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180116
두 번째 시간의 동영상은 촬영 실패했습니다.
홍민희gblayer('gblayer4', 'onething2704', '홍민희', 'onething2704@naver.com', '', '1', './program');(IP:221.♡.139.88)
18-01-20 23:52
가락-요한복음 16장 9절(부재)18011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7절부터 한번 보겠어요.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렇게 이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떠나가시는 분이 떠나가시는 분이 우리한테 오신다. 떠나가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겁니다. 세상을 벗어나게 해줄까? 라는 뜻이예요. 세상은 못 벗어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꼭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결국은 구원이 안된다는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그런데 문제는 세상을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가 모른다는 거예요. 세상을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벗어나기 싫어해요. 우리 자신이. 여기서 잘되기를 바라죠. 6절에 보면 5절도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뭔가 약간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떠나버립니다.
떠난 그 자리가 무슨 자리이냐 하면은 부재의 자리. 오늘 제목이 될 가능성이 후보감인데 부재의 자리. 부재, 존재하지 않는 것, 없는 것. 없는 존재. 부재의 자리. 부재의 자리를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까 함께 있을때는 이건 존재이지요.
존재인데 함께 있다가 떠나버리면 이 존재의 자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존재하지 않는 자리, 이걸 이제 부재의 자리가 되어 버려요. 제자들 가운데 먼저 부재의 자리를 만들어 버립니다. 부재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하는 말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까?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 거예요. 그러면 보혜사가 오게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만든 이 부재의 자리가 곧 너희의 자리로 내가 해주께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땅에서 떠나서 떠나버리고 이 자리는 없는 자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보혜사 성령이 올 때 그렇게 가능한겁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러한 주님의 취지에 우리가 기쁘게 ‘아이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하고 반기는 것만 남아 있어요. 반기는 것만.
그것을 반길려면 이 세상에서 어떤 미련이나 집착이 없어야 되죠. 없어야 될려면 시원하게 푹 떠나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시원하게 해주는 방식이 바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 하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겁니다.
있을 자리가 아닌데 너 자꾸 거기에 버틸라고 하지 말란 말이죠. 니가 지금 버티고 있는 존재 자리가 니가 어떤 자리인줄 알아? 그거 하나님한테 책망받을 자리야. 그런데 인간들은 떠날 생각하지 않고 거기서 훌륭하게 되려고 자꾸해요. 훌륭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하게, 거룩하게, 훌륭하게. 여러분 훌륭하게 되는 것이 쉽습니까? 있는 자리에서 훌륭하게 되는 것이 쉬워요? 아니면 아예 떠나는 것이 쉽습니까? 떠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이죠. 슈퍼맨도 아니고 말이죠. 이 세상 놔두고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자꾸 떠난다고 해도 제자들이 대꾸를 안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거든요. 왜 귀담아 듣지 않는가? 그들은 떠날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라듯이 내가 간다고 해도 왜 너희들 가만 있는냐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어떤 관계냐 사랑하는 관계잖아요.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은 사랑이라하는 것은 뭘로 측정되느냐 하면은 부재 했을 때, 그 사람이 없을 때, 마음에 있는 아픔, 고통의 양이 곧 평소에 그 사람이 가졌던 사랑의 양입니다.
부부니까 한번 시험해봐도 되겠지요? 말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백날 할 필요 없어요. 예비군 훈련 한번 가보세요. 예비군 그거 합니까? 숙식, 합숙 해요? 잠을 부대에서 자요? 몇일 잡니까? 예비군 훈련. 한 3,4일? 2,3일. 2,3일 너무 짧다. 그럼 사랑이 측정 안되겠네.
하여튼 뭔가 없어지고 난뒤에 마음에 심하게 고통이 온다면 그것은 같이 있을 때 평소에 되게 사랑했다는 뜻이예요. 독감 걸려서 안나온다든지. 누가 없어질때에 아이고 없으면 안되는데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예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 제자들도 베드로 같은 경우에 주님을 사랑했잖아요. 끝까지 가겠습니다 라는 말은 사랑하고 있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이제 부재의 그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겁니다. 이 점을 여러분 잘 기억을 해야되요. 굉장히 어려워서 그러는 거예요.
