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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80112a약1장23절(세마포 귀신)-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야고보서

안양20180112a약1장23절(세마포 귀신)-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해봅시다. 야고보서1장은 사람들이 이 대목은 너무 어려워가지고 무슨 말인지 그냥 넘어가는 경우에 해당되는 구절이에요. 야고보서1장23절부터 하는데 22절 보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절에 보면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성급하게 아~ 쉽다. 이리 나와요. 그런데 쉽다 하는 사람이 뭐가 벽에 탁 부딪치냐 하면 25절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이 율법 앞에다가 뭘 붙여놨어요? 자유하게 하는 율법.

이 말은 뭐냐 하면 “여러분, 율법 아시지요? 알았으니까 이젠 마음껏 자유롭지요?” 라고 지금 묻고 있는 인상을 주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은 법을 알게 되면 자유로워요? 속박됩니까? 속박되지요. 여기서 이제 벽에 부딪히는 거예요. 앞부분의 해석부터 상식에 의한 해석은 다시 수정을 요구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라는 느낌이 오지 아니하면 25절을 통과하지 못하지요. 듣고 행하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라고 되지 아니하면 율법 앞에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유발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자유 하는 율법을 모르고 난 뒤에 앞에서 “도를 행하는 자가 아니고 듣기만 하게 되면 자기는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딱 하게 되면 이건 뭐가 되는가 하면 요거 됩니다. 숙제됩니다. 숙제.

숙제. 참 짜증나요. 공부 끝나고 난 뒤에 마음껏 공차고 싶은데 집에 가서 놀고 싶은데 숙제가 올무 돼가지고 끝까지 따라오잖아요. 숙제를 해줘야 그 다음부터는 자율시간 되잖아요. 오늘 강의 너무 어려운데. 자유라는 것이 자유를 주는 요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떤 부담도 없을 경우를 우리는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자율.

사실은 자유라고 하는 것은 너무 허황된 개념 같아서 딱 와 닿는 개념은 자유보다도 자율입니다. 자유 한다고 그냥 멍청하니 앉아있지는 않잖아요. 나는 3시부터 4시까지 뭐하고 5시부터 뭐해야지. 뭐해야지. 요게 자기가 세운 자기 규칙이지요. 자기 삶의 시나리오가 자기를 짜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짜놓은 거기에 대해서 속박이란 말을 사람들은 못 느낍니다. 신나지요. 그러면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라 하는 것은 숙제를 딱 마치고, 숙제라 하는 것은 본인이 내는 게 아니지요. 남이, 타인이 내는 겁니다.

타인이 숙제를 냈고 그 해달라 하는 대로 해주고 이제는 간섭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내 생활입니다. 내 생활 도립했으니까 할 도리 했으니까 더 이상 추궁하지 말고 벌준다 이런 협박하지 마세요. 내 자유입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머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리라.” 되어있는데 말씀을 그냥 듣기만하고 행하지 아니했다. 또는 행했다.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아이~ 참 빨리 해줘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스스로 내 인생 꾸려가는 그런 생활을 해야지.’가 밑바탕에 깔려가지고 이 22절, 23절 말씀은 그냥 해주는 셈이 되어버리지요.

율법의 도를 행한 걸 자유라고 봅니까? 아니면 그거 빨리 숙제를 끝내버리고 뒷부분이 자유입니까? 이걸 제가 묻는 거예요.

오늘 성경대로 하게 되면 율법의 도를 행하는 그 자체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나의 유일한 즐거운 시간. 자유 시간.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라고 지금 우리보고 묻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이상해. 율법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게 아! 막 기분 너무 좋아! 우리 외손녀 맨날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하는데. 아이~ 좋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율법을 행하는 것이, 나 듣는 건 짜증 나. 듣기만 하면 짜증 나. 행하는 거 아이 좋아~~ 이거 어떻게 가능하냐 말이죠. 뺀질이처럼 “예, 예, 알았습니다.” 하고 내 빼고. 나 혼자 살면서 이게 즐겁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러니 이 성경 말씀이 현실하고 안 맞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어디서 뚫리느냐 하면 25절에서 뚫립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 하는 율법 앞에 사이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자유하게 하는 그 앞에 뭐가 있지요? 온전이지요. 온전한 율법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기존에 율법에 대해서 숙제관념으로 다가온 것은 크나 큰 이건 우리의 실수고 착각이고 무책한 겁니다. 율법을 우리의 속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이야기한 율법정신과는 너무나 달라요. 온전 이라는 말을 이 건물로 봅시다. 10층 건물이 있다 합시다. 10층 건물을 어떤 사람이 사려고 갔는데 한 3층보고 난 뒤에 온전히 내가 전부 다 알았습니다. 이러지는 안을 거 아니에요. 4층 아니지요. 5층 아니지요. 그러면 뭐냐, 10층이라면 10층을 보고 난 뒤에 그 사람은 건물에서 온전한 것을 다 봤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온전한 율법이라 하는 것은 율법 속에서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미진한 것이 남아있게 되면 이건 뭘 붙이면 안 되느냐 하면 온전한 말을 붙이면 안돼요. 율법을 볼 때 온전치 못한 쪽으로 율법을 보게 되면 이건 율법의 속박을 받고 자유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율법의 지적을 받아요.

