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료자 (마 24장 40절-51절) 대전- 99강
완료자 (마 24장 40절-51절)
대전- 99강
이근호
2018년 4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40-51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마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마 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 24: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 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4장 40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 데려 갈 사람은 섞어 놓지 말고 아예 분리 시켜 놓으면 좋은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데려가지 않음을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데려가기 전에 그 줄의 차이를 비교해 봐라! 차이가 있던가요? 없어요. 왜 사람은 육이니까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배 고푼데 무슨 장사 있습니까? 돈 없는데 신날 위인 없어요. 남들 돈 좋아한다고 말하는 본인은 돈 안 좋아하나요? 누구나 마찬가지잖아요. 여유가 있으니까 구제도 하지 여유 없어보세요. 구제도 사치입니다.
허세지요. 남자들의 약점이 뭐냐하면 허풍, 허세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허세 때문에 인생 완전히 망치잖아요. 허세는 누구를 의식 하냐하면 타인을 의식해요. (본문) 친구야 같이 가자는 겁니다. 외로우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나는 이 세상이 좋다는 식이죠. 따라서 두 사람이 밭을 그냥 갈아요. 한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밥 없이 산다가 아닙니다. 그냥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 지옥 가는 한사람은 검게 표시하고 천국 가는 한 사람은 희게 표시 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안목이고 본인들은 구분을 합니까? 못합니까? 못해요.
만약 교회에서라면 둘 다 하얗다고 착각하고 살거란 말이에요. 둘 다 시커먼데 둘 다 하얗다고 착각하는 거에요. 둘 다 못가는 데 난 너하고는 다르다고 하면서 마태복음 24장 40절을 자기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봐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 중에 가는 사람이 당신은 아니야! 라고 누구나 일방적으로 우길 수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인간은 누구 중심이라 했습니까? 나를 위하여, 이것부터 우리가 잘못된 거에요. 성경은 나를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 주신 말씀이에요. 성경은.
말씀은 누가 만들었냐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가 말씀 만들은 것을 성경에선 뭐라고 하냐하면 언약이라고 합니다. 무슨 언약? 창세 전 언약이에요. 창세전에 언약을 구상하신 예수님과 아버지, 즉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영원히 맺어진 약속 또는 영원히 확정 나버린 약속, 이것을 굳히기, 영원히 굳혀진 언약이죠. 영원한 언약 이것을 후발대에 나타난 인간으로 수정 될까요? 안 될까요? 수정 안 됩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들 때 첫째 날 만들지 않고 언제 만들었어요? 다 만들어 놓고 심히 보기 좋았더라는 구조는 이미 확정난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원리만 있다면 하나님께선 토 달지 않아요. 언약을 보고 하나님께선 기뻐하시니까 그런데 언약을 도중에 인간이 끊지 않았어요. 누가 끊었냐하면 마귀인 뱀이 와서 끊어버리지요. 선악과 따먹게 해서 끊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사람이 성경을 보고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경우를 갖고 매도해야 되요. 특정 몇몇 사람에게는 해당되고 몇몇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진리이다라고 하면 안되요.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적용되는 원리로 이야기를 해줘야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죽음,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죽는 이유가 있지요? 죽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세포가 죽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죄의 값은 사망이에요. 죄 때문에 죽는 거에요. 아까 여기 오는 도중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나는 희미하게 아는데 목사님은 뚜렷하게 아시지요? 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변했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최종적인 것이다. 바로가나 질러가나 이미 최종적으로 당겨서 다 아는 거에요. 잘난 국회의원이나 목사나 관계없이 십자가 앞에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에요.
