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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180316b 베드로전서1장 1-7절(선입견 파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80316b 베드로전서1장 1-7절(선입견 파괴)-이 근호 목사 그러면 그 피 뿌림이라는 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살고자 해요. 우리에게 죽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좋다고 하는 보약은 다 먹고, 어떤 것이 좋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것이 나를 살려내기를 학수고대하고 간절히 원합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뭐가 문제냐 하면 부활이라는 것에 해당사항이 안 돼요. 부활은 누구한테 해당이 되냐 하면은 죽었던 자에게만 해당이 되지, 죽지도 않는 자에게 부활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부활을 좋아한다는 자체가 이게 말이 안 돼요. 부활을 좋아할 경우는 자기가 희망이 없을 때나 부활이 좋지, 본인이 본인한테 희망을 계속 제공하고 있는데 무슨 부활이 좋아지겠어요. 그래서 3절에,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주어집니다. 부활하심에 합당한 능력이 제공됩니다. 그냥 능력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능력은, 현재 우리는 살고자 하는 것이 충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주의 말씀을 납득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이해 못해요. 문제는 성령이 오셔야만 되는데, 성령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주어지거든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았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모든 선입견이 제거되어지는 현상이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모든 선입견이 제거가 돼요. 선입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선행되는 인식을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 선행되는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나를 살리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 이런 것들이 누적이 되고 거기에 모아지고 종합되어서 이런 선입견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이나 태도가 나올 때는 어디서 나옵니까? 선입견에서 나오죠. 선입견에서. 의미 같은 것을 줄 때에.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이 선입견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죠. 근데 부활이 되어서 인간들에게 다시 찾아온다면, 인간들의 그 선입견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게 만든 선입견이고, 따라서 성도한테도 마찬가지고. 성도한테도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피 뿌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이 선입견을 갈아엎어버리죠. 갈아엎습니다. ‘아, 내가 세상이라는 이 모든 것에서, 내가 잘못된 바탕위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고 결정지었구나.’라는 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게 뒤집어지고, 뒤집어지고, 그게 파헤쳐지고 파헤쳐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본인이 점점 뭘 느끼는가 하면, 나는 무식한 자가 된다는 것을 느끼죠. 나는 무식하죠. 무식한만큼 빈자리가 늘어나겠죠. 사람이 좀 안다고 하면 공부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러면 딱딱해져요. 마지막 공부한 그 선입견으로 딱딱해져버려요. 예를 들면 지난 2012년도 7월 5일에 은혜 받았다. 이러면 2018년도에도 거기서 은혜 받은 것을 계속 우려먹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딱지가 생겨가지고 딱딱해지는 겁니다. 근데 진짜 성도 같으면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쭉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은혜 받았다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은혜의 전부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파헤쳐지겠죠. 완전히 걸레가 되도록 구멍 뚫려서 다 파헤쳐지게 되는 겁니다. 천이 있으면, 천에 구멍을 이렇게 뚫어버리면 나머지기, 남아있는 천이 있잖아요. 그리고 뚫리다가 뚫리다 다 뚫려버리면 이제는 뚫릴 구멍조차 남아있지 않죠. 완전히 걸레조각도 그런 걸레조각이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욥이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하리요. 그냥 내게 일어난 일은 주님이 주신 은혜고 선물이지, 제가 정신 차려서 행해서 얻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선입견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 4절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썩을 것이고, 더럽고, 쇠하여질 것이죠. 왜? 이 땅에서 통용되고 이 땅에서 용납되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선입견으로 이렇게 덮여져있습니다. 선입견으로. 산자락에 안개 덮이듯이. 자욱하게. 미세먼지가 서울 시내를 덮듯이. 선입견으로 전부 다 덮여있습니다. 썩어질 것, 더러워질 것, 쇠하여 질 것. 이것을 안 들키도록 선입견으로 덮여있는 이걸 가지고 윤리와 도덕이라고 합니다. 