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323b 마가복음11장 27절-30절(필요 없는 권세)-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180323b 마가복음11장 27절-30절(필요 없는 권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결국 버린 데서 구성된 그 마음가지고 그대로 하나님께 또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킬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을 버린 이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소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탈취할 생각 말고, 나는 이 땅에서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죽어서 좋은 천국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해주시면 아낌없이 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내가 다시 천국 쪽으로 가겠다는 이 희망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이야기할 때, “나는 터치하지 마시고 하나님 우리 만납시다.”라고 할 때, 그 인간에게 뭐가 빠졌는가 하면은, 죄라는 게 뭔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죠. 죄라는 게. 나 문제 있다가 아니라, 내가 문제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한 번도 하나님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있는 것을 몰라요. 인간이 문제 있다고 여기는 것은 뭐냐, 내가 다른 사람하고 만날 때, 내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저쪽이 가지고 있는 힘과 힘의 만남이에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힘과 힘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만약에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약하면 그거는 죄가 되고 나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쪽은 힘이 센데 나는 힘이 없다. 그러면 내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가 되는 겁니다. 19년 전에 애 하나 물에 빠져가지고, 변호사 되어서 복수해나가는 <리턴>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아닙니까? 소위 사회에서 잘난 인간들이 다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건 정의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정의는 내가 직접 복수하면서, 여자변호사가 직접 복수하면서 자기가 정의를 세우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모든 드라마가 다 그렇죠. 모든 드라마는 인간 대 인간과 비교하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을 비교할 때, 나한테 누락된 권세와 가진 권세, 가진 권세에 대한 누락된 권세, 약한 권세의 몸부림이고 반항이고 반발입니다. 일종의 혁명이죠. 그것은 뭘 발휘하느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고독한 주관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나 빼놓고는 전부 다 남이니까. 중요한 것은 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있기에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남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구 위주로? 나 위주에요. 죄냐, 의냐, 선이냐, 이거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근데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현재 갖고 있던 힘과 더불어서 함께 있는 거죠. 그럼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이 힘의 원천을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힘의 원천을 모르고, 남하고 비교해서, 나는 힘이 쪼끔밖에 없네. 너는 많이 가졌네. 그 힘 나눠줘. 안 나눠주면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럼 니가 힘이 왜 필요 하냐?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해답과 정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지도자 못지않게 서민이라 할지라도, 그 서민이 내 힘을 갖는 순간, 순간적으로 굳어지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절대적이 돼요. 절대적이 됩니다. 절대적. 그런 사람 많잖아요. 옛날에 아버지가 방앗간을 하든지, 술도가, 아니면 파출소장, 옛날에 잘나갔던 사람들의 리스트에요. 옛날에 이쯤 돼야 좀 산다고 할 수 있어요. 파출소장, 완전히 이거는 그 마을의 교주가 아닙니까? 유지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그 마을을 장악하죠. 얼마나 비리가 많았으면, 얼마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법을 알고 있는 파출소장이 그 지역을 완전히 휘잡아요. 휘잡고 있습니다. 술도가, 얼마나 술을 처먹었으면 술도가를 냈겠습니까? 그 다음 방앗간. 그래서 방앗간, 술도가, 파출소장 하면 그 집은 완전히 그거는 제왕적위치에요. 술도가해서 잘 사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옛날에 mbc드라마가 있었어요. “아, 글씨!”하는 백일섭이가 나온, 옛날에는 잘 살았거든요. 여기서 종말이가 나와요. 종말이. <아들과 딸>이라고. 정말로 종말이가 나와요. 종말론적인. 지금 김치공장하고 있다던데. 이게 뭐죠?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향수죠. “옛날 우리 집안이 이렇게 잘나갔어.” 