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b-이 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0절에 근심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거예요. 떠날 때 아버지한테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대한게 있을거예요. 그 기대한 것을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그 성격속에 다 집어 넣어버려요.
이거는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는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없다. 따라서 나를 위해서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기도해주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은 그것은 니가 단절의 의미를 이해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단절을 첫째시간 끝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주께서 오실 구원은 심판이였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전부 다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하기 때문에 심판하지만 그 뒤에는 구원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니가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심판 다음에 구원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이게 아직도 한다리는 심판에 걸쳐 놓고 한 다리는 구원에 걸쳐놓은 꼼수가 되는 거예요. 꼼수가.
왜 이런 것은 용납이 안되는 이유가 세상이 심판되는데 있어서 나도 거기에 기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이 심판받을만한데 있어서 나는 착한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아주 엉망이라서 세상은 심판받는다 라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판 받는데 있어서 나도 일조를 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남한테 해를 입히는 거예요. 산다는 그 자체가. 착하게 산다는 것은 성립이 안됩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조건하에 사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여기 살기 위해서는 모든 몸짓과 태도와 모든 말씨 톤 하나 하나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너의 행복을 나한테 양보할 의사가 없느냐는 소리예요 그게. 나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방의 행복을 강요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웃을 사랑하라 할때는 반드시 조건이 뭐냐 하면은 반드시 이걸 만나야되요. 강도 만나지 아니하면 이웃은 없습니다. 강도 만난자가 있을 경우에만 비로서 자기자신이 다 틀렸을 경우에만 비로서 이웃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가 강도한테 당하는 전적인 피해자라는 것이 과연 인간이 아담의 몸에서 성사될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반항합니다. 그거 전적인 피해자 아니예요. 반응했잖아요 방금. 방금 반응했잖아요.
애들도 태어나가지고 한 고집들 합니다. 김치 먹으라고 따라 다니면서 숟가락 줘도 안먹겠다고 합니다. 엄마가 조건 걸지요. 이거 해주면 인형하나 사줄게. 그러면 김치 담긴 밥 먹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서 엄마한테는 에너지 낭비가 발생된거예요. 효율 낭비. 빨리 먹이고 이거 해야되는데 김치 안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금 자기 계획에 차질이 일어 났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계획에 차질이 일어나면 인간은 고요하다? 아니면 열불난다? 열불나지요. 열불난다는 말은 이거는 새로운 그 열불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대상을 찾는데 마침 들어오는것이 공부 못하는 둘째 아들 들어왔다. 그러면 그날 또 분위기 안좋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한쪽을 누르면 그냥 쑥 들어가는게 아니예요. 그거는 옆자리로 잠시 이동한 거예요. 누적되게 됩니다. 그래서 한번에 터트리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거 안터트리면 그거 정신병자 되지요.
필드에 나간다든지 뭐 수가 있어야되요. 안그러면 빠라빠라 빠라밤을 하든지 뭐 있어야되요.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요. 안그러면 새로운 그 밥사발 영국제 사발을 사든지 쇼핑을 하든지 뭔가 뭘 해야되요. 안그러면 미장원에 가가지고 생머리를 다시 볶던지 해야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 심판받는데 일조하고 있는 중입니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범죄예요. 살아있다는 자체가 범죄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문학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의미라고 하지요. 의미. 누구 의미? 누구 좋아라고? 나를 위한 의미. 나를 위한 의미가 이게 문학이거든요. 문학에서 이게 윤리하고 나오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의미가 이게 가치가 되요. 나의 가치가 되요.
나의 가치가 이게 정신과에서 뭐가 되냐면 나의 자존심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신학으로 하면 뭐냐하면 나의 영광 나의 의가 되요. 예수님께서 로마서 10장에 뭡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위하여 누구 의를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지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기 의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내가 여기 존재한다. 존재할때는 그냥 존재하는게 의미 있게 존재해야되. 왜? 나니까.
그 다음에 나는 그냥 의미가 아니라 가치있는 의미있어야되. 왜? 나니까. 그냥 가치 있기 때문에 그다음에 뭡니까? 가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더 살아야되. 왜? 귀하니까. 귀한건 살아 남아야지. 훌륭하니까 자존심이죠. 자존심이 자기 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자기 갖고 있는 자기가치의 투쟁의 현장, 자기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는 그런 경쟁의 장. 이게 이 세상 이라는 겁니다. 그 세상에 와서 예수님은 완전히 자신의 가치와 자기 의미를 놔버리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의미를 찾지말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지지 않고서는 나에게 올수 없다는 거예요. 나에게 올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근심 다음에 기쁨을 제공한 것은 너너너 제대로 해라 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제자들 너희라고 이야기 해버렸어요. 너희. 너희라고 한 것은 너희들끼리 경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나는 기도 좀 더 했습니다. 나는 선교 더 했습니다. 같이 경쟁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 밖에 안되요. 둘다 못난 인간들끼리 못나 봐야 뭐가 되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잃어 버렸다가 다시 와야되요. 자, 여기서 아까 제가 첫 번째 어려운걸 했는데 심판밖에 없다. only 심판, 심판뿐이예요.
