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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우리교회 주일오전설교 빌립보서 3장 17-21절(십자가의 원수)180304-한 윤범 목사자유게시판빌립보서

우리교회 주일오전설교 빌립보서 3장 17-21절(십자가의 원수)180304-한 윤범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21절입니다. 신약성경 321쪽입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9절,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1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흔히 계시라고 하는데, 계시에는 보편성이 있죠.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일방적이고 또 그냥 밀어붙이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절대 인정을 안 하겠죠. 인정을 하던 하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진행이 됩니다. 말씀을 듣는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도 이게 일관되게 진행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근거 없이 사람들을 심판하고, 사람들을 막 때리고 죽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그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불행하고, 아,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러한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 말이 많죠. 사건의 원인이 뭐냐, 누구의 책임이냐, 책임소재를 따지고 책임을 지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것도 책임을 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들려지는 이 말씀은 그냥 어안이 벙벙하고 그냥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에요. “어? 말씀이 그래?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라고 이렇게 나오는 거죠. 또 개중에는 말씀을 좀 안다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크고 깊고 방대하기 때문에 다 소화를 시키지 못해요. 소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의 권위가 서지를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있죠. 그 욥이 굉장히 말이 많지 않습니까? 말 많은 욥이 그냥 뭐 블라블라~하죠. 거기에 보면 뭐 다 타당성이 있어요. 근거도 있고. 우리한테 성경에서 억울한 사람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가 대개 욥을 꼽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욥이, 그 말 많은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어떻게 합니까? 입을 가리죠. 입을 봉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을 한 거죠. 굴복을 당한 거예요. 성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아무 말 하지 말아야 돼요. 구약에 보면 또 하박국 선지자가 있어요. 이 하박국 선지자의 불만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는 거예요. 근데 이 하박국 선지자가 보기에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그걸 인정을 했어요. 수긍했습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옳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로 갈대아 사람을 쓰는 거예요. 도저히 여기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하나님! 우리가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은 맞는데, 왜 하필이면 갈대아 사람입니까? 우리보다 더 나쁜 놈들인데요?”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를 한 거예요. 우리도 동일한 오해를 항상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고 하면 그냥 아무소리 하지 않고 심판을 받으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 말이 많은 거예요. 불만이 있는 것이죠. 글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뭔가 어떤 원망을 펼쳐내고 있는 것이죠. 하박국 선지자는 나중에 어떻게 해요? 하박국은 짧죠. 3장밖에 안 되는데, 끄트머리에 가면 손을 들죠. 내가 아무것도 없어도,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라는 노래도 복음성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높은 자리에 딱 서보니까 다 보이는 거예요. “아, 내가 그냥 뻘짓을 했구나! 이거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다려보라고 했죠. “기다려봐라. 쟤들도 다 내가 처리할거니까 기다려봐라.”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불만을 품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죠? 어디서부터?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고 하잖아요(벧전4:17). 이게 베드로전서 4장에 나와 있는 부분인데, 그 말씀의 전후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그 구절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당하게 되는, 겪게 되는 고난을 이야기하는 대목 속에 함께 섞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뭘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인가 하면,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는 거예요. 근데 그 고난 받는 이유가 살인 때문에, 도적질 때문에, 또 거기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와요.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 때문에, 또 요즘처럼 그 미투 운동에 의해서 내 과거가 발각이 되는 그러한 고난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그러한 고난이 있다는 거죠. 근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게 되었을 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만일 그들이 고난을 받는다면,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은 어떤 심판을 받겠느냐? 뻔하지 않느냐? 뭐 이정도 비유도 소화 못 시키느냐? 라는, 뭐 이런 식이에요. 지금 우리가 고난 받는 상황이라면, 사도베드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상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아닌데 겪게 되면 하나님께서 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염려할 바가 아니라는 거죠. 놀랄 일도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복 받은 줄로 알라는, 뭐 이런 식으로 그 구절에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빌립보서를 읽었는데, 빌립보서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와요. 