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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0406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죽음놀이자유게시판레위기

20180406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죽음놀이(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19장 할 차례입니다. 레위기 19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라는 말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어떤 집단을 구원합니다. 집단, 단체를 구원할 때는 모델이 있어야 되겠지요. 하나님과 너희라는 집단 사이에 한 분을 대표해서 그 한 사람이 말씀을 대신하게 되면, 모세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알아듣는 무리, 그게 너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면 쉬운데요.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올라오는 자기 생각을 안 믿고 자기 바깥의 어떤 사람에게 자기 운명을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모험입니까? 보통 큰 모험이 아니죠. 사람은 자기 쪽으로 방향이 정해져있어요. 모든 걸 내 쪽으로 끌어 모으는 거예요. 애들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맛있는 게 있으면 할아버지가 맛 좀 보자고 하면, 안 돼! 앞의 방향이 저쪽이 아니고 내 쪽으로 오게 돼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게 돼있어요. 방향을 내 쪽이 아니고 저쪽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사실 인간으로선 가능할까, 생각해봐야 돼요. 한 가지 예를 들면, 교회에 교인수가 많은 게 좋습니까, 아니면 그 교회에 사도 바울이 방문하는 게 좋습니까? 주의 종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준다면 그 순간은 교인수가 몇 명인지 생각이 안 나지요. 사도 바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방향이 내 쪽에서 사도 바울 쪽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 바울에 속한 ‘너희’가 되는 겁니다. 너희란 말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너희가 O가 되려면 나는 X가 돼요. 내 생각 안 하고 주님께서 보내신 분의 말씀이 더 중요한 거예요. 교인수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말씀이 있느냐가 중요하죠. 우리 집 한 달 수입이 얼마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늘 말씀이 있느냐, 믿느냐가 더 중요한데 그 사람은 너희에 속해요. 너희란 말을 볼 때 너희의 반대말이 문법적으로 우리가 되지만 사실 우리가 아니고 너희의 반대말은 나가 돼요. 이런 이야기를 왜 초반에 하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을 한다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 것이지 너희가 흔히 말하는 나, 너희가 너희들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란 뜻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거룩하란 말은 뭐냐 하면, 이걸 쉽게 풀이하면 인간이 평소에 어떤 걸 내놓지요? 보통 자기 것을 내놓지요. 더 쉽게 이야기하면, 당신은 무엇에 그렇게 진지합니까? 당신이 인생 살면서 가장 진지한 게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그것은 평소에 그 사람이 내놓고 싶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돼있어요. 인간에게 뭔가 내놓고 싶은 게 있다는 자체가 인간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나에 대해서 내놓을 게 없어야 돼요. 너희에 대해서 내놓을 게 있어야 되지 내가 나만이 따로 챙긴 게 나오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레위기 19장에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한 말에 부합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시작했다는 말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나의 것으로 마중을 나와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사람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평소에 남한테 이야기하거나 내놓는 게, 내놓는다는 말은, 버스 타면 남의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들리는 것, 벤치에 앉아서 사담하는 것 들었을 때 두 사람이 이야기할 때 서로서로 내놓는 게 있어요. 자기 이야기죠. 그가 왜 자기 이야기냐 하면 평소에 그 사람이 거기에 진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식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나온다는 것은 평소에 관심사가 자식한테 꽂혀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은 뭐냐 하면, 내가 끌어 모은 것을 내놓으란 말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관심 있습니다, 방향이 끌어 모은 게 아니고 주의 말씀에 끌려가기를 원합니다. 끌려가는 그 모습이 나오는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은 분리란 뜻이고 다른 민족과 차이 난다는 뜻이거든요. 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 앞에 끌리는 것을 좋아해야 돼요. 주님 앞에 끌어당기는 걸 영광으로 여겨야 된단 말이죠. 감사히 여겨야 되고.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끌어 모은 것을 감사하지요. 챙긴 것을 감사하고. 자기 것이 든든하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고. 