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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0315a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하체자유게시판레위기

20180315a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하체(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18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과 무엇을 비교하느냐 하면,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구례도 행하지 말고”(3절)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 풍속도 따르지 말고, 가나안에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민족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 따르지 말라는 것이 둘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둘 사이에 끼어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에 애굽의 풍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풍습은 모르지 않을까 생각할 거예요. 이 점을 일단 유념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살던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미국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한국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미국 풍습과 한국 풍습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만약에 다르다면 어떻게 합니까? 미국 풍습과 한국사람 풍습이 다른 데 비행기 타고 태평양을 건너올 때 도중에 미국 풍습도 따르지 말고 한국도 따르지 말고. 미국과 한국이 전통과 역사가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선에서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게 된단 말이죠. 여기서 첫 번째 나오는 어려움이 그거에요. ‘~하지 말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라는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래요. “너는 반찬 이것 먹지 말고 이것 먹지 마.” 저는 옛날에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계모임을 주로 우리 집에서 했는데 상을 차려놓으면, 삼촌이나 손자들이 먹고 싶어 하잖아요. 그때는 뭐 먹지 말고, 뭐 먹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이것 먹으라고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게 있어야 돼요. 이것 먹고, 이건 먹지 마. 이래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애굽 풍습 따르지 말고 가나안 풍습 따르지 말고, 끝이에요. 이것 하라는 게 없어요. 그냥 붕 뜬 거예요. 하지 말라만 있어요. 가나안 풍습과 애굽 풍습 둘 중에 하나 잡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둘 다 잡을 게 못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풍습을 따르란 말입니까? 따를 수 있는 풍습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 이 풍습 따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하라는 것도 많이 있잖아요. 왜 없다고 합니까, 라고 할 때 ~하라고 할 때는 반드시 전제로 이것 하지 말라는 것이 현장에서 하라가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애굽 사람들입니다. 애굽 사람에게 뭘 하라는 것은 네가 이미 익히 해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네 힘으로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할 재주 있거든 해봐라. 그래서 ‘~하라“가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요. 배운 가락이, 배운 도둑질이 그것밖에 없어요. 하지 말라고 할 때 방금 이야기한 것을 글로 쓰면 쉬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감당이 안 됩니다. 이유가 뭐냐? 우리 몸을 우리가 감당 못할 몸이에요. 왜? 몸이 변했으니까. 하나님이 만든 몸이 아니에요. 범죄 한 몸입니다. 범죄 한 몸이 거룩한 법이 마주칠 때 범죄 한 몸으로 하나님의 법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감당할 수 있냐고 하니까 누구 생각난다. 김제동이 이야기한 것 같은데. 우리가 이런 몸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음란하지 말라. 그런데 몸은 이미 음란을 발산할 잠재성으로 가득 찬 몸이에요. 툭 치면 음란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남자들은 특히 술 먹으면 그렇거든요. 술 먹으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인 줄 아시고 주께선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돼있어요. 쉽게 말해서 2차 노래방이나 3차 가지 말라. 회식하는 목적이 2차, 3차 때문에 가는 것이지 1차 진지하게 회의하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요. 저녁식사만 하는 게 회식 아니잖아요. 2차, 3차 때문에 저녁식사를 참는 거예요. “더 좋은 게 있을 거야. 참아, 참아. 확 속풀이 할 수 있는 멋진 기회 있을 거야.” 우리 몸이 감당이 안 됩니다. 음란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음란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음란에 대해서 자극을 받게 되고 본격적으로 음란을 할 육신적인 준비가 돼있어요. 