왜? 우리는 이 바깥에 있는 관람자가 아니기 때문에 관찰자가 아니예요. 관찰자 관람자 어디서 통하냐 하면은 이것은 과학에서나 해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때, 만원경으로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그걸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합니다. 이것은 과학과 관찰이예요.
자기는 멀쩡하고 과학과 관찰해가지고 나에게 저 벌레의 존재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 암 걸린 내 남편에게 저 구더기에게 혹시 특수 약이 나올수 있겠느냐? 나올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어떤 계속 기대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의미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사태를 넣고 나와 있는 겁니다. 나와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관이라고 하고 밖에 있는 대상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객관이라고 해요. 주관과 객관이 있는데 주관, 객관 다음에 나온게 지배가 나옵니다. 지배.
모든 것은 보기만 하는게 아니예요. 총각이 지나가는 아가씨를 본다. 그냥 봅니까? 누가 봐요? 내가 보죠. 주관이죠. 내가 봐요. 누굴 봐요? 아가씨를 보죠. 객관이죠.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요?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지배지요. 갖고 싶다는 겁니다. 지배.
지배 할려면 여기서 뭐가 필요하다? 권력이 나오는 겁니다. 권력. 내 권력이 나와요. 개인적으로 어떤 경우라도 이런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게 티격태격 경쟁할 수밖에 없어요. 경쟁하게 되면 의미와 가치와 결국은 자기 의죠. 의와 의의 경쟁이 되게 되면 나는 주관은 주관적인 나는 상대를 뭘로 보느냐 나보다 못한 죄인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은 뭐냐 하면 의와 죄는 이미 결정난거예요. 내쪽은 무조건 의가 되요. 내쪽은. 우리 교회는 무조건 천당가는 교회예요. 내가 소속된 것은 무조건 가치가 긍정적 가치를 주고 우리에게 반대하는쪽은 무조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천하 죽일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에 있는 사람이 이쪽으로 시집왔다.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죄인이 의인이 되버리는 거예요. 일종의 귀순이니까. 지배관계니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구조속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이쪽에 자기 주관쪽에서 뭘 하느냐 하면은 기도를 하고 헌신하고 금식하고 선교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 한다. 결국 이거는 뭘 노리는 겁니까? 이 논리에 의하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 이렇게 할테니까 나한테 어느하나 내 마음에 드는거 걸려들게 하옵소서.
내가 원하는 객관이 있고 그 객관이 나에게 들어와서 내 영역이 확장되게 하옵소서 라는 노림수 가지고 이렇게 이 행동을 시도한거예요. 그동안. 그래서 우리 교회 부흥됐다고 이야기 하는거예요. 힘이 모아졌잖아요 힘이.
힘이 모아지고 그 힘은 허술한 나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이미지. 사람은요 현대는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는 그 이미지가 좋으면 그 이미지와 같이 묶어 주는 겁니다. 집에 뭐 꼬라지 엉망이라도 바깥에 아는 사람 많고 자기 이미지 괜찮으면 살만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미지를 어떻게 키우기 위해서 그 제거대상. 백수로 있는 동생 이거는 동생도 아니다. 왜 니가 태어나가지고 내 이미지에 손상을 끼친다 이 말이죠. 니가 태어나서. 드라마에 그런거 많잖아요. 어디 근본도 없는 것이 시집와가지고 어떻게 아들도 아닌게 DNA조사하니까 아들도 아닌게 아들 만들어놓고 어디서 우리 재산 다 훔쳐 갈라고. 같이 살래? 같이 못살아요. 쫓아내어 버리죠. 잉잉울고 자기 구두집하는 자기 아버지랑 같이 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드라마 초반부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세상은 모든게 의미 중심이예요. 모든게 의미. 나는 울었다. 은혜 받았다. 왜 우시지요? 왜 은혜 받았지요? 이유대라면 이유 나와요. 자기를 저주 했기 때문에 웁니까? 자기를 심판받을 해서 웁니까? 아니죠. 격려해주니까 울잖아요. 좋아서. 너무 좋아서 울잖아요. 격려해주니까.
나의 평소부터 나의 가치가 의미가 있고 싶었는데 옆에서 북돋아 주니까 비로서 살만한 세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게 전부 다 가짜라는 거예요. 그건 니가 시작한 예수다. 가짜 예수라는 겁니다.
그게 오늘 오늘 본문은 십자가 지기 직전이예요. 십자가 지기 직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못알아 듣는 비사, 계속 비유를 던지는 겁니다. 십자가 질때까지. 그리고 십자가 직전에는 뭐냐? 지금까지 비유로 이야기 했는데 그냥 대충대충해서 함축된 의미로 이야기 했는데 이제는 너희하고 나하고 잠시 빠이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자들은 또 여기서 오해합니다. 심판 +구원에서 여기서 플러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은 이해를 할 때 그때 제자들은 이 심판에 자기가 같이 참여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는 심판 받을 대상이 아무리 봐도 예수님 따라 다닌 죄밖에 없는데 내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이상해 이상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예수님은 심판받고 그 덕으로 우리가 구원받는구나라고 오늘날 교인들처럼 그렇게 생각을 한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그것마저 끊어버려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 잡힐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입으로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마저도.
