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자 180511
서울의존강의20180511a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1-12
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 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11절로부터 12절까지 이 두 절을 오늘 할 겁니다. 11절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렇게 되어 있죠. 자기라는 것은 선지자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죠. 그러면 서로 다른 두 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간다? 아,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죠. 어떤 사람도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부부라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 속에 한 사람이 들어간다는 이것은 신약이기 때문에 가능한데, 신약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선지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근데 신약은 ‘그리스도의 영’ 정도가 아니고, 아예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고 우리가 또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러한 실제적인 경우를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거는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두 사람 같으면 숫자가 2, 두 명이거든요. 둘인데 그게 하나가 된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가 있어요? 손 잡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아예 하나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베드로전서 11절을 뭐로 보느냐 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봅시다. 말도 안 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해가 될 수가 없죠.
그러면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믿자!” 이렇게 돼요. 그냥 믿자! 그거는 반칙이죠. 이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나올 수가 있겠어요? 결국 믿겠다는 말은 안 믿는다는 이야기예요. 못 믿겠다고 하면 성경이 이렇게 있으니까, 또 믿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그게 좀 기분이 나쁘니까 믿는다고 해요. 그러면 설명해보세요. 뭐 알아야 설명을 하죠. 믿지도 않는데 믿는다고 억지를 부렸으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설명을 해보세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게 설명이 안 돼요. 될 수가 없어요. 특히 이 선지자들도 본인이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나왔다. 이게 구약과 다른 신약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정답입니다. 설명서에요. 설명서. 어떤 전자제품을 택배로 받았는데, 쓰기는 쓰는데, 가동이되긴 되는데, 어떤 원리로 가동이 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요. 가동은 되는데 어떤 원리에서 가동이 되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면 가동은 된다. 이건 신약. 어떤 원리인줄 모르겠다. 그건 구약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이 신약에 있는 이 내용을 본인들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모르죠.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최종적이어야 해요. 최종적인 것에 도달될 때 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산이 있든지 또는 이런 건물이 있어요. 롯데월드타워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117층부터 121층인가 전망대가 있어요. 전망대. 전망대가 117층, 그 다음 계단 올라가면 118층, 또 계단 올라가면 119층... 이렇게 돼요. 목사님 가보셨습니까? 가봤어요. 가보면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전망대에서 보니까 서울 시내가 다 보입니다. 근데 이 롯데월드타워가 없다고 치게 되면 무엇이 날라 가느냐 하면, 높이가 500미터쯤 돼요. 한 500미터에서 보던 그 안목이, 이 빌딩이 없어지게 되면 그 안목도 같이 없어지느냐, 하는 그 생각을 해봤어요. 한번 올라갔는데 그 다음에 지진이 일어나서 롯데월드가 사라졌다. 그러면 자기가 올라가서 500미터에서 봤던 서울시내의 안목도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건물은 없어졌어도 안목은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본 게 있으니까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 키가 1미터 70이고 80인데, 어떻게 500미터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느냐? 설명을 해보라고 한다면, 설명이 되려면 뭔가 걸쳐있어야 설명이 되거든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뭘 봤어요. 봤는데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설치한 건물이라는 이게 없어서 그래요.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선지자들이 고난과 영광을 보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 있거든요. 오늘 본문이 그렇잖아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그 다음에 “미리 증거 하여”, 미리 증거 한 거예요. 누가요? 선지자들이.
그러면 이건 선지자들에게만 해당이 되고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느냐, 오늘날 우리가 받은 영이 뭐냐 하면, 오늘날 성도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돼요. 로마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롯데월드를 짓든지 해야 돼요. 근데 벽돌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짓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성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성도되려고 애쓰자. 그거는 뭐 교회마다 다 하고 있으니까. 하고 있는데 소용이 없죠.
