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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0319b 부산강의 : [시편]8(3편)-관계 재정리자유게시판시편

20180319b 부산강의 : [시편]8(3편)-관계 재정리(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한 것 중에서 약간 낯설고 이상한 게 뭐냐 하면 기존에 모든 육적인 관계가 깨어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구약 때 아브라함의 결속도 깨어진다. 당연히 깨어지지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달라요. 이스라엘은 새로운 민족이긴 하지만 여전히 육적이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손이거든요. 아브라함 혈육의 계통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는 것이 야곱언약을 통해서 계속 확산이 되지요. 제가 수요일에 했지만 야곱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특징은 뭐냐? 싸우는 성질을 갖고 있어요. 싸우는 성질로 말미암아 싸우지 않고는 이스라엘의 성립은 없는 거예요. 기존에 애굽 같은 세계에서 광야 있다면, 애굽이 함이거든요. 가나안 땅도 함이에요. 함과 함 사이에 광야 있는 셈족에 들어가요. 원래 셈족은 이라크 쪽에 있어요. 남쪽은 전부 다 함족이에요. 이라크에 있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나서 하란을 떠나서 셈이 함에 침투된 거예요. 함 땅에 셈족이 침투해서 자기 땅이라고, 약속의 땅 광야에 침투하지요. 여기 브엘세바에 와서 내 땅이라고 했는데 다시 애굽에 갔다가 와서 내 땅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 갔다 오면서 이게 내 땅이 아니고 하나님 땅이구나.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돼요. 왜 가나안 땅을 하필 많은 땅 중에 이곳을 하나님 땅으로 했을까? 그게 내내 세 사람이 같이 다니면서 궁금증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자기 땅이라고 했을까? 알래스카, 미국 북아메리카, 남극도 있고 오스트레일리아도 있는데 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했느냐는 겁니다. 물론 에덴동산이 나왔다는 그런 의미도 있지만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땅이 아니에요. 원래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이 나타날 때만 나타나는 게 약속의 땅이 에요. 만약의 약속의 땅이 약속에 따라 진행되지 않으면 그 땅은 저주의 땅이 돼버려요. 추방돼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약속의 땅은 구약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 애굽과 싸우면서 약속의 의미가 충족된다면 이게 구약이라면, 신약은 모든 인간을 상대로 예수님이 싸움을 벌이면서 인간 속에는 약속의 땅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약속의 땅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늘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안, 성령 안에 약속의 땅이 준비돼있습니다. 이것이 의존강의에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원한 기업, 그것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에요. 그래서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참 베드로는 희대의 사기꾼이다. 왜 사기냐 하면, 보통 사기가 아닌 것은 시킨 대로 행하면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시킨 대로 했는데 얻을 수 없다면 이건 사기죠.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아신 자라 했어요. 이건 인간의 행함으로 주는 게 아니고 이미 아신 자에게만 할당되고 배당되는 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얻고자 하는 사람은 때려죽어도 얻을 수 없는 곳, 그게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 안 믿는 사람한테는 사기 중에 이런 사기가 없고 이단 중에 이런 이단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이단이 안 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사실. 예수님은 배척당해야 됩니다. 우리가 설명할 것은 인간이 이렇게 행하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 행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행하셔서 열매로 주어졌다는 말을 함으로써 내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활동하심의 증인되라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시키는 거예요. 예수님 이야기만 나와야 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싸우는 성질을 부렸고 싸우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적, 상대가 있어야 되죠. 그 상대가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없는 자들이 상대가 되는 겁니다. 함 땅이 있는데 셈족이 애굽에 가서 광야를 거쳐서 이 땅에 감으로써 그냥 함이 살고 있는 땅이 셈 족속의 땅 정도가 아니라 셈 족속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족속의 땅이라면 아브라함 땅이냐, 아니면 아브라함 자손의 땅이냐? 아브라함 자손의 땅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이 완성되는 그날이 약속의 땅의 모든 것이 완성이 되는 날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 족속이 되는 방법이 뭐냐? 이게 아까 제가 피라고 했지요.