만약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성도라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징역 24년 살게 만들고 180억 벌금으로 내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는 겁니다. 얼굴 초췌하게 있을 게 아니고. 방글방글 명랑해야 돼요. 진짜 교도소에 있는 걸 산뜻하게. 내가 원했던 게 아니잖아요. 주께서 원한 거잖아요. 내가 원한 것과 주께서 원한 것 사이에서 누가 이겼느냐? 주께서 날마다 내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은 그것에 대해서, 주께서 이긴 그것이 바로 감사할 일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자기가 실패한 이유만 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서 실패해야 될 이유, 쉽게 말해서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정짓는 그 근거만 안다면 그것보다 더 성공한 사례가 있을까요? 그게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에요. 인생 성공이란, 내가 실패해야만 할 이유, 정당성을 발견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동안 실패한 이유는 바로 내 것을 따로 챙기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는 배치되는 짓을 평생토록 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 것이라는 것을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거든요. 주께서 허락한 적도 없는데 내 속에 있는 마귀 말만 믿고, 네 것 네가 챙겨야 돼. 착한 네가 챙겨야 되고 너의 선함으로 챙겨야 돼, 라고 나오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 자기 의를 위해서 계속해서 챙겨온 거예요. 그것이 자기 진정한 관심사가 되었고 그걸 이야기로 만들어서 남한테 자랑 질했고. 그건 어디까지나 나에요. 너희가 아니고. 3절에 보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돼있지요. 모든 인간의 존재의 원인은 자기한테 것이 아니고 바깥 상황, 바깥 사회에 있습니다. 울산에서 23살 먹은 사람이 버스를 박고 버스를 밀어붙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버스가 현대자동차공장 담벼락에 충돌해서 2명 죽고 5명 다쳤어요. 2명 죽은 원인이 뭡니까? 본인한테 있는 거예요? 왜 버스 타고 삐딱하게 앉았어. 왜 버스 탈 때 사고 날 걸 미리 예상 못하고 딴 생각했느냐? 그래서 네가 부상당할 만하다. 그렇게 책임 물을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원인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라는 것은 일시적 존재기 때문에, 순간적 존재기 때문에 우리한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거죠. 바깥에 있는 거예요. 원인 바깥에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나의 것이란 성립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나의 것이 있다고 하니까 나의 것이 철저하게 안 다치는 쪽으로, 안 다치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 괜찮은 원인들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합니다. 그것은 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래요. 23살 먹은 청년이 내가 탄 버스를 밀어낼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다친 사람, 죽은 사람 아무도 몰랐지요. 두 사람 죽었는데 버스 탄 게 죽을죄에요? 사람들이 죽을 때는 그만한 상응하는 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때는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는 게 원칙이죠. 그런데 버스 탄 게 죽을죄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일반적 상식과는 안 맞는 거예요. 사람 죽여도 요샌 사형 없잖아요. 그런데 버스 잘못 타서, 그것도 대전 버스도 부산 버스도 아닌 울산 버스. 사람이 죽는 것은 로마서 6장에 보면, 죗값으로 죽는다 했는데 그 죄가 뭐냐는 겁니다. 그 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을 위하여 내가 살다보니까 나의 것에 원래 주인의식이 없는 거예요. 쉽게 하겠습니다. 복수 또는 보복이죠. 보복이란 어떤 때 성립하느냐 하면, 내 것이 있을 때 복수와 보복이 가능해요. 내 것이 없다면 복수와 보복이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죽였다. 민수기에 나오거든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에 대해서 왜 주님께서 처벌하느냐 하면,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그 사람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냐 하면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이 보복하는 거예요. 아벨이 죽었잖아요. 하나님께서 땅이 호소해서 가인을 찾아옵니다. 복수죠. 아벨은 아벨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성도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거든요. 주의 것이니까 주의 것이 거룩하지 않을 때는 누가 처벌할 권한이 있느냐? 하나님이 처벌할 권한이 있어요. 그리고 그 처벌은 처벌해달라고 해서 처벌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쥐도 새도 모르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변치 않는 원칙에 의해서 처벌이 이뤄졌고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겁니다. 갓난아기부터 해서 전부 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무지무지하게 성실해요. 참 부지런하고. 자기 일에 게으름이 없습니다. 