옛날에 고등학교 때 보면 지각생 있잖아요. 늦게 오긴 왔고 들어오라 하니까 얻어맞을 것 같고. 야~ 들어 와 들어 와! 하잖아요. 매 맞더라도 들어오라 하잖아요. 율법을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 속에 들어오면 되는데 율법이 법이니까 율법 속에 안 들어오고 밍기적 밍기적 거리는 거예요. 밍기적 거린다. 머뭇거린다. 머뭇거리면서 머뭇거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자기 자유 시간을 지금도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내 즐거움을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후딱 숙제 해치우고 빨리 내 자율적으로 자꾸 내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에서는 들어와! 들어와! 빨리 들어오라는 거예요. 이리 되어버리면 아무리 숙제를 해도 이게 온전치 못합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장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은 우리로 완벽한 자유인데 어떤 짓거리를 해도 자유가 돼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저주를 통과 못하고 심판을 통과 못하면 그것도 성도냐? 했지요. 수요일날 끝부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적어도 성도라면 무슨 저주, 동탄 저주, 어떤 저주라도 이미 그건 다 아이고~ 잘 통과했다! 터널을 통과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는 거예요. 아! 고생되게 했다. 법 지키려고 고생 되게 했다. 지금은 자유에요. 그리고 자율이고. 저거 지킨다고 그거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별짓을 다했어요. 별짓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거니까. 이미 율법을 통과하고 난 뒤에는 무슨 세계냐 하면 이게 원천의 세계입니다. 원천.

성도의 원천입니다. 성도의 원천. 성도의 본향. 출현, 출현이란 말이 적당하네요. 성도가 처음부터 성도로서 뽑혀 나오는 자리. 이게 그냥 율법이 아니고 온전한 율법이에요.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이에요.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지금 겁을 집어먹고 있었던 거예요. 벌벌벌 떨고 있었어요. 아까 이야기한 야고보서2장10절에 의하면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든 법을 어긴 자가 된다. 이런 협박성, 공갈성 앞에서 우리는 내뺄 준비만 하고 있었어요. 못 지키는 걸 뻔히 아니까.

그런데 율법은 곧 들어오라는 거예요. 백날 내빼봐야 율법에서 머뭇거리면서 조금 해내다가 또 자기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 저주성과 두려움, 공포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을 완전히 개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자기 딴아 조심스럽게 착실하게, 성실하게 산다 하지만, 그게 지 생각이고 자기 패턴이고 진짜 하나님의 패턴에서 보면 이건 이런 모독이 없어요. 들어오라 하는데 안 들어와. 그것도 자유롭고 온전한 율법이라 하는데. “그냥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내가 니 보고 열심히 지키라는 게 아니고 들어오라고!”

왜냐하면 이 원천이 성도라는 것은 니가 말씀 지켜서 성도되는 게 아니에요. 먼저 원래 장소가 있어요. 골방이 있어야 돼요. 만들어지는 장소가 율법 안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분의 모델이 누구겠어요?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

지금 야고보가 예수님의 제자, 12제자는 아니지만 그냥 사도라고 할 수 있어요. 사도급이 되지요. 70인 중에 있다고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어쨌든간에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이 성경이 있는 이상 야고보도 성령의 글입니다.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자꾸 숙제를 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너는 지금 머뭇거리면 내가 원하는 그 인간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 가는, 하늘에 속한 그 인간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천국 가는 인간 같으면 출발점을 니 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니가 생각하는 니 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속에서 튀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율법이 아니고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 속에서 니가 잉태되어야 돼요. 마치 엄마 자궁처럼 잉태되어서 이거 출현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면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요, 행한다. 할 때 그 행함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행함 개념하고 완전히 달라요. 아주 역으로 달라요. 정 반대로 달라요.

자, 그럼 요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갑니다. 율법에서 출현한다. 그러면 여기까지는 어려운 게 없으니까 쉽다고 생각하고. 율법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율법은 중심이다. 어떤 중심이냐. 세상에 중심이다. 세상의 중심지. 이리 보시면 돼요. 오늘날 세상의 사람들 보면 뭐가 없어요? 중심이 없지요. 유행 따라 세파 따라 분위기 따라 막 흔들리잖아요.

