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거룩의 발생
20180504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거룩의 발생(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9장 하겠습니다. 레위기 19장을 훑어보게 되면 특정 율법에 대해서 강력하게 강조하는 게 아니고 이 율법, 저 율법을 섞어놓은 느낌이 들 겁니다. 하나의 율법을 지키면 그 다음 율법을 왜 지켜야 되는지 이것 안 지키면 어떤 처벌 받는지 그렇게 돼야 되는데 전혀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율법과 사소하게 느껴지는 법이 같이 섞여져 있어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자기가 지킬 만한 법은 지키되 아주 지키기 힘든 것은 나중으로 미뤄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공부할 때 쉬운 것부터 먼저 하고 그걸 발판으로 삼아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면 문제 푸는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본인이 느끼게 되죠. 내가 이 정도는 되는구나. 율법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내가 이 정도 레벨의 율법은 지키는 데 이 정도는 아직까지 멀었다고 자기 스스로 독자적으로 자기 가치를 측정할 만한 그러한 기회를 레위기 19장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다 위반한 것이 된다는 구절이 있지요. 야고보서에 나오는데 우리 일상적인 법 감정과 법 준수하는 습관과는 전혀 맞지 않아요. 법이 백 개 있는데 그중에서 70%만 지켜도 반은 넘어섰잖아요. 반을 넘어서면 누가 봐도 법을 안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법을 지키겠다는 성의 표시가 충분하게 된 걸로 보거든요. 70개나 지켰으니까 30개 안 지켜도 70개 지킨 걸 생각해보자. 그러면 저울에 달아볼 때 지킨 것이 훨씬 많으니까 하나님께서도 지킨 70개가 있는 이상은 봐주는 요소들이 많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법을 볼 때 우리가 그런 생각으로 보게 되는데 그러한 생각을 하나님은 일체 용납하지 않아요. 일 년이 52주인데 50주 교회에 나왔습니다. 2주는 빠졌어요. 오다가 타이어 빵꾸나서 빠지고, 오려고 했는데 집에 일이 있어서 못 왔다. 어쨌든 간에 두 번 빠졌단 말이죠. 이걸 하늘나라 재판관에게 가게 되면 이건 교회 나올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라고 물을 때 이건 50번이나 나왔기 때문에 있는 사람으로 쳐주는 거예요. 2번밖에 안 빠졌으니까. 성의를 표해도 절대적일 정도로, 퍼펙트에 가까운 예배출석 성의를 보여준 게 됩니다. 그래서 50번 나온 것을 사람은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양심에 가책 같은 걸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신이고? 52번 다 나오게.”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위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 자체가 율법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잘못된 접근이란 걸 알아야 돼요.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인 것을 티내라고 율법을 준 게 아니에요. 그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는데 제가 두 가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두 그림의 차이점이 뭔지 보시기 바랍니다. 군에 진지가 있지요. 어떤 지역에 토치카가 있어요. 1번 진지와 2번 진지 사이가 연결돼있습니까? 연결 안 돼 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법을 대할 때 1번 정복했고, 그 다음에 2번도 지키고, 3번 지키고, 4번 지키고. 하나하나 정복해나가는 식으로 법을 지키게 되면, 그 지키는 사람 마음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1번 지켰으니까 이게 의가 되겠지요. 자기 의 또는 자기 정당성 보장이죠. 2번까지 했으니까 추가적으로 자기가 더 정당하죠. 만약에 옆에 있는 어떤 집사님이 1번만 지켰다면 그 사람보다 곱빼기로 착한 거예요. 법 감정이 법 인식이 그런 겁니다. 그래서 교회 교인들은 우리 교회 목사님은 몇 번까지 지켰을까 생각하는 거죠. 그 교회 목사님은 맨날 성경보고 맨날 기도하니까 토치카를 70개, 80개 우리가 따라 붙을 수 없을 정도로 지켰기 때문에 교인들은 목표가 생긴 거예요. 내가 지금은 직장 다녀서 못하는데 퇴직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따라다니면서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그동안 뭔가 미흡했던 거예요. 