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9a 부산강의 : [시편]9(4편)-동질성과 정체성
20180409a 부산강의 : [시편]9(4편)-동질성과 정체성(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편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가 네 번 나오는데 나가 누구냐, 할 때 이 점을 생각해봐야 돼요. 동질성과 정체성이 달라요. 동질성은 내가 생각한 나는 남이 나에게 심어준 거예요. 나란 나와 관련 있는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구축했을 때 남이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남의 의견을 규합하는 거죠. 그런데 정체성은 몰라요. 내가 진짜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정체성은 하나님 몫이에요. 특히 성도한테는. 시편 4편은 다윗의 시잖아요. 1절에 벌써 ‘나’가 네 번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봐도 나란 것은 다윗이라고 하죠. 그건 동질성이에요. 다윗의 타인은 사울입니다. 사울을 마주하면서 그때마다 다윗 본인이 본인을 생각하는 것, 이게 전부 나라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돼요. 사울도 그렇고 다윗 본인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서 어려운 말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라 할 때 이건 의미 없어요. 나는 나지 뭐가 되겠어요. 나는 어떤 인간인가? 이럴 땐 의미가 있어요. 이건 본인이 하면 안 되고 남들이 이야기해줘야 돼요. 남들 보기에 난 어떤 인간인가. 그 남이 사울이거든요. 사울은 다윗의 적입니다. 적에게 몰릴 때 미움 받을 때 그 밉상으로 인하여 다시 나를 생각하게 돼요.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밉상 받지? 남이 없으면 정리가 안 된다니까. 나는 훌륭한 할머니라 생각했는데 할아버지한테 간다? 내가 생각한 나는 괜찮은 할머니인데 왜 나한테 오지 않고 할아버지한테 가지? 걔 눈에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게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주위에 남이 없으면 나도 같이 사라져요. 이게 치매 현상이라 하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내가 사라지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옛날 나를 붙드는 것을 우울증이라 합니다. 보통 옛날 나는 잘 나갔던 나, 남한테 사랑받고 알아주던 나, 그런데 그렇게 해주던 주위 사람들이 죽던지 떠나든지 가버리면 나는 나를 구축할 수 없어서 옛날 나를 연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나를 붙드는 거예요. 그걸 form형식이라 합니다. 그래서 동질성은 항상 형식으로 구축하게 돼있어요. 형식이 하나님의 정체성, 진짜 내가 누군지 아는 정체성 같아서 형식은 녹아져야 됩니다. 경계선이 허물어져야 돼요. 허물어지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프라이팬에 치즈를 올려놓으면 분명히 막인데 녹아 없어지지요. 나라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남들이 이야기하면서 내가 있다면 나란 내용이 형식으로, 치즈처럼 흐물흐물 녹아져야 돼요. 그런데 남이 있는 이상 치즈 막(시멘트??)오히려 강화돼요. 굳어져요. 혼자 있을 땐 긴장 풀고 있다가 남이 등장하면 타인과의 경계선이 굳어지잖아요. 굳어져서 오십견 걸린 것처럼 근육이 딱딱해지고 그렇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오면 갑자기 근육이 긴장해서 수축이 돼버려요. 힘들어요. 그런데 자기 맘에 드는 사람 같으면 치즈 막처럼 녹아져요. 모든 경계를 내려놓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타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쏙쏙 들어오면서 그것이 나의 동질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 인생사는 보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늘 같이 있는 것이 비록, 잠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채소를 먹고 살아도 좋은 사람 있으면 그것이 최고라 했어요. 고기 먹고 살아도 꼴 보기 싫은 사람과는 못 살아요. 힘들어요.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괜찮은 사람은 만나서 막 같은 걸 형성하게 되는데 그럼 오늘 본문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것은 다윗의 동질성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정체성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해줘요. 동질성이라면 다윗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고 속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다윗은 우리와 똑같아요.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다윗을 다루어서 다윗 안에 있는 내용물이 사실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진짜 정체, 자기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겁니다. 쉬운 예를 성도가 주님 앞에 왔다. 처음에는 인간이죠. 