희미하게 알든 뚜렷하게 알든 이미 최종적인 거에요. 그 최종적인 것이 뭐로 나타나냐 하면 결국 흙이 된다는 사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던 마리아 마르다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젊은 오빠가 죽었어요. 죽잖아요. 예수님을 섬겨도 죽어요. 정성껏 섬겨도, 순수하게 섬겨도 죽고요 왜 순수하게 섬기는데도 죽습니까? 안 죽는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원칙을 적용하는데 아까 말했듯이 창세 전에 인간을 만들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약속은 지상을 통해서 구체화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집요한 의지입니다. 이 의지를 누가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바꿔요?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하시는 게 아니라 언약을 앞장 세워요. 그냥 모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하나님, 언약인데 예전에 구약, 지금은 새 언약이죠. 새 언약의 구체화가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을 세우리니 이게 바로 십자가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서 다 이룬거에요. 같이 죽자는 겁니다. 언젠가는 죽지만 그냥 죽으면 그냥 죽는거지만 나와 함께 죽으면 영생이다. 이 나사로야! 그래서 나사로를 죽여 버린 거에요. 그런데 오빠가 죽으니 동생들이 난리도 아니지요. 이렇게 섭섭하게 하실 줄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안 섬길텐데라고 나올 수도 있고.
그렇게 잘 섬겼는데 죽였습니다. 예수 잘 믿는 집안이 몽땅 세월호에 빠져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사흘 만에 살려내지요. 여러분! 나흘 만에 살려내야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오일만에 살려내야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사로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최종적입니다. 언약 안에서,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죽어 사흘 만에 안 살아나도 2650년 만에 살아나도 살아난다는 것은 인 거에요. 지상의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흘 만엔 되고 일주일 만엔 안되는 믿음 없는 거에요? 그런 거 없어요. 최종적인 것이 우리 안에 있어야 되는 거에요.
아까 시간에 이것을 안정성이라 했지요. 이것을 요번 시간엔 언약, 최종적인 것이 언약.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뜻이 우리 몸을 통해서 왜 최종적인 것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달리 말하면 왜 다 이루었다는 것이 진짜 다 이루심인가를 우리를 통해 보여주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일은 미완료가 되겠지요? 미완료 속에 완료가 삽입되어 있으면 비교가 되지요. 미완료와 완료엔 어떤 차이가 나서 한쪽은 미완료이고 한쪽은 완료일까?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완료이고 내가 예수님 말씀을 순종해서 하려 하니까, 내가가 들어가니까 미완료가 되는 거에요.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선교하고 내가 예배하고 내가 교회가고 이러니까 뭘해도 미완료가 되는 거에요. 이런 것은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되고 아무 소용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지요.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무엇과 무엇을 대비하면서 완료를 증거하느냐 하면 나의 미완료성이 완료를 부각시키는데 필수 요건이 되는 겁니다. 예전 70년대에 유행한 노래가 있는데 딕 훼밀리의 나는 못난이,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근 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가봐~ 설레이며 말 못하는 나의 마음을 용기 없는 못난이라 놀리는가봐 라라라라 라라라라라~
나는 못난이에요. 자기 자랑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할 게 있어야 자랑하지요. 나는 못난이이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공식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방정식에 나는 잘났다가 들어갔다 나오니까 나는 못난이가 되어 버렸어요. 자기 자랑만 하다가 못난이가 나오는 거에요. 바라기는 한 달 수입이 한 2천만 원쯤 되는 못난이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왕 못난 것. (웃음) 어쨌든 언약이 어디서 빠져 나오는 가를 추적해 봐야 되요. 아까 언약은 완료라고 했지요. 언약은 어디서 빠져 나오냐 하면 미완료에서 빠져 나와요.