어떤점이 어려우냐 하면은 자리가 없다는 것. 자리가 없을 때 한번 적어볼께요. 부재의 고통이 곧 뭐다? 사랑이다. 왜 그러냐 하면 누가 고통한다? 내가 누가 떠나버리면 내가 아프잖아요. 떠난 사람이 아픈게 아니고 내가 아파요. 어떤 빈자리가 아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내가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구성해요. 남이 나를 구성했고 나는 그 구성으로 인하여 나는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나는 고통 당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타인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엄마예요. 엄마. 애들 보게되면 아빠는 별로예요. 아빠도 뭐 양육 휴가 받는다고 하잖아요. 글쎄 그 휴가 받아서 양육하는지 해외 놀러가는지 모르겠는데, 애는 엄마만 찾아요. 엄마만. 기본적으로 아직 갓난애는 엄마만 찾아요.
엄마가 없을 때 아부해서 아빠한테 하지만 엄마만 나타나면 아빠는 그냥 내쳐버립니다. 엄마한테 쪼로록 가버려요. 실제예요. 팩트입니다. 요새 늘 느끼고 있는거예요. 그냥 관찰하거든요.
엄마가 나를 만들었으면 나는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단독적, 독자적으로 사는게 아니예요. 타인의 흔적입니다. 타인의 흔적. 내가 있음으로서 나를 있게 한, 만들어 주신 또 나를 있게 한, 신체만 신체 덩어리만 있게 한 것이 아니고 나의 정신까지 있게한 이런 정신을 만들어서 내게 꾸역꾸역 집어넣어준 그분과 이렇게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떨어질수 없는 종속된 상태. 지금 인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 이야기 하는게 아니고 인간과 관계에서 마찬가지라니까 그걸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빠 엄마가 없으면 이 사람은 이 아빠 엄마를 대체할수 있는 뭐 고아원 원장이든 누구든지 하여튼 계속 인간은 단독적 독자적으로 살아가는게 아니예요.
심지어 자아가 형성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춘기 되면 혼자 큰소리 치지요? 그런데 막상 군대라도 가게 되면 엄마가 보고플 때~ 저기 앞에 계신분은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다만은 내가 나왔다고 인사말 한다고 우정의 무대라고 옛날에 했거든요. 뽀빠이 나와서 사회보는 거 있어요.
타인의 흔적이예요. 타인의 흔적. 남들이 나를 만들었어요. 나는 혼자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었다. 나는 이제 다 컷다 에헴하고 큰 소리 쳐도 막상 그 사람의 정신 대부분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자기를 낳게한 그 분을 의식해서 그 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조성된 겁니다.
그분의 눈치를 보면서 나를 만드신 분의 눈치를 보면서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 진거예요. 그래서 어떤 영향력을 누가 영향이 크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식구들 만약에 식구가 5명인데 5명 가운데 서로 지금 잘났다고 살아 가지만 이 중에서 누구하나 멀리 떠나버리면 또는 떠나든지 아프든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죽든지.
죽어버리면 가장 영향을 받은 쪽이 가장 많이 웁니다. 너무 아파서. 그러면 주로 시아버지 이렇게 돌아가시면 누가 우느냐 하면은 끝까지 시아버지에게 봉양했고 시아버지 가까이에서 근접해서 시아버지를 이렇게 돌봤던 그 맏며느리가 가장 많이 울어요. 안그러면 딸이 돌봤으면 딸이 울고.
왜그러냐 하면은 자기 일의 스케쥴 아버지가 이렇게 자기 스케쥴의 대부분이 뭘 의식하느냐 하면은 아버지가 시아버지가 아프다는 그것에 완전히 이렇게 젖어 들었거든요. 무슨일을 해도 친구 만나도 ‘빨리 집에 가야되.’ ‘왜?’ ‘우리 시아버지가 아파.’
모든 자기 인생의 스케쥴이 시아버지 아픈걸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그렇게 돌봤는데 떠나버리면 그렇게 나를 원망하고 나한테 행악질하고 똑바로 나를 돌보라고 그렇게 막 그릇 던지고 니가 며느리 값을 해! 욕은 욕대로 얻어 먹었는데 그 정이 굉장히 커요.
