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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생산된 왕 (삼상 10장7절 -10장 27절) 대전- 34강자유게시판사무엘상

생산된 왕 (삼상 10장7절 -10장 27절)
대전- 34강

이근호

2018년 1월 30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0:7-27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삼상 10:13)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삼상 10:14)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삼상 10:15)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삼상 10:17)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삼상 10:18)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삼상 10:19)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 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삼상 10:20)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삼상 10:21)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삼상 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삼상 10:23)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삼상 10:25)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삼상 10:26)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
(삼상 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사무엘 상 10장 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과 만나는데 이 두 사람의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해서 선지자가 위에 있고 왕은 그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이한 일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왕이 위에 있고 선지자가 그 밑에서 보조하고 있지요. 나라의 책임자가 왕이라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보겠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나라(민족)이 먼저 있고 왕을 책임자로 세우는데 책임자는 두 가지만 하면 되요. 첫째는 외부의 외세를 막고 둘째는 내부의 질서를 잡는 거에요. 질서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냐하면 세금으로 필요한 비용을 대는 것이고 외세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총 책임자의 역할이 바로 왕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왕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를 해달라는 것이지요. 잘 살게 해주고 적들에게서 보호해달라는 겁니다. 만약 적들에게 패하면 노예가 되요. 노예라는 것은 자기의 존재성이 바뀌는 겁니다. 노예의 반대가 주인이거든요. 주인으로 살다가 노예가 되어 보세요. 주인은 명령하는 자이고 노예는 명령 받는 자인데 자율성이 사라지지요. 박탈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자율성을 쥐려면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계속 유지하려면 책임자(왕)에 의해서 협력 체제가 되어 되겠지요. 오늘 날 생물학에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사회적인 왕 체제를 어디에 비유하냐 하면 보통 두 가지로 비유하는데,

하나는 개미이고 또 하나는 벌에게 비유를 합니다. 벌과 개미의 특징이 다른데 벌들에게 여왕 벌이 있지요. 개미는 지도자가 없어요. 이것을 집단 주체라고 합니다. 집단에 의해 주체처럼 움직이는 것. 인간은 사회가 있음을 뭐로 보냐하면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에요. 인간들은 자기들이 사회에서 현재 살다보면 자기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있어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옳다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옳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북한 같은 경우에 북한의 모든 제도가 주민들에게는 뭐를 자꾸 각인시킵니까? 현재 북한의 사회를 민족적 사회주의라고 해요. 같은 민족끼리, 민족적 사회주의를 정당화한다고 자꾸 북한에서는 그러는데 세상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데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민족적 사회주의를 구성화하고 정당화하려면 필히 하나의 살아있는 종교 또는 살아있는 교주가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북한은 종교 단체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됩니다. 교류가 안 되는데 무슨 대화가 되요? 이용할 뿐이지요. 아까 책임자(왕)를 내세운다고 했는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상적으로 본다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방문합니다. 방문하기 전에 이미 긴 그림자를 구약에 드리우고 방문해요. 이것이 먼저 말씀이 주어지고 말씀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겁니다. 4복음서에 보면 내가 온 것은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어느 인간도 수 년 천의 말씀이 자기에게 적용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이지 바르고 착하게 살자는 것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것이고 예수님은 바르게 살자는 게 아니에요. 말씀을 응하게 하려함이다에요. 성도라는 것이 요엘서에 의하면 마지막에 메시야가 오고 난 뒤에 성령을 받은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 본인의 결심이나 교회에서 앞에 손들고 나온다고 성도가 아니에요. 천국에 가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도 나무나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류 작업을 계속해서, 보자~해서 아버지가 보내신 자만 되고 거기에 목자가 등장하고 그 양은 목자를 알아 보고 또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이 냉정한 작업이에요. 거기에 뭐를 빼느냐 하면 자기감정에 즉, 스스로 매료되거나 빠져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울고 불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지요. 마태복음 25장에 울고 불고 했는데 못 들어간 사람이 있지요. 어리석은 다섯 처녀, 얼마나 울었겠어요. 문 열어 달라고, 그런데 문이라는 것이 왜 있느냐 하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거에요. 아주 역설적인데, 왜냐하면 문이 없으면 산이나 들이나 아무데서나 신을 부르짖으면 천국가면 되잖아요.

