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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80126a 마가복음11장 15절(성전속의 죽음)-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180126a 마가복음11장 15절(성전속의 죽음)-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1장 15-17절입니다.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16절,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하시매 이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성전이 눈에 보이죠. 주께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철거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게 되면 중심이 돼요. 눈에 보이면. 눈에 보이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죠. 몰린 이 사람들은 중심지를 찾는 셈이 돼요. 중심지를. “중심지를 찾았다.” 이렇게 돼버립니다. 중심지를 찾았다는 것. 사람들이 인생사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살 수 있는 안정된 중심지를 찾는 데에 있어서 자꾸 떠나고 또는 멈추고 하는, 그걸 반복해요. 집사님 댁도 이사를 가지만. 내가 가는 그것이 내 마음에 안심을 줄 정도로 어떤 고정된 중심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이 어떤 고정된 자리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흡족해하고 만족해하죠. 교회가 있다. 여기서는 성전인데, 오늘날 예배당으로 봅시다. 예배당 근처에 가게 되면 왠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 같고 은혜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내가 사는 동네에 절이 있다고 한다면 갑자기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이 들죠. 성전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의 가현적인 건물로써 비치게 되게 되면, 수평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안정을 제공하는 특정지점으로, 특혜 받은 지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아요. 창세기 6장, 7장에 방주가 나오죠. 방주. 방주에 올라타면 홍수의 심판에서 면할 수 있다. 방주에 올라타면. 홍수여 오라! 뭐 방주만 있다면 안심이다. 노아 같은 경우에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세월이 몇 천 년 흐른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받는 것이 되게 간편해 보이지 않습니까? 특정 배(방주)속에 들어가면 구원이 되니까. 구원이 얼마나 간결하고 간편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보면서 공갈, 협박, 핵폭탄 터질 때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그 마지막 최후의 방주 같은 것, 벙커죠. 방주 같은 것을 내가 구입해서 거기서 살고 있다가 최후의 심판인 핵폭탄이 지나가고 난 뒤에 헤헤거리고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아주 간결한 생각이 확 들어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마가복음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장치가 되는 거죠. 매혹적인 장치. 마음에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그 장치라 할 수 있어요. 그 성전은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만들라고 한 그 성전에 내가 근접해서, 그 성전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게 되면 나는 구원되고 천국 가는 사람이 된다. 얼마나 마음의 모든 잡생각이 다 해소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성전의 모습에 왜 그렇게 끌리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호수가 있고 호수 근처에 뱅 둘러서 집들이 있다고 칩시다. 호수가 있고 이 집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데,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같은 데를 보면 멋진 호수가 나와요. 근데 이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는데, 뭐 잔디를 깎는다든지 무슨 결정을 하게 될 때, A라는 집은 누구한테 영향을 받느냐 하면, 자기 집하고 근접한 양쪽 집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있어요. 양쪽으로 있는 옆집이 잔디를 깎는다고 하면 이 집 사람은 잔디를 깎을 영향이 아주 많아요. 또 B라는 집 근처에 있는 양쪽 집이 잔디를 안 깎는다고 하면 그 집은 잔디를 안 깎을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가운데를 호수라고 한 이유는 뭐냐 하면 공백, 비어있다는 겁니다. 