또 빈틈이 없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 정도로 성실합니다. 성실하신 하나님. 철저하게 보복과 복수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 했어요. 누가 다른 사람에게 명령한다는 말은, 자기 것일 경우에는 명령이 돼요. 부모가 자식한테 명령하는 이유는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안식일을 지키라, 거룩하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내 거야”란 뜻이에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말씀을 주신다는 게 이 정도로 고마운 일이에요. 말씀을 줄 때는 태도가 말씀 준 방향으로 나가야 되겠지요. 평소에 인간들의 방향은 뭐든지 끌어 모으는 방향에서 말씀이 왔을 때는 방향이 반대로 바뀝니다. 끌어 모으는 게 아니고 그냥 가져가세요, 하는 거죠. 마음껏 사용해주세요, 마음껏 다루어주세요, 라고 자기를 패배하는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물었잖아요. 교회 교인수가 많은 게 좋습니까, 말씀이 있는 게 좋습니까? 교인수가 많으면 우리교회 교인수 많다고 다들 끌어 모을 생각을 하지만 말씀이 있으면 말씀만 있으면 좋사오니, 이렇게 되니까 니 것, 내 것, 우리 것이 없고 다 같이 주님 보시기에 너희가 되어서 나를 챙기는 것에서 내가 손을 놔도 되는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죠. 그 방향성이 바로 기존의 상식적인 방향과 다른 구별되다, 거룩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3절에 나와 있는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란 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바깥에 있는 상황 또는 사회에 있다 했지요. 그럼 부모는 ‘나’가 아니잖아요. 부모는 나 바깥에 있는 어떤 인물이죠. 그게 상황이죠. 내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은 나 이전에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겁니다. 부모를 경외하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나에 대해서 관심사가 떠나라 이 말이에요. 자기의 원천을 찾아가는 거예요. 자기의 본래 모습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얼굴을 돌리는 거예요. 나의 원천, 나의 기원, 나의 시작, 나의 뿌리, 그것을 잊지 않고 생각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에 관심을 둔다는 말은 부모에서 멈추지 않겠지요. 부모의 부모, 계속하게 되면 누구한테 관심을 두겠어요? 하나님, 부모를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겠지요. 그러면 부모를 경외하라는 그 말씀 안에 자신의 뿌리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 경외와 더불어 주어진 게 안식일을 지켜라.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모든 걸 만드시고 만족하셔서 안식일을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안식일이란 인간이 존재하게 된 그 원천을 안식일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게 안식일이냐 하면, 나의 것을 다 빼앗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줄 때 그게 바로 안식상태가 되는 겁니다. 내 몸, 내 인생을 내가 다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다루시는 상태가 안식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에 머물면 안 되겠지요. 자신에게 머물러 있으면 안 빼앗기려고 할 테니까 주님한테 못 물려주잖아요. 내 것인 데 왜 돌려줍니까, 이러면 안식이 아니란 말이죠. 안식을 한다는 것은 평소에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잊어버려야 되고 또는 몰라야 되겠지요. 잊어버리는 게 안식이고 모르는 게 안식이에요. 안식이 되면 바보, 등신이 되는 거예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생 힘들게 살고 직장, 가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게 살다가 잠에 곯아떨어지게 되면 그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바보, 등신이 되는 겁니다. 잠자니까 모르게 돼있지요. 수면내시경 해보세요. 아이큐 150 넘어도 수면내시경 하는 순간에 바보, 등신 돼버려요. 몰라요. 그 과정이 불연속 돼버려요. 나는 지금 깨어있다. 마취제 들어간다. 정신 차려야지 하다가 깨면 다른 방에 옮겨져 있어요. 내 기억에 단절이 생겼어요. 주님께서 안식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집스런 나의 기억을 단절시켜버려요. 이건 노선의 문제거든요. 나라는 노선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갑니다. 가다가 중간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라는 노선에서 성령님의 노선으로 가요. 성령님은 원래적인 분이에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원래 계셨던 분이에요. 하나님이 안식 만들 때 거기에 계시던 분입니다. 원래 노선이 따라오다 내가 스무 살 때 잘 나갔고 나이 사십에 성령세례 받았다. 낚아채는 거죠. 독수리가. 낚아채면 내 기억 속에 예상 못한 일이 벌어져요. 어떤 현상이냐 하면, 내가 평소에 꾸준히 해왔던 나의 버릇은 어떤 일을 행하면 그것은 원인이고, 그 원인의 결과를 내 바구니에 다 담았어요. 나라는 위상과 내가 설정한 나의 영역을 채우는 데 급급한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결혼해서 아이들 많이 낳는 거죠. 3명, 4명 낳을 때 옆집에 배급 주려고 낳습니까? 얘가 강아지입니까? 나눠주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섯, 여섯 되도 나는 외롭게 살아서 얘 키우는 게 재밌어. 그러다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내가 해서 원인-결과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거예요. 