심지어 바다에서도 부르짖고 산에서도 부르짖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벧엘, 벧엘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늘의 문이지요. 문을 지정했다는 것은 산이나 들에서 백날 부르짖고 철야하고 안 받는다는 겁니다. 문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천국이 허락된 거지요. 벧엘을 통과하는 사람. 이번 수련회에서도 엘리사와 엘리야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갈에서 벧엘, 벧엘에서 여리고, 여리고에서 요단까지 갔을 때 왜 그렇게 길갈까지 가서거꾸로 요단으로 다시 당기냐 하면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코스대로 하신다 하셨거든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에요.

약속이 유지돼야 되지 본인들이 유지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선 민족이 혈통만 유지되면 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약속이 유지 될 때만 나라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 할 때는 세상 나라처럼 되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하나님이 왕 됨을 거부한 셈이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지요. 망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자기 약속은 인간들이 거부한다고 해서 실패로 끝날 약속이 아닙니다. 인간의 거부는 거부대로 가고 그 거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약속을 자기가 성취한다는 것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바로 천국 백성인 거죠.

내가 내 힘으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 해줄 사람, 그 증언할 사람이 예수님 이전에 구약에서 긴 그림자로 나타났습니다. 선지자인 거죠. 보통의 나라에는 왕이 있고 왕 밑에 월급 받는 선지자가 있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가 먼저이고 왕은 없습니다. 나라도 없어요. 선지자가 잠복되어 숨겨 놓은 나라가 등장하면서 덩달아 왕도 같이 생산해 내는 작업, 이것이 바로 사무엘상의 긴긴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보통은 사람들이 돈을 내어 교회를 짓습니다. 부동산의 교회를 짓고 등록도 하고 이렇게 교회가 있고 교회가 운영 되려면 목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있고 목사 불러다가 인건비 주고 한 1년 해보고 교인이 좀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면 계속 붙들고 안 늘어나면 갈아 치우기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디에서도 사용하냐 하면 절에서 많이 해요. 절에선 돈 많은 아줌마가 중 한 명 불러서 반반 갈라 먹기 해요. 중에겐 얼마 안 돌아 갑니다. 절만 지어 놓으면 돈이 되거든요. 중은 뭐하느냐 사주 팔자만 보면 되요. 염불은 테잎 틀어 놓으면 되고 그냥 사주 팔자만 봐도 장사가 되게 되어 있어요. 얼마 전에 세종 병원에서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그때 위령제 할 때 보세요. 대부분 중들이 해요. 세상은 이렇거든요.

그런데 선지자는 없고 성령 받은 사람이 교회를 만들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를 만드는 소간은 누구에게 있냐 하면 하나님에게 있고 새 언약에 의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반드시 오게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성령을 보낸 자는 누굴 만나게 되냐 하면 결국 형제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형제를 만날 때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왜 그러한가? 십자가 복음은 형제가 아니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기본적인 생각은 우리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습니다에요. 지옥 가야 된다는 것이에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가 기본이 되기 때문에,

그 기본을 자기 위주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냥 튕겨 나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듣기는 들ㅇ도 깨닫지 못하는 게 정상이에요. 오히려 깨닫는 다면 의심스러워요. 계속해서 테스트 해봐야 되고 추궁해 봐야 되요. 저 사람이 자기 의를 지키고 자존심과 체면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 성령께서 저 사람을 인도하는 지를 계속해서 의심을 해봐야 되지요. 의심해 본다는 것은 복음 아닌 것은 헤어져도 괜찮아요라는 기본 베이스를 깔고 해야 되요. 성령을 받아 복음을 알았잖아요. 다음엔 누구를 테스트 하냐 하면 가장 가까운 부부끼리 해보죠. 아내나 남편을.

