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6장 13절(죄 꽃다발)180220a-이 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16장 13절(죄 꽃다발)180220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하십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상당히 말 자체가 난해합니다. 이 세상은 태어나는 것이지 오는게 아니예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있는 거지요.
오기는 무엇을 와? 이 세상에서 아빠 엄마 있고 자식 태어나고 그래야 이 세상에 ‘있음, 있음’이 형성 되는데 이 세상 바깥에서 누가 온다고요? 외계인도 아니고. 온다고 할 때 그 다음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오는가? 누굴 통해서 오는가?
오히려 온다고 이야기 하심으로서 이야기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더 난해해져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온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의도적인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8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는데
이 내용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를 새롭게 쉽게 말해서 새롭게 ‘생산’한다고 보시면 되요. 생산. 이 땅에 없는 죄, 없는 의, 없는 심판을 생산하는 거예요. 생산이라는 말은 원래 그런 개념은 없는데 성령이 오셔서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의를 만들어내고 죄를 만들어 내고 심판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재료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가 재료가 되느냐 하면 여기 심판에 대해서는 여기에 보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세상 임금이잖아요.
이 세상 임금이 있어야 될 이유는, 세상 임금을 통해서 뭐가 생산되느냐 하면은 심판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주관적으로 활동을 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인간들이 예상하지 아니한 것, 인간들이 생각도 못한 것을 만들어 냈는데 그게 뭐냐? 의를 만들어 내고, 죄를 만들어 내고, 심판을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보고 믿으라는게 아니예요. 성령께서 알아서 만드는데 우리가 믿고 자시고가 성령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를 못해요. 본인이 본인 일을 하겠다는데 우리가 뭐 협조해 드릴까요? 뭐 보태드릴까요?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우리끼리 살면되고 성령은 성령끼리 성령의 일 하면 되요. 신앙 굉장히 간단하지요? 나는 내 인생 살면 되고 주님은 주님 일하면 된다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어디에 편입되느냐 하면, 죄 만들고 심판 만드는데 우리가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고 싶은대로 우리가 막 살도록 내버려 두는데 인간들이 막 살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의도적이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하는 것을 통해 죄 만들어 지고 심판 만들어 지고.
그러면 의는 어디서 만들어 지는가? 의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 지는게 아니고 의에 대해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의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는 이 땅에서 의가 나오는 것은 그것은 너희들이 손 댈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에 있다가 아버지께로 가면 거기서 이제 줄줄 흘리는게 의가 흘려지는 거예요.
뭔가 예수님이 위에 올라가는데 땅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의가 떨어진 것이다 이 말이죠. ‘의’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생산할 수 없고, 내가 만들 수가 없고, 주께서 아버지께로 가면서 생겨난 건데, 이것은 마치 만나를 주워 먹는 식으로 그냥 의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신앙생활 잘하세요” 할 이유가 없어요. “의롭게 사세요” 말 할 필요도 없고 “죄짓지 마세요” 라는 말도 할 필요도 없어요. 죄는 그들이 만드는게 아니예요. 인간이 없으면 죄가 없다. 이 말은 맞아요. 인간이 없으면 죄가 없어요.
그러나 죄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마귀가 인간을 통해서 죄 짓게 하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인간을 통해서 죄가 나오게 하지요. 인간이 없으면 죄는 없는데 인간이 ‘죄를 한번 지어봐야지’ 이렇게 해서 죄가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예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조차도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죄를 생산해 냅니다. 그러면 어디에 써먹을데 있다고 그 죄를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죠.
만약에 어느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 가서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리어카도 만들줄 모르는 우리가 가서 괜히 그 외부인 관계자 외 사람이 와가지고 “이 설비는 왜 했어요? 이 페인트 칠은 왜 합니까? 이것 할 필요 없는데” 이렇게 간섭질하면 안되지요?
그 페인트 칠하는 것, 이 설비 하나, 모든 공정 하나, 자동기기 하나, 로봇으로 용접하는 하나 다 이게 자동차 만드는데 다 필요해서 하는거라 말이죠. 그런데 그 자동차 만들 줄도 모르는 외부인이 가가지고 이거는 필요 없는건데 자동차에 이런게 들어가나? 이렇게 궁시렁 궁시렁 거리고 모르는게 아는 척하면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주제범위를 넘어서잖아요.