인간이 주님 앞에 왔을 때 인간은 자기의 육적인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와요. 주변에 자기가 사귀었던 많은 타인들, 남들이 생각했던 성격을 가지고, “나, 이렇습니다.” 하고 오지요. 대표적으로 성질 급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런 사람들이 와요. 오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줘버린단 말이죠. 성령은 누구 마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주면 베드로는 나중에 껍질만 남아요. 안의 내용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게 베드로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에게도 해당됩니다. 제가 동질성이란 어려운 말을 했지만 이 말 외에 적당한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동질성이란 두 시간 전의 나와 지금 나와 같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앞으로 두 시간 후에도 나일 것이라고 계속 우기는 것을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것은 form을 재서 여기까지는 나고, 저쪽은 나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체성이 돼버리면 동질성의 나를 뭐로 보느냐? 껍질로 바뀌죠. 껍데기로 바뀝니다. 두 시간 전에 저를 다루신 것처럼 앞으로 두 시간 후에도 저를 다루실 거니까 내 인생, 내 운명에 대해서 잘 될 것이라는 게 아니라 아예 없음이 돼야 돼요. 운명이 있으면 예정론 골치 아프지요, 천국 가는 건 골치 아프고 그러잖아요. 왜냐하면 나라는 동질성이 따로 있으면 15년 뒤에 천국 간다면 15년 동안 내가 성도로 유지해야 되는데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까. 중간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보통 문제 아니거든요. 치매라는 게 타인의 기억에서 멀어지지만 자기 자신의 기억에서도 멀어져요. 치매가 아들 못 알아본다는 정도 같으면 중간쯤 되는 건데 정말 치매가 심한 것은 자기 자신을 못 알아봐요. 그럼 죽을 때 다 된 거죠. 그냥 육신의 껍데기만 있는 거예요. 죽은 상태지요. 나는 죽을 때 웃으면서 찬양하면서 죽을 게. 이러면 정상인이죠. 그런데 치매 걸리면 나는 죽을 때 웃겠다는 것도 5년 전에 이미 다 바닥났어요. 다 써먹었어. 그때부터 예수가 누군지 몰라요. 내가 뭘 할지도 몰라요. 그냥 자다가 헉하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대비할 타이밍도 손에 쥘 수 없어요. 그냥 죽어버리는데 폼 나게 멋있게 죽는 그 계획도 실패로 끝나요. 인간은 껍질입니다. 갑자기 차사고 나서 죽어보세요. 폼 나게 죽는 게 어디 있어요. 아직도 자기 동질성이 있으니까 난 죽을 때 자식들 모아놓고 예수님 간증하며 죽어야지, 라는 되지도 않는 망상을 품고 있다니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리를 놔버리는 거란 말이죠. 성령께서는 미리 그걸 놓게 만들어요. 십자가로 나는 죽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미리 경험케 하는데 아직 우리는 다윗처럼 동질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체성과 치열하게 싸움 벌이고 있습니다. 정체성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가 집어넣은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체성에 눈 돌리지 않게 돼요. 난 그런 거 몰라. 남들이 인정해주면 그걸로 오케이. 자식이 날 인정해주고, 남편이나 아내가 날 인정해주고, 교인들이 날 인정해주면 난 오케이. 권 목사님이 아까 이야기했는데 교인이 열다섯 명쯤 된다 했어요. 본인은 열다섯 명의 목사에요. 그런데 하나둘 빠져나갑니다. 열세 명의 목사였다가, 열두 명의 목사였다가 지금은 몇 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서 목사님이 그 사람도 언젠가 간다는 거예요. 보세요. 나의 동질성은 열다섯 명 이었는데 이제는 제로에요. “목사님, 교인 몇 명입니까?” “없습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럼 나의 동질성은 교인이 하나도 없는 목사가 돼버려요. 하지만 그렇게 해도 자기 소망이 멈추지 않지요. 한 이 년 후에는 열댓 명 올걸? 이런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과거의 기억을 고집스럽게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거예요. 지금은 없지만 이 년 뒤에는 서울대학교 나왔다는 소리 듣고 열댓 명 들어올 수 있다. 그런 기대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래도 나는 가수다. 나는 목사다. 계속 가는 겁니다. 이 다윗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 하지만 사울에게 쫓기는 게 아니에요. 다윗은 진짜 다윗 되게 하시는 주님한테 쫓기고 주님의 원수, 주님과 싸우는 자는 본인이 고집하는 본인을 놓지 않기 때문에 그걸 쥐고 있기 때문에 주님과 날마다 싸우는 겁니다. 사울이 적이 아니고 내가 나의 적이 되는 거예요. 나의 정체성이 적이 되는 겁니다.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시편 4편에 나오는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할 때 대표적으로 이것을 왜곡되게 정말 터무니없이 잘못된 해석이 바로 다윗을 나와 동일시한다는 겁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하는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하게 되면, 내가 부를 때에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응답하지요. 