내가 아는 기쁜 소식을 전해보자 하고 백날 전해봐야 씨도 안 먹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그 다음 구절이 있어요. 개 한테 진주를 주지 말아라! 완전히 개 되어 버렸어요. 지옥에나 가버려라! 그렇게 통하지 않는 갓을 사람들이 자꾸 섭섭해 하는 데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요. 왜냐하면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아담의 자손인데 왜 나는 거부감 없이 술술 넘어 오는 데 그게 이상한 거에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되요 내가 뭘 노리고 믿는 건가? 억지로 믿는 건 아닌가? 안 믿어지는 믿으라 하니까 억지로 믿는 건 아닌가 자기 자신을 자꾸 살펴봐야 되요. 물론 스스로 살펴보는 것도 있지만 주께서 친절하게 못 믿는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친정 집안의 오빠라든가 사람들의 핍박이 화살처럼 날라 오지요. 환란과 곤고, 핍박이나 기근 이런 게 막 날라 옵니다. 그럴 때 생각하지요. 내가 뭐 잘난 것도 없는데 유난 떨 필요 있나 그냥 양보하고 대충 믿으면 되지 않나 하고 다른 사람들과 틀어지면 내가 힘드니까 애들에게도 이상한 교회 간다고 욕하니까 그냥 편한대로 살자? 싶어도 성령이 용납하지 않아요. 쉽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넓은 길로 가는 것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아요. 모든 것은 넓은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게 아니라 너는 어차피 좁은 길로 가게 되어 있어 라고 확인시키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안 믿는 나라와 언약으로 만든 나라의 차이를 아시겠지요. 친히 성도를 만드는 나라를 생각해 보면 실패를 유발하는 역사를 각오하셔야 되요. 우리의 인생은 실패해야 되지 성공하면 안 됩니다. 실패를 유발하는 역사는 역사 자체가 실패의 바닥위에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일단 약속의 땅에 들어오고 거기서 안정이 되니까 거기서 뭘 끄집어 내냐 하면 성공이라는 것을 끄집어내요. 성공이나 희망과 기대를 계속 요구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요구한다는 전제는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돼! 그럴 권리가 있어라는 것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권리나 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나와 들어간 것이 아닙니까? 그 과거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은혜를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데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받아 안정되면 모든 것이 이만 하면 됐다는 식으로 안심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 인데 이 정도만 되면 내가 천당까지 가는 데 아무 지장 없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습니다. 신명기 8장 11절을 보게 되면 12-13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거주하며 번성하여 소유가 풍성해 지면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린다

(신 8: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신 8: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신 8: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잊어버리는 거에요. 왜 이젠 도착점에 다 도달했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다 가졌기 때문에 이젠 하나님을 멀리해도 되 않겠냐는 겁니다. 안개가 지척을 분간 못하게 끼었을 때 산의 최고 지점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안개 때문에 직접 걸어 가봐야 되지요. 안개가 없을 땐 멀리서도 산이 다 보이겠지만 안개가 끼면 바로 앞 3-4m 밖에 안 보이잖아요. 산의 최고 지점을 잴 때는 직접 걸어 가봐야 되겠지요. 그러면 경사를 조금 씩 올라가게 되면 어느 지점에서 평평해 지는 순간이 될 거에요. 그 때 동서남북에서 다 내리 막 경사가 보이면 그 곳이 정상이잖아요.