그래가지고 자동차 공장 견학 한번 쭉 하고 나는 모르겠네 자동차 이렇게 만드는지 나는 몰랐다. 그럼 볼일 보세요 하고 나갈려고 하는데 잠깐! 하고 모가지 쥐고 당신도 쓸데 있다고 뭐냐? 뭐 쓸데 있습니까?
고장난 자동차 운전해 가지고 고장난 자동차와 함께 죽는 역할을 해줘야 되겠다 해가지고 자동차 구경하러 왔다가 잡혀가지고 나도 자동차 만드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죄 짓는 작업에 우리가 이미 참여시키는 것이 장차 올 성령께서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
그래 너는 니 맘대로 살아. 니 맘대로 살지만 그것도 죄를 생산하고 심판 생산하는데 거기 다 필요해서 너란 인간이 니 맘대로 사는 거예요. 그럼 의는 왜 안됩니까? 의는 주님이 주님 혼자, 아버지한테 가는게 그게 의라 이 말이죠.
의는 우리 소관 아니예요. 죄도 우리 소관 아니고 심판도 우리 소관 아니지만. 하여튼 세상것을 통해서 죄 만들고 심판 만들고 그것은 예수님 만드신 의와 대비를 시키고 대조를 시키는 겁니다.
자,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한 몇 분 동안 이야기 했는데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서 지금 뭐가 무의미하게 되었어요? 이게 무의미 하게 되었지요 이게. 그렇죠? 개인. 개인이라는 것이 이게 의미가 없이 되었어요. 개인이라는게.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개인.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게 성령께서. 이걸 좀 풀이해서 이야기 하면 성령께서는 “니 이야기 하지 말고 예수 이야기 해” 이겁니다. 강단에서 “목사야 니 이야기 하지말고 예수 이야기 해.” 항상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은 어디 생산의 재료이기 때문에? 죄와 심판 받아 마땅한 그것을 죄와 심판을 생산하는 제대로 이미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이미 말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성령이 해야될 것은 뭐냐 하면은 성령이 해야 될 것은 우리는 뭘 해도 죄고 뭘 해도 심판인데 의는 누가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 홀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라고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우리의 무슨 가치? 우리 개인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가치는 완전히 이거는 인정을 안해줍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것을 일체를 인정을 안해줘요. 잘했던지 너 남보다 참 경건했던지 착실했든지 그것들 묻지도 않아요. 니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이것도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순전히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13절에 나오죠.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뭐로 말하지 않고로 되어 있어요? 뭐로 말하지 않고? 자기 의로 말하지 않고.
자기의 의지 또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뭐는 말하시며?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그러니까 이거는 성령 자체가 누구의 심부름꾼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철두철미하게 종속된 심부름꾼으로 하는거예요.
성령이 자의로 자기 스스로 말한것도 아니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경상도 말로 “머라카께예? 머라하면 됩니까?” 이런식으로. 뭐라고 이야기 하면 됩니까? 그냥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그대로 말해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성령이 의와 죄와 심판을 이 땅에서 친히 생산해 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산해 내신 그 결과가 뭐냐하면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흐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9절부터 14절까지 쭉 이렇게 나왔거든요.
흐름은 그렇게 되는데 성경 본문 내용은 이런데 이걸 그냥 해가지고는 이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평소의 관심사가 성경에 있는게 아니고 어디에 관심있습니까? 개인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 이야기 하려고 이 땅에 태어난게 아니고, 우리의 심령은 누구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 갑니까? ‘나’ 이야기죠. 나. 나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지난 주일 낮 설교 했잖아요. 모든 자랑거리는 예수님한테 넘겨 버리라고. 예수님한테 넘겨버리라고.
내가 이런 짓을 알고 끊어 버리려고 이런짓을 했습니다 할 때 그걸 왜 나쁘다고 생각하면 끊어 버리고 좋은 일 하겠다는 그 의도가 뭡니까? 자랑거리 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런사고를 가지고 있는거예요. 자랑거리 하나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이 자랑거리를 만들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유지되느냐 하면 이 ‘개인’이 유지되요. 개인이. 나 자신이 계속 유지된다고요. 자기를 부인한다, 부인한다 불교처럼 백날 도 닦아도 이 개인은 계속가요. 부인했던 것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또 나를 잘라버릴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버리고 싶어도 버릴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제 월요일날 대구 강의 했잖아요. 내가 나를 협박한다고요. 이 세상에 가장 협박하는 자가 나예요. 내가 나를 협박해요. ‘너 이런짓 하면 벌 받는다. 이런 짓하면 지옥간다.’ 누가 협박해요? 내가 누구를 향하여? 나를 향하여 협박하고 있습니다.
