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2b 부산강의 : [시편]7(3편)-사랑과 소유
20180212b 부산강의 : [시편]7(3편)-사랑과 소유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사랑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 여디디야를 사랑하는 사랑의 이미를 사람들이 받을 때 그 사랑이 뭔지 인간 쪽에서 접근해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 가정에 진정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뭔지 알기 위해서 보통 큰일이 벌어진 게 아니에요.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솔로몬 외에 다른 아들들을 통해 사랑이 아닌 게 뭔지, 그리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그것이 얼마나 사랑과는 거리가 먼지 보여주는 계시의 사건으로 다윗의 남은 역사를 채우게 되는 겁니다.
어떤 것 하나라도 성도에게 일어나는 것은 복음과 관련돼있지 개인의 구원과 영광과 행복과 관련돼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라도 버릴 게 없어요. 하필이면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일어났냐고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막혔느냐? 막힌 게 뭐냐 하면, 다윗이 갖고 있던 것에 대해서 대적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 다윗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은 대적하는 쪽이 이해하는 사랑 개념이 진짜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이 결론적으로 정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 저건 내 새끼, 내 자식이라고 갑자기 없는 사랑이 막 나오게 돼있어요.
첫째 시간 끝에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소유지요. 소유라면 소유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소유자의 명예와 존재의 의지를 더욱 더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꽉 쥐고 있는 거예요. 내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한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뭐든지 내 것으로 모아요. 치매 현상 중 하나가 길거리 나온 쓰레기를 자기 집에 다 가져옵니다.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거든요. 치매 걸려서 집에 수시로 가보는 이유가 동네 있는 쓰레기가 어떻게 이동해 있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예뻐 보이는 스티로폼 통, 아이스크림 통이라든지. 치우면 두 시간에 가보면 또 들고 옵니다.
치매란 장기기억은 계속 살아있습니다. 장기기억 속에는 나는 평소에 이런 사고방식과 이런 사상과 의식으로 살아왔다는 남아있는 자료거든요. 인간은 소유의 연발, 연발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그것도 자기한테 좋다는 것. 그러면 자기 것으로 소유했다면 평소에 누굴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은 나에게 너는 쓸모 있고 가치 있다는 조건 하에 내 것을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상대방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서 제가 결혼에 대해서 요 근래 여러 번 강조한 게 있는데 일단 이혼하고 결혼하면 돼요. 이미 이혼한 거예요. “이혼했는데 왜 우린 같이 살지, 이상해?” 이래 돼야지 나는 너한테 다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왜 다 안 주냐는 거죠. 말이 안 되죠. 다 주었으면 박박 긁어서 다 주어야지요. ‘나는 너의 것이다’까지 줘야 되는데 주기는 다 주었는데 나의 것은 비워놓기만 하고 주지는 않았어. 이 쟁반은. 다 줬는데 왜 나한텐 다 안 줬어? 이러려면 헤어져. 말끝마다 헤어지제.
이것이 암놈과 압살롬을 통해서 사랑이 아니면서 사랑으로 통용되는 개념들을 살핌으로서 정작 솔로몬이 암놈 제치고 압살롬 제치고, 그것도 간음한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어떻게 해서 다윗의 언약을 이어받을 자격자가 되는지 하나님은 계시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도 성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버릴 없어요. 꼭 소고기 같아. 어떤 부위도 다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계시의 내막을 알기 위해서 인간의 내막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약간 엽기적이지만 참아내시고. 인간의 신체를 잘라요. 내장을 다 드러냅니다. 그러면 인간의 표면적만 남지요. 이걸 펼치면 그냥 가죽이 되지요. 이 가죽에다 주께서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의 장으로 사용해요. 우리라는 인생에서 다 끄집어내버리고 우리가 하던 모든 짓거리를 뒤따라오면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다 접촉을 시도하면 인생에 일어나는 하나하나가 복음과 관련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뒤따라오면서 추월함으로써 결승 진출이 빛이 나는 거예요. 한 번 넘어졌는데 다시 일어나서 3000미터 여자 쇼트트랙에서 결승 진출하잖아요. 