그런데 율법을 거울로 본다는 말은 아침에 그냥 안 나오잖아요. 거울을 보잖아요. 그러면 거울이 있다는 말은 지금 내 자신이 어떤가 거울을 보고 한다 말이죠. 거울은 그 사람을 그 앞에 고정시키게 만듭니다. 거울 앞에서 까불락 까불락하면 지가 보면 지가 어지러워. 거울 앞에서는 반듯하게 보지요.

그러면 흔들리는 나를 어디서 딱 잡아야 돼요? 거울 앞에 봐야 되지요. 거울 역할을 한다는 말은 다시 한 번 내 중심을 되비쳐보는 겁니다. 만약에 내 출현, 내 진정한 내 영혼의 고향이 율법 속이라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면 우리는 아침에 거울만 볼 게 아니고 어디 앞에서 다시 한 번 옷 몸새를 십자가 앞에서 한 번 봐야 되는 거예요.

그 율법, 그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고, 열심히 해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온전한 율법에서 파생된 것. 확정된 것. 그게 늘어난 것. 거기서 출생한 것. 중심에서 출생하니까 우리는 세상 어디를 가도 중심으로서 살아가고 활동하게 되어있어요.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중심을 우리가 속해있는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가도 중심의 중심됨을 세상에 중심 있다. 이미 결론난 중심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부분적 율법 아니고, 온전하고 자유로운 율법을 전파하는 증거 하는 기능자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아휴! 집사님. 나는 이거 지켰는데 이건 못 지켜서 어떻게 합니까?” 막 이렇게 불안해하고 “나는 이거 지켜서 복 받는다 생각했는데 아휴 2시간 뒤에 이런 나쁜 짓을 해가지고 이건 완전 저주 오는 게 아닙니까?” 할 때 “아닙니다.” 라고 자기 자신의 체험담,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면 그게 바로 그 자리에 박혀있는 온전한 율법의 중심적 기능이에요. 야고보가 사도잖아요. 그러면 야고보 본인도 마찬가지고 야고보에서 이야기하는 그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어디에 가도 니가 중심이 되라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일단 쉽다고 칩니다.

참, 문제는 이겁니다. 그러한 증인이라 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세상은 진공이다. 진공이란 텅텅 빈 공간이란 뜻이거든요. 세상은 진공이라 하는데 흔히 우리가 복음 알고 성도라 할지라도 자꾸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안타까워요. 성도한테는요, 성도는 세상이 텅텅 빈 게 아닙니다. 상대자가 있어요. 이 상대자가 누군지는 재수 없으니까 내가 붉게 쓰겠습니다. 이게 사단이에요. 사탄.

이렇게 성도님들하고 이야기해보면 자꾸 뭐를 까먹고 있느냐 하면 “목사님, 제가 이렇게 살면 저 반듯하게 살지요?”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반듯하고 성도답게 살려고 이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고 이렇게 늘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이야기해요. 나는 지금 누구하고 싸웁니다. 말을 안 해요. 왜냐하면 이건 나무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누구든지 하게 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 몸 편한 게 최고입니다. 몸 편한 게 최고에요.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내가 쳐놓은 나만의 공간에 누구 침범하고 나가게 되면 메꾸는데 에너지가 엄청나게, 원상 복귀하는데 힘들어요. 집에 손님 왔잖아요. 가보세요. 방 치우는 에너지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이 와가지고 내거 보고 나무라지는 않는가, 흉보지는 않는가, 설거지 안했다고 꼬라지 하고는 하여튼 한 5분, 10분 왔다가도 왔었을 뿐인데 아이구~ 마침 내가 옷을 안 맞는 옷을 입어서..., 온갖 생각을 다해요. 안 해도 될 그 에너지를 소비를 한다니까요. 이게 우리의 일상의 사람살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고방식하니까 자유란 딴 게 없어요. “제발 내 영역에 쳐들어오지 마!” 이게 자유입니다. 그냥 자율이지요. 제발 내 일에 내가 이렇게 딱 한 일에 대해서 니가 들어오지 마! 왜 들어오면 안 되는가? 나, 불편하니까. 왜 불편하면 안 되는데? 나 편해야 되니까. 왜 편해야 되는데? 묻지 마! 그 다음부터는 묻지 마! 나는 무조건 편해야 돼요. 건강하다. 편하다. 두 개 합치면 행복이거든요. 건강하 게 편한 것. 어디 아픈 데 없이 편한 것. 엄지 척! 최고에요. 최고.

이런 사고방식이 다 잠재되어 있는데, 복음 들었다. 성경 들었다. 이래가지고 복음 성경 잘 알았는데 막상 대화해보면 상대자를 자꾸 누락시켜요. 상대자를.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세상을 뭐로 보는가 하면 눈에 너 있고, 나 있고, 중간에 텅텅 비어있으니까 진공상태로 보는 겁니다. 진공상태로.

