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413b약2장8절(저승사자)-이 근호 목사
안양20180413b약2장8절(저승사자)-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합시다. 첫째시간에 마지막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리 되어있지요. 지옥의 권세가. 그러면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면 이것은 주님만이 지옥의 권세를 다룰 수가 있어요. 주님만이. 인간은 지옥의 권세를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미 파묻혀있기 때문에. 다룰 수 없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고, 다만 나타날 것은 있어요. 어렵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내가 나타내는 것은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나타낸다고 해서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께서 행하신다면 나는 뭔가 나타낼 수가 있는 거예요.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어려울 때는 성경에 나오는 쉬운 예를 들면 됩니다.
1월 15일이 유월절이다. 출애굽기12장13장에 보면 유월절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사자가 피 발린 문설주를 보고 넘어갔는데, 그 때가 낮이 아니고 밤이었어요. 그런데 이 유월절 사건이 있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한테는 유월절을 지켜야 됩니다. 유월절을 지켜야 되는데 유월절을 지키는데 각각의 소품들이 있어요. 시간적으로서는 뭐냐 하면 밤이어야 되고 낮에는 안 되고요. 밤이어야 되고, 양고기를 먹어야 돼요. 양고기 섭취해야 되고,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발효되지 않는 빵을 먹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할례 받은 자만이 이 유월절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밤이고, 양고기 섭취해야 되고, 발효되지 않는 떡을 먹어야 되고 이걸 무교절이라 해요. 이 떡을 무슨 떡이라 하느냐 하면 고난의 떡이라 합니다. 세 번째는 참석한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돼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유월절 1월 15일 보자는 겁니다. 그럼 1월 14일과 16일 밤과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겁니다. 맨 그 별이 별이고 달이 달이고 그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겁니다. 유월절 참석할 수 있는 애들이 이런 이야기해요. “아버지, 지난밤과 오늘 밤의 차이점이 뭐예요?” 이리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고 아까 이야기하고 연결시켜 봅시다.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은 지옥을 통해서 행할 게 있다? 없다? 행할 것은 없다. 그러나 나타내야 될 것은 있다. 이리 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제가 밤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밤은 누구한테나 밤이에요. 공평해요. 어떤 사람은 밤인데 어떤 사람은 낮 되는 거 없습니다. 서울시에 밤이 온다면 모두다 밤입니다.
그걸 지난 수요일날 황사는 사람 가려가면서 오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황사가 신자, 불신자 가려가면서 옵니까? 불신자는 마스크 안 써도 돼요? 황사가 사람 가려가면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밤이라는 것이 사람 가려가면서 오는 게 아니지요. 그런데 밤은 인간의 행함으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어떤 특정 밤에는 성도를 통해서 나타냄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을 통해서 알 수 있지요.
“아버지, 어제 밤과 오늘 밤의 차이점이 뭡니까?” 똑같은 밤인데 똑같은 달뜨고 별 뜨는 밤인데 차이점이 있어요. 이게 나타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뭐냐 하면 이게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서 내가 하지 않은 나라는 존재가 행하지 않은 주께서 행하신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이 바로 벌써 유월절을 통해서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고 앉은뱅이가 걷게 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낫는 전문의사가 아니지요. 자기가 예상을 못했어요. 그냥 현장에서 누가계시지요? 주님 계시지요. 아까 첫 째 시간에 저승사자 이야기했고,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지요. 주님이 부활하시면 그냥 놉니까? 일하십니까? 부활하고 난 뒤에 가만히 있습니까? 일하십니까? 일하시지요.
택한 백성에게 성령 주잖아요. 성령 주신다는 말은 그 안에서 성령안에서 예수님께서 그 죄인 붙들고 예수님 자신의 증인되도록 성령을 주도적으로 해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일을 하시면 사건화 돼서 나타나는 게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성도는 그냥 내가 행했다고 하지를 않는다 말입니다. 베드로 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본인은 행함은 뭐예요? 본인의 행함은 가치조차 있다? 없다? 없는 거죠.