어떤 중심이 비어있을 때는, 사람들은 정보를,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되고 행동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반드시 옆에 있는 집을 커닝해서 모방하고 흉내 내는 식으로 사회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있다고 할 때, 원래 이렇게 가운데 호수처럼 성전을 비어놓게 되면 사람들은 옆집을 보고 잔디를 깎든지 안 깎든지 하면 되는데, 이걸 가지고 사회라고 하는 데에 적용시켜보면 인간은 옆 사람을 흉내 내고 옆 사람은 또 그 옆 사람을 흉내 내는 하나의 공통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추상이라고 합니다. 추상.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정신적 구조. 이 정신적 구조를 이번 수련회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데올로기라고 했습니다. 이념. 이념이라는 것은 곁눈질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곁눈질해서. 모방해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데, 3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서유럽 배낭여행을 휴가내서 간다. 또 이쪽도 유럽으로 간다. 그럼 본인의 희망사항은 이미 정해진 거예요. 둘 다 유럽으로 여행 가는데 자기는 동남아에 갑니까? 만약에 갔다 오게 되면 동남아에 갔다는 소리를 못해요. 인도에 갈까요? 인도에 가서 무슨 흉한 꼴을 보려고. 결국에 이쪽도 유럽가고, 또 이쪽도 유럽에 간다면 자기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적어도 유럽을 가줘야 레벨이 맞잖아요. 동남아 태국에 간 것은 말도 못해요. 가만히 있어요. 무슨 우사를 당하려고. 그러면 뭐냐, 30대 초반의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들이 서유럽 배낭여행 가는 것이 하나의 이념이 돼버린 겁니다. 이념이.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보는 것은 옆 사람만 봤는데 그 사람의 정신구조에는 서유럽 여행 그것도 배낭여행, 좋은지 모르겠습니다만, 배낭여행이라는 것이 하나의 정신적 구조, 추상적 구조로 남는 겁니다. 빈자리에 정신이 딱 차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 동네가 전부 다 잔디를 깎는다면, 이 호숫가에 있는 동네에서 이 일은 옳은 일이 되고, 반드시 그래야 되는 일이 돼버립니다. 그래야 되는 일로. 그런데 만약에 호숫가에 집들이 있는데, A라는 집은 잔디를 안 깎아요. 근데 옆집 B라는 집은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왔기 때문에 항상 착실하게 잔디를 깎았어요. 또 C라는 옆집은 잔디를 안 깎아요. 물어볼 것이 아닙니까? “잔디를 왜 안 깎습니까?” “깎아봤자 또 날 건데. 그 뭐 힘들게 깎습니까? 한 번만 깎으면 되지. 뭐 추석하고 설에만 깎으면 되지.” “아! 그런 법도 있네.” 대번에 이념이 또 바뀌어요. 아, 그동안 잔디 깎는다고 애먹었는데, 이 동네는 안 깎아도 되는 동네였어요. 모방하는 겁니다. 닮아가는 겁니다. 이거는 부모가 자식들 키울 때 보면 형제간에 그대로 다 드러나잖아요. 이게 그 사람의 정신구조가 되죠. 결국 이거는 잔디 깎는 동네에서는 잔디 깎는 것이 이념이 되고, 중앙을 차지하고. 잔디 안 깎는 동네에서는 잔디 안 깎는 것이 중앙을 차지하는데. 그럴 때, 옆 사람을 보는 것이 그냥 흉내만 내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뭘 보느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서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고.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는데, 좋아한다 또는 싫어한다를 인간들이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안심 놓고 바라보는 이념의 중앙, 호수가운데를, 이 중앙을,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이죠.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중앙이라고 한다면 자기도 같이 좋아하게 되어 있고, 싫어한다면 같이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엠페도클레스(Ἐμπεδοκλῆς, 기원전 493년경~기원전 430년경)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모든 자연세계에서 행위가 나올 때 일치된 행위의 원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하면 끌어당기고 미워하면 밀어낸다는 거예요. 모든 게. 근데 이 사람이 연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나름대로 사색을 많이 했겠죠. 그 당시는 과학이 발달이 안 되었으니까. 쭉 고뇌해보니까 아,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미워하는 것은 밀어낸다. 이것이 사람에게 뿐만 아니고 모든 동식물까지 되고요. 오늘날 과학에서는 뭐냐 하면 박테리아, 박테리아에 두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박테리아에는 두뇌가 없어요. 박테리아에게 두뇌가 없다는 말은 신경세포가 없다는 거예요. 신경세포가 없는데 박테리아는 살아 움직이거든요. 