직장 다니면서. 일요일도 교대근무 때문에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성경도 잘 모르겠고. 뭔가 미흡한 미진한 부분을 본격적으로 퇴직했으니까 마저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연세가 많아서 잠이 온다는 게 문제지만. 빠릿빠릿하질 못해. 젊을 때는 돈 번다고 시간 다 보내고. 머리가 안 돌아가서 문제고. 시냅스가 뇌세포가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는데 연결이 안 돼. 이런 법 감정, 모든 것은 결국 허접스럽게 내 안에 마음의 창고가 허하느냐, 아니면 충실 하냐? 충실하면 영광이고 허하면 주께 영광을 많이 못 드려서 천국 가도 좀 미안하게 부끄럽게 구원받지 않겠느냐는 이런 사고방식이 있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에요. 토치카 이런 방식 아닙니다. 그럼 무슨 방식이냐? 이런 방식이에요. 어떤 논에 줄을 그어놨어요. 1번, 2번, 3번, 4번이 다 인접해 있습니다. 전부 붙어있어서 2번 하다가 17번에 갔다가 1번 하다가 56번에 가고. 이건 마음대로 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같은 지면 또는 같은 지형, 더 구체적으로 같은 요구사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 우리 젊었을 때 제가 스무 살 무렵에는 티비 잘 없어서 영화관에 많이 갔거든요. 만약에 6개월에 영화를 10편을 봤다면 10편이 다 똑같아요. 왜냐하면 다 신성일, 김지미에요. 엄앵란이 나와요. 그리고 어떤 영화를 봐도 내용이 똑같아요.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보나 문희 나오는 영화를 보나 윤정희 나오는 영화나 전부 내용이 비슷해요. 그러다 80년대 쯤 되면 그 어느 영화나 내용이 똑같아요. 촌에서 올라와서 미싱하거나 유흥가에 팔려서 거기서 재벌 남자 만아서 살다가 다 망했는데 책 사주면서 공부 뒷바라지 했더니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 부잣집 여자와 사귀니까 차버리고. 어느 영화를 봐도 같은 내용, 같은 요구사항이라니까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거룩이라 합니다. 다섯 개 하면 더 거룩 되고 두 개 하면 덜 거룩 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율법이 백 개라면 하나를 지켜도 거룩이고 99개를 지켜도 거룩이 안 될 수가 있어요. 그리고 하나를 지켰으면 거룩이잖아요. 그 하나가 두 번째 지켜도 동일한 거룩이고 세 번째 지켜도 동일한 거룩이에요. 세 배의 거룩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거룩이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진지 논리와 다르지요. 다른 거예요. 이걸 어떻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지 생각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큰 돌에 한 번 맞으면 죽습니까, 두 번 맞으면 죽습니까? 그것도 10층에서 떨어지는 돌에. 큰 돌에는 한 번 맞아도 머리 깨지고 두 번 맞아도 깨져요. 율법은 그걸 만나는 순간 머리 깨지라고 준 법이에요. 부서지라고 준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십자가를 돌에 비유해요. 십자가는 우리 머리에 떨어져서 우리 머리를 박살내는 거고, 자빠지면 엎어지면 돌이 와서 부딪치고 우리가 깨지고 돌이 날아와도 우리가 깨지고. 이래도 저래도 깨지는 것은 우리란 말이죠. 사람들이 왜 말씀이 안 들으려 합니까? 안 깨지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교회에 안 와요? 안 깨지려고 교회 안 오는 거예요. 멀쩡하게 살려고. 멀쩡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멀쩡하게 되면 자꾸 자기 정당성, 자기 의가 누적이 된다는 겁니다. 갈수록 깨지는 게 아까워서 못 깨요. 그동안 공들인 게 있어서 안 깨져요. 그래서 이러한 심리를 갖고 있으니까 흔히 어떤 설교에도 복음 나오는데 뭐. 이런 식으로 기피해버려요. 복음의 내용은 몰라요. 정보 하나 추가한 것을 복음으로 알 고 있어요. 살아온 인생 자체가 더 살 가치도 없는데 왜 자꾸 꾸역꾸역 살아, 하고 오함마로 머리를 치는 게 복음입니다. 복음 안 들으면 살려하고 복음 듣게 되면 안 살아도 되네, 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런 즐거움이 아무한테나 있는 건 아닙니다만 더 이상……. 왜 살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아까워서 살고 싶은데 복음에 부딪쳐서 자신이 깨져버리면 더 살아봐야 무가치한데 더 살면 뭐하냐는 어떤 편안함이 생겨요. 느긋함이 생기고 갑자기 마음의 무거운 짐 같은 것이 사라집니다. 살아봐야 인간 아닌데 왜 살지, 왜 살려고 하지? 