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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70강-신 32장 7–12절(이방민족 배당)180128-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신명기

170강-신 32장 7–12절(이방민족 배당)1801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7–12절입니다. 구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분종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지난 시간에 신명기에 모세의 노래를 언급하면서 최종 승자의 입장에서 이 노래라는 것을 부르는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노래를 불렀다는 말은 더 남아 있는 승리는 없고 그 최고의 자리, 제일 높은 자리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해서 하나님의 노획물로 전리품으로 얻어 챙긴, 하나님에 의해서 낚아 채인 그 사람들이 함께 앞을 내다보는 입장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입장에서 보는데, 그 본다는 것이 그냥 지형적으로만 본다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끝장 나버렸죠. 세상의 모든 시간이 종결되어 버리며 그것은 하나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세상 자체가 모형이 되요.

이걸 모형이라고 하고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그림자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분주함과 요란함과 세세한 움직임 같은 게 있더라도 카메라가 재래시장 한 복판에서 형사하고 조폭하고 싸우는 것을 찍는 다 할지라도 그 위에서 보게 되면 그 조차도 모형이 모형 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세트장이죠. 이 세상 자체가. 그렇게 느긋하게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건 자유적인 안목을 가지고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걸 오늘 성경에서는 독수리 날개 위에서 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독수리 날개 위에서. 독수리가 땅에 기어 다니는 독수리는 없잖아요. 아주 높이 나르죠. 제가 광주 갈 때, 대구에서 광주 가는 고속도로가 새로 뚫렸습니다. 전에는 산허리를 감고 돌아가던 길들이 터널 13개가 통과를 하는데 어디서부터냐 하면 고령에서 거창까지 갈 때는 터널 터널이 연속으로 있습니다. 터널 통해서 밑을 이렇게 보게 되면 저 밑에 국도가 지나가요. 어떤 걸 느끼게 되느냐 하면 국도는 자동차가 가면서 계곡 계곡 골짜기 골짜기 마다, 그 앞에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몰라요. 그런데 고속도로 높은 곳에서 터널을 막 빠져 나올 때 보게 되면 속으로 그래요. ‘저 앞에 차가 내가 보기엔 한 2Km까지는 차가 없는데 속도 팍 내도되겠는데..’ 하지만 당장 지평선으로 달리는 사람 앞에서는 그 코너를 돌면 차가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보이는 거예요. ‘속도 좀 막 빼지. 차도 없는데.’ 라고 하는 것처럼 세상을 이렇게 높이서 보는 것은 미리 보는 걸 의미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끝장나는 것을 미리 다 아는 거죠. 사다리 타기를 할 때 사다리를 누가 걸릴지를 잘 모르면 아슬 아슬 하지만 사다리가 이미 다 결정 된 입장에서 보게 되면 백날 꼬부랑꼬부랑 사다리를 쪼개서 백날 해 봐도 “짜장면 내기 이미 네가 걸렸어.”라고 미리 알고 있다면 참 느긋하겠지요. 그 아는 위치, 그 자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신약 성경이라 합니다. 신약성경. 그리고 아직 광야 지나면서 꼬불꼬불 국도로, 앞에 뭐가 가는지 모르고서 이렇게 늘 조마조마 하는 것을 구약성경이라 합니다. 구약. 그래서 신약적인 것과 구약적인 것 이 성경책이 둘 다가 있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봐야지, 그냥 신약을 봐 버리면 우리하고 동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제가 저번에 안양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마포 귀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벗어 놓은 것이 있어요. 그게 세마포 벗어 놓고 부활 하셨거든요. 부활 하실 때 세마포 가지고 부활 하신 게 아니고 자기에게 덮었던 세마포 벗어 놓고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세마포만 보고 있으면서 그 안에 주인공은 못 보는 거예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볼 때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과 함께 성령으로 부활 되어 가지고 귀신처럼 살지만 그들 보기에는 자기들하고 똑같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 땅에 쓰레기 취급을 했습니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노숙자처럼 생활하도록 그렇게 해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하죠.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걸 가진 자로다” 무슨 배짱도 그런 배짱이 다 있는지.