협박을 하든 협박을 안하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오늘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니가 지금 어디 밖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까? ‘나’라는 이 개인 밖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개인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누구 이야기 해요? 우리 개인 이야기 해요? 우리 격려하러 옵니까? 우리 칭찬하러 와요? 아니예요. 누구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이야기만 해요. 스스로 성령께서는 자기 이야기 안하고 누구 이야기 해요? 예수님께 들은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들도 비록 개인으로 출발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 해야죠. 사람이 모두 고민이 있다. 즉 고민은, 사람이 고민이 있는 이유가 뭐냐? 지금 누구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어요? 누구 걱정하기 때문에 고민합니까? 어디 주님 생각해서 고민했습니까? ‘아, 주님 십자가에서 부활해야 될텐데..’ 지금 주님 걱정하고 있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했어요.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야하는데..’ 아 갔다니까 이미 갔어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아버지께 가게되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어떠한 걱정거리나 근심거리가 일체 없어야 되지요. 말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죠. 없어야.
평소에 주님 생각만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려 하다가 2500m 상공에서 도로 떨어져 나갔다 하면 걱정이 되겠는데, 무사히 아버지께 갔어요. 그것도 무사히. 그 무사히 갔으면 됐지.
그러면 우리한테 더 이상 염려 걱정 없어야 된다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라면 맞다 이말이죠. 왜? 세상은 예수님 이야기니까. 우리 이야기는 없어요. 개인적인 이야기는 쳐주지를 않으니까.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뭐가 펄펄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개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개인에게 뭐가 나온다 하냐면 개인에게 죄가 나오고 개인을 통해서 심판의 요건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니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면서 붙잡을려고 하고 안 놓칠려고 하고 아낄려고 아낄려고 그렇게 아낄려고 하는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나오고 심판이 나오는데도 ‘니가 그렇게 니가 소중하고 아끼는 대상이냐 이것들아’ 하고 묻는거예요.
그렇게 아껴봐야 나올 주님의 받아줄 의도 안 나오고, 나오는 것은 죄와 심판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니 평생을 니가 아꼈냐? 아직도 못 놓고 있냐? 이렇게 묻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6장 이야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그 전체가 이게 요한복음 16장 이야기가 창세기 1장에 붙어 있는건 아니잖아요. 마태복음 1장 아니지요? 그 요한복음 16장 이야기 할 때까지 수많은 내력이 있을거 아닙니까. 내력. 경과가 있죠 경과. 그 경과가 왜 이렇게 첨부되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6장 이전에 15장있고, 15장 이전에 14장 있고 왜 이렇게 첨부되있을까요? 16장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그러한 첨부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16장이 설명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 하나 은혜받는 것 중요하지만 그걸 설명할때는 성경의 여러 구절이 다시 동원되야 되요. 다시 말씀드리면 16장 이야기는 예수님의 개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의 관한 이야기고, 성령께서 오시면 더 이상 우리 이야기에 대해선 일체 주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 개인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 착하게 살았고 바르게 살았고 봉사했고 이런걸 일체 안 물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게 안 되기 때문에.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의와 죄와 그리고 심판이 생산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의, 죄, 심판은 주께서 인정을 안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건 내 개인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의와 죄와 심판을 거론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고자하는 영광이 되는 그 의와 심판 죄의 개념이 아니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그 다음 질문이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는 나는 안 받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든 것을 왜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예수님 하시는 것이 의고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죄가 죄 개념이고 예수님 만드신 심판이 심판 개념이라면 우리 개인 입장에서는 그냥 의와 죄와 심판 예수님 만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받아들이게 되면 이 개인은 그대로 유지가 되버리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죄와 심판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 개인은 무의미하게 가치있게 날라가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내 개인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 만든 의와 죄와 심판을 자꾸 획득할려고 하는 거예요. ‘획득’ 획득은 쉬운 말로 뭐냐하면 ‘소유’지요.
예수님하는 것은 예수님쪽에서 가져다가 내 것만들어 버리죠.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예요? 내가 내 구원을 시키는 방식이 되요.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 된다고요.
