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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68강-신 31장 24–29절(언약궤와 율법)180114-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신명기

168강-신 31장 24–29절(언약궤와 율법)1801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1장 24 – 29절입니다. 구약성경 312페이지입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모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사람에게 명령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유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천지를 증거로 삼으리라,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걸 말릴 생각 안하시고, 그걸 고칠 생각도 안하시고 그냥 망하도록 방치를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동행하는 언약궤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멸망에 관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담은 책을 율법 책이라고 하시고 그 율법책과 나란히 언약궤를 옆에 두게 함으로써 뭐가 되게 하느냐 하면 26절에 보니까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증거가 되게 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너희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것을 그 옳다는 사실을 뽑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목표요 목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 인간이라는 것이 같이 더불어 좋으면 좋은데 그게 아니고, 너는 하나님의 영광에 끼어들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짓 하고도 영광 받으려고 한다는 자체가 네가 착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착각인지 아닌지는 내가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면서 너희들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너희는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할 것이고 그 위반한 자를 버리지 아니하고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은 “기껏 너희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앞으로의 모든 천지 변동에 대해서는 본문 28절에 나옵니다.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유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천지를 증거로 삼으리라” 모든 천지 변화가 그냥 무작위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증거용으로 천지가 움직여요. 하나님은 옳고 너희 인간들은 틀렸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천지지변이 이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아까 기도 하시는 분이 우리가 덤으로 산다는 참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는데 덤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덤으로 사는 것은 지금 사는 것 있고 추가해서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밥하나 추가요.”하듯이 지금 있고 추가해서 거기에다 덤으로 주는 게 아니고, 오늘 본문에 이야기 하게 되면 모든 우리가 앞으로 살 것은 우리의 과거로 바꿔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죄악된 것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생을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끌고 가면 지나보면 싹 사라질 과거사에 포함되는 미래가 되는 겁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덤이 기존의 것 보다 괜찮은 삶이 아니라 덤으로 줘봐야, 15년 더 살아봐야, 그것은 내가 죄인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덧붙여진 그러한 세월이 이 세상 살면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15년 더 살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우리는 내일 되면 또 하루치를 덤으로 얻어요. 그것은 우리가 이정도로 못돼 처먹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루를 또 주고 또 주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보면 전부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잊어도 되는 과거들입니다.

남은 죄를 죄 되게 경험하라고 준거기 때문에 그 죄는 나를 지옥 보내려는 죄가 아니고 증거 하기 위해서 죄 많은 너희들까지 구원하는 이 작업이 참으로 옳고 하나님의 의가됨을,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못돼 처먹은 인간들을 더욱 더 못돼 지라고 추가적으로 하루하루 세월을 보내게 합니다.

가야 되는데 또 늦춰지고 또 멀리 가야 되는데 또 못 가게 만들고 그것은 헤어져야 되는데 헤어지지 못하고 그런 경우가 많아요. 사사기에 보면 레위인이 가려고 하는데 장인이 자꾸 붙들어서 못가고 붙들어서 못가고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꼭 누구 집 같이 그러는데.

앞으로 산다는 것은 희망을 주는 게 아니고 이제는 희망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희망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희망이 있다면 우리 말고 동행하는 언약궤가 하나님의 희망이 되지요. 그렇다면 이 언약궤와 율법책을 같이 붙여주는 이유가 뭐냐.

어떤 사람은 율법 알고 언약궤하고, 언약궤 알고 율법 하는데, 이걸 같이 봐야 돼요. 헤밍웨이가 지은 소설이 ‘노인과 바다’거든요. ‘노인과 바다’ 책을 읽어 보지도 않은 인간이 “노인부터 먼저 읽고 2편 바다 읽을 게요.”하는 게 말이 안 되거든요. 말이 안 되잖아요.

제목 자체가 언약궤가 아니고 언약궤 더하기 율법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는 죄와 더불어 의가 되요. “우리는 옳지 않았고 주님만 옳았습니다.”를 같이 봐야한단 말이죠.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의가 있지 죄가 없는 곳에는 죄 안 지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고 하나님의 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어요.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우리는 감사해야 해요. 진짜 죄 짓고 감사해야한다 이 말입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왜 죄 짓고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그 죄는 사람이 뭔가 행동하게 되면 자기 정당화하기 바빠 가지고 그걸 극구 죄 아니라고 우기게 됩니다. 근데 뭐 행동해 놓고 죄라고 느끼는 것은 뭔가 덮어 주는 게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덮어 주는 것을 바라보니까, 덮어 줄 만한 대상인 것을 오늘도 체험케 하는 여기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든지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닌 이유가 창세기 28장 17절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16절, 17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무슨 체험을 했느냐 하면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면서 언약을 실행하기 위한 전담반이, 천사지요,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이 열리고 그 천사들이 자기를 향하여 작업하려고 작업 인부들이 자기에게 쏠리는 거예요. 쏠리니까 야곱이 하는 말이 ‘아,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나님의 문이로다’ 장소 이름은 ‘벧엘’, 문이라고 했거든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다른 곳은 문이 없다는 말이에요. 다른 곳에는 문이 없다는 말에서 더 나아가서 내가 꿈꾸기 전에는 이 세상에 아예 문이 없는 거였습니다. 문이 없어요. 이런 것을 한번 상상해 보면 됩니다.