미완료에서 언약이 빠져 나오면서 언약이 완료이고 우리는 미완료에요. 그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사도행전 4장12절. 주의 이름으로 완료한다는 것은 무엇과 대조되냐 하면 나의 행함의 어설품이거든요. 여기서 문제 하나 낼께요. 나의 이름으로 구원 받습니까? 받을 수 없습니까? 없습니다. 신앙인 같으면 나는 주님을 안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요. 왜요 나부터 출발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선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믿음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믿음이고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내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이 다툼이 일어나면서 누가 더 우세하냐? 예수님의 믿음이 우세함으로서 내 믿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성도는 알아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산이 뽑혀 바다에 옮기는 것이 어려울까요? 내 죄가 없어지고 천국 가는 것이 어려울까요?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다시 말해서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내 죄가 없어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죄가 없어지는 것이 어렵지요. 중풍병자가 걷는 것이 어려울까요? 죄가 사해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죄가 사해지는 것이 어려워요. 중풍병자가 건강하게 되면 여전히 뭐가 부각됩니까?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 정도로 건강하게 됐어! 나 얕보지마!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야! 이렇게 될 것이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죄인에서 죄 사함을 받아 버리면 죄를 사하신 예수님이 부각되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됩니까? 죄인으로 나는 못난이하며 천하의 죄인으로 사는 것이 즐거워요. 죄인의 헌금을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죄인의 기도를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받으실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감사하지요. 죄인이 하루에 성경 석장씩 보기도 안 받지요. 안 받는 거에요.
예를 들어 설날에 할아버지를 모독하는 손자의 행위는 간단합니다. 할아버지가 세뱃돈 오 만원을 주잖아요. 주는 그 자리에서 애가 그것을 보고 만원 하나를 할아버지에게 줄 때 이건 할아버지의 수염을 당기는 것보다 더 모욕적이에요. 주면 주는 대로 다 갖고 있지 왜 거기서 만원을 빼서 도로 줍니까? 너만 주나 나도 준다 이런 겁니까? (웃음) 맞먹자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하고 우리가 막가자는 이야기에요? 내 일이 성사가 되어서 감사 헌금 드린다고요? 뭐에요? 그게, 이 정도로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이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에요.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하나님은 (인간의)어떤 것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주시는 분이다.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다. 받는 건 교회목사나 좋아하지 주님은 안 좋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안경이며 시계나 손에 손톱이며 털 하나까지 전부 주의 것입니다. 주의 것이에요. 내 것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 몸으로 어떻게 영광을 돌리느냐? 내 것 아님을 아는 것이 주께 영광입니다. 왜 믿음이 없이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란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치명적인 죄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이것이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겁니다.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교회에 돈 갖다 바친다고 영광 되는 게 아니고 자기 주제 파악을 하는 거에요. 은혜 받고 돌아서면 또 내 것 챙기고 남에게 안 지려고 하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답게 살려고 하고 이런 모든 기준은 어디서 온 거에요?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까? 언약입니까? 아니에요. 미완료에서 왔어요. 내가 세상에 나아가 사람답게 산다? 이건 누가 요구한 거에요. 난 사람답게 살겠다. 남에게 기죽지 않고 살겠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심어주었어요? 바로 외부 인들입니다. 살아가며 만났던 모든 사람들. 살살 약을 올렸어요. 너는 이 정도 되야 돼! 그래야 너다워! 그러니까 이것이 인생의 보람이 되고 목표가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추하게 살기 싫다에요. 남자나 여자나 쫙 자크 열어 보면 이거 하나 들어 있어요. 추하면 어떻게 사나? 추하면 대안이 있지요. 자살. 추하게 사느니 차라리 농약 먹고 죽지! 요새 농약은 냄새 많이 나는 것을 넣는데요. 하도 농약으로 사람이 죽어서 못 먹게 냄새 많이 나도록 만들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간단해요. 나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살아 왔어요? 너나 내나 다 건들 였어요. 심지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잖아요. 살해당한 거에요. 어두운 세상에 구멍이 하나 났어요. 