그러나 야고보서1장할 때 제가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 진공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텅텅 빈 곳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에너지의 권력장을 이렇게 촘촘히 박아놨습니다. 권력장.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분위기’라고 합니다. 분위기. 그 분위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분이 나오지요. 제가 아까 집사님한테 이야기했지만, 현대인은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기분을 소비해요.

바둑 두는 데를 기원이라고 합니다. 기원에 가면 남자들이 소위 허풍 좋아하는 남자들은 만원짜리 내기 바둑을 둬요. 사실은 액수 큰 거거든요. 그런데 그걸 딱 보면서 저는 만원을 보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저게 진라면 몇 봉지가 되거든요. 제가 사고실험을 해봤어요. 만원을 딱 대면 종이가 얇아가지고 잘 안보여요. 진라면 3통을 쌓아놓고 내기해 보세요. 진라면 20개 이상 놓고 지금 바둑 두는 거예요. 도박이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아줌마들이 그 도박 푼돈 같으면 살림 장롱 완전 새로 갈아치웁니다. 그런데 도박장에는 그걸 몰라요. 돈 귀한 줄 모른다 말이지요. 이게 뭐냐 기분입니다. 기분. 요걸 땄을 때 기분. 그냥 쇼핑을 막 하잖아요. 특히 명절 끝나고 난 뒤에. 에이 씨~ 시어머니 때문에 신경질난다. 백화점가서 막 긁어요. 결국 뭘 소비합니까? 다 입지도 않을 걸, 다 쓰지도 않을 걸 다 산다고요. 기분을 소비해요.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자, 어째서 이러한 현대인이 되는가, 물론 그 배후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요. 사탄이 있다고요. 우리는 지금 사탄과 상대해야 됩니다. 사탄의 특징은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이겨내야 돼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사물은 물건이지요. 이 세상은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면서 필요한 것을 챙기는 거예요. 고기 100마리를 잡았는데 다 먹을 수는 없고요, 2마리는 먹고 나머지98마리는 시장에 내다 팔지요. 거기에 애들 필요한 운동화도 사고 쌀도 사고 밀가루도 사고 하잖아요. 그렇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시장경제원리입니다. 이렇게 시장경제원리를 말 안 해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예요. 이렇게 산다 말이죠. 한 번 정리해 보면 인간은 옛날에는 농업 했는데 자급자족했다. 자급자족이 끝나고 난 뒤에 노동을 하면서 정착을 하니까 내가 먹는 거 이상으로 많이 나왔어요. 그걸 가지고 남는다 해서 ‘잉여생산물’이라 합니다. 잉여 생산물.

잉여생산물을 다른 데 특화된 그 쪽의 특산물하고 교환하기 위해서 중간에 시장이 말하면서 옛날에는 물건 들고 갔는데 불편하드라 이 말이죠. 그래서 조개로 대처하던지 화폐였습니다. 옛날에는요, 조개 이런 게 귀하고, 하다가 금, 은 이런 것으로 또 화폐가 바뀌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금 몇 달란트 했잖아요. 그러면 이 생산물을 화폐로 바꾸면 화폐 자체적인 어떤 가치를 통해서 시장에 바꾸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태까지는 내가 노동해서 물건 얻는 것 가지고 다른 노동 한 것 가지고 노동을 맞바꾸는 것과 똑같아요. 돈은 교환 수단일 뿐이에요. 물건이 많은 게 좋지, 돈이 많은 게 안 좋은 세상이었어요. 그때는. 그런데 말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게 등장했어요.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뭐냐 하면 미래의 자아를 미리 돈 주고 지금 마련하고 싶은 거예요. 미래의 자아상. 현재에 미래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미리 당겨서 나를 그런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유럽에서 배를 타고 저 아시아나 인도 쪽으로 무역하는 사람들이 내가 배타고 저 인도의 면화를 사서 팔게 되면 그 때는 향신료, 설탕, 홍차, 그런 것들을 엄청나게 했거든요. 만약에 풍랑 없이 제 때 온다면 이건 일확 부자 되는 거예요. 한꺼번에 부자가 돼요. 부자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밥을 굶는다는 뜻은 아니고 밥을 많이 먹은 게 부자입니까? 옛날에는 밥을 많이 먹으면 부자였어요. 옷이 많으면 부자였어요. 그게 아니고 장래에 여유 돈을 갖고 있는 게 부자라는 개념이 무역상을 통해서 베네치아부터 시작돼서 그 때부터 새롭게 된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살다보면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 잘될 때도 있지만, 못 될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못 할 때에 일년 뒤에 갚을 테니까 돈 좀 빌려주세요. 지금 내 곡식을 살 수 있는 돈이란 수단을 매개체를 빌려주세요. 하려면 여유 돈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야 되지요.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이자가 생긴 겁니다. 이자. 이자이기에 이게 바로 자본주의에요. 이자를 위해서 투자가 있고 요새는 투자가 노동생산성을 재껴버리고 투자를 위한 투자로 모든 인간들이 투기꾼이 됐어요.