꼭 사랑보다 먼저 상처를 줘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나님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 자신이 상처를 입어야 돼요. 상처 입히는 쪽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마귀에 속한 인간 세계가 반드시 있어야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망하는 하나님이에요. 절대로 실패가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 무너지고 망해버리고 하나님한테 버림받는 하나님, 이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친 그분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에요. 멀리 있는 하나님은 몰라요. 바로 코앞에 오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을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응축시켜놨어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다, 존재가 돼버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 살아있다는 개념이 십자가에서 나머지는 다 부정당해도 살아있다, 존재한다, 이것만큼은 손 안 댄 게 되기 때문에 이건 잘못이거든요.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이 죄고 잘못됐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사랑, 살아있다는 모든 개념도 문제 있음이 드러나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존재한다. 난 그 존재를 믿어. 이렇게 되면 다른 것은 다 탈락이 되도 존재하는 개념은 안 다치고 생생하게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는 인식이 됩니다. 그게 안셀무스 신학의 시작이에요. 안셀무스부터 시작된 교회 이천 년 신학이 거기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청교도 있지요. 퓨리탄들(淸敎徒, Puritans).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받은 자답게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게 청교도에요. 청교도의 사상을 뭉친 것이 개혁주의사상입니다. 은혜 받고 바르게 사는 집단을 그들은 교회라고 해요. 그래서 교회 건드리면 화를 내는 겁니다. 괜찮은 데 왜 건드리느냐? 우리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왜 건드리느냐는 겁니다. 그 사람 신학의 근본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제시했으니까 이건 분명히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라고 보는 겁니다.
부산 강의할 때 신학 했잖아요. 모든 신학은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라는 이론적 이성적 논리가 신학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 모든 학문은 다 마귀에 물들었더라도 신학만큼은 하나님께서 칭찬해줄 것이고 영광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비슷한 사고방식이 찬양학이라는 겁니다. 이건 노래하는 목사들이 있어요. 선교학교에서 찬양학을 가르쳐요. 찬양학은 주로 시편으로 이성적인 학문적 토대를 갖추려고 합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찬양이라는 겁니다. 여기 시편 3편 2절 끝에 괄호 속에 (셀라)라고 돼있지요. ‘셀라’는 올려드린다, 바친다는 뜻이에요.
성경에 찬양시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지상의 출발점을 시편으로 잡자.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으로 가사로 만들면 하나님께서 흔쾌히 기뻐하실 것이다. 이게 찬양학입니다. 이 논리에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십자가가 빠졌지요. 빠지고 노래하는 존재자, 누굽니까? 본인들. 그리고 노래 듣는 존재자, 누굽니까? 신. 신과 노래 사이에 찬양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찬양학에서 나온 게 율동학이에요. 개량한복도 아닌 것이 이상한 옷 입고 율동하는 거예요. 길 가다 보면 율동선교학원이 있을 거예요. 돈 내면 율동 가르쳐주는 거예요. 율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고백하는 게 영광이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줘요. 행동이 춤추는 거예요.
율동학 하는 사람 중에서 여자는 많은데 남자는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의존교회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왜 교회에 여자만 많고 남자는 없느냐? 제가 그 이유를 밝혔지요. 2차, 3차가 없기 때문에 남자는 안 와요. 뭐든지 학술모임이든, 시인들의 모임이든, 검사들의 회식자리든, 독서모임이든 반드시 2차, 3차가 있어야 남자들이 와요. 특히 시인들 모임에. 시만 논해선 재미없어요. 정작 노리는 것은 리비도, 인간의 욕정을 달래줘야 마무리 짓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있어요. 세미나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 직업도 없이. 세미나 들으려고 가는 게 아니고 세미나 뒤에 식사 시간 노리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보통 나이가 육십 넘으면 그런 것도 생각하는 모양이라. 할 일이 없으니까. 얻어먹으려고. 공짜니까.