빌립보를 이야기한다면 바울이 옥에 갇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잖아요. 바울은 옥에 갇혀있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지고. 빌립보 1장에 보면 바울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고, 복음이 전파되면 아무 문제가 안 되고 상관이 없다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빌립보의 상황이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꼭 이런 것 같아요. 물건을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듯한 느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복음을 들으려고 교회에 왔는데, 뭐 고난이 쏟아지고 있는 거예요. 그 당회장 목사는 그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히는 상황이 닥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듣는 교인들이? 화가 나는 거죠. 그렇죠. 들어올 때 보다 나가는 속도가 더 배나 빠른 거예요. 배나 빠르게 도망을 치고 맙니다. 자, 우리가 고난을 받습니다. 특히 이 빌립보 교회에 이 고난 때문에 당하는 참담하고 참혹한 이 상황들이 환경들이 펼쳐지고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어요.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하죠. 우리가 분명히 기뻐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낮아지게 하시고, 십자가 지기까지 낮아지게 하시고, 그것으로 승리케 하시고, 그것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하늘의 시민권도 생기고, 하나님 나라가 먼저 생기겠죠. 하나님 나라에 백성을 채워야하니까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시민권자도 발생하고, 또 그 시민권을 갖고 누리는 자도 발생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들이 기뻐하는 이유가 된다고 들려주고 있고, 우리도 읽고, 우리로서도 이제 알게는 되었는데, 실제 그러냐는 겁니다. 실제로. 여러분! 정말 그러냐는 이야기에요? 말씀을 들었어요.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말씀을 보고 읽고 있습니다. 근데 이 말씀이 실제로 내게 그렇게 적용이 되고 있느냐 하는 거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30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절,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이제 싸움이 있는 거예요. 이 싸움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뭘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도 3장 17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했어요. 나를 본받으라고 해놓고,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으면, 잘 적용이 안 되면, 사도바울을 본받고 살아가는 그 주변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을 한번 눈여겨봐라, 그들을 한번 주목해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죄인인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와 고난이 동시에 같이 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이율배반이에요. 여러분, 이율배반이란 말을 다 아시죠? 어떤 사건이 있어요.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두 개의 주장이 맞서는 겁니다. 두 개의 주장이 서로 맞설 때 서로 모순이 되는 거예요. 은혜고 고난이에요. 서로 모순되는 거예요. 은혜 받으면 기쁨이 넘치고 감사만 넘쳐야 되는데, 고난이 따라오니까 감사가 나오다가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두 개의 주장이 모순되어 동등한 위치에서 팽팽하게 서로 맞서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율배반이잖아요. 하나님의 은혜와 고난이 함께 막 섞여서 우리에게 옵니다. 노래를 듣거나 연주하는 것을 보면 장조가 있고 단조가 있지 않습니까? 메이저가 있고 마이너가 있고 그런 거예요. 연주가 계속될 때 똑같은 높낮이의 음정으로 가면 재미가 없으니까, 막 변주를 하고 왔다 갔다 하잖아요. 높아지고 낮아지고, 업up다운down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할지라도 연주하는 자의 그 기조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챙겨놓고 주 안에, 또는 십자가 안에, 이런 말로 표현되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인도해나가실 때에 중간에 왔다 갔다 하고, 높낮이가 혹시 있을지라도 그 기조가 바뀌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이걸 오해하면 안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거예요. 그런 모순적인 상황을 견뎌내는 것이 믿음이에요. 주께서 말씀을 주셨고, 주께서 직접 그 말씀을 이루시는 그 과정을 겪도록 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상황이 이런 거예요. 오늘날 우리 상황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럼 고난도 있는 겁니다. 고난도 함께 동반해서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이 들려지는 이 표면뿐만 아니라 그 말씀 밑에 있는 이면도 살펴야 돼요.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있죠. 표면만이 아니라 그 이면도 있는, 언더라인underline도 있는 거예요. 거기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을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감춰진 하나님이야기도 있잖아요. 감춰진 하나님의 말씀도 있는 거예요. 은혜와 고난이 섞여져서 막 들어왔을 때는, 우리는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율배반적인 것도 있지마는, 완전히 하나님의 그 체계적인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에 혼란도 섞여져 있는 거예요. 체계적인 혼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CCTV에 찍혔잖아요. 보니까,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들을 패는 장면이 있었어요. 머리끄덩이 잡아당기고 꼬집고 하는데, 이유가 뭡니까? 말을 안 듣는다는 거잖아요. 교사의 말을. 그리고 식사시간에 밥 흘린다고 때리고 심지어는 발로 차고 그러지 않습니까? 아이들의 혼란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일본에 어떤 주부가 있는데 쌍둥이를 낳았어요. 남자쌍둥이 형제를. 그런데 딸이 너무 갖고 싶어가지고 임신을 해서 출산을 했는데, 딸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또 아들이 나온 겁니다. 아들만 세쌍둥이가 나온 거예요. 도합 다섯입니다. 7살, 4살짜리 남자아이들이 노는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난장판, 난리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겠죠. 근데 그 주부가 바라보는 눈길이 어떤 눈길이겠어요? 어린이집 교사와 같은 눈길이겠습니까? 