이것이 신약에 성도에게 한 모델이 되고 성령 받은 사람은 다 그러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너무 육에 빠져 있으니까 이런 자유를 못 느끼는데 사도바울은 느긋하게 느꼈던 겁니다. 스데반집사도 마찬가지고요. “죽여라, 죽여라.”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죽이면 제대가 되니까 좀 제대 좀 시켜달라는 식으로 죽이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구약은 어떠냐. 구약의 형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은 구분되어 있어요. 독수리같은 안목을 가진 사람은 구약의 출애굽기에 모세, 모세의 안목에 미치지 못한 일반 백성들은 그냥 국도 달리는 앞으로 몇 년 뒤에 몇 개월 뒤에 뭐가 나올지를 모르는 거예요. 답답해가지고. 그 대목이 출애굽기 14장에 나옵니다.

14장에 보면 바로의 군대가 따라와요. 바로의 군대가 따라와 가지고 진짜 바로의 군대가 가까이 다 따라왔어.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군사들이 따라오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에게 원망을 하는데 이렇게 원망을 해요.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 같이 하느냐” 그 다음의 말이 재미있어요.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 하였더냐”

우리가 애굽 사람 섬기겠다는 데 네가 와서 우리를 붕 뜨게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애굽 사람들이 따라 와가지고 이제는 그들이 살리지도 못하고 그들 앞에 완전히 몰살 하게 되었으니 집단 공동묘지 되게 생겼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다.”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수평적 사고예요. 수평적으로는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고 수직적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애굽 사람들은 허수아비고 밥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들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 하는 이 있음,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빼버리니까 그들은 수직적 사고방식이 날아 가버리고 옛날처럼 도로 도루묵이 된 거예요. 옛날처럼 도로 수평적 사고방식이 된 거예요.

‘20년 예수 믿었는데 뭐지? 이거는?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이런 식이에요. ‘20년 예수 믿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재정적인 어떤 보상 같은 게 아직도 없잖아. 이러려면 내가 예수를 왜 믿나? 안 믿지.’ 그런 식입니다. 그걸 누구에게 불평하느냐, 모세에게 불평해요.

모세는 이 백성들이 정말 답답한 겁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한쪽은 독수리인데 한쪽은 딱정벌레예요. 완전히 지렁이가 기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모세가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나 그만 할랍니다. 이 당회장 사퇴하겠습니다. 나 이 백성들하고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도 사고방식이 잘 못 되었어요. 백성을 자기에게 맡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백성에게 맡긴 것은 백성을 네가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책임 질 수 없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가로 막으면 자기도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마치 자기 백성, 교인이 자기 교인인줄 착각하는 거예요. 목사들이. 자기가 책임지는 것처럼. 가장이 자기 식구가 자기 소유인 줄 알고 지가 자꾸 책임지려고 하니까 나중에 사업 못해서 책임 못 지니까 상상 암에 걸리는 거예요. 자기 새끼들 아니에요.

오히려 부모보다 자식 대에서 하나님이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모가 알던 하나님보다 그 독수리처럼 계신 하나님과 지상에 납작 엎드린 인간 사이에 폭이 확 줄어들다가 신약에서는 아예 옆에 아기 예수로 오시거든요. 그 좁히는 폭이 부모 때 보다 자식 때가 점점 더 가까워져요.