자, 그러면 지옥의 권세 봅시다. 모든 인간은 아까 지옥의 권세 있다 했지요. 마태복음 16장18절에 분명히 나와 있지요. 교회만이 주의 권세지, 나머지는 주의 권세 없다. 교회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반석이 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움직이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다스려요. 인간이 세운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인간이 세운 교회는 흔해 빠졌지요.
인간이 세운 교회와 인간이 세우지 않은 교회와의 차이점은 뭐냐, 인간이 세운 교회는 그 교회를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운 교회는 누가 세웠어요? 주님이 세웠잖아요. 다시 물어볼까요? 주님이 세운 교회 누가 세웠습니까? 주님이 세웠지요. 그러면 교회가 유지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은 그건 누구 소관이지요? 주님 소관이지요. 인간이 교회 붙들고 부흥하려고 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인간이 교회를 부순다고 부셔집니까? 안 부셔지지요. 교인이50명되는데 다 나가고 한 명도 없다. 한 명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한 명도 없다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교회지요. 원래 다 나갔어야 할 교회라 말이지요.
저승사자가 둘이 있다고 저승사자가 아닌 게 아니잖아요. 저승사자가 열둘이 있다고 저승사자가 기분 좋은 게 아니에요. 하나가 있어도 주께서 저승사자를 통해서 일하고 둘이 있어도 일하잖아요. 성령 받은 사람이 숫자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숫자 많다고 더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날 때 여자 됐잖아요. 그러면 여자 됐는데 여자 열 댓 명이 있어야 여자 됩니까? 아니지요. 이건 내가 원치 않는데 주어진 숙명 같은 거예요. 숙명. 갑자기 숙명여대 생각나네. 숙명 같은 거잖아요. 숙명. 성령이 오시면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잖아요. 숙명 같은 거잖아요. 성령이 안 왔다 하면 뭐가 숙명입니까? 내가 운명과 숙명을 내가 만들어놔야 돼요.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숙명이고 주님의 숙제란 말이지요. 교인이 나오고 안 나오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나가게 하셔서 나가게 했고, 오라해서 온 거예요. 예를 들어서 50명 한꺼번에 와가지고 다음날 60명 나갈 수 있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울 뿐이지 내 저승사자 됨과 교회됨에 아무 지장이 없어요. 주님은 택한 백성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목자가 자기 양을 놓친다? 안 놓친다? 안 놓치지요. 그게 믿어집니까? 그게 믿어진다면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망가져도 주의 뜻이에요. 그게. 망가져도.
너무나 우리가 세상을 닮아가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대로 안 되면 우리는 짜증부터 먼저 내잖아요. 남편 몰라 적금 넣었는데 보니까 남편이 사전에 알아가지고 비밀번호 알아가지고 톡 털어먹어가지고 놀음자금으로 다 날렸다. 짜증날까요? 안 날까요? 나지요. 그러면 짜증나니까 해답은 누구한테 물어요? 주님한테 물어야 되겠지요. 성경에 나옵니다. 주님이여, 내 남편이 고자질 다해줘요. 남편이 내 적금을 다 날려서 내가 살아보려고 했는데 놀음해서 다 날렸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겠지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고쳐놓고 도둑놈을 잡고 예수님을 믿고 같이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면 주님의 답변은 성경 안에서 나오지요. 주님께서 답변하지요. 구원받고 안 받고는 니 소관도 아닌데 니가 왜 나한테 구원받아야 된다고 고집하는 성경적 근거 대봐라. 이리 나오지요. 먼저 그것부터 잘못되었지요. 그 아내는. 그리고 아까 니 기도할 때 적금 타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했는데 남편이 그걸 날렸다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생명은 자기의 소유에 넉넉함에 아니다. 누가복음12장13절, 상속을 형이 다 챙겨서 동생이 억울해가지고 주님에게 찾아오지요. 주님의 답변이 뭐였습니까? 동생편 들었어요 ? 동생편 안 들었습니까? 안 들었지요.
