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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동질성과 정체성 180409강의시편

20180409a 부산강의 : [시편]9(4편)-동질성과 정체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편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가 네 번 나오는데 나가 누구냐, 할 때 이 점을 생각해봐야 돼요. 동질성과 정체성이 달라요. 동질성은 내가 생각한 나는 남이 나에게 심어준 거예요. 나란 나와 관련 있는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구축했을 때 남이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남의 의견을 규합하는 거죠. 그런데 정체성은 몰라요. 내가 진짜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정체성은 하나님 몫이에요. 특히 성도한테는.

시편 4편은 다윗의 시잖아요. 1절에 벌써 ‘나’가 네 번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봐도 나란 것은 다윗이라고 하죠. 그건 동질성이에요. 다윗의 타인은 사울입니다. 사울을 마주하면서 그때마다 다윗 본인이 본인을 생각하는 것, 이게 전부 나라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돼요. 사울도 그렇고 다윗 본인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서 어려운 말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라 할 때 이건 의미 없어요. 나는 나지 뭐가 되겠어요. 나는 어떤 인간인가? 이럴 땐 의미가 있어요. 이건 본인이 하면 안 되고 남들이 이야기해줘야 돼요. 남들 보기에 난 어떤 인간인가. 그 남이 사울이거든요. 사울은 다윗의 적입니다. 적에게 몰릴 때 미움 받을 때 그 밉상으로 인하여 다시 나를 생각하게 돼요.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밉상 받지? 남이 없으면 정리가 안 된다니까. 나는 훌륭한 할머니라 생각했는데 할아버지한테 간다? 내가 생각한 나는 괜찮은 할머니인데 왜 나한테 오지 않고 할아버지한테 가지? 걔 눈에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게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주위에 남이 없으면 나도 같이 사라져요. 이게 치매 현상이라 하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내가 사라지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옛날 나를 붙드는 것을 우울증이라 합니다. 보통 옛날 나는 잘 나갔던 나, 남한테 사랑받고 알아주던 나, 그런데 그렇게 해주던 주위 사람들이 죽던지 떠나든지 가버리면 나는 나를 구축할 수 없어서 옛날 나를 연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나를 붙드는 거예요.

그걸 form형식이라 합니다. 그래서 동질성은 항상 형식으로 구축하게 돼있어요. 형식이 하나님의 정체성, 진짜 내가 누군지 아는 정체성 같아서 형식은 녹아져야 됩니다. 경계선이 허물어져야 돼요. 허물어지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프라이팬에 치즈를 올려놓으면 분명히 막인데 녹아 없어지지요. 나라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남들이 이야기하면서 내가 있다면 나란 내용이 형식으로, 치즈처럼 흐물흐물 녹아져야 돼요. 그런데 남이 있는 이상 치즈 막(시멘트??)오히려 강화돼요. 굳어져요.

혼자 있을 땐 긴장 풀고 있다가 남이 등장하면 타인과의 경계선이 굳어지잖아요. 굳어져서 오십견 걸린 것처럼 근육이 딱딱해지고 그렇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오면 갑자기 근육이 긴장해서 수축이 돼버려요. 힘들어요. 그런데 자기 맘에 드는 사람 같으면 치즈 막처럼 녹아져요. 모든 경계를 내려놓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타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쏙쏙 들어오면서 그것이 나의 동질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 인생사는 보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늘 같이 있는 것이 비록, 잠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채소를 먹고 살아도 좋은 사람 있으면 그것이 최고라 했어요. 고기 먹고 살아도 꼴 보기 싫은 사람과는 못 살아요. 힘들어요.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괜찮은 사람은 만나서 막 같은 걸 형성하게 되는데

그럼 오늘 본문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것은 다윗의 동질성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정체성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해줘요. 동질성이라면 다윗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고 속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다윗은 우리와 똑같아요.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다윗을 다루어서 다윗 안에 있는 내용물이 사실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진짜 정체, 자기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겁니다.

쉬운 예를 성도가 주님 앞에 왔다. 처음에는 인간이죠. 인간이 주님 앞에 왔을 때 인간은 자기의 육적인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와요. 주변에 자기가 사귀었던 많은 타인들, 남들이 생각했던 성격을 가지고, “나, 이렇습니다.” 하고 오지요. 대표적으로 성질 급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런 사람들이 와요. 오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줘버린단 말이죠. 성령은 누구 마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주면 베드로는 나중에 껍질만 남아요. 안의 내용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게 베드로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에게도 해당됩니다.