예수님 심판받고 난뒤에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그 사고방식까지 인간들이 자기 멋대로 임의로 조작한 자기 의미를 살리기 위한 조작된 가짜 복음이였다 하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체 인간을 위한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래서 그들은 근심하는 거예요. 근심하는 이유가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기 때문에 근심하는 거예요. 평소에 나는 나를 지켜야 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게 근심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지킬 사람이 떠나버리는 겁니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보람이예요. 제가 연세 좀 된 사람에게 이렇게 제가 조언하는게 있어요. 다른거 생각하지말고 사랑하세요. 지금 사랑을 안하기 때문에 사는게 그렇게 재미도 없고 힘든 거예요. 사랑을 하세요. 사랑을 할 거야 했지요.
왜 사랑을 하느냐 하면은 사랑을 할 경우에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은 주관이 없어져요. 주관이 없고 내 주관은 누가 대체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주관을 대체하기 때문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지배 관계가 형성이 안되고 자발적으로 나를 잡아먹어라 하는 식으로 자발적으로 상납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건 예속이거든요. 예속보다 더 행복한 사람 나와보라고 그래요. 없습니다. 예속된 것이 가장 행복해요. 예속 안되서 불행해요. 예속할 때 빈틈없이 온전하게 예속 되어야 되요. 못 사는 집에 찬바람 부는데 제대로 비닐 뜯어 가지고 제대로 했다 했는데 저녁되니까 뭔가 서늘해. 보니까 이게 제대로 안했어. 샛어. 그러면 우풍나오잖아요. 완전히 다 막아버려야되.
완전히 다 막아서 당신 것이 곧 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이 있는 그 전부가 곧 나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내것은 따로 챙길 필요도 없고 챙길 마음도 없습니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이것을 자유라고 해요. 진리가 너희를 지배하면 너희는 자유케 되리라. 진리가 나를 다스릴때는 따로 내가 진리를 행사할 이유가 없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까요? 이것은 제가 들은 반박 가운데 수천번들았던 이야기죠.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해도 됩니까 라는 그 말을. 거기에 대한 답변도 똑같이 수천번 해왔어요.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제가 수천번 이야기 할 때 주관, 객관, 지배 이거 해서 하거든요. 본인이 주관이 된걸 가지고 아무리 괜찮은 사람 아무리 만나봤자.
예를 들어서 어떤 총각이 있는데 괜찮은 여자를 만났다 그래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100번을 이야기 했어요. 그 사랑은요 이 주관이 살아있는 한 이것은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횟수가 되고 횟수가 안되면 이게 보복이 들어가고 데이트 폭력되요.
해줬는데 선물사주고 놀러갈 때 차비 다 대주고 식당 짜장면집 사줬는데 여자가 하는 말이 니가 말씨가 좀 그러니까 우리 헤어져 이렇게 나왔다 이말이죠. 그동안 밑천이 2645만원 들어갔는데 한마디로 우리는 성격이 안맞는거 같애 헤어져.
주먹 나오겠어요 주먹 안나오겠어요? 내가 너 잘된 꼴을 보는가 함 보자. 그 다음부터 뭐합니까? 복수가 들어가는겁니다. 이거는 평소에 사랑한게 아니였다. 사랑한게 아니였어. 하나의 자기의 정복욕이예요. 그게 정복욕이지 정복욕 또는 욕정이라 하지 그거는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테스토스테론은요 정복욕이예요. 거기서는 사랑이 안나와요. 사랑은 도파민이 나와야되요. 그 도파민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은 수면내시경할 때 나와요. 보통 수면 내시경하면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그게 죽음이예요. 그게 예수안에 죽은거예요.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얼마나 예속되고 싶었으면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으면 (심리학에서는 이걸 메조키스트니즘이라고 하지요. 어둠 많은 곳에서 쾌감을 느낀다.(?) 그런걸 이야기하는데 그건 심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한거고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설계를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똑똑하게 아주 쌩쌩하게 자기 주관을 그대로 끝까지 극단화 시켜버립니다.
제자들아 너 한 고집하잖아. 내가 십자가 질 순간에 너희들 본색을 내가 보여주마. 쫙 하고 그걸 끌어당겨서 그들의 본색을 절정에 이르게 만듭니다. 절정에 이르게 만들어 놓고 누가복음에서는 뭐냐 하면은 사탄이 베드로 너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내쪽에서 주님쪽으로 건너가는 길은 삐! 없어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는 특징입니다. 헌금 교회 집안 대대로 교회 집 전세 옮기고 다 돈 교회에 바치고 하늘나라 확장한다고 전부 다 거기다 때려 바쳤는거 백날 해봐야 그거 다 헛짓한거예요. 보이스피싱 당한겁니다. 보이스피싱이예요. 그거.