가까워진다는 것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일부러 내려와야 구원이 되는지 구원이 내 쪽에서 폴짝폴짝 뛰는 게 아니고 그냥 발악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왜 친히 내려와서 우리가 할 게 남아 있지 않도록 온전히 다 해야 되는지를, 그 폭을 알려면 부모가 알고 있는 죄의 깊이가 한 2미터라면 자식들은 2미터 50, 3미터, 3미터 50,..점점 더 깊어 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전부다 여기 젊은 사람들이 얼마 안 계시니까, 40대 이하는 한 사람도 없네요, 안 계시니까 지금 20대 까부는 거 한 번 보세요. 그 까부는 거 보게 되면 참 철이 없다 하지요. 진짜 코너 옆에 차가 있고 없고 그것조차도 모르고, 위에서 보면 다 보이는데 뭐가 한탕 되는 줄 알고 등록금 바쳐서 비트코인(이 말 또 나오네요.)해서 효도 한답시고, 이거 돈 벌어서 뉴질랜드 간다하고, 뉴질랜드가 어디 기다려 줍니까? 조선 떠나 호주가서 산다하고, 어디 가려면 목돈 있어야 한다는 그건 알아가지고, 갔다가 온 사람도 있는데, 아무 의미 없는 것을...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자식들에게 부모들이 경험했던 것이 너희에게 아무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배워라, 뭘 배우느냐, 그들이 까불다가 깨진 것들을 배워라” 하는 거예요. 까불다가 깨진 것을.

그러면 까불다가 깨진 것들을 배우면 그들은 안 까불면 되겠구나 하겠는데, 안 까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점잖게 바르게 산다는 뜻이 아니고 눈의 시선을 하나님이 계시는 쪽으로 높이는 거예요. 그 높이는 방식이 그러면 산 위에 올라가면 되는 게 아니고 높이는 방식의 모든 증거는 오히려 땅에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시하고 싶은데 사실 중요한 일들이 턱턱 마주치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이거 별로 안중요해’ 했던 사건이,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이 좀 더 가까이 와서 우리에게 속삭이듯이 더 큰 데시벨로 이야기하는 그 흔적을 가까운 사건 사건 속에서 퍼지게 되는 겁니다.

뭐 하나 예를 들면 밀양에 세종병원, 저도 그 병원 가봤어요. 아파서 간 건 아니고. 더워서 에어컨 쐬려고 간적이 있는데, 그 세종병원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면 거기에 내가 아는 사람이 없으면 나의 일이 아닌 것이 아니고, 만약에 우리 부모가 그 요양병원에 있고 내가 거기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처신 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왜 이런 일이...”라고 그 시험을 해 보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날 죽이시면 제대하라고 죽이시는 거예요. 제대하라고. 그런데 막상 우리는 그런 일에 들어가 버리면 “아이고, 이 병원이 물 쏟아지는 시설이 안 돼서 그렇다, 가슴이 아프다, 네가 부모 모셔놓고 하필 많은 요양병원 가운데 거기에 모셨느냐.” 하고 형제들이 막 타박을 하죠.

고거 한 며칠 지나면 보상금은 1/N 로 나눌 거냐, 내가 모셨는데 내가 다 차지할 거냐, 결국 이런 돈 문제고, 가신 분은 간 거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야지. 결국 또 수직에 다시 수평으로 쫙 깔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방법을 쓰느냐. 이게 오늘 참 재미있어요. 저 혼자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분종(분종은 ‘분양 한다, 아파트 분양 한다’의 뜻이에요.)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게 무슨 뜻이냐는 말이죠. 여기에 신학자다 좀 안다 하는 사람들도 손을 놔 버렸어요. 무슨 뜻인 지 몰라가지고. 뭔 뜻인지 몰라요.

여러분 지금 봤잖아요.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이 말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에는 약 240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유엔에 등록된 것은 한 210개 정도 되고. 평창 올림픽은 얼마나 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일 많이 참석 할 때가 월드컵 때 예선전에 제일 많이 참석해요. 220개가 참석해요.