그러면 결혼을 잘 하던지, 뭘 잘해서 옛날만큼이나 다시 유토피아가 회복이 될 때 내 주체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는 절대적 존재에요.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한 순간이 고정된 순간, 주체는 절대적 존재가 됩니다. 첫째 시간에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했죠. 그럼 이제 세 번째 이야기해야 될 차례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한 권세는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권세. 이 권세는 뭐냐,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조차도, 그걸 정당한 것으로 안 들키게 해주는 그러한 권세.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쪽에서는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을 정당화해달라고 요청하는 권세. 또 하나는 인간에게는 필요 없고 하나님에게만 필요한 권세.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권세. 오직 모든 권세는 한 점, 예수 그리스도에게 흡수되고 빨려 들어가야 될 그 권세.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야 돼요. 블랙홀 같아요. 예수님은 블랙홀 같아요. 모든 것이 소용돌이 중앙, 태풍의 눈이에요. 그 권세.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셔가지고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자기를 위해 필요한 권세를 어떻게 합니까? 그 권세는 회수하겠죠. 회수하면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회수하면서. 회수를 당하면 이 사람은 구원받고, 회수당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회수 당하는데 거부하거나 반발할 때는. 자,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가 나오죠. 중풍병자가 예수님한테 나온 이유가 있습니다. 뭣 때문에 나왔습니까?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친구들하고 합세해가지고 지붕 뚫고 내려왔잖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기가 뭔데 병에 안 걸려야 돼요? 니가 뭔데? 내가 건강해야 된다고 우기는 것은 지금 원천적으로 뭘 무시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 한 인간이라는 것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주로 왔잖아요. 아까 첫째시간 마지막에 했잖아요. 세례요한은 이 세상에 도끼 들고 왔죠.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잖아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오실 하나님은 구원자가 아니고 무슨 자다? 심판주가 되시는 거예요. 심판주. 그 심판주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는가를 세례요한이 보여준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늘나라를 뭐로 봤느냐 하면 구원의 날로 본 거예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구원의 날로 보는 그 사상, 그 사상에 갇혀있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지도자급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상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나하고 노선이 다르다는 거예요. 노선이. 너희들이 갖고 있는 권세 말고, 다른 노선이 개입된 거예요. 삽입된 거예요. 그래서 아까 바리새인들이 와서 물었죠. 니가 메시야냐? 니가 제사장이냐? 니가 선지자냐? 아니라고 했죠. 나는 오실 분의 노선이지, 너희들 노선이 아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오죠. 누구 허락을 받고 하느냐? 라고 하니까, 내가 너희들의 노선이 아닌데 너희들의 허락을 왜 맡아야 하느냐? 내가 하는 것은 너희들 노선 말고, 무슨 노선이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요한복음 3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잠깐 한 번 찾아볼까요? 권세이야기하면서 그걸 빠트리면 안 되겠죠. 언급해야 되겠죠. 3장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너는 지금 누구 허락을 받고 하느냐?” “나는 너희들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세례요한을 싫어할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아까 마지막에 했잖아요. 권세가 제의적 권세기 때문에. 제의적 구조기 때문에. 이걸 여러분들이 단순히 유대사회만 생각하면 안 돼요. 모든 국가는 반드시 종교적입니다. 종교적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모든 모임은 정치적이고요. 지금 밥 털어 먹고 죽을 사람 같으면 정치이야기 필요 없어요. 그러나 반드시 우리 가정은 내년까지 이어진다 싶으면 여기서 유토피아가 형성되고, 소망이 유예가 되잖아요. 유예가 되면, 여기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가지고 내년 목표한 데까지 끌고 갈 때에, 여기서 뭐가 발생돼요? 정치가 발생돼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가 성립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가정을 포기한다면, “니 같은 것은 호적에서 뺀다.” 이러면 소외된 거죠. 배제된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방법이 뭐냐 하면 기존의 권력에서 너를 뽑아내겠다 이 말이죠. 기존의 권력 노선 말고 다른 노선에서 너희들을 이 땅에서 내가 뽑아내겠다는 거예요. 