어쨌든 간에 인간의 존재에서 하나님께서는 너의 존재를 안 받는다는 게 아니고 항상 뒤따라가니까. 인간이 어찌해서 하나님께 왜 영광이 안 되는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사람과 인간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과 합치시켜서 하나님 쪽에서 나온 사람이 고난 받게 만들어요. 상처받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왜냐하면 하나님 사람도 마찬가지로 인간이니까. 자기 다치면 하나님께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다윗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언약입니다. 아브라함한테 네 아들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자기 아들을 아들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냈다는 것은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아브라함보다 이삭이 가깝다고 이야기했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는 어떤 원칙이 있는 일관적으로 내부적으로 같은 줄기로 연결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아들은 지상에서 죽는다. 상처받고 죽는다. 이게 일관된 원리입니다. 그게 이삭이 아버지 손에 죽어야 돼요. 죽지 아니하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죽이는데 죽이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어서 인간은 따먹고 거기에 마귀까지 들어오도록 허락하셔서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이 주가 되기 위한 환경조성에 하나님께선 계획하시고 선악과 심고 뱀 집어넣고 인간은 따먹도록 허용하시고. 허용하신 것은 선악과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워서 10년째 참아도 11년째는 못 참게 만들어요. 12년 참아도 마찬가지에요. 결국 그걸 따먹을 수밖에 없어요. 왜? 아름다운 것은 계속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 그게 구원이에요. 아까 사랑은 소유지요. 인간은 소유를 통해서 자기 자아를 구축합니다. 소유를 비껴가는 방법은 뭐냐? 내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과 바깥을 연결시키면 되지요. 그럼 내 소유가 안 되지요. 하나님의 의는 내 소유용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하는 거예요. 다리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안 중요한 거예요.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다리의 역할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교도소 일곱 번 왔다갔다해도 남한테 욕을 얻어먹더라도 다리 역할은 관계없이 꾸준하단 말이죠.
만약에 하나님의 의가 소유가 된다면, 내가 만약에 치매 걸렸다고 칩시다. 믿음도 내 소유, 예수도 내 소유가 돼버리면 치매와 더불어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모르는 데 뭐. 목사님이 와서, “집사님, 마지막인데 고백합시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가 누구세요?” 전혀 몰라요. 옛날에는 잘 믿었는데 이제는 갔네. 그러면 구원방법을 새롭게 만들어야 돼요. 치매 안 걸린 자, 요건이 하나 더 붙지요. 건강할 때 예수 믿고, 두 번째, 단 치매엔 걸리지 않은.
여러분, 치매가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우리 신체가 주님 거잖아요. 주님 것을 주님이 치매로 만든 이유는 그 관계를 돈독하기 위해서. 치매라도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치매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변함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치매 걸리게 했는데 그걸 누가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어요? 시비 걸 수 없잖아요.
참 그래서 복음이 쉬우면서 어려운 이유가 방해요소가 있어서 그래요. 평소에 내가 나를 건사하고 관리하는 그 방식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가동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신은 시시하게 보고 내가 나한테 투자한 것은 세상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 귀한 것 때문에 자꾸 감춰지는 거예요.
오늘 시편 3편의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라 하면, 나한테 무시당하고 나 때문에 가려진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 내용이에요. 나로 인하여 멀어지고 내가 귀찮다고 갖다 버린 것이 역전되어 오히려 나를 살리는 계기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이, 백성들은 압살롬 편이에요. 이야기가 뛰었습니다만. 모든 백성들은 아들 편이에요. 압살롬이 잘 생겼기 때문에. 옛날에는 털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복 받은 것으로 봤어요. 다윗은 이제 노인네 아닙니까. 식상할 때 됐어. 지겹다. 갈아보자. 백성들의 여망이 촛불처럼 타올랐다. 다윗의 아들 중에서 괜찮은 인물이 낫다. 그래서 추앙하고 있단 말이죠.
이 말은 사람들이 시시하게 여겼던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4,5백 명 밖에 안 돼. 숫자로 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무시했던 그들이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우리가 무시했던 예수님이 나보다 더 소중한 것처럼. 나에게 있는 모든 것보다 소중한 것처럼. 그걸 계속 알려주거든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솔로몬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아들이 있어요. 암논, 압살롬. 이 관계가 복잡하지만 상당히 흥미 있어요. 암논이 병이 났습니다. 상사병, 누이동생이 아름답기 때문에 병이 난 거예요. 아름다우면 그냥 보면 되는데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암논이 요나답이란 간교한 친구의 말을 듣고 소유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물리적인 육체의 힘을 사용합니다. 다말이 여성이니까 이겨내질 못하고 강간당했지요.