레위기 18장의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만 청소년들에게는 19금 동그라미 칠 내용이에요. 오늘 강의는 18세 이하는 안 듣는다 치고 성경 그대로 읽어볼게요. 6절부터.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그 다음에 계속 하체 이야기가 나와요. 10절에 보면, “너는 네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그 다음에 12절에 보면, 고모까지 확대시킵니다. “너는 네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이모까지 확대가 돼요. 14절 끝에 보면, 백숙모까지 건드리고 15절에는 며느리 하체까지 언급까지 언급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형제의 아내를 범치 말라. 이건 형수, 제수씨까지 거론하거든요. 사람이 가만 놔두면 하체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체, 하체, 하체를 자꾸 언급하니까 이상하게 발동이 되지요. 언급하니까 가만있는 걸 건드린 셈이 되지요. 하고 싶다고 나와요.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하지 말라는 순간, 너 말고 네 속. 너의 번지르르 한 점잖은 너 말고 점잖은 껍질 안에 들어있는 점잖지 못한 그것이 발작을 일으키도록 내가 법으로 자극을 주고야 말리라. 지금 이런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이 나왔다는 그 의미를 그 취지를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전혀 몰라요. 자기는 홍해 건너왔다고 특별 대우받는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예쁘고 참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면 우리에게 약속의 땅을 주게 될까. 노예생활을 벗어나서. 만약에 2차 대전 때 연합군이 군함도에서 일제 압제에 있던 우리나라 조선 징병인들을 해방시켰다고 했을 때에 <군함도> 영화 보면 나와요. 마지막 장면에 일본군을 잡아가고 조선과 중국의 징병인들을 풀어주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풀려났을 때 그 사람들이 일본사람들보다 더 착하고 온순하고 훌륭하고 마음씨가 정결하다는 자부심을 얼마나 크게 갖겠습니까? 저들은 나쁜 놈이고 우리들은 훨씬 더 고상하고 죄 짓지 않은, 잡힌 게 죄는 아니잖아요. 잡은 게 죄지 잡혀 간 게 죄가 됩니까? 아니잖아요. 미군이 와서 해방됐다. 우리는 해방된 동시에 착하다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물어봅시다. 잡혔으면 착합니까? 잡아가둔 사람과 잡힌 사람, 누가 더 착해요? 둘 다 똑같은 것 아닙니까. 둘 다 마찬가지거든요. 역할이 바뀌었다 뿐이지. 이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하고 집구석이 굉장히 가난하니까 이상하게 재벌 3세보다 훨씬 착해 보이는 이 느낌은 어떡하지? 가난하고 수입이 적은 만큼 착하다는 이 착각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러분 제대로 알아야 돼요. 애굽 사람을 애굽 같은 나라에 집어넣는 그것이 바로 출애굽 의미입니다. 애굽에 살던 애굽과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애굽과 똑같은 사람을 데려다가 지금 애굽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쫓고 애굽에 살던 사람들을 자기 백성이란 이름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뭔가 중간에 달라져야 돼요. 착하게 달라져야 되겠습니까, 거룩하게 달라져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져야 되느냐 하면, “주여, 우리는 이 법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걸 유일하게 아는 사람들이에요. 사람들 앞에서는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라고 싸울 수 있지만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잘난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돼요. 그래서 신명기 8장에 보면 광야에서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건짐 받았으니까 착할 것이다. 우리를 포로 잡은 애굽 사람보다 더 거룩할 것이라는, 우리는 잠재의식 속에도 음란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도 거짓말 한다든지 도둑질한다든지 살인한다든지 간음한다든지 우상 숭배한다든지 일체 우리 마음엔 아예 없을 것이야. 얼마나 착했으면 착한 인간들이 고생한다고 해서 고생 그만. 착하니까 착한 데 가야지, 라는 착각들을 그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걸 장담합니까? 장담하지요. 광야생활에서 열 번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취지에 도전했기 때문에. 그리고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달랑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유적 답사했는데 거기에 사막이 있어요. 그 사막에 40년 동안 돌려서 그들을 기어이 다 죽였습니다. 죽어도 그들은 할 말이 없어요. 그들이 법을 안 지켰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닙니다. 이런 게 중요한 거예요. 간음했기 때문에 몰살한 게 아니에요. 그들의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 하면, ‘집단 죽음’입니다. 개인별 죽음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선과 악을 따져서 죽이는 죽음이 아닙니다. 물론 두 사람은 빼놓고. 집단 죽음이 될 명분이 뭐냐 하면, 법을 어겨서도 우상 숭배해서도 아니라 음란해서도 아니고 믿지를 못해서 그런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완벽하게 착하게 살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에요. 