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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80525b 마가복음12장 13-17절(다른 공간)-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180525b 마가복음12장 13-17절(다른 공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마지막에 다른 공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겹쳐진 공간. 상당히 이질적인 공간. 이질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눈에 띄는 공간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자기들과의 언약관계라 생각했습니다. 언약관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에게는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자기들하고 떨어져있으면 모세를 불러다가 돌판을 자기들에게 줄 리가 없다는 거예요. 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시내산으로 모세를 불러다가 모세를 통해서 돌판을 줬죠. 돌판이 깨지고 난 뒤에 또 하나님께서 돌판을 다시 새겼습니다. 새겨가지고 언약궤 안에 담아서, 언약궤를 가지고 레위인을 통해서 계속 동행케 했잖아요. 동행해서 어디에 멈췄는가 하면, 세겜에서 멈췄고, 세겜에 있던 그 언약궤는 블레셋에 돌아다니다가 어디에 도착했는가 하면 바로 다윗에게, 기럇여아림에 왔다가, 다윗이 여부스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그 성전 속에 언약궤가 있는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건 누가 봐도 뭡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연락하는 연락처, 연락사무소를 지상에다가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이거든요. 그러니까 성전이 깨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학개, 예레미야, 느헤미야, 스가랴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성전을 지으라고 했죠. 그럼 성전을 지으라고 할 때는 성전 건물만 지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전을 지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연락체제를 다시 한 번 허락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46년 동안 지었다가 다 못 지은 헤롯성전이 있잖아요. 예수님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헤롯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은 겁니다. 그 헤롯성전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지평적으로, 이렇게 2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거룩한 공간과 속된 공간이 수평적으로 분리돼요. 그래서 로마한테 압제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은 지역된 공간의 가치, 이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락처이죠. 연락체계, 연락구조를 자기들은 붙들고 있고 유지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로마한테 세금을 바칠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래서 그들은 예수 당신에게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해서 왔고, 시험하려고 온 거예요. 예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너희들에게 곤란한 문제는 너희들이 만들어놓고, 왜 거기에 나를 끼어 넣으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너희들의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난제로 받아주는 그 문제를 너희들 선에서 해결해야지 왜 나한테 끌고 오느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누구한테 뭘 내느냐?” “돈을 냅니다.” “자, 그럼 보자. 돈에 누구의 형상이 있지?” “황제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돈의 주인이 황제니까, 황제한테 줄 것은 주고 하나님한테 주면 되잖아.”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면 잘했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정상이다가 아닙니다. 너희들이 수평적인 인식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수평적인 사고방식가지고서는.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가 뭐였는가 하면 바로 존재라고 했죠. 그들은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있어서, 법을 가지고 마중 나와서 자기 존재로 이 법을 지키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이 십계명 주면서 지키라고, 하라고 하신 그 명령에 부합되는, 그러한 실천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만들어내신 그분만이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출제위원이 해답을 갖고 있어요. 근데 그 해답을 가지고 왔잖아요. 주님이 해답이잖아요. 주님이. 주님이 해답이라고요. 