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7강 (안정성), 마태복음 99강( 완료자) 180424
안정성 (삼상 12장16-25절)
대전- 37강
이근호
2018년 4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2:16-25
(삼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17)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삼상 12:18)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 12: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삼상 12: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1)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삼상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무엘 상 12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양식이 있어요.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대해야 되고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해야 되고 인간끼리 상대할 때는 저 사람은 이것 좋아하고 저 사람은 그렇게 하니까 마음을 열더라! 는 것이 있는데 평소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루거나 상대할 때의 방식을 우리도 취하거든요. 그런데 그 방식이 하나님에게도 통하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겐 안 통하지요. 하나님은 형식이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같이 교제 할 수 있는 방식이 없어요. 그때 그때 달라요.
인간은 자기가 상대방을 다룰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 손에 다뤄지질 않습니다. 인간 입장에선 큰 낭패지요. 붙잡고 요청을 하든지 요구를 해야 되는데 잡히지 않으니까 돈으로 잡을 수 있다면 십일조로 붙잡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기도로 불러내면 쪼르르 달려와 뭘 도와드릴까요? 이러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형식이 없으니까 인간 쪽에서 다룰 방식이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형식이 없다는 말은 인간에겐 형식이 있는데 형식을 영어로 하면 폼이죠. 인간은 폼 잡고 남하고 상대해요. 폼 잡고 남하고 상대 할 때 염두에 두는 게 뭐냐하면 내 폼은 안 망가지겠다는 게 있습니다.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데 상대방으로 인해 망가져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는 내 것은 안 다치고 저 사람은 망가지든 말든 나에게 이익만 되면 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상대방에게 다가섭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하던 행세가 그대로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해요. 난 안 망가지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까지 확보하면 나에게 이익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박식들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가 다 나오지요. 성깔 다 나오고 평소에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다 나와요.
방금 이 이야기가 하나님은 형식이 없다고 했지만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냐하면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떻게 만나는 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오지요. 인간은 자기는 안 다치겠다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이거든요. 그 못된 성질머리를 친히 손대십니다. 평소에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으로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는 거에요. 14개월 된 아기가 있는데 지금 이런 행세를 십년 이십년 가도록 부모가 가만 두지 않지요. 뜯어 고쳐야 되요.
자기 하고 싶은 것 땡깡 다부리고 어릴 때는 때릴 데도 없어 봐 주겠지만 좀 더 크면 자기 밖에 모르니까 손을 대야 대겠지요. 왜 손대야 하냐하면 그래야 내 집 사람이 되요. 같은 훼미리가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백성을 만드는데 세상에서 하던 더러운 행세를 용인 안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자기 아들 같으면 징계한다고, 징계한다는 말은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꾸도록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곱게 안 바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뜻대로 안 되게 바뀌게 하시는 겁니다. 수정시키는 거지요. 주객을 전도 시키는 겁니다.
(히 12: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방금 이야기한 전제가 뭐냐하면 1.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상대 하듯 그 인간성 가지고 교회에 와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자기 손아귀에 쥐려고 한다. 2. 주님은 자기 백성이라면 그것을 용납 못하고 바꾼다. 3. 바뀐 인간들이 이 세상에 섞일 때 전에 인간을 다루던 방식 말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인간들을 상대할 것인가? 바뀌었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상대하시겠지요. 그게 뭐냐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남들도 알게 되는 데 달라질 때 어떻게 달라지냐가 중요하겠지요. 그것이 사무엘상 12장 16절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가만히 있으라 했지요. 이게 정말 어려워요.