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약간 어려우니까 참으세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모세야, 내 아들 건지러 가라고 할 때 그냥 가요. 갈 때 하나님이 누굴 죽이느냐? 하나님이 모세를 죽여 버립니다. 죽어가는 모세를 십보라라는 부인이 취한 조치가 바로 할례언약이에요. 아들의 고추 끝을 잘라서 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어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보통 육의 관계인데 십보라는 아버지를 죽이려하니까 아들의 할례를 통해서 아버지를 살려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할례언약의 관계에요. 그때 십보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피 남편이다. 자기가 피고 당신은 남편이란 뜻이 아니고 당신은 피로 맺어진 피를 증거해야 될 남편이라는 겁니다. 왜? 할례언약이 피를 내니까. 할례언약을 행함으로 관계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애굽에서 처음에 유월절 할 때 조건이 있어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사람들은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돼요. 이방인, 종마저도.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이스마엘 아니요, 이삭이란 뜻이에요. 이스마엘은 아브람 자식이거든요. 이삭은 누구 자식입니까? 아브라함 자식이에요. 아브람일 때 아브라함이 없어요. 아브람이 부정당할 때 거부당하는 그 뒷면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삭이 아니고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돼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갑니다. 후손,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위상이 새로 구성이 돼요. 그러면 이삭의 위상은 야곱이 돼요. 그런데 이삭도 불임여성에게서 나왔고 야곱도 불임여성에게서 나왔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었어요.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이삭과 야곱 사이에는 누가 개입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돼야 돼요. 직접 개입된 증거가 할례언약이란 말이죠. 그렇게 돼버리면 이게 중요한 건데요. 아브라함 있다, 이삭 있다, 야곱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을 때 하나님이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는 게 아니에요. 이 관계가 있어요. 관계가 광주리를 한 손에 들고 끄집어낼 수 있는 하나의 손잡이밖에 안 돼요. 관계를 끄집어내면 내 아들이 돼요. 드라마 보면 병문안 할 때 꽃장식한 과일 사가지요. 제 입장에서는 그래요. 대구에 칠성시장이나 부산에 재래시장에 가면 저 돈으로 백 박스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식 좀 했다고 되게 비싸게 받아요. 드라마에 나올 때마다 저게 비싼데 시장가면 저 돈으로 더 많이 사는데. 이런 엉뚱한 생각하는데. 그 꽃바구니나 과일바구니에 손잡이가 예쁘게 돼있단 말이죠. 그 손잡이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내 아들들이 아니고 내 아들이에요. 이게 신약에 가면 어떤 원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나는 착하다고 의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성령과 우리 사이, 이 모든 사이에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이들은 죄인이 돼요. 죄인들을 하나님의 의로 구원하는 겁니다. 죄인이 의인 되어서 의인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죄인은 끝까지 율법의 저주로 죄인 돼야 되고 우리 힘으로는 저주받아야 되는데 이 관계, 주님과 우리 관계, 이웃과 형제 관계, 관계가 의가 되는 거예요. 이 의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의가 새 언약으로 인하여 우리 속에 스며든 거예요. 교각, 연결고리를 이루어서 그것만 바짝 들면 모두가 한 몸이 돼버려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님의 의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 만날 때는 자신이 못난 것을 나타내요. 까불다가 맞은 것.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못-난-놈! 이순재의 못난 놈. 시집간 딸이 이혼하고 돌아오면 친정엄마가 등짝을 때립니다. “어이구, 이 못난 것.” 거기다 애 하나 들고 오게 되면, “못난 것. 내가 이러려고 시집보냈냐? 니 잘 살 줄 알았다.” 하고 등짝을 치죠. 그러면 딸은 울고. “니가 소박맞을 줄 몰랐다.” 요새는, “엄마, 내가 찼다니까.” 요새 무슨 소박이 있어요. 소박하게 소박맞지 않습니다. 차지요. “참고 살지.” “미쳤어, 엄마.” “니 어떻게 살래?” “엄마 내 애나 키워줘.” “너 뭐할래?” 홈쇼핑?? 화려한 돌씽 해쌓고. 배낭 매고 북유럽 놀러 다니고 있어. 요새는 친정엄마가 이혼을 독려하고 있어요. “그 인간이랑 살지 말라. 니 밥 못 먹여줄까.” “엄마, 그렇지. 잘했지.” 짝이 잘 맞아. 우리는 못난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건 신약적 의미고요. 그 의가 완성이 되지 않았어요. 구약은 그 의를 본인들이 해야 돼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됩니다. 엄청난 율법의 부담을 줬어요. 신약적 안목으로 보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게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구약의 언약입니다. 인간들 중에 과연 하나님의 영광에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나오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더니”(23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 환경을 구약 내내 조성해왔어요. 