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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80427a 마가복음12장 1-10절(심각한 것)-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180427a 마가복음12장 1-10절(심각한 것)-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1-10절입니다. 1절,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 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2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3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절,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 지라6절,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 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7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8절,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10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 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래 되어 있거든요. 보통 비유라고 하면 천국비유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냥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라고 해서 직접적인 천국비유는 아니고, 반대로 이 세상의 것을 이제 비유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근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분이 포도원을 지었는데, 다른 나라에 갔고, 농부들에게 그걸 임대했고,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갔는데 농부들이 단합해서 소출을 못 주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래서 종을 보냈더니만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또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고, 점점 구체적으로 포악해지기 시작하죠. 성질 더 내죠. 그 다음에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저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죽인지라. 세 번째는 아예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마지막에 한 사람, 사랑하는 아들을 최후로, 마지막이죠. 마지막에 아들을 보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포도원 주인은 끝까지 안 나타납니다. 아들을 보내죠. 포도원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농부를 진멸할 때 나타나죠. 그러면 이 최후의 내용이 두 가지가 돼요. 하나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 최후가 되고, 그리고 필히 주인에게 대들었던 농부에 대한 진멸, 진멸이라는 용어는 어떤 용어냐 하면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젖먹이부터 다 죽이는 것을 진멸이라고 하죠. 최후에 아들 보내고 농부에 대한 진멸, 이게 되면 최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비유로 할 때, 이 비유의 목적이 뭐냐고 할 때는 최후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겁니다. 최후를 만들기. 마지막 만들기. 마지막 자취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을 만들어요. 마지막을. 마지막을 만드는데, 이 마지막을 만드는데 있어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 의중을 있는 대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되겠죠. 마지막에 된 것을 굉장히 고맙게 여기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황불로 진멸되는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고, “역시! 참으로 하나님은 시원스럽게 일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에 공감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싹쓸이에 공감. 마지막 싹쓸이에 공감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 두 가지의 기능, 최후에 아들을 보내고 농부를 진멸하는 것. 이 비슷한 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데, 1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열 처녀 나오죠. 열 처녀가 둘로 나누어집니다. 5대5로 나누어집니다. 그 다섯 처녀의 비유에서, 25장 10절에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문은 닫힌지라, 마태복은 25장 10절 이 대목을 보면 자꾸 노래가 생각이 나요. “문밖에 있는 그대” 박강성이 부른 그런 노래가 있어요. 문이 닫혔거든요. 문이 닫혔다는 말은, 못 들어간 사람이 뭘 아느냐 하면 문이 여기 있었는데 열리지 않고 끝났음을 문 밖의 여인이 이걸 아는 거예요. 이거 비슷한 CF도 있어요. Try속옷선전인데 닫힌 문을 손으로 팍 치는 그런 것이 있어요. 문이 있다는 사실과 닫혔다는 겁니다. 문이 있다는 것은 천국이 있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은 문이 없어요. 