이것을 개구멍이라 표현 했는데 같은 말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빠져 나가시면서 십자가를 남겼거든요. 좁은 길을 남겼습니다. 요 개구멍으로 가야 주님을 만나요. 천국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추하게 살기 싫어해요. 고집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본성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안 고쳐요. 못 고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냐하면 40-41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작업을 어떻게 하냐하면 미리 하는데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두 사람이 있으면 나란히 놓고 보면 서로 잘났다고 해서 (대상)이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두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이 제시 되요. 이것이 신약에 오순절 날 예수님의 영이 와요. 성령이라고 해도 괜찮고 이 멘트를 날린 예수님이 미리 성령으로 와줘 버려요. 성령은 일방적으로 왔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하면 기도 빡세게 했더니 왔구나가 아니라 “저 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2장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여기에서 꿈을 꾼다는 것은 잠들기 전이 미리 꿈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잠을 잔다는 것은 의식을 놓아 버린 거에요. 그러면 뭐가 작용합니까?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조작하거나 편집 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런 가운데 뭐가 와요? 일방적으로 꿈을 꾸지요. 요셉이 꿈을 꿀 때 본인이 내용을 미리 작성했습니까? 없지요. 일방적이죠. 일방적으로 미완료에게 완료가 쳐들어 온 셈이에요.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을 안 받고 받은 티를 내는 사람은 그 이유를 본인이 행함에서 만들어 내요. 열심히 기도를 했다든지 착한 일을 했다든지 헌신한다고 작심을 했더니 성령이 왔다든지 순서대로 물로 세례받고 회개하니까 성령 받았다고 뭔가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왜 이래요? 주님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이럴려고 성령 받았습니까? 왜 그래요? 그냥 나 두세요. 주님께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게 두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두 사람이 밭을 갈 때 침착하게 꿇어 앉아 가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아니지요. 그냥 밭을 갈아요. 이 말은 둘 다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 그 결과를 만든 원인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데 미리 성령이 와 버릴 때 아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확정된 언약을 우리가 하나의 도화지로 여기면 언약의 물감으로 우리에게 채색을 합겁니다.
색칠하면 우리는 죄인이 되고 거기에서 피가 나오고 죄인과 예수님의 의 또는 희생의 만남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실 수 있고 더 좋은 교훈을 (산상설교)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처럼 베드로도 물위를 걸었지만 그것이 완성이 아니에요. 우리가 배고파서 오병이어에서 떡을 주고 귀신을 쫓아주고 그런 것이 언약이었습니까? 오병이어가 완성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귀신 쫓아 낸 것이 언약이 아니지요. 언약은 내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느니라가 언약이라는 말이지요.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예수님도 멀쩡하고 우리도 멀쩡하잖아요.
예수님이 떡을 주면 예수님도 멀쩡하고 떡을 먹는 우리도 멀쩡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도 망가지고 우리도 망가지고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졌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윗의 말처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고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졌고 망가진 것을 주께서 같이 망가졌다는 동질성으로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서 더러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거에요. 그 관계를 의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가 의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 된 것을 의라고 해요. 사랑이라고도 하고 첫 째 시간에는 해일 파도라고 했어요. 큰 쓰나미처럼 덮쳐버리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를 덮쳐버리는 겁니다. 덮치니까 우리에게 형편이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거에요? 아니지요. 갑자기 성령 받으니까 밭을 갈다가 이제 안 갈아도 되요? 아니에요. 밭을 갈다가 성령이 오니까 호미 놔두면 밥벌이가 됩니까? 아니지요. 전혀 다를 바 없이 동일한데 성령 받았다는 것과 성령 안 받았다는 것의 차이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끝.