뽑아내는데, 뽑아내는 과정이 뭐냐, 예수님이 빠져나온 그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베드로와 열한 제자는 자기들이 그렇게 권력적이고 정치적인지 몰랐죠.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자기가 얼마나 평소에 기존의 권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그거는 인간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주체가 그런 것을 배웠기 때문에.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이 중에서 누가 더 높은 자입니까?”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세상권세를 더 언급했어요. “세상 권세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이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섬기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럼 섬김이 뭡니까?” “이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제자들은 못 마시죠. 왜? 잘났으니까. 그러면 언제 마실 수 있습니까? 잘났으니까 쓴 잔을 마실 수 없다면 언제 마실 수 있어요? 못난 자가 될 때에. 그 못난 자가 뭐냐 하면 비로소 예수님 앞에서 뭘 알 때? 죄인인 것을 알 때에, “주여, 저를 함부로 해주시옵소서.” 여자 같으면, “주여, 저를 성폭행 당하게 해주시옵소서.” 남자 같으면, “주여, 저를 부도나게 해주옵소서.” “주여, 온 몸이 문둥병 되게 해주옵소서.” 이게 인간의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윤택은 제왕적위치에서, 복면가왕으로서 우리의 연극패를 미리 키우고, 키우게 되면 너희들은 나처럼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한 것입니다. 제왕적위치에서 16명 성폭행하고 60명 성추행했습니다. 그들은 아낌없이 몸을 맡겼어요. 왜? 그들의 유토피아가 이윤택한테 가 있었기 때문에. 윤택이 윤택이 이 윤택이. 안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지금요, 교회가 가짜입니다. 왜 가짜냐 하면 이미 범죄 한 상태에서 예수를 찾고 하나님 믿는다는 것을 본인들이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버린 상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찾고 예수 찾고 천국 가겠다고 나선 이것이, 화근이고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그들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못 빠져나오면 뭐가 됩니까? 죄인 되겠죠. 죄인 되면 돼요. 문제 굉장히 간단해요. 죄인 되면 돼요. 죄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죠. 죄인 되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조지든, 어떻게 꼴아 박든, 어떻게 유린하든, 저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린 하나님을 버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구원주가 아니고 심판주기 때문에. 심판주가 심판을 행세하겠다는데, 나에게 심판을 하겠다는데, 우리가 왜?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사6:5). 정말 십자가를 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상태에서 십자가를 받아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참담한 사람이 돼요. 참담한 사람. 제가 이론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심판받아야 구원이 있고, 죽어야 생명이 있고,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습니다. 이 이론은 틀린 말이 아니고 맞아요. 그런데 이걸 머릿속에 집어넣어버리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그렇게 해서 얻을 천국과 구원의 기쁨이 확 다가옵니다. “그래! 챙겼어! 나 이제 챙기는데 성공한 거야! 복음듣기를 잘했어!” 근데 이거는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론적으로 아는 거예요. 그러나 막상 성령 받아서 정말 죄 속에, 정말 심판 속에, 정말 주님 앞에 오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참담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참담함.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그 취지가 담긴 설교가 수요일에 했던 “당신의 이름은?”이라는 그 설교에요. 왜, 야곱이 얍복강에서 싸우고 난 뒤에, 그렇게 싸워서 지기 싫어하는 야곱이, 왜 형한테 자발적으로 먼저 나서서 절을 한 번 한 게 아니에요.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일곱 번. 그리고 용어도 달라져요. “나의 주여!” 그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받은 복 형이 다 가져가세요.”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다리는 누구한테 얻어맞았는지 절면서, 김대중처럼 절면서, 지금은 죽었지만, 절면서 왜 그렇게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야곱을 상대할 때,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줘요. 그러면 야곱은 상대방을 이기는 것, 그게 야곱이 해야 할 일의 경계선이에요. 거기까지예요. 드디어 해가 뜨기 시작합니다. 해 뜨고, 하나님을 이겼던, 억제했던, 인간의 일이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누구 일이냐 하면 천사의 일이에요.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립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야곱과 천사의 만남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이름이 무슨 이름?