 말하고 하는 그 순간 인간은 두 개를 생각하게 돼요. 첫째는, 선악과 빼놓고 나머지는 다 따 먹을 수 있지요, 라고 필히 자기 권리를 우기게 되어 있습니다.

뭘 하지 말라고 하면, 이것은 안 할 테니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지요,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이 첫 번째 출발점이에요. 그 다음에 다른 것은 다 먹었다 치고 거기서 멈출 인간이 아닙니다. 다 따먹고 난 뒤에, 저것은 왜 안 되는데요, 하고 되돌아와서 반항하고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뭐가 모자라서 선악과를 못 따먹게 만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이런 현상이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좋은 점수를 매기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즘 세상에 신율법주의라는 것이 있어요. 신율법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적어봤습니다.

고혈압에 안 좋은 식품 : 염장식품, 오이지, 단무지, 장아찌, 젓갈은 안 좋답니다. 훈제식품, 햄, 소시지, 베이컨. 과자종류, 포테이토칩, 팝콘, 크래커 안 좋고요. 인스턴트식품, 라면, 그리고 통조림, 가공식품 안 좋아요. 치즈, 마가린, 버터, 케첩. 장류 안 좋아요. 된장, 고추장, 간장 먹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자연식품 가운데 소의 곱창이라든지 조개, 새우, 해삼 먹으면 고혈압에 안 좋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토피에 안 좋은 것 : 대두, 팥, 완두콩, 견과류 안 좋아요. 아몬드, 잣, 안 좋아요. 기름진 것 안 좋고, 인스턴트식품 안 좋고, 햄, 소시지, 스파게티 안 좋고, 닭튀김 안 좋아요. 돼지고기 안 좋고, 담배, 술 안 좋습니다.

당뇨에 안 좋은 것 : 라면, 감자튀김, 햄버거, 피자, 체지방 콜레스트롤이 살을 찌개 하고 활성산소를 건드려서 안 좋다는 겁니다. 돼지내장, 치즈, 오징어, 새우 못 먹고, 자두, 호두, 도넛, 초콜릿, 아이스크림, 과자 못 먹어요. 계란도 흰자는 먹을 수 있는데 노른자는 먹으면 안 된답니다. 흰밥, 설탕, 음료수, 곱창, 밀가루, 과일, 전복, 문어, 슈크림, 상품화된 쿠키 못 먹어요.

그러면 신율법주의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이것 피하고 나머지 먹게 되면 자기 고유의 것을 살 릴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날 신율법주의에요. 관심이 여기에 다 쏠려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살릴 수 있느냐. 교회에서 뭘 안하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신율법주의에요. 뭘 하면 지옥 갑니까? 그걸 눈치 채러 오는 거예요.

사도가 계속해서 내뿜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과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이 땅에 감금되었다는 겁니다. 갇혀 있다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아담 개인적인 결정에 의해서 따먹은 것이 아니고 배후에 누가 있는데 그게 구조적으로 한통속인 것을 알기 위해서 주님께서 약속을 줄 때는 뜰채를 사용해요.

뜰채라 하는 것은 한꺼번에 다 뜨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관계된 것을 다 떠올리는 거예요. 인간만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더불어 악마와 인간이 결탁되어 있다는 것을 함께 뜰채로 떠 올리기 위해서 그 다음에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약속이 주어지는 거예요.

감금되어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혼자 어떤 자율권이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감금에 대해서 사람들은 성경을 봐도 잘 몰라요. 그걸 잘 알게 한 대목이 광야라는 겁니다. 이 광야의 특징은 사람을 살리는 데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요. 광야를 거치게 하는 이유가 뭐냐?