교도소에서 사형수들끼리 모여가지고 노래자랑을 벌이는 겁니다. 그리고 상품들을 줘요. 그리고 거기 노래자랑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내일 전부 다 형장으로 끌려갑니다. 내일 죽을 인간이 모여서 노래자랑 해가지고 상품 탔다고 좋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심지어 그 상품 가운데 10년 뒤에 타는 적금통장 이런 거 있다면 내일 죽는 사람에게는 의미 없잖아요.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감옥이에요. 그리고 사형수들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사형수들이에요. 사형수들인데 저희들끼리 모여서 노래자랑하고 있다 이 말이죠.

손흥민이 한골 넣었습니다.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형수가 넣은 골입니다. 손흥민 이라는 사형수가 넣은 거예요. 문재인은 사형수가 대통령 된 겁니다. 이게 우리끼리 노니까 그게 굉장히 우리 사는 보람이고 희망사항으로 되지만 하늘에서 언약 안에서 보게 되면 문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하늘의 문이라는 것은 무서운 의미에요. 어떤 무서운 의미냐 하면 문이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요청한 적도 없고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리고 인간들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하늘의 문은 없습니다. 없다는 말은 그 문이 열릴 때만 갈 수 있어요.

실제로 문이 있다 할지라도 문이 인간 쪽에서 백날 두드려 봐야 안 열리는 문이에요. 우리 외손녀는 내가 아무리 바빠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려요. 그러면 내가 안 열어 줄 수가 없어요. 이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문을 열어 줘야 돼요. “누구십니까?”하고 물어요. 뻔히 알면서도. 외손녀가 말을 못하니까 그냥 두드리기만 해요.

이처럼 문이라는 것이 인간 쪽에서 두드리면 열게 되어 있는데 세상에서는 두드릴 문도 없고 그런 문이 있다 할지라도 두드린다고 열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뭐냐? 벧엘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겁니다. 그 언약의 성격을 이렇게 확정 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 언약이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구체적으로 그런 취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박스로, 물체 형식으로 만들어져요. 언약궤가. 사람들이 추상적인 것은 모호하잖아요. 그런데 그 추상적인 것을 보이는 물체로 이렇게 담아 놓게 되면 그 물체가 이동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파악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한테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빼앗기면서 언약궤가 혼자서 온 동네를 다 돌아 다녀요. 그러고 난 뒤에 그 언약궤가 너무 저주를 유발하니까 무서운 물건이라 해서 그 블레셋 나라에서 언약궤를 이스라엘 쪽으로 내 보냅니다. 그러면 그걸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 언약궤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차 같은 스스로 움직여서 스스로 모든 계획과 언약을 본인의 열심과 본인이 만든 상황 속에서 다 성취하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수있지요.

언약궤하면 사람들이 잊지 못할 그 유명한 설교들을 이용하잖아요. 소 두 마리. 울면서 갔듯이 장로 임직식 할 때 돈 내는 소로서 잘 바쳐서 돈이나 많이 내라고, 장로 임직식 할 때 흔히 좌나 우로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간 것처럼 당회를 똑바로 인도하라고 그런 말하잖아요.

그처럼 언약궤는 스스로 움직이잖아요. 언약궤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말은 우리는 항상 매일 매일이 언약궤 이끄는 데로 따라가야 할 수동적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수동적 입장인데 그 수동적 입장의 취지가 뭐냐 하면 출애굽기 33장 22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 드리면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 만날 때 하나님께서 덮어 줌으로써 모세는 하나님 만나도 자기의 목숨이 성하게, 멀쩡하게 된 거예요.

그 덮어 주는 것이 출애굽기 25장 21절에 언약궤 만들 때 그게 필요 요건이 되는 겁니다. 천사가, 천사의 두 그룹 조각품이 언약궤를 덮음으로써 어떤 인간도 언약궤에 대해서 손댈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인을 남겨요.