여러분, 그게 더 낫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 게 낫지 않아요? 사람이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목표가 생깁니다. 이것보다 더 괜찮은 존재, 이것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데 내가 지레 포기할 순 없지, 라는 오기 같은 것, 야심 같은 것이 생기면 그 사람의 근육은 굳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생긴 게 오십견이라는 거예요. 어깨에 힘들어가서 모든 게 부자연스러워요. 자기가 잘난 것을 뽐내기 위해서 살아가게 되면 마귀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과제를 줘요. 개 경주할 때 그냥 달리라 하면 안 달립니다. 개 앞에 먹잇감을 달아요. 개는 트랙 보고 달리는 게 아니고 자기 앞에 아른거리는 먹잇감을 빨리 쫓아 잡으려고 달리잖아요. 마귀가 주는 과제는 개 경주와 같아요. 그걸 달성 안 하면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앞에 달아요. 이번에 금식 안 하면 나는 의로운 사람 아니라는 것을 금식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금식을 따라잡는 데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의로움은 나보다 먼저 약 올리는 식으로 항상 내 앞에 앞서 달리고 있습니다. 못 따라잡습니다. 따라잡았다고 쳐도 그걸로 끝입니까? 또 있어요. 하루에 성경 석 장 읽고 주일에는 다섯 장 읽어서 일 년에 다 읽었다. 끝입니까? 마귀가 이야기하기를 네가 얼마나 믿음이 태만했으면 석 장만 읽느냐. 다른 사람은 다섯 장 읽는데. 그래서 사탄과 천사가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성경을 한 장 추가한다, 아니다? 지가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헌금을 천원을 더 한다, 안 한다? 수입이 얼마기 때문에 지난해까지 헌금을 십만 원했다. 그런데 올해 퇴직해서 수입이 없는데? 그러면 수입이 없으니까 오만 원으로 삭감? 그러면 속에 있는 천사가, “그러면 안 되지.” 천사인지 마귀인지 구분도 안 돼. “십만 원하다 오만 원 하면 그 오만 원의 다섯 배의 손해가 매달 주어져도 오만 원 할래? 네가 전에는 자발적으로 했는데 그 자발성이 떨어졌나? 믿음이 떨어진 거야?” 이렇게 내부에서 악마인지 천사인지 구분도 안 되는 것이 호소하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래요? 십만 원하면서 오만 원만 할 걸, 하면서 계속 십만 원하니까. 자발적 오만 원+비자발적 강요 오만 원. 이게 무슨, 지가 함정을 판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악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상식 또는 인식 덩어리가 악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이라고 해서 독립적인 실체가 따로 있는 겁니까? 현재 분위기가, 내가 이런 짓하면,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 적어도 믿음 있는 사람처럼 살아야지.”라고 혹시 누구한테 들키게 되면 또는 라이벌이라든지 누가 나를 주목할 때 “저 사람 요새 믿음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 기도도 빨리 끝내고. 전에는 대표기도를 5분 하더니만 2분만 하고.” 그렇게 그런 것 측정하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타인이니까 그 타인이 한 것과 자기를 항상 대조하며 살게 돼있어요. 그래서 교회 분위기에 항상 휘둘리게 돼있고 같이 밀치고 밀리게 돼있어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가 나를 지배하는 거예요. 김정은은 천하에 악마 덩어리라고 하다가 김정은 사랑해요. 이게 뭐예요? 줏대도 없고 완전히 분위기 타는 거예요. 결국 악하다고 하는 것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타인들의 보편적인 이념이 나를 악하다 할 때 악한 것이냐, 아니면 악이란 독립적인 실체가 있느냐? 악이란 독립적 실체를 악마라 합니다. 악마가 실제로 있느냐는 겁니다. 어느 쪽이냐 말이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죠. 뱀 나오죠. 사탄 나오잖아요. 적그리스도 나오고 악마 나오죠. 그런데 성경에는 악마가 나오는데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악마에 신경 쓰는 게 아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평가하느냐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잖아요. 따라서 그걸 커버하는 방법은 계속해서 내 신앙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티를 내는 식으로 하고, 교회 한 번 빠지면 변명 열두 개 정도 동원시키면 되니까. 