윤리와 도덕. 윤리와 도덕의 목적은 뭐냐 하면, 살아있는 나를 더 가치 있는 살아있는 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더 썩게 만들고, 쇠하여질 것을 더 쇠하게 만들고, 더러워질 것은 더 더럽게 하면서, 이거 붙들면서 살다가 나중에 수십 년 지나면 이 사람이 죽어요. 죽는 게 어떻게 됩니까? 쇠하여지고 썩죠. 썩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그 시체는 더럽죠. 처음부터 더러워질 것이었고 처음부터 쇠하여질 것이었고 처음부터 썩어질 것이었어요. 그 썩어질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선입견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뭐로 만들어지는가, 윤리와 도덕으로 제시가 되는 겁니다. 그 윤리와 도덕 뒤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기어이 잘난 인간으로 살아야 되겠다. 나는 뇌물을 받았지만 5억밖에 안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야기에요. 10억 안 받고 5억밖에 안 받았다. 내가 성폭행 한 것이 아니고 합의에 의해서 한 것이다. 16명 성폭행한 이윤택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합의에 의해서 그랬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그다지 막가는 인간이 아니다. 그다지 나는 인간 말종 정도는 아니다. 어느 정도 나는 윤리와 도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거거든요. 그리고 그 상대도 내가 이런 윤리와 도덕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나하고 상대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서로가 같은 윤리도덕에서 합의하에 좋은 관계를 가졌다. 이래 되는 거죠. 나는 죽어야 된다는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너무 질책하지 마옵소서. 그런 뜻이 돼요. 나를 너무 질책하지 마옵소서. 지금은 돌아갔지만, 우리 외손녀가 집에 있었잖아요. 집에 있을 때에, 물이나 우유를 주게 되면 뭐 하다가 좀 흘렸잖아요. 흘렸으면, 흘리고 남은 것은 간직하면 되는데, 조금만 흘렸어도 남은 것을 다 부어버려요. 조금 흘렸는데. 이걸 다 붓는 이유가 뭐냐 하면, 원인제공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아, 아이의 타고난 본능이죠. 다 흘리게 되면 애초에 이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죠. 없는 게 되면 흘렸다는 사실 조차도 이게 없는 게 되죠. 흘린다는 게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요. 흘리면 나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짓을 하는 겁니다. 나쁜 짓을 감추기 위해서 더 나쁜 짓을 해버리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처음 나쁜 짓 안 했던 그 시절의 나 자신을 견지하기 위해서, 그걸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윤리와 도덕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겁니다. 내가 비록 사람을 팼고 도적질은 했지만 우리 어머니는 사랑한다. 뭐, 이런 것 있잖아요. 교도소에 가서 엄마가 보고플 때~♬ 교회에서 교도소에 위문공연가가지고 단팥빵 한 개씩 주고, <어머니기도 못 잊어> 찬송 기타 치면서 불러주고, 이러면 눈물 줄줄 흘리죠. 비록 내가 사람은 죽였지만 나는 어머니는 사랑한다. 왜 그러는가 하면, 나는 윤리와 도덕을 견지해서 개차반 같은 인생이지만, 그나마 나는 죽기 싫다. 나는 기어이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아무리 살고 싶어도 결국 인간은 썩고 쇠하고 더러운 육신을,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육신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이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교리를 떠나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키스 할까요’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그 주인공 감우성의 개가 암에 걸려 돌아가셨어요. 드라마에서. 감우성이 키우는 개가 돌아가셨어요. 자기애인 김선아 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 급히 병원으로 뛰어갑니다. 그 개라는 어르신네는 지금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있고. 그 담당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데도 주인 앞이라고 점잖 빼고 있어요.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 안 하고 저렇게 참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 개는 연기에 충실하고 있어요. 죽을 때도 고상하게 죽고, 암에 걸려도 아주 점잖게 죽는 그 모습을 보고, 인간이 우리가 죽을 때도 저렇게 죽어야 아름답지 않느냐 하는데, 절대로 죽음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럽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꾸역꾸역 기어이 윤리와 도덕으로 덮습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덮어버리면, 여기에 뭐가 빠지는가 하면 왜 죽는가? 하는 이유가 빠졌어요. 인간이 왜 죽는가? 그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사항입니다. 근데 자기가 왜 죽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무장했고,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윤리도덕이라는 선입견과 너무나 대조가 되는, 대치가 되는 말씀을 날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 윤리와 도덕차원에서 비-거룩하고 경건치 못하다고, 미달이라고 죽여 버렸어요. 