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재정리 180319
20180319a 부산강의 : [시편]8(3편)-관계 재정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편 5절부터,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이 해석에서 제일 핵심은 ‘나’가 누구냐는 겁니다. 나가 현재 보고 있는 나일 수 있느냐?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는 없는 나에요. 언약이 없었으면 등장하지 않는 나.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나 주변에 비 언약이 눈에 띠죠. 언약이 아닌 걸 우상이라 합니다. 우상을 한 자로 하면 ‘신’에요.
인간들이 나라는 존재라 하는 순간 신을 요청하게 돼있습니다. 요청한다는 말이 중요해요. 요청한다는 말은 자신의 뿌리, 자기의 근원을 사람들은 놓칠 리가 없어요. 나는 어디서 나왔으며,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그 부모는 누가 만들었지?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 최초의 부모는 누구지? 신,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비 언약이에요.
신이라 하니까 비 언약 아닌 것 같지요? 비 언약 신이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과 연결이에요. 여기가 뭐가 없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나 여기 존재하는데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 여기에 무슨 언약이 필요합니까? 나 여기 있음에 누가 만들었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서 싸워야 될 가나안 족속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팔레스타인, 옛날 용어로는 블레셋.
블레셋은 뭐냐? 본인 있고 땅 있고 신 있고. 딱 이 세 가지 요소에요. 우리는 알라신 덕분에 이 땅에 산다. 그런데 알라는 신이에요. 특별한 내용이 없어요. 그냥 신이에요. 영어로는 god에요. god를 그 사람들 용어로 사용하니까 알라가 되는 것이지 알라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보편적 신이에요.
이것은 인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에도 땅이 있고 그 땅은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땅이 있고 조상 있고 그래서 내가 있고. 그 조상들은 우리한테 전달하기를 이 땅과 조상은 바로 신에서 나왔다. 그래서 힌두교도 신을 믿잖아요. 이건 태국도 마찬가지고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다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그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과거로 돌아보게 되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세계에 220개나 되는데 그중에 경제력이 40위까지 빼놓고 거지꼴이라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한국에 사니까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40위 밖으로 떨어지면 고통의, 저주의 세계에 자기가 태어난 걸 인식해요. 아프리카나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에는 물가가 6000프로나 올라갔지요. 먹을 게 없어서 동물원에서 사자가 먹어야 될 사료를 훔쳐 먹어서 사자는 빼빼 말랐고. 난민 신청이 10만 명이 넘고. 경제대국이 졸지에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고 아프리카는 줄곧 그래왔어요. 그런 나라에서 사는 처신의 방법은 마음을 낮추는 거죠. 하루 두 끼 먹는 게 어디냐. 그들이 마음 낮출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다 같이 못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프리카 나라에 공산주의가 잘 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잘 사는 사람 따로 있으면 속이 뒤틀려서 죽고 자살하겠지만 다 같이 못 사니까 다 같이 쓰레기 줍고 사니까 남아있는 것은 정, 이웃의 정으로 붙들고 사는 거예요. 마치 1950,6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이전에 사람들이 정 나누고 살았잖아요. 새마을운동이 그 정을 다 빼앗아갔지만. 이스라엘이 그 척박한 땅에서 그만큼 사는 것은 키부츠란 협동조합 때문에 그렇죠. 이걸 모델로 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일으켜요.
이스라엘이 다른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온 게 아니고 신이 불러 모았다는 거예요. 이 점이 어려운데 우린 여기서 태어났다가 아닙니다. 그럼 이 땅은 자기 땅이 돼요.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 땅인데 자기 백성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불러 모았다는 의식이 강해요. 그렇다면 이들이 사는 것은 생존이 아니고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따르는 언약을 따르는 사명감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죠. 그 뜨거운 사막에서 갈릴리 바다, 사해 물 끌어들여서 대규모 야자농장을 개척해서 농산물을 생산했고, 축산은 헐몬산에서 했고, 그 다음에 치안이 되면서 관광객들이 와서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조금 못하겠지만 얼추 살아요. 그렇게 사는데 픙경은 우리나라 80년대 정도밖에 안 돼요. 그렇지만 아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스러워요. 안정감이 없고 전부 총 들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버티는 것은 생존이 아니고 사명감이라는 겁니다. 이건 우리한테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있지요. 이것은 생존 때문이 아니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언약 때문에. 내 목숨보다 언약이 우선이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죽었잖아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였다면 오늘 본문 시편은 이스라엘의 교과서에요. 이 시편을 통해서 두 가지 해석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스라엘적 안목을 끄집어내야 돼요. 또 하나의 안목은 뭐냐 하면, 그들은 새 언약을 믿지 않습니다. 구약 언약에 의해서 시편을 어떻게 봤는지 하나, 두 번째는 신약, 새 언약, 이 살과 이 피로 내가 새로운 언약을 세우리니. 너의 모든 죄를 이 피로 씻어 준다는 복음적인 관점에서 시편 3편을 다시 해석해야 돼요. 두 가지 해석이 나와야 됩니다.
만약에 첫 번째 해석, 구약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한다면 기존 교회처럼 돼버려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덕분에 밥 먹고 살았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죽이는 사고방식이에요. 안목입니다. 하나님 믿었는데 해준 게 뭐 있나? 이거는 기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대들었던 그 사고방식이에요.
어제 오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세례요한을 주목해야 된다. 세례요한 생각하지 않고 신약이 나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으로 세례요한은 어떤 인간이었느냐? 여자에서 태어난 최고의 남자는 세례요한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율법적 인간이에요. 율법적 인간이지만 예수님 오셨을 때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옵니까, 라고 단절, 끊어짐ㄴ을 의미하고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내 세계에서는 당신은 메시아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납득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이 계시하기를 오실 메시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돼있어요. 너는 물로 세례주지만 이쪽은 성령으로 세례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 주는 구약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신약 사이에 단절이 있고 이 단절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를 경유한 자에게만 물세례가 아니고 성령으로 세례를 줘버립니다. 건너올 수가 없어요.
세례요한이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하나의 배역, 역할을 맡은 거니까 역할한 사람을 나무라면 안 돼요. 배역과 자기의 속성을 일치시키면 이걸 메소드 연기라 하는데 너무 이러면 곤란해요. 배역과 그 사람의 역할에 빠져버리면 영화인지 실제인지 모르고 성폭행하죠. 이것 안 돼요. 그 배역은 본인의 속성에다 주께서 사명으로 입혀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란 율법적 의식으론 뚫어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1번 해석을 꼭 알아야 돼요. 시편 3편에 나오는 구약적 이스라엘적 해석을 알아야 될 것은 바로 육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알아야 돼요. 육적인 해석이 어떤 문제가 있기에 천국 가는 영적인 해석으로 건너올 수 없었느냐? 육적 해석 안에 어떤 요소가 영적 해석으로 건너오게 못 했는지 알아야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한다면, 시편 3편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구냐 하는 거죠. 시편 읽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까 이야기한 우상, 쉽게 말해서 신, 신을 믿는 이 사람들은, 힌두교가 대표적인데 베가라는 노래 작품집이 있어요. 신의 계시죠. 신의 계시를 보고 믿으면 된다. 믿음이란 본인이 본인에게 설득당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적인 믿음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설득당하는 것. 억지에요. 본인에게 의심을 해야 되는데 의심 없이 그냥 믿어버려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한테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끌어 모아보자.
주부들 취미 가운데 이런 취미가 있어요. 티비 홈쇼핑 보고 무조건 사대는 겁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문 열어주는 거예요. 혼자 노는 재미론 괜찮은 재미에요. 계속 문 열어주고 택배 받고 돌아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