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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공백 180102강의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 16장 1절(공백)180102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이제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에 전체 세팅된 세상을 볼 때 세상을 이렇게 세팅해서 보는데 세팅을 한 마디로 이렇게 보면 되요.

악의 보편성이다. 이 한마디만 하면 예수님의 취지를 다 담을 수 있습니다. 악은 개인이 나쁜짓을 했을 때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보편성이 아니예요.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야 나쁜짓이.

그런데 보통 인간들의 의해서는 뭐냐 하면은 착한 일 하면 악이 아니고, 악한 일을 했을 때 개인적인 악으로 국한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나쁜 사람 만나서 나쁜 짓 안하면 자기는 계속 괜찮은 사람 되요. 나쁜 사람 안 만나고 좋은 사람만 만나면 계속 착한 사람 됩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진짜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멀리했습니다.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로 생존하는데 매일 불안 불안하는 사람들. 생존하는데.

욱하는 성질이 좀 많이 일어나는 사람들은 악한 경향이 있어요. 오늘 그 어느 그 통계에 보게 되면 학력에 따라서 욱하는 성질이 대졸 나온 사람들은 거의 없는데 중졸, 고졸, 초졸은 욱하는 성질이 있어 가지고 많은 그런 범죄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만큼 살기가 빡빡하니까 그게 차여 있다가 폭발하는 겁니다.

어쨋든간에 바리새인들은 사람은 악한 사람 따로 있고 선한 사람 따로 있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의 개별성인데, 예수님이 딱 이땅에 왔다가 떠나는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전부 다 악한 사람 되버려요.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악의 보편성이예요. 악의 보편성.

다른 사람이 다녀가면 괜찮은데 예수님이 다녀갔다 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필히 예수님이 일어 난다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은. 그거 뭐 증거사례 따질 필요 없어요.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근거가 뭐냐하면은 내가 가고 난 뒤에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나님을 섬길려면 저 예수의 제자들을 예수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움직일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거예요.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뭘 알수 있느냐 하면은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과 예수님이 보고 있는 이 세상과 세상보는 시대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이 다른 이유가 내가 세상을 볼 때는 항상 전제가 있어요. 나는 선하다가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봐버리면 예수님이 다녀간 순간 어느 인간도 선한자는 한사람도 없었다가 여기에 드러나요. 악의 보편성이니까. 이것을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예수님이 다녀가기 전에는 각자 각자가 보는 나름대로의 착하게 살아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감으로서 전체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악한 보편성이 된다면 그 다음의 질문이 뭐냐? 제자들은 악할까요? 선할까요? 라는 질문이 필히 여기서 나와야 되요. 제자들은 악할까요? 선할까요? 제자들은.

이것은 물어보나마나 답은 딱 나와야되요. 예수님만이 악을 보편성 있다고 주장할수 있는 유일한 권리자예요. 그럼 다른 사람은 뭡니까? 나는 아무리 봐도 그다지 악하지는 않고 선할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에 제자들도 포함이 될까요? 안될까요? 당연히 포함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남은 악하지만 나는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집합, 그것이 합산이 되게되면 그 전체가 예수님을 욕보이는 악한 보편성의 일부로 보탬이 되고 기여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악의 보편성에 기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해당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손해볼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악하기 때문에 죽는것에 대해서 억울할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중요한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제자인데 이것들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나는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나는 안죽어야 되는데 이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악의 보편성이구나. 하나님이여 저들이 나를 죽입니다. 아 나는 억울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라고 편든다고 해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따로 떼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그 해석은 옛날 성령 육적으로 해석하던 해석 그대로 똑같이 되는 겁니다. 모든 성경 해석에서는 나는 착하고 라는 선입관 가지고 들어가잖아요.

모든 성경 해석 성경을 왜 봅니까? 나쁜 짓하기 위해서 봅니까? 성경 보는 이것은 착하다고 우기면서 보잖아요. 이것이 예수님 다녀간 상태에서는 이것조차 악이 된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악이 된다는 말은 스스로 악이라고 파해칠수 있는 그러한 근거가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착하게 보기 때문에 착한데서 악이 나올수 있다는 근거는 본인이 뽑아 낼수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일방적으로 주님의 선언 이여야 되요. 너는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하고 말씀에 순종해도 그게 악하다라고 누가 이야기 해야되요? 예수님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줘야 되요.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갭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갭은 여전이 있는 거예요. 여전이 있어요.

