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강-갈 4장 4-5절(때)180506-이 근호 목사
287강-갈 4장 4-5절(때)1805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4-5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의 관심사와 오늘날 사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서로 다르지요. 관심사가 다르게 되면 쓰는 용어도 달라요. “때가 차매”, 또는 때가 되매, 아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들 이야기를 했고 사람을 볼 때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로 사람을 보지요.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갈 때는 항상 혼자 살아간다고 보는 겁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 혼자였고 끝까지 나 혼자로서 내 인생을 꾸려나간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거울 보세요. 자기 혼자 있지요. 옆에 귀신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 혼자 살아가기에 내가 앞으로 잘되고 못되고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잘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들이 왔다는 겁니다. 아들이 왔고 아들이 와서 보니까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얽혀 있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율법에 얽혀 있는 자로 보고 율법에 그냥 얽혀 있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요.
그 율법이 뿜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쏴대는 것이 있어요. 그 율법의 영향력 때문에 인간은 늙어죽는다는 겁니다. 늙어죽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 후에 아무 일이 없다면 그냥 죽지요. 그게 아니고 죽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들춰졌기 때문에 율법이 갖고 있던 그 벌칙조항, 저주의 독소에 의해서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내가 좀 늙었네.’ 하면서 올해 들어 좀 망가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링거도 맞고 의학적으로 수습은 해보지만 아무리 수습해도 지나간 청춘을 돌려받을 수는 없는 겁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평소대로 그냥 사는데 골조부터 해서 모든 것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고 몸 온천지 안 아픈 데가 없고 점점 주저앉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공기 탓인가? 기분 탓인가? 미세먼지 탓인가? 자외선 때문에 그런가?’ 그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피하는데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런 쪽으로 도피를 하지요. 백날 가봐야 그 마음가짐은,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네 옆에 율법의 촘촘한 그물망이 있는 이상은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감금되어 있고 갇혀 있다는 거지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빡빡하게 쪼아대는 율법의 그 저주에서 네가 벗어날 수 없고 운명처럼 죄의 지배아래 놓여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사도바울보고 항의할 거지요.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 라고 대꾸할 겁니다. 사도바울은 준비된 이야기를 할 거예요.
나도 몰랐었는데, 나도 몰랐다는 그 말은, 내 식으로 율법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공부를 해도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실을 인간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뭔가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이 오심으로, 또는 다른 말로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옛날 지나간 한 순간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해가면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물론 훌륭한 일을 했지만 그 때는 그 일로 끝나버렸어요. 종결된 거예요. 예수님이 정치범으로 십자가 졌다. 그럴 수 있겠지. 그 당시 사회가 악해서. 그러나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 그렇게 끝난 줄로만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보통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과 예수님이 태어난 것은, 세상을 읽어보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는 안목과 더불어서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죽었다, 이렇게 끝내면 그분은 그분이고 우리는 우리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그냥 살아나기만 한 것이 아니에요. 살아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오셔서 일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뭔가 하나 절차를 거쳤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니까요. 그냥 죽어서 없는 채로 “나 하나님이다. 너희는 이제 죽었어.” 이렇게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현대인이 사고하는 대로 혼자 있다고 여겼는데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다 인간을 죽여 버리고, 저주해버리고, 심판해버리는 환경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넓은 안목가지고, 그 포괄적 안목 가지고 지금 사도바울은 적절한 단어를 섞어서 우리에게 문장을 제시한 거예요. 그러면 오늘 4절, 5절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이 문장이 갖고 있는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사도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의 안목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이게 하나의 교리가 아니거든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현실 그 자체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편지를 쓸 때 하나하나 쓰면서 늘 염두에 두는 것은 뭐냐? 내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를 종합해서 이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나, 그 말이에요. 사람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 죄인이 만들어내는 지혜와, 죄인들이 모여서 머리 맞대고 구성해낸 그 진리 그것은 죄 아니냐 그 말입니다.
인간이 부지런히 노력을 하는데,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백날 노력해봐야 너희들을 꽉 조이고 있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지혜를 끄집어내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현재 너희들이 분투노력하고 있는 모든 시도가 도리어 더욱더 주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모독과 모욕으로 반복해서 번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 쪽에서 복음을 전해도 받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는 것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는 것, 분명히 둘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은 채로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5절을 지키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할 거예요. 왜? 시도하는 그 출발점이 자기니까. 믿으려고 할 것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속량에서 벗어난 자아상을 구축하려고 시도할 겁니다. 그게 가짜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기라는 겁니다.
사도가 이 말씀을 주는 것은, 이 내용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나 혼자 있다면 4절과 5절을 내가 내 이성으로 믿으려고 할 거예요. 나 아니면 나를 살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노력을 해도 내가 해야 되고, 성경공부를 해도 내가 해야 되고, 예배참석을 해도 내가 결심하고 선택해서 하고, 모든 것을 내가 해야 돼요.
그걸 제가 사기라고 했지요. 사기는 사기꾼만 만날 뿐이에요. 여러분이 이렇게 하시면 구원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는 이유가, 당신은 안 해서 구원 못 받았다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중립지역에 있는데, 중성적인 위치에 있는데 구원받는 정보를 제대로 입수를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시도를 안 했는데 이제 구원받는 비법을 알려줄 테니까 이것 받아들이시고 노력하시고 순전한 마음으로 진짜 ‘믿습니다’하고 매달리면 여러분은 구원되도록 사랑의 하나님께서 허용했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사람을 꾀이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신의 경험상 노력을 안 해봤겠어요? 모든 노력을 다 해봤잖아요. 그런데 노력했다는 그 노력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할 때 그 사람 중에서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본인도 그중 하나로 끼워넣자는 그 말이지요.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외부에서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나에게 집어넣어 준 것은 내가 노력한 보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기도 열심히 한 그 대가로 오신 것이 아니에요. 내가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 열매로, 그 애씀을 가상히 여긴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예수님 보내주마.” 그렇게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게 된 그 상황은 오히려 반대였어요. 본인이 사기꾼이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을 사기꾼으로 본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사기꾼으로 본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법을 줬고, 말씀을 줬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줬고, 그래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그 주체세력들은 전부 다 지금 사울 쪽에, 자기 쪽에 다 있다는 말이지요.