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름은 인간의 일은 어디까지가 한계며,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가 완성되는가를, 이스라엘 이름 안에 그 두 요소가 다 들어있어요. 다 들어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그냥 구원하지 않고, 싸움이라는 방식으로 창세기 3장 15절, 싸움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들어오는 자기의 자리를 인간의 육속에 마련해놓고, 그 인간을 죽임으로서, 인간을 죽이고 그리고 승리했다는 것. 승리했다는 그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져오고, 왜냐하면 가져올 권리가 있죠. 왜 가져오느냐 하면 이게 전부 다 언약의 구조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언약을 하나님이 줬기 때문에 언약의 구조를 지상에서 형성해야 됩니다. 구성해야 됩니다. 구성요소 속에 야곱은 몸을 제공하고, 하나님은 그 새로운 이름을 얻기 위한 재료가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제출한 거예요. 제공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창조를 한 거예요. 자기창조. 자기가 시작한 일을 자기가 창조해서 마감도 본인이 한 거예요. 거기에 인간의 몸이 쓰인 겁니다. 원재료로써. 죄악 된 몸, 육의 몸, 악의 몸이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온 거죠. 밤중에 찾아옴으로써, 언약 안에서 인간은 뭔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소위 구원을 받을 수가 있어요. 언약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는지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럼 그 전까지, 2000년 기독교 신학은 어떤 것을 가르쳤는가? 하나님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있다. 인성과 신성이 있어가지고, 거기서 인간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인성인 반면에 영혼은 신성이다. 그 죄지은 신성을 주님이 와서 바꿔치기 해버리면 인간은 신성의 인간이 된다. 이래 돼버려요.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빠졌어요? 싸움이 빠졌죠. 이기고 지고 하는 게 빠졌죠. 그럼 싸움이 빠져버리면 뭐가 소용이 없어요? 창세기 3장 15절이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그 내용이 없이 구원이 된다는 것이 2000년 동안의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신학입니다. 왜 싸움이 빠져있을까요? 이성적으로 알기만 하면 구원이 될 수 있도록, 교회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이 참담함. 이 참담함이 빠지고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구원받고. 받아들이면 그 다음이 뭡니까? 세례식 받아야 되겠죠. 제가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실체는 없는데, 실체가 없으면 인간은 못 믿으니까 실체를 만드는 거예요. 예배당 만들고, 신부, 목사, 이렇게 구비하면 실체가 점점 더 형성되죠. 교회법 만들고, 거기다 성만찬 하고, 사찰집사는 못해요. 목사가 해야 돼요. 칼빈에 의하면. 성만찬이나 세례식 주죠. 그러면 거기에 행함으로 그 실체에 가담하게 되면, 어디 여행사에 등록하면 여행가는 것처럼, 구원되잖아요. 눈에 보이는 예배당 찾아서 가서 등록하고 세례식, 성만찬 받으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면서요. 내 살과 내 피로 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문화 아닙니까? 종교문화. 그런 식으로 2000년 동안 계속 사기를 쳐온 겁니다. 전 세계의 교회가.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 사람들이 이렇게 나온 겁니다. 안 믿으면 되잖아요? 왜 믿어야 돼요? 유토피아, 향수 때문에.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잘돼서 천국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직접 예수님의 영, 또는 예수님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의 생각,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걸 느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걸.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몰랐고, 사두개인들도 몰랐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악마 짓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몰랐어요.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세례요한이 천국이 왔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실체가 뭡니까? 없죠. 없는 거예요. 없어요. 실체가 없죠. 물세례 이거는 아니죠. 심지어 예수님이 실체죠.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믿어야 될 게 아닙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까?”(마11:3). 이랬다고요. 주님의 실체는 놀랍게도 세례요한에게 “내가 메시야라고 전해라.” 이렇게 한 게 아니에요. 뭐라고 합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이거 뭐예요? 너희들이 예상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예상 못할 일이 벌어지려면 인간은 무엇까지 알아야 돼요? 