심지어 성령을 받아도 여전히 있는 겁니다. 만약에 해석을 이렇게 하지 않고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과 그들은 한통속이 되어서 주의 일을 한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성경해석은 예수님 중심이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을 빙자해서 누구 중심이냐 하면은 자기가 성령받았다고 우기는 본인의 행동은 의라고 행위가 의라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결국은 어디로 빠집니까? 자기 의를 따로 챙긴게 되요.

‘주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는 그 이야기나 바리새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열심히 충성 했습니다. 노력했습니다.’ 라는 그 사고 방식이나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고 난 뒤에 반드시 누가와야 되느냐? 성령이 와야되요.

이게 15장 26절에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한번 구분해볼께요. 예수님께서 내가 가고 난 뒤에 세상이 너를 죽일것이요. 죽이면서 이것이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대로 된 코스다 라고 생각하면서 너희를 죽일 것이니, 너희는 그 때에 각오해라. 예 각오하겠습니다.

이러면 신앙생활 사도생활 할수 있습니까? ‘각오하겠습니다. 예! 결심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생각한 것과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의 말씀을 해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고 도대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정도로 우리는 내 생각만 몰두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때 누가 와야되요?

성령이 오게되는 거예요 성령이.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된다고요. 그래야 악의 보편성의 우리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우리가 인정을 해야된다 이 말이죠.

‘나는 예수님의 제자니까 저는 빼주세요.’ 라고 하면 안되요. 그러면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어요. 마음 바르게 갖고 개과천선 해가지고 늘 이렇게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주의 말씀에 몰두하고 읽고 또 읽고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그러면 주의 일을 할 수 있어요? 그걸 주의 일을 빙자해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은 바꿔보겠습니다. 만약에 성령이 오셨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 어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성령이 오신 경우라면 우리 일에 대해서 그건 잘못됐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이렇게 해야지라고 성령께서 이렇게 나무래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고쳐 가지고 바르게 행동할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질문이 너무 깁니다만은.

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오시고 난뒤에 ‘아! 이것은 잘못되었구나.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주님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행동 똑바로 고쳐가지고 이제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게 주의 일이 될까요? 안될까요? 주의 일이 안됩니다.

성령이 오게되면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우리한테는 책임과 어떠한 질책, 책임도 우리한테 부담도 주지 않습니다. 이게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신약, 성령 오게되면 법을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 버린다고요. 법을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요. 말씀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버려요.

이거 눈감고 아무데나 사도바울의 편지 아무데다 들춰보겠습니다. 지금 아무데나 임의로 했어요. 고린도후서 나왔습니다. 고린도후서 나왔는데 이 고린도후서 보면 고린도후서에 이런게 있어요. 지나간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새롭도다 뭐 우리 육을 죽이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이 아무데다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후서, 아무데다 펼쳤는데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지킵니까? 영원토록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지킬 생각조차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말씀을 줘놓고 명령은 온갖 명령을 다 해요. 무시로 기도하라. 때를 얻던지 복음을 전파하라. 니가 영에 살고 육을 죽이고 뭐 온갖 명령은 다 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성령의 몫입니다. 그게 성령이예요. 그게 성령입니다.

물론 성령은 나무라지요. 나무랜다는 것은 뭐든지 우리 인간세상에서 나무란다는 것은 ‘나 나무랬지? 한번 두고볼 거야. 앞으로 잘하는지 볼 거야.’ 이 지켜보는 것이 나무라잖아요. 나무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변화가 주어지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나무람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그런데 성령의 나무람은 니가 행동 똑바로해라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뭘 안 쳐다봤다고 나무라냐 하면은 왜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완전히 개무시 하느냐고 나무라는 거예요. 그 나무램이.