이 세상이 전부에요. 그리고 세상은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이 있어서 이쪽, 이쪽 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자체를 확장시켜나가는데 모든 인간의 역량을 다 동원 시킵니다. 지혜도 그렇고 인공지능부터 해서 생명공학, 미생물, 모든 인간의 천문학, 모든 학문은 이 세상의 범위를 넓혀서, 현재 인구가 76억인데요, 76억 인구를 다 같이 지구촌으로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어요. 이걸 확장시켜서. 만약에 문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노력이 필요 없어요. 빠져나오는데 열중하면 되지 확장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확장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만약에 대한항공 여자주인 이명희씨가 문이 있음을 안다면 그렇게 행악질 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교회에 가서 말씀 듣고 복음만 들으면 그만이에요. 먹고 던지고 욕하고 할 필요가 없잖아요. 왜 인간은 욕하고 던지고 화내고, 두 딸하고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왜 그렇게 성질내느냐 하면 문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문이 없어요. 문이 없는데, 이걸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문밖에 있는 여자에요. 문밖의 여자. 혹시 그 노래 듣고 싶으면 유튜브에 들어가서 들어보세요. 기타전주가 멋있어요. 문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이 아무리 넓은 아파트, 좋은 아파트에다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건 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상구를 막아버리죠. 문이 있다면 이것들이 완전히 거기다가 도배를 해버려요. 문 없다~! 영구 없다~~! 하는 것처럼. 문 없어~~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문을 닫아놓는 겁니다. 교회가 문 역할을 하려면, 교회가 교회 스스로를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믿습니까? 교회 봅니까? 그러면 천국 문을 이 교회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아셔야 됩니다.”라고 이래 나와야 돼요. 그런데 교회가 크면 클수록 문을 좋아하겠어요? 교회를 좋아하겠어요? 자기가 돈 바쳐서 크게 되었다는, 일종의 소꿉놀이죠. 교회놀이니까. 그 소꿉놀이에 완전히 매료되고, 그게 교인들한테는 완전히 멋진 취미에요. 사람이 혼자서 노는 취미도 있지만, 남하고 노는 취미에서는 뭘 기대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인정받기에요. 모든 취미는 남하고 놀 때는 반드시 인정받는 거예요. 교회에 교인들이 봉사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합니까? 그거는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고, 그 보는 눈은 자기가 인정받는 거죠. 그럼 자기가 인정받으면 본인이 문입니까? 아니잖아요. 관심이 나한테 쏠리면 문에게는 관심이 없어져버려요. 내가 여기 있음이 최고에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남한테 이렇게 칭찬받고 사랑받는 내가 있음으로, 나에게 있어서 더는 다른 인생이나 보람이라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근데 그것이 만약에 주님의 천국의 문을 가리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를 부인해야죠. 자기 십자가 져야죠. 지금 다시 한 번 봅시다. 최후를 알리는데 누가 알린다고요? 아들만이 최후와 연관이 되어 있죠. 또 하나 보탠다면 농부에 대한 진멸. 제가 두 가지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죠. 따라서 아들만이 최후를 알려준다면, 그럼 나는 무엇을 알려줍니까? 나는 오히려 최후를 가려버리죠. 최후 됨을. 최후의 문을 가려버리죠. 내가. 마태복음 25장 10절에서 “문이 닫힌지라” 이것은 제가 말로 하는 것도 되지만, 저쪽 문을 한번 닫아보세요. 닫으시고 그 안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자, 어느 정도 심각한 문제냐, 문이 닫혔죠? 열리겠습니까? 혼자 합격했어요. 혼자. 우리는 문밖에 있어요. 문 열어달라고 백날 이야기 해봐도 문이 닫혀있는 이상은 없어요. 자 나오세요. 지금 문밖으로 나온 것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나온 것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 다시 돌아온 겁니다. 오늘 강의가 어렵지도 않은데 복잡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들과 농부에 대한 진멸이 없으면 이 땅의 어떤 것도 최후의 징후관을 만들 수가 없어요. 최후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들이 등장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일괄적인 진멸이 없으면 이 세상은 어느 누구도 최후가 없는 거고, 최후가 없으면 닫힌 문이라는 개념 자체도 이것은 허망하게 되는 겁니다. “문 없어. 우리가 사는 영토를 넓히면 그게 행복이야.”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주시고 농부에 대한 진멸을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최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만드는데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포도원이 동원됐어요. 