욕해주는 정이 굉장히 커요. 욕해주는 정이. 그러니까 씁쓸해서 우는 거예요.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 놓고 어른 혼자 가버리면 당신 때문에 나 정신병 걸리고 우울증 걸린걸 돌아가신 시아버지 당신이 책임 지겠어요!! 항의조로 하면서도 굉장히 많이 울어요. 그분의 인생이 자기를 많이 잠식했어. 많이 잠식한거예요.
지,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진도를 나가 봅시다. 좀 더 진도를 나가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제 이걸 감당할수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모든 개인은 그 사람을 둘러싼 타인에 의해서 결정난 타인의 존재다. 타인에게 종속된 존재다 라고 할수 있죠.
그러면 한 인간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오고 가고 가고 오고 오고 간 이것을 본인이 결정할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이 결정 못해요. 예를 들면 애가 한 12살이다. 12살인데 옛날에 저 어렸을적 12살쯤 됐을 때 이 집안에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버지 같이 대 가족 살았는데 할아버지 쪽에서 경상도 말로 뭐라 하냐 하면 기추라 하는 거예요. 기추. 기추란 말 들어봤어요?
경상도 말 쓰는 사람은 이것은 표준말이라 딱 오는데, 동호회. 또는 좀 약간 표준말 가까운게 뭐냐 계원. 지금 나 혼자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나? 기추 못 들어 봤지요? 계원. 옛날에는 상부상조하는 그런 상조회가 있었어요. 동네끼리. 그걸 기추라 합니다. 이 상부상조 하는데 틈만나면 모여가지고 술 먹는 핑계대고 나이 많으니까 60 다 넘었으니까. 이 분들이 집에 온다 말이죠.
집에 오게 되면 한번 보세요. 12살 먹은 애가 집에 손님들 오거든요. 오면 거나하게 차려요. 끝나고 난뒤 남아 있는걸 누가 먼저 다 차지하느냐 지금 저 갈치 남은 걸 누가 먹느냐 지금 가족들 딱 있어요. 지금 삼촌들하고 조카들 경쟁자가 되어 가지고. 삼촌이 손 떼라~ 조카가 옴메 기죽어 이래 가지고 하거든요.
그런데 12살먹은 아이에게 그런 할아버지와 그런 친구들이 온다는 것은 이미 본인이 결정한게 아니 잖아요. 아니죠? 그러면 이 분들이 왔을 때 이 분들이 뭐냐? 이게 나에게 타인의 그룹을 타인그룹을 형성하는 겁니다.
나의 인생관 나의 정신관에는 이미 나보다 같이 인생을 살면서 선점한 성인들이 모두 활동과 움직임과 그들의 대화, 욕설, 문장 그리고 언어 이 모든 것이 쏙쏙 내안에 차곡차곡 다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조건을 내가 결정했습니까?
이걸 가지고 던져진 존재라고 하지요. 사르트르가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던져진 존재라 했거든요. 던져진 존재.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모르는게 있어요. 사르트르는 말하기를 이미 형성된 환경속에 우리가 던져져서 그 자아가 일방적으로 외부영향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확증된다 이렇게만 이야기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예요.
왜 잘못된 생각이냐 하면은 사람이 물론 어린아이니까 자기 인생을 결정 못해요. 하지만 던져진 존재로 인하여 내가 그들에게 이런게 참 이 말이 어려워요. 그들이 일방적으로 100% 영향을 주는게 아니고 그들이 일단 영향을 주게 되면 나한테 무엇이 있어요.
이게 오늘 강의, 무엇이 있어서 받아들일건 받아 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해서 그 손님이 나한테 왔을때는 나도 한바탕 그럴 일 없지만은 눈싸움 해가지고 쟤는 어린아이지만 말싸움 못하겠다 하고 이쪽에 변화를 유발 시킵니다. 변화를.