베냐민 지파로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 안에 누적된 진리가 정보처럼 꽉 차 있다는 말이지요. 한 두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숱하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리 아닌 것을 배제하고 진리 엑기스만 골라서 정통적인 신학으로서의 해석법을 사울은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거기에 준해서 볼 때 예수 믿는다,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다, 하는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용서할 수 없는 사기꾼들이라고 해서, 사울은 자신만만해서 그들을 처단했던 겁니다. 스데반집사 같은 경우에는 물론이지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을 때 사울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자신만만했지요. 확신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놈이 확신.
그놈의 확신을 그렇게 쓴다니까요.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본인은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올 때 “주여, 누구십니까?” 그냥 “나 예수다.”가 아니에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해서 앞에 ‘핍박’이라는 말을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 그 핍박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도 여전하더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에 반복해서 적용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누굴 핍박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요새 사람들은 다 점잖아서 새벽 다섯 시에 술 먹고 남 패기 전에는, 광주이야기입니다, 새벽 다섯 시에 술 먹고 패싸움하기 이 전에는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안잖아요. 벌금 물어줘야 되고, 구치소도 가야 되고 그게 귀찮으니까.
욱, 하는 것을 자제하고, 배운 값을 하고, 지성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도덕적 탁월함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고, 본질을 움켜쥐는 시도를 함으로서 그것이 나의 미래를 구원한다는 생각들이 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누굴 핍박한 적이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핍박이라는 방식으로만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나풀나풀 주님께서 천사의 날개를 타고 오게 되면 “웰컴, 주님이여” 이런 식으로 오는 줄로 알고 있어요. 핍박이라는 방식이 삭제된 채.
핍박이라는 말이 사울에게만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어찌할꼬, 라는 것은 구원받았던 유대인들이 하는 고백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사적인 죽음이고, 그 주변에 직접적으로 근접해서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에게 다 예수님은 핍박이라는 방식으로 죽은 분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줄 때에 취지는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없는데 뭔가 보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달라진 사람을 찾아내는 방식이에요.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주실 때 그것을 예고한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이렇게 시작해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농부가 밭을 갈 때에, 분명히 이 밑 지하 2미터 안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밭을 간 적이 없다는 그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은 본인이 미리 예상한 바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밭 갈다가 혹시 횡재해서 보물이 생기면 좋겠다는 그런 상상력을 미리 발휘한 적이 없어요. 하다 보니까 뭔가 덜컥 걸렸고 보물이었어요. 가서 그 밭을 몽땅 샀습니다. 이것은 예상 밖의 문제에요. 자기가 예상한 범주 안에 들어있지 않은 사실입니다.
내가 천국에 가요? 이것은 내가 예상하지 않은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돼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드리면 설만 넣어주겠지. 이것은 이미 예상이 되잖아요. 우리는 삼대 째 기독교집안이다. 이것은 예상이 된다고요. 태어날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이미 예상이 되잖아요.
예상이 되어버리면 준비한 것이 되고, 준비한 것이 되면 핍박이라는 요소가 빠져버려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예상도 섞이지 않은 채로 구원해요. 아예 공로라는 것은 일체 끼어들지 않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때가 차매,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때, 결정적인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헬라어로 ‘카이로스’라 해요.
결정적인 순간이 오매, 라고 할 때 그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없어요. 있더라도 일방적입니다. 자기위주에요. 인간은 자기연대기를 따로 설정해서 자기에게 결정적 순간을 뒤에 소급해서 평가를 하고 임의로 의미를 붙이거든요. 그것은 주님 앞에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것은 통하지 않아요.
결정적순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인간이 꿈도 꾸지 않았을 때, 갇혀 있을 때. 아주 쉬운 예가 미이라같은 경우입니다. 시체가 되어서 관속에 누워 있는 경우, 이집트의 미이라같은 경우는 피라미드 안의 관속에서 수천 년 동안 누워 있잖아요. 그렇게 누워있는 입장에서는 ‘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미이라의 관 뚜껑을 열었다면 이것은 미이라 입장에서 예상한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그 죽음의 관을 열어 제키는 그쪽의 입장에서 때가 차매, 때가 되매 관을 연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때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때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연결, 연결, 연결되기 때문에요. 23시간하고 24시간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새벽 1시하고 새벽 2시하고 연결되어 있잖아요. 이게 끊어짐이 없다는 말이지요. 새벽 1시의 인간이나 새벽 2시의 인간이나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겁니다.
새벽 2시 10분에 술 먹는 인간이 새벽 2시 11분에 술 먹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미친 사람이지요. 똑같은 인간이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 속에 놓여 있고, 시간은 중지되는 법이 없고 끊어지는 법이 없어요. 심지어 내가 의식을 잃더라도 바깥사람에게 물어보게 되면 “네가 기절한지 두 시간 되었어.”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기절해서 의식이 없더라도 계속 이어져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끊어짐이란 게 애초에 없어요. 그러면 끊어짐은 누가 결정하느냐? 인간 바깥에 계신분이 끊어짐을 결정하지요. 이게 시간의 끊어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끊어짐이 침투가 되면 인간이 연속되면서 구축해놓은 자기존재의 의미가 다 무의미가 돼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