이 포도원이 동원됐다는 말은,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져 볼 테니까 여러분이 답변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의 행위하고 이 세상하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습니까? 라는 질문. 내 행동하나하나 하고, 이 하늘의 별과 달과 해가 지구에 뜨는 것하고 어떤 연관성을 갖습니까? 라는 질문. 이 질문에 대해서 탐구를 시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근데 그 사람은 탐구했어도 그것의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다만 우리는 거기에 예속된다고만 이야기했어요. 자연이 움직이는데 함께 움직인다. 끝. 그래서 인간이 살려면 자연의 이치를 파악해서 잘 적응하게 되면 우리는 사는 것이 편해지고,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역으로 나가면 우리는 사는 게 불편해진다. 고정도까지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1687년인가, 영국의 뉴턴이라는 사람이 등장해가지고 연관성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그리고 대자연의 행위를 중력, 또는 만유인력으로 설명을 해버렸어요. 설명을 했거든요. 이거는 다시 말해서 사과 떨어지는 것하고 사람이 절벽 떨어지는 것하고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같은 위치에서 떨어지는 거잖아요. 사과도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고 인간도 절벽에서 떨어지잖아요. 그 전까지는 사람이 절벽에서 왜 떨어지는 줄 몰랐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냥 자연에서 땡기는 힘이 있다고 하는 그걸로 끝났지, 저쪽과 저쪽 모든 게 하나로, 만유인력이라는 하나로 이야기를 못했어요. 만유인력이라는 건 두 물체사이에서 잡아 땡기는 힘이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여기서 뉴턴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어요. 이 힘은 어디서 생기느냐? 라고 하니까, 뉴턴이 말을 못했어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 힘은 어디서 왔느냐? 몰라요. 지금도 몰라요. 지금은 이 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주가 있는데 옆에 보이지 않는 다른 우주가 있다. 샌드위치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 중력이라는 것이 왜 생겼느냐 하면, 옆에 있는 보이지 않는 우주가 흔들리니까, 이 힘, 옆에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영향을 주니까, 영향력을 받아가지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중력이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이게 다중우주설이에요. 다중우주설. 이거는 수학적으로는 되는데, 실제적으로는 지금 증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다중우주설이라고 해가지고 샌드위치우주설. 여기서 만나는 시공간이 달라요. 이쪽에서는 미래지만 이쪽에서는 과거가 될 수가 있고. 여기에 상대성원리를 동원해서 설명을 하는데, 양자역학이론을 설명하거든요. 이게 14차원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풀어내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도 설명 못하는 것이 있어요. 힘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설명이 되는데, 내가 지우개를 가지고 칠판을 지우게 되면 달한테 어떤 영향을 줍니까? 그거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바둑을 둔다든지, 김밥을 먹게 되면 내일 날씨가 바뀝니까? 이 천기가 바뀝니까? 안 바뀌죠. 그러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사람이 자연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누구나 할 수가 있는데, 그게 인간에게 영 성이 안 차요. 인간의 욕망,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은 어디까지 요구를 하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대자연이 변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걸 꿈꾸면서 나왔던 책이 바로 삼국지에요. 제갈공명의 개인적인 의사(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가 바람의 방향을 바꾸잖아요. 자, 이쯤하게 되면, 성경에서는 아까 이야기한 이 세상은 어떻게 연관되어져 있는지 그 이유가 나왔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세상은 바로 누구의 행위에 의해서? 예수님의 행위에 의해서 이 세상이 전부 다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를 위해서.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는데, 아들을 보내기 위해서 뭘 준비를 했느냐 하면 포도원을 준비를 했거든요. 이 포도원은 바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구약에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잡하지만 자세하게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아는 상식으로는, 저도 상식밖에는 모르지만, 이스라엘을 아는 상식으로 보면 약속의 땅에서 무슨 전쟁이 일어나니까,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고 해가 멈췄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한테 쫓기니까 홍해 바다가 갑자기 갈라졌습니다. 