이게 연극 1막이에요. 연극 1막으로 끝나버리면 누가 승리했습니까? 누가 진리에요? 역시 인간은 살아남는 것, 온갖 살아남는 것이 진리고, 살아 있을 때까지는 살아야 된다는 이게 진리고,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모르겠다가 진리가 돼요.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가 진리에요. 지금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왜 죽는가 물어보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리가 무엇이냐를 찾고 있다고요.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진리를 찾아서 뭐하겠습니까? 백날 좋은 약을 개발해도 결국 죽는데. 불로장생을 하기 위한 약재를 찾아서 진시황제가 돌아다녔다는데, 차라리 그러한 무모함이 솔직함이죠. 그런 무모함이 솔직해요. 죽기 싫다. 그래서 아까 노량진에서 고시하는 사람들이 붙여놓아야 할 것이 아까는 피 뿌림이라고 했지만, 불사 같으면 죽기 싫다. 이런 것 붙여놓죠. 니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뭐 이런 것을 비슷하게 붙여놓겠죠. 썩어지고 더러운 것에서 뭐가 나왔다고 했습니까? 윤리도덕이 나오죠. 그러면 지금 우리 육체는 썩어가고 있고, 쇠하여져가고 있고 더럽혀져가고 있죠. 자연적으로 우리에게서 뭐가 나옵니까? 윤리와 도덕이 나오죠. 그러면 주님의 피 뿌림은 지금 남하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자기백성, 자기 성도와 윤리와 도덕으로 티격태격 싸우는 양상으로, 지금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뿌림의 능력이 작용하는 거예요. 이제 좀 전체 그림이 됩니까?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에게 피 뿌림을 주십니다. 근데 우리가 피 뿌림, 피 뿌림... 이라고 하면, 이건 정신병자라고 했죠.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피 뿌림이 찾아왔을 때는,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선입견을 그냥 완전히 구멍을 내는 거예요. 뻥뻥 뚫려요. 내가 유지했던 윤리도덕을 지킨다는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고, 아무 효험도 없고, 자기 교만하게 하는 것에나 필요하지, 주님의 영광, 내 구원, 복음전파, 전혀 그거에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 방식은 이미 베드로가 주님을 만날 때 경험했던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과 베드로의 마지막 헤어짐. 십자가 달리기 전에 마지막 헤어짐의 광경을 너무나 잘 알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죠. 그리고 난 뒤에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장에 보면,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베드로가 자기의 선입감,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선입감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제시하지 않아요. 제시하지 않고, 내 것을 철회해요. 갖고 있는 느낌을 철회하고 뭐로 대신합니까? 답변을?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뭐가 구멍 났어요? 더 이상 나를 가릴 윤리와 도덕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선입견 자체가 구멍이 숭숭 다 뚫려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찾아와서 나를 아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주님한테 부끄럽게 되면 될수록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겁니다. 주님한테 부끄러움을 받으면 오히려 당당하게 돼요. 제가 강남강의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성도는 자기가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로 다가서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자가 다 같이 죽은 자로 보이는 안목 하에서만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지만, 성도는 이미 미래의 사람이기 때문에, 미래에서 온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마주본다고 했죠. 명동이나 어떤 곳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오는데, 자기는 혼자서 마주쳐가는 거예요. 마주가면서 뭘 보느냐 하면 자기의 과거상을 다 보는 거예요. 제가 강남에서 그걸 기시감이라고 제목 달아서 올려놨잖아요. 다 바라본다 이 말이죠. 바라보게 되면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럽습니다. 여기는 김 썩어짐. 최 쇠하여짐. 박 더러움. 다 합쳐서 곧 시체가 될 사람들. 곧 시신, 시체가 될 사람들. 따라서 그들이 갖고 있는 선입감에 놀아날 필요가 없죠. 그들의 평가나 그들의 판단에 대해서 인정받고자, 또는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 보고 미투해가지고 저 사람이 5년 전에 이런 일을 했다고 하면, 성도는 어떤 태도로 임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더 될 건데? 그거밖에 안 돼요? 한두 명이 아닐 건데요? 와! 그거 참 세상 재밌네.” 그걸 재밌게 봐야 된다니까요.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자기의 윤리도덕적인 선입감을 가지고 내세우는 그것이,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윤리도덕적인 선입감이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이 있었던 거예요. 이미 피 뿌림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주장하는 그 윤리도덕의 잣대가 너희들을 지옥 보내는 그 프레스press압력기계, 악마의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의 평가를 들으면서 뭐 즐겨야죠. 