살 집을 사는 게 아니에요. 투기 대상으로서의 아파트를 사는 거예요. 그냥 눕고 그냥 밥 먹는 자리를 사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옆자리에서 얼마 올랐다. 얼마 내렸다가 나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요. 그냥 뜨듯한 밥 먹고 살면 되는데 세상에 다른 단지에 2억 올랐데. 우리는 5천 내려갔데. 이게 저주처럼 그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배후에 악마가 절대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악마가 드러내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기호입니다. 기호. 이 기호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가치로 표시한 거예요. 표시. 아까 가치를 표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돈 또는 돈의 액수가 되는 거예요. 돈의 액수가 기호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기호가 되면 기호, 요거 이런 세상을 기호체제라 합니다. 이걸 기호 네트워트가 됩니다. 네트워크. 설명하는데 어렵다마는 참아내셔야 돼요.

자,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내가 존재한다. 왜 존재하느냐, 묻지도 않아요. 이 세상은 그런 거 안 묻습니다. 이 세상에는 중심이 없어요. 중심은 없고 이 세상은 율법이 없지요. 온전한 율법이 없지요. 미래가 있다는 말은 온전한 율법이 없다는 말이에요. 미래를 미래라 하는 것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거예요. 중심이 없어요. 기호체제하고 반대말이 뭐냐 하면 율법체제에요. 야고보서에서. 율법체제. 하나님체제에요. 여기는 자유롭고 온전한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진공이 아니라고 했지요. 진공이 아니고 무슨 체제냐 하면 기호체제입니다. 왜 사탄의 체제라 하지 않고 기호 체제냐, 사탄은 자기를 이 기호라는 관념 뒤에 숨어버린다고요. 기호를 창조하는 것은 앞서서 존재가 있고 존재는 뭘 하느냐 하면 요걸 아시면 오늘 다 풀려요.

존재는 존재감을 갖는다. 차이점이 달라요. 존재는 존재감을 갖고 존재감은 뭐냐 하면 자신한테 이익을 입고 이익이 뭐냐 하면 가치를 따지고 그 가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시장에서 찾는 거예요. 여기를 설명해야 됩니다. 하나 하나 차이점을 이야기할게요.

존재라 하는 것은 평소에는 없어요. 몰라요. 나는 존재한다. 미친 사람 아니면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뭔가 움직이지 나는 움직이고 있는 게 나는 존재한다. 이리 하지 않잖아요. 존재는 없는데 뭔 감은 있어요? 존재감이 있어요. 존재감은 혼자 있을 때는 존재감은 안 나와요. 누가 불러줬을 때 “혹시 여기 택배 왔는데 계십니까?” 누가 부르잖아요. “예, 여기 있어요.” 갑자기 자기를 겨냥한다니까요. 우리 외손녀가 “이거 내거! 이거 내거!” 잘 밝혀요. 지금 그 단계라. 남이 불러줘서 존재감할 수도 있고, 내가 저게 탐이 날 때, “저도 바나나 하나 먹어도 돼요?” “저도 바나나 먹어도 돼요?” 슬금 슬금 다가갈 때 저 사람이 내 존재를 받아줄까 할 때 존재감이 생긴다니까요.

그럼 존재감부터 뭐가 생기느냐 하면 반드시 뭐를 노린다? 이익을 노리는 거예요. 이익을. 이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당신 이거하고 무엇을 얻을 건데요? 당신이 이러면 이걸 잃어버리는데? 당신 그럼 얻는 게 뭐냐? 이게 존재감에서 나온 거예요. 누구 앞에서? 이미 상대를 의식하지요. 상대를 의식할 때, 자기 존재감이 나온다니까요.

평소에 집에 있을 때, 나는 자고 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 없어요. 그런데 방에 있는데 누가 들어왔다. 누군지에 따라서 다르지요. 아는 사람 같으면 그냥 누워있고 “아이고, 오셨습니까?” 존재감을 느끼면서 존재감 행동 하나, 하나가 막 가동되면서 어떤 말을 해야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나한테 이익이 되고 손실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누구 하나 왔다가 가버리면 “아이고, 세상에 내가 이 속옷을 안 치우고 이게 무슨 짓이고” 손해 본 느낌 들어요. 손해 본 느낌. 그리고 가구가 깔끔하다. 아~ 내가 얼마나 우리 집 청소했다는 걸 알겠지. 어떤 이익감을 느낀다니까요. 이익감을. 존재감이지요.