자, 그러면 이 대자연은 뭔가 지상에서 특별한 움직임에 상응해서 같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죠. 그걸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뭐냐 하면, 언약에 준해서 대자연은 보조적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언약에 준해서 대자연은 보조적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언약에 준해서. 이렇게 되니까 뭔가 상당히 깔끔하죠. 언약에 준해서. 깔끔한데, 이 깔끔한 결론을 모른다 치고, 아까 제가 한 질문, 이 대자연과 인간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다시 이야기하면, 정답을 이야기했는데요. 자, 지금 대자연의 움직임과, 얼마 전에 비가 왔잖아요. 대구 근처에 있는 청도의 우물 저수지 댐은 25퍼센트밖에 안돼요. 경주고 뭐고 하도 비가 안 와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가 안 왔어요. 근데 얼마 전에 비가 왔단 말이에요. 7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이것도 오른 거예요. 근데 비가 왜 왔느냐 하는 겁니다. 가물기 때문에 비가 왔다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가 “가물면 안 돼. 가물면 안 된대.”라는, 우리의 애타는 심정을 하나님이 이해해서 비가 왔다. 그러면 우리의 심정이 애타면 다 이루어지던가요? 오늘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맘에 드는 남자를 찾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하겠습니까? 드라마 얼른 보니까 이런 내용도 있어요. 그 아가씨가 기도하기를 내가 지금부터 눈감고 있다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남자를 무조건 나는 사귄다. 그래서 눈을 떴는데, 실제로 자전거 타고 한 남자가 지나가요. 가만히 보니까 아는 사람이라. 옛날에 자기가 찾던 사람이라. “으아악~~! 오 신이시여! 하필이면 내가 기도한 것이 왜 이렇게 이루어집니까?”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맹세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입다가 전쟁이 났을 때 무슨 맹세를 했습니까? 승리하고 돌아오게 되면 제일 먼저 나를 마중 나온 것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했죠. 어디서 닭이 두 마리 정도 나올 줄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양이나 닭이 나올 줄로 알았지, 자기 딸이, 그것도 시집도 안 간 자기 딸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마 전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모양이라. 사람은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유대 랍비문학이라는 게 있어요. 랍비, 유대스승들이 성경해석 하잖아요. 구약성경 할 때 이런 게 있어요. 어떤 랍비는 하도 비가 안 오니까, 자기 둘레에 동그라미를 쳤어요. 동그라미를 쳐놓고,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기 전까지는 내가 이 동그라미 안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않겠습니다.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했더니만 비가 왔어요. 그게 유대교에서 유명한 일화에요. “하나님한테 협박 공갈치니까 하나님도 겁나서 들어줬더라.” 뭐 이런 거예요. 그럼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여러분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대자연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그냥 기도 정도, 그리고 그 중간에 끼어드는 게 없죠. “우리의 소원대로 이루어주시옵소서.”라고 하죠. 그런데 정답은 이겁니다. 인간과 대자연에 뭐가 끼어드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든다. 이게 정답이거든요. 이게 정답인데, 이 정답을 알 수가 없죠. 언약이 끼어들 때,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경우를 봤을 때, 이게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 이제 슬슬 제가 이야기한 취지를 여러분들이 간파를 할 거예요. 세상이 우리를 둘러싼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반대하는 괴물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있다는,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언약이 오면서 그것이 드디어 실제상황으로, 이렇게 피부껍질을 벗기듯이 본질을 드러내는 그 작업에 예수님께서는 나서시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만 보게 되면 또 새삼스러워요.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되어 있고, 그게 어떤 형편이냐 하면,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따랐다는 것은 자기가 따르고 싶어서 따른 것이 아니고 이거는 강제조항이죠.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영이 뭡니까? 불순종의 영이죠. 그 불순종의 영을 우리 힘으로 나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가 없죠. 그래야 통치라는 것이 성립이 되니까. 통치는 뭡니까? 협상이 아니에요. 이거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그냥 우리는 그 영에 사로잡힌 거예요. 