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주님 아니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먼저 마태복음 24장에서 이야기 한 겁니다. 40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라고 하니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우리 같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내 중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했으니까 밭 한 세 번 갈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했으니까 눈 부릅뜨고 안 졸아야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어요? 아니지요. 성경 말씀은 죄인을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너는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가 분명해 져요. 로마서 3장 19-20절이지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더욱 더 저주 아래 있게 한다. 입을 막고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미세먼지에 쓴 마스크가 생각나는데,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나불나불 대다가 말씀 앞에서 침묵해요. 할 말이 없어요. 욥같이 재를 뒤 집어 쓰고 할 말을 못해요. 무슨 말을 합니까? 새벽 기도에 나와서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땅을 치고 통곡하고 “주여! 이럴 수 있습니까? 제가 십일조를 한번 빠뜨린 적이 있습니까? ”하다 성령이 와버리니까 어떻게 해요? 은혜를 받으니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보니까 자리에 침도 튀고 눈물도 고이고 바닥에 많이도 흘려 놨는데 내가 지금 무엇이 그리 분통해서 햇빛주고 은혜주고 지금까지 밥 먹여 살려 줬어~살이 쪄 다이어트해야 되 너무 맛있는 것을 많이 주셔서 거기에 가물다고 단비까지 내려줬어~
게다가 밤에 별까지 반짝반짝 빛나~ 도대체 뭐가 그리 성질나서 주님 앞에 항의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감사는 못하고 땅은 왜 쳤지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욕심을 잉태하여 죄를 낳는 것처럼 태어 날 때부터 고질병이라 못 고칩니다. 은혜 받았다고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죽을 때 까지 이 짓하고 있는 거에요. 나 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을, 미완료인데 완료(다 이루었다)가 같이 겹쳐 가는 거에요. 과자 웨하스나 샌드위치, 햄버거처럼 겹치는 거에요. 밑에는 미완료, 위에는 완료. 레슬링에서 한 사람은 밑에 누워 있고 한 사람은 그 위에 엎어져 있으면 심판이 바닥을 막 치지요. 끝났다고, 끝났어요.
주님은 십자가로 덮고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피로 덮고 우리는 깔려서 죄인되고 성령께선 옆에서 끝났어! 다 끝났어라고 선언해 버리시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입니다. 엘리야하고 주님과 모세가 변화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누가복음 9장에도 나오지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그들과 죽음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죽어야 죄인이 구원받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죽나? 죄 값으로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 이 가져가신 죄 속에 누구의 죄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까? 모세, 엘리야의 죄가 들어있다는 것이고 모세 엘리야가 선지자 노릇 한 것도 주님 앞에선 뭐가 되요? 죄를 죄 되기 위해 그 일을 하신 거에요.
구약에 보면 모세나 엘리야가 대단한 사람 같아요. 마치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사람 같아 보여요. 손양원 목사나 주기철 목사나 한경직 목사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부각되어 있잖아요. 천하의 죄인을 사람들이 영웅으로 만들어 놨어요. 왜? 눈에 보이니까. 제가 이스라엘에 가 보니까 다윗과 아브라함을 영웅으로 만들어 놨어요. 다윗과 아브라함이 대단해요. 가묘까지 시온산에 만들어 놓을 정도로 대단해요. 유대인들이 다윗을 섬기고 아브라함을 섬겼습니다. 완전히 예수님을 개 취급해요. 예수님을 사람 취급도 안해요.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데도 성령을 안 받으니까 십자가를 모르는 거에요.
개신교도 마찬가지이고요. 십자가를 몰라요. 그저 교회만 붙들고 있지요. 4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린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키지요. 그러면 이 말씀을 누가 가져간다? 예수님이 가져가지요. 예수님이 가져가서 다 이루었다라고 완료가 나올 때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 피로 나오지요. 피 안에는 깨어있으라가 포함되지요. 십자가 피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안 깨어 있어도 깨어있는 사람이 되게 해요. 마태복음 24장 42절을 우리 힘으론 완료를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대로 지키게 하는 겁니다.
쉬운 예로 성도인데 농땡이 한다. 정말 주님 생각 안해요. 창세전에 구원되기로 예정 된 자는 맞아요. 그런데 너무 농땡이에요. 성경이고 뭐고 예수고 뭐고 잊어버리고 그저 돈 버는 데만 매진하고 있어요. 그런데 신랑이 온다. 오면 성령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 신랑이 오기 전에 구원받을 여자들은 뭐가 있어야 한다? 기름 준비를 해야 되겠지요?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말씀 자체가 이루어지겠지요. 이루심을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전달시키면 그 성도는 이미 기름 부은 자가 되어 버려요. 말씀 지킬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성령이 지금 노는 게 아니거든요.