억울하게 왔는데 그게 억울한 거냐.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나오지요. 누가복음12장 1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의 응답입니다. 맞지요.
주님이 또 남편이 털어먹은 억울한 아내한테 이야기합니다. 니가 방금 살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는 것은 주님 소관이에요? 인간 소관입니까? 죽고 사는 게. 그건 마태복음 10장에 나와요.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지지요. 그리고 그 아주머니가 모르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자기가 악발이해서 살아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어요. 참새 키우고 들풀 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날 그런 말 했지요. 사람이 은혜 주게 되면 더 큰 은혜 달라고 하는 게 문제라고요. 은혜주면 고마울 줄 알아야 되는데 더 큰 걸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그 아주머니가 정말 성도라면 본인 잘못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편으로 하여금 적금 다 깨가지고 놀음으로 다 날린 거예요. 그리고 그 남편하고는 이혼해야 돼요. 또 이혼하기는 싫어. 사회에서 이혼녀는 안 좋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우이 사느냐 하는데. 남편 구슬려가지고 월급 빼먹어가지고 지는 놀고 남편은 돈 벌고 그런 계산도 서있다니까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도망가는가, 성경대로 에요. 성경대로.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이게 제가 틀린 말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길을 누가 막습니까? 내가 막아요. 내가. 남이 막는 게 아니에요. 놀음쟁이 남편이 막는 게 아니고 내가 내 길을 막는 거예요. 이렇게 복음을 이야기해도 안 들으려고 해요. 뭐 안 듣는 것도 제 이론에 의하면 누구 뜻이다? 주께서 허락하신 거죠. 지옥 실컷 체험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다시 해봅시다. 밤이 왔을 때 그 자식들이 이야기해요. “오늘 밤과 지난밤과 차이점이 뭡니까?” 그런 이야기가 유월절에 보통 하는데. 성경에도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버지여, 이 소품들이 무엇입니까?” 묻는 대목이 나와요. 유월절 할 때 성경에 보면 나와요.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 할 때 자식들이 보기에 이게 뭐냐 하면 특이하다는 겁니다. 특이하다.
자, 특이하다는 말은 보편적이 아니다 라는 뜻이지요. 흔하고 흔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좀 이상하고 특별나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처럼 인간은 어디에 있다? 지옥의 권세 안에 있지요. 지옥의 권세 안에서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좋은 법문 만들면 돼요. 자기들끼리. 서로 위해주고 서로 다독거려주고. 초코파이 하나 건네주고, 정주고. 이사 왔다고 떡 해주고 사람 사는 재미 그거잖아. 그거 외에 뭐가 있어. 친하게 지내고 정답게 지내고 서로 칭찬하고 서로 위해주고, 그렇게 살고 예수 믿었으니까 죽으면 천당 가면 된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뭘 집어넣었다 했습니까? 오늘 몇 번째 했는가 모르겠다마는. 율법이 개입되지요. 율법은 못 지킨다. 돼있지요. 최고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인데 그 사랑의 모습은 무슨 모습이다? 죽음의 모습. 다 죽었다는 거예요. 죽음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속에 소스를 부은 거예요. 소스를. 카레 소스를 붇듯이. 이미 인간은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십자가에 죽었으니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에요. 일상에서는. 왜? 지옥의 권세에서는 시간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특이성, 낮과 밤이 있지요. 계속 같은 밤이 주어집니다. 저녁에 퇴근해서 씻고 자는 밤 하다가 특이한 밤이 있어요. 이게 무슨 밤이라 했습니까? 유월절 밤이지요. 유월절 밤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밤에 태어난 민족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야곱이고 야곱이 이스라엘 된 것이 바로 낮이 아니고 밤의 천사와 만났기 때문에. 창세기32장에 나오지요.