주님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식으로 좋은 아이디어 좋은 정보를 획득해서 그것으로 내것으로 꽉꽉 채우면 ‘나는 구원되겠지..’ 하는데 그거 구원안되요. 왜? 무거워서 안되. 짐이 너무 무거워.
뭔가 이렇게 많이 끌어놓으면 하나 떨어지면 그거 챙기다가 이거 두 개 날라가요. 무거워서 날개 잃은 천사가 되가지고 무거워서 뜨지를 못해. 뜨지를 못해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다면 주님의 것으로 내가 없어져야 될텐데 주님이 이런이런 일을 하셨습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쳐도 그런 이야기를 해도 우리 개인이란 인식이 없어집니까? 예?
만만치 않지요? 녹록치 않지요? 주님 하세요 나는 나대로 살께요 하고 또 자기 개인을 고수하게 되지요. “아 주님 훌륭하시네 하지만 나도 뭐.. 한 인간합니다.” 이런 식으로 따로 챙기게 된다 이말이죠.
그 아까 제가 우리가 개인이 살아있으면 주님의 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이라고 했습니까? 이게 내가 벌린 나의 구원이 되지요. 나의 구원 작전이 됩니다. 바로 교회에서 교인들을 자꾸 이런 식으로 몰아넣지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구원됩니다. 구원 작전을 자꾸 벌여주는데.
예를 들어서 국자 봅시다 국자. 국자가 이렇게 생겼잖아요. 국자가 국을 떠가지고 이쪽으로 옮길 때 이쪽 국을 국자가 이렇게 생겼잖아요. 앞부분을 턱이라고 해요. 푹 뜰 때. 그럼 일단 국이 국자 안으로 삭 들어오게 되면 이 턱만 넘으면 자동적으로 쭉 미끄러지면서 이 안에 담기겠죠? 빠져나갈려면 턱을 넘어서야 빠져나가잖아요.
주님의 의가 국자라면 우리를 푹 떠버리면 주님의 의란 턱만 넘어버리면 더 이상 우리가 내가 스스로 의로워질 이유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턱을 넘어버리면. 이제는 미끄러질 일만 남아있어요.
국자 뜰 때 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고깃덩어리, 한우 고깃덩어리 1이라면 국자 떠오면 나보다 먼저 떠온 고깃덩어리 2도 여기 있고 고깃덩어리 3도 있을거 아닙니까? 그러면 고깃덩어리 1이 나라면, 넘어서 여기 물이 있고 출렁하고 섞이면 반갑다 고기야. 고기2, 고기3 다 모여 있다고요. 이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성령에 의한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지요? 같은 주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이야기했고 그 주를 받은 사람은 이 턱을 넘은 거에요.
턱을 넘어버리면 여기서는 더 이상 뭐가 되느냐 하면은 개인이 아니고 여기는 뭐가 되느냐? 고기1, 고기2, 고기3가 되는 거예요. 의의 열매1, 의의 열매2 이렇게 된다 이말이죠. 그런데 여기 모인사람이 자기 이야기 하겠어요? 국자라는 새로운 환경, 오늘 제목을 ‘국자 환경’ 국자라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 동네가 어떤 동네지? 희한한 동네네. 어떻게 개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개인 이야기는 나올 이유도 없네. 이 바닥에서는.” 내가 어디서 무얼 하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왜냐하면 그 이야기로 구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와서 주님의 국자가 동원되야 되고 이게 성령인데요. 성령이 동원되야 될 걸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자기가 국자를 들고 괜찮은거 뭐 십자가 복음, 성령, 삼위일체 괜찮은건 다 골라가지고 골라가지고 골라 골라서 이 개인이라는 그런 그릇에다가 담아버려요.
담으니까 이 사람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서 나올 건 무슨 이야기 밖에 없습니까? 주님 이야기 입니까? 내 이야기 입니까? 자기 이야기죠. 자기 이야기.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구원 받고. 자꾸 자기 이야기 튀어나와요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기 이야기 나올 때 제가 늘 좀 시비조로 하는게 그렇게 자기 이야기 나올 때 그렇다면 이 사람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치매 걸리면 국자고 뭐고 다 던져버려요. 치매 걸리면 자기가 담아놨던 것 다 빵꾸 나가지고 다 쏟아 버리고 평생 끌어 모은 고귀한 언약, 십자가 복음 성경100독 싹 다 빠져나가.