사람들이 신앙을 하며 복음을 알고 난 뒤에 그것을 이용할 요량으로 목표를 정하는 데 이 정도 될 때 까지 하나님 도와 주세요라고 빡세게 기도해 보고 점점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죠. 헌금도 더 해보고 열심히 봉사도 더 해보고 어느 정도 되면 아이들도 시집 장가 다 보내고는 더 이상 기대 할 것이 없어져요. 그저 몸이나 좀 안 아프면 되고 갱년기나 수월하게 지나가고 하면 모든 것이 멈춰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정상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습니까? 갈수록 더 큰 언덕이 나오잖아요. 본인은 내리막 길이라 안도 하지만 사실 도착하지도 않았어요. 배부르고 좋은 집 짓고 장사 잘 되고 농사 잘 되면 그게 전부입니까?

더 큰 언덕이 기다리는 거에요. 더 큰 언덕은 십자가에요. 신약까지 이어져야 하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해 지니 여호와를 찾지도 않아요. 배부르니까 그 때는 바알을 섬기고 제사도 참석 안 하고 절기나 말씀도 안 듣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십자가)정상까지 보내기 위해 어떤 작전을 세우시냐 하면 압박을 가해 갑자기 하는 일이 꼬이지요. 가졌던 것 다 아까울 정도로 내리막길로 가겠죠. 그러면 또 뭘 오해하냐 하면 전 으로 돌아갈 수 있게 회복해 달라고 기도해요. 오년 전에 십 년 전에는 참 좋았는데 십 년전이 뭐 그리 좋아요? 주님 안 바라보던 시절이 그렇게 좋던가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던가요? 주님 없이도 내 혼자 살아왔다는 그런 시절이 그리워 지던가요? 아니잖아요. 다른 길로 가게 해요. 전에 가던 길이 아니에요. 전에 직은 언덕을 오를 때는 기도하고 헌금하고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 이조하고 선교 헌금도 하고 온갖 것 다 하다가 정상에 올라 얼마 안가서 다 일어 버릴 때는 그 시점에선 뭘 해야 됩니까? 다 해 봤는데 다 해봤는데도 미끄러졌다면 뭐해야 되요? 아무것도 하지 마라지요.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오르기는 결코 천국에 도달할 수 없는 타고난 종교적 놀이에 불가한 겁니다. 종교적 승부걸기, 내 경건과 윤리, 도덕을 가지고 까부는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해요.

주님은 십자가 정상에서부터 마중 나오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디에서 만납니까? 최저 바닥에서 만나지요. 그야말로 초 죽음 상태, 정말 하나님 이야기만 나와도 예수님 이야기만 나와도 죽이고 싶은 극한 자기 교만, 자기 의, 이제는 내 안에 악 이외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그 지점에서 주님은 피해자로 등장합니다.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동행해서 주께서 아무도 갈 수 없었던, 길이 있긴 있었어요라고 물을 정도로 하고 가지요. 가는데 안개가 자욱해요. 어디로 갈지 우리는 못 정해요. 우리의 결심과 선택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이것을 네 자로 줄이면 막 살아라!

나의 결심과 선택이 나의 구원에 하나도 영향을 끼치지 못 한다는 것을 더 확고히 깨닫는 겁니다. (안 좋은)어떤 일이 벌어 졌으면 내가 행실을 잘못해서가 아니고 주님께선 원인과 결과를 나에게 두는 그러한 썩어빠진 옛 사고방식을 놓아버리도록 내가 잘못해서 이런 나쁜 결과가 왔다는 자기 행위와 결과를 결부 시키는 것을 아예 잘라 버리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모든 원인은 이미 확정 되어 그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찾아가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어떻게 제가 구원 받았습니까? 묻지요. 전에 같으면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았지요 할 텐데 이제는 원인을 주께선 계속 숨겨 놓고 인도하시니까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하면 이젠 알지요. 아버지와 아들의 단독 회의에 의해서 창세 전부터 결정된 대로 너는 그런 인생을 살라고 지정해 주셨다는 거에요. 지정받은 사람, 즉 선택된 겁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한 선택들을 해요? 안 해요? 계속 하고 있지요. 그 선택을 무산시키는 선택, 우리 보고 선택 하지 말라가 아니고 선택은 하되 우리는 선택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막 살아도 선택하게 되요. 결정하고 결정 할 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고 상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무산 시키는,