하나의 예를 들게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도. 저번에 강의했지만 디모데후서 3장에 읽어볼께요. 사도 바울이 편지한겁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이렇게 쭉 나온다 이 말이죠.

자, 이 말씀 우리에게 줬습니다. 주고 난뒤에 자칭 성령받았다고 우기는 우리들이 딱 보면서 이 말씀을 왜 줬겠어요? ‘그러니까 니가 성도야?’ ‘네, 성도입니다.’

성도라면 자기를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교만하지 말아야 되고 부모를 거역하지 말아야 되고 범사에 감사해야 되고 거룩해야 되고 무정함을 원통함을 풀어야 되고 절제해야 되고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이게 성령 안받은 사람의 특징이예요. 성령 안 받아놓고 받은 척 하는 사람의 특징이 이 특징이예요. 이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는 지금 여기 지적한 대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몰랐던 본 모습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인간이 예수 믿는다고 이제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까? 성경에서 너는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교만하면 되요. 돈을 사랑하면 된다고. 지금 우리가 문제가 뭐냐면 돈을 덜 사랑해서 문제예요.

지독하게 진짜 지독하게 사랑을 못하는데 주께서 지독하게 사랑하도록 인도 해줘요. 교만을 덜 했어요. 지금 교만을 덜 해서 문제라고. 더 교만하게 해 주시는 겁니다. 왜? 뭘 쳐다보라고? 십자가 쳐다보라고.

자, 요한복음 봅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너한테 이야기 한 것을 증거하는거 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의 그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성령이 오게되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요.

그러면 십자가 바라보게 할 때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십자가 바라볼 때 십자가가 좋습니까? ‘나는 돈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가 기적 같겠습니까? 어느것이 기적 같습니까?

돈을 지독하게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철회할 마음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십자가가 왠말이냐? 나와 같은 인간에게는 십자가가 왠 행운이냐 이 말이죠. 그냥 지옥에 내쳐도 아무 지옥에 내쳐도 입이 100개 라도 할 말이 없는 우리에게 저 십자가가 왜 떳느냐 이말입니다.

정월 대보름 달 뜨듯이 떠가지고 너의 죄를 이미 사했노라. 그런 소식이 성령을 통해서 들려준다는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 입니까. 그러니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오직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안받은 사람은 이제는 받은 척을 해가지고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 되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사도의 자기를 사랑 안해야지. 돈을 사랑 안해야지.’

푼돈이나 사랑안하지 목돈 줘봐요. ‘어머나, 예수님 미안합니다.’ 챙겨놓고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게 인간이거든요. 우리는 목돈 만질 기회도 없어서 그런거 모르지만.

그래서 제자들이 증거할때는 전에는 예수님과 한패라는 자기 자신을 증거했는데 예수님 성령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까지는 딱 지고 난 뒤에는 자기가 예수님 십자가로 건너 갈수가 없잖아요. 못 건너 가잖아요. 전부 다 배반하고 등을 돌리고 다 돌아 섰지요. 그 구조를 그대로 유지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이야기를 뭐로 보냐 하면은 해방으로 봐요. 오늘 제목은 일단 후보감으로 해방과 구원이라고 봅시다. 해방과 구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해방은 그 구조에서 벗어남이예요. 그 구조에서. 이 구조에서 벗어남이 해방입니다.

해방이다!! 이러잖아요. 해방이다!! 36년 일제압제에서 해방이다. 그 구조에서 혼자 달랑 슈퍼맨처럼 공중으로 우주 창공으로 착~날라가는 것처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데서 벗어나잖아요. 구원은 뭐냐 하면은 나를 꽉 옭매였던 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지하는게 구원 이예요. 그대로 유지하면서. 죄 속에 있는 구조를 그대로 견지를해, 유지를 해줘요.

왜냐하면은 해방의 목적은 내가 행복한거지만 구원의 목적은 예수님의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를 죄인을 의인되게 했느냐를 예수님의 자기 성과가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못난놈을 계속 견지해줘야 되요. 내 힘으로 탈출이 불가능함을 구원되었기 때문에 계속 견지해줘야 됩니다. 유지를 해줘야 되요.