그건 백날 해봐야 지옥 가는 거니까 소용이 없고. 천국가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되는데, 문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방법이 있다? 없다? 이게 없는 겁니다. 없어요. 그러면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어떡해?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과 연관되는 사항이 있어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다 연결됩니다. 그 연결되는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가 뭐냐, 그게 버림받는 것, 버림받음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죠.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쫓겨나죠. 버림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했던 그 체계와 구조로부터 버림받은 겁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는데, “살기 좋았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금 뭐 살기는 좀 힘들어도 참으면 되지.” 이러는데, 그게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에덴동산을 이루는 그 체계와 원리에서 쫓겨난 거예요.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체계와 원리는, 쫓겨나게 되면 두 번 다시 에덴동산에 갈 수 없는 원리를 장착하고 이 땅에서 사는 겁니다. “아이고, 뭐 좋은데 살았는데 호강했다 치고, 그 다음에 이 땅에서 살대로 한번 살아보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고생 더하느냐, 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뭔가 잃어버렸어요. 에덴동산을 구성하는 그 요건에서 인간이 배제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 물어내!”에요. “에덴동산 물어내! 에덴동산을 그대로 하는데 있어서 너희들은 범죄자야. 너희들은 책임이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는 인간들의 관심사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부모님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잡채를 만드는데, 소금으로 약간 간을 볼 타이밍에서 엄마가 잠시 딴 데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철없는 아이가 와서 소금을 붓는다는 게 잘못해서 팍 부었어요. 그러면 완전히 짜서 못 먹잖아요. 그럴 때 엄마가 와서 하는 말이 “이 잡채 물어내!” 이래 되죠. 그러면 아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엄마는 엄마가 만든 잡채만 신경 쓰고 아들이 손이 떨려서 소금을 퍽 부은 그 아들은 하나도 생각 안 하지? 그치?” 이래 되는 거예요. “엄마한테 참 섭섭해. 왜 이렇게 소금을 많이 붓게 됐는지, 쟤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물어내 이 잡채! 이렇게 하면, 엄마 잡채가 중요해? 아들이 중요해?” 엄마가 하는 말이 “잡채가 중요해!”
이게 소통이 안 되고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대화가.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하고의 대화가 뭐냐 하면, 성도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체제, 천국이 중요해요. 근데 성도 아닌 사람은 뭐가 중요하냐 하면 교회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교회는 자기가 돈 내서 만든 회사거든요. 자존심이고. 위신이거든요. 교회를 왜 만드느냐 하면 교회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설마 이 정도의 정성을 들였으면 주께서 내치지 않겠지.’라는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미 버림받은 인간성에서 나온, 잡혀있는 체계고 원리고 조직입니다.
이제 분명히 알았죠. 하나님이 만든 그 천국의 원리에서 인간은 이미 배제된 상태인데, 인간은 뭐냐 하면 정성과 노력과 경건과 거룩을 다 끌어 모으면, 끌어 모은다는 그 시작을 어디서 하겠습니까? 자기에게서 하겠죠. ‘설마 하나님께서 내치지는 않겠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정성과 거룩과 경건과 노력이라는 아이디어가 이미 내친 상태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이미 내침을 당한. 그걸 죄인이라고 해요. 이미 죄에서 나온 아이디어 하나가 경건이고 거룩이고 열심이고 정성이고 기도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알죠. 이슬람의 뜻이 뭐냐 하면 그냥 복종이에요. 복종. 그냥 알라신에게 복종하는 게 이슬람 종교입니다. 그런데 알라신은 하는 게 없어요. 알라신은 하는 게 없고, 인간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복종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복종해도 안 돼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종하게 되면, 성경에서 나오는 말로 순종인데. 복종, 순종해서 이게 구원이 될 것 같으면 이거는 이슬람교지, 인간이 만든 종교지, 복음이 아닙니다.
