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2a 울산강의-레위기 17장 : 피와 몸
20180202a 울산강의-레위기 17장 : 피와 몸(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오늘 17장 할 차례인데 1장부터 16장까지 무슨 내용인지 다 잊어버렸지요. 지난 1월에도 안 했으니까 1장부터 16장까지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회상하듯이 중요한 포인트를 집어드리겠어요. 레위기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돼있으니까. 레위기 1장 1절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라고 돼있지요. 회막이란 성소 출입구 있는 데를 말합니다. 회막에서 모세를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임의로 따로 만들어주신 거예요. 회막이 없다, 성소가 없다면 어디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안 만나겠다는 뜻입니다. “감히 너희들이 나를 만나?” 그런 뜻이죠. 그러면 회막을 만들고 성소를 만들었다는 말은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너희 인간들은 나, 하나님을 만날 자격도 없고 권리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그걸 확실히 하는 없던 장소가 새롭게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음을 확정짓게 하는 장소가 회막입니다. 원래 회막은 하나님께서 먼저 만들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는 거죠. 있는 장소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게 아니고 장소가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일부러 하나님께서 회막이란 걸 만들어서 그 장막에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거예요.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회막이란 특별한 만남의 장소가 있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안 만나주는 것이 마땅한 건데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다면,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만날 때 은근히 기대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만나면 이것 요청해야지, 이 소원 들어달라고 이야기해야지, 하는 그 모든 것은 인간들의 부질없는 상상에 불과한 헛된 꿈에 불과한 겁니다. 만날 수도 없는 인간을 만나게 해줬다는 말은 그 만남에서 시작되는 모든 내용들은 인간이 상상도 못한 겁니다. 인간의 요구사항과 전혀 관련 없는 거예요. 이것을 오늘날 신약시대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은 인간과 만날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은,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보낸 게 아니란 것과 동일한 취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알기 위해서 애초부터 인간이 소원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과 만날 수 없는 요건이 돼요. 인간이 텅텅 비어있는 게 아니고 뭔가 내심 노리는 게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안 만나주는 이유가 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아는 방법은 이렇게 시작하면 되죠. 도대체 하나님 만나면 어떤 소원과 어떤 요구사항을 하고자 했는지 그것을 탐색해보면 되겠지요. 그것 때문에 안 만나줬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다 제거하면 돼요. 그걸 다 지워버리면 돼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제일 큰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거죠.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안 만나주는 거예요. 천국 들어갈 자격도 없으면서 천국 가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죽어서 천국 가겠다. 이게 욕심이죠. 사탄의 마음이에요. 차라리 노골적으로 마귀도 천국 넣어달라고 하지. 가룟 유다도 천국 넣어주고 악마도 천국 넣어주세요. 마음 어지신 신이십니다. 마귀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종교가 불교거든요. 대자대비 하잖아요.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말을 두 자로 줄이면 구원이죠. 마귀를 앞장세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구원의 하나님,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 교회가 장사 안 될 리가 없어요. 죽어서 좋은데 간다는데 마다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돈 몇 푼만 내면 구원시켜준다는데 그걸 왜 마다해요. 예수님은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되겠지요. 죽어서 천국 가겠다, 또는 저 구원해주세요, 할 때 사탄의 마음이거든요. 이걸 아니라고 반박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죽었다. 다른 말로 하면, 쓰레기다. 쓰레기를 성경에서는 더럽다, 오염되었다, 추하다, 또는 영광이 아니다. 로마서 3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다른 말로 “너는 죄인이야.” 