자기 의미 챙기기 위해서 거기에 말려든거예요. 아까 그 첫시간에 우리 성도를 뭐라고 했습니까? 이면지라고 했지요 이면지. 이미 주께서는 뒤에 정답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정답을 정답이기 위해서 정답과 대조되는 그냥 낙서를 하신거예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보기에 주님 보시기에 낙서 같은 거예요. 낙서같은거.
낙서인데 우리는 주관을 죽을 때 까지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낙서로 보지 않아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여기 객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객관을 추상화 시킨게 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역사라고 하는겁니다. 자기 일대기. 자기 일기장이예요. 일기장. 자기 일기장.
역사는 뭐냐? 깨어나기 위한 악몽이다. 성도한테는 깨어나기 위해서는 악몽같은게 역사입니다. 왜냐하면은 아무리 성령받고 은혜받아도 돌아서면 뭐가 무슨 본전이 챙깁니까? 내 역사의 본전이 자꾸 생각나요.
내가 이런 행동하게 되면 내일 무슨 벌 받지 않을까? 또는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사고 많은것은 과거의 내가 나쁜짓을 해서 지금 그 결과로 주께서 징계 내려 가지고 이렇게 사업이 어렵게 되는게 아닌가? 반드시 자기 역사를 이렇게 하게 되요.
그런데 성령받게 되면 그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뭐라고 했지요? 악몽이죠 악몽. 악몽은 여러분 그걸 악몽이라고 하지않고 잠잘 때 뭐라고 합니까? 가위눌렸다 하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가위눌렸어요. 롯데백화점 가위눌리고, 온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 우리로 가위 눌림으로 요소로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게 뭉쳐져서.
자식에게 내가 제대로 말한적있나. 남편을 내가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가. 아내에게 아내 생일인데 반지 선물해줘야 되는데 반지 선물할 때 얼마짜리 선물해야되는지 이 주변 눈에 들어오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가위눌림의 재료가 되요. 왜? 그것이 차곡차곡 선반에 쌓이면 이게 역사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역사라 하는 것은 낙서거든요 낙서. 이면지 뒷면에 낙서라고요.
주님께서는 그 낙서짓을 우리에게 허락을 합니다. 마귀한테 마귀한테 시켜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육이니까 마귀가 다루는 방식이 있거든요. 그 다루는 방식대로 우리는 어쩔줄 모르고 내 역사 깔끔하게 이렇게 나한테 나 보일만한 자랑질 할만한 역사만들기 위해서 그냥 몸부림을 치게 만들어요. 우리가.
절제하고 자제하고 인생을 살 때 조심조심 살아요. 역사에 흠짓 안나게 하기 위해서. 한번 일을 할때도 이게 주의 뜻일까? 아닐까? 한번 행동해놓고 단락 지어 놓고 내가 방금 한일이 착했을까? 선했을까? 혹시 나로 인해 피해자가 있을까? 없을까? 있으면 내가 사과해야지. 10년전에 몰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내가 모르고 우리 스텝한테 모르고 내가 사과했는데 그래도 해도 지금 뭐 와장창 스튜핏 다 떨어져 나가버렸어요.
모든걸 그러니까 이걸 기회삼아 항상 온고지신 과거에서 배운다는 것 그렇게 옛날에 나쁜짓 했기 때문에 두 번다시 하면 나는 개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그래서 보다 더 역사가 보다 진전된 거룩을 닮아가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 에베소서의 5장에 나오는. 그런 말 어디서 들은 구절은 있어가지고 그런거 다 갖다 붙여가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주님의 몸을 이루고 온갖 것 비슷해 보이는거 다 동원해가지고 점차점차 자기 성적표 내신 성적을 나아가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벌써 교회 나오면서도 중풍 들렸어 벌벌 떨어. 기도할때도 벌벌 떨고. 대표기도할 때 벌벌 떨고. 대표기도 해가지고 녹음 방송하면 안합니다. 무엇 때문에 떠는지 평소에 무슨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갔기에 대인기피증이 있는 이유가 뭔지.
대인 기피증은 있어도 주님 기피증은 없어요 또. 왜? 주님을 만난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제자들이 못난 제자들이 극단까지 절정 올려버려요. 사단의 시험을 받아가지고 결국은 제자들이라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건널 다리가 끊어져 있음을 만천하에 보입니다. 이 제자들의 삶을 어디에 담는가? USB에 담아요.
성도는 USB입니다. 정보를 운반하는 작은거 있지요. 작은거 물건. 쪼만한거. 15GB 있잖아요. 담아서. 이 USB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그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 되게해요. 죽어서 가는게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이 저주 받고 심판받는 이 세상에 와서 이 USB작용을 해요. 복음을 전파하면서 뭐냐 하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복음을 이렇게 되요.