단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이에요. 남자만 40만 명이거든요. 40만 대 2에요. 이 말은 대다수가 안 믿을 이야기를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을 만하네, 라는 식으로 이끄신 게 아니고 그들의 기본 속성, 근본적인 근성에 의하면 절대로 믿지 못할 상황을 하나님께서 유도하시고 만들어내신 거예요. 그래서 안 믿는 게 정상이고 믿는 게 기이합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너희들은 수가 많은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라. 하나님의 의도를 보세요. 왜 못 믿을 이야기인지 한 번 들어보세요. 너희들은 극히 숫자가 적다. 그리고 너희들이 만나야 될 민족들은 숫자가 상당히 많다. 해놓고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내 약속이니까 믿으라. 이 말을 간단히 풀이하면, 네가 애굽에서 경험적으로 알아왔던 모든 선입관과 모든 신뢰성은 말씀 앞에서 스스로 부정하라. 이것은 적들과 싸우기 전에 누구와 싸워야 하느냐 하면, 내가 그리고 내가 기대하고 내가 목적으로 삼고 내가 희구하고 희망하는 나의 현실과 싸워야 돼요. 내가 꿈꾸는 현실,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을 내가 완전히 좌절시켜야 돼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구원은 몰락이라고. 자진해서 몰락하는 게 구원입니다. 자기 믿음을 신뢰한다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게 되면 이건 믿음이 없는 거예요. 내가 품어온 게 내 몸이 경험한 것들의 집합이거든요. 내 몸이 경험한 것이 뭉쳐서 지금의 나의 믿음의 내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땐 이렇게 하고, 부동산 투기할 땐 이렇게 하고, 어떤 사람 선볼 때 인상이 이렇고. 모든 게 평생 익히 몸이 습관화 되어 몸에 스며든 그런 것들의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라고 내용을 채우는 거예요. 몸에 잔뜩 들어있는 것을 어떻게 그 독소를 무슨 수로 빼냅니까. 빼내는 것을 우리는 강력하게 싫어하는 데.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집단화는 무슨 뜻이냐 하면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믿음의 내용을 주님께선 믿으라고 제시하더라 이 말이죠. 그게 광야생활이에요. 그래서 레위기 18장 1절부터 3절까지 가나안 풍속도 따르지 말고 애굽 풍속도 따르지 말고, 이 말은 지금 네 자신과 싸우란 말과 동일합니다. 이 말과 더불어 내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아까 결론부터 말씀드렸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 자신을 안 믿어요. 자기가 경험을 안 믿습니다. 새롭다고 느껴져야 돼요. 주의 말씀은 내가 다가가서 이해해서 받아들이란 말씀이 아니고 나를 개무시하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믿는 것, 인정하는 거예요. 스스로 주여, 나를 때려주시고 밟아주세요, 라는 심정으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은 밟아서 나는 인간 말종입니다. 이런 인간을 살려주신다니 황송스럽습니다. 이런 자세가 아니면 주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하나님, 저 잘났으니까 약속의 땅에 가면 쓸모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라내도 저는 살려주셔야 돼요,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나와서는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나와서는 끝난 이야기죠. 그건 약속의 땅에 못 가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내용의 가장 근원은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음란. 음란=우상숭배. 논리가 이렇게 전개됩니다. 음란을 터치해서 우상 숭배자로 몰아넣고 우상 숭배에서 다시 음란을 끄집어내는 두 가지 계통을 밟아요. 상당히 함축됐지요. 인간 속에 음란을 품어서는 안 된다.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라는 것이 내 자신이 납득이 되는 신을 내가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우상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내가 아는 상식을 내가 지키고자 하니까 그것이 바깥으로 현상화 되면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음란해서 멸망시키는 게 아니고 우상 숭배했다고 멸망시켜요. 그리고 갈렙과 여호수아가 무사히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들어간 겁니다. 고로 우상 숭배란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들어있지 않는 것,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우상 숭배란 기괴한 동굴형상이나 이런 형상을 안 섬겼다고 우상 숭배가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되지 않은 모든 발언이 나오는 진원지, 그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 신뢰성이 나올 턱이 없는 것. 그걸 불모, 풀이 자라지 않는 삭막함, 하나님의 약속과 다 이루심, 그러니까 행함으로 따지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죠. 다 이루심을 믿지 못하는 게 나오는 것, 행함으로 뭔가 틈을 두는 것, 이만큼 행하면 나는 구원받는다고 이게 우상 숭배에요. 인간은 기껏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내가 이 정도 착하니까 더 착해야지. 더 착해서 영광 돌려야지. 이게 우상 숭배에요. 다 이루심이 더 보탤 행함이 없는데 또 보탤 행함이 튀어나오는 것, 그게 우상 숭배입니다. 툭 치면 행함 나오는 사람과 툭 치면 복음이 나오는 사람과 이건 사람 자체가 다른 인간입니다. 