의미가 없고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그 순간부터 새사람 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소급해서 의미가 제공됩니다. 내 노력이었다고 여겼던 것도 내 노력이 아니고 주님이 허락하신 거구나, 라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 돼요. 그러면 내 기억이란 노선에서는 나에게 모든 걸 회수하다가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에게 회수한 것 몽땅 주님 앞에 반납하게 되지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얘가 다섯이든, 여섯이든 관계없어요. 주님께서 돌려드리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다 바치게 되죠. 왜냐하면 주님의 허락이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아이가 다섯이고 여섯이고 생겼으니까 몽땅 주의 것이라고 돌려주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속에는 두 개가 있어요. 나의 기억이 있는데 성령께서는 십자가 피를 앞장세웁니다. 나의 기억에 있는 내 소원, 내가 잘하려고 한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죄에 해당됨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피를 모르면 죄를 몰라요. 피를 모르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라는 것은 또다시 자기 자신을 잘난 척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내 죄를 압니다. 매일같이 반성합니다. 자책합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짓 안 할게요. 지저분한 짓 다신 안 하겠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다시 괜찮은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다고 남한테 떠벌이고 있는 거예요. 뭐가 진지합니까? 자기 잘남이 진지한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나는 다시 새사람 될 수 있다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예수님이야기 아닙니다. 십자가이야기 아니죠. 괜찮을 자기 장래를 미리 당겨서 자랑 질하는 겁니다. 두 노선 가운데 어느 게 안식일입니까? 안식일은 본래적이라 했지요. 창세기 2장 초반에 안식일 나오지요. 천지창조가 완성됐을 때 안식일이라 했단 말이죠. 하나님도 안식하고. 하나님의 안식이란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본래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음을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왔다는 걸 알 때 우리는 마음에 안식을 느끼는 겁니다.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 일어나는 모든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아니면 사회에 있어요? 사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으면 더 나가야 돼요.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울산의 버스가 차에 받혀 밀려서 담벼락에 부딪쳐 두 명 죽였다는 그 사람은 참새도 주께서 허락해서 죽이듯이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겁니다. 가족들은 그 점에 대해서 그 부모가 만약에 그렇게 돌출했다는 걸 안다면 그 가족들도 정신 차리고 내가 내 자신에 머물러 있다면 이건 살아도 죽은 상태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상태라는 걸 자식들은 감 잡아야 돼요. 성경에서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걸 말합니다. 끊어졌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쪽에서 듣지 않는 그런 것이 죽음 관계에요. 기도를 해도 안 듣고 열심히 해도 안 듣지도 않고. 인간의 모든 것을 일체 듣지 않는 상태가 죽음 상태에요. “너는 너 혼자 살지 찾기는 왜 찾느냐?” 이런 식이에요. “니가 그렇게 잘났으면 평소에 네 힘으로 잘 살데, 왜? 살아 봐.” 주님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배격당하고 배제당하는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눈꺼풀 깜빡거린다고 산 게 아니에요. 홀로 살면 죽은 상태에요. 연예인들 혼자 살고 엄마들 나와서 지켜주는 프로 있지요. 죽은 자식들 부모가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각자에 cctv가 달렸다고 봅시다. 내 모든 일상에 대해서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지켜본다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하고 감사한다면 그 사람은 열린 상태거든요. 연결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상태를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죽어도 산 거예요. 버스 사고 나도 죽어도 산 거예요. 그런 성도를 안식이라 해요. “이제 그만 됐다.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천국 와서 편히 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 안 했고 주의 일했기 때문에. 주님과 통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주의 일인 것을 본인이 알잖아요. 미천한 인간에게 주의 일을 맡겼다는 그 자체가 본인의 입장에선 굉장히 감사히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감지덕지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게 열린 상태고 그게 주인을 알아보는 상태죠. 이사야 1장에 나오지요. 소도 지 주인을 안다고. 그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서로 통하는 사이가 안 됐단 말이에요. 