그럼 이익을 구체화로 얻을 수 있는 것. 아! 그 사람 좋더라. 예를 들어서 사장님이 “아이고, 김대리 훌륭하다. 훌륭해. 착해. 정말 훌륭해. 월급20만원 깎는다. 이해해라.” 이거 말이 안 되지요. 훌륭해. 착해. 한 달 뒤에 당신은 차장으로 승진! 그게 뭐냐 하면 칭찬에 실질적인 획득이 되어야 돼요. 실질적인 획득. 그럼 경쟁에서 이기는 거잖아요. 그게 가치에요. 그러면 이익에서 가치가 오면서 여기에 뭐가 오느냐 하면 대리라는 기호에서 뭐로 바뀝니까? 과장이란 기호로 바뀌지요. 요 기호의 네트워크가 세상이 되는 겁니다.

기호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옛날에는 뭘 생각했느냐 하면 기호라 하는 것은 의미입니다.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가치가 있다니까요. 의미가 아니고. 그 가치는 기호로 나타나는데 그 기호가 무슨 네트워크냐 하면 시장네트워크, 나한테 어떤 구체적인 돈 몇 푼. 대리인데, 200만원 받다가 과장되어 150만원 받으면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과장의 기호에 맞는 추가적인 가치 잉여가치가 부가되어야 돼요. 그러면 200만원 받다가 250만원 받으면 50만원은 왜 줍니까? 니가 시장에 살 때 전에는 200만원치 물건사다가 당신은 얼마나 자유가 있다. 250까지 구입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소지했다고 언어가 모든 이 네트워크가 사회가 부여하는 겁니다. 혹시 회사 직분이? 과장! 아~ 과장님! 기호적으로 서로 소통하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거예요.

가치를 지니고 그걸 기호가 붙고 그 기호가 비로소 힘 있는 의미로서 우리에게 주고받고, 주고받고 되는 겁니다. 특히 자녀들 선볼 때 “총각, 뭐하노?” 묻잖아요. 교회에서 “집사님입니까? 권사님입니까?” 묻잖아요. 그게 뭐예요? 그게 전부 다 기호세계라니까요. 그런데 그 기호세계에 누가 있다고요? 하나님의 원수, 마귀가 숨어있으면서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놨다니까요. 이익이냐, 손해냐, 무얼 얻을 것이냐, 무엇을 잃을 것이냐, 전부 이렇게 돌아가게 만들었다니까요. 목쉬어도 할 수 없다. 이거 중요한 거니까.

처음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하게 되면 이 세상이 진공인줄 알아요. 진공. 진공이고 나만 율법대로 말씀대로 착하게 살면 주께서 아이고, 착하구나! 이렇게 복 줄줄 알아요. 그런데 착하게 살면 된다. 할 때 착하게 살 때, 실질적인 우리 존재감이 “하나님이여, 저 여기 있어요. 착하게 살게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니가 존재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뭘 노리는 거예요. 이익이고, 이익은 어느 네트워크에서? 이 세상의 네트워크에서 물건을 힘을 보다 많이 획득할 수 있는 힘을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킬 때 힘을 추가적으로 얻는다는 그 생각이 배후에 누가 있다? 사탄이 있는 거예요.

육의 세계! 그럼요. 야고보서1장 나오는 거. 계속 강의한 내용이 이거에요. 1장부터 죽 이야기한 게. 우리는 너무 추상적으로 보는데.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어느 세계에 다녀갔느냐 말이에요. 예수님이 지붕 속으로 갔습니까? 예수님이 없을 때는 이 세계가 전부에요. 푹 담그고 빼는 순간 “죽여야 된다. 저 사람을.” 하고 숨어있는 악마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부추겨가지고 심지어 민중들도 다 부추겨가지고 죽여 버려라. 왜? 이유는 없다. 무조건 죽여 버려라. 우리하고 안 맞는 사람이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이 네트워크에 집중하다 보니까 자연스럽지요. 특히 운전하시는 분들 그런 거 느끼잖아요. 운전할때는요, 처음에 운전할 때는 차 따로, 나 따로에요. 차가 어른 같아. 모셔야 돼. 그런데 운전 5년10년 하다보면 나하고 한 몸이에요. 이 핸들은 나의 긴 팔의 연장이에요. 이야기하면서 운전 다 돼요. 왜? 한 몸이니까. 차가 어디에 바치고. 다 느끼지요. 다 알아요. 전부 다 느껴져요. 전부 한 몸이니까.

이 세상은 태어나면서 훈련이 됐기 때문에 이 세상과 한 덩어리에요. 한 덩어리. 한 덩어리이기에 너무 친숙하고 떨어진다는 게 이상해. 이익 없이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한 짓이에요. 이익 없이 행동한다는 게. 남한테 뭔가 희생해주지요. 그거 그냥 공짜 아닙니다. 좋은 인상 남기고 그 사람에게 해가지고 결국 뭔가 노리는 게 있어요. 바보 아닌 이상 공짜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요번 수련회 하면서 어떤 문장을 이야기했잖아요. ‘관용이란, 확신 없는 자들의 미덕이다.’ 기억납니까? 날 리가 있어요? 사람이 관용하니까 어지러워 보이지요. “세상에~ 목사님 관용도 많고 세상에~ 성경대로 산다.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거 같다.” 참,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확신이 없어요. 확신이 없는 것을 관용으로 감추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뭐로 티냅니까? 아름다운 모습으로. 확신이 없어요.