남은 것은 썩어 빠진 자기와 국자만 들고 있는 국자들고 지옥에나 가지. 그게 왜 지옥갈 수밖에 없냐면 주님의 의는 그게 아니거든요. 주님의 의는 그게 아니예요. 그렇다면 이 요한복음 16장이 창세기 1장에 갖다 붙였으면 좋겠다 싶으시면 창세기 1장을 넘어 요한복음 16장에 있는 이유가 뭐냐?
그러면 참 요한복음 16장 이전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 멀리 갈 것도 없이 요한복음이니까 요한복음 1장이 있겠지요. 2장이 있겠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이 있겠지요. 2장이 있겠지요.
그러면 그거는 뭐냐하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일이 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날 때 오늘 강의를 들었으니까 ‘사람을 만났다’라는 말도 되지만 그것을 오늘 강의들은 자들은 예수님은 개인들을 만났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개인들을.
오늘 강의가 다른 강의 못지않게 상당히 어려울거예요. 어려운 이유가 뭐냐하면은 자신을 보편자로 간주하는 것, 이게 바로 개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개인을 분석을 해보면 자기를 보편자로 합니다. 보편자란 말이 어렵지요?
그러면 알기쉽게 보편적 기준점으로 이렇게 보시면 되요. 보편적 기준점으로. 보편적 기준점인데 보편적 기준점으로 이런 절대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걸 개인이라고 해요. 이걸 개인이라고 합니다. 보편적 기준. 이것은 말이 이상한게 보편적 기준 세상을 전체를 내가 보기에 내 기준으로 이 인간도 저 인간도 평가하는, 이게 보편이거든요. 보편적인 기준점, 절대 기준자, 그게 나다 이 말이죠.
보편적 기준점이라 보편이라 하지만 말을 다시하면 자기 자신을 특수자로 보는 거예요. 특수자. 특수자. 그냥 특수자가 아니예요. 독보적인 특수자. 이걸 두자로 하면 뭐라고요? 이게 개인이라고요 개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되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몰라요. 왜냐면 우리 자신을 알고 남을 만나는게 아니고 상대에 따라서 내가 그 때 그 때 달라져요. 30대 나하고 40대 나하고 50대 내가 달라요.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카멜레온 같아. 카멜레온~ 하는거 있잖아요. 카멜레온 같아. 그때마다 변색해 우리는. 아내 대할 때, 자식 대할 때, 남편 대할 때, 회사에서 상사 대할 때, 뭐 교회 목사 대할 때 전부 다 달라요.
그 중에 내가 꼭 집어서 이것은 나다 할게 없어요. 오늘 제목을 카멜레온이라고 할까? 카멜레온~ 그러면서도 본인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니까요. 10년 살았는데. 10년 살아도 몰라요. 20년 더 살면. 몰라요. 그러면 30년 더 살면 치매 걸려서 더 모르지. 늙으면 더 모르지.
평생을 살아도 내가 누구인지 정해놓은게 없는데 이상하게 속으로는 남을 평가해. 자기를 보편적 기준점으로 삼았다니까요. 그래서 이게 이거하고 구원하고 연관시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저를 구원하소서” 하면 예수님께서 “니가 누군데?” “가만 보자 내가 누구지? 모르겠습니다.” “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뭘 건진단 말이냐.” 이렇게 되거든요.
자, 네 사람이 있다. 아무렇게나 무턱대고 네 사람이 있는데 전부다 네 사람다 본인을 개인으로 봐요. 개인. 그렇지 않고서는 정신병자거든요. 전부다 개인으로 봐요. 개인으로 보니까 전부다 각자 보편적 기준점이고 특수자예요. 특수자들.
주님이 이들 사이에서 다 만나요. 이들 사이에 다 만난다고. 이들을 다 만나요. 이들을. 이들을 다 만나요. 요한복음 16장하고 있는데 1장부터 15장까지 뭐가 있느냐? 이들을 만났어요. 이들을. 이들을 만났다니까요.
이들을 만났을 때 이 개인들이 자기가 특수자라는 것을 감추고 양보하고 협상하고 정치적 협상해 가지고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요. 사회를 만드는데 그 사회를 만드는 방법을 제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어디서 만약에 전화가 온다고 합시다. 띠리리 띠리리. 대화보면 벨소리 "------" 벨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누구세요?”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 저쪽 상대방 전화 건 남자 목소리가 들려요. “나야. 잘있어?”