이 대목이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습니까?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현장을 하나님은 무능한 분처럼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꾸몄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사태를 꾸몄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섭섭함을 지울 길 없지요. 우리는 제삼자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강간당한 당사자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성폭행이라 하는데 저는 그 말이 듣기 싫어요. 성폭행이 아니에요. 그냥 강간이에요. 그런 것 보면 약간 짜증나요. 왜 자꾸 인권을 고려해줍니다. 그냥 강간범이지 성폭행이라 하면 다른 폭행과 같은 폭행이 되잖아요.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강간이에요. 강간이라 하면 성폭행이란 것과 느낌이 어떻습니까? 폭행은 당해도 회복할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세월 지나면 아물잖아요. 강간은 한쪽이 한쪽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다 삼킴을 당한 겁니다. 강간당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러니까 모든 책임에 대해서 강간범이 져야 된다는 거고.
폭행했다는 말은, 맞을 만 해서 맞았겠지 하는 그런 뉘앙스가 있어요. 성폭행이라 하면 폭행이니까 돈으로 해결하든지 약간 살고 나온다든지 어떻게 해결하면 다시 그 여자는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보인단 말이죠. 하여튼 강간이라는 말은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표현이지 성폭행은 영 마음에 안 들어요. 폭행범도 인간이니까 인권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있는 건데, 강간이란 말이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 민주사회에서는 너무 부정적인 것은 빼자고 한 것인데, 이건 뭐 중요한 건 아니고요.
어쨌든 강간이었어요. 사랑이 아니고 소유지요. 그러면 다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슨 뜻이냐 하면, 암놈의 아내가 되는 것이 그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한 하나님의 준비된 사태의 원활한 진척의 의미는, 내가 배다른 오빠의 아내가 되는구나. 옛날에는 왕궁에서 근친결혼이 많았어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는 거죠.
여자 입장에서 결혼하기 전에는 예뻤다는 것이 유죄가 되지만 결혼하게 되면 남은 인생의 책임은 나와 결혼한 남자가 다 져주기 때문에 나는 당신만 의지하면 내 인생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이게 보상책으로 여자한테 남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암논이란 인간이 얼마나 비겁한지 그렇게 병이 날 정도로 사랑했으면 자기 아내로 삼아서 행복하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계 해놓고 전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욱 더 미워했다고 돼있어요. 무슨 이런 변태가 다 있어요. 남자는 다 그런 거예요?
사이다가 병 안에 있을 때 거품이 막 올라와요. 사이다 병 따서 마시는 순간 김새지요. 탄산가스 빠지면 설탕물이죠. 쏘는 맛에 먹는데 없잖아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암논과 다말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소유의 허망함, 인간 소유 자체가 없음이에요. 인간이 소유하겠다는 욕망만 있고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소유할 때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결국 무슨 욕망으로 변했느냐 하면, 꺼져, 라는 욕망으로 전환된 거예요. 암논이 다말에게.
그러니까 결국 암논은 자기 소유욕을 소유한 거예요. 일단 소유욕을 만족했잖아요. 그러면 다른 소유를 또 소유를 찾아가야 돼요. 그래서 남자는 여러 여자를 원하고 여자는 한 남자를 원하고. 내가 지어낸 명제입니다.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여러 남자에게 보이고 싶고, 결혼하고 나면 한 남자만 세퍼트처럼 무는 거예요. 요새는 좀 달라졌지만.
너, 내 것 다 가져갔으니까 네 것까지 포함하여 내 것으로 인수인계하겠다는 의도로 결혼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남자들이 식겁한다 하죠. 남자들이 여자와 함께 있기 싫어하는 베스트 1위가 잔소리가 많다는 겁니다. 잔소리 때문에 같이 못 있겠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있기 싫어하는 첫 번째가 신선한 새로운 게 없다는 거예요.
어쨌든 암논을 통해서 인간의 소유욕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왜 허망하냐? 내 소유욕은 내가 거둬들였으니까. 내 욕망이 진실이고 진리고 그게 곧 내가 꾸민 현실을 가동시키는 원리원칙이 되고 말았어요. 내 욕망대로 될 때만 가장 좋은 세상이고 그 욕망에 하나님이 동원해줘야 나는 그런 하나님을 아낌없이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 그걸 암논을 통해서 보이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시 솔로몬으로 돌아가면, 솔로몬은 여디디야죠. 솔로몬은 누구의 욕망입니까? 다윗의 욕망이었어요? 아니요. 밧세바 욕망이 아니죠. 누구 욕망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욕망을, 자기 사랑을 그냥 다윗에게 줘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현실과 인간의 욕망이 갖고 있는 현실과의 싸움, 그것이 바로 시편 3편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기서 많다는 것은 하나와 다수를 대비하는 거죠. 하나는 다윗이고 다윗 외에 전부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겁니다.