우에 합니까? 즐기는 거죠. 경상도 말로 “~케라”에요. “~말하세요.” 이런 뜻이에요. 마이 케라. 고마 케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잖아요. 마이 케라고 해라. 많이 이야기해라. 더 더 더 이야기해봐. 그 윤리도덕 선입감, 나도 옛날에 그것가지고 복 받으려고 하다가, 나 피 뿌림 받았어. 그 중에 하나가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했는데, 사람은 언행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가 될 때, 그게 인격이 인격다운 것이고, 짐승하고 다른 점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그 점이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정답은 마이~ 케라~!에요. 나도 옛날에 그렇게 생각했지. 말과 행동이 같아야 되고, 자기 약속은 지켜야 되고, 나도 그렇게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썩어가고 있는 증거고, 그게 쇠하여져가는 증거고, 그게 더러워지는 증거였다는 거예요.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조치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미리 준비하신 영원한 기업을 잇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4절에 나오죠. 자, 이쯤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이 베드로전서는 희대의 왕 사기극입니다. 베드로는 사기꾼입니다. 전혀 사람의 선입감에 합치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사기꾼이든지 아니면 정말 진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그네 된 사람, 이 땅에 자기 거처가 없는 사람, 이 땅에 거처가 없는 사람은 죽은 자죠. 이 땅에 거처가 없는 사람한테는 베드로는 진실한 사도고, 그 외에 모든 사람에게는 베드로전서는 전부 다 사기극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전서는 타협이나 협상은 없습니다. 도 아니면 모, 모 아니면 도에요. 앞면 아니면 뒷면, 뒷면 아니면 앞면이에요. 일 아니면 이, 이 아니면 일. 그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베드로가 소개하는 이 나라에 인간의 행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윤리도덕을 포기를 해야 되는데, 인간은 이 윤리도덕을 포기를 할 수가 없어요. 왜? 그게 자신의 모든 취약점과 부끄러운 점, 수치스러운 점을 윤리도덕으로 가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썩어가는 인간들, 썩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추하게 살기 싫다!” 추하게 살기 싫다. 더럽게 살기 싫다. 나는 자랑거리가 될 만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게 구호입니다. 추하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추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에 무엇이 계속 투입이 되는 거죠? 윤리와 도덕. 윤리와 도덕으로 투입된 자의식이 바로 선입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피 뿌림이 작용하게 되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육의 사람이니까. 추한 것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 것을 싫어하죠. 그런데 피 뿌림이 오게 되면 어디를 빵구를 냅니까? 윤리, 도덕, 선입견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와해시킵니다. 와해시키면 우리는 와해시킨 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또 메워요. 또 새롭게 재편성하고. 남아있는 걸레조각을 가지고 재편성하죠. 밀가루 홍두깨로 죽 밉니다. 만두 한다고. 그렇게 만들어놓고 동그란 컵 같은 것으로 찍어내잖아요. 남은 자투리 버립니까? 다시 자투리 뭉쳐가지고 펴서 몇 장이라도 더 찍어내듯이. 우리의 할 일은 뭐냐 하면 내 선입감을 정리를 하는 것. 이쁘게 정렬을 하는 것. 그게 매일의 하루 일과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특히 옷가게 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늘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마네킹 옷 입히고 정렬하는 것이잖아요. 하고 난 뒤에 청소하고 가게 문 열잖아요. 인간들도 마찬가지에요. 여자는 특히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얼굴 정렬합니다. 균형 안 맞는 것 균형 맞추고, 어젯밤에 남편한테 터진 것은 색조화장으로 커버하고. 누구 만나게 되면 어디에 부딪쳤다고 변명거리까지 준비하고. 추하기 살기 싫은 거예요. 주께서 한 피 뿌림은 이렇습니다. “맞아도 괜찮다. 천당 간다.” 니가 그런 것으로 커버 안 해도 이미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선입감 자체가 빵구가 나야 된다는 겁니다. 빵구. 펑크가 나야 돼요. 선입감 자체가. 자꾸 그걸 다듬고 메우고 매끈하게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뻥뻥 구멍이 나면 날수록, 너덜너덜해지면 해질수록, 성령의 바람이 쑥쑥 들어오죠. 성령의 바람이. 그런 윤리도덕을 가지고 나를 사수하고 치장하지 않더라도 사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 삶이에요. 그게. 참, 사람의 할 일은 모든 매사에 손가락 놀리고 발가락 놀리고 뭘 보고 하는 모든 것은 이 선입감(견) 정렬에 있어요. 어떻게 가지런하게 정렬해가지고 하느냐. 그래서 하이힐 신은 아가씨가 길에서 돌부리에 넘어지게 되면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스타일 구긴 것이 더 아파요. 안 아픈 척하고 후딱 일어나지만, 나중에 피 줄줄 흐르고, 스타킹 줄 나가서 죽 찢어지고. 