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강-YouTube강의(상관없는 관계)180501-이 근호 목사
233강-YouTube강의(상관없는 관계)180501-이 근호 목사 233강, 제목은 ‘상관없는 관계’입니다. 북한 말에 “일 없습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 없다는 말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안 그러면 거절의 의미도 있죠. 도와드릴까요? 일 없습니다. 나는 당신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납니다. 그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오늘날 하나의 생물체가, 보통 유기체라고 하는데요. 생물체가 태어나면서부터, 세포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가두어두는 막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모든 생명체에. 우리 몸은 피부라는 것이 있습니다. 막 같은 것이 있어서 피부가 있죠. 피부가 있으면, 피부의 바깥과 피부의 안이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피부 바깥은 남의 세계고, 피부 안은 나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면 그 피부 안에 모아 둔, 가두어둔 그 안에 있을 때에, 그 안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의식을 생산해내는 일이 그 안에서 세포들이 협동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피부를 통해서 병균이 들어왔을 때에는 백혈구가 와서 이걸 막는다고 의학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목숨을 바쳐서 막아요. 그걸 면역이라고 하는데, 면역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지킬 것이 있고, 따로 챙길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물질이 있는 우리의 피부나 세포, 몸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에 덩달아서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도 그러니까, 나라는, 지금 나를 지키려는 이 자아가 팽창하고 이걸 사수하는데, 새롭게 들어오는 그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이냐, 아니면 방해가 될 것이냐를 알아서 측정하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본성이라 이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누가 지켜주겠습니까? 내가 스스로 지키는 것이 본성이라 이 말이죠. 이게 본성이 될 때에, 나 말고 다른 쪽이 왔을 때에 동지 아니면 적, 아니면 그 중립지역, 동지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는, 유보된 가치로서 대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타고났다는 그걸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자기긍정이죠. 자기지킴이 타고났는데, 어떻게 자아가 나에게서 예수님 쪽으로 건너갈 수가 있습니까? 못 건너가죠. 믿는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돼요. 믿는다는 말은 이용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우리는, 내가 그렇게 해석을 해버려요.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미 우리의 본성부터가 나 위주로 살면서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도와주세요.” 또는 “당신을 이용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아서 내가 이용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계세요.”라든지, 협조해달라는 그런 요구에 불과한 거예요.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당신 것을 빼낼 테니까 당신은 거기에 대해서, 내 일에 대해서 협조해달라는, 그런 내용 외에는 뭐 다른 내용이 있겠어요? 누굴 위해서입니까? 나를 위해서죠. 근데 성경 전체를 보세요. 모든 피조물은 누굴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있지, 피조물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대체 성경대목에서 뭘 믿는다는 말이죠? 결국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아무리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워도, 자기를 낮추고 비울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에, 그것은 누구하고 비교하는가 하면 예수님과 비교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의와 죄라는 것은, 자기한테 유리하면 의라고 보고, 자기한테 손실이 오면 이건 나쁜 것이라고 봐요. 악한 것으로 보고 죄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의와 죄조차도 이건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와 죄가 달라요. 그러니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할지라도 그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위주에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교회 나오라고 하면, “교회 나가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 나오는 그런 행위를 할 테니까, 그럼 교회는 반대급부로 나에게 무엇을 제공할겁니까?” 이래 나올 게 뻔하다 이 말이죠. “교회 나오시면 천국 줍니다.”이렇게 하면 또 오해가 되는 거죠. “아, 나는 내 위주로 멀쩡하게 있으면서 추가적으로 천국을 또 추가해서 받는구나.” 이렇게 돼버리면 그게 무슨 천국이겠어요? 지옥이겠죠.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다윗이 말년에 하나님께 찬송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찬송하는 대목을 보게 되면, 4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5절,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절,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찬송하는 이 내용은 다윗에게, 자기의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을 다 살아오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먼저 제시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언약이었습니다. 그걸 다윗언약이라고 하는데, 다윗언약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제시했기 때문에, 다윗은 그 언약 앞에서 언약을 받고 난 뒤에 뭐가 들통이 나느냐 하면, 나는 아무리 해도 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것이 아주 철저하게 파헤쳐지는 겁니다. 발각이 돼요. 아, 나라는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놓지만, 그 약속을 성취할 수 있는 그 능력도 없고, 그러한 자질도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언약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오실 때, 그걸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줬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못난 인간이 기여할 바는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내 구원받는데 있어서, 못난 내가 내 구원에 협조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일체 없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찬송을 하는 것은, 다윗의 마지막 때에,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며, 하나님의 원수에게서 자기를 구원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모든 시작과 끝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이 사실에, 다윗은 찬양하면서 고마워하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바로 언약 안에 있는 후대의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으로 나타나야 되죠. 하나님의 언약이 덮쳤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갈수록 나는 못난 자가 돼요. 무능한 자가 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남한테 쓸모 짝 있는 인간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하고 동일해요. 저 사람도 못났고 나도 못났어요. 다 같이 못났는데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고, 참여하게 된 거예요. 협조한 것이 아니고 참여하게 된 거예요. 도움 되라고 뽑힌 것이 아니고, 도움이 되지도 못했는데 일이 다 마무리 되는 것을 통해서, 오직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언약 속에 계신 분. 바로 찬미 받아야 될, 찬송 받을 역사를 두신 그분이 되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내가 알지 못했던 주님의 원수를, 우리는 그 원수 속에서 못 빠져나왔는데 빠져나온, 구원이니까, 흉악한 죄에서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빠져나왔다는 그 말끔함, 깔끔함을 원 없이 찬미하죠. 이것이 다윗의 찬송이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될 찬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