그러면 그들이 정말 언약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킨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실은 그들이 제대로 정상인이라면 누구를 영접하고 누구를 환영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시험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되죠.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자기 존재가 자기가 보기에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한국기독교도 그렇지만, 모든 교회사나 기독교 역사의 제일 큰 문제가 뭐냐 하면은, 예수 믿고 하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본인 자신이 예수 믿는 나에게 뭐가 문제가 있느냐 하는 이걸 생각을 안 해요.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었고, 뭐 성령 받으라고 해서 성령 받았고, 그럼 나에게 탓할 게 뭐가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누가? 나라는 존재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잖아요.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기전에 이 땅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말씀이 다 아버지의 뜻이 되는 겁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다 이루려고 오신 거예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왜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일어난 자연현상이죠. 현상이, 질서가 갑자기 꼬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의 공간, “이게 공간이야. 이게 현실이야.”라고 하는, 그 현실과 공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을 다 담을 수가 없어요.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성전도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를 담아둘 수가 없어요. 찢어진다는 것은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감당이 안 되니까. 감당이 안 돼요. 그럼 성전은 존재하죠. 기존의 모든 자연물도 존재하잖아요. 이 존재는 주님이 일으킨 이 언약사건을 다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언약이 진행되면,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언약사건으로 주어져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의 원천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46년 동안 성전을 지었을 때, 그걸 보고 제자들이 우와! 우와!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눈에 뭐가 보이느냐? 이게 보입니다. 그걸 헐어버리라. 그걸 며칠 만에? 3일 만에 다시 지을 것이다. 그래놓고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보니까 그게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자연도 예수님의 사건을 다 표현해 낼 수가 없어요. 감당이 안 돼요. 그러니까 꿈에 계시 받았느니, 꿈에 예수님을 봤다느니, 천국을 봤다느니 하는 그런 기적이 있잖아요. 그거는 다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건은 인간이 표현하는, 자연적인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그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가 없어요. 자기가 봤다는 그 본인이 죽어야 돼요. 내가 계시 받았다는 그 계시가 깨져야 돼요. 아들 바치고, 돈을 바치고, 십일조 했잖아요. 그 내가 죽어야 돼요. 십일조 내고서 주의 은혜를 받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냈다고 하는 그 나, 그 내가 자각되고 인식되는 순간, 순간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왜? 안다는 것이 죄가 돼버려요. 내가 헌금 냈다는 것, 그것도 의미 있는 행위를 했다는 그 자체가, 이게 내가 죄인이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사건이 나에게 존재 있게 다가오는 의미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너는 진작 죽어야 돼! 라는 그 의미 말고는 다른 의미를 우리한테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주님하고 함부로 같이 막 먹으려고 해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뭐, 친구라고 한다고 막 먹을 수 있는 친구인줄 알아요? 그럼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도들은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새롭게 사도들에게 일을 시킨 거예요. 사도의 존재보다 사도에게 주신 기능적 사명, 사명적기능이 사도의 존재보다 더 우선되는 겁니다. 죽을 때에도 그냥 못 죽어요. 사명을 감당하라는 차원에서 죽어줘야 해요. 자살하면 안 돼요. 누구처럼. 자살해서는 안 돼요. 죽는 것도 사명의 일부로서 죽어야 해요. 자기 맘대로 못 죽어요. 자기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그거는 주제 넘는 일이에요. “제가 죽을까요? 말까요?” 주님 앞에서는 니가 그런 질문을 할 그런 자격조차, 권리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이런 구시렁구시렁 댈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니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욥처럼 한번 당해봐! 욥처럼 한번 당해봐야, 아! 하고 재를 뒤집어쓰지.