저것들을 죽여, 살려, 뭐 가서 패야 되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렇죠. 근데 흐뭇한 미소를 띠면서 걸레를 들고 먹을 것을 들고 쫓아다니면서 먹이고 씻기고 빨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아주 즐거운 듯이. 사람들이 물어봤어요. 도대체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뭐라고 답변했을까요? 체계적인 혼란이라고 이렇게 해버린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거예요. 애들이 자라는 그 과정 속에서는. 뭐 아이들의 발달과정 속에는 몇 세에는 뭐가 있고, 어떤 일이 있고,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하다는 거예요. 근데 유아교육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어린이집 교사는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근데 이 아기 엄마는, 뭐 짜증이 나겠죠. 뒤를 보면 뭔가 있겠죠. 그러나 그것을 다 받아들이는 겁니다. 도대체 이 차이가 뭡니까? 도대체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거예요? 너희에게 불같은 시험이 닥칠 때에 이상히 여기지 말라(벧전4:12).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놀라지 말라. 베드로 사도가 한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를 믿는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전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막 이야기해서. 우리는 혼란, 머리가 뒤죽박죽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는데 하필이면 왜 이런 일이!” 그거는 전혀 쓸데없는 말입니다. 전혀.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일들이 벌어지게 되어 있어요. 문제적인 상황에 빠져보세요. 주님이 생각이 나는지. 주님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기조가 변하지 않습니다. 체계적으로 끌고 가시는데 혼란에 빠져서 움직이는 것은 우리예요. 나예요. 그게 죄인의 특징이에요. 그게. 그러면서 뭐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고 있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 차린다고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정신 바짝 나가지고 자기 검열에 들어가죠. ‘너 예수 믿는 거 맞아? 그따위로 예수 믿을래?’라고 하면서 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이불 킥하고 그러죠. 저도 이 설교 끝나고 서울에 집에 가면 아마 이불 뒤집어쓰고 이불 킥할지 모릅니다. ‘아, 설교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라고 하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할 건 해야죠. 우리의 소원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천국에 가고 싶은 거예요.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고 싶은 거죠. 그리고 또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십자가의 원수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거죠. 여러분, 십자가 원수는 원하시지 않잖아요? 십자가 원수는. 십자가 증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선택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의 선택은 항상 가짜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옳은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하고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본받지 마! 이거에요. 그러니까 나를 본받을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본받을래? 라고, 이렇게 선택의 형식으로 던져도 우리는 선택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우리의 믿음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고, 어떤 선택도 거기서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각각 어디에 속해 있어요. 어떤 단체에 속해 있습니다. 속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배운 대로, 익힌 대로, 그 패턴대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딴 거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소속된 그곳의 논리에 따라서, 그 진영의 논리에 아주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조사한 적이 있어요. 결과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보니까, 무교성향, 무교, 종교가 없다는 뜻의 그 무교가 아니고 무당 쪽이에요. 무교성향이 50%이에요. 유교성향이 30%입니다. 잘 짚은 거죠.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것이 20%입니다. 자,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라고 하는 이 말씀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20퍼센트를 가지고 교회에 온 거예요. 그 20퍼센트만 가지고 성경말씀 듣고, 강의 듣고, 예수 믿으면 구원해준다고 하니까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 그것으로 자기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데, 너무 많이 결여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 밑에 숨겨진 80퍼센트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해봐야 찌르면 뭐가 나옵니까? 무당이 나오는 거예요. 찌르면 예의범절, 삼강오륜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삼강오륜에 합치가 된다. 예의를 갖추어야 된다. 부모를 공경해야 된다.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 뭐 이런 식으로 그냥 구구절절이 꿰는 이유가 다 근거가 있습니다. 그냥 막 나오는 것들이 아니에요. 이것을 좀 정리하면 지배구조와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주체라고 합니다. 지배구조와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바로 그 주체가, 지배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지배 권력을 전복시킬 수 있는 그러한 힘이 그에게서 나올 수가 있느냐 하는 거죠.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말씀을 드리면 십자가의 원수가 바뀌어져서 십자가의 증인이 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밑에서 올라오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밀면 밀리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예요. 왜? 아무것도 선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몸에는 이미 관성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 관성대로 그냥 흘러가고 관성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주님이 쓰시는 방법은 따로 있잖아요. 