내가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인간이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는가를 본인이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상상에 상상을 하고 상상에 상상을 또 하고, 3월 25일에 상상한 것이 뭔지 몰라서 기다리고 있어요. 3월 26일이 되면 내가 뭘 상상했는지 몰라요. 4월 2일에 뭘 상상할지를 여러분 아세요? 모르잖아요. 우리는 계속 유토피아, 상상, 실체 찾기. 눈에 보이는 것 찾기.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렇게 실체를 찾는 그게 죄송하고 미안한 것입니다. 참담하게 느껴져요. 참담하게. 이 소자에게 한 것이, 제가 수요일에 할 때는 소자라고 안 했죠.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의 특징이 뭐냐, 누구라도 다 이 작은 자를 이깁니다. 누구라도. 아까 첫째 시간에 한 이야기에 의하면 지극히 작은 자가 뭐가 엷어요? 가진 권세가 엷죠. 지극히 작은 자의 권세가 얼마 안 되잖아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실체인데, 그 실체는 일시적입니다. 어린애들 고아원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때뿐이에요. 또 사라져요. 인간 쪽에서 뭔가 실체를 잡겠다고 하는 자체는 어디서 벗어나느냐 하면 “나는 참담합니다.”라는 의식에서 벌써 도망친 거예요. 벗어난 거예요. “나는 그다지 뭐 참담할 것까지는 아니고, 나는 죄인인 정도는 알겠는데 참당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또 다시 자기 자신의 권세를 요청하고 희망하고. ‘나는 천국 갈 자격이 될 걸?’이라고 다른 자아를 또 상상하고. 참담하면 그런 천국 갈 상상도 하지 말아야 되는데, ‘참담하지만 이걸 아니까, 참담해도 괜찮은 자아잖아.’라고,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또 나를 상상한다니까요. 전부 다 사기입니다. 모든 게. 모든 게 사기에요. 사기를 치실 때 “이게 사기다.”라고 하시고 치셔야 돼요. 단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지식으로 외우고 머리에 다 담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지 제 소관도 여러분 소관도 아니에요. 성령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직접, 지극히 작은 자로 만들고 참담하게 만들 겁니다. 참담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범사에 감사한다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 여러분, 세례요한이 목 잘릴 때 얼마나 창피스럽고, 우사스럽고 얼마나 아플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랬겠어요? 세례요한이 목이 잘릴 때. 여러분,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아이고 창피스러워라. 집안가족들이 보면 얼마나 우사스럽노..’ 뭐 잘났다고 성령세례 받아가지고, 남 귀신도 쫓아내주고 병도 고치고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런 식으로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참담하게 안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지적당할 대로 지적당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욥처럼 유구무언이 되는 거죠.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할 말을 잊었지만은~♬(김수희, 잃어버린 정). 우리교회 집사님들의 특징이 뭐냐,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에요. 지난 주 기도를 이상규 집사님이 했는데, 내내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마이크를 켰는지 안 켰는지. 마이크를 켜서 이상규 집사님의 기도가 나와 줘야 씹을 게 있다니까요. 근데 마이크를 안 킨 느낌이 있어가지고... 켰어요. 아이고 다행이네요. 그럼 이상규 집사님은 참담하게 되는 겁니다. 참담하게 되어야 돼요. 참담하게.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기존의 권세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지적으로 복음을 외워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빠져나오신 그 방식 외에는 없어요. 그래서 수요일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찢어주신 그 구멍이 아니면 인간이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은 없다고 했죠. 하나님이 먼저 찢어버리신 거예요. 이 권세, 세력을. 찢어버리고 그 찢어버린 그 자리에서만 빠져나와요. 야곱은 죽어야 될 이름이에요. 야곱은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아, 이미 나는 죽은 자로 다루어졌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죽은 자로. 그냥 죽은 자가 아니고, 육의 대표자, 죄로 죽은 자에요. 그러니까 야곱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한 것도 없이 사랑받는 거예요. 한 것도 없이. 그러면 야곱의 죄는 뭡니까? 지은 죄가 있어서 죄인이 아니고, 이것저것 한 것도 없이 무조건, 무조건 죄를 지어야 된다는 사실을 야곱이 언제 알아요? 형을 만나서는 몰라요. 인간 대 인간에서는 몰라요.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죽을 몸을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음을 아는 겁니다. 죽을 몸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복음 개념을 뭐라고 했습니까? 복의 개념은 영과 육을 가름하는 기준점이 되죠. 내가 복 받았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맞아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아브라함은 납작해야 돼요. 벨기에식 과자가 있죠. 안에 계피 들어간 것. 납작하게 체크무늬 된 것. 와플. 야곱은 와플입니다. 자기 면적을 가지면 안 돼요. 