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강-YouTube강의(건너지 못할 강)180220-이 근호 목사
223강-YouTube강의(건너지 못할 강)180220-이 근호 목사 223강, 제목은 ‘건너지 못할 강’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두 개의 건널 수 없는 강이 나와요. 하나는 홍해가 나오고 하나는 요단강이 나옵니다. 요단강과 홍해의 차이점은 뭐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건널 수 없는 강을 두 개나 마련했느냐, 그 점을 생각해야 돼요. 강이 두 개가 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강을 건너기 전의 상황과 건넌 후의 상황이, 강 하나만 있다면 좌우로 대칭이 되겠죠. 좌우로. 그러면 강만 건널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이제는 합격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합격한 인간. 하나님의 천국에 합격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강 하나만 있다면. 만약에 강 두 개가 있다면, 첫 번째 강을 건너 합격한 그 인간에게 두 번째 강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첫 번째 강을 건넜던 그 방식으로 두 번째 강을 건너서는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첫 번째 강을 건너게 한 것입니다. 무지무지하게 복잡한 거예요. 두 번의 분리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하나는 애굽에서 따로 분리된 히브리인들,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죠. 애굽에서 분리된 인간에게 강 하나만 있다면 애굽에서 분리된 그 자체로서 이미 구원이에요. 천국의 합격자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들에게 또 하나의 강을 준비했다는 말은, 애굽에서 분리된 인간만이 인간이라는 것이, 두 번째 강에 가서는 어떤 인간도 인간이 아니다가 돼버리는 겁니다. 애굽에서 분리가 됐던, 어쨌든 간에 인간이라는 자체는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두 번째 강이 마련된 거예요. 그리고 첫 번째 강, 두 번째 강의 특징이 뭐냐, 둘 다 인간의 능력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이에요. 건널 수 없는 강을 두 개나 마련했던 겁니다. 첫 번째 강에서, 홍해죠. 홍해에서 그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건넜던 거예요.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이건 한 번이죠. 단 한 번의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으로 강을 건너게 돼요.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그 사람들이 홍해를 건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요단강을 건널 때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는데 길을 내야 되겠죠. 길이 없다는 말은 홍해를 건너온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 없어요. 홍해는 건너왔는데 요단강 길이 없어요. 그렇다면 요단강 길이 없다는 말은, “너희들이 인간이냐? 그렇다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다.” 인간이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나라에요. 그럼 뭘 보여주겠어요? 천국은 인간이면 못 들어간다. 그러면 천국은 왜 있느냐, 무엇을 위해서 있는 나라냐,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위해서 있는 나라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언약궤가 보인다고 했어요. “이에 하늘에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11:19). 언약궤를 제사장이 메고 요단강 한복판에 설 때, 전에 홍해에서 일어났던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 홍해에서 무슨 현상이 벌어졌죠? 물 사이가 갈라지면서 길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홍해나 요단강이나 길이 났다는 말은 길이 없다는 말이죠. 길이 없다는 말이에요. 길이 없다는 말은 물로 덮여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연극무대의 커튼이 쫙 열리는 것처럼 물이 열어줘야 비로소 나오는 길이에요. 물이 열어줘야. 홍해에서 뒤따라오던 애굽군사들이 다 물에 빠져죽었잖아요. 오히려 바닷물이라는 것은 이 땅이 심판으로 덮여있다는 겁니다. 심판으로 덮여있는 거예요. 심판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심판으로 덮여있는 것을 홍해에서 갈라지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럼 홍해 바다에서 사람을 보고 심판의 길을 열어줬을까요? “어! 너네 히브리인이네 이리와!”라고 하면서 열어줬겠느냐는 겁니다. 인간이 건너겠다는 마음 때문에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에요. 심판을 열게 하는 유일한 요소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그렇다면 천국은 언약의 나라고, 언약된 자만 들어갈 수가 있고, 언약이 없는 사람은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으로 넣어준 게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바꿔치기 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바꿔치기 해야 되는 거예요. 처음에 홍해에서는 히브리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근데 그 피가 두 번째 강 요단강에서는 뭐냐 하면 살려내는 피가 아니라 그 피 안에 모든 인간이 죽어야 되는 피인 거예요. 피가 인간을 죽이고, 피가 죽였던 그 인간들만이 피를 앞장세워서 두 번째 강물이 열리는 겁니다.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력으로 천국에 못 가고 철저하게 언약의 피에 종속돼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에 종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십자가 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으로 조금씩 끌려가는 거예요. 죽음으로 끌려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반복해야 돼요. “나는 이제 죽으면 천당에 간다.” 이게 아니라, “나를 죽이는 분은 세월도 아니고 나이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고, 나를 죽이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피만이 나를 죽이십니다. 십자가 피에서 나를 죽이십니다.” 그렇게 피가 나를 덮쳐 날마다 죽일 때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있는 거죠. 십자가 지신 분이 살아있는 거죠. 그러면 이런 자격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살았다가 아니라 누가 살았다? 내 속에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언약이, 천국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계속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그 사람은 천국에 이미 입성한 사람입니다. 천국을 이미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건널 수 없는 강이에요. 그래서 언약궤가 있던, 요단강을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들이 약속을 땅을 밟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본인이 어떻게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이 계속 살도록 보여주어야 하느냐 하면 요단강에서 이끌어낸 그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궤의 의미가 계속 살아있어야 하는데, 약속에 들어가서는 살아있지를 못하고, “이미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뭐.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는데 뭐.” 이렇게 하다가 그들은 전부 다 언약궤의 취지, 정신을 위해서 멸망한 겁니다. 이제는 그 언약궤가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떤 교회나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 피가 들어와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는 날마다 살아나는 식으로 언약궤가 엔진이 돌아가듯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엔진이 웅웅~거리면서 계속 가동되듯이, 성도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만 계속 증거 되고 있죠. 따지고 보면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뭐만 생각하면 되겠어요? 하나님은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반긴다는 것. 이거 하나만 알게 되면 바로 천국은 주님이 머리되시고 우리는 주님에게서 퍼져 나온, 주님에게서 계속 생산되는, 그리스도에게서 생산되는 사지(四肢), 지체(肢體)로서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사지, 그것은 머리됨을 증거 하라고 떨어져 나온 사지입니다. 그걸 두 자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