일상의 시간에서 특이한 시간의 밤이니까 이 밤이 갑자기 도약해 버린 거예요. 기존의 시간이 아니고 특이한 시간, 밤. 이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이 시간은 반복이 된다고요.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잖아요. 그런데 이건 뭐냐 하면 유월절이 신약에 들어가면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의 반복이 여기서 침투하게 되면 이 바탕은 인간의 존재가 되고 특이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특이성이다 말이지요. 특이성. 사건.
로또 당첨되는 게 특이한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내 행함과 별개로 뭔가 나로 인하여 특이한 것이 나타날 때 행함은 X고, 나타냄은 O표라 했잖아요. 기억나십니까?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은 인정받지 않아도 성도는 뭔가 나타나는 게 있다. 그게 뭐냐 성령께서 죄인을 통해서 뭘 증거 하느냐 하면 지금 이미 니가 부활의 세계 그리고 성령의 처소 안에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알려주고 확인해주고 드러내는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남들 보기에는 굉장히 특이하게 보이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행함과 행함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사건과 사건의 연발로 되어있습니다. 자, 그 특이한 거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눅가복음7장36절~38절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게 예수님 사전에 이게 조율된 거예요? 아니면 돌발사태 입니까? 돌발사태지요. 이게 바리새인한테 허락 맞고 한 거예요? 지금 초청자가 바리새인이지요. 그럼 이 여자는 바리새인이 초청한 여자에요? 초청 안한 여자에요? 초청 안한 여자에요. 불청객이지요.
갑자기 들어와서 예수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갑자기 들어와서 예수님 앞에 갑자기 뭘 하느냐 하면 울면서 눈물로 향수병을 깨고 적시면서 머리털로 씻고 주님 발에 향수를 붓는다 이 말 아닙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전적인 항복을 의미하거든요. 전적인 항복. 주의 뜻대로 처분해 주소서. 내 인생은 내가 처분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행함으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밟든 주님 마음대로 해주세요.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47절을 한 번 보세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 사랑이란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은 그 여자의 돌발사태 특이한 사건을 뭐로 여겼느냐 하면 그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예수님이 존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발생된 사건이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여자가 예수님께 수용하는 그 현장은 여자하고 예수님만 있는 현장이 아니고 누가 있어요? 바리새인이 함께 있지요.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대목이 왔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단둘이 있을 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이 저쪽 지옥의 권세가 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고 사람들을 왜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느냐를 들추어내는 용도로 주님의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냥 니 사랑한다. 우리 사랑하자. 이게 아니라 그들 보는 앞에서 그들이 아무리 행했다. 행했다. 착하다. 착하다. 의롭다. 의롭다. 해도 할 수 없는 그 것.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예수님 앞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손들고 포기시키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날려 보내는 거예요. 향수 안에는 자기 모든 인생이 다 들어있어요. 그 여자의 향수 안에는. 운다는 것은 그게 빠져나오는 순간입니다. 나는 이만큼이다. 하는 그 게이지 수치가. 쫙 빠져나오는 거예요. 사료탑에서 사료가 밑에 구멍에서 빠져나오면 수위가 죽 내려가지요. 그것처럼 몽땅 다 빠지는 거예요.
투석도 그런 투석이 없어요.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사랑, 자기 자신의 기대감, 자기가 자기의 인생의 목적이 되는 이것이 완전히 빠져나온 겁니다. 사이다 열고 사이다 다 뽑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자랑하지 않고 울면서 했다는 말은 이걸 다 붓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 받은 사랑에 비하면 내 모든 걸 소모한다 할지라도 어찌 주님의 사랑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이에요.