240개쯤 되는데 그 민족들이 각기 자기 고유의 역사를 가지고 자기 씨족들에 의해서 강물이 흐르는 곳에 처음 유목, 목축생활 하면서 살아와가지고 자식들 낳고 난 뒤에 그렇게 씨족이 부족이 되고, 부족이 나라가 된 거예요. 이거는 누구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숫자를 보고 그들의 숫자를 정했다고요? 숫자를 정한다는 것은 그들의 면적을 정한다는 건데, 그렇게 정했다는 겁니까? 이게 터무니없는 비역사적 사실, 이거는 진짜 이스라엘 백성이 참 우겨도 너무 우긴다는 그런 생각 들잖아요. 마치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북쪽에 있는 성도, 나는 있는지 없는지 안 믿습니다마는 있다고 치고, 북쪽에 있는 성도가 오히려 북쪽에 자기 김정은이 정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의 문재인 정권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가 지금 남쪽은 잘 살기 때문에 신앙이 없고 자기네들은 신앙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의인의 기도는 능력이 있으니까, 자기는 믿음이 있으니까, 믿는 우리들이 기도하게 되면 결국 남북통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는데 만약에 세월호 빠지게 되면 “거봐, 남쪽 나라 사람들이 기독교를 주고, 교회를 줬지만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대로 벌을 받게 하신거야” 라고 하면서 벌을 받으면 남쪽에 있는 대한민국은 “우리가 회개하자. 5천만 민족이여, 하나님께 돌아오자”이러면 이제 남북통일 이룬다는 북쪽 성도가 하는 이야기를 심심해가지고 북한에 왔다갔다하는 미국 선교사가 그것을 듣고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해괴망측한 소설 쓴다고 이야기 할 겁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게 기도가 문제예요. 기도가 분류를 해요.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자기는 좋은 편에 속해 가지고 일단 나는 좋고 훌륭하고, 훌륭한 내가 한 기도는 중보의 효과를 본다는 거예요. 내 기도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김정은이 죽이는 거는요, 태극기 집회 참석해서 기도해도 김정은 이는 곧 죽게 되어 있어요. 태극기 집회 참석한 사람들은 주로 큰 교회 권사 장로들이거든요.

남쪽에 있는 목사들은 통일을 뭐라 하느냐 하면 북쪽 통일은 우리가 기도하기 나름으로 끝난다는 거예요. 언제쯤? 그건 모르겠다는 거예요. 앞에 코너에 차 오는지 안 오는지 그걸 몰라가지고. 여러분,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중보기도 자체가 터무니없는 자기 신앙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중보기도는 응답 받으면 마귀가 응답한 거예요. 응답이 되었다면 마귀가 응답한 거예요. 제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기도 안 해도 햇빛과 공기 주신다는 사실. 그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그리고 김정은도 살리고 있다는 거예요. 살리고~살리고~그런 노래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를 살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기도해서 살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는 건 그거예요. 우리의 기도는 거기에 대한 감사만 있으면 되요.

‘왜 죄인인데 살리십니까?’라는 감사만 있으면 되지, 또 나름대로의 자기가 얼마나 능력 있는 성도이기를 그렇게 과시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 능력 있는 성도가 자기는 능력 있는 성도라고 떠버리거든, 결국 뒤에 뭐냐 하면 돈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에게 돈 바치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이 말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보이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민족은 하나님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스라엘을 중간지점에 공중에 띄워 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공중에 띄워 버리면 프리즘이에요. 이스라엘의 숫자를 통해서 거기에 할당받는 민족이 이방 민족이 되는 겁니다.

220개의 이방민족인데 220이든 240이든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다니엘에 보면 모든 나라는 나라가 한 나라밖에 없어요. 모든 나라는 바벨론의 자손들입니다. 짐승의 나라 자손들이에요. 모든 나라는 이스라엘이 프리즘역할을 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를 바닥에 색깔로 나타낸 것이 이방민족이에요.

그러면 이 말이 하나의 허세인가, 엄포인가, 그냥 해보는 소리인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민수기 31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대들을 데리고 전쟁을 할 때 숫자를 세고 전쟁을 나가요.