툭 치면 어떤 사람이 복음이 나온다는 말은 그 사람이 착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얼마나 못났으면 복음이 나오겠어요. 얼마나 못났으면 용서가 나오겠습니까. 한 평생 이렇게 완벽하고 조심스러웠고 철저에 철저를 기했다. 이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난 개판이었어. 그런데 용서받았어. 도대체 그런 희한한 대단한 소식이 어디서 들어왔느냐? 그게 바로 복음이야! 라고 당당하게 주저 없이 그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레위기 18장을 보지만 복음입니다. 이걸 율법이라고 율법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복음은 그 안에 인간의 실패를 담보로 해서 이뤄지는 거예요. 인간이 성공하면 복음이 아니죠. 주님이 성공해야 돼요. 우리는 실패했지만 주의 성공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나와야 됩니다. 당신은 어떤 점에서 실패했느냐?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 된 몸을 주의 법을 감당 못할 몸인 것을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 깨달음의 과정에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이 음란에 관한 법에 대해서 깨닫는 과정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두 가지 안목을 상정할 수 있어요. 첫째는 창세기 2장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안목,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죄로 죽은 자의 안목, 이 둘이 달라요. 죽은 자의 안목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조상이 보여줬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1번은 벌거벗은 몸이에요. 벌거벗은 몸을 하나님이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몸이 정상이에요. 그런데 범죄 하고 난 뒤에, 죽은 몸이 되고 난 뒤부터는 아담이 수치를 느끼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렸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2번에서 하는 질문이 이렇게 돼요. 벌거벗으면 안 된다는 것이 죽은 자의 죄 된 입장에서 하는 질문이에요. 1번, 아무것도 모를 때 질문은 뭐냐? “옷이라 것이 왜 필요하지?” 이런 질문이 돼야 되는 거예요, 안목이. “옷을 왜 입지? 옷 안 입어도 되잖아. 그게 옳잖아. 저 사람도 옷 입고 저 사람도 옷 입는데 왜들 옷을 입지? 죽은 모양이구나. 저 사람들 잘못 되도 보통 잘못 된 게 아니구나. 옷을 왜 입지?” 이래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발가벗고 돌아다니면, “애도 아니고 발가벗고 다니지? 부끄러워라. 경찰이 잡아가야 된다.” 우리의 안목이 비정상인 것을 감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다들 옷을 입으니까 옷을 입는 게 정상인 줄 알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2번에 와요. 이미 범죄 한 인간에게 온다고요. 범죄 한 인간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렸단 말이죠. 옷을 입은 상태가 되면 덜 부끄럽게 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안 느끼잖아요. 수치가 사라졌다는 말은 잘난 존재가 됐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2번을 향하여 과연 너희가 잘난 존재 맞느냐? 옷 속에서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내가 캐볼까, 라고 옷을 벗긴 채로 법을 감당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 옷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어떤 관계냐? 부부관계지요. 부부 외에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부끄럽게 여기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부부 사이에 벌거벗고 있으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부부기 때문에 같이 목욕할 수 있고 침대에서 같이 잘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상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걸 주님께선 거부하는 겁니다. 부부기 때문에 해도 된다는 그것을 인간이 부부라는 명분으로 부부기 때문에 우리는 옷 벗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자 없지요, 라는 그 고집스러움, 약간이라도 정당성 확보하려는 것, 그것을 주님께선 용납하지 않지요. 우회로 쳐들어옵니다. 다른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러면 그 소리 듣고 한 번도 바람피우지 않은 부부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난다, 신난다. 우리는 죄 안 범했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부부가 지금껏 바람피운 적 없는 그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서 다른 아내를 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 사람을 비껴가야 되잖아요. 너희들은 사랑이 깊어서 다른 여자, 다른 남자에 대해서 신경 쓰는구나. 너희들은 착하니까 이야기할 필요 없고. 바람난 옆집에나 이야기해야 되겠다. 이래야 우리의 상식이죠. 그러면 정상적인 부부니까 레위기 18장 지워버릴까요? 찢어버리든지 매직으로 새카맣게 칠해 버릴까요? 우리한테 해당사항 없네. 특히 새순교회 교인들에겐 하나도 해당 없을 거예요. 물론 미투 해봐야 알겠지만. 왜 착실하게 정상적인 부부한테 이런 낯 두꺼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애들 볼까봐 겁나는 그런 말씀을 왜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까? 