이렇게 하니까 39절에 봅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했는데, 바리새인이 초청한 집에서 여인이 이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한 이유는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랑했다. 구원했다. 가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왜 이 세상은 지옥의 권세 아래에 있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지옥의 권세의 대변자가 있어야겠지요. 대변자. 이게 지옥의 권세다. 하고 대변하는 대변자로서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바리새인이 등장한 거예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지옥의 대변인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갖고 있는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악마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룬다는 걸 알지요. 악마는 뭐든지 다 다뤄요. 하나님의 말씀을 앞장세웁니다. 특히 바리새인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 하면 말씀을 듣기만하면 안되고 그걸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사상이 바리새인의 사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바리새인의 말만 듣지 말고 그걸 그대로 행동에 옮겨라. 하는 말이 있지요. 저희들은 말뿐이지만, 너희들은 행동에 옮겨라. 하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적이 있어요.
자, 여자가 똑같은 사건이 일어난 건데 그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이 보는 관점하고 이 바리새인의 관점이 왜 이리 다룰까요? 그것은 바리새인은 그 여자에 대해서 여자의 행함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평소에 바리새인 본인이 행했던 것과 같은 취지에서 행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은 똑같으니까. 내가 어떤 행동할 때는 무엇을 노리고 행동하는데, 저 여자도 아마 뭘 노리고 행동했을 거야. 하고 하는 거예요. 이 행동을 함으로서 추가해서 더 얻을 게 있다고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고 여기고 행동에 나선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지금 그 행동은 얻을 것을 챙기는 게 아니고 오히려 있는 것도 버리는 행동이지요. 버리는 행동. 바리새인이 예수님보고 충고를 해요. 뭘 충고하느냐 하면, 저 여자가 얼마나 행실이 더러운 여자로 알았으면 저렇게 더러운 것이 몸에 묻히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바리새인 본인이 예수님을 초청할 때 뭐로 보느냐 하면 선지자로 초청했기 때문에.
선지자의 원조는 바로 모세지요. 신명기18장15절과18절입니다.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8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그러니까 모세 같은 선지자가 결국은 선지자의 원조가 돼요. 그 다음 나온 것이 바로 엘리야가 나와요.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유다나라에서는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사람이에요. 뜻대로 살고 뜻대로 이룬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다 사모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모세 같은 선지자에요.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율법을 전할 때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요. 이 모세의 자리가 고라신이라는 갈릴리바다 근처에 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그 유적지가 얼마 전에 개발돼가지고 내가 거기 가봤어요. 고라신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 중의 하나가 모세의 자리라는 것이 발굴이 되었어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했다는 것이 요한복음에 나오거든요. 그걸 고고학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선지자 같으면 거룩해야 돼요. 거룩은 뭐냐 하면 죄가 묻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깨끗하라고 주신 거예요. 더럽히지 말라고. 그러면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더러운 사람과 상종을 안해야 되지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하면서 선지자인줄 알았어요. 선지자일 거라고 여겼는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생각한 선지자가 전혀 다르고 그 행실 나쁜 더러운 여자를 그냥 발에 씻도록, 그 여자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겠어요. 죄 지은 여자가 자기 머리털로 하는 것을 용납을 하니까 이 사람이 선지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바리새인이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이렇게 합니다. 당신을 만진자가 누구였으면 죄인인줄 알았으려니와, 여기에 보면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그 선지자라 하는 것은 그냥 똑똑한 사람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원하고 있는 메시아 같은 사람이었으면 알았으리라,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시몬아, 내가 니게 말이 있다.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 뭐냐, 선생님 말하소서.” 누가복음7장 41절입니다. 두 사람이 빚진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빚진 이야기를 할 때에 빚이 얼마가 되느냐가 여기서는 전혀 중요하지를 않습니다.
뭐가 중요하냐 하면, 얼마가 됐든 빚을 탕감해주는 그 마음을 부가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있어야 돼요. 한 사람은 탕감해주시는 분, 또 한 사람은 탕감 받는 사람. 요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가 뭐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죠. 이해되시지요.