불순종의 영에 사로잡힌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 이후의 상황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대안이 없고 대책이 없어요. 대안도 없고 대책도 없고, 그저 사는 게 힘들면 “신이시여! 살려주옵소서. 내가 눈을 뜰 테니까 맘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또는 “이렇게 비가 안 와서 농사하기 힘드니까 비를 내려주옵소서.” 그저 우리의 기도가 효과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 대자연의 움직임이 나의 순수한, 나의 진심어린 충성과 정직함, 열심, 열성, 온유함, 이게 성경에서는 순전한 마음이죠. 이걸 마태복은 5장의 용어로 쓴다면 마음이 청결한 자. 청결 알죠? 청소기로 윙윙~~하면서 청소하는 것. 마음이 청결한 자는 뭘 보리라? 천국을 본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날마다 마음만 깨끗하게 소제하고 청소하면 되죠. 찌꺼기 없이. 이거 불교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오면서 언약을 모르고 자기 괴로움을 안고 교회오고, 교회 와서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하든 관계없이 자기는 그 말씀가지고 마음을 깨끗이 해서 정성을 다하여 순전한 믿음,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신을 향하여 뭘 달라고 합니까? 자기의 결핍된 것을, 이 어려운 상황을 빨리 회복시켜주시고, 더 낫게 해주시고, 숨통이나 좀 트이게 해주시고, 내 갈 길을 좀 밝혀달라고 이렇게 빌겠죠. 뭐가 빠졌습니까? 지금 뭐가 빠진 거예요? 언약이 빠졌잖아요. 언약이. 그럼 언약이 빠졌다고 한다는 것을 기성교회에서 들으면요, “그럼 언약 집어넣지. 뭐.” 이렇게 하거든요. ‘아, 이게 그냥 소금물 떠놓고 순전하게 비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뭔가 추가적인 것이 필요하구나. 뭐 언약이 빠졌다고? 십자가 빠졌다고? 그럼 집어넣지 뭐.’ 조미료 막 치듯이 그걸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마음과 들어오는 언약과 화합이 될 수 있어요? 없어요? 화합이 안 되죠. 근데 사람은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예수, 전능하신 하나님, 온갖 금식에다 철야에다가 기도에다가 간절한 마음, 이걸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언약이 들어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최후 만들기에 나섭니다. 최후 만들기. 뭐가 최후거리라는 말입니까? 순전한 마음으로 내 형편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달을 보고, 해를 보고, 별을 보고 빌던 그 마음가지고, 하나님, 예수님, 뭐 여호와, 삼위일체한테 비는 이것이 바로 문밖에 여자. 진멸당해도 마땅한 그 사고방식을 주님께서 오셔서 까발리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쯤해서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봅시다. 대자연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모든 대자연의 움직임은, 이 대자연 스스로를, 모든 것을 최후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함 중심으로 대자연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함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실 모든 것 중심으로 대자연은 움직여가는 겁니다. 그 대자연 속에 포도원, 이스라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고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냥 싱긋이 웃죠. ‘아, 그들이 망해야 되는구나. 우리가 망하는 스케줄이 우리한테 꼭 필요하구나.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죗값으로 죽는 것은, 이것은 반드시 있어야 될 필연적인 과정이구나. 망해야 된다면 기꺼이 망해야하는구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언약을 위해서, 주님의 하신 일을 위해서 내가 망해야한다면 기꺼이 망해드리겠나이다.’ 이렇게 싱긋이 나와 줘야 하는 거예요. 그냥 나오면 안돼요. 싱긋이 웃으면서 나와야 돼요. 망하라고 있는 세상, 망해야 마땅하죠. 망하라고 있는 세상.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지면 흙이 바짝 말라가지고 다 부서지고 손가락 사이로 알갱이가 다 빠져나가잖아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인간이라니까요. 흙이 돼서 부서지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면 뭐는 인간이 아니에요?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이건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박물관에나 어떤 미술관에 가보면 조각으로 만든 흙이 있잖아요. 그걸 오함마로 깨고 도끼로 깨면 바스라지면서 완전히 형체도 없어지잖아요. 그게 우리라니까요. 그게. 그냥 한 3,40년, 50년, 60년, 70년, 70년 이상 여기 계시지만요.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이거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아닌데도, 잠시 살아있으니까 지금 내가 인간인가? 하고 자기가 스스로 허망한 망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봐야 나중에 흙이 될 걸. 그래서 생각해봐야 해요. 왜 흙인데, 흙이 인간인데 왜 우리는 살아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해요. 왜 살아있는 인간을 왜 죽이십니까? 라고 할 게 아니고. 질문의 취지를 바꿔야 한다니까요. “진즉에 흙인데, 왜 아직도 흙이 안 되고 촐랑촐랑 까불고 있습니까?”