언약궤를 인간이 만들어요. 인간이 만든 게 맞아요. 그리고 안치 하는 것도 인간이 합니다. 하지만 언약궤를 활용하거나 그것을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영역은 인간은 손 못 댑니다. 인간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되요. 그 지시를 가지고 두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은 언약궤에 모든 것이 응축되고, 응집이 되어 있고 율법은 언약궤로부터 전부 다 파생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노인과 바다’입니다. 같은 작품이에요. “언약궤를 알고 싶으냐? 그러면 율법부터 밟아 나가 봐라.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언약궤는 그 정도로 저주스럽다.” 하지만 그 저주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도 그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율법의 취지를 알고 되면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저주를 비로소 저주라고 알고 있는 동시에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두 저주와 축복이 같이 있는 게 십자가거든요. 십자가 안에서 죄인이 동시에 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이제는 내 인생에 손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손 댈 필요가 없다고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자기에게 형을 내리지마라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 둘이 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남 일수가 없어요. 주님을 사랑한다고요? 주님이 남입니까? 누가 이야기 했더라. “우리가 남이가?” 홍준표가 이야기 했는지... 주님이 남이에요? 근데 우리는 내 위주로 살다 보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가 선택해서 내가 골라가지고 근접한 곳에 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은 어디 있느냐? 배격당하고 있어요. 천대 받아요. 영하 10도 되는데 주님은 저리로 치워버리고 가까운 자리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운데 두고 거기에다 늘 눈 맞추고 지켜보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우리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우리 사랑하는, 만약 자식이라면, 사랑하는 것에서 법이 나와요.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그러니 이 사랑이라는 것이 표면화될 때는 항상 법으로 작용한다는 말이죠. 내가 좋으라고 내가 유리하라고 나온 법이 법이냐~아니면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그 법이냐~. 내가 좋으라는 법은 서로 의사소통하고 정치적인 협상과 타협이 가능하지만 주님에서 나온 법은 협상과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죽일라고.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27절에 보면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너를 안다는 거예요.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율법 주신 것은 율법을 한번 따라가 봐라, 율법이라는 밧줄을 한 번 따라가 보세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

거기에는 덮어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덮어주는 사랑은 1월 10일 날 대제사장이 소의 피를 가지고 거기에다 뿌려 버려요. 그 뿌리는 순간 성전 밖에 있는 10km안에 진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죄가 일 년치 전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가 되어 버려요.

보통 속죄제는요 자기의 죄를 참회를 하는 경우에만 재물이 개입되어서 용서를 받는데 그 날만큼은 알든 모르든 참회를 하든지 안하든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는 시혜입니다. 대통령이 주는 사면 같은 거죠. 그냥 베풀어 버리는 거예요. 율법과 관련해서. 그러니까 1월 10일 날 그걸 대속죄일이라 하는데, 그 대속죄일은 유일하게 대제사장과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그 언약궤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의 그림자냐 하면, 무엇의 모형이냐 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지정한 유일하게 인정한 대제사장이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는 무슨 조치? 대사면 조치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졌다는 거예요.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떨어졌을 때 그냥 가면 안 되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그 대목을 만나요.

거슬러 올라가면서 뭐가 파괴되느냐 하면 바로 내가 완전하게 죄인으로 굳어집니다. 이 굳어질 때 딱 적합한 노래가 있어요. ‘Let it go' 겨울왕국 노래인 'Let it go~Let it go~' 겨울왕국에 보면 엘사라는 공주가 나오거든요. 그 공주의 특징은 만지만 전부다 얼음이 되요.

만지면 얼음이 된다는 말은 독자적인 행동은 이제는 무의미하게 된 거예요. 물론 본인은 축구하고 탁구하고 어디 놀러가고 하겠지만 만지는 순간 하나님 보시기엔 얼음땡이에요. 전부다 STOP이 되는 겁니다. 율법 안에 갇히면 모든 인간은 저주가 돼요. 그 갇히는 게 복이에요. 그 갇히도록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신 겁니다.

갇혔다하면 이건 언약궤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 갇힘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해야 되죠. 이 말은 율법을 지키면 십자가 만난다는 뜻이 아니고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율법이어야 그게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 되는 겁니다. 옛날 초대 교회 때 어떤 교파가 있는데 그 교파는 이 구약성경을 오해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한 구약시대에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는 그딴 것은 갖다 버리라는 거예요. 구약을 율법시대로 보고 또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고,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봐가지고 “너 편한 데로 골라잡아라” 이런 뜻으로 한 거예요. 그게 ‘영지주의’쪽에서 나온 것도 있고 그런 것이 있는데, 그런 유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소위 개혁주의라는 이단에서, 개혁주의도 이단인데, 개혁주의에서 뭐라 하냐면 그것을 무율법주의라고 하면서 자기네들은 율법 있다고 자랑질 하고 있어요. 자기네들 지금 지옥 간다고 자랑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똥파리들입니다.