복음 전파는 딱 두자입니다. 맞다. 하나님의 심판은 옳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은 합당하다는 거예요. 그걸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모든 것이 OK, OK. 모든 것이 YES가 된다고 했어요. 고린도후서 1장에서. 모든 것이 OK라고 했어요. 1장인가 2장인가 헛갈리는데 1장입니까? 2장입니까?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1장입니다. 1장 21절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가 아니고 예스가 되요. 이걸 로마서 8장에 뭐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우리 개별자는 없어요. 개별자는 이미 어디 뭍혀 있느냐 하면은 이미 통째로 개별자는 통째로 단절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 속에 있어요.
따라서 이 저주받은 우리를 USB로 담았다는 자체가 성령이 왔다는 뜻이고 성령이 와가지고 한말이 주님의 모든 조치는 심판이고 모든 한일은 무조건 이것은 이것은 옳은것이고 맞고 그리고 합당하고 그래도 일이 그래도 추진된다는 겁니다. 싫으면 말고예요. 싫으면 말고. 사도들이 전도 방법이 뭐냐 하면은 싫으면 말고예요. 실적같은거 전도 실적 같은거 그런거 묻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와요.
아무리 봐도 아닌데 왜 오시죠? 가시죠. 밀어내요. 밀어내도 밀어내도 온다면 그건 진짜고 밀어냈다고 삐져가지고 안오게 되면 진짜 밀려야 될 사람이고. 통배짱이예요. 배짱이라니까요. 배짱장사 배짱장사. 모든 것이.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능력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지요.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있잖아 빌립보서 4장 초반에 이야기 하면서 뒷부분에 그렇게 합니다.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뭘 한다 말이고? 뭐 에베레스트 올라가고 한 100명 전도 한단 말입니까? 아니예요. USB는 뭐냐 하면은 꽂히면 그곳이 바로 꽂힌 그 장소가 이미 그게 OK가 된 장소예요. 머무는 곳이. 원래 USB가 이동용이잖아요. 꽂히면 거기에 당연히 거기 정보가 흘러나오죠.
사도가 죽어도 예수가 나오고 살아도 예수가 나오고 사나 죽으나 예수그리스도가 나오는 USB가 되는 거예요. 오늘 첫째 시간은 이면지, 두 번째 시간은 USB 여러분 꼭 기억하라는 말 안합니다. 저는 차라리 오히려 악몽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세상 전체가 헤쳐나올 악몽같은 겁니다. 얽히고 설킨 가시덤불 같은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는거였습니다. 제발 이 내가 갖고 있는 아담의 몸이 뿜어내고 있는 나의 주관, 나의 의미, 나의 가치 이것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못살겠다가 아니라 나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하면 내가 나의 구원을 훼방하는 자요, 방해하는 자요. 내가 포행자요, 내가 살인자요, 내가 죄인이라는 겁니다. 나 때문에 내가 뿜어내야될 주의 증거를 내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런 속성이 계속 발휘되고 있습니다.
무슨수로 그걸 뭐 조심한다고요? 절제한다고? 뭐 성령의 열매는 절제고 온유와 화평 백날 해봐라 안된다. 성령의 열매는 제가 여러번 했는데 성령의 열매는 단번이예요.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죽었다. 죽은자로 보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이 USB에 갇혀 있으면 이미 이거는 죽은자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저주 받았음에 한 무리 뗀 것이 이거예요. 바깥에는 저주고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는 겁니다. 저주받은자를 앞장 세워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생명을 전파하겠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방법이예요.
훌륭한 사람 있어야 하지요. 훌륭한 사람은 없어요. 천하의 죄인들을 가지고 묶어 놓고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잖아. 그러니까 십자가 피만 바라보자 라고 하게 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방법입니다. 이거 예수님이 증거한것이고 오직 복음은 부활이 아니예요. 십자가가 복음이지.
부활은 왜 복음이 아니냐 하면은 부활 속에는 나의 부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십자가를 생각해야되는데 십자가 부활 이렇게 해버리면 사람들은 눈이 십자가로 갔다가 어디가 좋아서 마음이 어디로 호호 거리면서 부활에다가 마음이 좋아해요.
이러면 자기는 십자가와 함께 죽은게 아니고 자기는 십자가에 안죽고 탱탱하게 살아 있어요. 살아있는 상태에서 어디를 골라볼까? 뭣을 골라볼까? 십자가 보다 부활이 괜찮네. 부활은 십자가 이후니까 앞에 것을 포함하겠지. 그러니까 이걸 가지면 십자가 믿음셈이 되니까 나 부활믿겠어. 부활이 새생명. 이렇게 나온다 이말이죠. 이런건 없어요.
이미 십자가에 함께 죽었으면 무엇이 부활이냐 하면은 주께서 살아 있음이 부활이예요. 십자가 안에있는 자를 주께서 살아 있어서 가지고 주님의 몸으로 지체로 사용한다는 그 능력자체가 부활의 능력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 노아 방주 있었지요. 노아 방주 바깥에 노아가 있었습니까? 방주 안에 노아가 있었습니까? 방주 안에 노아가 있었잖아요. 방주안에. 애들도 아는 이야기인데 방주안에 있었지요. 그러면 바깥은 뭐냐? 바깥 생각하면 바깥은 지금어디 지금 전부 다 물 안에 지금 다 갇혀 있지요? 이걸 가지고 노아가 언약안에 있다. 언약안에.