우리 부부는 정상이라는 그게 가식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부부는 의인이 되고 법 없이도 산 사람이 돼버려요. 법 없이도 산 사람이 되면 애굽에서 나왔던 의의가 날아가 버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유가 없고, 천국 갈 필요도 없어요. 죄인 아닌 데 왜 천국 가죠? 희한하죠. 천국은 죄인들만 가요. 지옥은 누가 갑니까? 죄인들만 가요.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죄인 밖에 없어요. 천국은 죄인은 죄인인데 용서받은 죄인이 가고, 지옥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가요. 의인은 없어요. 그런데 정상적인 부부 생활했다고 자기는 다른 죄는 몰라도 레위기 18장에선 자유롭다고 해당사항 없다고 성경책에서 빼버릴까요? 하나님이 빼고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바깥에 나갔다 다시 들어와라. 정상적인 부부라 생각하지 말고 정상적이 아닌 부부라고 생각했을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으로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에요. 주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이 간음과 관련되어 말씀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비록 약해도 소수라도 약속의 땅에 네피림 민족은 거대한 거인이라도 장대 같이 버티고 있더라도 주의 약속이니까 그들이 키가 크든 작든 관계없어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관계없어요.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 주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유 불문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대다수가 안 믿은 거예요. 왜 안 믿었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기대 걸고 자기의 의로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뭔가 지킬 만한 것을 지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 숭배와 관련돼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간음을 통해서 그걸 우상 숭배라 하는 거예요. 우리 부부는 간음한 적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상 숭배야. 그게 불신앙이야. 왜 그러냐 하면, 그 부부가 밖에 나갈 때도 옷 벗고 나갑니까? 아무리 부부라도 집 안에서도 뭐라도 하나 걸쳐요. 밖에 나갈 때도 걸친다고요. 진짜 그 부부가 태초에 하나님이 만족하신 1번, 아무것도 모르는 부부라면 밖에 장 보러 나갈 때도 골프 치러 나갈 때도 옷 벗고 나가야지요. 그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지 못하거든요. 하체를 가리고 있잖아요. 하체 가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어요. 인간들이 죄 짓고 정당화하니까 더 못 됐어. 그게 못 돼 처먹었어. 주께선 정상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정상으로 되돌릴 때는 반항하지 마세요. 우린 착합니다.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이모의 하체를 건드린 적 없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반항하고 거부하지 마세요. 아담에겐 얼마든지 그런 능력이 잠재돼있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끔찍하든 말든 우리 몸은 우리가 감당이 안 됩니다. 어디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 못해요. 보통 남자들이 그런 능력이 없어서 바람 못 피우지. 돈이 없어서. 미투도 유명해야 당하지 울산바닥에서 비실비실해서야 대상도 안 된다. 김흥국 정도 돼야지. 이윤택이란 사람이 16명이나 성폭행했는데 그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인 거예요. 대단한 위치에 있잖아요. 출세를 안 해봤으니 알 리가 있나. 그렇고 그런 서민들에겐 해당 사항도 없어요. 우리가 그 정도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의 잠재적 욕구는 과연 잠자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자기 아내보다 월등하게 아름답고 더 지적이고 고상하고 엘레강스 할 때에 그건 장담할 필요도 없어요.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애굽의 삶을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을 부르러 온 하나님을 하기 위해선 주님께서 왜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것부터 출발해야 되겠지요. 하체가 뭐냐? 하체는 창세기 3장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졌던 겁니다. 자아의 의미가 부여된 게 하체에요. 그러면 상체와 하체를 달리 생각해야 돼요. 성경에서 하체가 부끄러웠지 상체가 부끄러운 게 아니거든요. 왜 상체는 부끄럽지 않지? 같은 신체인데. 부끄러워서 눈썹 가려야 되겠다고 왜 안 합니까? 상체는 눈이 있고 하체는 눈이 없잖아요. 눈에서 시선이 나오는데 인간의 시선은 반드시 상대를 대상화로 봅니다. 대상화는 사물로 보는 거예요. 사물의 특징은 주고받는 정신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응시하고 일방적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군에 가기 전에 남자들이 총각 뗀다고 옛날에는 흔했거든요. 친구들이 술 먹이고 사창가에 데려갔다. 그 창기와 국제평화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합니까?