소도 주인을 알건만 너희는 자식이라도 아비를 잊어버렸다. 이건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요. 끊어졌다면 원래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주님의 심판과 저주와 보복과 복수가 멈출 날이 없지요. 계속. 아까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선 성실하다고. 주님은 쉬는 날도 없어요. 토일 안 놉니다. 주무시지도 않아요. 하나님께선 졸지도 않으셔요. 주님한테 졸음운전 같은 것 없지요. 시편 121편에 나오지요. 눈을 들어 산을 보라. 우리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산? 아니야.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다. 벌써 열려있지 않습니까.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은 이미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에 솔깃하고 내 쪽에 끌어 모으는 게 아니고 오히려 안식일뿐만 아니고 모든 말씀이 끌린다는 말은 이미 그 사람 안에 주의 안식이 성사되고 있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 사람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안식이에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안식상태가 되는 겁니다. 연결된 상태, 범죄 하기 전의 원래 상태에 관계로 이어졌기 때문에 안식상태 놓여있습니다. 신약에서 그런 게 있지요. 이 땅에서 성령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죽어서도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묻는 게 아니고 살아있으면서 계속 물으시는 겁니다. 네가 네 위주로 사느냐, 아니면 말씀이 들리는 쪽으로 얼굴 돌리며 사는지 계속해서 묻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힘으로 자기가 자기 위주를 포기하고 주님 위주로 살 수 있는 위인이 있는가? 없습니다.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는가? 구원은 계약이 있어야 됩니다. 언약에 의해서 성사돼요. 우리는 계약자가 아니고 계약의 결과물이지 계약자는 따로 있어요. 그러면 구약의 계약자가 누구냐? 모세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아닙니다. 노아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계약자가 누굽니까? 계약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에서 계약자가 돼요. 그리고 신약에 오면 계약자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와요.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나님께서 자찬했던 경우는 만족스럽다는 증거는 바로 안식의 만족이었습니다. 안식에 만족했는데 뱀이 와서 안식을 흩트려버렸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동원시키는데 그 계약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 하나님의 이름이 되면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가 돼요. 아버지와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이 창조 전에 예정하신 계약을 지상에 펼칩니다. 부챗살 펼치는 것처럼, 함축된 것, 주름진 것을 펼치는 것처럼 활짝 펼치게 됩니다. 펼칠 때 노아언약, 모세언약, 아브라함언약이 그 내용이 돼요. 펼칠 어떤 원리로 펼치는지 줄줄 나오는 겁니다. 펼칠 때 핵심이 있어요. 핵심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는 반드시 두 개의 상대자가 있어야 되지요. 한 상대자는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는 사람이죠. 사람이 있어야 후손이 있을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여자의 후손으로 등장합니다. 두 번째는 뱀의 후손이죠. 뱀도 뱀의 역할 해야 될 사람이 있겠지요.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계약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을 통해서 인간세계 속에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면 분류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분류현상을 오늘 본문에선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레위기 처음에 제사 나오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제사 지내는 제단에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관여하게 돼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지금까지 공부한 걸 복습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와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하나님, 자기 것이다. 소유니까 명령과 지시할 수 있는 거예요. 명령과 지시한다는 그 자체가 네 쪽의 자체적인 것은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시에 의한 그것만 받지 너란 이름으로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받아요.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을 한 겁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한다. 또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일을 발생시킨다. 같은 뜻입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하나님은 자기 일에 대해서 누구의 협조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일하셔요. 