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강-YouTube강의(선입견)180116-이 근호 목사
218강-YouTube강의(선입견)180116-이 근호 목사 제 218강, 제목은 ‘선입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진리를 주셨습니다. 진리를 주셨는데, 진리를 주신 동시에 사람들 나름대로 만들어낸 진리가 있어요. 만들어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진리와 견주게 됩니다. 자기들이 아는 진리와 외부에서 온 진리와 일치점이 몇 퍼센트 맞아떨어지는지를 따지게 되어 있죠. 따질 때, 그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이 진리가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 것인지, 실제적인 어떤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요. 나에게. 나에게 보탬이 되는 그것이 진리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은 겁니다. 상당히 자기 딴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지혜롭다, 슬기롭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힘이 더 커지는 것, 힘이 더 늘어나는 것을 가지고 이익이라고 하는데, 그 힘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본인들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걸 정리하게 되면 진리란 본인이 더 단단해지고, 안정적이고, 더 커지고, 본인의 영역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그 모든 방안을 그들은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주신다고 한다면, 인간들은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먼저 마중을 나가죠. 우리한테 얼마나 이익이 있느냐를 생각하면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곧 진리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의 진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진리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를 위한 뜻이죠. 굉장히 간단하죠. 아버지를 위한 뜻이 아버지의 뜻이에요. 여기에 뭐가 전혀 끼어들면 안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한 뜻은 진리에 포함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진리를 줄 때는, 진리 아닌 것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진리가 이 땅에 정착하게 되죠.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 되는 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생각하고, 뭔가 외부에서 진리라고 하게 되면 거기다가 보탤 생각을 해요. 자기가 깨지는 것이 아니고 멀쩡하게 있으면서 추가적으로 더 얻어지는 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고, 아버지의 뜻이 들어왔을 때에 무엇과 충돌을 일으키느냐 하면 모든 진리는 나한테 보탬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된다는 그 생각과 자기 뜻과 어쩔 수 없이 꽝하고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진리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무엇도 함께 몰고 오셨느냐 하면 아버지의 뜻도 함께 몰고 오신 거죠. 그러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고 칩시다. 안 왔다고 치면 사람들의 뜻만 여기에 놓여있겠죠. 사람들의 뜻만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세계는 멀쩡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진리를 대동하고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은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전쟁터로 유발했고 사람들은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진리를 배격하기에 급급하게 된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꼭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죠. 여러분들이 진리를 받을 때 어떤 식으로 받았습니까? 도움 된다고 받았습니까? 이익 된다고 받았습니까? 제일 처음의 이익이 뭐냐 하면, ‘이 진리를 확보하면 죽어서 천국 간다.’ 이런 이익을 생각했죠. 그러니까 진리가 참 좋아 보이죠. 벌써 거기에 뭐가 포함이 되었습니까? 충돌이 아니고 나를 천국 보내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일방적인 자기 이익을 고려한 개념을 이미 본인들이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거는 “예수님은 길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라고 백날 이렇게 외워도, 그리고 환영하고 반기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반복을 해도 여전히 자기영역을 떠난 적이 없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진리라고 합니다. 엉터리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근원적으로 바닥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다시 정리해드릴게요. 예수님은 진리인데, 진리란 아버지의 뜻이에요. 아버지의 뜻이 왔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있는 인간세계가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따로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따로 왔다는 자체가 기존의 인간들 속에는 진리라는 것은 아예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예요. 없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각자 인간들의 포부와 이익과 노림수, 원하는 것, 기대, 희망, 이런 것으로 구성된 진리관이 이미 성립이 된 이상은,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그것을 내 위주로 해석해놓았기 때문에, 해석해놓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고 일방적으로 우겼던 겁니다. 이게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저를 포함해서 우리 자신한테 한번 물어보자 이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데 뭘 원해서 믿었던가요? 무엇이 좋아서 믿었는지 다시 한 번 자기한테 질문을 해보자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그 대목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나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소위 인간들이 시도한 것이 뭐냐 하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쪽을 원할까요? 그것을 기피할까요? 이게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을 원할 때, 이미 살아난 거예요. 이 사람한테는 진리가 와도 진리를 배격할 수밖에 없던 요소가 아주 극렬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우리 각자한테 물어보는 겁니다. 본인이 똑똑하고 슬기롭다고 자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벌써 우리들에 의해서 진짜 예수님은 배격당하고 가짜 예수만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 감췄다는 겁니다. 우리의 선입견이, “하나님이 우리가 이런 것을 원합니다.”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우리 자신을 점점 더 지옥가게 만드는데 가담한 거예요. 방향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는 쪽으로 점점 더 우리를 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슬기롭고 지혜 있는 것을 우리가 자진해서 포기할 마음이 없잖아요. 그런데 정말 구원받을 사람은,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너는 슬기도 필요 없고 지혜도 필요 없다는 쪽으로 자꾸 몰아세워 가도록 해요. 네가 안다는 것이 화근이고, 네가 안다는 이것이 문젯거리라는 겁니다. “나는 성경에 대해서 압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압니다.” 이게 화근이고 문젯거리에요. 몰라도 갈 수 있는데 왜 꼭 알아야 하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몰라도 갈 수 있는데. 자기가 모른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르면서 가는 것이 최고 아닙니까? 내가 주특기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구원을 받는다. 이게 바로 엄지척, 최고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남이 알아서 다 해주는 것, 그걸 가지고 여기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는 어린아이에요. 어린아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좀 알지 마세요. 똑똑하지 마세요. 슬기롭지 말고 행동 바르게 하지 마세요. 이성적으로 하지 마시고, 그냥 무턱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개판이죠. 제발 한번은 개판 맛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보세요. 그래도 천국 간다면 이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포착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여러분을 포착해서 어린아이같이,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되는대로, 몰아세운 대로, 그냥 흐르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뒤에서 미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자유만큼은 우리도 누려보는, 그런 자가 진리 안에 있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