우리는 뭐든지 지시를 두뇌에서 내린다고 하는데, 실제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이런 데서는 두뇌가 없어요. 아메바도 마찬가지고. 그거는 뭐냐 하면 화학적인 물체가 왔을 때 반응을 나타나는데, 과학자로서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저 화학물질이 왜 자기한테는 좋다고 느껴지고, 왜 저 다른 화학물질은 안 좋다고 느껴지느냐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설탕을 주니까 좋다고 따라오는데 이건 무슨 신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독성이 있는 것은 또 밀어내는 거예요. 왜 밀어내느냐 하는 겁니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이건 싫어하기 때문에 밀어낸다는 거예요. 왜 싫어해야 하는데? 과학으로 따지게 되면 이건 분자덩어리거든요. 분자덩어리에 같은 분자가 왔는데, 이게 같은 분자인데 왜 이쪽 분자구조는 싫어하고 왜 이쪽 분자구조는 좋아하는데? 이쪽 분자는 왜 끌어당기고 이쪽 분자는 왜 미워하는데? 딸이 시집갈 때, 딸이 한 서른다섯 쯤 되면 급하잖아요. 처음에는 교회 다녀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남자면 다 된다고 해서 선을 막 보게 하는데. 뭐 급하니까 그게 뭐 문제입니까? 밥벌이만 하면 그냥 붙여주려고 하는데. 계모임 가서 사진 보여주면서 조건 맞는 후보자 물색해가지고 딸한테 선보라고 하죠. “딸아! 선 한 번 봐라.” 실컷 조건 맞춰서 했는데 딸은 나 혼자 산다고 해요. 나 혼자 산다고 하다가 엄마가 뭐 인센티브를 주니까 그거 받고 선보러 갔어요. 보고 와서 엄마가 어떠냐고 물으니까 싫다고 하죠. “싫어!” “왜 싫은데?”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 싫어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인물도 내 타입이 아니고.” “너는 어떤 타입인데?” “나도 몰라. 무조건 내 타입이 아니야.” 말하는 것도 꼴 보기 싫고, 뭐 하나 싫으면 다 싫어요. 엄마로서는 답답하죠. 다음 후보자 찾는 것이 굉장히 곤란한 거예요. 그러면 엄마도 딸이 시집 안 가면 안 가는대로 놔두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엄마는 딸이 시집 안 가니까 싫은 거예요. “왜 싫은데?” “몰라.” 본인도 본인에 대해서는 왜 좋은 게 있고 왜 싫은 게 있는지 본인도 모르면서, “내가 시킨 대로 왜 안 했느냐.” 그게 또 싫은 거예요. 이게 지금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영원한 숙제가 되게 돼있어요. 가로막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맹목적이다 하는 겁니다. 맹목적 움직임이에요. 맹목적, 아무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데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전진하는 겁니다. 전진 또는 헤매는 것. 전진한다. 헤맨다. 찾는다. 부지런하게 새로운 것을 구상한다. 이렇게 되는데, 성전이라는 것이 딱 고정되어 버리면 이 전진하고 헤매고 찾는 것이 여기서는 전부 다 스톱이 돼버립니다. 스톱이 돼버리니까 유대인들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걸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다 찾았다. 인생 그만 헤매도 된다. 인생관에 있어서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은 남아있지 않아요. 해답을 알았으니까. 진리를 알았으니까. 마치 노아가 방주를 보면서, 방주 말고 딴 방법 없습니까? 라고 이러지 않고, 그냥 방주 안에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구원되었잖아요. 똑같은 방식으로 눈에 보이면서 최종적인 해답이 될 수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있다면 인생을 그만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줄 거예요.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인생을 헤매고 있고, 참 복잡하고 정리하기 힘든 인생관에 이 성전이 하나 있고, 이 성전에 수천 년 동안 무슨 이데올로기가, 무슨 이념이 여기서 쓰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 주셨고 그 주신 성전에서만 하나님과 만난다. 만약에 성전을 외면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서 지옥 간다. 따라서 성전이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고 천국백성이다. 이러한 이념, 옆에 사람이 다 믿으니까 거기에 같이 동조가 되어서 안 좋아도 같이 좋아지는 것처럼 강요받는, 추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요받는 그 분위기 속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결집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참 많이 도움이 되잖아요. 천주교 가정을 좀 알거든요. 일가친척 중에 천주교가정이 있는데, 안방에 가면 마리아상이 있어요. 그리고 마리아상 옆에 십자가상이 있는데, 그 십자가상에는 꼭 목걸이가 매달려 있죠. 십자가상은 꼭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상이에요. 