라고 한다면, 이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한 용도로써 사용되기 위해서. 왜 니가 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분이 하신 일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잠시잠간이나마 나타났다가 잠시 후에 사라지는 겁니다. 흙이 되어서 바스러지는 거죠. 바스러지는 것이 아니고 밟아야 돼요. 없어지는 겁니다. ‘미이라’라는 영화에 보면 적을 손에 쥐게 되면 전부 다 형체도 없이 흙이 되어버리죠. “내가 지금 누구하고 싸웠지?” 흙하고 싸운 거예요. 혹시 여러분 이웃에 별난 이웃이 있거든요. 여러분이 싸울 때 흙하고 싸운 겁니다. 오늘도 60대 흙하고 뚱뚱한 흙하고 만났잖아요. 둘 다 흙이라니까요. 옆에 또 여자 흙하고 만났어요. 6시 17분에. 리설주가 와가지고. 이설주 라면 말도 안 해. 리설주야. 흙 네 명이 만났다니까요. 흙 네 명이 흙 되기 위한 만찬을 하고 있어요. 제가 방송한다면 흙 중계방송이에요. 다시 한 번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최후를. 마지막 최후를. 그런데 언약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살아야 되는 것이 정상인줄 알고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살아야 되는 이것이 옳은 일이고, 죽으면 이것은 수치스럽고 뭔가 인생 실패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불순종의 영으로 통치받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순종이냐, 불순종이냐가 어디서 이게 실체가 드러나느냐 하면은, 언약이 투입될 때, 언약이 개입되면서, 아, 순종한 사람은 아무도 없음이 드러나죠. 모든 사람은 필히 불순종 외에는 나올 게 없어요. 불순종. 불순종 외에는 나올 게 없는데, 이걸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했다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죽는 것이 언약 입장에서는 마땅한 거예요.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돼요.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당연한데 무서워한다는 말은, 진짜 본인의 원천과 본인의 근원을 저항하고 반대하는 요소가 우리에게 무서움이라는 느낌을 제공한 거예요. 그럼 그 느낌을 누가 줬습니까? 보이지 않는 악마로부터 주어진 거죠. 죽는 것이 마땅한데, 우리 죗값으로 죽는 것이 마땅한데,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무조건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무슨 고집이 그런 똥고집이 다 있어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 흙에서 만들어졌으면 어디로 환원이 돼야 됩니까? 흙에서 왔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되잖아요. 돌아가는 것이 이게 안심이고 안정화잖아요. 안정화. 안 돌아가게 되면 착각에 빠진다니까요. 본래 모습으로 안 돌아가게 되면 진짜 도깨비, 허깨비, 공유가 돼요. 도깨비 공유. 지 자리를 못 찾고 맨날 망상 속에 떠돌아다녀요. 망상 속에. 동창회에 가서 두 사람이 만나면 망상A와 망상B, 둘의 만남이에요. 인간의 만남은 망상과 망상의 마주침입니다. 내놓는 이야기가 전부 다 망상적인 이야기만 내놓아요. 성령 받은 사람은 복음만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착각과 망상밖에 안 나옵니다. 어디서 문제가 있으면 어디서 잘못 된지를 몰라요. 실컷 그렇게 살다가 문 닫힌 후에, 문밖의 여자에요. 오늘 쉬는 시간에 문밖의 여자를 들어야 되겠다. <문밖에 있는 그대-박강성>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고, 닫혔는데, 아니 문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어요. 이 세상에. 이 세상 말고 저 세상으로 옮겨가는 문이, 이 세상에 있으면 이 세상에 문이 있다 이 말이죠. 야곱의 벧엘이 아닙니까? 하늘의 문. 하늘의 문이 있다는 말은 이거(세상) 포기하라는 뜻이거든요. 그리고 이 땅에서 알았던 모든 추억과 이 기억들은 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는. 이 땅에서 메달 따고 뭐 공부 잘하고, 판사 되고, 의사되고, 이거 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요, 이 세상의 마지막을, 솥에다가 불을 때가지고 부글부글 끓는 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을 푹 고아내는 가마솥(세상) 안이거든요. 좀 덥나? 상당히 더워요. 이 안은 지옥 같아요. 여기서 좀 숨통이 트이도록 문으로라도 좀 빠져나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어요? 성령께서는 뭐냐 하면, 성령은 이 땅에 계시다가 빠져나가신 분의 영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 땅에 같이 살아있어도 이미 우리는 합격을 받은 사람, 이미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 바깥에, 천국 문 저쪽에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이 땅에 살려두신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사명. 성령을 주신 것은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사명이 뭐냐 하면 약 올리기에요. 어떻게 약을 올리느냐, “세상 끝났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너는 진멸의 대상이야. 끝났어.” 두 가지 요소에요. 아들이 왔으면 뭐 환영하고 이거 없어요. 아들이 왔다는 것은 진멸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아들을 환영하면 될 거 아니냐? 