금요철야기도회에 왜 왔습니까? 응답받기 위해서 온 거예요. 성경에 나오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멘트가 뭐냐? “주여, 성경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믿으니까 여기서 일어난 그것이 그대로 나한테 응답으로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할 때 인생이란 자기를 평소에 괴롭혔던 아줌마라든지 있잖아요. 아래층과 층간 소음 때문에 성질 급한 그런 사람들과 적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기도하면서, “주여, 저 사람을 밟아요, 말아요? 주여, 저의 기도를 들으소서. 저들이 나를 괴롭게 하지만 저들의 영광을 나중에 허사로 끝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미 정답 나온 것, 응답받기 쉬운 겁니다. 믿습니다, 하면 끝날 문제에요. 모든 성경을.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아니고 자기가 고수하겠다는, 고집스럽게 자기 동질성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약에 목사가 설교해준다면 교인들은 은혜 받았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뭔가 노렸던 게 있는 모양이죠. 나의 나 됨을 누가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 우리의 노동과 돈을 아낌없이 제공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나를 남이 타인이 동의해줄 때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친구처럼 느껴지고 같은 운명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아니라면 다윗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먼저 따져야 돼요. 지금부터 강의가 굉장히 어려워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증명을 사탄에게 하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사탄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지 않았어요. 증명은 누가 하느냐? 사탄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메시아라는 증빙자료를 사탄이 제공한다는 사실. 두 개의 문장을 연결시키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광야에 갈 때 성령이 가게 하셨어요. 성령께서 사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존재증명을 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누구냐 하는 아까 이야기한 동질성이 예수님한테는 필요치 않아요. 모든 인간들은 동질성을 붙들고 삽니다. 남한테 인정받을 때 비로소 내가 안심이 돼요. “나는 이런 맞구나.” 남한테 나설 때도 너희들이 이야기한 나라고 그들에게 소개가 돼요. 명함 같은 게 그런 것 아닙니까. 명함에 ‘○○회사 과장’, 이런 게 나와야지 ‘주의 종’이라고 안 쓰잖아요. 왜냐하면 보편성이 일반성이 떨어진다고요. 명함에다 ‘주부’ 이런 것도 안 돼요. 직업이 있어야 돼요. 방송에서 아주머니들 나올 때 꼭 직업 없으면 주부라고 나와요. 직업이 있으면 직업이 나온다고요. 여자라면 없을 때 주부지 일단 있으면 산부인과 의사, 내과 의사라든지 나오지 주부라고 안 나온단 말이죠. 상대방이 생각하는 이상의 남들이 인정해주는 자아로 자기가 집중력을 가져야 되니까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데 성령께서 사탄을 부추겨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을 경우에 사탄이 인정하는 메시아는 이런 조건이어야 하는데 그 조건에 당신이 맞습니까? 사탄 쪽에서 증명해대는 거예요. 성도가 성도라 하면 안 돼요. 성도가 자기를 믿는 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마을이 이것 때문에 갈라졌거든요. “이근호 목사는 예수도 안 믿는다.” 이것 때문에 갈라졌어요. 그 사람이, 예수 믿느냐고 물었어요. 내가 답변 안 했어요. 그런 건 나한테 묻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는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갈라졌거든요. 주님께서 사탄을 우리 주변에 계속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증명하는 것은 전부 가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동질성에서 못 벗어납니다. 동질성이 나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 남들의 요구사항, 남들이 인정하는 것이 솜사탕처럼 뭉쳐져서 그게 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아무 내용이 없어요. 남들이 인정한 대로 그냥 따랐기 때문에 주변의 남이 뭘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그때마다 나가 변동되기 때문에 진짜 나는 몰라요.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렇다. I am ⏿. 우리는 이 네모에 들어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의 소관이에요. 