그 선택과 결과가 현실과 전혀 매치가 안 된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시키시는 겁니다. 자유 아닙니까? 이게 자유거든요. 만약에 내 선택이 나의 구원을 이룬다면 그런 결과를 낳게 되면 우리는 수 없이 작은 산들을 오르려다 지옥 갑니다. 우리가 아는 거잖아요. 선택을 한다는 것은 미리 확률 상 아는 것을 선택해요. 확률이 50% 와 25%가 있으면 둘 중에 50%를 선택 하거든요. 주님의 선택은 주님만 아는 선택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것을 에베소서 1장 4-5절에처럼 우리가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몰라야 되고 알 필요도 없는 거에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니까요.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왜냐하면 내가 알아서 천국 갈 것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데 이미 요나가 큰 물고기 안에 있을 때 뱃속에서 물고기를 발로 차며 “그 방향이 아니야! 이쪽이야!”이렇게 했습니까? 그냥 물고기가 요나를 데려 갔고 원래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에요. 그래서 니느웨 앞 바다에 내려놓은 거에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만 했지 도착 지점이라든지 날짜를 알았겠습니까? 안에 시계가 있었겠습니까? 노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뭐냐하면 네가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치든 발악을 하던 기도와 헌금을 하던 선교를 하든 그런 것은 나의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 노아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노아 언약을 통해서도 이런 점이 나와야 되요. 노아 언약의 특징은 그들이 가둬져 있다는 겁니다. 갇혀 있다는 것을 슬프게 여기지 말고 감사히 여겨야 되요. 가둬져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겁니다. 나의 선택이나 결심 같은 것은 갇혀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도하는 데로 맡기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뭐라고 했어요? 사랑은 미리 죽는 죽음이라고 했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 줘 버리는 거에요.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여야 되요. 사람이 살면서 나는 사랑 없이는 못살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떻게 사랑 없이 삽니까? 혼자서 얼마나 힘듭니까? 다 줘도 즐거운 사람을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돈 많고 인기 많으면 뭐 합니까? 사람은 기대는 데서 자유를 얻어요.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고 나에게 지적 질 안 하고 어떤 것도 용납하면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 신약에서의 마지막 계명은 사랑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할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에 미국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할 때 요한 일서 3장 16절에서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마세요. 헌금도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웃 사랑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빼앗기는 것이지 뭘 하게 하지 않아요.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뭘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헌금을 해놓고 자유를 빼앗겨 버려요. 다음에 또 해야 되네 하고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결심을 해야 되고 선택을 하게 되면 마귀의 꾀임에 빠진 것이 되요. 끝까지 돈 쓰지 말고 버티세요. 미쳤나! 너에게 돈 주게! 그런데 울컥하듯 저 인간에게 돈을 안 주면 안 되겠다 하면 그것은 빼앗기는 거에요. 빼앗기는 것은 특징은 줘도 내가 줬다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게 됩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되요. 강도에게 빼앗기듯 되는 데 그럴 때 주께 돌리지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언약 안에서는 모든 것을 손 놓아 버리는 겁니다. 손 놓는 것이 자유라 했지요.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내가 결심하지 않고 손을 놓아 버리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사무엘 상 10장에 나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이방 나라에서는 민족의 구성원들이 있는데 그들이 왕을 뽑는데 왕을 책임자로 보지요. 뭘 책임져 달라? 우리 자손들의 족보를 지켜 달라는 거에요. 시키는 대로 할테니까 .외세로부터 지켜주고 내부의 안정된 질서로 내 것 지켜 달라는 거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라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선지자를 보내고 그 밑에 백성과 왕을 생산 하지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백성을 위한 왕이라든지 왕을 위한 백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세상 나라와 달라요.