확신이 없다는 말은 첫째 강의에서 중심이 하나도 없어요. 어디 천국을 가려고 시도하지 천국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에요. 성도가 아니에요. 관용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못돼 처먹어야 돼요. 배려는 손톱만큼도 없어야 돼요. 왜?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는 하룻밤에 185천명이 죽었잖아요. 요번 수련회 때 했지요. 히스기야하고 붙은 거. 185천명. 하룻밤에 천사가 와서 다 죽였습니다.

그 185천명 가운데서 효자도 많고 집에서 정비소하는 사람도 많고 농사짓는 참신한 사람 얼마나 많아요. 나라의 부름 받고 온 사람들 많아요. 그 젊은 아들 미래가 창창하고 자기 네트워크에서는 전부 다 한가닥하고 사랑하는 아들이고 세월호에 빠진 아들보다 더 귀한 아들이에요. 제천에 죽은 아줌마보다 더 훌륭한 주부들입니다. 한꺼번에 다 죽였어요.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온전한 율법이 없기 때문에. 사탄에 매인 것이 자유가 없는 거예요. 사탄에 풀린 것이 그게 자유입니다. 이런 분위기, 이런 기분, 이런 네트워크의 출신이 아니어야 돼요. 여기 소속이 아니어야 돼요. 이건 성도의 상대자입니다. 성도가 매일같이 싸워야 될 상대자에요. 이 네트워크가. 우리는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살아갑니다.

지난 낮 설교하면서 그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참 이야기 잘했다 싶은 대목이 뭐냐, 인간은 24시간 중 23시간 멍청히 있다고. 그냥 멍청하게. 특히 의사들. 입 벌리세요. 멍청히. 예~~ 아이고, 요거 빼야 돼요. 요건 안 빼도 되겠네요. 이 자체가 멍청한 거예요. 택시 운전사하는 사람들. 삑삑. 탔습니까? 모든 게 멍청해요. 주부들 설거지하면서 멍청해요. 그러다가 안 멍청할 때가옵니다. 혹시 누구 계십니까? 그 때가 뭐가 생깁니까? 존재감생기는 거예요. 예. 예. 아니오. 문 열지 마세요. 아이고~ 머리 한 번 보고. 거울을 보고. 중심 잡고. 못 빠져 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야고보서 율법하는 것은 예수님만 이야기하면 돼요. 쉽게 말해서 로마서율법은 다른데 그냥 예수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율법, 예수님이 딱 오니까 이거는 유지하면서 지키려고 하니까 상대자 없는 절대적 존재감가지고 하나님하고 상대하려하는 거예요. 맹탕으로. 자기는 평소에 누구하고 상대하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단독자로 ‘나는 내 할 것만 충실히 했습니다. 이 충실함가지고 성경 말씀 충실히 지키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지요.’ 라고 일방적 생각을 주님 앞에 들여놓습니다.

그럴 때 야고보서2장 10절 다시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어기게 되면 모든 것이 범한 자가 된다는 원리를 니가 아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방금 했던 이 기호의 네트워크인데 이 기호의 네트워크에서 율법 지킨다는 말은 결국 뭘 노리는 겁니까? 이익이죠. 주의 말씀대로 복음대로 지키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옵니까? 되겠지요. 그런 식으로 노리다가는 그 배후에는 누가 있다? 사탄이 자꾸 그런 율법가지고 그런 짓하는 거예요.

그런데 온전한 율법은 인간이 지키는 게 아닙니다. 온전한 율법을 구성하고 이 땅에 집어넣으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이 야고보서에는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율법이라 보고 그 율법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여기 있다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새롭게 여기서 만들어내요. 생산해 내요. 이게 하늘에서 온 은사라고 되어있어요. 야고보서1장에서는.

쉽게 말해서 로마서로 말하면 하늘의 성령을 받는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 낸 피조물이 성도에요. 그러니 출발점부터가 이미 자유롭고 뭐하다? 온전한 율법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미 온전한 율법으로부터. 행동 여하에 따라서 온전에서 미온전으로 가는 게 아니고, 여기서 자연적으로 행위가 나오는데 복음적 행위가 나오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온전하고, 온전하다는 말은 누구한테 지적을 받는다? 안 받는다? 이미 지적을 거치고 난 뒤에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자체가 온전한 거예요. 그걸 은사라고 해요. 은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존재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존재감 나오지요. 존재에서 존재감 나오는데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이 나와야 한다 이 이야기에요. 이 성경은. 존재에서 존재감 나오면 여기서 바로 뭐와 관련되어있어요? 존재감 자체가 이익과 관련되어있어요. 이익과. 이거 지키면 천당 보내줍니까? 내가 이거 지키면 천당 보내주는 이익을 제 소유화 시킬 수 있습니까?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사탄의 짓이에요.