그 넘기시는 방법. 십자가 원수에서 십자가 증인,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으로 그 넘기시는 방법이 따로 있잖아요. 어떻게 합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잖아요(마12:29, 막3:27). 원래 그를 쥐고 있던 집주인을 결박시키고 어떻게 해요? 세간을 늑탈한다고 하잖아요. 뺏어간다고 하잖아요. 주님이 옮기시는 거잖아요. 여러분 몸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 몸으로는 절대 넘겨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죄가 왕 노릇 한다고요. 죄가 죽음을 가지고, 사망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우리를 다스리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사망이라는 거예요. 그걸 수단으로 우리를 찍어 누른다는 거예요. 꼼짝 못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이 지배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물론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그 뒤편의 따라오는 구조 안에서 보면은 우리에게 뭔가 희망적이고, 아,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는 부분이 있어요. 로마서 5장 21절이에요. 저는 자꾸 로마서 5장 29절이라고 해요. 29절은 없어요. 21절이 마지막인데,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지금 우리에게 뭘 하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 지배한, 그 지배하고 있는 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 분명히 나오는 말씀대로 보면은, 뭐 영생,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 이런 것들이 우리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들이에요. 우리가 그 낱말, 용어,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나 스스로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말씀들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이룰 주가 따로 있다는 거죠. 따로 있는 거예요. 십자가 원수는 어떻게 사나, 십자가 원수가 사는 패턴이 19절에 나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은 그들이 지배당한 그 모습 그대로 땅의 일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은 그렇게 살다가 멸망하고 만답니다. 십자가 원수가 하는 일은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한 십자가 원수들이 꿰는, 그 교활하고 아주 정교한 말들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미혹되지 말라. 그들을 만나거든 어떻게 하라? 떠나라. 말도 섞지 마세요. 섞어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증인, 주의 증인의 패턴은 뭘까요? 20절에 시민권이 나오는 그 부분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말을 했을 때에, 이 기다린다는 말을 여러분이 아주 눈여겨보셔야 돼요. 자,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확인이 됐는데, 그럼 도대체 왜 기다리느냐 하는 겁니다. 왜? 왜 기다리느냐 하면은, 십자가의 원수 된 우리를 십자가의 증인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을 하시는, 우리가 할 수 없는데 그것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기다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다리는 것은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자만이 기다릴 수 있는 거예요. 제가 방금 전에 우리도 십자가의 원수로 끼어 넣었어요. 우리도 십자가의 원수에요. 원수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당연히 원수잖아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를 하다보면 자꾸 길어져요. 왜 길어지느냐 하면 설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실은 설교가 설명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데, 여러분이 걱정이 돼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뒤에서 저의 목덜미를 당기고 있으면서 이건 이야기해야 된다고 자꾸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원수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아담의 후손이잖아요. 아담이 하는 일이 뭡니까? 이건 완전히 말썽꾸러기잖아요. 트러블메이커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십자가의 원수죠. 그리고 모든 문제의 뒤치다꺼리는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고. 이걸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우리를 지배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다는 소리죠.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맞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예수 믿고 나 십자가의 원수야,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잘 모르는 거죠. 우리는 그냥 죄의 자리를 잘 지켜줘야 하는 겁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다 보면 특히 장로교, 개혁주의 계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쪽의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 항상 걸리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에요.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부분이에요. 주님께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자기를 의인 만들었다는 겁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게 맞습니다. 뭐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의인이라고 만드셨고, 주님이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죄인의 자리를 놓치면 안 돼요. 그들은 거기서 넘어가지를 못하니까 맨날 싸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얼마나 그 지배구조와 그 지배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아주 콘크리트 친 것처럼 막혀있는지를 볼 수가 있죠. 죄인에서 의인되는 그 결과만 따먹는 거예요. 과정은 전혀 무시하고. 여러분, 십자가를 보실 때에,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목적이라면 전혀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아,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셔서 나를 구원하셨네. 아멘. 감사합니다. 끝.”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 되게 하시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거기에 딸려오는, 부수적으로 죄인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 떨어진 겁니다. 