아니요, 아들을 환영할 것 같으면 종들도 환영했겠죠. 종 보냈을 때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은, 끝장내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거예요.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왜 아들이 와야만 끝장이 나는가? 라는, 그 문제겠죠. 왜 아들이 와야 끝장이 나느냐? 우리가 상식적으로 하는 선에서 일단은 해답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 언약이기 때문에. 기존에 노아, 아브라함, 모세... 이렇게 왔지만, 그 언약은 자체로서 완성이 아니고 완성을 내다보는 겁니다. 마지막에 아들이 올 때까지 그냥 길로써 온 거고. 터를 닦은 거고요. 마지막에 아들이 오게 되면 세상은 이제 끝장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나오죠. 10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절,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래 되어 있죠. 진멸하게 되면 뭐가 생기죠? 마지막이 생기죠. 그 마지막을, 그 마지막의 내용과 의미를 모퉁이 돌로 삼아요. 그게 오늘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게 시편 118편에 나온 내용인데. 그 다음이 중요해요. 이것은 뭐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라고 되어 있죠. 이것이 구약하고 신약 마가복음 12장 10절하고 달라요. 시편 118편 22절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에요. 시편 118편에서는. 시편 118편 23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되어 있고, 마가복음 12장 10절에는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구약은 ‘여호와’고 신약에는 ‘주’로 되어 있죠. 그러니까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그냥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 약속이 먼저 제시되어 있고, 약속된 내용만 성취해버립니다. 약속의 내용만. 그래서 첫째 시간을 마치면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세상은 필히 멸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약속을 이루기 위해 세상은 필히 멸망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시편 118편에 의해서, 여호와께서 그렇게, 어르신께서 그렇게 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또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행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그 돌이 새로운 집의 모퉁이 돌이 되는 그 반전을 하나님이 즐겼다 이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원했던바다 이 말이죠. 버리는 일은 하나님께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포기한 사람,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요, 굉장히 기분이 상쾌하고, 자일리톨 껌처럼 싸~하면서 시원하고, 온몸에 산뜻한 맛이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을 안 하거든요. 대표적으로 자기 생각 안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만 끝까지 한번 보세요. 자기 생각 합니까? 자기 처자식 이런 것 생각해요? 딸 생각하고 뭐 이런 것 있어요? 없지요. 도대체 스데반 집사에게는 나라는 것이 없어요. 나. 어떻게 사람이 돼가지고 자기를 챙기는 것이 없다니까요. 자기 챙기는 것이 없으면 자기를 지킬 것도 없지요. 이 세상의 모든 염려와 걱정은 어디서 생깁니까? 지킬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킬 게 있기 때문에. 아까 인정받는 것, 자존심, 지킬 게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어디서 누적된 겁니까? 세상 살아가면서 좋은 것 다 모아놓으니까, 이걸 지키려고 한다 이 말이죠. 버리기 위한 기능 때문에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인간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는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서, 이제는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지키겠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두 형제가 나오잖아요. 가인은 지키겠다는 것이고 아벨은 버리겠다는 것이고. 가인이 지켜가지고 온 세상이 가인의 후손이 되어버렸잖아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뭡니까? 자기 지킴의 가치와 의미를 훼손했다는 이유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한번 보세요. 술을 왜 먹습니까? 술 먹은 이유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 다음에 담배는 왜 피워요? 자기 기분을 괜찮은 쪽으로 지키기 위해서. 술 먹는 이유는 기분을 업 되게 하기 위해서. 아주 기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담배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행동하나하나가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그 표현을 감추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그냥 발산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사람들이 새벽기도하고, 특별새벽기도를 왜 합니까? 