이 요소를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자꾸 빼먹어요. 우리 만났잖아요. 만나면 일방적으로 응응하고 다 받는 척들을 하고 받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 말할때는 내가 오히려 눈 앞에 나타났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영향력을 가미하게 되요.
영향력 가미해서 이쪽에 변화가 유발한 그것을 내가 도로 가지는 복잡하지요. 내가 도로 가지게 되요. ‘저 사람은 나한테 말 잘못해가지고 욕 얻어 먹더니 이제는 내 앞에서 풀 죽었네.’ 이러면 결국은 그 변화된 타인 변화된 타인이 주인공일까요? 내가 주인공 일까요?
둘 중에 누가 주인공 일까요?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 보면 누가 주인공 입니까? 자아라 하는 것은 뭐의 흔적이다? 타인의 흔적이니까 타인이 100% 주인공인것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100%는 아니다 이말이죠. 제말은. 100%는 아니고 서로 영향을 준다 이 말입니다.
정답은 둘중에 내가 주인공입니까? 저 사람이 주인공 이겠습니까? 라고 묻는데, 객관식 했는데 객관식이 잘못된 객관식이예요. 왜냐면 정답은 따로 있어요.
뭐가 정답이냐 하면은 행동이 주인공입니다. 행동. 그리고 행동에다가 뭘 붙이느냐? 뒤에다가 행동하는 자를 붙이면 이게 오류입니다. 이게 오류예요.
수련회 갔다 왔으니까 이 정도 어려운건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다 들었으니까. 사람이 제가 실험해 볼께요. 그냥 물 마시잖아요. 물 마실 때 이것은 물 마시는 행동이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 물 어디갔지? 누가 마셨지?’ ‘내가 마셨어.’
물 마시는 행동하는 나를 행동에다가 집어 넣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오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게 죄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다가 나를 내가 했다고 그냥 편하게 갖다 붙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동이 나오게 해서 그 행동하는 주체자로 주인공으로 본인을 거론하는 이 잘못된 결합을 주님께서는 유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행동을 예수님이 행동을 유발하고 있었던 겁니다. 계속해서 유발하고.
예를 들면 이 말이 왜 근거가 있느냐 하면은 본디오빌라도가 왔을 때 본디오빌라도는 지금 방금 이 오류대로 해요. 예수님한테 뭐라하냐 하면은 당신은 나한테 잡혀있다. 나는 당신을 잡아 가두었다. 자, 내 말만 들으면 당신은 난 당신을 풀어줄수도 있고 계속 붙잡아 둘수도 있다.
자, 뭐가 잘못이예요? 남들 보기에 다 맞는 말이죠. 본디오빌라도가 재판장이니까. 이 사람 풀라고 하면 풀고, 죽이라 하면 죽일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뭐라고 했지요?
자, 붙잡아 둔다는 행동 행동에다가 누구를 갖다 붙였어요? 내가 붙잡아 둔다고 붙였지요? 그 다음에 풀어준다. 행동이죠? 누가 갖다 붙였습니까? 내가 알아서 풀어주면 풀어준다 했지요.
자, 이 이야기 할 때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다고요. 진리가 무엇이냐? 오류 아닌게 무엇이냐? 오류와 상관없는게 무엇이냐 물었잖아요. 빌라도가 예수님 만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 했어요. 예수님께서 아무 소리 안했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냐 하면은 니가 하는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버리면 얼마든지 풀수도 있고 더 맬수 도 있거늘 천사 소관이다. 이 행동에다가 붙일걸 붙여야지 엉뚱한 것을 붙였다 이 인간아! 다시 말해서 니가 나를 붙잡아 두지만 내가 갑이고 너는 을이야 이런 뜻이예요. 이게 진리예요. 진리.
많은 그 유투브에 동영상 보면 목사님들 강의 하는거 많이 나와요. 그런거 어떤때는 어떻게 강의 하는가 싶어서 기대는 안합니다만은 혹시나 싶어서 들어봐요. 들어보게되면 뭐가 나오느냐하면 지식이 나와요. 지식이.