신약에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는 여기에 우리를 죄인으로 집어넣는다니까요. 죄인으로 집어넣을 때 감사해야 돼요. 왜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을 알기 쉽게 하면, 앞에 뭘 집어넣으세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닌 그분이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그러면 이런 정체성에서 그 다음에 기능이 나오는데 기능은 나의 동질성에서 나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이 나한테 심어준 체면과 명예에 따라서 행동을 조절하는 그런 기능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준 정체성에서 나온 기능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기능이 나옵니다. 메시아의 기능이 나와요. 성도는 안에서 메시아의 기능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 해당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빠르게 이야기했지만 우리에게는 운명이라는 게 필요치 않아요. 죄인에게 운명이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할 때 주님이 보시기에 죄인으로 규정해줄 때 이렇게 들어오신 예수님의 메시아 기능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되고 우리의 운명이 되고 우리의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도 되고. 그러면 사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네가 메시아이거든 이렇게 하라 했거든요. 네가 메시아이거든 돌이 떡 되게 하라. 메시아이거든 뛰어내려라. 메시아이거든 할 때 뒤에 붙는 말이 뭐냐 하면, 사탄이 기대하는 사탄이 인간세계를 장악하면서 거짓되게 심어놓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상이 따로 있어요. 그걸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지 대질시키는 거예요. 그것 하라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을 사탄만 지켜보는 게 아니고 모든 인류와 그 당시 유대사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 지켜보는 거예요. 내가 원했던 오실 메시아 맞는지 자기 기준으로 정립된 게 있고, 그 기준에 준해서 예수님을 파악하고자 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사탄에 종속된 인간들, 이것이 광야의 시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탄한테 시험을 끝났지만, 십자가질 때까지 일반사회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시험을 계속 받습니다. 일단 대장이 사탄이니까 사탄한테 시험받고 난 뒤에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테스트가 예수님 십자가질 때까지 계속해서 주변의 테스트가 이어지는 그런 삶을 예수님은 사시는 거예요. 만약에 성도에게 정체성이 들어왔다. 십자가의 정체성, 예수님의 정체성이 들어왔다. 그러면 그걸로부터 해서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사탄이 주는 시험에 성도는 시달리게 돼있습니다. 끊임없이. 시험의 기준이 두 가지인데 사탄이 이야기하는 메시아 상이 어떤 메시아 상이냐? 이것이 바로 땅을 위한 메시아에요. 이 땅은 인간의 생존 터전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쫓겨나서 땅의 토지를 갈아야 되죠.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사탄에 매여 있으니까 땅을 위한 메시아가 오기를 원해요. 땅이 경작이 안 되면 자기는 못 사니까. 땅은 쫓겨난 결과성이거든요. 인간은 원래 토지에서 농사지을 필요 없었어요. 쫓겨난 존재임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이 땅에서의 삶이에요. 땅에서 살다 결국은 죽게 됩니다. 죽어서 흙이 되지요. 죽어서 흙이 됨에도 불구하고 땅에서 생존하겠다는 말은, 땅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그 취지에 대해서 극구 저지하고 탈피하고 거기서 발을 빼려고 애쓰는 그 노력 속에서 뭐냐 나오느냐 하면, 악마의 본래의 뜻이 거기서 돌출되게 돼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살아야지, 하는 그 말 속에는 사탄의 요구조건이 함유돼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지. 결국 죽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살 때까지 살아야지. 거기에 사탄이 뭔가 의도가 있어요. 그러면 묻지요. “왜 죽어야 될 인간이 삽니까?” 그건 묻지 말고. 하거든요. 그러다 더 화가 나면, “너는 죽고 싶어?” 하고 반대로 공격해 들어오지요. 이런 인간들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땅에다 죽는 이유를 집어넣어요. 죽는 이유가 언약궤입니다. 그러면 땅+언약궤=하나님 언약의 실현, 상태가 돼요. 그런데 언약궤 특징은 캄캄한 데 있어요. 이스라엘 성막 동영상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아 씨가 녹취 다했는데. 이상현 목사님이 통역했거든요. 거기 지성소까지 들어가요. 그 지성소가 캄캄해요. 그래서 다윗이, 너무 캄캄한 데 계셨습니다. 이제 환하게 나오셔야지요. 그래서 성전 구상하게 된 겁니다. 캄캄하다는 것은 스스로 자폐적인 것, 밀폐되고 폐쇄적인 거예요. 왜 언약궤가 어두운 곳에 있느냐? 