선이 빠진 부분은 더 나은 다른 선으로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보충해야 되는가? 그래야 유지가 되니까. 결국 인간의 생각이란 단순해요. 뭐냐 하면, 과거 생각이 현재를 구성하는 배경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어제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을 뺄 것인가, 더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생각이에요. 어제 없는 오늘은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제의 연속성으로 오늘에 이른단 말이죠. 그러니 이건 인간이란 그 당시 분위기 또는 대세에 휩쓸리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줏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제일 무서운 것은 남들의 시선이에요. 남보다 무서운 게 없어요. 악마고 예수고 하나도 안 무서워요. 평소에 내가 과거로부터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 오늘 만났을 때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걸 제일 심도 있게 제일 다급한 문제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경우에 이혼이란 것이 가슴 아파요. 처녀 결혼과 이혼 후 결혼과는 천지 차이거든요. 과거가 있는 것과 생판 처녀로 결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이혼하고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고 있는데 전 남편이 손님으로 와 보세요. 분위기 어떻겠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그나마 전 남편 혼자라면 괜찮은 데 새 여자와 함께라면? 도대체 이 세상은 누구 눈치 보며 살아가는 거예요?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가 도대체 뭐예요?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성경? 무슨 되도 않는 소리에요. 무슨 성경이 날 구성합니까. 복음? 이 세상이란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 인간들이 오늘 레위기 19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경을 봐도 3번은 지켰고 4번은 지켰고 5번은 좀 이상하고. 해볼까요?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나오니까 이번 어버이날에 가게 되면 경외하는 것에 해당되니까. 왜 그게 경외함에 해당되느냐 하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어버이날에도 안 찾아보니까. 그 사람과 대조할 때 나는 경외하는 쪽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거예요. 전부 남들과 대조하며 살아가니까. 그리고 내가 2017년 작년에는 부모님을 다섯 번 봤는데 2018년에 퇴직해서 열 번 보고 있으니까 나는 과거를 배경으로 깔았을 때 곱빼기나 경외하는 거니까 3번은 그냥 넘어가자. 지킨 걸로. 3번 진지는 지킨 게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니까 주일로 바뀌었으니까 주일에 대충 열 번에 세 번 정도 빠지니까 70%. 70%는 우수한 성적이거든요. 50보다 많으니까 지킨 걸로 치고. 4번 되면 신이 나요. 왜? 절에 안 가니까. 갓바위 안 가니까. 헛된 우상을 섬기지 말라하니까 아무리 봐도 집에 제사 안 드리지요. 부처한테 안 빌지요. 점 안 치고 딸래미 결혼할 때 궁합은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초에 토정비결도 안 봤으니까 봐도 재미로 보니까 4번에 대해선 우수한 점수가 나온단 말이죠. 교회 다니고 난 뒤에는 아예 이런 것 안 했으니까. 달 보고 빌지 않았으니까. 3번 우수, 4번도 크게 우수. 5번 봅시다. 너희는 화목제물 드리고. 무슨 뜻이에요. 화목제물 드리되 열납되도록 드리고? 예배 시간에 졸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6절에 보면, “그 제물을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말이죠. 이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넘어갔지만 3번, 4번, 5번 되었으니까 6번 하나 빠져도 75% 아닙니까? 점수로 75점이면 이 바쁜 세월에 괜찮은 것 아니겠어요? 9번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이건 거의 95점 맞아요. 왜? 요새 안 그래도 마트에 살 것 많은 데 집에 냉장고에 유통기한 지난 게 우유부터 해서 한두 개가 아닌데 구태여 남은 이삭까지 주울 이유는 없거든요. 특히 울산은 잘 산다하니 99%. 악착 같이 이삭까지 줍진 않으니까. 여유 있으니까요. 요새 굶어죽는 사람 있습니까. 9번은 지켰네. 