암논이 그렇게 할 때 다말이 희생자가 되고 오빠 압살롬 집에 있었습니다. 처녀의 티를 내는 공주 옷을 그 현장에 잃어버렸어요. 나는 이제 처녀가 아닌 데 나를 쫓아냅니까, 하니까 아내 삼을 마음 없다고 강제로 무조건 몰아냈어요. 그래서 다말이 오빠 집에 가 있었어요. 오빠는 다말은 그냥 가족으로 사랑했겠지요. 사랑은 뭐라 했습니까? 소유입니다. 다말을 건드린 것은 압살롬, 내 것을 건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가족을 사랑한다는 말은 태생부터 갖고 나온 나의 소유욕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거예요.
내 자식이 유치원 달리기 1등해야 돼. 남의 자식 1등하는 건 싫어. 나의 질투심을 유발해요.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뭔가 자기 소유에 둘러 싸여 살아요. 자식을 건드리면 날 건드린 게 돼요. 이걸 존재의 확장이라 합니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이겁니다. 신체만 내 것이 아니고 신체에서 확장된 것도 내 것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초보운전시절에는 보닛 앞에 있는 물체와 부딪칠까 걱정하잖아요. 벌벌 떨면서. 그런데 운전대를 해보면 운전대와 차가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 누가 피아노를 증정했는데 얘들이 피아노로 장난치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있는데 그 피아노를 증정한 집사님한테는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교회 꽃꽂이도 마찬가지고. 교회 갖다 바치는 게 화근이라. 그것만 주시해. 혹시 누가 흠집 낼까 싶어서. 내 존재의 확장이기 때문에.
헌금이란 내게서 떠나가야 헌금이 되는데 헌금해도 나를 떠나지 않으면 그 교회에 투자한 게 돼요. 주식을 산 게 돼요. 결국 교회 문제 있으면 누구 지분이 많은지 발언권과 관련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권사가 장로님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니까 장로가, “권사님, 이 교회 얼마 다녔어요? 헌금 얼마 냈어요?” 지분 문제로 나와요.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했다는 소식이 아버지 다윗의 귀에 들어갔거든요. 다윗은 인간적으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자기 소유 아닙니까. 자식은 소유거든요. 자기 소유를 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치는 거예요. 암논을 치면 내 자식 치는 거니까 만약에 암논을 덮고 봐주게 되면 피해 입은 가정, 압살롬이 싫어할 거잖아요. 다말은 뺍시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니까.
그래서 그냥 덮고 가는 거예요. 여기서 압살롬은 아버지를 못 믿겠다는 거예요. 압살롬의 계획은 아버지의 소유권에서 본인의 소유권으로 따로 설정하겠다는 거죠. 그게 반란입니다. 반란이란 나는 이제 당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암논을 죽여 버립니다. 암논이 그런 나쁜 짓을 했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쳐낼 수 없는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다윗 본인이 설정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가정에 관여한 거예요.
그런데 압살롬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암논을 봐준 게 돼요. 아버지 다윗도 간음했잖아요. 간음했음에도 주께 사랑을 받았지요. 그게 아버지의 위상이고 아버지의 자리에요. 아버지 신체 말로 깔고 앉아있는 방석이란 말이죠. 방석 자체가 용서 위에 앉아있는 겁니다. 방석이 더 중요해요. 우리 인생이 어떻게 남보란 듯이 사는 인생보다 내가 깔고 앉은 십자가 피 묻은 방석이 더 중요하다니까요.
그걸 압살롬이 끊어버립니다. 양털 깎는 축제가 있어서 다윗의 아들들 다 불렀는데 보는 앞에서 암논을 죽였습니다. 죽인다는 것은 힘이 센 거예요. 힘이 세다는 것은 소유의 능력이 남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자기 소유권을 유지하는데 강력하게 굳어져있단 말이거든요. 어지간해선 소유권이 안 깨진다는 걸 보여준 겁니다.