애굽에 살던 사람을 광야에 내놓고 보니까, 네가 어째서 죽은 존재인가를 애굽에 있을 때는 몰랐었는데 광야에 내놓고 보니, 아하, 이렇게 해서 인간은 죽어 합당하구나, 라는 것을 들춰내는 그 공간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라 하는 것은 결국 죽음에 인간이 감금되어 있는 거예요. 죽음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감금된 상태지만 기어이 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몸부림을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세상을 애굽으로 규정하시고 성도로 하여금 같이 애굽에서 살면서도 성도에게는 특별히 ‘광야 되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복음을 통해서, 사도의 입에서 복음을 계속 쏟아냄으로 말미암아, “너는 남들처럼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너는 지금 광야에 와 있어.” “나는 그냥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 사는데요.” 그게 아니고 지금 이곳을 광야라는 안목으로 볼 수 있어야 돼, 라는 것을 사도는 계속해서 독촉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에 주목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스데반집사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은 성령 충만 받았다는 요건이고요. 그가 성령 충만했을 때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거기서 스데반집사를 죽이려고 달려들지요. 돌 들고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백성들이 모세를 죽이려고 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스데반집사가 그들의 화를 돋우게 것이 뭐냐? 스데반집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했어요. 성령 충만 받아서, 예수님은 이렇게 일하셨다는 그 이야기를 하니까 저쪽에서 격분해서 돌로 쳐 죽인 겁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성령 받은 사람으로 스데반집사를 내세운 이유는, 너희들도 성령 받았다면 스데반집사처럼 그렇게 세상을 봐야 되지 않겠는가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정말 성령 받았다면. 스데반집사가 인생 실패한 것이냐, 라고 묻는 겁니다.

스데반집사는 성령 받고 난 뒤에 같이 현실을 보면서도 중층현실, 다른 현실을 살고 있어요.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현실층이 계층이 달라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걸 인디언텐트라고 했어요. 요새 애들 아파트 거실에 텐트 하나 쳐주잖아요. 너만의 공간, 너만의 소박한 비밀공간을 만들어보라고 따로 주는 것처럼 주님께서 성도한테는 인디언텐트를 따로 차려줍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텐트를 따로 줘요. 주게 되면 그 속에서 세상 살아가는 것과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의 차이 남을 분명히 보여주게 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본색을 드러냈는지는 민수기 14장 3, 4절과 34절에 잘 나와 있어요.

민수기 14장 3절에 보면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곁에 있다가 사도의 계속되는 복음을 감당 못해서 떠나버린 사람들, 사도의 원수가 된 그 사람들은 광야적환경에서 이야기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애굽에는 무슨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애굽의 공간이에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내가 어떻게 살았고, 교회 몇 년 다녔고, 유아세례 받았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 우리교회가 어떻고, 남들은 이렇게 살았는데 우리는 이렇게 살았고,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고, 자식 키웠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애굽이에요.

나를 박살내는 것이 싫다는 겁니다. 거기에 저항하는 거예요. 어떤 자율성, 자율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주체성과 내 자긍심을 인정해주는 세상, 그런 공간이 그립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민수기 14장 4절에 보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지도자를 뽑자는 겁니다.

지도자를 누가 뽑는가? 본인들이 뽑아요.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그 사람들이 지도자, 목사를 세우고 대통령을 세우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다시 애굽에 살던, 옛날 우리 몸에 익혔던, 몸에 쩔었고 쩔었던, 그야말로 고치지도 못하는 쩔어 있던 이 본성을 그대로 인정해 줄 그 동네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광야라는 것은 낯설고, 나를 작살내고, 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곳에 괜히 왔다는 거예요. 특히 광야의 특징은 음식을 주는데 하루치만 줘요. 하루치만 준다는 말은 그 인간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개인적인 연속성을 하루 단위로 도마에서 칼질해서 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하루치만 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광야라는 그 현장감에 걸맞게 ‘아, 하루만 사는구나.’ 하루만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하루살이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하루라도 살 가치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고, 그런 입장도 아니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광야라는 것은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안 살아도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리고 난 뒤에 ‘나는 왜 이곳에 존재하고 있지?’를 되물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만나의 의미가 속까지 파고드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 연속성이 깨지는 거지요. 나의 연속성이 깨지면 무엇의 연속성이냐? 만나의 연속성, 하나님의 약속의 연속성, 하나님의 언약의 연속성, 주님의 약속의 땅, 요새말로 천국이죠, 천국에 들어간다는 그 약속만이 내 고유의 것보다 우월함, 그게 더 우세되는 곳, 그게 광야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제일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옛날 애굽에서 살던 나만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한 그것은 광야에서 힘들게 되어 있지요. 괴롭습니다. 주님의 사건이야기 하고자 우리를 구원했는데 그 주님의 사건 이야기에 누가 방해자인가? 내가 더 살아야 되겠다는 나, 나는 더 살아야 돼, 고생하면서도 더 살아야 돼, 이것이 주님을,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자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는 정탐꾼을 보내지요. 정탐꾼을 보냈는데 갈렙과 여호수아의 의견이 뭐냐? 약속의 땅에 버티고 있는 그 인간들은 어떤 인간들이냐 하면, 우리가 애굽에 살면서 익혔던 세상관과 부합되는 인간들이 있더라. 칼과 무기로서 땅을 지키겠다는 그 사고방식의 그들이 있더라.