근데 복음을 가지고 복종, 순종해서 된다고, 영광 돌린다고 하는 기독교가 돼버렸으니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복음과 분리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아까 롯데타워 이야기했잖아요. 롯데타워 건물도 없는데 500미터에서 서울 시내를 봤다는 그 안목, 그 경험. 그러면 구약선지자들이 그걸 보게 된 것은 그들의 복종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러면 노력해서 그런 거예요? 기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 전에는 그들은 그것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다? 없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신이 임할 이유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 빼고 기독교를 한번 만들어보세요. 우리가 아이디어를 한번 끄집어내보자 이겁니다. 몇 천 만 명 모여서 성령 받았다는 그걸 빼고, 성령 받은 것을 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한번 해보자 이 말입니다. 성령 빼고. 그러면 뭔가 있겠죠. 열심히 하자. 십일조 하자. 주일에 모이자. 모여서 찬송하고, 밴드 만들어서 하고, 심방하자. 뭔가 있겠죠. 만들었다 칩시다. 만들어놨을 때, 그 다음에 성령이 그 자리에 왔다고 한다면, 성령은 이미 만들어진 그거를 호응할까요? 안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부정할까요? 부정하죠. 그걸.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이라고 보면, 성령이 왔을 때는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아이고, 기특하구나. 내가 없어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네. 그렇다면 나는 숟가락만 얹으면 되겠다. 그래. 너희들의 노력이 가상하니까 내가 뒤에서 약간 도와줄게.” 그래서 성령이 플러스알파(+α)하는 식으로, 그렇게 보태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 겁니까? 성령이 일을 시작할 때는 어디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아담을 내쳤잖아요. 아담을 내칠 때는 모든 인간이 다 내침을 당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뭐부터 하느냐 하면 인간이 내침을 당한, 버림받은 그 상태를 다시 우리에게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아이고, 이만큼 잃었다.” 이래 되지만, 사람이 모든 것을 잃을 때는, 사실 모든 것을 잃고부터는 잃은 그 자리가 바로 원래 내 자리였어요. 내 자리기 때문에, 내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자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잃을 것도 없는 그것이 본래 내 자리가 돼요. 아무것도 잃을 것도 없는.
강아지 집 나갔다. 잃어버렸다. 아쉽죠. 강아지 잃어버렸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처음부터 강아지 없었잖아요. 강아지 어디서 구했든지, 사든지 해서 있었잖아요. 그렇죠.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 근데 이 강아지에서만 멈출까요? 나까지 포함시킬까요? 나까지 포함시키는 거예요.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잡을 때, 지금 아브라함이 이삭을 걱정하는 거예요? 본인을 걱정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신앙을, 지금 아브라함의 신앙을 점검하겠다는 겁니까? 이삭 신앙을 점검하겠다는 겁니까? 아브라함 본인 신앙을 증거 하는 거죠.
그럼 본인을 증거 하는 그 증거의 자리는 자식이 있을 때에요? 없을 때에요? 자식이 없을 때죠. 본인의 자리는 자식이 없는 자리에요. 그 없는 자리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게 내 자리다.”하고 니가 고백할 수 있느냐를 보이라는 그게 아브라함에게 한 신앙의 테스트에요. 그게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에요. 더 나아가서 내가 없다면 내가 없죠. 내 말 맞죠? 내가 없으면 내가 없죠. 그러면 내가 해야 될 걱정근심도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내가 없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어요. 내 자체가 없는데. 걱정할 내 자체가 없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어요.
그러면 걱정근심은 결국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가 있다고 치고 나오죠. 그러니까 걱정근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뭔가 잘못된, 우리의 자리를 안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 자리를 안 가고 어정쩡하게 남의 자리를 돌아다니니까 걱정근심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우리의 자리를 주님께서 보여준 게 뭐냐 하면 버림받는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그럼 버림받는 자리,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가,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아요. 만약 버림받는 자리가 신월동이라고 하면 신월동에 다 모입니다. 그래서 버림받는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정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요. 십자가로. 나는 내 자리를 못 찾아요. 왜냐하면 찾고자 한다면 내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본인이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어요. 세계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모든 신화라든지, 모든 글들, 시, 문학, 경전, 이러한 모든 내용은 딱 하나입니다. 자아 찾기입니다. 자아 찾기.
그걸 ‘옴파로스’라고 하는데, 그리스어로 배꼽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배꼽, 중심이다. 이 말입니다. 중심 찾기. 달라이라마도 그렇고, 티베트(티벳)불교도 마찬가지고,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든 것이, 특히 인도의 힌두교 같은 경우에 아트만, 자아 찾기에요. 내가 곧 신이다. 진정한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그거 찾아서 뭐하는데?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가 뭔가를 생각해볼 때, 반드시 거기에는 ‘이다’와 ‘아니다’가 같이 등장하니까, 이게 갈라지는 거예요. 선을 행하는 그 순간, 선을 행하기 전에는 악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선을 행하는 그 순간 그 옆에 뭐가 같이 등장하느냐 하면, 생각하지도 않았던 악이 같이 등장해요.