그러면 교인들 지식 받아 적기 바빠요. 자, 지식을 주는 곳에 갔다. 지금까지 강의 한 것 그대로 적용해보면 나는 어떤 모임에 갔다. 모임에 갔을 때 나라는 인간은 외부에서 뭔가 와야 나를 채운다. 이런 사고방식이 죄라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다들. 어떤 정보가 있으면 그 정보를 얻는 이유가 생활에 편리하기 위해서. 왜 편리하냐 하면 편리해야 행복하니까 편하니까. 편리하면 편하고 편한 것은 행복이고. 어순이 빨갛다 빨간것은 사과 나오지요. 그것하고 마찬가지예요.
편리한 것은 행복이고 그 다음에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는게 아니고 나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잖아요. 나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타인이라니까요. 예수님은 타인이거든요. 예수 아니라도 내게 필요한 타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사르트르가 오류가 있다 이 말입니다. 나는 던져진 존재다. 일방적으로 어릴 때부터 키웠으니까 그런데 제가 아까 뭐가 부족하다 했지요? 그 외부의 환경을 예예하고 삭삭 비는게 아니예요. 자아가 형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쪽의 평가를 내가 이용한다니까요.
그 이용할 때 제가 무슨 표현을 했냐 하면 이걸 했다고. 퀘스천 마크로 했어요. 인간의 자아성에 무슨 괴물이 있기에 분명히 어릴 때 부터 부모가 다 키웠는데 좀 크면은 그 다음에 부모를 순응하는 척을 하면서 용돈주니까 척을 하면서 나중에 실제는 뭡니까? 부모를 이용하겠다는 그 심보. 누구야 너!
그 심보 어디서 나온 심보예요? 철학자들이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 심보가. 어디서 저 더러운 심보가 어디서 나왔느냐 말입니다. 형제간에 부모가 분명히 이야기 했을 거예요. 형제간에는 친하게 지낸다. 그 부모가 아담과 하와라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자식은 누구겠어요? 가인과 아벨이죠.
얘~ 너희들 싸워 이러진 않았을거 아닙니까. 친하게 지내라 할거란 이말이죠. 그럼 친하게 지내라 싹싹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르트르에 이론에 의하면 늘 친하게 지내야 되요. 왜? 내가 내 속에 외부의 것이 그냥 들어왔으니까 친하게 지내자 친하게 지내자 했는데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너 뭐야? 가인아 니 속에 뭐야? 니 속에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을 시기나서 죽이게 한 니가 그 괴물이 가인이냐? 아니면 그 껍데기에 불과한 니가 가인이야? 어느쪽이 너야? 묻는다면 가인이 뭐라고 하겠어요?
나도 몰라요. 내가 왜 그런짓을 했는지 나는 동생 안 미워했는데 욱하는 성질에 죽이고 싶었습니다. 내 속에 괴물이 누군지 나도 몰라요 하잖아요. 그게 나온다고 그게 성경에.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죄라고 해요. 죄. 그걸 죄라고 하는데 죄가 신약에 오면 인격이 됩니다. 사단이 되요.
그래서 제가 설교하면서 인간은 강의하면서 인간은 사단의 대리자라고 했습니다. 대리자. 왜 사단을 구태여 언급해야 되느냐 하면은 사단을 언급하지 아니하면 예수그리스도가 가짜 예수그리스도가 통용되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 예수그리스도는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은 사단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하고 상대하는 분이 예수인줄 알고 있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이 오시면 나를 천국 보내주기 때문에 주님한테 아부를 해야될게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여러분 교회 목사님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단아 오너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까? 예? 여러분들이 기도해야되고, 헌금해야되고, 선교해야되고 이렇게 하지요?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이야기 하지요?
그러면 이 말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지금 목사는 지금 누구하고 맺어주는 거예요? 나하고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맺어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성경에 맞느냐 말이죠? 그게. 성경에 맞던가요?
오늘 강의한 그 원리를 다시한번 응용해 봅시다.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지금 기존 교회 목사들이 뭐냐하면은 인간들 있고 외부에 예수님이 계시다. 인간들은 예수님한테 주는 대로 받아서 구원받으면 된다 이 논리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뭘 시켰다? 우리에게 행동, 행위가 일어나게 했다 이 말이죠. 모든 사항이. 그러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