그런데 한 사람은 뭐냐 하면 빚이 있는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권리 있는 사람이 자기 권리를 없는 것으로 양도하고 베풀어주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게 사랑이란 말이죠.
그러면 사랑은 뭐냐, 심판하셔야 되는 분이 그 사람에게는 심판을 면제해주는 고 심판 사이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럼 이 여인이 울 때는 어떤 마음으로 울겠어요? 당신은 나를 심판해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어찌 이렇게 용서를 해주십니까. 어찌~~ 이렇게 용서를 해주십니까? 라고 울면서 그동안 내가 나를 심판 안 받겠다고 투쟁하고 노력했던 모든 요건들을 자진해서 설사약을 먹고 다 빼듯이 다 빼내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다 빼는 거예요. 똥 같은 것을 확 빼내는 거예요. 내가 나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요소를 확 빼는데 그걸 누구 앞에서 했다? 바리새인 앞에서 한 거예요.
그럼 세상의 권세는 뭡니까? 너의 천국 구원받는 너의 의는 니 행함으로 이걸 저축을 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지옥의 권세 안에 있는 인간들의 특징이에요. 그럼 저축을 하려면 통장이 있어야 되지요. 그럼 통장은 누가 통장이 됩니까? 나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지요. 나라는 것이 있어야 되고 나의 뭐가 쌓인다? 끊임없이 나의 행함의 그 대가가 “주님이 축복 주신 거 있잖아요.” 흔히 이야기하는 “주님이 축복 주신 거, 주님이 이쁘다.” 한 그걸 계속 누적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겠지요. 자기 행함으로.
그런데 제가 지난 수요일날 설교 중에서 꽃꽂이 하는 녹색 스폰지 블록 이야기했잖아요. 또 한 가지는 뭐했습니까? 골판지 이야기했지요. 면적은 뭔가 꽂힐 수 있는 면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고난도 받았다. 이렇게 돼버리면 고난 받았다 하지만, 뭐는 여전히 살아있어요? 내가 고생했던 거 예수님을 받아내는 이 바탕은 있어요? 없어요? 여전히 있겠지요. 이게 뭐가 되겠어요? 이게 바로 자기 의가 되겠지요. 자기 의. 왜? 자기한테 왔으니까. 나 이 정도로 주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자랑질 할 수 있는 그 근거가 계속 마련되겠지요. 수요설교 한 번 들어보셔야 되는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서 이렇게 멋지게 됐다. 이런 게 있겠지요. 그런데 골판지는 뭐냐, 뾰족하게 되어있어요. 종이가 이리 있으면 종이를 이리 보면 면적이잖아요. 요걸 이리 세워버리세요. 면적이 안보이고 뭐가 보입니까? 선이 보이지요.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복을 이만큼 누려야 되고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면적으로 생각했던 야곱이 밤에 오신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면적에서 뭐로 바뀌었냐 하면 면에서 선으로 바뀐 거예요.
왜냐하면 천사 자체가 그래요. 천사 자체가. 낮이 되니까 밤으로 가야겠다. 해서 천사는 낮과 밤사이에 경계선에서 나왔어요. 낮과 밤 경계선에서. 참 어려운 이야기지요. 경계선에서 튀어나온 게 천사고 경계선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따라서 낮과 밤 변하는 그 선 사이에서 그걸 째고 나온 천사에 의해서 야곱이 만나기 때문에 야곱은 야곱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천사처럼 요 따라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가 아니라 이쪽가면 지옥이고 이쪽은 천국이라. 그 경계선 상에서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야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따라다닌다고 예수님한테 얻을 게 없어요. 예수님은 경계선이라니까요. 내 말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은 안 믿으면 지옥이고 믿으면 생명이니까 천국이다. 그 경계선에서 하는 거예요. 이 저승사자는 이 땅에서 재벌 될 필요 없어요. 저승사자는 그냥 경계선이라니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을 받은 것이고 예수님의 영을 받았으면 하나의 경계선이에요. 내 것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게 없다니까요. 내 것이 있으면 아무리 해도 내 것을 못 버려요. 못 버린다니까요. 신학교처음 들어간 사람이 유명한 찬송가 부르지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온전히 헌신 하겠다는 이 말아닙니까.