거기는 정말 캄캄해요. 조명시설이 지성소에 있지 않고 커튼 앞에 성소에 있기 때문에 지성소에는 조명시설이 없어요. 왜 캄캄한 데 계시느냐? 땅의 정체성을 어느 쪽에 있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에 땅에 섞였다고 보면 제일 쉬워요. 하늘과 땅이 끊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이란 이름으로 하늘의 요소를 땅에 집어넣어버렸어요. 그게 언약이고 언약이 오게 되면 이 지상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더라도 노아언약에 의해서 전부 물에 잠겨버려요. 엄청난 저주고 심판인 겁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갈 때 뭘 속이고 남을 해코지해서 멸망한 게 아니에요. 땅 자체가 멸망의 요소의 표현들이기 때문에 땅의 열매기 때문에 땅과 더불어 멸망하는 겁니다. 노아 홍수가 올 때 온 땅을 덮었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물이 안 덮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어요. 방주 안 밖에 없어요. 방주가 동동 뜨는 겁니다. 뜬다는 것은 다 잠겼다는 거거든요. 이것은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질 자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왜냐하면 인간은 땅에 밀착해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땅에 밀착한 동물 이름이 나오지요. 창세기 2장에. 뱀. 뱀과 더불어 땅과 밀착해 살아야 돼요. 부동산, 자기 땅 없는 걸 나그네라 해요. 우리 성도를 나그네라 하잖아요. 네가 있을 곳이 없단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강남 가고 이민 가는 이유를 모르겠어. 이민 간 사람들 화내겠지만.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그것도 모자라면 방주 만들기 해서 땅 파고 핵전쟁 대비해서 들어가는데. 땅은 호소하게 돼있어요. 죽음을 내뿜게 돼있지 피할 곳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산들아, 바위들아, 나를 덮쳐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습니다. 피할 곳이 없으면 안 피하면 돼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우리가 땅 없이는 못 산다는 근원적인 자기 정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과 인간이 한 통속이에요. 왜냐하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땅은 흙으로 돼있고 인간도 흙이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땅이 저주받으면 곧 그 땅만 믿고 사는 우리도 같이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세 번째 시험이 그거였잖아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너한테 줄게. 나한테 절하라. 절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저주의 왕에게 왜 절합니까, 저주받으려고 절합니까? 그럴 필요 없잖아요. 시편은 다윗언약이거든요. 언약궤가 함께 있다는 것을 다윗을 주목합니다. 사실은 다윗이 주목하는 게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다윗이 자기의 동일성에서 자아성에서 진짜 자아를 찾아가는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작업에 다윗언약이 여기에 개입하게 돼있습니다. 그 언약이 개입하면서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나는 죄인으로 출발했다고 하죠. 그렇게 되면 다윗은 저주받은 땅에 하늘의 언약과 유일하게 만나는 언약지점이 돼요. 그러면서 본인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과 언약의 죽음과의 결합에서 바로 천국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하늘에 올라갔다고 천국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 올라가봐야 우리 동질성, 우리 자아성으로 올라가봐야 올라간 그것이 다 허무해요. 허망하고 허구라니까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생 다음에 저 생 있다고? 그건 망상입니다. 없어요. 그런 논리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생이라고 규정한 그 규정을 내 몸에서 규정했기 때문에 내 자아성에서 규정했거든요.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 있잖아요. 이 몸은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데 가야지, 편히 있어야 한다는 그런 계산을 정체성에서 하는 게 아니고 먼저 있는 내가 여기 있음에서 출발하거든요. 나의 있음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내가 예수님께 옮겨와서 예수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내가 가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예수의 나라로 옮겨가면서 거기서 나가 손실돼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손실되면서 내 꿈과 내 소망과 믿음도 같이 없어져버려야 돼요. 그야말로 주님 앞에서 우리는 치매 환자가 돼야 됩니다. 껍질만 남아야 돼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와야 돼요. 