하지만 우리가 애굽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이제 그들도 능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길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 옛날 애굽에서 빠져나온 경험을 새삼스럽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믿는 한 우리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의견이에요.

층이 두 층이라니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세상이 있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산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돈이 있어야 살아요. 인간 개인의 자존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뻔히 압니다.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우세하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다 죽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민수기 14장 32절부터 보면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정탐한 40일은 약속과 관련된 40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광야에 유리시켜서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광야의 특징이 뭐냐?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때만 시간이 적용되느냐 하면, 약속과 관련된 시간일 경우에만 광야의 시간으로 새롭게 투입되는 거예요.

그런데 패역한 인간들은 애굽에서,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을 계산했기 때문에 다시 그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공동묘지에 시간이 흐릅니까? 공동묘지에 시간이 안 흐르지요. 성도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70, 80, 90, 이것 필요치 않아요. “생일축하 합니다.” 의미 없습니다. 추도예배, 의미 없어요. 교회 역사 몇 년 인가, 소용없습니다.

성도한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왜? 광야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시간밖에 없어요. 광야에서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들은 감금된 겁니다. 공동묘지에 집단으로 감금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1장, 2장, 3장, 4장을 거치고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잖아요.

1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사람에게 들은 것을 이야기지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고. 2장에서는 십자가를 보아라.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했고. 3장에 들어오면, 우리는 율법에 감금되었다, 죄에 감금되었다고 이야기했지요. 4장에 와서 더 이상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쏟아내니까, 그 감금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이 세상이 광야라는 것을 이야기하니까 사도바울에게 붙어 있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이 떠나버린 거예요. 마치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놈의 돈 모아서 교회 세우면 교회 키우려고, 선교하려고.

신천지는 1년 헌금이 3천 7백억이에요. 많이 들어오지요? 신천지교인들이 기존교인들입니다. 기존 교인이 했던 행세를 신천지가 똑같이 하는 거예요. 내 교회라는 겁니다. 자기 고유한 것이 있어요. 자기 고유한 그것이 바로 애굽이에요. 가봤자 지옥입니다. 자기 고유한 것. 내 새끼 잘되기 위해서, 내 가정 잘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 내 교회 부흥시키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목사를 뽑아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목사 입에서 나올 것은 뭐냐 하면, 애굽적인 것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지금 북한 보세요. 북한이 종교단체거든요. 애굽화시킨 거예요, 애굽화.

그들 종교단체의 특징은 뭐냐? 북한 이야기하기 전에 신명기 8장부터 읽어야 될 필요가 있겠는데요. 신명기 8장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애굽이죠, 우리 마음은요.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네가 움직인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주의 말씀이 너를 작살내게 만들고 움직인다는 그 말이거든요.

북한은 살아 있는 종교단체거든요. 북한의 정신은 기독교입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기독교가 관련이 있어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김일성과 같이 있던 그 목사가 김일성에게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들은 어떤 애굽적인 권세가 자기들을 살린다고 본 거예요.

남쪽에서 큰 교회 목사들이 할 일 없어서 북한에 우르르 가요. 북한에 가게 되면 북한 선교한다는 용도로 아는 교인들이 후원금을 주니까 그거 가지고 노후대책하고 생계보장 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북한이 기독교적 정신의 국가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겠어요? 죽 불러다가 제일 먼저 김일성 참배시킵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북한 가자고 요청한 분이 있어요. 옥수수와 관련된 분이 있어요. 참배를 시킵니다. 만약에 그중 어떤 목사가 참배를 안 한다면 보내버립니다. 다시 남쪽으로 보내버리고, 참배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코스는 알까기. 알 많이 까놨어요. 북한의 인구가 모자라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발목을 잡는 겁니다. 꼼짝 못하게.

dna 유전자검사하면 다 나오는 것을. 감금되어 있거든요, 감금. 애굽은 악마에 의해서 감금된 거예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발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의 원천이기 때문에.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

그 광야에 있던 사람들 다 죽여 버렸습니다. 아까 민수기 보셨지요. 다 죽여 버렸어요. 결국 이게 뭐냐?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었던 이유가 인간의 능력으로, 우리가 정신차리고 주님 섬기겠습니다,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위인은 없어요. 왜? 그들은 어디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에. 갇혀 있어요.