아이고, 이거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냐? 라고 하는데, 그거 죄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도로 포장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예요. 왜, 자기 죄하고 연관시키지 말아야 되냐 하면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난 것 자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기 때문에 구태여 정렬을 하나마나 이거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구멍이 안 난 채로 자꾸 정렬을 해버리면 자기가 다듬어놓은, 남들 보기에 나 이 정도라는 그 무게, 그 무게가 상당한 무게거든요. 요즘 미국에서 한국 철강제품 수입을 안 한다고 하는데, 그 철강제품 같은 무거운 선입감. 그걸 억지로 들고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고,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자초하는 일입니까? 선입감이 이렇게 깨지고 구멍이 나버리면 가벼워져요. 가벼워지면 모든 상황을 내가 흔쾌히 용납이 돼요. 감사가 되고. 이번 일도 감사합니다. 저번 일도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 선입감 깨라고 이렇게 일이 일어난 줄 알고 감사합니다. 그 구멍을 만드는 그 작업이 피 뿌림의 능력입니다. 그게 바로 7절입니다. 7절 한번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진도 너무 빨리 나간다. 이거 큰일 났네. “너희 믿음이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련인데 무슨 시련이냐, 믿음의 시련이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 거죠. 자기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죠. 자기를 믿는 것을 행함이라고 해요.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자기에 대한 포기거든요. 포기인데, 세상은 포기하지 말라고 연단이 와요. 불로써. “니 착하잖아? 니 거룩하고 경건하고, 신앙생활한지, 교회 다닌 지 한 50년 됐잖아? 이번 일은 니가 중보기도하면 해결이 돼.” 자꾸 우리로 하여금 이미 구멍 난 양말을 가지고 자꾸 끌어 모으게 만들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행함으로 어떤 효과적인 결과를 낳겠다는, 그런 무모한 시도를 또 시도하게 된다고요. 또 벌이게 돼요. 왜 그렇게 벌입니까? 추하게 살기 싫다. 나는 추하지 않게 살고 싶다가 계속해서 작동하게 만들도록 불같은 시험이 오는 거예요. “니 그냥 그렇게 죽으면 안 돼. 니 죽으면 정말 니 장례식 때 한 명도 안 온다. 니 친구 없다. 니 그러면 사는 의미가 없잖아. 보람 없이 니 허무하게 이렇게 죽을래?” 그냥 허무하게 죽으세요. 안 그래도 처음부터 허무해요. 요란 떨어도 허무해요. 요란 떨어도. 그 허무를 못 이겨서 죽는 죽음이 자살 아닙니까? 허무하면 허무한대로 살면 되잖아요. 이마에 받치면 받친 대로 살면 되는데, 허무한대로 살면 되는데, 이마 받쳤다고 자살하는 거예요. 추하기 싫은데 뭔가 있으니까 이게 추해보이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없는 요량하세요.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배추밭에 배추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 사람들은 돌멩이처럼 존재하죠. 그걸 적자존재라고 하는데, 그냥 존재자체뿐이에요. 가만히 있다가 썩어 넘어가는 겁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세례요한이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윤리도덕으로 자기를 휘휘 감고 있는 바리새인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니들이 구원을 받으면 이 돌멩이도 구원을 받겠다.” 왜냐하면 이 돌멩이는 휘휘 감은 게 없잖아요. 바리새인들은 뭐로 감아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윤리 도덕적 선입관으로 휘휘 감았어요.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고 살아야 된다. 이것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습니다.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아야 된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 부모들이 훈계조로 계속해서 심어준 그 정신세계입니다. “니는 명망 있는 이씨 집안의 사람이다. 니가 어디 가서 하는 행동여부에 따라서 우리 집안의 명예와 아버지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을 받느냐, 훼손이 되느냐에 있기 때문에, 우리 집안의 자식이라면 집안의 영광을 위해서 함부로 허투루 행동하지 마라.” 뭐, 그런 식으로 막 훈계를 하죠. 절대로 우리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게 더럽히는 거예요. 그게. 그게 뭐냐 하면 마귀의 시험이에요. 그게 믿지를 못하고, 베드로전서가 희대의 사기극이잖아요. 사기극은 믿으면 안 되잖아요. 사기극 제시하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뻔히 다 아시기 때문에. 얼마나 지 잘난 체하면서, 추하게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말이 세상은 윤리도덕이지 성경에서는 뭡니까? 온갖 교리와 경건으로 휘휘 감아있는 것. 그게 시험거리에요. 그게 바로 사탄의 시험이에요. 그게. 욕 안 얻어먹기 위해서. 욕 얻어먹으면 저주받은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선입감. 그러니까 선입감이 문제에요.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그 자체가 선입감이에요. 그 선입감에 구멍이 나야 된다니까요.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태어난 것 자체가 벌이에요. 이 땅에 산다는 것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빨리 제대하고 싶어 해요. “주여! 