거기 있는 겁니다. 포함이 된 거예요. 그걸 모르고 자기가 의인이 됐다고 떠들고 다니면 뭐하자는 겁니까? 나머지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에베소서 2장의 뒷부분을 참고해주시고 이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12절에서 14절까지의 몇 구절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 말씀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치욕과 고통을 당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욕과 고통을 받고 가셨다면, 바로 예수 믿는 자, 그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그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가라하시면 가는 거예요. 오라하시면 오는 거예요. 밀면 밀리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근데 사실 우리를 밀어붙이실 때에 살살 곱게 미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그냥 요란스럽죠. 기어이 밑바닥을 보이게 하는 거예요. “죄인 맞잖아?”라고 계속 추궁하시는 거예요.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죽도록 방치하신다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살 길이 없는 것 같이 막막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3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없으므로)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자,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잖아요. 십자가 언약의 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해서 재림신학을 거론하고, 그런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가 섰으면, 십자가가 딱 들어 올리면 모든 게 다 딸려옵니다. 거기에. 성경전체가 다 딸려오고 있어요. 그래서 미진한, 남아있는 어떤 것이, 해결 안 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단지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우리만 모를 뿐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모르는 것도 믿어야 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안 생기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거고요. 기다릴 것이 남아있다고 해서 그러면 안 되고, 성도의 기다림이 그런 기다림이 아니고, 역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을 기다리는 건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 그것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 고정된 시간을 자르고 들어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게 되지 않으면 성경을 백날 봐도 헷갈리고 헤매고 헤맵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갈3:1)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안 보이지? 어라! 안 보이네. 왜 안 보이지?” 뭐 이러고 있는 거예요. 꼭 약 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어쨌든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에, 보인다고 말을 못하는 그 마음이,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안 보이면 할 수 없는 거죠. 안 보이면 어쩔 수 없어요. 보여주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 여기 대한민국에 있는 대한민국백성인데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주님, 우리에게는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복창해야 되잖아요. “대한민국은 내 나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복창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우리는 이 대한민국의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 떠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기꺼이,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기다린다는 거예요. 주님 계신 곳으로. 근데 우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영원한 도성 하나 차려보려고, 아파트 한 채 마련하려고 전전긍긍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는데, 우리는 가진 것 자랑하려고 했잖아요. 그거 예수 믿는 거 맞아요? 예수 믿고 나 잘났다고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그저. 제가 지금 욕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고 있어요. 연명하고 있는 거잖아요. 제가 발음 정확하게 했습니다. 연명. 연명하고자.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다고요? 영문밖에 계십니다. 근데 히브리서 13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도 우리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주님이 지금 영문 밖에 있어요. 이 세상이 아니고 다른 밖에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 따라서 그리로 나아가자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이야기에요. 나아가라! 라는 그러한 명령이 포함이 되어 있어요. 권유고, 명령이고, 청이고,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로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주님이 뻔히 아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아가라, 가라고 권유하고 명령하는 식으로 말씀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능력 때문이죠. 주님이 그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는 거잖아요. “너희들은 할 수 없어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너희들에게 나아가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죄인들의 답변은, “저는 무능력해서, 제 능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저는 십자가 원수기 때문에, 십자가 증인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럼 주님께서 “그래? 내가 넘겨줄게.”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본인이 직접 하시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하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만들고, 그래서 거기에 소속된 백성들을 만들고, 거기에 시민권을 부여하고, 결국 그 말은 혜택을 받는 누군가가 생긴다는 거죠. 