납작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스데반이나 사도바울에게 할 때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 납작한 자가 되게 만들어요. 납작한 자가 되어가지고, 베드로나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도, 나의 것이 없어요. 납작하게 응축이 되었어요. 뭐, 그거 끝나고 난 뒤에 부풀던지 말든지 간에. 하여튼 납작하게 된 거예요. 주님을 모르면 무조건 저주고, 주님을 알면 죄를 지었던 뭐하던 관계없이 무조건 죄인이면서, 무조건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의가 되는 거예요. 자, 권세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에게서는 권세를 예수 안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안. 그래서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서 예수님의 권세는 어떤 권세라고 했습니까? 힘이 나오는 원천이라고 했죠. 원천. 원천의 권세죠. 원천의 권세가 이 세상을 만들었는데, 이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모든 것이 통일이 되겠죠. 통일이 된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50이 되든, 60이 되든, 70, 80, 90이 되든, 그것은 무의미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를 설명할 때, 풍선에다가 점을 찍어놓고 설명을 하죠. 초등학교 때 그렇게 가르쳐주죠. 풍선에다가 별을 세 개를 그려놓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하나는 5cm, 또 하나의 거리를 2cm라고 해놓고, 바람을 한 번 집어넣어보세요. 바람을 더 집어넣어버리면, 이거 2cm는 20cm, 이거5cm는 10cm가 되겠죠. 하지만 그 별이 차지하고 있는 전체저인 위상은 변함이 없어요. 인간이 죄인의 자리에 있으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간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무리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근데 이게 예수님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안에서도. 세상 안에 권력이 있다면 어떤 자리라도, 심지어 혼자 살겠다고 저쪽 이스라엘에 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시내산, 시온산에 동굴파고 거기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바로 자본주의적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안 먹고는 못 살잖아요. 앞에 여리고성 시장에는 내려와야 되지 않습니까? 여리고 시장에. 못 먹고 살아도 신발은 신어야 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할 게 아닙니까? 주차비 받아야 되죠. 그래야 운영이 되니까. 자본주의적 특징은, 이미 모든 존재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상품화된 존재죠. 상품화된 상품 속에는 뭐가 있다? 이게 가치가 있는데, 이게 사용가치가 아니고 무슨 가치? 교환가치에요. 만약에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목사가 다 죽었어요. 목사라는 목사는 다 죽었다. 교회는 목사가 필요하다. 그러면 오목사의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갑자기 막 늘어납니다. 서로 모시려고 하죠. 아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희박하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세상 권력은 그렇게 유지가 됩니다. 수요와 공급의 방식에서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백날 개인적으로 난다, 뛴다, 뭐 개인의 가치가 어떠니, 나의 존재가 어떠니 백날해도, 이미 마귀는 웃고 있다는 거예요. 돈 좀 주면 있는 직장 때려치우고 대번에 딴 직장으로 옮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체가 교환가치를 의식하면서, 본의 아니게, 본인이 그렇게 요구한 것도 아니에요. 이미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니까요. 본인은 진짜 동화나 쓰고 시나 쓰고 싶죠. 동화 한편 쓰는데 한 2억 주면 쓸 수 있어요. 또 바꾸어질 수 있어요. 동화집 백날 내봐야 자기가 자기 돈 내고 사거나 한 권이나 팔릴까? 십자가마을에서 강제로 좀 사주니까 한 열 권이나 팔리겠다. 그런 일 없어요. 팔리지가 않는다니까요. 자기 돈만 들어가서 손해 보죠. 하지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요구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시장에서 팔릴만한 상품이 될 경우만이, 그 사람은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인간극장을 보면 이태리에서 성악전공한 사람이 뭐하는가 하면 커피 파는 카페해요. 주로 아내가 커피 만들고 남편은 시다발이하고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은 일본에서 안경박사학위를 따고 왔어요. 지금은 뭐하느냐 하면 조립식 시다로 뛰고 있습니다. 조립식 가건물에 판넬 붙이는 것 있잖아요. 거기에서 기술 배운다고.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무슨 안경이냐 하면 ‘안경박사’에요. 서남대, 대구에 있는 미래대 교수들 줄줄이 다 나왔어요. 전부 다 박사들이에요. 그 사람들 유학 갔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졸업하는 고등학생들은 얼마 안 되죠, 대학이 전부 다 정리되죠. 그 박사들이 다 소용없어요. 그나마 70세까지 해먹을 수 있는 게 목사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씀운동 박용기는 70세도 빠르다고 계속하고 있어요. 70세도 넘어가고 있는데. 계속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수렴청정하고 있어요. 