벌 그만 내리시고 후딱 저를 데려가주시옵소서.” 살아도 이 땅에 낙이 없습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현재지만 우리 후대에는 종말이 된다. 이래 생각하죠. 그게 엉터리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는 재림이 안 됐으니까 우리 후손이 종말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나중에 후손이 되면 그들이 종말이 아니고, 그들은 또 후손이 종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현재라고 보고. 우리 앞선 선배들이 우리보고 종말이라고 했던 과오를 한 것처럼.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세대는 아직은 망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선입감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이 세대에 주께서 지금 오시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말은 “빨리 죽여주옵소서.”하고 같은 말이거든요. 미세먼지 대신 유황불 확 내려가지고 끝장냅시다. 그러면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니도 망하는데?” “저도 망해도 좋습니다.”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 성전이 망해도 좋다고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을 포함해서 같이 망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망한다는 말은 성전 망하고, 성전이 망한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도 망한다는 거예요. 죽으시는 겁니다. 예수님 죽을 때 사실은 이 세상도 죽었다고 판정이 끝났어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 근거로 계속해서 근사하게 살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든 고민과 걱정이 어디서 오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 살고자 하는 데서 와요. 왜 자꾸 남한테 변명하고 남한테 핑계대고 잘난 척하고 구질구질한 뒷말이 왜 그렇게 동원되느냐 하면, 이러고서라도 더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도덕으로 자꾸 땜질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살고 싶어도 피 뿌림 자체가, 이미 우리는 주님의 죽음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피 뿌림 자체에. 세상에서는 우리는 죽은 자고, 그 죽은 자를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나그네라고 하죠. 우리는 나그네에요. 이 곳은 있을 곳이 없습니다.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데나 있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있을 곳에 대해서 너무 미련가지면 안 돼요. 아무데나 그냥 엉덩이 대고 살면 돼요. 어떤 사람이 100평짜리 아파트 주거든 그냥 사세요. 거부하지 말고. 그냥 사시고, 한 70평짜리 주거든 너무 섭섭해 하지 말고 그냥 사세요. 50평 같으면 성질나지만 그냥 참고 인내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그런 것들이 시련이거든요. 내가 잘나서 이만큼 큰집에 산다는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윤리도덕으로 이런 복을 받았다는, 교회에서 말하는 경건의 덕으로 이런 복을 받았다는, 자꾸 행함 쪽으로 계속 붙박이처럼 있으려고 하는 시험을 받는 거예요. 믿음이 아니고 행함 쪽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런 시험을 계속 받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구멍을 내죠.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입니다. 이게 시련이에요. 계속해서 원인결과를 연결되지 않게 만들어요. 연결되지 않게. 착한 일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고, 나쁜 짓 했는데 예상치도 않는 복을 받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두 시간 걸려서 파마를 했는데 남편이 파마 새로 하라고 하고. 성질나서 아무렇게나 해달라고 했는데, 니 머리 스타일 최고라고 이래 나오고. 우리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거예요. 왜? 예상을 빗나가야 예상했던 우리 자신을 안 믿기 때문에. 빗나가야 또 하나의 구멍이 뚫리기 때문에. ‘그래,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 나온다고 했던 이런 선입감. 주여! 또 엉터리로 판정 났네요.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성경 보게 되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무슨 좋은 일? 개코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일이 더 힘들게 되었어요. ‘주여! 선입감 또 깨지네요.’ 선입감 깨지면 선입감 또 만들고, 깨지면 또 만들고, 그 작업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그게 5절에 나와 있어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 이게 피 뿌림과 관련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보호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피 뿌림을 보호하는 거예요. 피 뿌려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보배입니다. 보배라는 말은 나중에 뒤에 나올 거예요.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자, 이걸 설명하는데도 좀 어렵죠. 근심을 사람들이 왜 합니까? 