주님이 일을 다 해놓으시니까 어떤 혜택을 받는, 그것을 취하는 자가 생긴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돼요. 가만히 있으면 해당하는 자에게 통보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 일이나 하면 되죠. 십자가마을에 아주 유명한 말, 유행어, 그저 열심히 막살아라! 통보가 왔는데 못 알아봤다? 그건 할 수 없어요. 그건 어떻게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시다가 갈 때 되면 가야 돼요. 근데 여러분, 천국 못 간다고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자기일 열심히 하다가 지옥 가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어요?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이상한 거예요. 지옥 가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사도바울의 출신이 유대교출신이에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3:5-6)라는 그런 말씀이 빌립보서 3장에 쭉 나옵니다. 그런데 유대교 바탕에서 자란 그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여기에 상세하게 밝히고 있어요. 뭐 읽어도 못 알아들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간에 본인이 열심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바탕이라는 것은 겉으로 표현되는, 생각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의 출발점이 그 바탕이잖아요. 조금 길긴 한데 제가 한 번 볼게요. 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 로마서 8장 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미 우리에게 바탕이 깔린 대로, 마인드, 생각 뭐 이런 패턴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신뢰할만한 그 육체를 가진 사도바울이 어떻게 십자가 증인, 성도가 되었는가, 그는 뭔가 잡았다고, 이루었다고 할 만한 그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고. 너무나 힘들다고. 지금도 고난가운데 있다고. 이런 고백을 해댑니다. 저는 바울을 보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바울이 생각하는 인식론, 그 인식론의 바탕 위에 바로 죽음이 깔려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사건에 바울이 휘말려 든 거죠. 우리가 뭘 인식한다는 것은 뭐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잖아요. 뭘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근데 그 알게 된 그것이 실제로 보여야 돼요. 실제로 믿어지느냐 하는 거죠. 몸 따로, 생각 따로, 그 마인드가 따로 놀면은 그건 인식이 안 된 거잖아요. 바울이 아무리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라고 그렇게 해봐야, 그러한 인식,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이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일 수가 없어요. 복음은 외우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여러분, 복음을 외워서 여러분이 복음, 복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은 절대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냥 놔두세요. 애쓰고 억지를 부리고 수고하면 괜히 병납니다. 그저 알고만 있으십시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근데 십자가 사건에, 죽음의 사건에 휘말려들면, 아니 말려들지 않고도 안다고 한다면 그냥 아는 거예요. 그냥 아는 것뿐이에요. 그거는 믿음이 아니죠. 설교나 강의, 여기 본 교회 목사님께서도 전국적으로 다니시면서 설교나 강의를 하시는데, 설교나 강의를 자주 듣다보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분별지가 생기는 겁니다. 분별지. 아, 이거는 맞고 이건 틀리다. 이건 복음이고 이건 복음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것들이 생겨요. 그러나 믿음은 주님의 일입니다. 그걸 믿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인식이 시작된다는 첫 증표는 죽기를 소망하는 거예요. “지금의 이 삶은 아무리 돌아봐도 덧없어 보이고, 다른 세계를 들여다봐야 내게는 도달불가능해보입니다.” 이게 프란스 카프카가 한 이야기에요. 카프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마는, 정말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 불가능한 것을 그 짧은 말속에서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들이 뭘 안다고 했을 때에, 그것이 믿음으로 바꾸어지고,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여러분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살아나겠어요? 살 수가 없어요. 그저 죽어 마땅하다고, 죽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정말로 이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본 본문 빌립보서에서 하늘의 시민권을 이야기할 때, 빌립보서는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는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시민권자는 뭐 이렇다, 뭐 이렇게 산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빌립보 지역이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식민지였잖아요. 근데 그 빌립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어요. 로마시민이에요. 당시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당시에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들에게 다른 나라 시민권을 권하면 그들이 그것의 필요성과 그것을 생각할까요? ‘아, 다른 나라 시민권을 가져야 되겠다.’라고. 당대 최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로마시민권자인데? 전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땅의 나라에서 하늘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권유를 해도 듣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뭐, 들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들어봐야 뭐합니까? 이 시민권을 획득하는 사건은 바로 이 십자가사건에 말려들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어요. 여러분, 근데 이 땅에서 제일 좋은 시민권이 어느 나라 시민권이에요? 미국요? 예, 집사님 미국 나왔습니다. 또 어디 없습니까? 대개 미국이잖아요. 따기가 어렵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방법이 있잖아요. 돈이 많으면 됩니다. 제가 거기에 대한 상식이 없지만, 어쨌든 내가 백만불을 투자하겠다고 한다거나, 돈이 많으면 돼요. 아니면 특이한, 특출한 능력이나 재능이 있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굉장히 욕심이 많은 나라거든요. 세계 최고는 다 자기나라가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미국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러한 재능이 있으면 돈을 투자해서라도 다 데리고 옵니다. 