천국에선 본인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일체 안 됩니다. 군대 처음 입대하면 본인들이 소지하던 물건을 집으로 더 보내주지요. 다 버려야 하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남에게 안 지려고 애썼던 모든 것들, 무기라는 말이 적당한데 세상은 전쟁입니다. 싸움이지요. 그러면 누굴 위한 싸움일까요? 자기를 위한 싸움이지요. 안 싸웠으면 덜 피곤하겠는데 출근 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집구석에서 싸워요. 싸움의 연속이에요. 자존심 싸움이지요. 내 것 지키겠다는 싸움인데 가만히 있으면 지니까 설치는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성경 좀 보신 분들은 이 대목이 어디에 또 나오는지 아실 거에요. 출애굽 할 때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를 만들 수 있어요. □가만히 있으라 라고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는데 뭐냐하면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발시키고 + 가만히 있으라가 되는 겁니다. 난감한 상황에서 난감한 것은 누가 난감하냐하면 기존의 내 생각이 난감하지요. 그러면 난감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난감했던 것이 어떻게 바뀌게 되냐하면 감사와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요. “아! 내가 까불었구나! 주님 앞에 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 게 또 까불었구나!”나는 죽어도 되는데 꼭 살아야 됩니다. 남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져도 되는데 져서는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고집을 부렸구나 라는 변화된 인간성이 여기서 결과물을 내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내 계획과 기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난감한 상황 앞에 마주치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되는 거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나에게서 힘을 뺀다가 되지요. 하나님과 교제 할 때는 나에게서 힘을 빼는 거에요. 야곱이 환도 뼈를 다쳤잖아요. 왜 그런 줄 알아요? 형을 이겨 보고 부자 되려고 애썼던 축복받으려고 했던 저력이 한방에 다 주저 앉아버린 거에요. 다리를 져는 거에요. 그건 나에게서 힘을 빼는 거에요. 왜 빼야 되느냐? 만약에 나에게 있는 힘이 비축 된다면 내가 자기를 포기 안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집착과 아집을 계속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희망이나 가능성, 거위의 꿈. 이런 노래의 가사처럼 나에게 있는 힘을 빼지 않고 모으려 하는 겁니다. 사무엘 상 12장 16절부터 보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있어라 이 공식을 하나님 쪽에서 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이 천국에선 안 통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남과 사귈 때 나는 다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빼먹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론 안 되겠지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헤 찾아오게 되면 내가 남과 상대하던 방식은 나와 하나님의 만남에선 그것이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통하지 않지요. 통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 하겠지요.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대체해야 되는 거에요. 집어넣는 방법이 ( )가만히 있으라 앞에 어떤 상황이 들어가겠습니까? 난감한 상황을 일으켰어요. 난감한 상황의 특징이 뭐냐하면 기존에 내가 예상하던 것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상황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불가능한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는 난감한 상황이 되고 평소에 내가 남과 상대하던 방식은 뭘 집어넣어도 실패도 끝나버려요. 이건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 ”
가만히 있는 그것이 천국에 합당한 성품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어떤 식으로 구원받는다? 늘 가만히 있는 방법으로 구원 받아요. 그러면 그 방법은 인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 아니에요. 인간은 절대 자기 힘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그럴 위인들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걱정이 돼서 못삽니다. 뭔가 나름대로 온갖 수단을 다 써야 되요. 기도를 하던 십일조를 하던 철야를 하던 모든 해보는 거에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가 평소에 하나님을 다루던 세속적인 방법은 다 토해내야 되게 하시지요.
그동안 십일조 했다고 하나님을 장악하려하고 기도해서 내 편으로 만들고 선교, 헌금, 목사 섬기기 이런 것을 해서 하나님을 다른 사람 다루듯 했던 악마적인 더러운 심보가 난감한 상황 앞에서 다 무용지물이 되고 소용없다는 것이 다 들통 나지요. 가만히 있는 것이 천국 성품이라면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선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어린 아이같이 가만히 있는 거에요. 어린 아이의 특징은 나름대로의 계획이 없어요. 자기 기대도 없고 자기 꿈도 없고 비전도 없어요. 그냥 본성대로 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인지 마치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될 정도로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정리하자면 ‘나’라는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행함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고 다시 어린 아이 같이 될 마음도 없고 엄마 뱃속에서 다시 들어 갈 수 도 없고요 이 말은 이미 엎어진 물이라는 말이지요. 쏟아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게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