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할 말이 없다고 하겠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금 선풍기 돌아가는 것도 전부 다 사건이에요. 주께서 선풍기 돌아가게 하셔서 돌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손길입니다. 주님의 손길. 시편의 시인이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늘에 떠있는 별만 보지 말고, 별을 만드신 손가락도 같이 보라고요. 손가락이 있다는 것은, 별 자체, 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을 벌이시는 사건의 증거로서,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깔려있는 겁니다. 일종의 천장타일이죠. 천장의 도배지. 도배지에 있는 무늬에요. 무늬.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은 뭐냐 하면, 본인이 주인공이 된 공간입니다. 아까 제가 넓은 아빠 침대에서 두세 살 먹은 아이가, 그 나름대로 아빠의 이불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잖아요. 다들 그렇게 놀면서 커왔잖아요. 그렇게 놀면서.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사춘기에 접어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가게 되면 자기가 놀던 구역이 있잖아요. 놀던 구역. 친구들하고 담배 피우던 구역. 동네 한 가운데에 벤치가 있는 공원. 그게 자기의 나와바리에요. 자기의 구역이라고요. 그런 애들에게 해외여행 보내봐야, 해외가 내 세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돌아오게 되면 놀던 동네가 정겨워요. 여러분들도 초등학교시절의 꿈을 가끔 꾸죠? 꾸게 되면 그 놀았던 면적이 보통 몇 평쯤 되던가요? 뭐, 전 세계, 서울까지도 안 들어가죠. 고향동네 골목하고, 눈에 보이는 산등성이까지 안 가요. 산등성너머에서는 누가 오는가 하면, 오빠가 장날에 신발 사들고 오기 때문에. 내가 오빠 생각할 그 범위 내에요. 오빠생각 알죠? 장날에 신발 사들고 오는. 그래서 산등성이너머는 오빠가 오는 동네고, 그 동네까지 넘어가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몸 중심으로 자기 공간을 형성해나가요. 이것을 제가 수요일에 ‘자기조직화’라고 했습니다. 모든 유기체의 본능입니다. 아메바부터 모든 고정 식물까지, 세포는 전부 다 스스로 자기조직화를 해요. 백혈구가 왜 있습니까? 우리 몸을 지키는 자기조직화의 일부로서, 자기 면역체계로서 자기조직화가 있잖아요. 면역체가 깨지게 되면 드디어 암세포가 활성화된다 이 말이죠. 교회라고 할 때에, 사람들이 내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이유는 교회자체가 자기조직화를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서는 뭐가 나와야 합니까? 헤트로토포스, 이질적인 공간. 내가 형성한 모든 공간은 그 주인공이 누구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오류고, 그 자체가 악마의 통치를 받은 증거가 되거든요. 인간이 나에게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동안 꾸준하게 내 중심으로 살아와야 돼! 라는, 그런 악마의 심부름꾼으로 꾸준히 살아온 거예요. 복음은 다 튕겨버리고, 마귀 말이라고 하면 다 순종하는 이유가, 그 마귀가 사람을 좋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평소에 나라는 영역, 나와바리, 나의 세계가 나를 중앙에 두고 벌이는 하나의 소꿉놀이거든요. 그러한 성향, 바로 누가 시킨 겁니까? 바로 이 세상 신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마귀한테는 어떤 속성이 있느냐 하면은, 복음에 대해서 저항하는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심어줬어요. 십자가에 대해서 저항하는 거예요. “내 중심이 아니면 나한테 복음이야기를 하지 마세요.”라는, 그런 성향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 뭔가 수상한 교회에요. 수상한 교회.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마는, 사기 치지 않고서는 교회가 운영이 안 돼요. 분명히 이거는 마귀 편에 서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겁니다. 사람을 좋게 하지 않았는데 교회 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근데, 그러면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 교회가 교회를 가리고 있으니까, 기존교회를 치워버리면 그때 비로소 교회가 등장하죠. 근데 그 교회는 내 소유가 아니에요. 나라는 존재는 거기에 없어요. 나는 하나의 진짜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사건적인 기능으로서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그날로 마감이 되고, 그 다음 날이 되면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인생을 난도질하는 겁니다. 계속 끊어나가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광야 때 그 만나가 며칠 분의 양식이었습니까? 하루분이죠. 무슨 뜻입니까? 하루살이, 니는 하루만 살라는 거예요. 언약의 백성이라면 며칠 산다? 수명이 다 하루만 살아야 돼요. 단 하루만. 내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이게 언약적인 사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보면, 공간은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예수님 존재에서 나온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존재가 모든 존재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두 번째는, 있는 인간 존재로서는 언약사건이 아니고서는 자기 원천을 찾아갈 수가 없어요. 