그래서 세상 나라와 자꾸 싸움을 붙여요. 저쪽에서는 힘으로 하려는 싸움이고 이 쪽에서는 언약만 믿으면 승리하는 거에요. 승리 할 때는 자연 현상과 결부되어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의 자연이라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아니라 세상 자연도 하나님의 언약 작업과 연동하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할 때 갑자기 뭐가 멈췄어요? 해가 멈췄지요. 그리고 뭐가 떨어졌어요? 우박이 떨어졌지요. 해와 우박으로 이겼어요. 다시 말해 약속의 땅은 약속된 사람들만 살아야지 너희는 살 곳이 못돼! 자연 현상도 도와주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오지요.

천국이라는 곳은 새 언약에 의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이 되는 순간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지옥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은 나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누구냐를 병행돼서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추수 작업입니다. 추수 작업은 알곡만 건지는 것이 아니에요. 반드시 가라지도 가라지 답게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나만 구원 받는 다면 이기적 구원관이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구원하면 실상이 드러나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속의 밝혀짐이 드러남으로서 구원과 동시에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가 되게 되어 있어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니까.

전도는 그렇게 하는 거에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멀리 간다고 전도가 아니라 그냥 살면서 전도 되게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게 추수 작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한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란 이런 것이다라고 요한복음 4장에서 그렇게 말씀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백성과 왕 사이의 직접적인 고리를 끊어버립니다. 끊어 버리고 왕이 되려면 반드시 언약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다가가야 되요. 그 언약의 말을 당시는 모세 이후이기 때문에 모세 언약 또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왕은 율법 책을 항상 옆에 두고 신명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왕은 곁에 여자나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율법에 의해 백성들에게 다가가야 되요. 백성도 왕에게 올 때는 자가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다가오면 안 되고 왕이시여!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되요. 신약은 언약 앞에 새 언약을 붙이면 되요. 새 언약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사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고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만나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피로 세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 세워서 되는 게 아니고 교회 세운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피를 내세워야 되고 그냥 피가 아니라 Rh⁺ Rh-헌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누구 때문에 흘린 피라는 것을 같이 갖추어서 내세워야 되요. 이 피는 나의 모든 행함이 죄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내는 피고 그 죄를 내 힘으로는 죄 씻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 죄를 대신 씻기 위해서 흘린 피 입니다라는 것으로 내놔야 되요. 그래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서 서로 갖고 있는 피를 내 놓으며 만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죄인입니다라를 내놓게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이번에 사법고시 3차를 통과 했는데 그것을 내가 참지 못하고 자랑 질 할 정도로 죄입니다. 이 놈의 자식이 자랑 안 해야 될 과제를 하게 힘을 쓰게 하네! 하면 옆에서는 우리 딸이 이번에 유학 갔다 와서 천재로 소문나서 남보다 5년 당겨서 박사 학위를 받아서 천천히 받아도 되는데 애가 성질이 급해서 시카고 대학에서 벌써 스카웃 돼서 교수로 가는데 또 남편이 좋다고 해서 치과 의사로 뉴욕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 강남에 있는 아줌마와 품위 없는 아줌마가 똑같이 되지만 어쨌든 마음은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시지만 주여! 내가 자랑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모든 행위 뒤에 자아를 붙이지 말고 죄만 붙이면 돼요. 공식 아주 간단해요.

처음부터 선지자는 이런 왕을 줬다는 자체가 기존에 있는 왕을 달라고 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행위입니다. 언약은 반드시 마지막에 예수님의 피로 마감되기 때문에 아까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긴 그림자를 끌고 왔다고 했지요. 그 그림자 중의 하나가 사무엘상의 이야기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피 흘릴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의 성질, 죄에 대한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왕을 줬다는 자체가 기존에 있는 사고방식을 고발하고 죄의 지적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지적을 어떻게 하는가? 22절을 읽어 보세요. 왕을 찾는데 부끄러워서 나는 못해요 하고 도망치고 있어요. 그 현장에서.