인간이 돈을 놔요? 미쳤어요? 뭐가 빠졌어요? 참담함. 이게 빠진 거예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하는 이 참담함이 빠진 거예요. 죄 속에 인간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 죄를 내가 찾을 죄가 아니고, 내가 바로 그 죄의 역할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근데 세상의 죄는 사람과 사람과의 비교에서 되는 거예요. 뭐, 성추행, 성폭행이라고요? 한번 전수조사(대상이 되는 집단을 하나하나 전부 조사하는 방법)해볼까요? 전부 다. 모두 다 전수조사 해봐? 판사부터 해서 검사, 말단까지 다 전수조사 해볼까요? 심지어 2살, 27개월 되는 아이의 전수조사. 제가 사진 다 찍어놨어요. 그의 죄를. 우리 외손녀의 죄를 다 찍어놨어요. 밥 안 먹겠다고 도망치는 것 다 찍어놨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이 이미 하나님을 버린다고 선언하고 나온 그 작자들이에요. 그래서 선언했다는 이 사실을 인간들끼리는 몰라요. 모르고, 버림을 받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와서 버림받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 때, “저 양반이 왜 저렇게 하지? 좀 양보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고집부리지?” 우리가 의아해하면서, 그동안 우리는 내 근원적인 죄, 근원적인 권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그건 당최 모르고, 그러니까 원천을, 샘을 몰라요. 요단강의 발원지를 몰라요.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권력, 에라! 아무거나 자본을 잡고 돈을 잡으면 밥이나 먹고 살지 않겠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그것만 한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예외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떡 없이도 산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떡이 돈이니까, 왜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그런 망발을 해요. 제가 첫 번째, 두 번째 권세를 먼저 언급했어요. 자, 이쯤하면 다 기억이 안 나니까. 첫 번째 권세는 바로 대중들, 서민들, 백성들의 권세죠. 백성들의 권세는 지금은 괴롭지만, 언젠가는 메시야가 와가지고 유토피아를 이룰 것이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이고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그 대중들에게서 자기들의 위상을 신에 가까운, 신과 유일하게 결탁이 되었다고 대중들을 현혹해버려요. 오늘날 목사들이 대표적이죠. 결탁하는 거예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그런 식인 거예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어요. 그러면 대중들은 자기의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하니까 보장한다는 증거를 대라고 하겠죠. 그들은 성전 붙들고, 제도 붙들고, 율법 붙드는 거예요. 목사끼리 교회법 만드는 거예요. 교단 만드는 거예요. 교단법이 헌법보다 더 세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서민들은 용납을 하죠. 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천국은 가야 되겠고, 천국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길 원하고. 그래서 아까 실체라고 했죠. 예배당 건물 세우고, 교회 만들고, 목사 세우고. 이게 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방식으로 손에 쥐겠다는 거예요. 쥐어야 안심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투입된 세례요한. 세례요한의 실체는 뭐였습니까? 도끼죠. 그냥 도끼가 아니에요. 기존의 니가 어느 권세에 속했는가를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치는 도끼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의식적으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 당시의 지도자들이 왔을 때에 과격한 발언을 해버립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니들이 구원받아? 돌멩이가 구원받겠다(마3:7-9). 이 돌멩이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너희들은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자기한테 온 사람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못 빠져나온 상태에서 지금 누구한테 왔다? 세례요한한테 온 거예요. 세례요한은 구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누가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이 보장해준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슨 근거로 구원을 보장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왜 설득 당했습니까? 그들에게는 뭐가 있기 때문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A.D33년에 예수님 돌아가시고, 그리고 A.D70년 유대나라가 멸망하고, 4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일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요세푸스가 지은 유대전쟁사나 20권의 책에 다 나와요. 이 전쟁에 보면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이 성전에서 아까 이야기한 대중들의 권세가 나오고, 구약에서 감람산에 메시아가 내려온다는 것을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유토피아를 그리워했습니다. 