선입감이 바로 마중 나오는데, 이 선입감이 현실을 설명해주는 기준역할을 제대로 못해요. 기도했으면 기도응답이 되어야 하는데 안 돼요. 이게 당황스럽죠. 이 당황스러움이 뭐로 바뀝니까? 근심으로 바뀌는 거예요. ‘어? 내가 신앙생활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결과가 별로 안 좋네. 나 어떡하지?’ 근심하게 되죠. 근데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는다고 했는데, 시험이라는 것은 전제가 있어요. 시험Test, 또는 템테이션Temptation,유혹은 항상 땅에서 부는 바람입니다. 땅에는 공기로 덮여있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서 땅은 그 기후의 변화가 생기거든요. 멀리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고기압과 저기압에 의해서 기후의 변화가 생깁니다. 땅의 골격에 따라서 근육의 질이 그때그때마다 울퉁불퉁 새로 생기죠. 침 발라서 봉투 만들다 보면 손가락에 근육이 생기죠. 힘주어서 한 그 부위가 근육질이 발달하잖아요. 이 세상의 온갖 시험은 우리가 예측 못합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따라 달라요. 근데 그 모든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선입감의 정렬은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뭔가 정돈하는 것을 용납 안 해요. 왜? 정돈을 하게 되면 정돈 된 그것을, 또 하나의 그걸 의지하려고 해요. 우리가 의지할 게 없어야 믿음인데, 우리는 의지하려고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해요. 자식을 애지중지 키운 부모들은 그 자식에 대해서 굉장한 집착과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이야기를 해요. “내가 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니는 이 어미의 마음을 모르나? 이 호래자식아! 내가 먹을 것 안 먹고 숟가락에 담아서 니 줬는데, 니가 이래 나오면 돼?” “엄마! 고마 케라~ 마이 들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전에 우리 어머니가 젊었을 때 요리학원에 가서 솜씨 부린다고 짜장면을 해줬어요. 우리 어머니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어요~♬(GOD ‘어머니께’라는 노래). 짜장면이 좋다고 하셔서 식구대로 짜장면을 만들어줬어요. 그 면이나 맛이 요리학원에서 했기 때문에 중국집보다 더 맛이 좋았어요. 근데 지금 우리 어머니는 치매로 병원에 가계시거든요. 아까 저녁 먹을 때 제가 짜장면 먹었다고요. 그 짜장면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어머니가 짜장면을 해주셨던 것이 그렇게 고맙다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게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어머니가 치매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때 지나간 어머니의 수고가 짜장면을 통해서 다시 느껴졌습니다. 이러면 어머니로 인해 내가 불편한 점이 많았다는 선입감에 구멍이 생기는 거예요. 참 고마운 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다음에 짜장면을 먹을 때 그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어머니에 대한 고맙다는 선입감에 구멍이 나버려요. 그러니까 뭔가 하나 생겨버리면, 그걸 정당화해서 마치 내가 믿을만한 대상인처럼, 내가 그걸 착각해서, 피 뿌림이 아니고 그걸 믿게 되면, 나는 그 정도로 착하기 때문에 뒤에 더 살아야 한다가 나와요. 더 살아야 한다. 살아 마땅하다. 어머니 은혜를 아는 자이기 때문에 나는 죽으면 안 돼. 왜? 너무 귀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래 돼요. 그게 짜장면의 유혹이었습니다. 각양 유혹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죽었다는 피 뿌림을 믿기 보다는, 여전히 아직도 내가 건재할만한, 유지할만한 가치 있음 쪽으로 계속해서 사탄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겁니다.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피 뿌림의 능력이에요. 그게 무슨 능력? 보호의 능력이에요. 우리는 내가 보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호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걸 믿어야 하는데, 우리는 따로 구축하려고 해요. 내가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그 기준을 자꾸 따로 만들어요. 만들면, 그 만드는 방법도 주께서 이 땅의 속성을 위해서, 땅이 무슨 땅입니까? 템테이션, 유혹의 땅이에요. 유혹의 땅이기 때문에, 땅은 항상 우리를 유혹합니다. 유혹해서 뭐라고 하느냐, 나로 하여금 윤리와 도덕, 괜찮은 선입감을 건설하고, 그것을 재정렬하도록 계속 유혹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마지막 끝은, 어쩌나 저쩌나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가 있는 이상은, 우리한테는 무거운 철판이 되는 겁니다. 자, 철판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철판이 무거운 철판인데, 이 철판을 뭐라고 했습니까? 선입견, 윤리와 도덕이죠. 이거 뚫어야 돼요. 뚫어야 됩니다. 이거 안 뚫리고 받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제가 주저하지 말고 살라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냥 윤리도덕 따지지 말고 그냥 통과해야 돼요. 통과해야 이쪽 복음의 세계가 나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살겠다고 백날해도 철판에 이마만 부딪치고 혹만 나서 되돌아와요. 팅하고 되돌아옵니다. 자꾸 되돌아와요. ‘아니지. 아니지. 성경에서 절제하라고 했는데 절제해야지. 마지막 때일수록 믿음으로 신앙생활 잘 하라고 했는데,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죄로 인도한다는데 내가 인도받으면 안 되지.’ 