그 십자가상에 묵주처럼 목걸이가 매달려 있어요. 그 옆에는 공동 번역된 성경책이 하나 있고. 가정주부들은 밖에 나갈 때 한 번씩 이 앞에 엎드려가지고 머리, 어깨 찍고 묵주도 한번 돌리고. 그래가지고 무사히 갔다 왔다고 또 하고. 자, 이게 일종의 가정제단이거든요. 제단. 제단이 있다는 말은 뭐예요? 이미 내 마음은 이 제단중심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심리적으로 상당한 안정감을 주잖아요. 상당히 안정감을 주죠.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성당에서 형식과 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그것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게 수천 년 동안 모든 인간의 심리를 테스트해보니까, 추상적인 성경이야기보다도 눈에 확 띄는, 확 보이는 건물이 있고, 유별난 신부나 수녀 복장을 해가지고 거기서 상주하면서 사람들이 오면 상담해주고 위로해줄 때,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편리하고, 골치 안 썩고, 자기 마음을 쉽게 안정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없었던 겁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테스트하고, 테스트하고 테스트해서 얻은 결론이 그거에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보셨잖아요? 저는 한 스무 번도 더 봤습니다만. 그 영화에서 마리아가 기타치고 뭐 하면서 남자 주인공 트랩대령에게 자꾸 암시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돈 많은 미망인하고 결혼한다고 할 때에, 그 마리아가 삐져서 기타 던지고, 일곱 명 애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에 복장이 벌써 달라요. 아주 정결한 복장으로 딱 있죠. 그러다 수녀원 원장에게 걸려서 한소리 듣죠. “네가 사랑하는 남자하고 잘 안 됐다고 여기 와서 도 닦는다고 도가 닦이냐? 차라리 빨리 도로 내려가라.” 비겁하게 사랑싸움에 미리 패배자가 되지 말고 붙어라 이 말이죠. 붙어가지고 돈 많은 미망인 쳐내고 자기가 일곱 명의 애들 엄마가 돼가지고, 나중에 2차 대전 때 알프스 산 넘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일곱 애들 합창단 만들어서 생활했잖아요. 실화입니다. 그러면 수녀가 됐다는 자체가 이미 복장부터가 다르잖아요. 복장부터가. 복장이 다르다는 것은 자기를 옥죌 수 있다는 이 말이죠. 자기의 불안한 모든 것을 정돈할 수 있는 거예요. 유니폼이. 그러니 이게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이고 위선입니까? 그 옷 하나가 뭔데? 수녀복이 뭐고 신부복이 뭔데? 그 옷 하나 입었다고 해서 바르게 된다는 말은,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비쳐지느냐에 자기의 모든 인생의 종착점인양 그렇게 여긴다 이 말이죠. 그렇게 신부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위선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안 하는 이유는, 그동안 줄곧 그런 것들이 이념으로서 세뇌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념으로서. 오스트리아가 가톨릭국가가 아닙니까?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제일 첫 장면이 뭡니까? 수녀가 놀고 싶어서 산에서 춤추고 있는데 저 산 밑에서 눈치도 없이 밥 먹으라고 종을 울리니까, 아이고, 기도시간이 됐다고 내려가는 그 장면이 나오잖아요. 인생을, 어떻게 거룩한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을 눈에 띄는 식으로, 임의로 구분 짓는다는 이게 얼마나 인위적인 거예요? 참 이게 인위적이잖아요. 성도가 되었다는 것, 복음을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교회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교회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 교회를 뛰어넘고라도 구원이 될 수 있느냐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녹취까지 되어 있으면 천하 농땡이들 교회 안 와도 된다고 좋다고 하죠. 일단 교회 안 오게 되면 기름 값이 빠져요. 기름 값 빠지고 헌금 빠지고. 기름 값 빠지고 헌금 빠지니까 쓸데없는 종교 쪽으로 돈을 안 쓰잖아요. 이거만 모아도, 복리로 계산해보세요. 사람의 모든 움직임은 그 마지막 대목에서 결국 돈입니다. 돈.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이념에서 나에게 좋은 것이 뭐고 미워하는 것이 뭔 줄 알아요? 다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돈이 유리하게 되면 좋고 돈을 쓰게 되면 미운 거예요. 인간은. 뭐 이렇게 선보는데, “한 달 수입이 나는 천만 원이 되는데 저랑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뭐 그런 남자도 별로 없지만. 그런 남자가 자기한테 대시하게 되면, “흥! 나는 사랑을 천만 원에 팔지 않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당신 같은 속물하고는 결혼 안 할 거예요.” 근데 그 다음 사람하고 선을 보는데, 한 달 수입이 일억이에요. “일억인데요.”