퍼질러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화목제물로 그 다음에 나와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인하여 너희들은 구원을 받았느니라. 방식이 구약을 허투루 버리지 않아요. 그들의 실패를 가위로 잘라버리지 않습니다. 실패를 모아요. 우리의 인생 실패를 다 모아요. 버릴 게 없어. 다 모아놓고 그러니까 너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이지 너의 행함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내 자랑이 아니라 주님만 자랑하게 만들어요. 십자가만 자랑하게 만드는 그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게 시편이잖아요. 시편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고 이게 다윗언약이라는 겁니다. 모세언약에서 더 진보된, 추가된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언약의 추가는 반드시 죄의 추가와 연동해서 병행해서 주어져요. 모세언약으로 죄를 유발시키고 그 죄에 대해서 율법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무엘상 1장 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언약은 제사장언약이에요. 왕이 필요 없어요. 제사장 하나 잘 되면 잘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제사장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전에 아브라함언약과 똑같은 원칙으로 해요. 없는 자식이 등장합니다. 원래 사무엘은 없는 자식이에요. 아기를 못 낳아요. 사탄도 다 쓸모 있다니까. 마귀들인 첩 브닌나가 아기 없다고 축복 못 받을 걸로 간주해버려요. 나는 아들 있고 너는 아들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했지 형님을 축복한 게 아닙니다. 약이 오를 줄 알았어요. 분명히 그럴 리 없는데 자식 없는 건 마땅하고 딱히 제시할 성과는 없는데 분명히 그건 아닌데 뭔가 이유가 있을 건데 하고 한나가 그 이유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죠. 엘리 제사장이, “술 먹었나? 왜 중얼거려.” “술 먹은 게 아니고 너무 억울해서. 뭘 가졌다고 복이 아닌데 잉태치 못한 자가 복이 있다 했는데 잉태했다고 복이라 하니까 뭔가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한나가 하나님께 바치지요. 어린 사무엘이죠. 어린 사무엘은 아무것도 몰라요. 밤중에 세 번씩이나 찾아오지요.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목소리인 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음성을 내리고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게 왔을 때 세 번이고 백 번이고 찾아가는 이유는, 내 나라가 내 노선 망했다는 걸 알 때까지 계속 찾아가요. 그게 세 번이었습니다. 엘리 망합니다. 이 사람이 나쁜 짓해서 망한 게 아니에요. 아들 잘못 교육해서 망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이라면 사무엘은 자기 자식 제대로 교육 못했어요. 같이 망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해놓고 구실을 뒤에 붙이는 겁니다. 엘리 가문은 새 시대에서 허물어져야 될 가문인데 그 허물어지는 이유를 보니까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존중히 여겼다. 나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경홀히 여기고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긴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핑계 삼아 조진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고 이미 저주받기에 저주받는 구실을 억지로 찾아내는 거예요. 야곱의 형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받아야 돼요. 그런데 저주받아야 될 에서가 나쁜 짓한 게 없어요. 놀라운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니 행한 것도 없잖아요. 행한 것도 없는데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돼있어요. 그렇다면 야곱이 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받을만한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세상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33살에 죽은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청년은 그 나이까지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 33살에 죽는 결과를 야기 시키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게임한다든지 돌부리에 걸려 인대 나간다든지 모든 것이 그때 33살에 죽기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한 일이에요. 그걸 사무엘상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이게 신명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사무엘상이 받았고, 그것을 누가복음 1장에 마리아찬가에도 나와요.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죽이고 살리고 하시는 모든 것은, 발걸음을 세시고,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는 것까지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해석을 한 마디로 뭐냐고 물으면, 인간이란 복음으로 재 해체된다. 이게 핵심이에요.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복음과 관련지어서 다시 해석해줘야 그 사람이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복음과, 언약과, 십자가와 관련돼있어야 돼요. 