너는 죽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언질을 줬어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너희가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약속대로 준수할 의무에 따르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으면 결국 마땅히 죽어야 돼요. 구백년 살아도 소용없어요. 살고나면 결국 내가 죽는다는 것만 남지 구백년 살았다는 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노인네가 구십을 살았다. 구십년 살았는데 뭐 남았습니까? 남기는 뭘 남아요. 초가 타게 되면 남는 건 뭐가 있습니까? 초가 남습니까? 그냥 까만 심지만 타들어갈 뿐이지 남는 게 없잖아요. 인생 구십을 살았다. 자식 다섯 명 키우고, 뭐 쓸데없는 소리나 하지 본인이 뭐 남았어요? 곧 내일모레 죽는 시신이 되어가는 모습, 이제 병원도 감당 안 되는 숨도 못 쉬는 그런 답답한 숨소리, 그런 것만 남는 거예요. 과거에 대기업 임원하고, 내가 옛날 목사였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지금 뭐가 있느냐? 젊을 때 머리카락 새카맣고. 몇 십 년 지나면 허연 것도 다 빠졌는데. 뭐가 있어요. 이빨도 다 빠졌는데. 틀니도 안 맞을 때 결국 남는 건 뭐냐? 내가 죽는 게 사실이구나. 죽인다고 하셨는데 진짜 죽이시네. 주님의 음흉만 말씀만 남아요. 세상의 모든 것은 안개 같이 사라져도 남는 것은 주의 말씀의 확실함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우리의 똑똑함이 아니라 주의 말씀의 정확함,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온 거예요. 이미 죽은 거예요. 쓰레기에요. 아까 말씀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회막 자체가 하나님은 인간을 안 받아준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증거물로 준 게 회막이에요. 회막은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오셔서 비로소 만들게 하신 거잖아요.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게시니 비로소 발생된 게 회막, 만남의 장소란 말이죠. 말씀이 없으면 만남의 장소도 없는 거죠. 장소가 없다는 말은 안 만나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인간 왜 만나주는데. 그래서 회막으로 말미암아 안 만나준다는 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 회막이 있으면, 원래 200규빗, 100규빗으로 직사각형인데 정사각형 두 개로 생각해야 돼요. 여기 제단이 있고. 동쪽에 문이 있어요. 에덴이 동쪽이니까. 생명나무 가는 길이 동쪽이니까 동쪽에 문이 있고 북쪽은 막혀있고 이쪽도 막혀있고. 이 회막을 볼 때 사람을 전부 다 좀비 화 시키는 겁니다. 회막에 올 때 산 사람으로 오면 안 돼요. 죽은 자임을 분명히 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확정시키는, 회막의 기능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회막이 산 사람을 좀비, 죽은 귀신으로 하는 방법은 뭐냐? 레위기 1장에 “그 예물이 소이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서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3,4) 오늘 17장 하는데 1장부터 16장까지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다시 스토리로 연결시켜보자는 말입니다. 전에 했던 연속성 가운데 17장이 있어야 되니까. 7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어떻게 합니까? 제물을 가져왔는데 안수를 한단 말이죠. 안수한다는 말은 전이된 거예요. 이쪽이 본질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안수거든요. 제물에다 모든 걸 이양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물의 움직임은 곧 나의 움직임이에요. 소나 양, 염소. 그러면 진 밖에서는 분명히 사람이지만 안수를 함으로써 회막 안에 들어가면 사람은 소나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움직인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그 소나 양, 염소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면, 제단에 불을 피우고 그 다음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고, 9절에 보면, 단 위에서 불살라 버리죠. 쓰레기나 마찬가지란 말이죠. 죽어 마땅하다 이 말입니다. 소나 양, 염소가. 소나 양, 염소가 진 밖에 나오면 일반인들이에요. 평범한 울산시민입니다. 평범한 울산시민인데 회막 안에 들어가면 소나 양, 염소가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몽땅 불태워서 없어져야 될 존재가 되는 거예요. 죽은 존재란 말이에요. 인간끼리 있으니까 서로 살았습니다. 형님, 아우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가면 형님이고 자시고 간에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죽은 존재를 불태웠을 때 9절에 보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 하나님의 응식은 냄새에요. 하나님의 약속대로 진행된 그 결과물을 냄새라는 형식으로 받아 챙기시는 것이 하나님을 배부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양식이 돼요. 이 번제의 최초는 창세기 8장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정결한 새를 잡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사람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흠향하시고, 기쁘게 받으셨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세상 것을 통해서 분명히 노출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노력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보이는지 몰라요. 