벌써 전화 내용이 수상하지요? 벌써 헤어진지 좀 오래됬다 생각 안듭니까? 띠리리리, 누구세요? 나야 잘있어? 누구세요? 하는 그 음성 알면서도 한참 뜸을 들여요. 뜸을 들이다 여자 하는 말 “------미안해.” 찰칵 끊어버렸다. 일방적으로.
자, 이건 무슨 이야기겠어요 이거는. 누구세요? 나야. 잘있어? 아부하는 형식으로 잘 보이려고. 뜸을 들이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동등’입니다. 동등.
여기에 남자 여자 어떤 차별이 없어요. 똑같이 모든 인간은 개인을 동등화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차피 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면 똑같이 동등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끊었잖아요. 찰칵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단 말이죠.
남자가 전화한 것은 옛날 우리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고 전화 한거예요. 전화를 먼저 한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당당하게 그가 한 제안을 여지없이 밟아 버리고 “미안해” 하고 일방적으로 끊었단 말은 ‘내가 니 말 들을 이유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나 니말 들을 이유 없다.
‘너는 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가자. 나 더 이상 찾지마라. 이제 너한테 미련없다.’ 아마 뒷 이야기를 다시 쓰라면 다시 또 전화해요 남자가. 해가지고 그럼 여자가 “왜?” 남자가 “누구 생겼어?” 이러겠죠.
이게 뭐냐하면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동등한 사회. 동등한 사회에 누가 끼어 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찾아왔거든요. 예수님을 믿을 권한과 자기 그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동등이란 말을 왜 주장하느냐 하면 동등할 때 사회가 좋다는게 아니고 가장 나 다움 나의 개인다움이 가장 확실하게 주장할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미안해’하고 끊어버렸단 말이예요. 미안하긴 뭘 미안해. 지금 귀찮다는 뜻인데. 이걸 끊어버렸다는 말은 내 인생에 대해서 건드리지 마라. 내 인생 건드리지 마라. 이건 내가 내 인생이니까 건드리지마. 라는 그러한 동등한 사회에 누가 오셨다? 예수님이 오신거예요.
그러니까 이 개인들이 예수님을 튕겼습니까? 영접했습니까? 튕겨버렸지요. 사정없이.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튕겨버렸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을 돌아다니면서 결국 인간에게는 뭐온다? 개인이라는 것은 개인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지요.
이 동등과 비슷한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은 옛날에 나왔던 광고에 이런게 있어요. ‘낯선 여자에게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뭐 이런거 있거든요. 자, 길을 가다 마주쳤는데 내가 쓰는 향수와 동일한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향수 쓰는걸 가지고 ‘동등’이라 하지 않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동질’이라고 해요. 동질. 이걸 동질이라고 해요.
그럼 인간세계는 개인이 괜찮아 보이면 그와 똑같은 향수 쓰고 싶고 똑같은 안경쓰고 싶고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개인의 확대라 하는데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내가 함으로서 저 사람처럼 모방하면서 내 개인의 영역은 확장되는 거예요.
동질과 동등. 틀려요. 동등이라는 것은 지위가 존재 지위가 같이 평등한 것을 이야기하고 남하고 나하고 똑같다는 뜻이고, 동질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야 뭐든간에 나는 저것 갖고 싶어서 얼마든지 저 사람처럼 나도 할수 있다는 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것이 동질이예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동등과 동질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는데요 예를 들면 결혼 해볼께요 결혼. 결혼은 동질하고 싶어서 동등이라는 제안을 한게 결혼이예요. 남들이 결혼하니까 나도 결혼하고 싶어서 라고 할때는 동질이죠.
동질인데 나만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티격태격하니까 그래 내 남편도 나처럼 같은 지위를 부여해줄게 우리 결혼하자. 동질을 위해서 동등을 허용하는 것이 결혼이죠. 그런데 아무리 결혼해도 누구는 없어지지 않습니까? 절대로 개인은 없어지지 않지요. 오히려 강화가 되지요. 강화. 개인은 더 굳히게 되지요.