그걸 새언약으로 바꿔봅시다. 예수의 피 안에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 죽은자로 보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만 보이니까 십자가는 죽은 거잖아요. 죽은자로 보는거예요.
너는 왜 세상을 자꾸 죽은자로 니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느냐? 바깥 사람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둘이 연결되면 안되겠나? 연결이 안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거예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가 연결이 된다 안된다? 안되는 겁니다. 되지를 안해요.
그 뒤에 봅시다 29절 봅시다. 28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어디로 갑니까? 제곳으로 다 뭐 됩니까? 흩어 지지요? 착각하지 마라 이것들아 이말입니다. 지금은 왜 이들이 착각하느냐 하면은 20절에서 근심하겠으나 기뻐한다 할때에 사람은 근심할때에 이성적으로 뭘 받아드리느냐.
근심 잠시 끝나면 기쁨이 오겠지 여자가 애를 임심했는데 임신할 때 고통이 있지만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 고통이 없애니까 기쁨만 있으니까 우리는 그걸 이미 눈치챘으니까 그 비유의 의미를 아니까 우리는 이제는 기쁨이 줄곧 되겠지라고 생각한거예요. 주의 말씀은요 우리가 주의 말씀은 제 3자가 거기에 바깥에 서서 제 3자가 알아채라는 말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그 말씀속에 경유를 함께 해야되요. 그 과정속에 섞여 들어가야되요. 그 말씀속에.
근심하면 근심해야해요. 근심할때는 기쁨이 있다? 없다? 1도 없어요. 근심할때는 하나도 없어요. 그냥 근심 뿐이예요. 조진거예요 인생. 끝장난거예요. 깜놀이예요. 충격이예요 정말. 왜 인간이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 말씀이 있는데 제 3자의 관찰자가 되지 못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있으면 우리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나에 이익이 되는 의미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보기 때문에 이게 나는 주관이 되고 성경은 객관이 되가지고 귀한말씀 뽑아낼거 다 뽑아내요 여기서.
좋은거 십자가도 뽑아내고 언약도 뽑아내고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어떻게 복음적으로 행함없이 구원받았다 온갖것 다 끄집어 내고 주관이 살아 있는한 소용 없는 겁니다. 정말 행함 없이 구원받을려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속에 가서 우리의 행함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 관계가 철저히 체험되야 되요. 체험될려면 우리 안에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울분과 분통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실망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분노 이게 나와야 되요. 이게 이게. 이게 나와야 되요. 아직 안나온다고요? 아직 덜 건드려서 그래요.
뭐 돈 부도 나도 울분 안난다고요? 부도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했지요?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은 뭘 끊을수 없다? 혈육이죠. 자식. 자식 건드리면 다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고 했습니까? 자기의 그것도 그냥 미운자식이 아니고 이스마엘 바치라는게 아니예요.
이스마엘 잡는게 아니고 누굴 잡는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시키신 주님의 방식대로 앞으로도 자기의 아들을 보내시는 방식으로 오심으로 그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구원 복음은 심판을 전하는 거예요. 심판에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전할 때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속에 우리를 체험케 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또 마음에 심히 또 이제는 기쁨이 근심이되요. 왜냐하면 실제로 이렇게 되면 어쩌지? 어떡하지 할건데. 이걸 이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망한다 라고 울때는 아직 안망했어요.
왜냐하면 울게 있다는 것은 아쉽다 미련있다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망해버리면 망한줄도 몰라요. 그 망한상태를 주께서는 망하라고 은사를 선물을 줍니다. 선물 은사. 선물을 줍니다. 그 선물이 뭐냐하면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느정도 망하는지를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옵니다.
사랑은 미워하지 않아요. 성내지 아니합니다. 김사랑이 불렀던 노래 알지요? 사랑은 언제나~ 사랑은 한때 하루에 두 번 온유한게 아니예요. 어떻게 온유합니까? 언제나. 남편이 술먹고 들어와도 온유해요. 자식이 세 번 재수해도 기뻐요. 심지어 둘째딸이 베트남 남자랑 사귀어도 온유해요.
여러분 그게 가능합니까? 내가 제일 미운자가 우리 회사 상사가 되서 스카웃되서 들어왔어요. 그러면 그 사람 미쳐버립니다. 특히 여자한테 제일 정신 미쳐버리는게 뭐냐 하면은 남편한테 여자 있다 이런 경우. 그때는 노래가사처럼 똑같이 됩니다. 할말을 잊었지만 무슨 말을 하리요. 할말을 잊어 버려요. 할말을.