따라서 레위기를 줌으로써 네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지? 기다려. 내가 레위기 율법을 줄 테니까 그 율법 따라와.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 거야. 그러니까 레위기를 보게 되면 억지로 이 땅에서 살려고 하는 모든 스트레스와 마음의 부담을 다 털 수가 있어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죽은 귀신처럼 돌아다니는 거였구나. 바이어 만나고 한 건 수 올리고, 뭐 하고 같은 귀신 만나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가족이 네 식구인데 하나가 생일이다. 귀신 넷이 모여서 죽을 양식, 케이크 먹고 그 다음에 죽을 귀신 태어났다고 노래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레위기 입장에서. 교인들이 교회에 왔다. 이건 죽은 귀신 열댓 명 와서 예배란 걸 드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가 살게 된 것과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구분해야 돼요.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직도 여러분을 안 죽이시고 살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레위기 때문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울산의 레위기. 레위기로 울산바닥에 살도록, 움직이는 레위기로. “네 눈에 내가 살았다고 보지만 사실은 죽은 귀신이야, 좀비야.”라는 식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회막인데 옛날 언약이니까 레위기잖아요. 옛날 언약의 완성체가 있어요. 그게 바로 다 이뤘다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보게 되면,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죄 없지만 죄인 되신 분이 있어요. 그분이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죠.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말은 하나님한테 버림받는 거잖아요. 그게 우리가 미처 내 자신에 대해서 몰랐던 진짜 내 모습을 예수님이 대신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 앞에 네 모습은 내가 버림받은 그 모습이란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내 모습 보려면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돼요.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이 당했던 그 체험이 우리에게 그대로 일어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답변 들으나마다 버릴 만해서 버렸지요. 죄가 있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버려야지요. 죽이고 없애버리고. 그리고 죄인을 죽이고 없앰으로 말미암아 누가 흐믓하고 만족스러우냐 하면, 하나님이 만족스럽고 기쁜 거예요.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내심 은근히 요구해야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을 요건이 된다는 겁니다. 만나주지도 않는 하나님을 만나줄 거라고 지레짐작 생각하는 그것이 사탄의 마음이에요. 안 만나줘요. 누구 마음대로 만나줘요? 안 만나주는데 이스라엘한테 특별히 만나주는 이유가,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니고 주제파악 하라고 만나주는 거예요. 어디 안에서? 번제 안에서, 레위기의 제사법 안에서. 그러면 번제하게 되면 몽땅 태우면 약간 기분 나쁘려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왜 나름대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죽으십니까? 이렇게 속으로 욱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이래도 죄 없어, 라고 속죄제, 속건제를 통해서 낱낱이 까발리죠. 어떤 사람은 오십년 동안 착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그런데 이 세상, 경쟁사회에서 착실하게 살았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집에서 홈쇼핑 하는 순간 여러분은 재래시장을 굶겨 죽게 만드는 죄인입니다. 온라인 쇼핑 때문에 오프라인 가게 다 문 닫게 됐어. 그건 생각 안 했지요. 자기 편리만 생각하고. 그리고 시장에서 값을 깎는다? 또 여러 명 죽였습니다. 부천의 어떤 건물에 2층도 pc방이고 5층도 pc방이에요. 둘이 손님 당기려고 싸웠는데 가격인하로 경쟁을 했습니다. 원래 1000원 받아야 될 사용료가 오기로 버티다가 300원까지 내려갔습니다. 문제는 300원 한다고 그 pc방에 가는 순간 1000원 받고 정상 영업하는 pc방주인들을 자살하게 만들어요. 범죄자입니다. 간접적 범죄자에요. 내가 살아서 이만큼 버텼다는 말은 나 때문에 이유도 모른 체 왜 내가 이렇게 가난해야 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그 굴레에서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해서 비록 학력은 낮지만 착실하게 살았다. 이상하게 착실하게 살았는데 계속 정규직 안 되고 계약직으로 떠돌다 나이 많다고 쫓겨났을 때 왜 나의 착함과 착실함이 남들 다 사는 아파트 하나 못 살고 빌라 월세 방을 전전하게 만드는지 그 내력도 이유도 모른 체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삽니다. 그것도 대물림해서. 뭘 착하게 살았어요? 존재한다는 자체가 범죄인데 뭘 착하게 살아요. 