하니까 바로 “아이고 감사합니다.”하죠. 천만 원은 튕길 수도 있어도 일억은 못 튕깁니다. 일억은 못 튕겨요. 일 년이면 십이억인데요. 일억 짜리 만나면 천만 원짜리 튕겨서 주께서 복을 주셨다고 할 거예요. 이게 자본주의의 이념이에요. 제가 자본주의를 이념이라고 하는 이유가 인간은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뭘 싫어하는지를 본인이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캐보면 전혀 자기가 한 게 아니고 곁눈질해서 내가 흉내 낸 거예요. 몸에 습득된 거예요. 어느새 저항할 수 없이 쑥쑥 들어온 겁니다. 이 중심이 뭐냐 하면, 이 호숫가의 중심은 돈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옆집사람들과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돈에 의해서 된 거예요.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제가 왜 그렇게 호수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제가 왜 호수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게 중간이 비어있습니다. 공백입니다. 원래. 성전중앙이 비어있어요. 성전은 그게 있더라도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들어가면 안 돼요. 언약궤라는 게 있긴 있거든요. 성전 안에는 성소하고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나무 상자위에 금으로 조각된 천사들이 나란히 마주보게 되어 있고, 커튼은 천사그림이 네 가지 색깔로 수놓아져있고, 이래 되어 있습니다. 뭐 만들기야 사람이 만들었죠. 하지만 만들었다고 해서 자기가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 들어갑니다. 굉장히 신기한 게 뭐냐 하면 온 천하를 만든 하나님께서, 특정지점에서 인간과 만나주신다는 점이 아주 특이해요. 왜 특이하냐면, 특이한 점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천하를 만들었기 때문에 산이든 들이든 바다든 관계없이 만나주는 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 하나님이 만드신 넓은 들판, 어디에서 외쳐도 만나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 상식을 깨고 하나님은 안 만나줘요. 번개는 아무 데나 쳐도 하나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함박눈은 언제든지 내릴 수 있어도 만나주지는 않아요. 첫 번째가 일정하게 만나는 특정지점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만나주신다는 것이 놀라워요. 만나주신다는 점이. 왜냐하면 사람들이 카페에서 만난다면, 같은 키로 만나죠. 하나는 2미터고 하나는 3미터면 안 되잖아요. 하나는 5미터 되고 하나는 2미터가 되면 이래가지고는 만날 수가 없잖아요. 마음을 낮추어주셔서 같이 만나준다는 게 신기해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인간과의 만남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영광을 포기하시고, 아까 영광이야기를 했지만, 영광은 포기한 영광이 우리에게 다가온 영광이에요. 포기한 영광. 그 포기한 영광은 주님 쪽에서만 포기하면 안 돼요. 우리도 우리 영광을 포기해야 돼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 만나주셨다는 것이 신기해요. 유대인들이 이걸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이렇게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너무 큰 분이시기 때문에. 이 하잘 것 없는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이건 도저히 인간의 아이디어로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정현이가 페더러를 만나요? 같이 시합을 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황제를 어떻게 신삥이(집단이나 조직에 처음 들어와 조직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가 만나서, 그것도 연습이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시합을 한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그게 허락이 돼요? 그러니 기적이죠.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1세트 패, 2세트에서 기권함). 감히 그걸 어떻게 만나요? 못 만나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수건이야기가 나옵니다. 못 만날 인간인데 하나님 쪽에서 어떤 처치를 한 겁니다. 처치. 하나님이 자기 처치를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만나도록 주선을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우리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 두 가지만 받아들여도 테니스 3대 0으로 지던 말든, 그리고 밀양에 세종병원 화재로 몇 명이 죽던 말든, 아무 큰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밀양의 세종병원은 제가 더울 때 들어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쉬었던 곳입니다. 