성령이 왜 일합니까? 어느 하나 지킬 말씀이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계속 각성케 하는 거에요. 이 말씀이 너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 여기 밭 갈다가 구원 받은 사람이 너야!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나는 이 말씀 지킨 적이 없는데요라고 하겠지요. 없으니까, 미완료니까 예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이 이루었어! 그러니까 네가 의인이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의 증인이 됩니까? 나의 증인이 아니고 완료자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완료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성경 안 봐도 구원 받겠네요.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봄으로서 내가 죄인이고 주님께서 못 한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성경 보게 하셔서
늘 깨닫게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누굴 증거합니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지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지요. 계속해서 42절에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했으면 우린 알아야 되요? 몰라야 되요? 성경에 “알지 못함이니라”이라고 되어 있으니 몰라야 되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2000 몇 년 계산하지 마세요. 7년 환란이니 계산하지 마세요. 그냥 너는 알아? 난 몰라! 배짱인지 몰라도 구원되요.
심지어 안 깨어 있어도 구원 받아요. 왜? 깨에 하시니까 주님의 자기 숙제이니까, 세상에 이런 대단한 배짱이 어디 있겠어요? 이게 믿음 아닙니까? 오죽 나를 못 믿고 기대를 안 했으면 이렇게 넉넉한 배짱가지고 살지요. 그것을 첫 째 시간에 뭐라고 했어요? 안정성이에요. 회사에서 퇴직해도 몸이 아파도 암이 걸려 4기라도 안정성이에요. 사람이 불안한 이유는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부터 벌벌 떨기 시작해요. 그 스트레스가 암으로 돌아오지요. 하나님! 천 원 내면 되겠습니까? 안된다고요? 그럼 만원이면 기도 응답 되겠습니까? 안된다고요? 쩨쩨하다고요? “너는 고린도 후서 8장을 못 봤느냐? 자발적으로 내라 했잖아!”
그럼 자발적으로 내겠습니다. 이것이 자발적이 되겠습니까? 이건 강요지요. 그렇게 안내면 벌 받을 까봐, 저주 받을까봐 십 만원이면 되겠어? 백 만원? 이건 협박 공갈 당한거지 자발적 아니에요?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자발적이라는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돈은 주님이 우리에게 헌금 한 거에요. 우리가 주님께 한금하기 전에 주께서 햇빛과 공기와 모든 것을 주께서 헌금 할 때도 그냥 헌금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똑같은 햇빛과 빗물을 받아도 북한의 김정은은 자기 아버지 덕분에 받았다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더 살게 단비를 주셨다.
똑같은 비를 맞고 똑같은 해와 별을 보면서도 하는 고백이 달라요. 하나는 주님께 감사하고 하나는 자기 잘났다 하고 다릅니다. 44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생각지 않은 날에 인자가 오지요? 생각하지 마세요. 성경 참 쉬워요. 생각 안하면 되요. 가만 있자!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온다? 갑작스럽게 온다! 그럼 대비 안하면 지옥?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대비해야 돼!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도둑이 새벽 2시 44분에 올지 새벽 3시 42분에 올지 2시 45분 동안은 깨었는데 2시 46분에 잠깐 졸았는데 그때 오면 낭패지요.
제일 문제가 뭐냐하면 치매인데 이거 어떻게 할 거에요? 65세까지 멀쩡했는데 65세에 파키슨 병이 와서 75세는 심해져서 자식들이 와서 요양원에 보냈어요. 67세 까지는 예수님 들어 본적이 있어요. 72세 되니까 예수님은 모르고 나훈아, 남진은 알고 만약에 그 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깨어있기는커녕 맨 날 너무 센 약 먹어서 낮에도 졸고 있어요. 그렇게 안하면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 안 주려고 그렇게 합니다. 자식도 몰라보는데 무슨 예수를 알아봐요. 이 분이 권사라면 구원 어떻게 받을 건데요? 이런 질문이나 옛날 세종 대왕은 복음도 모르는데 구원받았을 까? 하고 같은 질문이에요.