그러면 그렇게 헌신했을 때 이게 면적이 되어버리면 나는 주님 앞에 헌신했다. 가 꽃꽂이처럼 꽂히겠지요. 그러면 주님 앞에 헌신한 면적이 남겠지요. 이걸 부인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 면적에서 선으로 옮기는 것이 뭐냐 하면 존재에서 하루, 하루 사는 게 사건화 되는 겁니다. 선이니까 자체적인 폭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의 증인으로 살아요. 증인으로. 내 것이 없고 하나의 증인이에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가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지옥이에요. 사도바울의 말을 들으면 천국이에요. 그러니 이게 뭐냐, 사도바울은 그 경계선에 있지요. 사도의 특징이 그거에요. 하나의 면적이 아니고 선이라니까요. 선.
드라마 같은데 저승사자 나오지요. 저승사자가 교통사고 납니까? 이미 죽었던 자에게 저승사자는 안 죽지요.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갈 수 있지요. 교통사고 왜 안 나느냐 하면 면적이 없거든요. 영이기 때문에 부딪힐 영이 없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는데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냐 문을 닫아놨는데 그냥 통과했지요. 육체가 있는데 부활한 육체에요.
지금은 우리는 육에 속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게 안 되잖아요. 안 되더라도 성령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람 되게 하십니다. 죽으면 그렇게 돼요. 죽으면. 천사들의 특징이 그거잖아요. 천사의 특징은 주께서 시키면 어디에도 다 등장하는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누가 구해줬습니까? 천사가 구해줬지요. 베드로도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성문을 흔들어서 구출했잖아요. 척척 다 열리고. 자동문도 이런 게 없어요. 쇠문이 열렸잖아요. 멋지지 않습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 천사가 그렇게 했거든요.
천사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고 이건 천사 마음대로에요. 주님 마음대로거든요. 아브라함한테 천사가 왔잖아요. 그리고 삼손의 부모한테 천사가 왔지요. 천사인 줄 모르고 대접하려하니까 아내가 천사다 해가지고 이름이 뭡니까? 내 이름을 왜 묻느냐, 나의 이름은 기묘자다. 했잖아요. 마노아집에 그렇게 했어요. 삼손의 아버지 이름이 마노아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주님 주도하에 움직입니다. 주님 하에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이는 목적을 알아야 돼요. 목적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뭘로 다가오느냐 하면 이 세상의 너희들은 지옥의 악마의 힘에 눌려서 산다는 것을 계속해서 자기 성도를 통해서 또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악마에 따라 살아간다.
악마가 뭐냐 하면 악마의 노림은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니 것 가질 필요 없다는 것. 니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니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사건화 시켜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욥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왜 주셨습니까? 자녀분 계세요? 왜 자녀분을 주셨지요? 사실은 우리가 복음을 알면 주신 게 아니고 갔다 붙여놓은 거지. 세상 사람은 내 자식이라 하는데. 남의 새끼 아니고 내 새끼 내 자식이라 하잖아요. 왜 주셨습니까?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니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악마의 힘에 의해서 니 것으로 여기지만, 가져갈 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증거 하라고 주신 거예요. 자식이. 사람들은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한탄하는데 처음부터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됐어요. 어릴 때도 내 맘대로 안됐었어요. 그 자식도 태어나자마자 지 고집대로 움직였어요. 교육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악마의 권세에 있는 것을 악마의 권세자가 교육해서 인간 만들겠어요? 안되지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저승사자처럼 주의 복음을 주께서 허락할 때에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전해야 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복음을 나타나면 되지요.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내게 되어있다니까요.