그 동네 좀 알아요. 좀 아는데, 불난 현장을 보니까 새로워요. 제가 아는 병원이라서. 그 가족들이 굉장히 마음이 상하겠죠. 아프겠죠. 하지만, 이거 두 가지를 알면 우리가 마음 상했다는 말조차도 너무 자기 분수도 모르는 건방을 떠는 것이 돼요. 감히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만나줬으면 내 인생에 어떤 굴곡이 있고 어떤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한 맺히고 가슴치고 할 그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만나줬는데. 그것 때문에 왜 한이 맺힙니까? 한 맺혔다는 말은 지금 본인이 노력해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하나님 어디에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마치 알프스 산을 돌아다니면서 요를레이~ 요를레이히요~♬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이 수녀 복장을 하고서 찾아드릴까요? 신부가 되어서 찾아드릴까요? 그런 시도밖에는 안 되거든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하게 되면, 지상에 눈에 보이는 중심은, 인간들이 그것을 찾는다는 것을 주께서 알지만, 절대로 눈에 보이는 중심을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슨 중심이냐, 성전중심이 아니고 성령중심이죠. 성령중심. “성전중심은 어떤 지정된 장소에 있고 성령중심은 어디에든 있다.”라고, 이렇게 정리하시면 안 됩니다. 안 돼요. 왜냐하면 성령중심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에요. 성전중심은 이 세상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기 위한 지점을 찾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성전중심이고, 이 성전중심으로는 만날 수 있지만, 성령중심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만날 수 있는 곳이 없다가 되어야 해요. 어디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도 인간은 만날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너 혼자 백날 전진하고 후퇴하고 백날 해봐라. 결국 네가 애쓰고 노력한 그 헛수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생각해보시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셔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쫓아버리고, 돈 바꾸는 자들을 다 쫓아버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을 쫓아버리고, 의자 엎으시고. 점잖게 의자 좀 치워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본인이 손수 엎었어요. 예수님께서 땀 깨나 흘렸습니다. 엎으시느라. 안 다치셨는지 몰라요. 그리고 기구 들고 가는 사람까지 성전에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러면 이거 빼고 저거 빼고 차 떼고 포 떼버리면, 그러면 성전의 의미는 뭐냐 하면 결국 성전은 공백으로 비워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성전은 비워놓는 거예요. 인간들이 뭔가 거룩한 것을 찾고자 한다면 그거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죠. 성전 안에는 없잖아요. 없으면 그거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성전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성전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곧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오늘 성도의 칼럼에 9년 전에 심재성 목사가 쓴 이근호 신학에 대한 비판의 글을 올려놨습니다. 9년 전에 한 댓글도 같이 올려놨는데, 올려놓고 댓글을 달아놨습니다. 사람이 5초 후에 죽는다면, 지금 5초 후에 숨이 넘어가서 죽는다면, 5초 전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한번 쭉 돌아보세요. 살 때는 보람이 있었다, 뭐 했다고 하지만, 5초 후가 딱 되게 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인생이. 내 인생 자체가 부질없는 거고, 그리고 5초 지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돼요? 사라져버려요. 물건 남아 있는 것, 자식들이 후딱 전부 다 재수 없다고 불에 다 태워버립니다. 아예 흔적도 없이 다 치워버려요. 책 쓴 것이라든지 뭐 돈 되는 것은 모르겠다만. 무조건 돈이니까. 그 외에는 전부 다 불에 태우죠. 원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없는 거예요. 지금 사니까 있어 보이죠. 근데 세월에, 시간에 다 갉아 먹힌다니까요. 내 긴 꼬리가 야금야금 다 먹혀들어가고 있어요. 언젠가 제가 그런 강의했거든요. 촛불을 예로 들었거든요. 초를 하나 사게 되면 굉장히 길어요. 아이고, 어느 세월에 다 닳을까? 하죠. 초나 모기향. 모기향이 뺑뺑 돌아있어서 지겹다 하지만 아침 돼보면 이게 뭐가 되어 있어요? 재가 그 모양대로 남아있죠. 