자, 동질 동등 언급한 이유는 개인의 관심사는 절대로 개인에게서 비켜나지 않는다는. 절대로 개인의 관심사는 개인에게서 눈 돌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동등 안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울분과 분노가 이어지고 그게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범죄로 이어지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뭔데 나를 개무시하느냐?’ 이렇게 하지요. 이게 무엇을 염두해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까? 너만 개인이냐? 나도 개인이다. 개인은 이 세상에서 뭘 해야 된다? 개인은 반드시 동등해야 된다는 원리원칙을 니가 왜 위반하느냐? 돈 좀 있으면 다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나옵니까? 니가 재벌이면 다야? 이렇게 나오지요. 재벌이면 다야? 어디서 과거사 들먹여 가지고 방송에 내고 빨리 내려! 하잖아요. 황금빛 그대에 나와요. 니가 재벌이면 다야? 니가 돈 좀 있다고 나한테 유세해? 유세 떨어? 나도 집에 가면 대우받는 아버지야. 하잖아요.
그럼 재벌이 픽 웃지요. 니가 그렇게 동등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은 니 안에 무슨 욕망있다? 너 나처럼 부자되고 싶은 동질 그런 심보가 있고 그런 욕망이 있잖아.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을 중심으로 해서 남처럼 되고 싶은 동질과 이것은 개인, 자기 위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어쩔수 없이 남도 나와 같이 인정해주는 동등을 약간의 한시적으로만 임시적으로만 동등해 주는 것처럼 동등해 준다는 것은 뭘 한다? 개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은 개무시하지만, 개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오직 자기만 관심있는거예요. 자기만.
이 자기만의 긴 그림자를 가지고 개인사, 개인 역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누구 이야기? 예수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 입니까? 자기 이야기죠.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올때까지 예수님 누구를 만났습니까? 오로지 자기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을 만난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실 때 그럼 이 개인과 동질과 동등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지요.
그걸 뭐로 인정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 공생애에서 드러나는 거죠. 예수님께서 처음에 공생애할 때 복음을 전하시면서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이 나갔습니까? 어떤 개인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니까 말씀을 전하니까 뭐가 튀어나왔어요. 뭐가 나왔습니까? 귀신이 나갔지요.
이 말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개인한테 호소해서 개인이 스스로 개개인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예요. 그러면 이 개인이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면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 안에 뭐가 있어요. 뭐가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귀신이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사람들 일반 대중들은 귀신 쫓아 내면서 왜 주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마귀는 그 큰 귀신은 왜 안쫓아 내는 겁니까? 잔챙이는 쫓아내고 너의 아비는 마귀다 해놓고 그 마귀는 왜 안 쫓아내지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래놓고 주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예요?
누구는 귀신 쫓아내주고 누구는 바리새인 그것들은 “독사의 새끼들아” 해놓고 그 독사를 빼주지 왜 독사의 새끼들 욕만하고 독사를 안빼주는 거죠? 그 해답 이야기 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신학자들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개인을 구원하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할 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면은 바로 성령과 함께 있어요. 성령의 지시를 따랐던 예수님이 예수님이 죽고 승천하고 난 뒤에는 이제는 성령이 그 승천하신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성령이나 성령도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은 예수님을 뭐로 옹립하려고 합니까? 성령께서 어떤 분이냐 하면은 성령께서 도와주되 성령 본인이 누구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어떤 분으로 상대를 높이기 위해서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거예요. 참 희한하죠. 성령께서 예수님을 도와주는 이유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도와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령도 그렇고 성부도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고, 모든 중심이 누구 중심이예요? 예수님이 중심으로 이 활동이 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 중심으로.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악마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 악마의 적은 예수님이 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하나님을 부정하라고 우리를 가르치는게 아니고 뭐를 부정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중심을 계속 극구 부정하라고 한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아담에게 찾아온거예요. 아까 악마가 아담에게 찾아온 이야기 하면 아까 제가 유투브할 때 언급을 했는데.
그 뱀이 인간에게 찾아가는 그 이유, 그 이유는 인간 속에, 여러분 아까 뭐라했죠?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다 했어요? 부분이 아니고 인간 속에 전부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 유투브를 다시 틀어줄수도 없고, 잠깐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다수 아닙니까? 다수. 하나가 아니잖아요. 다수가 아담에게 들어왔지요. 그럼 아담은 1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하나고 우리가 다수라는 것이 이게 상식인데 성경은 이게 아니고 하나 속에 우리가 다 들어가버렸다 이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어디에 있어요? 아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가 아버지의 뜻이에요. 아담에게. 그걸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마귀가 알기 때문에 그 아담을 노린 거에요. 아담을.