갑자기 뭐가 생각난다. 자기 역사가 쫙 흘러가지요. 역사가. 여고때 이뻣던 여고때부터 해가지고 철없이 연예할때부터 해가지고 아이 둘낳고 기뻐했던 남편 이뻐서 같이 캠핑갔던거부터 해가지고 쭉 해서 캠핑가서 오징어 구워먹던 이야기....차악~~~
자, 그때 뭐가 나온다고요? 이게 나오죠. 그런데 그 심판이 사랑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너는 니 주제 파악을 안하니까 주께서는 주제파악 하라고 남편에게 바람을 피우게 했습니다. 지금 내 시나리오가 너무 독하다 정말. 이건 내가 미안합니다 미안한데, 이거는 어쩔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예 말고 그러면 로마시대 때 사자에 찢겨 먹는거 그거 할까요 그러면?
이번에 오늘 두 번째 유투브 동영상 10분짜리 했는데 두 번째가 뭐냐 장벽을 했어요. 장벽을 할 때 여리고 성은 무너뜨렸지만 그 무너진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내부에 마음속에 들어갔다 했어요. 그래서 아이성에 모인거예요. 인간의 성은 무너뜨릴수 있어요. 남편 바꿀수 있고 아내 바꿀수 있고 다 있어요.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이 펜스를 이 저주받을 펜스를 내손으로 어떻게 이걸 망치로 부순다고 부숴집니까? 안부셔지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부숴주니 고맙다 소리해야되요 정말 이거는. 나는 처음부터 바람이고 뭐고 처음부터 나는 결혼할 자격도 없고 자식은 있을 자격도 없고 나는 태어날 자격도 없는 인간이였음을 비로서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하면서도 내가 참 못땠다 정말. 이런 사람 없는데 이런 사람 없어요. 없는데 성경은 그걸 이야기 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제가 이 말하는 것은요 여러분 보고 신앙생활 하지 말라는게 아니고 행함으로 유사 복음 받았다는 흉내를 낸다는 것은 결국은 주께서 만들어 주신 한계에 다 결국은 본색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거예요.
분노와 울분과 분통과 이거는 뭐 하나님 보고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 별을 보고 이야기 하고 저 갈대 보고 이야기 하고 괜히 가는 남의 개보고 발차고 쓰레기통 차고 이런식으로 그것도 하루이틀 아니고 매일같이 합니다. 그것도 뭐 집안에 문제 있어서 되는거 아니고 사소한 문제 때문에. 사소한 문제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 왜 북한 가서 춤추고 있나? 쓰레기통 차는거 그런것도 울분이거든요. 왜 내가 꼴보기 싫어하는 탤런트가 왜 저 드라마에 주연으로 왔는지 나 안본다 하면서 또 다 보거든요. 그런것들 아주 사소한 모든 것이 왜 내 중심으로 안돌아가느냐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왜 내 중심으로 왜 안돌아 가지요? 왜 안돌아 갑니까?
예수님과 내가 일대일 대적관계가 있어줘야 그 틈에서 십자가가 날마다 반복되서 부곽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십자가 뿐인데 그 십자가를 이론으로 알아버리면 그 깊이와 높이가 안나와요. 십자가 알고 있는 내 자랑하기 바빠요. 나 십자가 안다 해서 남한테 자기 증거 하기 바빠요. 주님 증거 하는거 아니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걸 알때에 주께서 뜻에 따라서 아까 했잖아요. 낙서라고 낙서. 뒷면에. 우리는 필름 막이예요. 오늘 용어가 비싼거 너무 많이 나온다. 우리는 필름입니다. 필름이라는 폭을 갖고 있지 않아요. 하나의 막이예요. 이면지라니까요 이면지.
이렇게 보면 내 역사 나오지만 세로로 들면 폭이 없잖아요. 인간은 하나의 경계선이예요 경계선. 인간이 아니고 성도는. 성도는 이쪽은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예요. 이쪽이예요. 이거는 베드로도 사도바울 요한 전부 다 그랬어요.
그들은 자기를 증거하지 않아요. 나는 십자가 지지도 않았다고 자기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하기를 이런데 우리는 이렇게 보지않고 이렇게(정면으로)본다고요. 이렇게 보니까 거기 자기 역사가 나오고, 자기 잘남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낙서예요 낙서. 갈지자. 이게 낙서라니까 낙서. 낙서를 왜 하느냐? 낙서 믿지 말라는 겁니다 이거. 육에다가 낙서 해놓고 그러니까 육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거예요.
오늘 강의는 쉬워요. 내일 아침부터 낙서질하면 되요. 세상에 나가서. 낙서처럼 살면 되요. 낙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좀 진지하게 이야기 해야지 왜 낙서하고 합니까? 이러면 만약에 우리가 내일부터 진지하게 살아 버리면 그게 뭐냐하면 새로운 결과와 목적을 기대하는 원인으로 작용해 버립니다.