자꾸 되돌아와요. 인도받으면 안 되지, 그 뒤에 남는 게 뭡니까? 그러니까 나는 더 근사하게 살아야 된다. 추하지 말고. 저 철판을 뚫어야 돼요. 윤리도덕 판을 뚫고 지나가야 된다고요. 뚫고 지나가면 저 윤리도덕 판이 얼마나 두꺼웠었는지.. ‘바보! 병신! 등신! 나 같은 바보도 없어. 답답하게 저기에 갇혀가지고.’ 내가 스스로 내 근사한 내 존재를 포기를 못한 거예요. 나쁘지만 양심은 지켰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래서 그것가지고 구원받나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양심과 최고의 윤리도덕을 주장한 줄을 여러분이 아시죠?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어느 계층보다도 악마와 가까이 있는, 근접한 존재입니다. 악마의 자식이에요. 너희 애비는 마귀니라.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철저에 철저를 기한 사람보고 이야기했어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동안 윤리도덕을 가지고 여러분들 어디에 써먹으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빙자하여 어디에 써먹으려고 했어요? “나 괜찮은 신자다.” 그거 자랑질 하려고 써먹었잖아요. 그러면 죽을 요량으로, “나 신자 아니야. 나 개판이야.”라는 것으로 윤리도덕 철판을 뚫어야죠. 보면 철판이지만, 뚫고 나가게 되면, 그게 뭐냐 하면 그냥 비행기 나는데 약하디 약한 솜사탕 같은 구름에 불과해요. 웰컴 투 마이 월드Welcome to my world~♬ 제가 대한항공 비행기 탔을 때 동영상에 깔아놓은 것인데, 지금은 빼라고 해서 다 빼버렸는데. 옛날에 대한항공 CM송이에요. 노래가 참 좋아요. 비행기 나를 때 새털 같은 구름이 있잖아요. 그 구름이 윤리와 도덕이었습니다. 그 위를 나른 거예요. “인간들이 저래서 지옥에 가는구나!” 왜, 남자들이 복음을 안 듣고, 여자들이 복음을 이야기해도 안 듣는 이유가 뭡니까? “이 정도로 근사한데, 여기서 복음까지 들으면 더 근사해지면 나 어떡해. 나 대충 근사할래.” 이것 때문에 복음을 안 들어요. 지금 갇혀있어요. 뚫지를 못했다니까. 근사한 폼으로 사는 보람을 찾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기껏 뭔가 쑤시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꼭 구차한 변명들이 나오죠. “성경은 모르지만 나도 신앙생활 좀 한 사람이라고.” 이런 게 막 나와요. 특히 아내가 복음 알고 남편한테 이야기를 하면, “하지마라. 이야기하지 마. 내가 니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는 줄 다 안다. 여자가 알아봐야 시근머리(지식의 앎 정도)같은 것밖에 더 알아? 남자는 그것 보다 더 알아. 나 니가 안 해도 내가 니보다 더 복음적이고, 나는 다 알아.” 바로 그게 선입견이에요. 그게 바로 빵구가 나야 돼요. 그게. 그게 되도 않는 남편 구실하려고 하는 겁니다. 밥 먹여주면 고마운 줄 모르고. 니가 한만큼 나도 했다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이게 바로 갇혀있는 것이 아닙니까? “니가 한만큼 나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윤리도덕으로, 우수한 단계는 아니더라도, 인간 말종은 아니잖아.” 이런 거거든요. 말종이 돼야 돼요. 인간 말종이. 그게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말종임에도 구원하신 이 사랑을 어떻게 찬양을 해야 되겠습니까? 더 살 가치도 없는 것을 살려주시고,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계속 살려주시니,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만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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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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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3 자유게시판 20180315b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하체 레위기 최고관리자 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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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0 자유게시판 176강-신 32장 44-52절(모세의 고백)20180318-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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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8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180316a 베드로전서1장 1-7절(선입견 파괴)-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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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 묻고답하기 430년 후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18-03-18
16,605 자유게시판 강남-요한복음 16장 16절(기시감)180313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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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2 강의 임플란트 180316 야고보서 최고관리자 18-03-17
16,601 강의 하체 1 180315 레위기 최고관리자 1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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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