(삼상 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이것이 뭐냐 하면 기존 세상에선 왕이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잖아요. 그런데 가문의 영광은 커녕 나는 안 할 래요라고 피하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이 기존의 사고방식하고는 다른 것으로 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모습입니다. 장차 올 만 왕의 왕이 어떻게 왔습니까? 사람들에게 멸시와 모멸 받는 그런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27절 읽어 봅시다. 사울이 도살당하는 양 같아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다시 말해 우리의 선택을 신이시여! 우리의 결제 판에 싸인해 달라는 겁니다.

(삼상 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자는 내가 은근히 생각했던 구원의 코스, 구원의 길과는 전혀 예상 못한 다른 길로 갑니다. 안개 낀 장충당 공원처럼 길이 없어요. 그냥 살 수 밖에 없지요. 맡겨야 되지 우리 식으로 계산해서 이렇게 하면 복이 올거야! 이렇게 하면 내 일이 잘 풀릴거야! 그것은 사단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지 주님의 세계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성질 드러내나 안 드러내나 모두 죄에요. 주께서 이미 죄를 해결 했으면 그냥 내놓으세요.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구원 하시지 인간이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자의 말을 들어야지 세상 말 들어서 뭐 할거에요.

예수 믿고 잘 됐다는 그러한 것은 지옥에서 보내는 하나의 유혹 거리입니다. 상당히 유의해야 돼요. 사울은 어디 사람이냐 하면 베냐민 사람입니다. 여기가 어려운대요. 사울이 베냐민 사람이라는 말은 애곱에게 열 두 아들이 생기고 난 뒤에 그 중에서 요셉이 그들을 구원을 해요. 요셉의 엄마는 라헬입니다. 야곱이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라헬이에요. 라헬과 야곱의 관계는 수요 설교에서 하고 있고 라헬에 의해서 두 아들이 생깁니다. 요셉과 베냐민이에요.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 나라에서 번창하게 만들어요. 눌러도 눌러도 번창하게 번창이라는 말은 복이거든요. 창세기 1장에서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는 것을 복이라고 해요.

복이라는 것은 증폭인데 이미 창세 때 완전한 성질을 증폭 시킬 때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그 성질이 유지 되냐에 초점을 맞춰야 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구원이라면 이것이 증폭되면 복이 되는 겁니다. 내 것이 많은 게 복이 아니라 죄가 많아 졌기 때문에 복이 아니고 나를 용서하신 사랑이 증폭된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복이 증폭되기 위해 우리는 점점 낮아질 수 밖에 없고 내 선택과 결심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많이 용서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사랑받는다는 원리에 의해서 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빈 공간이 많다는 거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쓸데없이 자기 결심과 노동의 결과들을 안보니까 비어 있는 자는 복이 있는 거에요.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천국이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당겨서 가는 거에요. 살아 있을 때 천국 가야 되요. 살아서 천국 못가면 죽어서도 천국 못갑니다. 살아 있을 때 성령이 와서 나의 마음이 허접하고 아무것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뭐라도 다 담겨 유지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못난이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나는 못난이기 때문에 뭐든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사울은 베냐민 지파인데 20절에 보면 나와요.

(삼상 10:20)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란 뭐를 상기시키냐 하면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라헬 계통의 두 지파 요셉과 베냐민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거에요. 왕이란 지도자급인데 옛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조건하에 왕이 된 겁니다. 베냐민 지파가 그런데 나중엔 결국 실패해요. 실패해서 유다 지파에 소속되고 왜냐하면 역사란 실패의 반복이에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분명 하나님이 있게 하셨지만 인간의 기본 바닥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언약을 수용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 벽을 넘어서 또 다른 언약을 준비 하시고 그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림자를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진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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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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