왜냐? 모든 것은 새 언약,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바로 성도고. 따라서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인생이나 구성도 새 언약과 복음과 관련성을 갖고 있고 이들을 해치는 자는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언약궤를 앞장세워야 되지만 이제 성도는 움직이는 언약궤에요. 본인언약이에요. 만약에 나한테 해코지하면 주께서 친히 원수의 뺨을 쳐버립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그러면 성도와 구약에 다윗언약의 이스라엘과 그냥 연결되나? 그냥 연결되지 않습니다. 단절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했다면 그 아들이 중간에 등장해야 돼요. 바로 시편 3편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치는 자는 내가 진노하리라. 이것과 연결되어서 성도는 예수 안에 있거든요.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공동운명체란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를 미워함이 아니고 나를, 예수님을 미워함이라는 원칙에 의해서 이 본문은 해석돼야 됩니다. 해석1과 해석2가 대략적으로 건성건성 이렇게 연결됩니다. 논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이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세밀하게 들어가는 겁니다. 시편은 다윗언약 시대거든요. 다윗언약 대표자는 다윗이에요. 시편 3편 1절 들어가기 전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압살롬이 우리가 알기에 다윗의 아들이지요. 아들이 아닙니다. 왜 아니냐? 인간적 육으로는 다윗이 낳은 아들 맞는데 언약궤 관계로는 적이 돼버려요. 자식이 원수라니까. 압살롬의 묘가 어디 있느냐? 내가 이스라엘 답사를 안 갔다 왔으면 말을 안 하는데 갔다 왔어요. 가기 전에 동영상을 많이 봤거든요. 이왕 가는 것 본전 뽑자고. 뽑지도 못했어요. 하도 볼 게 많아서. 동영상 보면서 뭘 궁금해 했느냐 하면, 여기 황금 돔이 있고 통곡의 벽이 있고 동쪽에 감람산이 있습니다. 감람산이 예수님 승천했다고 곳이라 했는데 전부 다 엉터리라고 했지요. 좀 내려가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가르쳐 준 곳이 있다는 거예요. 그 밑에 학개, 스가랴, 이름 모를 선지자 무덤이라 하는 곳이 있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잡혔던 곳, 이건 동영상으로 올려놨고. 그 밑에 내려가면 겟세마네가 있는 거예요. 뽕나무 있고 거대한 성당 있고. 제가 궁금한 것은 이 사이가 뭔지 궁금한 거예요. 이 사이에 길이 나있어요. 이 길을 제가 동영상으로 다 찍었어요. 이게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기드론 골짜기를 건널 수 있어요. 도로가 났어요. 여기에 압살롬의 무덤이 있어요. 아주 황폐한 무덤이. 물론 압살롬 무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길 건너오면 다윗 성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다윗 성이 예루살렘이 아니냐 하는데 아니에요. 다윗 성 따로 있고 시온산은 여기 있고 예루살렘은 따로 있고. 거리는 가깝지만 다윗 성에 보면 히스기야의 동굴이 있고 그런데. 이 거리가 약 150미터 돼요. 관광객들은 전부 이리로 가요. 우리는 걸어서 갔어요. 분문(똥문)을 통해서 가면 검문하고 들어가게 돼있는데 압살롬이란 자식이 아버지에 반란했지요. 그것은 언약에 대해서 대든 겁니다. 언약에 대든 동기가 뭐냐? 정의가 정의답게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을 배다른 형제 암논이 건드렸지요. 그렇게 건드려놓고는 전보다 더 미워했다고 했어요. 그럴 때 친오빠 압살롬이 제대로 아버지가 징벌을 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분노가 정의를 찾아 형을 죽여 버렸는데 그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의의 실현방법과 인간적으로 욱하면서 나온 육적인 실현방법이 다르고요, 인간이 보기에 죄라는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죄라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 언약 안에서 죄와 언약 밖의 죄가 너무 달라요. 언약에서 죄와 의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면, 맡기는 것, 이게 의입니다. 그리고 못 참겠다. 이게 악이 돼요. 이 설명하는 게 어려운데요. 왜 어려우냐 하면, 맡기는 것 같으면 그렇게 당했다. 심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지, 라고 하면 의겠네요? 아니에요. 인간은 맡기고 맡겨도 절대로 내 손으로 해결하게 돼있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다윗은 이미 자신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맡긴다는 게 뭔지 알았어요. 맡긴다는 것은 그냥 맡기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우리는 소극적으로, “난 몰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거잖아요. 하나님이 친히 주변상황을 언약에 의해서 조종하는데 조종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며 모친이 나를 죄 중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것을 구체화 시키는 일에 하나님이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네가 지금 낮췄다고 하지만 낮춘 것조차도 죄야,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낯설고 상당히 황당하기도 하고 그렇지요. 내 인생은 이렇게 몰아세웁니까, 하는 반면에 못 참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못 참은 게 아니에요. 맡겨 봐요.