얄미워요. 흐트러짐이 없이 그대 모양대로 재가 되어 있어요. 그대로 재가 떨어져 있잖아요. 처음에 죽고 난 뒤에 한 6개월 동안은 그분의 업적이 뭐 어떻고 하지만, 6년만 지나보세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있다, 없다를 누가 정하느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정해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정하느냐, 내 눈에 보이면 있는 거고 내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보는 내 눈이 한 90년 되면 이 눈도 사라져요. 사라질 시선가지고 있다, 없다를 자기마음대로 판정하는 거예요. 자기가 영원히 살아있으면 모르겠는데, 자기도 이 땅에서 없어질 인간이 같이 없어질 인간보고 있다, 없다를 판정을 내리는 그 의미로는, 이게 제대로 진리 값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못하죠. 다 같이 사라져가는 마당에. 이쪽에서 향 피우면 연기 나오고, 이쪽에서 향 피워도 연기 나오잖아요. “나는 내 연기가 너무 멋있다.” “아니야. 내 연기가 예쁘다.” 근데 둘 다 바람 불면 다 날아가잖아요. 허공만 남고 연기는 다 없어지잖아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예수님께서 뭔가 성전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지적을 하실 때, “네 눈에 이 성전이 있어 보이느냐?”라고 이래 물어봐요. 그러면 만져보고, “있네요.”라고 하면 “이 성전이 너는 있다고 하지? 왜? 네가 살아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죽는다면, 내가 죽기 5초 전에는 있지요. 근데 5초 후에 죽는 인간에게, “성전이 있느냐?”라고 하는 이 자체가, 물음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자기의 죽음과 더불어서 그 의미는 취소가 되어야 해요. 근데 인간은 왜 죽느냐? 늙어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죄 값으로 죽어요. 그러면 내가 살아 있으면서 있다 없다 하는 이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느냐 하면, 내가 죽는 원인으로서 이게 자꾸 추가가 된다니까요. 내가 죽는 이유가 뭐냐, 죄다. 내 죄가 뭐냐, 없어질 것도 있다고 우겼던,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정현선수가 이길까? 페더러선수가 이길까?’라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이게 우리가 죽을 이유에 합류가 된다니까요. 왜,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두느냐 이 말이죠. 테니스 게임에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뭣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제가 핀셋으로 빼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죠? 그게 뭐냐 하면 지고는 못 살겠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게임으로 간주하고 인생을 살아요. 모든 것을 게임으로 간주하고. 지고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남한테 이겨야 된다는 겁니다. 왜 이겨야 되는데? 뭐 거기에 대한 답변은 없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뭐냐, 이기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합니다. 살아남는 것.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살아있으면 이긴 것이고, SNS에서 사라지면 그건 죽은 거예요. 그걸 사회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죽음. 사회에서 나를 요청하지 않을 때,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뭘 하느냐, 구멍이죠. 있음 판에다가 뭘 해야 되겠어요? 구멍을 내야 되겠죠. 빵꾸내야 됩니다. 풍선이 있다. 풍선을 없애는 방법은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되잖아요. 오늘 본문이 뭐냐, 바늘로 콕 찌르는 거예요. “이건 아무것도 없어야 돼!”하고 바늘로 콕 찌르는 겁니다. 그럼 풍선이 퓨우웅~하고 바람이 빠지면서 까불다가 아무소리도 안하고 축 처져있겠죠. 바람이 쭉 빠지겠죠. 구멍을 냈으니까, 이 성전은 구멍 난 성전이죠. 이 구멍 난 성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구멍 난, 또는 상처 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버립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바꿔요. 그러면 이 구멍 난 건축구조물과 구멍 난 예수님의 몸 사이에 많은 논리가 필요하겠죠. 많은 논리가 깔려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많이 어려워요. 어떻게 해서 구멍 난 건축물이 예수님의 창 자국 못 자국으로 이게 바뀌어져야 마땅한지를.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하다. 무다.”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제가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불교는 제로(0)바닥으로 환원하는 것이 불교에요. 