자본주의사회도 이렇게 연관돼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이란 것이, 내가 산다는 것이 자기 위주로 사는 입장에서 죽어서 천국을 가요? 하나님께서 그걸 인간으로 간주하겠습니까? 죽을 짐승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래서 레위기에서 계속 주장하는 것은 핍니다. 네 껍데기 말고 피를 내봐라. 그 피가 깨끗한 피인지. 결국 여기 회막 바깥에 있는 모든 백성의 피는 절대로 깨끗하지 않은 더러운 피. 그 더러운 피가 그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더러운 피가 몸의 내부에 활동하면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지요. 그걸 하나님은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걸 죽음으로 간주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회막을 줘서 그 인간들을 첫째는 너는 누구냐? 두 번째는 죽고 난 뒤의 혜택. 이 두 가지의 기능을 회막의 제사제도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죽고 난 뒤의 혜택이에요.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혜택이 입겠다는 이런 사람은 아예 하나님의 법을 전혀 이유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죽은 우리를 죽었다고 확정짓기 위한 법이에요. 로마서 3장에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입을 막고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그냥 숨 끊어진 정도가 아니에요. 저주를 받는 거예요. 아래 있는 것이 합당하다는 거예요. 그러한 정보를, 놀라운 진리를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말은, 너희들이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현장이 돼야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영생의 혜택이 그러한 절차를 거쳐야 얻게 되는 겁니다. 먼저 욕심내면 안 돼요. 나 착하니까 괜찮으니까 하나님 복 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 돼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돼, 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살았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누구냐?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은 거룩한 존재에요. 그러면 많은 쓰레기 같은 인간을 회막이 안치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을 제사장처럼 거룩한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이 회막 안에 있는 제사법을 통해서 성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하나의 모델케이스에요. 제사장은 아담의 자손이잖아요. 보통 인간인데 회막 밖의 일반인과 어떤 차이 나는가? 모세는 시내 산에서 차이 남을 계속 부여받게 됩니다. 복장부터 다릅니다. 속옷부터 복장 하나하나가 거룩의 혜택을 입은 자로 무장되죠. 거룩 안에 들어있어요. 그리고 제사장이 되기 위해선 복장만 갖추는 게 아니에요. 제사장이 활동하는 공간, 제사장이 접촉하는 모든 기구와 천막부터 해서 그 내용 사이에는 전부 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거룩한 기름과 피가 뿌려져 있어요. 기름과 피니까 기름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죠. 피는 그분의 죽음이 되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하면 예수 안에서 거니는 사람만 제사장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흘리신 피의 효과로 말미암아 선악과 따먹고 마땅히 죽을 인간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선악과는 생명나무의 뒷면이라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뒷면이라 했지요. 아담 이름은 흙이고 하와 이름은 생명. 속의 생명으로 인하고 겉의 남자가 살게 돼요. 그런데 세상에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속이 아니고 뒤쪽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에 보면 수컷을 잡아요. 수컷은 이 땅에 나타나는 대표자니까. 왜 여자와 남자 중에서 수컷이 되느냐 하면, 지금 소나 양, 염소가 인간을 대체하는 짐승이잖아요. 원래 들에 있던 소나 양이에요. 그러나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기 위한 율법적 작업에 소나 양이 개입된다면 인간을 대체물로 하나님 앞에 제단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제단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은 모델이니까 인간이고 소나 양은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죠. 짐승 같은 인간을 인간 같은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 바로 성막 안에서 이뤄진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큰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간 아니다. 짐승보다 못한 걸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짐승을 잡을 때 수컷, 암컷을 나눈다고요. 수컷을 남성을 의미하고 암컷은 여성을 의미하잖아요. 레위기 1장에서 수컷을 드린다는 말은, 이 땅 인간 세계에서는 아담이 대표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의 종속물이 돼요. 