주님이여 이렇게 내가 착실하게 원인 집어 넣으니까 input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output. input에 제대로 암호 비밀번호 집어 넣었으니까 드드륵드르륵 오만원짜리가 계속 쏟아지기를. 그런 자동 현금 인출기를 우리는 하나씩 가지고 있는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그 햇빛과 공기는 니가 뭘 집어 넣어서 햇빛과 공기 오느냐?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침 몇시에 해 뜹니까? 물어보자. 아침 몇시에 해뜨지요? 뭐 대충 이야기 하면 아침 7시라고 합시다. 이게 잘못된거예요. 아침 7시에 해뜨는게 아닙니다. 해뜰때가 인간적인 시간으로 7시예요.
자연은 인간말을 안들어요. 그냥 해뜹니다. 해뜨는데 해 뜨는 것을 우리는 해뜨니까 일과 시작해볼까 라고 그걸 이용하지요. 해는 주님이 뜨게 하시고 우리는 그걸 내 주관이 해를 객관으로 봐가지고 내가 이용할려고 하는 거예요. 나 해뜰 때 나는 쿠쿠밥솥에다가 밥 안친다. 이게 이용한다고 하는거예요 이용하는거.
그럼 밥안치다가 다음날 죽어버리면 어떻할건데? 죽으면 그 다음날 해뜹니까? 안뜹니까? 해뜨잖아요. 보세요. 우리가 죽든말든 해뜨잖아요. 그럼 해는 누굴 위해 뜹니까? 저 해는 누굴 위해 떠요? 우리를 위해 뜨지않고 주님을 위해 뜬다 하지 마세요. 우리를 위해서 뜨지 않지요. 왜 우리를 위해서 해가 뜨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엉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심판받기 마땅하기 때문에 해는 우리하고 결부하지 않습니다. 해뜨는 것은 죄인 이지만 주께서 주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노아 언약이 오면 은혜는 항상 희생이 나와요. 은혜가 그냥 나오는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벨의 피에서 나오든지 노아의 제사에서 나오든지 모세의 제사에서 나오든지 다윗의 희생에서 나오든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때까지 핑계치 못할자를 유보하는 식으로 모든 대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보면 해나 피조물이나 모든 산천 초목이나 다 누굴위해 증거한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이 만들어졌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근심이 우리가 당연한데 근심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예상못할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상못할 기쁨이. 강의 시간에 이렇게 분위기 다운되는 이유를 알아요. 제가 예를 이렇게 잘못 들어서 제일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어. 진짜 그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예수고 진짜 버릴겁니다. 너무 근심이 너무 깊어 졌어요.
다윗이 밧세바를 사랑했지요. 다윗이 왜 밧세바를 왜 사랑했습니까? 물어봅니다. 왜 사랑했어요? 제가 묻는 내가 잘못이다. 주께서 사랑하게 하셨어요. 왜? 사랑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중에 태어난걸 알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언약의 자리는 주님의 자리는 용서의 자리고 그 맞은편의 자리는 죄인의 자리여야되요. 죄인의 자리인데 인간들이 자기가 의미를 주다 보니까 죄냐 의냐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스스로 판단해가지고 본인이 죄인것만 죄라고 여기고 근원적으로 죄인 것을 인정을 안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모친의 죄중에 태어나게 하신 것을 주께서는 밧세바를 사랑하게 하신겁니다. 사랑만했습니까? 그 남편을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지요. 자, 누가 죽이게 했습니까? 그 죽이는 과정이 뭐냐 하면은 그 죽이는 과정 속에서 다윗이 나는 안죽였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을 보여주면서 죽여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은 적의 화살은 아무나 쏜다고. 그 우리아 장군으로 하여금 자기가 쏘는게 아니고 자기가 죽여 버리면 자기는 살인자가 되버리잖아요. 그런데 슬쩍 이렇게 제일 위험한 지역에다가 던져 넣어서 뭐를 빼느냐 하면은 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아는 정도까지 거기까지는 아니까 전적으로 죄인인 것은 아니다.
나는 비록 조폭이지만 거리에 불쌍한 사람 있으면 마약 판 돈중에서 만원은 줄정도로 내가 양심이 그렇게 망가진 놈은 아니다 라는 식이 가장 최절정에 있는 죄입니다. 내가 이렇게 엉망이지만 교회 나와서 주님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믿을 정도는 나는 착하다가 최정점에 있는 사탄의 악마의 모습이예요.
나는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신학교 내 몸을 헌신해서 신학 교육받아서 목사 되서 남에게 복음 전할정도만큼은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전적인 죄인 아니다. 이것이 악마의 가장 근접한 모습이예요. 악마의 가장 근접한 모습.
나의 인자함이 교인들로 하여금 마음을 교회에 붙들게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계속 다녀서 복음을 듣게 하니까 나는 주의 일에 일조했다는 그 사고방식.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목사가 강의하는 것 설교하는 것 그게 바로 죄입니다. 들을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을 가지고 마음대로 활용해주시는 그 주님의 의가 자기 백성을 건진다는 사실, 이제 다시한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살면서 온통 근심밖에 없습니다. 잠시 기쁘더라도 돌아서면 또 근심이 찾아올 밀물처럼 들어닥치는 그러한 악몽같은 세상에 살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그것이 생명인 것을 생명활동인 것을 참여된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