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트럼프와 회담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지 앞에 아가씨와 침대에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돈 주고 나옵니까? 아니지요. 정신적 교류를 안 하지요. 하나의 사물이에요. 대상이라니까요. 포르노도 야동도 마찬가지에요. 하나의 사물로 보는 거예요. 사물로 볼 때 사람은 스톱이 돼요. 시선 스톱이 된다고요. 어떤 것을 집중해서 볼 때 스톱이 돼버리면 고정되면서 내가 쏘아 댄 의미를 회수하는 대상이 된다고. 나의 것이 돼요. 스톱이 되면서 순간적으로 자아가 굳어져요. 너는 내 거야. 마치 매직이 내 거야, 이 안경은 내 거야. 책은 내 거야. 내 거야, 하는 동시에 그쪽과 교류가 단절돼버려요.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눈과 눈이 마주치며 이야기해야 된다고. 하체를 사물로 보지 말고 하체의 주인공을 봐야 돼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아담대로, 하와는 하와대로 자아가 확정되었어요. 자아가 확정되었으니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저 대상자는 내 성욕을 채울 것인가, 나한테 생활비를 얼마 줄 것인가? 또는 당신과 결혼해서 아내로 들어가게 되면 아가씨 때 못한 유럽여행을 해줄 것인가?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 시집 잘 산다, 용돈 오백만원 준다고 자랑질할 수 있도록 남편이란 작자는 나한테 후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는 동시에 그 여자는 자아가 굳어져요. 남자와 시가 쪽은 하나의 대상으로 스톱이 된다고요. 사물이에요. 돈 내는 기계, 현금자동지급기처럼 돼버리죠. 자식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너 오늘 몇 등 했어? 수학점수 얼마야? 애는 점점 기계가 돼가요. 엄마한테 기계처럼 된다니까요. 인간이 자기의 하체를 숨겼다는 것은 상대방을 볼 때에 자기 위주로 보는 거예요. 자기를 감추고 자기 눈이 있는 것으로 상대를 쳐다보는 겁니다. 주고받는 교류가 없지요. 이걸 대구강의에서 중층결정이란 어려운 말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부터 일을 저질러놓고 뒤에 하나님이 투입됩니다. 그렇게 해야 인간으로 하여금 잘난 게 없음을 완전히 들춰낼 수 있어요. 그렇게 해야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가 살아요. 내가 건져주지 아니하면 너는 네 자신이 우상화 돼있고 독자적인 하나님처럼 살아간다. 내가 네 하나님 되는 것, 네 힘으론 스스로 깨부술 수 없어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그 우상 됨이 악마의 속성인 것을 완전히 박살내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번지르르한 외부, 점잖은 체하고 잘난 체하는 그것에 민망스러운 이야기를 집어넣어요. 평소에 이모의 하체, 백숙모의 하체 생각도 안 했는데 이 용어를 집어넣으면 그때부터 상대방에게 “이모님, 옷 좀 잘 입고 다니세요.” 지가 욕정을 품어놓고 책임을 이모한테 돌린다고. 남자가 자기 욕정을 감당을 못하니까 요새 아가씨들 치마가 짧아? 탓을 남에게 돌리느냐 이 말입니다. 치마라도 하나 사주고 그런 이야기해라. 색조화장이 어떻고,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것을 하느냐 하면 본인이 감당이 안 되니까 본인의 욕망을 본인이 덮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자기가 책임을 못 지니까 남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옷차림이 너무 도발적이라서 너만 보면 껄떡거려서 안 되겠다. 그러니까 점잖게 옷을 입어줘. 그러니까 상대방은 뭐냐 하면, 자기가 건전함과 고상함과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한 사물로 변해버려요. 눈에 띠는, 나는 널 응시해도 너는 날 응시하면 안 돼. 이런 식이에요. 남자, 여자를 평등하게 하자. 헌법정신에 그런 게 들어있을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억지인 줄 몰라요. 남자와 여자는 절대 평등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용납을 안 해요. 어떻게 여자와 남자가 평등합니까? 남자가 힘이 세도 세고. 힘이 세서 남자가 우월한 게 아니라 남자가 우월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남자는 우월해요. 남자는 여자보다 더 대단하고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녀평등이 아니에요. 성경도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남자를 사람 취급 안 해요. 남자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 같은 존재라고 들춰내기 위해서 여자를 약하게 만들었어요. 남자가 개라는 것, 짐승만도 못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자는 남자한테 치어 살도록 돼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하거든요.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사람 취급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메시아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사람 취급 안 하는 여자의 후손으로 와요. 마태복음에서 족보 바뀔 때 남자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여자의 개입으로 족보가 땅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여자 덕분에 살아요. 남자는 힘만 세지. 그래서 이름이 남자는 흙이고 여자는 생명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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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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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