감금이라는 것은 투옥을 의미하고 투옥이라는 것은 감시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이 애굽이라는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도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감금시키는 감옥부터 학교, 병영, 병원, 수용소, 치매 수용소라든지, 그리고 국가, 공장, 이 사회전체가 자율적인 감금체제로 다 움직입니다.

가위 던지고, 화분 던지고, 서류 던져도 안 나옵니다. 왜? 여자한테 그런 것 좀 맞더라도, 이명희한테 좀 맞더라도 자식들 볼모로 애굽에 잡혀 있잖아요.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습니까? 왜? 나만의 고유한 것인데, 내 인생인데. 누가 책임집니까?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데요. 예수를 믿어요? 무슨 소리하고 있나요? 그건 인간에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예수를 믿어요? 혹시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까, 자기 덩치는 그대로 애굽덩치로서.

광야 없이, 광야 없이 그냥 통과합니까? 안돼요. 광야는 교체하는 공간이에요, 교체하는 공간. 교체가 일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신약에 와서 그 교체하는 공간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 계실 때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고. 얼마 전에 그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또 우리가 꼬집어봐야 돼요. 세리가 기도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기도를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기도의 내용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반면에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했어요. 그 기도의 내용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 이 양쪽을 오가시면서 성전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는데 성전의 의미는 뭐냐 하면, 교체하는 곳이에요. 광야처럼. 어떻게 들어와야 되느냐? 불신자로 들어와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를 떠난 사람은 본인이 신자라고 여기고 구원이라는 결과물을 신자라고 여기는 자기 몸에 먼저 짊어진 그것이 오류였습니다.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구원된다는 그 사실을 먼저 자기 몸에 짊어지고 그 다음에 자기 몸을 스스로 관리해보려고 하다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개인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문제를 가리게 되어 있어요. 오늘 몇 번씩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만의 개인적인 문제는 내가 내 개인문제에 집착하는 순간 예수 생각이 안 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에요. 정말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해체되지 않아요. 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문제가 작은 문제로 여기지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큰 문제가 내 문제에요. 내 문제가 제일 큰 문제에요. 이거 해결하려고 온 거예요. 신율법주의자 되려고 교회 온 겁니다. 사도와 같이 있으려면 같은 아픔이 있어야 되고 같은 상처가 있어야 돼요. 같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도 곁에 붙지를 못해요. 예수님 곁에 붙어 있지를 못합니다.

세리는 불신자로 성전에 진입했어요. 저쪽 바리새인은 성전에 뭐로 진입했느냐 하면, 신자로서 진입한 겁니다. 주님께서 보고 양쪽을 바꿔치기 한 거예요. “잘 걸렸다. 이놈아.” 이쪽 신자를 불신자 자리에 옮기고 이쪽의 불신자를 신자의 자리로 옮겼어요. 그 바리새인이 세리를 보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저 사람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저 사람처럼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나이다. 자기 고유의 것으로 감사한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바꿔치기 했어요. 그러면 죄인은 의인의 자리에 가 있는 겁니다. 그 자리가 뭐냐? 예수님 자리에요. 예수님은 둘 중에 의인의 자리에 가지 않고 죄인의 자리에 가서 죄인의 친구로 합세해 버렸습니다.

네가 죄 짓는 것을 이해한다는 그 말이에요. 네가 네 고유의 것에서 못 벗어난다는 그 점을 내가 이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설치고 행위를 해봤자 네 고유의 것을 떨쳐버릴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으니 이제 너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에요.

여러분, 사랑은 혼자 합니까? 혼자서 사랑하는 법은 없어요. 그런 것은 없어요. 같이 해야 돼요. 주님은 사랑을 어떻게 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우리는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시겠다는데 ‘어떻게’라는 것은 달수가 없어요. 내가 이 땅에 왜 태어났습니까, 는 이유가 없지요. 그냥 태어났지요.