결혼을 했는데 아기가 없을 때는, 기저귀는 어떤 것을 쓰고, 애기 옷 빨래는 어떻게 하고, 애 유치원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 안 하다가, 애기가 생기고 난 후 그 다음부터는 부수적인 것이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모든 아기들이 이쁘고 귀여워요. 근데 내 애기가 태어나서 유치원에 가서 왕따를 당하는 순간, 내 애 빼놓고 나머지기 애는 다 경계대상입니다. 저 애가 내 애를 때리지 않을까, 저게 내 애의 빵을 뺏어 먹지는 않을까, 그리고 저 애가 내 애보다 공부를 더 잘해서, 선생님한테 이쁨을 독차지해서 우리 애한테 돌아올 이쁨에 그만큼 손해나지 않을까, 이렇게 경쟁상대가 되는 겁니다.
이 모순점, 이 모순점이 원래 성경대로라면 모순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선악이거든요. 선과 악이라니까요. 선과 미흡 된 선이 아니에요. 어거스틴이 그렇게 억지를 부렸는데. 어거스틴은 잘못된 거예요. 악은 미흡 된 선이라는 그건 말이 안 돼요. 선과 악이 같이 있는 겁니다. 선과 악을 해소하려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본래의 내 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선하면 선하고, 악하면 악해지니까. 아예 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선이면 선, 악이면 악, 하나만 하기 때문에 모순된 점이 없을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아 찾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근데 자아는, 자아를 찾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자아가 이렇게 있는데, 자아 찾기라 하는 것은 뭔가 진정한 나는 진짜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점선으로 표시하면. 찾아가는데, 찾아가는 내내 뭐가 있느냐 하면 현재 있는 나를 계속 여기서 부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찾았다고 딱 붙들면 이것(점선으로 표시된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붙든 내가 또 여기서 주체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찾은 나와 찾게 된 대상과 분리가 일어나지 않아요. 분리가. 이게 떨어지지 않아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작아지고 그녀는 커져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만 살면 족해.” 이렇게 하는데, 그 여자가 만약에 떠나간다고 한다면, 없던 본인도 다시 등장하잖아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한다고요. 내가 해버리면 결국은 그 여자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가 대상이 되고 사랑하는 주체는 내가 되기 때문에, 나 없는 너는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나라는 이 진드기, 나라는 괴물은 아무리 나를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이거는 교회 기도할 때나, 헌금할 때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도한다고 하면서 제일먼저 생각나는 게, 지금 손가락을 모았는데 가지런하게 모아졌는가, 관절이 안 좋은데 오늘 계획은 3분내지 5분, 기분 좋으면 10분 끌어볼까, 온갖 생각을 다 한다고요. 그렇게 한 5분쯤 되어서 기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하고 기도하면서 스케줄 생각한다고요. 스케줄 생각한다니까요. 기도하면서 내가 휴대폰을 꺼놨는지, 누구한테 전화 올 때 됐는지, 온갖 것을 다 생각해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은 봉투 열 때부터 이거 너무 과하지 않는가, 한번 빼볼까, 빼면 천상에서 캡처해서 사진 다 찍을 거 아닙니까? “쩨쩨하게! 니가 만원을 빼? 삼심배로 갚아줄게.” 또 이런 소리가 들려와서 후딱 집어넣는다고요. 만원 빼다가 삼십 만원 날아갈 수가 있으니까. 헌금 봉투에 집어넣을 때 내가 헌금하는 것을 저 목사가 좀 봤으면 하죠. “우리 집사님은 참 착실해. 어려운 가운데 헌금도 하고”라는 칭찬을 받을 텐데, 하필 헌금할 때 목사가 화장실을 가요. 목사가 화장실 갈 때 헌금을 해버리면, 요즘 저 집사 헌금 안 한다고 오해를 받을 것 같고, 모든 설교가 나를 지적질 하는 설교로 들릴 수 있고.
그리고 헌금을 하면서도 남들이 헌금하는 것을 좀 알아야 균형을 맞출 건데, 나만 쪼다같이 많이 하고 병신같이 헌금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은 벌써 교회 예산이 남은 것을 알아서 헌금 빼는 것을 모르고, 자기만 교회 예산 잘 몰라서 헌금 많이 했다. 보니까 돈 좀 남아있어요. 내가 미쳤다고 교회 예산 남아있는데 뭐 할라고 헌금했는지 또 후회하고. 후회하다가 자원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