그럼 출발점부터가 뭐냐 하면, “나 여기 있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일 설교 끝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도 무슨 취급을 하는가 하면, 마치 먼지취급해서 장난이나 오락이라든지, 유희, 농담, 취미로 여겨요. 그래서 몸에 뭐가 묻으면 툭툭 털면 떨어지듯이, 백날 30년, 40년을 복음을 들어도 내 존재 안에 침투가 안 되면 그냥 지식이 되는 거예요. 침투가 안 되면 그냥 지식이 되는 거죠. 지식이야 딴 데 관심 둬버리면, 지식은 그 순간 다 떨어져나가요. 먼지처럼 다 떨어져나가요. 근데 성령이 온다는 것은 언약대로 오잖아요.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의 원천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제가 몇 번을 묻는데, 언약의 원천이 누구죠? 예수님 존재죠. 사건은 뭐냐, 예수님의 존재를 우리 내부, 우리 마음속까지 성령에 의해서 집어넣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새 언약의 기능입니다. 옛 언약은 말씀으로만 가까이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는 안 들어와요. 그런데 에스겔의 예언대로 마지막 언약은 우리가 거부할 수도 없이, 우리의 심령에 새 언약이, 심령 속에 새 언약의 돌판이 아예 장착을 해버려요. 하나의 반도체 칩처럼 심겨져버립니다. 그러면 내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이 우선이 되면서, 나라는 존재는 사건이 보여주는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허접한 육적인 본성을 마음껏 활용하시고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즐겁게, 기쁘게, 뭘 해도 막사는 것이 돼요. 막살라고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그냥 막살고 있어요. 제가 매직을 들고 있고 제가 주님이라면, 매직 이것이 일반성도라면, 위에서 매직을 막 흔들면 흔들리잖아요. 근데 주님 생각 안 하고, “요새 내가 왜 이렇게 흔들리지?”라고 하죠. 주님께서 흔들고 있으니까 흔들리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흔들리든 점잖든 간에, 뭐가 걸리든 관계없이 이것은 주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전립선이든 후립선이든, 뭐든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공간문제에요. 공간문제. 다른 공간으로 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 언약이 새로운 공간으로 왔습니다. 새로운 공간이 있고, 이 공간은 아무리 인간이 찾아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모든 것에 이 다른 공간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 없어요. 그러나 사건이 오게 되면 나는 이미 그 공간의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속, 소속이 되면 여기서 소속에 대한 증명이 나오죠. 제가 지난주일 오후에 시편 65편 4절의 말씀을 이야기했죠. 이미 성도는 성전의 뜰에 들어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전의 뜰. 성전의 뜰에 들어간 순간, 내 인생은 어떻고 내 몸은 어떻고, 이게 아니라 “여기가 어디지?”라는 새로운 공간이 느껴지죠. 새로운 공간이. 그 공간은 주님이 계시는 전의 뜰이에요. 우리 보통 가정집에서도 자기의 뜰을 누구한테 함부로 안 보여주잖아요. 문 닫고 뜰까지 인도받는다는 것은, 내 식구다, 라고 할 때만 가능한 거예요. 그렇게 식구가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서 다른 공간,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보는 공간을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로마서 1장 24절에 의하면 내어버림을 당한 겁니다. 내어버림을 당한 것. 동성애하는 자, 내어버림을 당한 거예요. 우상섬기는 자, 내어버림을 당한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주의 뜰에 초대를 안 받은 거예요. 이 사람들한테는 초대장이 안 간 거예요. 손잡고, 이곳까지, 주의 뜰에, 확정된 장소거든요. 최종장소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떠날 일이 없는, 완전히 그 집안, 하늘나라의 패밀리에요. 마태복음 12장 47절에서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한 식구가 돼버렸어요. 그것을 하늘에 있다고 봅시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하늘에 있다고 보고 그 다음에 저 지상세계를 내려다보자 이 말이죠. 그들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두 개의 공간을 생각 못해요. 하나의 공간만 생각하잖아요. 하나의 공간만. 전에 대전강의 할 때 중첩된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골로새서 강의할 때 중첩된 공간이라고 했죠. 중층현실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죠. 수직적으로 우리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말은, 생명 쪽에서 내려다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다툼이라고 하죠. 아귀다툼(서로 악과 기를 쓰며 헐뜯고 사납게 다툼), 서로 살아보려고. 왜? 그들의 보는 현실에는 이 하늘의 공간이 안 보여요. 사나죽으나 자기존재 중심의 공간만 눈에 보이잖아요. 