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강-YouTube강의(희생과 이타주의)180102-이 근호 목사
216강-YouTube강의(희생과 이타주의)180102-이 근호 목사 제 216강, 제목은 ‘희생과 이타주의’입니다. 보통 사회에서 희생이라고 하면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 그걸 희생이라고 하죠. 남을 위해서. 근데 성경에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그 위치에 있지 않아요. 그것은 주님의 희생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이 희생한 것을 마치 자기가 선심이나 쓰는 양, 또 자기가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 이거는 우리한테 주제 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타주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없어요. 성경에서 인간의 능력가지고 다른 인간에게 능력을 전달하거나 그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면 필히 인간의 영광이 돼요. 사람이 행동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기억하게 되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행동한 본인에 대한 가치를 따로 추리려고 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생과 이타주의를 분명히 구분하고, 성경에서 이타주의는 없음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느냐 하면, 주를 위해서 라고 할 때, 주를 위해서 살면서 성경을 보게 되거든요. 성경에 보게 되면 사도행전 2장에서 서로 도와주고 뭐 음식도 나눠주고 떡을 떼고, 라는 그런 대목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로마서나 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서로 돌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평소에 주님의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평소에 친한 사람끼리, 마음 맞는 사람끼리 서로 돌봐주는 것이 있잖아요.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가족끼리, 가족에 대한 애착은 인간으로서는 타고난 것이고.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한 가족끼리의 정이라든지 가족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남들한테 베푼다고 실습을 하게 되죠. 이타주의, 나는 손해보고 남을 도와준다. 근데 문제는 그 이타주의가 한계에 봉착돼요. 한계에. 근데 자기는 성령 받아서 한다고 하지만, 자기 딴에는 그게 영적 일인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인간에게 영적 일이라는 것은, 본인이 살아있는 한 영적 일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부다 육적인 겁니다. 영적 일이라는 게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이 유발되면서 비로소 영적인 것이 거기서 나오죠. 방울토마토 같은 것이 동글동글하고 작잖아요. 입에 들어가면 어떻게 돼요? 씹으면 팍 터지죠. 우리의 육이 자기 뜻대로 안 되고 팍 터질 때, 비로소 이타주의에서 희생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이타주의는 남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내 것 가지고, 내가 가진 힘 가지고 그쪽에 기꺼이 내놓고 도와주는 거예요.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가치를 포기하고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 그런 게 보통 이타주의입니다. 이타주의의 반대말은 이기주의거든요. 이기주의가 아니고 이타주의로 나가는 거예요. 이기주의도 아니고 이타주의도 아니고 어정쩡한 중간지역이 생긴다는 것은, 그거는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모든 것은 나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그런데 나 중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까지 배려한다? 남을 생각한다? 그것은 역시 자기 생각의 확장이고 확대된 겁니다. 이기주의의 다른 형태가 이타주의에요. 제가 설명을 하는 것보다도 직접 성경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마태복음 5장에 그 유명한 산상설교가 나옵니다. 39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게 이타주의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고발입니까? 상대방에 대한 고발이에요. 40절,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이거, 개기는 겁니다. 나한테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게 그러니까 더 하라고 들이미는 거예요. 상대방이 하라고 하는 그 지시가 영적이 아니고 육적인 거라는 것을 폭로하는 도구로, 수단으로써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희생은 뭐냐, 희생은 근본적으로 자기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께서 저 사람에게 저런 일을 발생시켰느냐를, 주님께서 발생시켰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돼요. 주님께서 저런 일을 발생시킨 것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이타주의라는 이름의 이기주의로 살아가는지, 내 죄를 폭로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발생시킨 겁니다. 그 한 가지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나오죠. 여기에 유명한 부자청년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부자청년은 자기 힘으로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자기 한계가 어디인지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한계를 주님 쪽에서 제시해버립니다. 21절, “내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죠. 그러면 부자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줘야 될 그 가난한 자, 자, 여기서 모든 재산을 팔아서 주면 구원받습니까? 그 사람은 이타주의를 행사한 거예요.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주게 되면 이기주의라는 이름의 이타주의를 행사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뭐냐, 나를 좇아야 돼요. 예수님을 좇아가야 돼요. 예수님을 좇아가게 되면 내가 행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게 이타주의든 희생이든 주님 앞에서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점차 깊이,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내 죄를 들추어냄이에요.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근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주의 뜻을 행한다고 일을 누가 만들어요? 내가 만들어요. ‘저 사람을 도와줄까? 말까? 어려운데 내가 희생해? 말아?’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모든 작업의 예상을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행한 이 행동에 대한 실적과 성과를 은근히 찾아보게 됩니다. 고대하게 돼요. 기다려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과가 좋으면 자기는 선한 일을 했다고 여기고, 선한 일을 했을 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교만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까싶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의 은혜로,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우회적인 자랑질을 하기 마련이에요. 인간은.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막사는 겁니다. 왜냐하면 막사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막살 때 그걸 본인도 알아요. 그게 죄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도 알아요. 그게 죄라는 것을. 그래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냥 죄짓고 살면 되는 거예요. 살되, 그 가운데서 우리의 죄가 더욱더 깊어진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베푸는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 예를 하나 들게 되면, 회사에서나 어디에서 부정한 일을 요구했을 때, 이것저것 따지면 골치 아파요. “나 그거 못합니다.”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NO!”라고 하면 돼요. 그러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의인입니까? 아니에요. 노라고 한다는 것은 본성상 내가 사는 식하고 맞지 않기 때문에 노라고 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노라고 유발할 수밖에 없는, 자기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태를 주께서 일으킨 거예요. 뒤에서 뭐 부당한 요구였다, 정의에 어긋났다,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노라고 해놓고, ‘참 나는 또 내가 가치 있다고 챙기려고 했구나.’라고 곱씹으면서,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희생 앞에서의 죄인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