이 두 질문의 답변은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다. 죄의 보편적 현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이에게 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요. 죽음이란 늙어 숨 끊어 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영원히 저주 받는 거에요. 생명나무 열매를 못 따먹어서 영원히 저주 받는 것, 이갓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입니다. 이것을 애굽에서 나올 때 알려 주신 것이 애굽 사람도 곤히 자고 히브리인들도 곤히 잘 때 소리 소문 없이 고요하게 저주가 시커멓게 애굽의 전역을 덮어 버리지요. 그 날 저녁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은 사람은 푹 자도 괜찮아요. 실컷 자도 괜찮아요.
새벽 2시에 와도 괜찮고 4시에 와도 괜찮아요. 왜? 알아서 처리하니까 죽음의 저주가 뭘 보고 지나갔습니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 간 거에요. 알아서 한 거에요. 차 고장 나면 주인이 손대지 마세요. 하이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보험에서 알아서 저희끼리 다 알아서 해요. 구원도 주님의 자기 일이에요. 우리의 구원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피 바르게 한 것도 십자가가 믿게 한 것도 주의 일이에요. 새언약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 피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을 결과적으로 고백하면 그 뿐이에요. 오늘 저주 받아도 괜찮고 내일이 마지 막 날이어도 괜찮아요.
오늘 저녁 먹다가도 괜찮아요. 그건 주의 일이거든요. 사는 것도 살게 하셔서 살듯이 공중에 올라가는 것도 주의 몫이에요. 주님이 자기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겁니다. 그 때에 너희는 인자가 올 때 마태복음 24장 44절을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를 때 오셨구나!를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영원토록 되풀이 하라는 겁니다. 천국에 가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대상자가 되었습니다라고. 그 다음 45절을 봅시다.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습니까? 당시 12제자들이 들었죠. 그런데 12제자 가운데 남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해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거에요. 그러면 12제자가 다 지옥에 갔습니까? 아니지요. 성령이 오니까 마태를 통해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해서 우리는 못했지만 주님의 자기 과제로 인해 말씀대로 우리를 주님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내 뜻이 아니였고 아버지의 뜻이 었습니다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46절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면, 배신하고 울고 있는 베드로보고 복이 있다고 한다면 베드로가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주여! 저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하겠지요. 그게 복이 있는 거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이야기 했잖아요.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랑은 나에겐 없고 주께서 주시게 되면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고기 잡을 때도 일방적으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일방적으로 찾아 온 거에요.