거기서 승부를 하고, 싸우고, 경쟁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들의 논리에 대해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그들이 백날 논리를 벌여봐야 딱 한 논리로 정립이 됩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적어봅니다. 인간의 모든 심보는 딱 요걸로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첫 번째는 찼느냐, 두 번째는 차였느냐, 깠느냐, 까였느냐, 이것뿐이에요. 찬사람 트럼프고 차인사람 김정은이에요. 모든 논리가 차이는 순간에도 내가 찼다고 할 때는 견딜만합니다. 내가 찼으니까. 이 정도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에요. 자기존재중심. 어떤 검사가 있는데, 검사가 선을 보는데, 검사니까, 강남에서 중매가 오죽 많이 들어옵니까? 바보 같은 남자하고 선을 보는데, 좀 티 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나중에 맘에 안 들어서 가려고하니까, 남자 쪽 엄마가 와가지고, 검사 며느리 보려고 한 그 여자한테 와가지고, 돈 30억을 내주면서, “이거 받고 결혼해라.” 물론 드라마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자, 여기서 이 원리를 해봅시다. 뭐가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 하면은, 30억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30억보다 내가 깠다는 것이 더 중요해요. 내가 깠다. 30억보다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해요. 나중에 30억을 받더라도 일단 까야 돼요. 차버려야 하는 겁니다. 한진 그룹을 그렇게 욕하지만, 한진 그룹을 지탱하는 여자 이명희, 조현아, 조현민, 그 집안의 자존심은 뭐냐 하면, 화분 던지고, 과일 던지고, 서류 던지고, 그들 쪽에서 깠다는 차원에서 그들은 어떤 처분을 봤더라도 신나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리 보상을 받아도 땅콩회항은 까인 거예요. 안 까이면서 까는 재미로 가는 것은 한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뭐냐 하면, 공무원 되는 거예요. 직장생활하면서 월급이 문제가 아니고, 까는 쪽에 내가 속하는 거예요. 공무원 그것도 권력이라고. 까는 쪽에 속하는 이게 바로 공무원이에요. 공시준비생 무려 44만이에요. 뭐 기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사람은 까는 재미로 살았어요. 월급 줘도 부목사를 왜 싫어하느냐, 부목사보다 선교사를 더 좋아하느냐, 부목사는 까이는 자리고 선교사는 까는 자리에요. 교인수가 몇 명 안 돼도 까는 재미로 살아요. 까는 재미. 아무리 시집에서 잘 해줘도 독립해야 되는 이유는, 독자적인 내 중심이거든요. 공간이, 예수님의 공간은 다른 공간입니다.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자기절대화 때문에 남을 차는 것입니다. 이 차는 것에 대해서, 모든 인간에 차이신 분이 누굽니까? 우리 예수님 아닙니까? 근데 성경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까였다고도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은 나한테 버림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어요. 가만두어라!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판유리 이야기했잖아요. 판유리로 수족관을 쭉 내려 보는 거예요. 원래 횟집에 가면 수족관이 길쭉하잖아요. 이 수족관의 규격에 판유리를 맞춰서 내리꽂아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고기들이 그 판유리 밑에서 뽀글뽀글하면서 발버둥치는 것이 다 보이겠죠. 그들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은, 자기존재를 천국에 올려놓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인간+신, 이라고 했죠. 인간 플러스 신, 이 자체가 오류가 있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섬겨야 돼! 말씀을 들어야 돼! 이 자체가 바로 악마적인 발상이라니까요. 악마적인 발상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도 존재고, 존재에서 발생한 신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처럼. 신 존재 증명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존재를 잘 사귀는 이것이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이걸 사람들이 현실로 보고, 이게 현실의 전부로 보는 겁니다. 이게 기존의 인간의 공간개념이에요. 자기중심의 공간개념입니다. 내려다보는 것이 없어요. 정말 주님의 뜰에 있고, 십자가 안에 있다면 이미 초대받은 거예요. 이 초대를 받은 순간, 버림받았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순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 버림받았는가를 자기가 부름 받을 때, 주님에 의해서 부름 받을 때 아는 거예요. 부름 받는다는 것은 어디서 어디까지냐 하면 기존의 공간에서 내가 몰랐던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하잖아요. 이게 구약에서는 수평적으로 이루어졌어요. 구약에서는 그들이 어디에 살았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았잖아요. 애굽에 살다가 어디로 갔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죠. 수평적으로 공간이동이죠. 공간이동인데, 중간에 뭐가 있었습니까? 광야가 있었습니다. 광야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광야에 있다 보니까 무려 열 번이나 주님 앞에 대들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서, 그 지도자가 어디로 가고자 하냐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겁니다. 