그 일에 대해서 그게 하나의 전쟁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악마는 인간을 앞잡이로 세워서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부추겨서 인간 쪽에서 에덴동산 가라.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를 가게 하거든요. 천국 문을 두드리는 노크를 하게 한단 말이죠. 누구 노래처럼. <Knocking on Heaven's door>(Bob Dylan) 인간 쪽에서 천국을 시도하는 거예요. 시도할 때 누구 좋으라고 시도하는 거예요? 바로 이 세상사는 게 답답하니까 죽어선 좋은 데 가야 되잖아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천국까지 드높이기 위해서. 그걸 창세기 11장에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죠. 바벨탑 만든 취지가 그것 아닙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도록 계속해서 자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거예요. 내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거예요. 과연 그런가요? 내가 잘되는 것이 나한테 좋은 동시에 하나님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것으로 끌어 모으는 그것을 마귀로부터 배워서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만 받아요. 우리 것은 안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뭘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제사 드리는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신약에 오면 결국 예수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바로 피 제사 아닙니까. 내 살과 내 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신약에서 예수님이 친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기 위해서 그 형식이 구약 때부터 꾸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돼온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을 담아내는 그릇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자기 것을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계속 하달됩니다. 하달되어 구성되고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형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장차 하나님 자신이 그 방식대로 모든 계약을 완성하고 성취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할 때 그 부모와 하나님과 관련돼있는 거예요. 부모는 그 부모한테 계속해서 저주받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왜 하나님의 언약이냐 하면, 언약이 없는 신은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나온 적이 없어요.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전쟁이 일어나요.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다. 어떻게 함락시킬 것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이디어에서 나오면 안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동행하는 자리에 있어야 돼요. 그것은 제사장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총 열세 바퀴 돌았더니만 여리고성이 저절로 그냥 무너진 거예요. 요단강 물이 불었다. 요단강이 평소에는 안 그런데 갑자기 물이 불었어요.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한 복판에 서있을 경우에만 물은 그 순간 스톱이 돼요. 스톱이 되니까 길이 나오지요. 그 길을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잖아요. 만약에 언약궤가 그때 없었으면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뭘 느껴야 돼요? 나는 절대로 천국 갈 수 없는 백성이었는데 내 속에 있는 언약궤, 언약 때문에 나는 이미, ‘이미’가 중요해요.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신약의 성도들은 새 언약이 있으니까 십자가 있으니까 성령을 받았으니까 그걸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이뤄지고 이런 결과를 내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막힌 요단강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는 게 아니고 요단강 같은 상황이 매일같이 주어지죠. 여리고성 함락하니까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사고방식이 뭡니까? 갑자기 여리고성 무너지니까 언약이 있어야 될 자리에 우리는 여리고성 함락했다는 자기 체면이 있어버렸어요. 그 다음 성이 아이 성, 작은 성이에요.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들어가지 않고 이미 큰 성도 함락했는데 작은 성 정도야 우리 힘으로. 그러다가 그들은 아이 성을 점령하지 못했잖아요. 결국 아간을 돌무더기 만든 후에야 아이 성을 함락하지요. 희생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쉽게 하나님 없는, 쉽게 돌아선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희생물을 제공하는 그런 상황, 사태가 계속해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들이닥쳐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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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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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