복음을 전하게 되면 목적을 갖게 되어있어요. 목적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행함은 반드시 기대와 목적을 노리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게 뭐냐, 존재가 돼요. 면적이 된다니까.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가 어떤 요렇게 행하면 요런 결과가 나오겠지. 라고 계속해서 지 현재 행함과 결과를 결부를 시키고 있는 게 문제에요.
성령께서는 그걸 수정하십니다. “봐라. 니 자식 니 맘대로 안 되잖아.” 안 된다는 것을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엄마,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럴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진짜 자녀분 그래요? “엄마, 공부가 제일 쉬워요. 나 이러다가 사법고시 합격하겠어요.” 그런 이야기해요?
그러니 “엄마, 왜 갑자기 부자 되었어?” 그런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부자 되던 가난하게 되던 관계없이 그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내가 악마의 권세에 눌려서 살았던 그 모습을 내가 다시 발견하는 겁니다. 나도 저 철딱서니 없이 살았던 내가 지금은 주께서 변 빼내듯이 변비 빼내듯이 설사하듯이 다 빼내가지고 주의 일로 하게 하셨다. 하는 것을. 늘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특이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자체가 또 특이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그 현장에서 증명하게 증거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다시 돌아봅시다. 참, 이 야고보서 율법 이야기하려고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훑어 봤는데. 죽 돌아봤는데요. 여기 11절 봅시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이 말은 뭐냐, 율법이 스스로 다 응취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죄와 죄 사이가 틈이 있는 게 아니고 여기도 소소한 작은 죄들이 몰라서 그렇지 많은 죄와 죄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태도를 어떻게 하느냐, 사람을 볼 때, 세상을 볼 때 이렇게 보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앞에 있잖아요. 한 사람이고 있잖아요. 사람으로 보지 마시고 사람들 어깨, 어깨 사이에 주님 계심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저 사람이 내 앞에 등장한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나한테 앞에 붙였다. 하고 사람들만 구분해서 보지 마시고 사람들 사이에 주님께서 얘도 오늘 니 만나게 했고, 얘도 만나게 해서, 만나게 하는 거예요. 남편도 자식도 만찬가지입니다.
주님이 현재 살아계셔서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 사람 대할 때는 이렇게 대하고, 저 사람 대할 때는 저렇게 대하지요. 주님이 한결 같은데 우리는 한결같지가 않아요.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요렇게 요령부리고 이 사람은 이렇게 요령부리지요. 한결같지 않으니까 죄를 하나 어기면 모든 것이 어긴 결과를 우리가 초래하는 겁니다. 하나같이 내 중심으로 사니까.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처음에 돌아가서 세상은 성경을 덮어버리면 인간끼리 좋으면 좋은 거예요.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게 정상이라고 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악마의 세력 안에 갇혀있는 세상이에요. 세상은 인간들이 지금 놀고 있는 마당입니다. 이거 지옥이에요.
지옥인데, 주께서는 이렇게 야고보서를 주셔가지고 다시 한 번 온전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밖에 없음을 알게 하셔서 그런 드론에 띄우듯이 저승사자의 안목을 가지고 하는데, 우리가 하늘로 직접 돌아다니면 편한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남들로부터 오해와 모독과 배척과 오해 이런 모든 그래서 지옥 간다고 이러한 온 수모를 다 받게 하십니다.
다 받게 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이래서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지옥 속에서 나도 지옥 갈 일조를 한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걸 용서해 주셨으니까 우리가 쌓아놓은 평생 사는 죄가 아까 그 여자처럼 쫙 설사 나서 빠지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어떤 의미로 돌아가셨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평생 살아가면서 두고, 두고 깨달아야 될 일이고 우리의 존재를 부셔서 사건화 시켜서 뭘 하던지 간에 주께서 유발하신 사랑이라 알고 사랑 앞에서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