애굽으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그 인간이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그 인간이나, 사실은 따지고 보면 같은 무대에요. 저쪽 남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가나 전부 다 수평적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들어갔던 그 이스라엘나라가 나중에 결국에는 망했잖아요. 망했다 이 말이죠. 그들은 일종의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연극에 참여한 거예요. 모세 같은 경우에는 느보산에서 저 멀리 봤어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봤는데, 본인은 못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예수님과 변화산에 함께 있죠. 수평적으로 못 들어갔는데, 수직적인 헤트로토포스, 낯선 공간에는 모세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그러면 결국 모세의 인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가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는 기능을 펼쳐보였던 사람입니다. 모세의 존재라는 것은 진짜 존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주님이 해야 될 일을 먼저 보여준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모세의 기능이나 우리의 기능이나 동일한 기능이에요. 우리는 이 땅의 방랑자입니다. 방랑자. 기타 치면서 방랑자여~ 방랑자여~♬ 방랑자입니다. 방랑자는 자기 존재가 머물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살려주는 것도 주께서 살려줘요. 있을 때까지만 있으라고 할 뿐입니다. 기능이니까. 그럼 방랑자의 모델이 뭐냐, 방랑자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원천이고 모든 존재는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나올 때 예수님 존재와 예수님 사이의 사건이고, 그 사건은 무슨 사건입니까? 두 글자로 언약사건이죠. 예수님께서 언약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 새로운 공간에 인간은 존재로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못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죠. 예수님의 언약사건의 혜택을 입어야 들어가지, 언약사건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가 봤자 자기 존재를 가지고 그냥 들어간 셈이 되기 때문에, 들어가 봤자 자기 세계의 공간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간 셈이 되기 때문에, 이거는 하늘나라 공간에서 안 받아주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받아줬습니까? 안 받아줬습니까? 안 받아주죠. 베드로의 목숨을 안 받아준다는 것은 아예 안 받아준다는 거예요. 아예 하늘나라에는 베드로의 목숨의 의미를 담는 자리는 베드로의 자리가 아니에요. 내가 목숨 바쳤다는 그 의미를 살리는 그런 자리는, 하늘나라에는 아예 없는 자리에요.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서 죽었다는 그 의미만 있어야 하는 자리지, 내가 내 구원에 기여했다, 보탬이 되었다는 그것을 살려주는 자리는 아예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그럼 목숨 바쳐도 못 간다는 말은, 아예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이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에요. 천국은 뭐냐 하면 기존의 인간 존재가 연상해서, 상상해서 만들어낸 공간일 뿐이에요. 가짜죠. 허구입니다. 그런 천국 없어요. 천국은 다른 공간이라니까요. 없는 데라니까요. 애가 아빠의 이불을 가지고 여기는 산골짜기고, 여기는 냇가고, 여긴 집이고 하고 있는데, 아빠가 “야! 뭐하노?”라고 보면, 애가 느껴지는 그 공간이 아빠한테는 느껴집니까? 안 느껴집니까? 안 느껴지죠. 심술궂은 아빠는 어떻게 합니까? 발로 이불을 뭉개버리죠. “빨리 가서 자!” 돋우어놓은 산과 골짜기를 발가지고 뭉개고 발로 툭 차죠. 그런 경우를 어릴 때 많이 당했죠. 오빠나 누나가 와가지고, “공부 안 하고 뭐하노?”라고 하면서 실컷 모래성을 쌓아놓은 것을 발로 차가지고 부숴놓는 것을 봤죠. 인간들이 볼 때는, 자기존재로 볼 때는 그 공간은 없는 공간이라니까요. 사도바울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미친 거예요. 미친 것. 미친 거라니까요. “죽어서 가겠지.”라고 한 것은 마르다 마리아가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 믿으면 죽어서 가겠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빠 나사로는 마르다 마리아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 가있는 거예요. 죽어서 간다는 그런 안목으로 백날 보면 무덤에 가있지 다른 공간에 가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기존의 인간 공간에서는 나흘이 되면 썩기 시작해서 냄새가나요. 기존의 공간에서는 무덤에다가 돌문을 해놓고.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기존의 공간에, 죽었는데, 제대했는데, 입대해서 다시 등장한 겁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가지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보는 예수님의 존재 모습이 있잖아요. 눈 있고 코 있는 존재모습. 예수님의 몸이 지금 다른 공간의 다른 사건을 유발하면서,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공간을 몰고 사람들과 제자들 앞에 등장한 거예요. 