미디안 군대와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은 사다리타기게임이 이미 끝난 문제예요. 이 코너 다 돌았어요.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전쟁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그들에게 주는 겁니다. 그들은 시늉만 했을 뿐이고. 그래서 전쟁에 승리하고 난 뒤에 그 얻어지는 모든 전리품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바로 제사장에게 주는 겁니다.

민수기 31장 29절에 보면 “절반은 그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자손들에게 주고 그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이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가져다가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그러니까 군인들이 받았던 1/1000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프리즘이거든요. 중간에 있단 말이죠. 프리즘 내부를 또 층을 나눠가지고 제일 하나님이 가까운 쪽이 제사장, 그 다음에 두 번째 단계가 레위인들, 그래서 민수기 31장에 보면 그 다음에 또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군인들의 1/1000은 제사장에게 주고 그 다음에 가만히 있는데 얻어먹은,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얻은 자손들의 절반에서는 누구에게 주는가, “그 절반에서 1/50을 성막을 맡은 레위인들에게 주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지금 이 전리품들이 전쟁하기 전에 누구의 것이냐 하면 이방민족 거예요.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과연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민족을 모든 민족과 민족 사이에 중보자적 기능을 줬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오직 너희들만 택한 민족이고 너희들만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올 때 독수리가 날개에 업어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나와요. 19장 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어떻게 업었는데.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나왔다”는 거예요. 독수리 날개 넓기도 넓어요. 남자만 40만인데 그걸 업는 독수리도 있네요. 여하튼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는 말은 앞에 일을 미리 다 보고 있다는 말이에요. 조감도라고 하죠. 이상의 시에 보면 나오죠.

여하튼 위에서 쳐다보는 거예요. 시인 이상이 건축가 출신이에요. 그래서 항상 시를 쓸 때 건축가 안목으로 봐요. 건축가가 이 설계도와 모형을 미리 다 만들어 놓잖아요. 시에 보면 ‘아해가(그 당시 아이) 골목을 다니는데 아해 하나가 무섭다고 그래요.’ 두 번째도 ‘무섭다고 그래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을 높은데서 보면 무서울 게 없는데 조선 사람은 일본인한테 백이면 백 전부다 무섭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앞을 내다보다가 폐병 걸려 죽었지만. 조감도가 그렇게 위에서 보는 관점이죠. 조감도라고도 하고 오감도라고 해요.

마찬가지로 독수리 날개로 왔다는 말은 독수리가 버려놓고 간 거예요. 어디 택배 기사입니까? 독수리가 광야를 갔다는 말은 광야가 사실은 애굽과 같은 옆에 있는 지형이 아니라 애굽을 아래에 두고 이거는 하나님과 애굽 사이에 광야가 중간에 낀 거예요.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어떤 코스 어떤 절차를 밟아서 어떤 힘든 환란을 거쳐서 가는 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에를 광야라는 지리적 환경가지고 지금 실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만 들어라. 그 말씀의 핵심이 제사화 되어 있고 그 제사를 관리하는 사람이 봉사하는 사람이 누구냐 제사장과 레위인이에요. 쉽게 말해서 “제사장과 레위인 덕분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기꺼이 드려야죠. 이거는 “내가 전쟁했다, 우리 남편이 전쟁 가서 월남 간 상사가 되어가지고 카메라 사왔는데 이건 내 것이다 - 월남전에 갔던 사람들은 카메라 다 사왔어요 - 사왔다” 이러면 안 되고 그 전쟁에 그 이방나라 베트남에 왜 성도가 참석했느냐는 말이죠. 이거는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가 업고 나간 거예요. 하나님의 승리를. 승리하면 하나님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계시기에 베트남 전쟁을 붙여준 거예요. 이방나라가.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 이방나라가 잘 먹고 잘 살더라도 그 보다 더 소중한 나라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가 더 소중하고 마지막 종착점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종착점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백성, 이게 천국이에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백성, 그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그거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이 땅에서 만들어 지면서 여기에서 어떻게 하늘로, 위로 올라가는 가예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위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예루살렘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만든 숫자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만든 숫자에 의해서 영토가 정해져요. 그게 바로 민수기에 보게 되면 민수기에 열두 지파가 시범 모델로 보여 주는데, 열두 지파들이 숫자에 따라서 영토가 정해집니다. 베냐민 지파는 영토가 얼마 안돼요. 숫자가 얼마 안돼서. 숫자에다 영토가 정해지듯이 장차 이스라엘에 이스라엘 될 사람들을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에 뽑힐 그 지파에 뽑힐 사람을 위해서 이 지상이 이방 나라화 되어야 하고 심지어 이스라엘마저도 이방 나라화 되어야하고 이방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된 사람을 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악한 역할, 반대하는 역할, 발목 잡는 역할 하라고 이방 민족을 대한 민족이라는 이방 민족을 두고 우리는 여기에 성령 세례에 의해서 이 땅에 성도가 미리 된 거예요.