그 유토피아를 이용해서 생긴 파가 네 개의 파가 있어요. 시카리파, 진짜 조폭이에요. 그 다음에 열심당원, 그 다음에 쿰란공동체, 엣센파, 그 다음에 유대정통파, 제의적, 제사를 드리면서 신적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권세. 이 네 개의 파가 내란을 벌였습니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각자의 유토피아를 누가 빠른 시일 안에, 누가 확실하게 해줄까, 그 쪽 편을 들어서 내란에 말려들었습니다. 여기에 처음에 온 왕이 베스파시아누스 왕인데, 이 사람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얼마나 내란이 심해서 서로 잡아 죽였으면, 정복하려고 온 사람을 해방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포위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가 정복한 그날, 포위를 포기하고 본국 로마로 돌아갔어요. 왜냐하면 차기 황제(제 9대 로마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고 난 뒤에 그 다음 몇 년 뒤에 다시 왔거든요. 돌아가고 난 뒤에 아들이 와요. 티투스Titus장군(로마의 10대 황제)이 옵니다. 와가지고, “완전히 항복하라. 항복하면 너희들에게 적당한 땅에 있게 해줄게.”라고 했는데, 항복 못합니다. 이 네 파가 항복 못해서, 특히 시카리파와 열심당원이 로마에 대적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화를 이용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에서 메시야가 로마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하려고 온다고 했어요. 성전이 있으니까. 그래서 성전 붙들고 그렇게 했는데, 이 성전에다가 로마가 실수해서 성전에 불을 지르니까 이 사람들이 몸을 던져서 성전이 불타는 것을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있는 금을 모두 로마군이 강탈해갔죠. 이것을 누가 예언했습니까? 예수님이 예언했죠. 예수님이 왜 예언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자폭하려고 왔어요. 자폭. 나하고 같이 망하자.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유토피아를 그리니까, 뭐 현실을 이렇게 그릴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 현실 속에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줄을 잡아당겼어요. 천장의 줄을 잡아당기니까 예수님도 죽고 다 죽는 거죠. 마치 삼손이 기둥 두 개 뽑아가지고 블레셋 성전을 폭파하듯이, 주님께서 나도 망하고 니도 다 망하자는 거예요. 다 망했죠. 다 망하면서, 기존의 세상권력은 다 망하는 거예요. 주님만 구름타고 빠져나온 겁니다. 구름타고 빠져나갔죠. 제자들은 도망갔고. 그 뒤에 A.D70년경에 시카리파 두목이 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한 삼천 명 정도 데리고 마사다 꼭대기로 갔어요. 마사다 꼭대기는 동영상으로 보셨죠? 거기에서 비둘기 키워서 단백질 보충하고. 이렇게 비가 오게 되면, 모든 그 근처의 비는 마사다의 정상의 물 저장고로 올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어놨어요. 수로의 모형이 있는데, 이상현 목사님이 주전자를 가지고 물을 부으니까 그 주변에 있는 모든 물들이 마사다 요새로 다 빨려 들어가는 것을, 그걸 제가 못 찍었어요.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우리만 찍고 그러지를 못하잖아요. 지금 다시 갈까요? 그래가지고 3년을 버텼습니다. 티투스가 유대인 노예를 통해서 경사로를 만들었어요. 마사다 요새 서쪽에. 경사로가 아직도 있어요. 경사로 만들고 공성퇴 만들고, 거기다가 불화살을 쏘았는데, 이 시카리파 두목은 바람이 로마 쪽으로 불기 때문에 불화살 쏴봐야 로마군인들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바람이 반대로 불어서 몰살당했어요. 몰살시켜놓고 바로 치지 않고 군사들을 불러 진영에서 잠자게 했습니다. 그 불길을 보고 시카리파 대장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다. 자살하자. 다 자살했습니다. 여자 3명에 애들 2명, 5명 남고 다 죽었습니다. 유대나라 멸망했습니다. 왜 멸망했는가? 예수님은 기존 권세와 함께 자기를 묻어버린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 권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권세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죽을 때까지. 90될 때까지. 우리는 상품화에요.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주님이 보실 때 어떻게 봅니까?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증인입니다. 이제는 와플이니까. 납작하니까. 내 것이 없어요. 우리의 복의 기준이 뭐냐, 납작한 거예요. 이쪽이면 저주고 이쪽이면 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나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와플로 할까요? 제목은 ‘필요치 않는 권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필요치 않는 권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권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기 치더라도 나만 살아나면 그만이라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기를 십자가 앞에서 들통 나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사기밖에 칠 줄 모르고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 이 죄인을 피로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중풍병자가 낫는 것 말고, 니가 죄사함을 얻었다는 그 권세 앞에, 그 권세만 저희들이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