왜냐면 아담속에 오실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인간 속에 소복히 그 안에 압축되어서 들어 있어요. 따라서 악마는 인간을 건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부가 건드린 것을 건드릴 수 있다고 본거예요.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케 함으로서 하나님의 전부를 괴멸시킬 수 있는 그러한 요소로 본겁니다. 그래야 그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예수님의 원수가 돼요. 마귀는 오직 주 예수가 주 되는 것만 방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뭘 모르느냐 하면 마귀가 하는 짓을 몰라요. 뭐가 마귀인지 몰라요. 마귀가 인간에게 집어 넣은 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올 때 뭐가 마귀냐 하면 마귀는 오직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의 또는 자기 자랑 이게 바로 마귀예요. 이게.
마귀가 흉축하게 얼굴 벌겋고 이게 아니고 마귀라 하는 것은 자기 의 때문에 그런거에요. 이 세상의 모든 범죄, 이 모든 범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모든 범죄는 자기 자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지요.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 의와.
교회 주의해야 됩니다. 교회라는게 뭘 만들어 내는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개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을 인정해주고 개인 속에 뭘 집어넣어라? 너만의 맞는 뭘 집어 넣어라? 뭔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자랑거리와 의를 만들어내라 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라니까요. 마귀. 그게 바로 마귀라니까요.
성령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대비해야 될게 뭐냐? 악령. 악령은 무슨 작업을 했는가를 반드시 같이 대조를 해줘야 성령의 하신 일에 객관적인 것이 나타나요. 그런데 악령이 하는 것을 먼저 누가 먼저 만나본 분이 있죠? 누가 만났습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이 인간 속에 왔어요. 오니까 귀신들은 내쫓았어요. 그런데 누구는? 사탄의 자식이라는 뱀의 독사의 새끼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악마를 안쫓아 버렸잖아요. 왜?
사탄의 그 뜻이 강렬하게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자기가 죽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예수님이 ‘내가 죽어야 성령 온다’ 했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내가 죽어야 뭐 되니까 나 죽을래?라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죽어버리면 뒤에 뭐가 와도 이거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몰라요. 혹시 자식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안중근처럼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결국은 자기가 소속 돼있는 확장된 개인이죠. 소속된 그 단체로서 하는거고.
죄인을 위해서 죄를 위해서 죽은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죽어야 성령이 온다는 거예요. 죽어야 성령 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의 턱을 넘을 수 있는 국자의 턱을 넘을 수 없어요. 그 국자가 뭐냐 하면은 악마의 악령의 틀을 넘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악령은 인간에게 뭘 만들어 놨습니까? 인간을 뭐로 만들어 놨어요? 개인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개인은 무소유라고 준게 아니고 개인은 스스로 동등하고 나란 것을 절대화 시키기 위해서 개인이 우리한테 환원되는 거예요. 각자각자 다 그래요. 자기 밖에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보편적 아까 뭐라고 했어요? 기준이 보편적 기준. 자기가 보는 것이 자기가 기준이예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기만 옳다는 거예요. 이거는 마귀가 그랬던 간에 일단 기분 좋다 이 말이죠. 내가 신이 되니까 신처럼 되니까.
이걸 이미 맛을 봤는데 이걸 왜 포기해요? 미쳤어요? 그걸 포기하게?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해요? 바보 등신도 아닌 이상은. 그러니까 예수님을 밀어내는 거예요. 어이 하나님! 나 하나님인데 죽어서 지금 지옥 가려고 하니까 좀 무서우니까 조치 좀 해주세요. 지금 우리는 이런 식이라니까 교회 오면서.
나 괜찮은데 어떻게 좀 해달라는거예요. 사랑의 하나님 일로 와바 이리로 와봐 뭘 해주면 죽어서 천당갈 거야? 빨리 이야기해. 지금 시간 없어. 지금 돈 번다고 빨리 이야기해. 이런식이라니까요.
나 다치면 하나님이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죠. 마귀가 나설 필요가 없지요. 결국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떠밀으라고 하는 역할이예요. 결국 예수님 마귀한테 떠밀려가지고 죽었지요. 죽었더니 그 다음에 뭐가 나왔다?
이거는 감당이 안되는 성령이 온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개인이라 여겨 죽였는데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개인이 감당을 못하는 분이 나와요.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