제가 동질성이란 어려운 말을 했지만 이 말 외에 적당한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동질성이란 두 시간 전의 나와 지금 나와 같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앞으로 두 시간 후에도 나일 것이라고 계속 우기는 것을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것은 form을 재서 여기까지는 나고, 저쪽은 나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체성이 돼버리면 동질성의 나를 뭐로 보느냐? 껍질로 바뀌죠. 껍데기로 바뀝니다. 두 시간 전에 저를 다루신 것처럼 앞으로 두 시간 후에도 저를 다루실 거니까 내 인생, 내 운명에 대해서 잘 될 것이라는 게 아니라 아예 없음이 돼야 돼요. 운명이 있으면 예정론 골치 아프지요, 천국 가는 건 골치 아프고 그러잖아요. 왜냐하면 나라는 동질성이 따로 있으면 15년 뒤에 천국 간다면 15년 동안 내가 성도로 유지해야 되는데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까. 중간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보통 문제 아니거든요.

치매라는 게 타인의 기억에서 멀어지지만 자기 자신의 기억에서도 멀어져요. 치매가 아들 못 알아본다는 정도 같으면 중간쯤 되는 건데 정말 치매가 심한 것은 자기 자신을 못 알아봐요. 그럼 죽을 때 다 된 거죠. 그냥 육신의 껍데기만 있는 거예요. 죽은 상태지요. 나는 죽을 때 웃으면서 찬양하면서 죽을 게. 이러면 정상인이죠. 그런데 치매 걸리면 나는 죽을 때 웃겠다는 것도 5년 전에 이미 다 바닥났어요. 다 써먹었어. 그때부터 예수가 누군지 몰라요. 내가 뭘 할지도 몰라요. 그냥 자다가 헉하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대비할 타이밍도 손에 쥘 수 없어요. 그냥 죽어버리는데 폼 나게 멋있게 죽는 그 계획도 실패로 끝나요.

인간은 껍질입니다. 갑자기 차사고 나서 죽어보세요. 폼 나게 죽는 게 어디 있어요. 아직도 자기 동질성이 있으니까 난 죽을 때 자식들 모아놓고 예수님 간증하며 죽어야지, 라는 되지도 않는 망상을 품고 있다니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리를 놔버리는 거란 말이죠. 성령께서는 미리 그걸 놓게 만들어요.

십자가로 나는 죽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미리 경험케 하는데 아직 우리는 다윗처럼 동질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체성과 치열하게 싸움 벌이고 있습니다. 정체성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가 집어넣은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체성에 눈 돌리지 않게 돼요. 난 그런 거 몰라. 남들이 인정해주면 그걸로 오케이. 자식이 날 인정해주고, 남편이나 아내가 날 인정해주고, 교인들이 날 인정해주면 난 오케이.

권 목사님이 아까 이야기했는데 교인이 열다섯 명쯤 된다 했어요. 본인은 열다섯 명의 목사에요. 그런데 하나둘 빠져나갑니다. 열세 명의 목사였다가, 열두 명의 목사였다가 지금은 몇 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서 목사님이 그 사람도 언젠가 간다는 거예요. 보세요. 나의 동질성은 열다섯 명 이었는데 이제는 제로에요. “목사님, 교인 몇 명입니까?” “없습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럼 나의 동질성은 교인이 하나도 없는 목사가 돼버려요.

하지만 그렇게 해도 자기 소망이 멈추지 않지요. 한 이 년 후에는 열댓 명 올걸? 이런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과거의 기억을 고집스럽게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거예요. 지금은 없지만 이 년 뒤에는 서울대학교 나왔다는 소리 듣고 열댓 명 들어올 수 있다. 그런 기대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래도 나는 가수다. 나는 목사다. 계속 가는 겁니다.

이 다윗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 하지만 사울에게 쫓기는 게 아니에요. 다윗은 진짜 다윗 되게 하시는 주님한테 쫓기고 주님의 원수, 주님과 싸우는 자는 본인이 고집하는 본인을 놓지 않기 때문에 그걸 쥐고 있기 때문에 주님과 날마다 싸우는 겁니다. 사울이 적이 아니고 내가 나의 적이 되는 거예요. 나의 정체성이 적이 되는 겁니다.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시편 4편에 나오는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할 때 대표적으로 이것을 왜곡되게 정말 터무니없이 잘못된 해석이 바로 다윗을 나와 동일시한다는 겁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하는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하게 되면, 내가 부를 때에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응답하지요. 금요철야기도회에 왜 왔습니까? 응답받기 위해서 온 거예요. 성경에 나오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멘트가 뭐냐? “주여, 성경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믿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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