그러나 복음은 뭐다? 마이너스(-)에요. 제로(0)을 뚫고, 없는 것보다 뭐가 더 없는 것, 없음보다 더 작은 것. 이 불교사상과 철학적으로 같은 것이 뭐냐 하면 들뢰즈 사상입니다. 들뢰즈 사상.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영(0)보다 더 작은 것, 이거는 고대 헬라사상에도 약간 있어요. 구체적인 것은 아니고 약간 있어요. 무슨 뜻으로 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이걸 제가 두 번째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해드릴게요. 영(0)보다 더 작은 것.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는 헛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이건 복음을 빙자한 불교신자가 돼버려요. ‘이목사님이 교회를 이겨야 된다고? 그럼 교회 안 가면 되지. 돈 들고 기름 값 드는데 왜 가? 교회 안 가고 집에서 인터넷으로만 들어도, 인터넷 깔아놓은 것만 해도 돈 한 푼 안 들고 복음 다 얻고.’ 요런 괜찮은 것이 어디에 있어요?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거는 불교가 된다니까요. 불교가. 모이기에 힘써야 되는데 안 가는 거예요.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데 안 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몸은 세포로 되어 있어요. 세포의 본능이 뭐냐 하면 좋아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요. 이 말 자체가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앞뒤가 맞지 않아요. 정확하게 이렇게 해야 돼요. 받아들였으니까 다른 사람이, 외부의 관찰자가 보기에 ‘저건 좋아하는구나.’ 밀어내니까 ‘저건 싫어하는구나.’라고 하는 게 맞죠. 그러니까 좋아한다, 미워한다를 누가 판정 내리느냐 하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관찰하는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또는 다른 외부에서.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자기의 본능에다 자꾸 이퀄(=)시켜버린다니까요. “나는 그 사람이 싫어. 왜냐면 나는 저 타입이 싫은 모양이야.”라고 하는데, 만약에 저 타입 중에서 나중에 한 5년 뒤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버린 패, 버린 화투 패에서 보물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려고? 이게 시편에 나오죠. 건축자들이 머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잖아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편118편 22절). 그게 성전인데, 그러면 우리가 성전이 되려면 예수님은 우리한테 싫어버린 바가 되어서 밀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다 나갔다, 복음 전했는데 다 나갔다, 복음 전했는데 나갔으니까 내 복음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복음 전하니까, 복음에 의해서 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복음에 의해서 나갈 수가 있다. 그러면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죠. 나갔으니까 나는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를 했잖아요. 수요설교 녹취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야곱은 자기가 모르는 원인으로부터 이끌려가고 있는데, 라반은 과거에 자기가 한 것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지금 야곱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동조해서 야곱도 그만 같은 레벨이 되어가지고, “내가 이십년 동안 일했는데 그냥 빈손으로 나가면 되겠습니까?”라고. 노동의 대가를 얻는 이것이 마치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인양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참, 이런 이야기를 무슨 취지로 하는지 잘 모르시겠지만, 두 번째 시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쨌든 간에 이미 위에는 좋고 나쁜 게 있지만, 밑으로 들어가 버리면 내가 좋고 나쁘다는 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영(0)보다 더 낮은 차원에서 한 일의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근데, 구멍 난 성전이 상처 난 예수님의 몸으로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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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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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