껍질이란 말은 주께서 나를 아무것도 아니도록 멍게의 내용물 다 뽑아내듯이 뽑아낼 때 쓸 만한 걸 뽑아내는 게 아니고 쓸 만한 게 없음을 확정지으면서 뽑아내요. 죄인으로서 뽑아낸다고. 죄인으로 뽑아냈는데 주님의 언약 완성에서는 그게 유일한 쓸모 있는 게 돼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들 천국 간다하면 그 당시에 사람들 놀랬어요. 왜냐하면 나쁜 사람들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만약에 천국 간다면 예수님이 소개한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하면 나쁜 사람이기에 가야 될 나라가 돼요. 천국은. 그게 정답이에요. 천국은 나쁜 사람이어야 돼요. 나쁜 남자, 나쁜 여자. 나쁜 사람이 가는 곳은 천국이고 착한 사람들은 지옥을 가야 된다니까요. 그러니 시편 4편 보고 철야기도하면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를 의인되게 하소서” 이러면 이거는 지옥 가는 주문 외우는 것과 똑같아요. 여기에 열중하면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지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신자 맞습니까, 나는 교인입니까, 나는 성도입니까? 할 때 본인이 성도 되려고 하지 마세요. 남들 열다섯 명 오잖아요. 다 나가버려요. 세상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강도 외에는 없어요. 우는 아줌마들 두어 명 있었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멀찍이 보든지 다 갔어요. 없어요. 그 상황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와야 돼요. 외로워야 되고. 외롭다는 말도 건방진 말이에요. 아직도 친구 많다는 걸 미련 두고 있다는 것, 자기 동질성을 쥐고 있으니까 친구 열댓 명 되고 동창회 가면 알아주고 하는데 지금은 동창회 가기도 싫고 가봐야 술만 먹고. 이것은 주변이 알아서 나를 단절시켜주니까 이게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인 겁니다. “나는 주의 종이다. 꺼져라. 사탄아!” 이럴 필요 없어요. 사탄은 성령께서 주님 뜻대로 나한테 보냈단 말이죠. 주님께서 사탄을 일부러 만나게 해줘요. 내가 정립되지 않은 정체성을 사탄이 와서 도와주는 셈이라니까요. 꼭 배고플 때 와요. 돈 떨어질 때 오고. 돌이 떡 되게 하라. 네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떼 부자 되라고 이런 식으로 오지요. 그럴 때 우리의 동질성에 의하면, “감사합니다. 주의 종이여” 하고 영접하겠지요. 부자 되게 하는데 누가 거절해요. 아무도 거절할 사람 없습니다. 이러면 성도 아니에요. 이게 바로 주께서 죄인 되게 하시는 방법이거든요. 집세 600만원 올려줘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딱 맞춰서 줬다. 그게 주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기본에 뭐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나는 더 살아야겠다는 것이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죠. 그럼 이런 것을 성도가 할 수 없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걸 충분히 이렇게 해요. 빠지게 해놓고 돌아서서 소급해서 이게 네가 몰랐던 너의 진면목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사탄이 감사해요. 먼 친척 아재가 얼마나 고맙습니다. 600만원 챙기고 죄인 되고 구원받고. 좀 그런 일이 자주 생겼으면 좋겠어. 챙길 건 챙기면 “주여, 죄인 여기 있습니다.”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또다시 확인시켜주고. 그런데 지난 낮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제일 나쁜 게 뭐냐 하면, “사탄아, 물러가라!” 도대체. 이건 지금은 나는 성도다. 앞으로 성도답게 살아야 돼. 그런데 사탄이 얼마나 날 지옥 가라고 시험하겠느냐? 따라서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내가 성령을 조종해서 어쨌든 간에 나한테 오는 유혹을 물리치지 아니하면 나는 탈락이고 뿌리치면 성공이다. 이게 바로 사탄 아닙니까. 이런 사고방식이 사탄이에요. 그 사람에게 당신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래? 지금 그 사람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기는 여기 있고 그리스도를 타인으로 봐요. 예수님이 타인 중에 하나죠. 예수님이 나를 지켜볼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그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했죠. 나라는 것은 주변에 누가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그때마다 정립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할 때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비췸을 얻더라도 십자가 모르면 탈락하듯이 그 말씀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생각나서 그걸 이겨보려고 하는 겁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어디 가느냐? 감람산 기도원 이런 데 가요. 이 세상 땅에 어디 가도 지옥이에요. 감람산 기도원, 지리산 들어가면 성자 되는 줄 알아요. 안 먹고 안 들으면 돼요? 