시민권부여합니다. 또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겠죠. 그런데 하늘나라의 시민권은 어떻게 땁니까? 방금 이야기한 그런 방법은 안 통하잖아요. 여러분, 꿈도 꾸지 마십시오. 절대 안 됩니다. 성경을 여러분이 보실 때 “어떻게?”라는 것을 찾으시면 그건 백퍼센트 실패에요. 성경에는 “어떻게?”가 없어요. 어떻게, 라고 찾는 그 방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결과들을 모아놓고, 이 결과물을 내가 했다는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라는 것을 찾으면 안 되고, ‘누가 그렇게 하셨는지’, ‘누구?’를 찾으셔야 돼요. 사도바울이 주님을 찾듯이. “주여 누구십니까?”하듯이. 제가 영화 한 편을 받는데, <올 더 머니 All the Money>라는 영화를 봤어요. 2월에. 세계 최고의 갑부로 꼽히는 석유재벌 존 폴 게티의 손자 '폴 게티 3세'(16살)가 이탈리아 마피아에게 납치가 된 후에 협상을 벌이는 그 과정의 영화였어요. 근데 거기서 폴 케티가 책을 한 권 써요. 책을 한 권 써서 출간을 하는데, 편집장에게 넘기면서 제목을 ‘부자로 사는 법’이라는 것으로 해서 출간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편집장이 쭉 보더니 이건 안 되고 ‘부자가 되는 법’으로 고칩시다, 라고 한 거예요. 자, ‘부자로 사는 법’과 ‘부자가 되는 법’, 이 차이가 뭡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세요? 어떤 분이 부자로 사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일단 정답이라고 하고요. 부자가 되는 법이 더 맘에 들지 않으세요? 아닌가요? 믿음이 다 좋으셔가지고..., 서점에 가면 요즘에는 장르별로 아주 화려하지만, 요란한 제목들도 아주 많아요. 저도 어느 날에 서점에 가서 봤는데, 눈에 확 띄는 제목이 있었어요.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가 되는 비법’ 아주 제목이 확 들어왔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데, 사지는 않았습니다. 한참동안 들여다봤습니다. 거기서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영화 한 편 택하셔서 백번만 보면 된답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그 욕망을 꿰뚫어본 그 편집자가 제목을 ‘부자가 되는 법’으로 고쳐서 출간하기로 한 거예요. 왜 그렇게 고쳤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부자가 되면 부자로 사는 거 아냐? 또는 부자가 되어서 부자 항상 하면 되지. 부자가 뭐 별 거 있어? 부자로 사는 법을 따로 배워야 돼?’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전혀 부자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가본 적이 없으니까, 그 세계가 어떻게 노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예측하고 예단하고 자기가 추측한대로 그냥 내뱉을 뿐이지, 부자가 사는 동네는 모르는 거죠. 문제는 뭡니까?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이 문제지, 부자로 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자가 되는 법이라는 이런 식의 책들이 더 많이 팔리는 것 같아요. 그러나 진짜 부자는 노는 물이 다릅니다. 여러분,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완전히 다른 동네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는 상상도 못해요. 그 부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까 말씀 나온 대로 미국 시민권이 최고라고 하지만 그래봤자 땅의 것이잖아요. 그게 땅의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늘의 시민권이 상상이 돼요? 전쟁으로 비유하면 어떻습니까? 어느 쪽이 전쟁 중이에요? 부자가 되는 법 쪽이 전쟁 중이잖아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되고 전쟁을 해야 되잖아요. 내가 어디 부자 되는 방법이 없나 하면서, 그 방법을 찾아서 한껏 한탕하기 위해서 두리번거리고 눈이 시뻘개가지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세계 최대의 노동력시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법 개정을 통해서 일주일에 최대 52시간만 하면 돼요. 이렇게 노동하는 이유가 뭐예요? 부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여전히 전쟁이에요. 거기에 쉴 날이 없어요. 근데 부자로 사는 법은, 부자로 사는 쪽은 이미 전쟁이 끝나버렸어요. 끝난 전쟁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부자라면 그저 전쟁이 아닌 평안가운데, 이미 사신대로 그저 누리고 사십시오. 성도에게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기준이 다르면 삶도 다르고 평가도 다를 수밖에 없죠. 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체계적인 혼란가운데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그냥 복음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다르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해요. “고난당한다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이미 고난당해서 죽으셨거든. 끝.” 이렇게 복음 선포하고 끝내버립니다.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죠. 왕 되신, 주되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상,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더 이상 다른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주님이 그 길을 온전히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자기 아들을 보내시면서 그 절차를 다 밟아가셨고 완벽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가 모든 절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십자가의 원수들은 예수님이 주되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놀랄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다리는 소중한 순간이 오면 그냥 누리십시오. 누리고 감사하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합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해서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죽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고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길에 저희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저희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시고 저희를 인도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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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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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