그 다음에 10번도 지켜요.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줍는 것도 힘들어. 허리 아픈데 뭘 그것까지 주워. 그때는 이건 새들이 먹든지 다른 사람들이 먹든지. 10번은 거의 백 점이에요. 11번 봅시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이런 건 뭐.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11번 이게 문제네. 하루에 300번 이상 거짓말해요. 입만 떼면 거짓말하고. 특히 부부 사이에는 더 많이 하고. 지금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전혀 이해 못하고 이런 식으로 하나 지키고 자기 착함에 내가 얼마나 내가 우수한지 그렇지 않아도 알고 있지만 말씀을 통해서 더욱 더 확인받겠다는 식으로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고. 이거는 진짜 돌 열 개 맞아 죽어야 마땅해요. 하나님이 원하는 건 거룩입니다. 결국 거룩입니다. 거룩이 뭐냐? 나를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생각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지요. 하나는 생각하는 머리가 율법에 의해서 박살나든지, 로마서 3장에 나와요. 모든 율법에 우리는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자라요. 더 좋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대 앞에선 난 되게 작아져. 작아질 정도가 아니고 아예 없어져야 돼요. 사랑의 특징은 이유가 없다는 데 있어요. 이유 있는 사랑은 거래지 사랑이 아닙지다. 이유가 있으면 안 돼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사귈 때 저 남자/여자와 사귀면 행복하겠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정말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럼 사랑이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면, 강제적으로 의도적으로 평소에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은 판단을 하거든요. 잘 들어봐야 돼요. 사람이 판단할 때 판단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선택이 있어요. 선택하고 판단하고 그 다음 세 번째에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뭐냐 할 때 결정과 판단을 의도적으로 내가 회수하는 거예요. 나는 저 사람과 안 사겨. 저 사람 미워.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할 때 선택도 같이 날아가면 애초부터 사랑한 게 아니고. 나 저 사람 싫어, 하는데 계속해서 떠오른다든지 잊지를 못할 때 이건 이미 내 선을 넘어선 거예요. 누가 좋아진다는 것은. 내가 저 사람과 살면 어떤 이득을 얻고. 이것은 선택에 내 욕구와 욕망이 관여되어 그렇단 말이죠. 결정을 스스로 깨고 판단을 깨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든지 또는 이민을 간다든지 또는 같은 교회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간다든지 그렇게 내 눈에 띠지 않는 강제로 헤어질 상황이 될 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멀어지게 되면 처음부터 이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냥 잠재된 욕구가 작용한 겁니다. 그런데 미국 이민 가도 눈에 안 보여도 몸은 따로 있지만 같은 하늘에 있잖아요. 언젠가는 돌아와 줘요. 같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며 지울 수가 없어요. 그리워서. 이건 병 수준이에요. 병은 본인이 선택해서 걸리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도 병입니다. 사랑이 왔다는 것은, 내가 다룰 수 있는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이건 고통이에요. 고통스러운 사랑, 이 사랑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권한 밖에서 움직이는 내가 판단한 것 이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우거나 없애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신약에서 성령의 오심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믿지 마세요. 왜 자꾸 제가 막 사세요, 예수 믿지 마세요.