근데 제자들이 알아먹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먹어요. 아무도. 다른 공간이 중첩되었다는 이런 뜻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바리새인이 와서 하는 말이 세금을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드신 것은 언약적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는 이미 완성이에요. 완성한 거예요. 완성하게 되면 세금을 누구한테 내는 것이 아니에요. 세금을 누구한테 바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누구한테 낼까요? 했죠. 이거는 로마황제한테 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한테 내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께 내서 그들이 구원받습니까? 헌금내서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에요. 하나님은 제물을 안 받아요. 니가 제물이 되기 원해요. 니가. 니가 제물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한심령이 아니기 때문에 받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죠. 그래서 짝을 이루어야 돼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흠 없는 제물이 되셔서, 그냥 예수님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상한심령 된 자기 백성을 껴안고 드리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물이라는 것을 증거 하게 되는 증거용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한평생이 예수님만이 흠 없는 제물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상한심령인 채 우리는 평생을 돌아다녀야 하는 겁니다. 이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우리가 하는데 있어서. 이거 쉬워요? 어려워요? 쉬워요. 그냥 살던 대로 막살면 되잖아요. 막사는 것도 힘들어요?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상한심령이니까. 이것보다 더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는 혼자서 사니까 문제인데, 주님과 함께 있으면 쉬운 정도가 아니죠. 주님께 그냥 맡기면 되죠. 아까 로마서 1장 24절에서 ‘내어버려 두사’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주의 뜰 안에 있는 구원받은 사람이 보기에는, 주님께서 그냥 방치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해요. 방치한다는 말은, 방치되지 않고 주께서 거둬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예요. 내 백성은. 그러면 여기서 뭐가 떨어져 나갑니까? 주님의 선택이 우리보다 우선이 된다면 뭐가 떨어져 나가느냐 하면, 나의 결심, 나의 선택, 나의 행위는 의미 있어요? 의미 없어요? 전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참 훌륭하시고 참되신 분이시여, 당신은 외모를 보지 않고 아무라도 꺼리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해놓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자기들이 평소에 했던 대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라고 예수님한테 물은 겁니다. 물으니까, 이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공간에 속해서, 자기존재입장에서 그렇게 묻는 그 물음에, 예수님 이외에 모든 교인들은 다 말려든 거예요. 모든 신학자들과 교회목사들, 교인들은 다 말려든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아, 고민된다. 어떡하면 되지?’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고 가이사에게는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래, 세금도 내고 십일조도 하면, 이러면 아버지의 뜻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다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렇게 해석 안 합니까? 성도라면 바칠 자에게는 바치고, 또 로마서 13장까지 거론해가면서, 세금 바칠 것은 바치고 또 교회내야 될 것은 교회에 내야 되고. 그러면 이것은 뭐와 같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취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류類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내어버림을 당한 사람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한다고, 마가복음 12장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자, 그러면 더 나가봅시다. 그들이 세상에 바칠 것은 바치고 주님께 바칠 것을 바치면, 그것이 하나로 잘 조화롭게 통일이 됩니까? 안 됩니까? 통일이 안 되죠.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이니까 내는 것은 껄끄럽지 않지만, 만약에 내가 북한주민을 위해서 내야 된다면, 만약에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세금을 낸다는 것이 마음속에서 꺼림칙하고 내기가 싫죠.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어디서 양아치들이 와서 자릿세라고 한다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돼.’라고 내면서도 마음이 시원하지를 않죠. 