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더는 못 참는다. 기어이 과거에 참은 것 다 무효로 돌리고, 이래서 어느 세월에 내가 하겠느냐. 이런 경우가 자식 전도할 때 많이 생겨요. 그냥 맡기면 되는데. “복음 들어라.” “얼마나 들어야 되는데?” “1년은 들어야지.” 1년 지나도 변화가 없네. “엄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더는 못 참겠다. 이것 안 하면 집 나가라.” 엄마가 갑자기 급진적인 조치를 하는 거예요. “네가 복음 듣는 것 때문에 용돈 줬고 네가 저지른 걸 참았는데 이제 복음도 안 듣는다고? 나가!” 이게 압살롬이에요. 본인이 기대한 것을 기다리다 성질나서 더는 못 기다려서 일을 저지른 거예요. 이것을 다윗은 이미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쫓길 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그때 다윗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냥 둬라. 저주하는 것도 주께서 알아서 저주케 하고 내가 만일 저주받을 일 없다면 그 저주가 나한테 날아오다 저절로 복이 될 것이다.” 이게 맡기는 거예요. 주변상황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고 모든 게 주의 뜻이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일을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만들어 가실 때 뭘 노리느냐? 나는 지금보다 더 죄인 맞군요, 라는 결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일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주께서 일을 만들어 놨는데 나는 팔짱 끼고 놀래. 그게 아니고 주께서 만든 일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압살롬적이고 얼마나 내 일에 못 참는가를 들춰내는 식으로 주께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1번, 맡기는 쪽에 절대로 설 수 없어요. 성도는 어디냐? 2번 쪽입니다. 불신자도 2번이고. 똑같아요. 다만 차이점은 뭐냐 하면, 내가 성질 급하게 주이 일을 못 기다리는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주께서 일을 만들어냈다고 2번에서 1번으로 갈 수 있으면 성도고, 2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압살롬입니다. 2번에서 1번으로 가면서 뭐가 나오느냐? 고마움과 감사가 나와요. 내가 주제파악을 못했구나. 내가 죄인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왜 저한테 이런 엄청난 일을 하시는지 원망스럽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내 안에 아직도 생산되는 죄를 바깥으로 끄집어낸 그 일이 주께서 내 주변에 유발시키는 일이에요.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걸 알게 하는 겁니다. 그 결과가 감사와 고마움으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2번에 있는 불신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있거든요. 제가 울산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울산에 화학공단에서 가스관이 터져서 독가스가 울산시내 남부 쪽에 퍼졌다. 남부 쪽 사람들 중에서 신자는 냄새 못 맡습니까?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그 역겨운 냄새를 맡지요. 제가 그 말을 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결국 신자나 불신자나 우린 이 세상에서 똑같은 형편에 있어요. 신자라고 더 봐주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내가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쁜 짓 많이 해서 인새이 망가진 게 아니에요. 신자나 불신자나 전부 이런 고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성도는 그 고통 가운데서 자기 주제파악을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당해도 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피로 천국에 가게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로 나올 때는 성도고, 많이 누리면서도 틱틱거리고 더 없느냐고 간절히 기도하고. 이건 신자 아니죠. 이건 압살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에 좇길 때 이 본문 내용은 다윗이 ‘나’가 되고 공격하는 압살롬이 되는 것처럼 보이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유대교에서 다 그렇게 해석해요. 다윗이 압살롬에 좇길 때 했기 때문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들이” 할 때 여호와여 다윗의 적들이 어찌 많은지요? 나를 치는 자가 많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적으로 간주했습니까, 아들로 간주했습니까? 아들로 간주해서 죽었을 때 물론 하나님 뜻에 의해서 치지만 그것이 다 내 탓이요, 나 때문에 내가 밧세바를 건드린 그 죄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래서 자기는 아들한테 당해도 싸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들인 내가 아버지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당해도 싸다는 마음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유대교처럼 다윗, 압살롬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달리 해석해야 돼요. 이게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적은 곧 이스라엘이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적은 나다. 이런 관점에서 이걸 봐야 됩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런 말을 하려면 조건이 있어요. 