이방 나라라 하는 것은 성도를 성도답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의 환경 구원의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지묘동 대구에 살고 있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주가 되기 위해서 하늘에서 그냥 주가 되신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와서 죄 많은 세상을 다녀가야 주가 되는 것처럼 똑같은 절차를 우리는 밟는 거예요.

예수님은 육을 입고도 죄를 안 지었지만 우리는 육을 입었기 때문에 걸핏하면 하나님께 대들잖아요. “못살겠다, 못살겠다, 이 땅에서 못살겠다.” 그럴 때마다 “네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육에서 나온 가짜 예수야. 진짜 예수로 바꿔 주잖아.” 하면서 성령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진짜 예수로 바꿔줘요. 네 죄 때문에 생각했던 상상의 예수 말고 진짜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구원되는 진짜 예수님을 수시로 어떤 어려움과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될 때마다 계속 보여 주십니다. 그 경로가 이 땅에 광야라는 거예요.

그래서 택한 백성만, 이스라엘만 구원되는 게 아니라, 택한 백성 건지는데 이 광야만한 환경은 없어요. 그 광야에서 모세도 함께 고생한다는 말은 장차 예수님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 땅에서 이 추운 땅에서 함께 고생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원망했습니까? 광야의 백성들이 뭐, “물 없다, 양식 없다”, 그냥 죽으면 되는데, “양식 없다, 물 내놔라, 뭐 애굽으로 돌아가자, 열 번이나 돌아가자” 그 원망들을 모세가 혼자 다 받고 있잖아요. 지금은 우리 주님이 다 받고 있단 말이죠. 진짜 못된 우리들이죠.

그리고 세상 환경이 잘 살면 예수고 뭐고 그게 좋아가지고 거기에 훅 빠지고 그런데 이 모세의 노래는 이미 모든 골짜기를 다 거쳤어요. 이미 최종 도착지점에 딱 와보니까, 아, 이방나라라는 것은 택한 백성 만드는 하나의 비닐하우스 같은 역할, 하나의 모판 같은 역할로써 구원되지 못할 이방 사람들, 여기서 이방 사람들은 지옥 갈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미국사람 말하는 게 아니고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의 구분, 요한 계시록에 나왔듯이.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사람과 없는 사람, 그 피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제사장 되어서 흘린 그 피, 어린양의 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사람은 이방 민족과 차별화 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그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너희들은 천사와 같은 존재다.” 라는 이것을 도착지점에서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택한 백성, 그 숫자, 생명책에 있는 기록된 것, 우리는 그 숫자를 모르지만 세상에 살면서 오직 피만이 모든 걸 해결했음을 사랑이고 그것이 기쁨이고 보람이고 존재의 이유인 것을 받아들이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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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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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