주의 일은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창세전에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찾아 온 거에요. 찾아오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하루 세끼 먹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었는데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뭔가 달라요. 내가 뭐를 해도 죄인인 것을 알고 구원은 내 행함이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누가 한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미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느끼는 거에요. 그 다음부터 자기가 종이 되는 거지요. 47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약 성령을 안 받으면 “우리가 이 정도 희생했으니까! 아휴! 주께서 맡기는 것이 당연하지!” 이렇게 나올거잖아요. 이건 자기 잘난 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맡기면 황공하지요. 주여! 제가 어찌 이렇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어떻게 주제넘게 면류관을 못 씁니다. 하고 벗어서 누구에게? 주님 발 아래 던지는 겁니다. 이건 제가 쓸게 아니고 주님이 쓰셔야지! 왜 제가 씁니까?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됐기 때문에 주님이 쓰셔야 마땅하지요. 요한계시록 4장 마지막에 천국 간 장로들이 보좌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미리 하자는 겁니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가 억울한 것이 주께서 주셔서 상이 되게 하셨군요! 사도 바울에겐 가시가 있었어요. 그렇지요? 사도 바울이 가시 빼달라고 몇 번 기도 했습니까? 세 번 기도 했습니다. 제가 질문하겠는데 가시가 빠졌습니까? 안 빠졌습니까? 안 빠졌어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 했는데? 그리고 고린도 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굶기도 했어요? 굶지 않았어요? 굶었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을 알아요? 몰라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 했지요. 기도 했는데 왜 굶었지요? 시도 바울이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쨌든 니가 지금은 살아 있잖아! 그 때는 굶었지만”
결국 오늘 강의를 요약해 보면 뭡니까? 내가 살아 있는 거에요? 주님이 살아 있는 거에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 양자택일 하라고 했지요? 내가 살아 있다가 되면 누가 가려 집니까? 주님이 없어요. 내가 펄펄 살아 있아요. 내 감정, 내 자존심,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 허풍과 허세, 내가 살아 있다라는 것이 어린 애도 그래요. 부모가 얼마나 저 때문에 고생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밖에 몰라요. 무조건 달라 해요. 주님이 십자가 진 것도 모르고 살아야 된다라는 그것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적어도 한 달 수입은 오백만원 이상으로 사람답게 살게 무조건 내놔라는 거에요.
교회 가서 기도 했으니 내 놔라는 거에요. 헌금하고 십일조 했으니 내 놔라는 거에요. 30배, 60배, 100배로 깡패도 아닌 것이 주실 리가 있겠어요? 깡패를 키우지 않잖아요. 종입니다. 종은 어떻게 하라? 주인이 맡기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백수도 괜찮습니다. 이혼 당해도 이게 왠 떡입니까? 지금 제가 오바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생을 정말 남과 비교하면 짜증나요. 내가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났다고 이 지경이냐고 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할 말을 잊었지만은~ 노래 가사처럼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불신자나 성령 받은 자가 아무리 흉내 내고 모방해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어요.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화평과 온유는 어떤 인간도 뺏을 수 없어요.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나요. 아무것도 아닌 저를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종으로 삼으시니 감사합니다가 되지요. 그 다음에 49-50절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여기서 술친구가 있는데 술친구가 왜 생깁니까? 제가 결혼하는 새댁에게 부탁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뭐냐하면 결혼하면 남편의 세 가지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첫 째 경제권을 뺏어오고 두 번째 주변 친구를 다 끊어 버리고 세 번째는 술 담배를 끊게 만들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결혼 생활이 힘들게 되지요. 친구들 만나면 결혼 생활이 안되요. 아내는 그것들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되요. 자! 술친구는 왜 생깁니까? 세상에서 발을 못 끊겠다는 거에요. 왜 세상이 나를 살리기 때문에 누구를? 멋있는 나를 살리기 때문에, 인간은 추하게 살기 싫잖아요. 시시하게 살기 싫잖아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고 싶지요. 이런 멋있는 것들 때문에 멋있게 저주 받는 겁니다. 술친구와 더불어. 술은 허풍과 허세를 주지요. 제 정신으론 안 되니까, 맨 정신으론 안 되니까.
술은 성령이 주지 않는 세상이 주는 기쁨을 집중해서 다 주니까 친구도 있지요. 술도 있고, 동창셍은 왜 만납니까? 술 먹고 싶어서 혼자는 술 맛이 안 나니까, 요샌 여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왜 여자들이 그렇게 술을 먹는지? 얼마나 세상에서 살 기 힘들었으면 제 정신이 아니고 미친 거거든요. 잠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술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이 말은 세상과 망해라는 거지요. 너는 진작에, 결론을 말하면 우리는 세상 친구를 끊을 위인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성령께서 못 끊는 것을 끊게 하실 때 주님께 감사하자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는 말씀도 못 지킨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날 때부터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 말씀을 지켜봤자 아버지께 영광이 안 되는 것을 너무나 깨닫게 하신 자체가 구원받는 성도의 모습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