이게 율법에서 나와 버리면, 구약이 율법책이 아니고 십자가가 떠버리면 이게 연결이 되어서 구약 전체가 복음이 되어 버려요. 복음으로 흡수되어서 복음이 나오는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거 하면 안 돼. 이거 하면 벌 받아.” 이게 아니고 사 복음서를 하든지, 율법서를 하든지 뭘 하든지 ‘아, 그래서 십자가구나.’라고 아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뭐 새삼스럽게 경험을 해야 되느냐, 물론 경험을 하긴 하는데 경험을 할 때 원칙이 있어요. 무슨 원칙이냐 하면 구약 때 망했던 이스라엘이 갔던 코스대로 우리에게 경험케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우리의 행동을 구약이 그대로 다 보여줍니다.

물론 율법 안에서 얼음땡이죠. 엘사죠~Let it go죠~그냥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는 율법대로 하는데, 그렇게 율법이 하는 우상 숭배하는 이유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내가 있는 지금도 이런데 돌아서면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요소가 모든 인간에게는 아담의 보편성으로 주어진 겁니다.

이걸 쉽게 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시건방짐 속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시건방짐의 반대가 뭐냐 하면 후딱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 “나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생깁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후딱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하면 안돼요. 후딱 환자들과 같은 급이라는 동급이라는 것으로 후딱 돌아가야 돼요. 같이 환자 되어야 하는데 환자 안 된 것은, 안 된 것도 하나님의 자비에 속하지 내가 훌륭하게 살아서 몸이 건강한 게 아니에요.

지금 아픈 사람 앞에서 이러는 게 미안하지만. ‘너는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보자. 너도 아프면 그런 소리 나오나 보자’ 벼르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아프면 ‘주여,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하겠죠. 하지만 아프면 아픈 데로 의미가 있는 게 뭐냐 하면 신약에 누가복음 15장에 양이 100마리 있잖아요.

목자가 100마리 양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냥 데리고 가면 되는데 주께서 목자가 뭐라 하냐면 양이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잃어버린 다음에는 99마리는 있으나 없으나 그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다시 합쳐도 100마리 양이 아닙니다. 한 마리 양이 주도적 역할을 해요. 잃어버렸다가 얻은 게 그게 언약궤를 증거 한다는 거예요.

언약궤는 죄 속에서 뭐가 달라지는가를 증거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언약궤가 땅에 내려올 필요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언약궤를 통해서 땅에 내려왔다는 것은 “하나님 계십니다.”를 증거 하는 게 아니에요. “훌륭하십니다. 전능하십니다.”를 증거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들이 뱉는 아부는 질색하세요. “나는 망가졌습니다.”를 증거 하라고 언약궤가 내려 온 겁니다.

신앙생활이 굉장히 편해요. 어떻게 보면. 내가 복을 안 받아야 될 이유를 찾으면 돼요. 잡채를 먹으면서 잡채 자체가 나한테 온 이유를 생각하면서 먹으면 돼요. 그럴 경우에만 시건방짐이 없어져요. 그리고 남한테 칭찬 받는 사람 이거 좋지 않습니다. 이거 좋은 사람 아니에요. 남한테 악한 소리 듣는 사람 그 사람 악한 사람 맞아요.

진짜는 뭐냐 하면 좋은 소리도 듣고 악한 소리도 듣고 그 경계선이 분명해 진 사람이 진짜 뭔가가 확신이 있고 제대로 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에요. 왜? 뚜렷한 기준점이 있기 때문에, 언약궤라는 중심점이 있기에 욕할 사람은 욕 하란 말이죠. 그런 사람이 좀 많아서 문제지만. 그러나 귀하게 여기면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되고.

뚜렷한 것이 있어야 돼요. 쉽게 이야기해서 이걸 세자로 하면 ‘싸움닭’이에요. 싸움닭. 평생을 싸움닭으로 사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데 복음적이 아니라서 문제인데. 평생을 그 싸움닭이 복음 알아도 다른 급으로 클래스가 다른 싸움닭으로 변해요. 중심이 “나 하늘의 문이다”라고 우기는데 어쩔 겁니까? 언약이 함께 있으니까, 덮어줌이 함께 있으니까 “그래, 지적질 해라. 그러나 덮어줌만 나는 증거 하겠다.” 이렇게 편합니다. 죄인 되어야 돼요. 제가 더 이상 뭐를 말 하리요. 우리 죄인 되라는데.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엉뚱한 생각했습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남한테 이겨보려고 참 부질없는 짓 했는데 언약궤도 아닌 주제에 죽어야 할 죄인 주제에 중심 노릇했습니다. 이제는 언약궤의 중심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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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