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대부분이 가짜니까 그래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시도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얼마나 착해야 되고 얼마나 성경적 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는 흥정이라는 차원에서 계속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이런 가짜를 그냥 방치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가짜는 제발 그만하세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 따라다녀도 조금만 어려움이 오고 어떤 재미없는 일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고난 온다고 전부 다 예수 버리게 돼있단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그런 말이 있지요.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거든요. 원래 촌에서 거름 졌으면 장에 가면 안 돼요. 거름은 밭에다 부려야 된다니까. 거름을 지고는 밭에 가야 돼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지옥 가니까 거름 지고 지옥 가요. 같이. 다 지옥 가니까 다 넓은 길로 가니까 자기도 분위기에 따라서 그쪽으로 휩쓸려야 되는 것처럼, 어떤 의무감처럼 그 사람들과 같이 아니하면 내 인생이 불행해질 것처럼 거름 지고 장에 가는 거예요. 가끔 교회 와주고 후딱 저쪽에 장에 가고. 거름 지고 장에 가면 똥 냄새만 풍깁니다. 성령께서 주실 때 우리 속에 담긴 것은 천국 가라고 담긴 것이지 지옥 가라고 담긴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성령 받은 사람도 세상을 따라가고 싶어 해요. 인간이니까. 하지만 대단히 어색해요. 이제 대화가 안 된다니까요. 안 믿는 사람과도 대화가 잘 되던데요? 이상해요. 안 믿는 사람과 소통이 될 리가 있어요? 위선하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율법이란 내가 하나하나 정복해가는 게 아니에요. 3절 지켰다. 4절 지키자. 19장 5절, 6절, 7절. 이렇게 하나씩 정복하고 지켜서 레벨 올리고 제자 훈련하듯이 3단계. 4단계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19장 같은 경우에 옆에 나란히 있어요. 중요해 보이는 율법이나 사소해 보이는 율법이나 바로 옆에 있어요. 사소한 것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레위기 19장 27절 누가 읽어보세요.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하나님께서 미용기술까지 가르쳐주는 겁니까? 굉장히 사소해보이잖아요. 용모에 대해서 사람들이 털 관리, 자기 수염 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굉장히 그게 ……. 그런데 12절 봅시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것보다 8절에 보면,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 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지옥 간다는 이야기인데 거룩한 백성에 합류되지 못한다는 뜻인데요. 이 말씀과 27절 말씀과 한 지면에 붙어있단 말이죠. 8절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고 지키는데 27절,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이걸 만약에 안 지켰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95점 쯤 됩니까? 빵점이죠. 왜? 거룩이 나왔으면 아까 이야기한 것 쉽게 합니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27절을 봐도 주님을 사랑해야 돼요. 그러니까 법을 지켰다는 게 나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지킨 주인공이 내가 부각이 되니까. 나 3절 지켰다. 누가? 내가. 4절 지켰다. 누가? 내가. 5절 지켰다. 누가? 내가. 그런데 옆에 사람이 7절은 못 지켰네. 그래도 3절, 4절, 5절 지켰으니까 나에게 못 지켰다고 하지 마. 난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나 지켰어. 또다시 내가, 내가, 내가가 계속 살아있게 돼요. 내가 살아있으면 판단하게 되고 결정하게 되고 선택하게 돼요. 그러면 그건 자기 거룩, 자기 사랑이지 주님의 거룩이나 주님의 사랑이 아니란 말이죠. 오늘날 세상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치던가요? 심심해서 기독교방송 본 적 있잖아요. 장경동 같은 코미디언 같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재록 같은 사람들 어떻게 가르쳐요? 세상에 있는 큰 교회 목사들 어떻게 가르치던가요? 여러분, 보이스피싱입니다. 보이스피싱을 그냥 걸리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 자기 것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걸리는 겁니다. 