압살롬이 자기 소유권으로 왕 되겠다면 백성들은 뭘 봐요? 백성들의 오해한 것이 다윗을 강력한 왕으로 본 거예요. 영토가 넓었으니까. 힘 때문에 강력한 게 아니고 다윗이 보여주는 천국은 힘의 강력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용서의 강력, 간음과 살인했음에도 구원받는 사랑의 강력함인데 그 사랑은 안 보이고 그저 누가 힘이 세냐? 지금 대세가 어느 쪽이냐? 대세가 이미 압살롬으로 기울여졌다면, 하나의 대세가 치고 나온다면 마치 그쪽이 대세인 것처럼 시늉을 해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대세라고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딸려갑니다.
하나가 이슈가 된다는 것은 사회질서가 재편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예상하면 안 돼요. 갑자가 돌발 사태를 일으켜요. 압살롬이 다 죽인 게 아니고 암논만 죽였는데 들리기는 왕자들 다 죽였다는 소식 때문에 다윗이 낙담을 했고, 다윗언약이 특징은 뭐냐? 아들이 왕이 돼야 되는데 솔로몬은 어려서 그 힘의 대결장에 끼어들 수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압살롬에 넘어갈 입장이 됐어요. 여기서 중요한 게 다윗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옛날에 내가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다윗에게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해요. 압살롬이 그렇게 나한테 해를 끼쳐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줄 것이라고 시므온이라는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말했어요.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어디 출신이냐 하면, 다윗이 유다지파거든요. 사울이 죽고 난 후에 베냐민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되는데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왕이 되니까 억하심정들이 베냐민지파에게 잠재돼있지요. 잠재돼있던 것이 다윗이 어려울 때 네가 하나님께 벌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한 거예요. 다윗이 한 짓거리를 보니까 벌 받아도 싸다는 거예요. 다윗은 절대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옛날에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교회 안 다녔기 때문에 이런 고생한다는 것은 버림받아야 될 지옥 가야 될 생각인 거예요. 그런데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 이런 나쁜 결과가 온 게 아니고 주께서 그게 선이고 옳기 때문에 주신 거예요. 원인은 주님한테 있고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영생 얻게 하기 위해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건의 원인은 우리한테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다윗언약에 속한 사람의 생각이에요.
이것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겁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이 울고 기도하는 이유가 반성하잖아요. 반성을 왜 합니까? 내가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로 벌 받았다고 하는데 그 사고방식 자체에서 벗어나야 돼요. 그게 제일 힘든 거예요. 인생에서 제일 힘든 게 내가 행동 똑바로 안 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는 것에서 벗어나야 돼요.
반대로 내가 행동 잘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하는 그 발상에서도 같이 벗어나야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 나란 자체가 결과물이고 선물이에요. 선물 받은 사람은 선물 준 사람을 증거 하면 되지 나를 거기에 끼어 넣으면 안 됩니다. 잘했기 때문에 복 받았고. 그런데 그걸 자꾸 우리는 테스트해요. 인생을 살면서 쓸데없이 매일같이 테스트합니다. 오늘은 기도가 잘 되네. 아마 오후 쯤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압살롬 같은 그리고 압살롬을 따르는 잘못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육이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걸 시편 3편에서 지적하지요. 2절에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매일같이 주입시킨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안 돼. 이렇게 교통사고 나니 나는 안 돼. 지옥 갈 거야. 난 나쁜 사람이야. 태어날 때부터 우린 죄 속에서 태어난 걸 모르고 나쁜 짓해서 벌 받는 차원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자꾸 자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정말 제가 강의 더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만 바꾸면 돼요. 그게 바로 적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마귀가 계속 적이 되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너, 행동 똑바로 안 하면 네 미래 없어. 넌 몰라도 네 자식들, 삼대를 작살내는 거야.” 이런 생각은 내가 나한테 한다고. 내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원수가 바로 나야 나. 다윗을 보여주시면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찬양하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면 돼요. 그게 바로 나 아닌 내 안에 계신 주님은 새로운 나를 만든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신 영생 쪽으로 가게 하신 주님을 못난 모습을 통해서 얼마든지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속임을 당했고 또 내가 나를 속이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자랑하고 소유권을 확보하려는 저희들 이제는 이런 짓거리에서 벗어나서 주님만 감사하고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