내가 누구 편에 있어야 돼요? 여호와 편에 서 있을 경우에만 이 고백이 나오지요. 그러나 인간은 나는 날 위해 존재해요. 하나님마저도 날 위해 있어야 하나님답다고 우기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걸 보는 사람들이 소위 은혜 받았다는 게 수상해요. 3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이건 꼭 회사승진시험 칠 때나 이런다고. “주여, 라이벌이 승진되려고 하는데 이번에 내가 과장되게 하옵소서.” 이것과도 연관되고, “내가 나의 목소리로” 이건 뭐 집 계약할 때 또는 재개발 들어가서 돈 떼먹히느냐 마느냐 할 때 모든 분야에서 전부 나를 중심으로 보게 되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내가 자고 깨어나니까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이사 간다든지 하면 주의 응답이라고 한단 말이죠. 얼마 전에 주차 때문에 약간 신경 쓰인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강의하고 집에 오니까 아주 기쁜 소식을 접했어요. 그 사람이 죽었어요. 난 사람 죽는 게 그렇게 기쁜 줄 몰랐어요. 생생해요. 아침까지 차 닦았다니까요. 꼭 내 자리에 차를 대거든요. 바로 이웃집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그 사람이 차를 댔는데 그 자리에 차를 댄다고 늘 틱틱거리는 거예요. 아침에 차 닦고 저녁에 죽어 돌아왔어요. 이제는 주차문제로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한지. 그만 시편 3편에 자고 일어나니까 주께서 원수를 죽여 버렸어요. 바로 그런 내 모습이 주님의 원수가 돼요.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 나는 창세전에 시편에 있다고 보면 돼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밖에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고, 그 의를 드러내가 위해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차후에 만들어졌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윗도 압살롬도 만들어졌고 그들을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예수님 이야기하기 위해서 배역들을 역할들을 맡은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버지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신약에 성령 받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해석이 그 해석이에요. 시편에 나오는 모든 나는, 긍정적 나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아니다. 그러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나일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를 빼는 해석을 해야 돼요. 이것은 내 돈 떼먹은 사람 죽고, 내 주차 반대한 사람 죽고. 생각할수록 기분 좋아요. 그 사람 죽었다는 사실을. 난 그 사람 죽으라고 기도한 적 없습니다. 진짜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정말 예상 밖에 죽었어요. 결론내립니다. 죽으니까 원수에요. 내 원수가 있고 죽으라고 고사지낸다고 원수가 아니라 이게 죽으니까 원수에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는 모든 자는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지요. 하나님을 내 위주의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마음이 괴로웠고 슬펐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로 인하여 그렇게 괴로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노래가 아니에요.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노래입니다. 예수님의 시편이에요. 다윗이 아들한테 당했을 때 아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다시 말해서 잘못한 짓을 하는 압살롬의 대표자로 다윗이 아버지한테 대신 용서를 구하는 심정이란 말이죠. “저것들 다 내 자식인데 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압살롬을 어떻게 살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이 압살롬을 죽여 버려요. 요압한테 죽지요. 다윗은 요압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요압 주의하라. 언젠가 그는 내 손에, 다시 말해서 다윗언약에 죽을 인간이죠. 하나님이 죽어야 될 내 아들을 자기가 공을 세우겠다고 죽여 놓고, 요압도 그걸 알아요. 아버지가 아들 죽는 걸 안 좋아는 걸 알고 부끄러워하며 들어가요. 그래야 사무엘하가 설명이 돼요. 그렇게 안 보면 설명이 이상해요. 분명히 이겨놓고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나는 옳다, 바르다하는 자체가 중간에 할례언약으로 이어주신 하나님의 의를 전부 다 개인적으로 자기 위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모독하는 식으로 모든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짜 그중에 하나가 우리 자신들이에요. 복음을 안다하지만 나 위주에요. 주차 시비 좀 걸었다고 그 사람 죽었다고 지금 이러면 안 되지만 감수성이란 게 있잖아요. 감수성을 말릴 수 없어요. 기분 좋은데 기분 좋다고 하지. 기분 되게 좋아요. 누가 나한테 담배피고 노려보는데 담배피우면 어떤데, 하고 까불다 뒤에서 트럭에 치면 겉으론 저 사람 안 됐다 하지만 속으론 고소하다, 이놈아. 우리는 남 고소한 재미로 살아요. 제발 고소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날 건드려서 많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그 불행한 양만큼 우리는 행복이 증가되는 겁니다. 그래서 롯데를 응원하고 프로야구 보고 도박하는 이유가 나로 인하여 망하는 자가 있을 때 존재의 의미가 새록새록 새롭게 신나게 드러나는 거예요. 