주께서 사랑을 주면 이유 없어요. 그냥 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어떻게 달라져 있습니까? 그게 더 중요한 질문이에요.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달라고 하면 다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해체되었기 때문에.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바로 그 모습을 스데반집사가 보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복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다 털리는 것이 복이에요. 그동안 내 고유한 것 지킨다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 했습니까?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는 상태가 복입니다. 왜? 광야에는 나를 죽이는 곳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만이 교체되는 방법이고 교체되어야 만이 약속의 땅에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일 죽이지요, 매일.

만나를 가지고 하루하루 자른다는 말은 불연속적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지키려면 불연속적이 아니고 계속해서 어제와 오늘이 이어져야 지킬만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광야는 그것을 끊어버리게 만들어요. 네가 지금 어느 구석인데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를 이으려고 하느냐. 날마다 너를 죽이는 이 작업을 계속 해 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먹게 되면 또, 나는 주님 덕분에 살았다, 하고 본인이 또 살게 돼요. 20년째 만나 먹었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끊어버리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 설교가 어렵게 느껴질 거예요. 쉽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가 사는 것이 내가 시킨 것으로 살기 때문에 그냥 살아라. 그것이 층을 이루는 거예요. 주님이 시킨 거예요. 주님이 시킨 거래요. 뭐 하라고. 네가 왜 광야를 통과해야 만이 구원받는지. 다시 말해서 광야 없이는 천국 못가는 이유를 알게 하는 겁니다. 이게 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다 하라는 말이지요.

다 하면서 성령 받은 사람은 층이 있을 것이고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바이바이 할 거예요. ‘복음이 뭐가 중요하다고. 예수가 뭐 중요해? 내가 중요하지.’ 다시 돌아서는 겁니다. 자기 인생 자기가 꾸리고 내 인생 자기가 지키는 겁니다. 누가 누굴 시키는가? 내가 나에게 매일같이 시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나를 시키다가 결국은 모든 일이 다 틀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어떤 아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며느리와 산지 15년 되었습니다. 함께 살죠. 복음으로 엮인 관계는 아니에요. 다 준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불만이 있는 거예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사는데 며느리는 모태신앙이니까 타고난 신율법주의가 있잖아요. 남한테 신자다운 모습 보인다고 참다, 참다, 참았는데 이제 70넘어서 폭발한 거예요. 15년 전에 어머니 용돈하시라고 40만원 줬거든요. 15년 동안 인상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습니다. 남자 애들 둘 다 키워줬지요. 남자 애들은 오죽 또 왔다 갔다 합니까? 얼마나 번잡스러워요. 둘 다 키웠는데 인상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이 시어머니는 조선tv를 봐요. 그런데 나머지 네 식구는 뭘 보느냐 하면, jtbc를 봅니다. 그래서 신율법주의로 협상을 했어요. 집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안하기로 협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조선 tv를 봤어요. 홍준표 나오는 그거. 그걸 보고 있으니까 며느리가 화가 나서 한소리 했어요. 뭐 저런 것을 또 보고 있냐는 식으로.

그 참에 화가 더 났습니다. 그래서 독립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자, 이게 사랑입니까? 언약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 성령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입니다. 그 다섯 식구가 다 교회 나가요. 목사한테 신율법주의를 들었습니다. 교인은 교인답게 주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것들. 당신의 영혼을 찬란하게 빛내라. 이런 식으로.

그동안 위선 떤다고 얼마나 고생고생 했습니까? 이제는 며느리고 뭐고 ‘빠이빠이’ 나 고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드디어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것도 해야 하는 것이지 한다고 떠벌이는 것 보니 별로 할 가능성도 없어요. 가능성이 한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남과의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이용할 가치가 있어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뭘 다 줘요? 왜 줘야 되는데요? 지가 뭔데요? 우리 그렇게 삽시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이게 죽어 마땅함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되는지.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기쁨이 사도의 기쁨과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과 일치되는 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체하라고 세상 태어났는데 우리는 주의 말씀 들고 시험 문제 풀기 바쁩니다. 이거 다 풀어서 천국 가려고, 그렇게 시도하는 그 모든 것, 그것조차도 죄에 감금된 현상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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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7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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