교회부흥을 하든 뭘 하던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특별새벽기도를 하는 이유가 평소에 하는 모든 것, 그 사람의 모든 사고방식도,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그 사고방식 외에는 없어요. 그게 바로 괴물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충돌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흙으로 와서 흙으로 없어지라고 만들어놓았는데 인간은 발악을 해요. 내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라고 물으면 답변이 없거든요. “내가 없어지면 저 딸은 누구하고 사느냐?” “누구 딸인데?”라고 물으면 그것도 할 말이 없어요. “딸을 지키기 위해서 어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 딸은 누구 딸인데?” 내 딸이 아니거든요. 그럼 내가 지킬 것이 없거든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인간은. 언약이 오지 않으면 인간은 이유 없이 살아요. 이유 없이, 무조건, 악마가 시키는 대로, 지켜야 돼! 내 것 지켜야 돼! 평생 일구어놓은 것 내 것 지켜야 돼! 이거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무심코 나오는 그 사람의 행위, 말씨, 말투, 모든 것에 전부 다 영향력을 주는 겁니다. 그것이 영향력을 줘가지고 심지어 하늘에 있는 해, 달, 별을 보고, 그 다음부터는 저게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변동되라고, 온갖 미신적인 요소를 다 뿜어내가지고 아예 한을 품죠. 내일 동창회에서 놀러 가는데 비 오면 안 된다고 하나님한테 협박하는 거예요. “다음 토요일 비 오면 안 됨니데이~ 우리 놀러가기 때문에.” 마치 아이들이 수학여행 갈 때에 비 오면 안 된다고 기도하는 것 하고 똑같아요. 아이들이 시험 칠 때에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아는 것만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왜 나와야 되는데? 그래야 내 점수가 높아지니까. 왜 점수가 높아져야 하는데?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니가 왜 인정받아야 되는데? 몰라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자비가 없다. 오늘 강의 제목으로 “자비가 없다”에요. 이 세상은 자비가 없습니다. 자비가 없는 것은 우리한테 합당한 조치에요. 우리는 자비가 없어야 될 대상자입니다. 우리가. 근데 우리가 만약에 사랑과 자비를 원한다면 반드시, 필히 뭐냐 하면 내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사랑을 주옵소서.”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십자가, 피, 긍휼하는 이것도 문밖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구원받은 자는 내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우리는 내 것이 없고, 그냥 빈 그릇이에요. 자아가 빠져나간 빈 그릇에 긍휼 채워주면 긍휼 채워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 채워주면 진노 채워지는 겁니다. 그것뿐이에요. 예수님의 두 속성, 하나는 자비고 하나는 진노입니다. 구원자, 심판자니까. 이 속성을 빈 그릇이라는 조건하에 이것이 주어지거든요. 빈 그릇이 뭐냐 하면, 최후로 그것이 마땅히 내가 당해야 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최후를 유발하는 요인으로써, 내 것을 지키려고 했음을 우리가 자인이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제 슬슬 감이 오죠. 정리가 되죠. 왜 주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냥 진노하면 되는데, 사전에 이 말씀을, 진멸한다는 이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그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 진노가, 아들의 죽음이 너희들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과. 너희들 속에 있는 괴물이 예수님의 하는 일에 대해서, 언약에 대해서 극구 반대하는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예의 차리고, 겸손하고, 좋은 사람 같으면 대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러면 내가 아들을 한번 보내봐? “아이고, 아들이 오셔도 저는 환영하죠.” 정작 아들이 오니까, 그 아들이 현재 있는데서 순수하게 융합되어 있는 아들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아 마땅함을 노출시키는 쪽으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그런 쪽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죠. 우리의 본 속성이, 내 것은 내가 지켜야하니까 예수님을 제거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에 협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우리가 부정적인 역할로서 협조한 셈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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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7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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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