내 것 내가 지켜야 된다. 금융원에서 내 돈에 무슨 문제 있다고? 그럼 내 돈 지켜야지. 그래서 나온 게 보이스피싱에 걸리잖아요. 평소에 교회 가면서 평생 동안 지킨 내 의가 있어줘야 하늘나라 심판 받을 때 그걸 내밀면 천국에 합격한다는 그런 세상적인 악마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 교회라는 보이스피싱에 여지없이 말려든 거예요. “여러분, 그것 못하면 벌 받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처벌받습니까, 죽습니까? 죽지요. 수염 끝을 손상하면 죽어요. 머리 가를 둥글 깎으면 죽는다니까. 11절에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도적질하면 집행유예나 징역 5년 살거나 벌금 무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는 죽는다니까요. 왜? 도적질하면 갚아주면 되지 않느냐. 그게 아니고 나의 거룩을 뽑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지면이고 지역이라 했지요. 일차원적 평면에 붙어있어요. 그러면 성도에게 뭘 하냐? 평면에서 초월을 끄집어내야 돼요. 평면에서 하나를 지키면 같은 평면의 면적이 되잖아요. 제가 국민학교 때 먹은 급식 빵이 있어요. 옥수수 빵 줬어요. 냄새가 구수해요. 당번이 가져오면 선생님이 나눠주는 데 가난한 집 아이는 두 개 준다고요. 다른 아이들은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이지만 할 수 없어요. 반장 같으면 세 개 먹어요. 세 개 먹었다고 되는 겁니까, 맛있게 먹었다고 되는 겁니까? 어느 게 맞습니까? 이걸 주는 것은 배불리 맛있게 먹으라고 준 거예요, 한 개 먹으라고 준 거예요, 두 개 먹으라고 준 거예요? 맛있게 먹는 것은 하나, 둘이라는 양적 변환이 의미가 없지요. 율법을 하나 지키나 둘 지키나 의미 없다니까요. 율법을 준 것은 돌에 부딪칠 때 뭐도 부딪치느냐 하면, 나는 내가 의를 만들어서 만들어진 의로 천국을 뚫겠다는 이것이 박살나는 그 기쁨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어떤 율법을 지키더라도 단 하나를 지키더라도. 로마서 3장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따라서 모든 인간은 모든 율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같은 말로 예수님만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와 비교해야 돼요? 옆에 있는 김 집사, 박 집사와 비교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비교할 때 예수님처럼 못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모든 사람이. 목사고 장로고 간에 어떤 인간도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님처럼 믿음이 없어서 없어 보인다고 하는데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해요.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잘 들으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또 나타나서 내가 예수를 믿어줘야 돼요.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잊어버리게 돼요. 개코나 이건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만 모아놨구나. 평생 교회 다니면 하나님께 영광되지도 못할 그런 뼈다귀만 모으고 있었던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은 우릴 해골로 본다고요. 이건 에스겔 3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짝 마른 뼈 같이 봐요. 뼈에 말씀이 담길 때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안목이고 성령 받은 사람의 안목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칠칠맞게 이빨에 고춧가루나 끼고, 이러한 무례한 예의에 어긋나는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랑하는 사람한테 화낼까요, 등신 같이 웃을까요? 등신 같이 웃지요. 나한테 관심 있는가봐. 여러분,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지적질을 해도 그 지적질 자체로 굉장히 반가움으로 다가서야 결혼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랬는데 얘 낳고 난 뒤에 각 방 쓴다고요? 내가 소중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이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건 행운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