이 세상에 피할 데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증명이에요. 지난 낮 설교에 했지만. 상상하는 거예요. “주님, 저 주님 제자 맞습니다. 주의 사람 맞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것 사탄의 짓이에요. 이것 아닙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됐습니까? 바로 종의 길을 가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고통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나한테 스며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영광 받는 왕의 자리가 고난 받는 종의 자리로 전환되면서 시편 4편이 쓰여지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겠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쓰시는 거예요. 쓰시게 되면 장차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이 자기만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죠. 구원할 자기 백성 있지요. 그러면 자기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들의 죄가 어디에 스며듭니까? 예수님께 스며들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잖아요. 그게 고난 받는 종이 되는 거예요. 고난 받는 종인데 그게 왕이에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탄은 일반 사람들이 메시아를 로마제국에서 벗어나는 위대한 영웅, 힘 쎈 왕, 진짜 다윗 같은 그들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어요. 실패한 다윗 말고 성공한 다윗이 오시게 되면 우리 민족은 드디어 약속대로 택하신 민족으로 구원받는다고 자기 정체성이 아니고 자기 동일성을 계속 우기는 거예요. 동일성들이 모이면 집단적 동일성이 되잖아요. 집단 주체 아닙니까. 그게 바로 우리 유대민족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너 성도고 나 성도니까 우리 교회는 성도다. 이게 집단 주체거든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귀히 여기듯이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을 귀히 여겨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이단은 딴 게 아니에요. 자기의 우상을 숨기지 않고 집단의 모습으로 드러낸 게 이단입니다. 자기가 볼 것 없으니까 나는 어디에 소속돼있다고 자랑 질하는 것. 그렇게 기 안 죽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기 집안이 어려우면, 시삼촌이 청와대에 있고, 우리 조카가 이번에 울산시 토목직 9급에 합격했고. 자꾸 이렇게 뭔가 껍질에다 괜찮은 브랜드를 붙이는 거예요. 주께선 이미 죄인으로 규정했는데 그게 싫은 거예요. 죄인이지만 좀 괜찮은 죄인,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무슨 괜찮은 죄인이 있습니까. 전부 다 미더덕 찜이고 멍게인데. 다윗의 시편 4편의 주제가 뭐냐고 물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왕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택한 백성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의 아픔이 다윗 개인적 아픔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시편 4편의 주제입니다. 아픔을 즐기는 사람은 정신병자에요. 아픔을 왜 즐깁니까.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언약궤는 땅에 있거든요. 언약궤가 시내 산에서 주어졌지요. 언약궤는 상자에요. 물체에요. 그 안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있고. 그 상자가 나중에 인격이 돼요. 이 과정이 어려워요. 이 과정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거예요. 언약궤가 있다하니까 엘리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상자 있으면 적들이 물러갈 줄 안 거예요. 찌지직 어떤 전자파 나와서 이길 줄 알았어요. 상자 빼앗기고 전쟁에 패배했잖아요. 다윗언약은 뭐냐 하면, 상자가 물체가 돼버리면 인간에게 대상체가 돼요. 인간 바깥에 있는 사물체가 된다고. 다른 사물 다루듯이 우리가 내 소유로 삼으려고 시도합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물체의 뜻과 내가 합치가 안 돼요. 언약궤가 인격체로 변해줘야 나란 인격이 합류하게 되고 함몰시키게 돼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특정 지점에 있으면 예수가 아니에요. 예배당 앞자리에 예수님 계시면 안 됩니다. 앞자리가 은혜 받는 특수한 자리가 되면 그건 하나의 지점이 돼요. 나의 대상으로 물체가 된다고요. 그럼 주님은 뭐냐? 성령께서 어디에 옵니까? 어떤 특정 물체에 손대면 하는, 그건 옛날 언약궤고 언약궤 뚜껑 열면 죽고, 그거는 구약이지만 신약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와요. 우리 내부에 온다고. 인격체로서. 내부에 오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은 내 육체만 보일 뿐인데 안의 기능은 주님이 기능하는 것. 물론 그렇게 되면 남들은 안 알아주지요. 왜? 남들은 우리 겉모습을 보기 때문에 안 알아주지요. 이 과정은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