마지못한 종속물이 아니고 여자 자체가 남자를 사모하게 돼있어요. 그리워하게 돼있단 말이죠. 이 말은, 남자는 그 자체로 완성물이지만 여자는 미완성물입니다. 왜냐? 처음에 아담을 만들어놓고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어떤 목표가 될 대상이 없지만 여자는 그냥 여자로 사는 게 아니고 바라봐야 될 대상이 있어요. 결합돼야 할 대상이 있어요. 그게 남자에요. 남자를 돕기 위해서 여자를 만들었잖아요. 창세기 2장에서. 남자 입장에서 여자를 하대하고 무시하지만 그 여자 없이는 남자는 그냥 죽을 수밖에 없어요. 본래 죽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영생을 주기 때문에 무시하는 여자를 통해서 죄 없는 의인의 상태로 돌아갈 기회를 남자가 얻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의 이름은 죽어야 돼요. 흙이고, 여자의 이름은 생명입니다. 밖으로 드러날 때는 남자가 큰소리쳐도 여자의 생명의 효과를 남자가 흡수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어쨌든 수컷을 바침으로서 이 세상 대표자가 남자라는 것이 분명하고 수컷을 죽임으로 하나님께서 흐믓해 하시는 겁니다. 레위기 1장 17절에 보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러니까 인간들은 죽는데 기분 좋으신 분은 하나님. 속이 다 시원하다. 에스겔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어요. 내가 저놈들 저주하니까 이제 속이 시원하다고 돼있어요. 레위기 2장 11절에 보면 소제 이야기하면서 누룩을 넣지 말고 이스트 첨가하지 말고 꿀을 첨가하지 말라는 말은, 이제 좀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모델은 이전처럼 세상에서 양식을 자기 입맛대로 자기를 스스로 생존시키는 방식은 사는 의미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13절에 소금을 치라는 겁니다. 이스트 쳐서 말랑말랑해서도 안 되고 꿀 넣어서 자기 원기회복 할 필요도 없고. 소금을 친다는 말은, 너희들은 원래 네 식대로 생명을 공급해서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을 소제 드릴 때마다 회상케 하는 거예요. 그걸 분명히 해두는 겁니다. 나는 내 식대로 해서 사는 게 아니구나. 죽음의 또 다른 양상임을 알란 말이죠. 세상에선 물론 꿀을 넣고 맛있게 먹지요. 하지만 이렇게 산다고 해서 생명이 아님을 분명히 하란 말이죠. 제사를 통해서. 그 다음에 3장 17절에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했어요. 뭐든지 먹지 말라 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요. 이것은 창세기 2장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먹지 말라, 먹지 말라는 것은, 네가 스스로 너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골라 먹을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기름과 피는 네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죽은 너희를 생명을 줄 때 하나님의 만족을 경유해서 주어진 기름과 피가 그냥 생존이 아니라 영생을 주게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유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유한, 성막 제사를 경유한 기름과 피가 살리는 거예요. 이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회막 근처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죽은 시체에요. 이번에 수련회할 때 엘리야 이야기,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죽잖아요. 그럴 때 얼마나 낙심합니까? 선지자가 들락날락하다 애꿎은 아들이 죽으니 무슨 난리에요. 아들이 죽으라고 선지자 대접했습니까? 이건 마리아, 마르다 가정과 똑같잖아요. 나사로도 예수님 잘 섬겼는데 돌아온 결과가 뭡니까? 멀쩡한 오빠가 죽었잖아요. 참 기가 차지요. 예수님 섬기고 대접할 때 어떤 마음이 작용할까요? 나는 하나님을 섬길만한 자격이, 하나님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안 만나주는데 나는 특별히 착하니까 만날 줄 거라는 악마의 생각이 든 거예요. 예수님 섬긴다고 해서 별난 인간 아니란 말이죠. 오히려 예수님을 섬김으로서 더 건전한 장소에서 가까운 자리에서 정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고 천국 갈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알아야지요. 주님께서 나사로를 죽여 버립니다. 죽임으로 생존이냐, 아니면 생명이냐, 그 차이점을 깨닫게 하죠. 그동안 생존의 끈을 못 놓은 거예요. 죽기 살기로 살기 위해서 살은 거예요. 이유도 모릅니다. 사는 목적도 몰라요. 그냥 태어났으니까 생일축하 받으면서 돌잔치 가락지 받으면서 그때부터 줄곧 남들 사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 같이 따라가면서 살아 붙었어요. 공부들 하니까 공부했고 취직하니까 취직했고, 남들 결혼하니까 결혼했고, 아파트 사니 같이 살고, 남 칠순 하니까 칠순 했고, 요양병원 가니까 요양병원 갔고. 뭐에요. 그게. 넓은 길 따라 다 지옥 간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 같아. 우린 거기 물 한 방울 같고. 폭포에서 떨어지니까 다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질 때 신났지. 떨어지고 보니 지옥인데. 예수님이 개입해야 돼요. 예수님이 회막이거든요. 예수님이 만남의 장소 아닙니까.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이건 생존이었지 생명이 아니었단 겁니다. 그리고 생존에 있는 입장은 생명을 요구할 어떠한 권한도 없어요. 주면 받고 안 주면 그만인 안 줘도 마땅한 그런 입장이지 저에게 생명나무 따먹게 하옵소서. 