그래가지고는 율법을 몇 개 지켜야 돼요? 그것도 정신 멀쩡할 때 지켰다가 정신 멀쩡하지 못해도 못 지키면 어떻게 할 건데? 성경에 보면 못 지키게 되면 뭐한다? 지가 지켰던 거 다 무효인데. 니가 모든 걸 지켰어도 하나라도 어기면 무효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의미가 니 행위로 온전함이 취소되는 그런 소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소속이 다르다는 말은 여기 있다가 거기 간다는 말이 아니고 출생지 자체가, 출현 자체가 하늘의 은사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하늘의 은사. 성령으로 출발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여튼 이것도 모르고 그동안 야고보서 보게 되면 이건 뭐 예수 믿다가 에이 씨~ 야고보서 보니까 이건 뭐 할 것 다 해야 되고 나 미치겠다. 그러니까 숙제 빨리 끝내고 숙제했으니까 저 요번 괜찮겠지요? 숙제했으니까. 이리 나온다 말이죠. 그게 이익에 따라 돌아가는 기존에 사탄적 네트워크에 푹 젖어 있어서 그래요. 푹 젖어 있어서. 여기는 돈 주고 사야 되고 그래야 생산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존재가 예수님이 된다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는 존재감이 예수님 존재감이 나와요. 예수님감. 예수님의 감각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감각이. 예수님의 감각을 야고보서2장에서는 뭐냐, 형제사랑이라 해요. 누구 사랑 안한다? 형제 사랑이 누구 사랑 안한다? 내 사랑 할 필요 있다, 없다? 왜 내가 내 사랑해야 됩니까? 내가 왜 내 관리를 해야 돼요? 출생지가 어디입니까? 예수님 속에서 나왔지요. 그럼 책임자가 누구에요? 누가 책임자고 누가 나를 세상으로 그냥 살게 하십니까? 주님이 살게 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굴 사랑했어요? 예수님이 이웃형제를 사랑했잖아요. 그 사랑을 연이어서 우리도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랑? 내 사랑을 안 하고 가는 거예요. 도대체 보통 자신감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미리 쉬기 전에 이야기하지만, 그 이웃사랑이 그 태도가 관용이다. 온유하다. 그런 겁니까? 아니면 사가지 없는 거예요? 어떤 거예요? 사가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예수님이 친절하지 않아서 돌아가신 거예요. 마음 맞춰주려고 공통점 찾으려고 안 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교회에서 예수님 얼굴보다 십자가가 낫지요. 예수님은 얼굴보다 십자가가 더 예수님다워요. 얼굴 그려놓으면 참 친근하다. 착하다. 이리 생각되잖아요. 십자가는 뭡니까? 어느 인간도 공통점이 없었다. 이 말입니다. 인간과 전혀 안 맞는 분으로서 돌아가신 거예요. 지금 제자들도 외면했으니까요. 제자들이 외면한 그 외면의 자세가 지금 그게 우리를 만들었다니까요.

내 품성을 주님이 만들어냈지 내가 만들고 하면 이게 또 나의 이익으로, 요거 하면 이익 옵니까? 내가 천당 가는데 유리합니까? 또 이렇게 따지더라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걸 따진다면 이미 그건 따지기 전에 하늘의 은사를 안 받은 사람이 돼버려요.

결국은 이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1장을 새로 보라는 거예요. 하늘의 은사가 없고 성령이 없으면 야고보서 이거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지 않으면 그 뒤 이야기가 전혀 납득이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이게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성도의 거처가 어디냐, 이걸 묻는 겁니다. 니 얼마나 착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니 소속이 어디야? 너 어느 출신이야? 전라도야? 경상도야? 어느 쪽이야? 묻는 것처럼 하늘이야? 땅이야? 묻는 겁니다. 땅에서 하늘로 가는 게 아니에요.

제가 수요일날 그런 질문하라 했잖아요. 수요일질문 해볼까요. 땅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본향에 갈 수 있습니까? 슈퍼맨도 아니고 어떻게 올라갑니까? 정답 이야기했는데 또 돌아서면 다 까먹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또 이야기해줄 테니까. 이 땅에서 죽는 거예요.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을 죽였던 그 원리 원칙대로 공히 같이 죽으면 그 안에서 누가 반겨주느냐, 예수님이 반겨줘요. 예수님이 반겨줍니다.

그러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차곡 차곡 포개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그게 베옷이지요. 시체를 덮었던 예수님 다니시던 베옷이지요. 그거 이야기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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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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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