그래도 뭐, 나는 주님이 세금 내라는 대로 나는 세금 바쳤으니까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억지로 자기정당성을 챙기려고 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에서 내분이, 지금 갈라지는 거예요. 뭔가 하나가 안 되고 점점 더 갈라지고 찢어지는 거예요. 마음이 그렇게 분열된다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에요? 왜 그렇게 억지로 세금내고 억지로 하는 것을 구라치는가? 그 목적이 뭡니까? 그 목적이. 주의 뜻대로 지키면 나라는 존재를 어디에 보내준다? 천국 보내주겠지. 참자! 참자! 이런 식이에요. 근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똑같은 식이라니까요. 이게. 낸다는 것 자체가, 사람은 내게 되면 자기행동의 결정을 주시하게 되어 있고 기억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낼 것 냈다. 십일조 냈다. 뭐 냈다. 낸다는 것 자체가, 그 행위가 나오게 되는 내 존재를 점점 더, 더욱더, 깊이 새기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50년 동안 십일조를 냈다든지, 60년 동안 모태신앙이라든지, 차라리 어릴 때 유아세례를 안 받았으면 그런 소리를 안 할 텐데, 뭔가 받은 게 있으니까 그 받은 것을 첨부해서 내 존재는 적어도 모태신앙이다.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이거 모태솔로가 돼야 돼. 모태신앙이다. 무슨 훈장처럼 이러고 있는 거예요. 마치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깡패가 와서 돈 내라고 할 때는, 그것은 주께서 보내신 깡패십니다. 주께서 보낸 깡패에요. 그 깡패한테 돈을 내면서, ‘더러워서 이 세상 안 살란다.’라는 마음을 가지셔야 돼요. 돈을 내든지, 안 내겠다고 더 버티다가 얻어맞아서 치료비가 더 나가든지, 그래도 인간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내가 돈 달라고 해서 돈 준 게 아니고, 십만 원 달라고 했는데 오만 원 줬다. 오만 원은 내가 찼다.’ 그렇게 다 비굴하게 살아놓고서도 끝에 가서는 꼭 하는 말이, ‘그래도 나는 진정한 마음은 아니었어. 억지였지. 내 쪽에서 깠어.’ 그것만은 기어이 쥐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상해도 너무 상한, 상한심령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냉장고에 안 넣어서 바깥에 둔 음식 신 것 있잖아요. 신 냄새나는 아주 시어빠진, 썩어빠진, 갈수록 우리 마음이 점점 시어져가요. 우리는 썩어빠졌어요. 젊을 때는 뭐 국가번영을 생각하다가 취직하고 난 뒤에는, 인턴생활 할 때는 아무소리 안 합니다. “그냥 무슨 일이든 주저하지 않고 다 받겠습니다.”하죠. 그리고 면접 볼 때도, “그저 이 회사가 나를 뽑아주시면 이 회사가 이익이 있느냐, 손해가 있느냐, 그것만 생각하고 나는 이 회사에 원서를 냈습니다. 나를 기계로 사용하시려면 주저 말고 기계로 사용해주소서.” 이런 마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회사도 그런 사람을 뽑고. 두말하지 않고요. BBQ인지 어디서 뭘 해도, 떼먹더라도 대리점 이것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닭 팔아서 다 드리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면 넣어주지를 않아요. 노사협력? 똑같은 괴물끼리 협력해서 뭐합니까? 요새는 뭐 협동조합도 새로운 경쟁으로 등장해서 한다고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돈의 모습이 누구냐? 황제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게 다예요. 주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주님의 세상으로 안 보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내 존재처럼 생긴 존재, 그것을 의식하는 것밖에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런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시체가 돼야 해요. 이미 죽은 채로 살아왔다는 것. 그 버림받은 자를 십자가 피로, 주의 새로운 다른 공간에 넣어줬으니까, 이제는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 우리 육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마음껏 보여주면서 남은 세월을 살 수밖에 없어요. “아, 내 육신이라는 것이 이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가로막는구나!” 이것을 충분하게 보여주도록, 그래서 니 같은 죄인을 구원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도록,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기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핑계도 많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한계는 이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자기 잘난 맛을 따로 챙기는 우리의 어설픔을 주께서는 질책해주시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된 우리가 주께서 십자가 피로 이미 구원해내신 그 은혜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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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7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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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