어디 선악과 따먹은 주제에 그런 망발이 나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엘리야가 죽은 아이에게 세 번 겹칩니다. 그러고 나니까 애가 살아났지요. 그 애가 살아날 때 엄마가 살아난 거예요. 이 선지자가 우리 집에 올 때 그냥 참기름이나 주려고 온 게 아니고 평생 아무리 살아도 몰랐던 것, 생명이란 위에서 줘야 받는 것이지 신학공부하고, 신학교 간다고 오는 게 아니거든요. 삼위일체 공부한다고 생명 오는 게 아니에요. 교회 다닌다고 생명 오는 게 아니에요. 이건 줘야 오는데 줘야 오는 그 이유가, 요구조건이 뭐냐 하면, 네가 죽은 인간이란 걸 자인하는 거예요. 분명히 하자 이 말입니다. 살만 한 인간 살리는 게 아닙니다. 살 자격도 없는 인간을 살리는 겁니다. 그래야 모든 공로가 주님의 공로만 높아지기 때문에 아버지가 기뻐하는 거예요. 수컷은 대표성을 이야기하고 물론 제사장도 남자지만. 모든 제물이 집대성해서 제사장 같이 거룩한 백성 만드는 거예요. 제사장은 자기가 착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인데 이걸 레위기 2장 9절에서 기념이라 했어요.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취하여” 소제물 중 일부를 취해서 지금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증빙하고자 하는 겁니다. 기념하고자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전체 이스라엘에 대해서 거룩의 기념물이 되고, 전체 이스라엘은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계신다고 이방민족에게 증거하는 기념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얻어진 기념물이에요.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다 이루었다 할 때 그게 십자가 형상에서 나타날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죽음으로 나타날 때 바로 그 죽음에 뛰어들란 말이죠. 그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죽는다는 모험을 하란 말이 아니고 지금 죽어 있는 그대로 오란 말이죠. 죽기 살기로 뛰어봐? 내가 결심해봐? 이것도 투기고 오긴데 이렇게 하란 말이 아니고 그냥 뭘 해도 그런 투기나 결단을 내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소급해서 죽은 상태인 것을 인정하면 돼요. 참 쉽지요. 젊은 여자가 아기를 낳았다. 젖을 물리면서 “아기야 젖 많이 먹어라. 죽은 엄마한테 나오는 젖이야.” 그러면 그 엄마는 영생 얻은 사람이에요. “이것 먹고 큰 사람 되라.” 이러면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기야 젖 먹어도 죽었고 난 젖 먹여도 죽은 거야.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생각난다면 그 사람은 아기한테 영생을 먹이고 있는 중이에요. 왜? 그 자체가 결과물이기 때문에. 2장 12절에 보면, 소제를 드릴 때 뭘 드리느냐 하면, “처음 익은 것으로”라고 돼있지요. 첫 이삭. 이게 뭐냐 하면, 원래 안 생겨도 되는데 하나님의 제사에 의해서 첫 번째로 발생된 거예요. 그리고 4장부터 번제 다음에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나오잖아요. 그것은 딱 두 가지 내용이에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걸 줄이면 먹지 말라. 네가 먹지 못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는 영생을 얻는다. 네가 먹어서는 안 되는, 아니 네가 먹고자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망쳐버린 너를 내가 못 먹게 함으로 영생을 얻는 거예요. 그게 피와 기름입니다. 기름은 기름 부음과 관련돼있고 피는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생명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결국 피인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냄새니까 깨끗한 피가 돼요. 더러운 피를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깨끗한 피가 되잖아요. 깨끗한 피와 이쪽 더러운 몸과의 관계에요. 그러면 몸에서 죄를 뽑아내야 되겠지요.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이 레위기에 쭉 나와 있어요. 세상에 일반 사람과 같이 있어도 구분 안 되는 몸이잖아요. 세상적인 몸이죠. 애굽에서 살던 몸 아닙니까. 애굽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서 율법은 뭐냐 하면, 절대로 저들과 같이 살아선 안 된다. 그들의 풍속을 따라선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지킬 수 있어요, 없어요? 지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 사고나 몸이란 것은 이미 주변 환경에 의해서 거기에 완전히 스며든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안 되냐? 하나님의 말씀은 몸에 스며드는 게 무엇이 들어있는지 뽑아내는 용도로 준 거예요. 부정적이라니까요. 주사기가 뭘 넣는 거지만 뭘 뽑는 주사기도 있다니까요. 이미 우리는 뭐로 무장돼있습니까? 같은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생존을 향하여 질주하는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장치가 몸의 장치들이에요. 우리가 배우는 영어, 수학, 모든 것이. 생명 얻는데 영어 몇 점 받아서 영생 얻습니까? 필요 없지요. 그러면 영어, 수학 하지 말까요? 왜 해야 됩니까? 고도의 기술이 돈으로 나오잖아요. 전문적 기술이 없는데 컴퓨터도 못하는 데 무슨 월급을 줘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완전무장 돼있는 거예요. 뭘 하는 것은 우리 생존이 딸려 나오는 겁니다. 그것 하지 말라하면 죽는데. 그게 바로 생명을 방해하는 생존의 근성이에요. 근성.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