남편이 바깥 일 힘들면 아내 탓하는 것처럼, 가정 탓하는 것처럼. 종영된 시청률 40% 넘었다는 <황금빛 인생> 보면서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바보 등신 같은 남자. 책임질 수 없는 가정을 지가 책임지겠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는 겸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만의 극치에요. 가정은 하나님이 책임지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식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아빠가 아빠다워야 돼. 나 하나 희생하고 봉사하면 가정이 화목해. 드라마 주제가 그거잖아요. 그게 바로 교만의 극치라니까. 그게 바로 악이에요. 언약에서는. 우리는 악한 역할 하라고 배정받았어요. 언약 입장에서 예수님만 드러내야 돼요. 예수님만 의인되고 우린 죄인 돼야 돼요. 그렇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차 때문에 죽은 사람을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고소해하는 나를 감사해야 돼요. 못 돼먹었어요. 왜? 아담의 족속이니까. 성경 알고 교리 안다고 해서 누를 상황이 아니에요. 누를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솔직하세요. 솔직해야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이건 나한테 해당되는 아니라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동기유발자라는 것을 주께서 십자가 피 흘러 죽도록 내가 이런 짓거리를 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배역에 우리가 들어가야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마지막에 해준 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도와줬습니까? 앞장서서 이럴 분 아니라고 말렸습니까? 비겁한 사람. 장모 병도 낫게 해주고 물 위도 걸었지만 다 말짱 소용없어요. 비겁하게 배신자의 길로 가잖아요. 가룟 유다만 배신자인 줄 알아요? 열두 제자들도 배신자 아닙니까? 그게 원래 우리 자이에요. 예수 안 믿는 자리가 우리 자리라니까요. 그러니까 기적이죠. 그러니까 천국 가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걸 여러분 혼자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도 안 되는 기쁨을. 누가 이야기해도 설명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목사님 겸손하니까 구원받았겠네요. 이런 되도 않은 소리해요. 무슨 겸손해요. 남 죽은 걸 고소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몰라요. 시편 3편에 의하면 우리는 뭐냐? 우린 원수의 역할을 계속 수행함으로써 시편 3편을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게 내 위주로 쓰인 것처럼 착각하는. 시편을 외움으로 하나님이 마치 내 편인 것처럼. 내가 누워 자고 하면 하나님께서 다 내 일을 도와줘야 하는 것처럼,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의 뺨을 쳐야 옳은 하나님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들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윗이 압살롬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끝까지 압살롬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압살롬이 지옥 갔느냐8? 그 문제는 질문할 사항이 아니에요. 역할을 그렇게 맡았어요. 나쁜 역할. 다윗은 다윗 역할, 압살롬은 나쁜 역할을 맡았어요. 그리고 다윗은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데 죽었을 때 울어도 너무 울어요. 압살롬아, 압살롬아.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못 된 인간이라고 내팽개쳤지만 황폐하기 짝이 없어요. 철문으로 못 들어가게 만들어놨어요. 압살롬의 묘에 오줌도 막 누고. 그리고 그 친구 묘도 같이 있어요. 이스라엘에선 압살롬은 아주 나쁜 인간. 다윗의 무덤은 가묘인데 어디 있느냐? 시드론 골짜기에서 보면 시온 산에 다윗의 가묘가 있고 여기에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요. 다윗과 압살롬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를 사랑하는 관계, 좇기면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떤 인간의 행함으로 따지지 않고 죄인인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그냥 주께서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일으키는 그 가운데서 그 의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바로 시편 3편을 통해서 우리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학대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학대한 우리를 구원하는 그것이 모든 언약을 다 취소시키고 다 폐기시키고 마지막 언약 하나로 끝내버린 거예요. 자, 예수님이 피 흘렸다. 네 죄 때문에 피 흘렸다. 오케이! NO or YES? YES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없이는 신약이 없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관계가 이제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맺어지는 새로운 형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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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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