그 대구 강의에서 그런거 했는데 재래시장에 가면은 베개 껍데기 베게 피라고 합니까? 이불 호청이라고 합니까? 알맹이 있고 솜있고 호청이죠? 호청이라든지 베개피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냥 그대로 있고 바깥을 둘러싸잖아요.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죄인은 죄인대로 그대로 있고 예수님의 의로 이 구원받은 죄인을 호청처럼 둘러 쳐버려요. 그러면 사도는 누구를 자랑하느냐 하면은 나 같은 죄인중에 괴수지만 오직 누구만 자랑한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누구의 은혜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혼자만의 작업이였다. 혼자만의 업적이였고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재료로 삼아서 나를 원료로 삼아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원작용입니다.

그런데 해방은 뭐예요? ‘답답했는데 아이고 속이 다 풀리네.’ 자기자신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고맙다고 여기면서 이용하는 것, 그게 바로 해방신학 또는 해방의식이예요.

사람들은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은 어느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자기가 못난놈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멋있게 구원되는 것을 자랑하겠어요? 예? 해방을 자랑하겠죠. 그래서 해방된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나 구원 받았다.’ 이거고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묻는 것.

관심사가 자기 구원밖에 몰라요. 자기 잘되고 싶었는데 잘됬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헌금하고 십일조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쪽은 뭐냐하면은 전에는 나 잘되고 싶어요. 지금도 내가 잘되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잘되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것이 우상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야기 하잖아요. 하나님을 찾느냐? 아버지를 찾느냐?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6장 5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그런 이야기 하죠.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3절에 보니까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그 다음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렇지요.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와 나를 알아라가 관심이예요. 너희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자기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 관심인데,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와 자기의 관계를 알리는게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12제자들이 예수님을 평소에 따라 다닐 때 왜 예수님과 헤어졌지요? 끝까지 예수님 따라 간다고 그렇게 장담해놓고 막상 일이 딱 들어닥치니까 모른다고 배신하고 왜 헤어졌습니까?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 있어요.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제자들이 성령이 오지 않으면 여전히 뭡니까? 여전히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를 모르니까 그 악의 보편성 속에 일부가 본인들이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그들이 모르는 것을 성령이 이야기 하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뭘 몰랐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몰랐잖아요.

그러면 성령 오게되면 뭐를 제공하는 겁니까? 아버지와 아들 때문에 너희는 이 땅에 태어났고 이 세상은 다 이렇게 만들어 졌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딴거 아니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심이 나한테서 관심사가 아버지와 아들에게로 관심사를 돌리는 겁니다.

그런 자리가 무슨 자리냐? 로마서 8장에 보니까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런 자리가 아들의 자리이예요. 그런 자리가 아들의 자리예요.

아들의 자리는 그림을 그리면 쉽게 이해됩니다.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를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이것은 악의 보편성입니다. 어느 인간도 몰라요. 제자들도 왔다가 가버렸어요. 다시 제 갈길로 갔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아들이고 아들의 자리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아들의 자리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자리 있는 줄도 몰라요. 이런 자리를. 현실 속에 이런 현실 있는지 몰라요. 그냥 자기가 사는게 현실의 전부 인줄 압니다.

그런데 아들이 갔을 때 죽었어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아들이 가는 곳에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가 있지 않고 이것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은 ‘누군가 죽었데.’ 이것은 무덤의 자리죠. 무덤으로서 현실의 하나의 삽입되 있는 자리가 아들의 자리예요.

그러면 죽었으니까 이것은 별볼일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부활시키고 성령을 와버리면 그 아들의 자리가 현실에 같이 있으면서 여기서 뭐가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은 성령이 뿜어져 나오죠.

아버지와 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나라고 했다 이말이죠. 하나. 그러면 아들이 성령으로 오게되면 성령과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가 되잖아요. 그 다음에 성령이 도달되게 되면 이들이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은 그들이 죽었다고 여겼던 그 자리에 본인이 들어가게되요.

그러면 아들과 성령과 아버지와 성도가 전부 다 뭐가 되요?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나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따로 놀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말이예요. 따로 놀수 있는 기능이 없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 한 것 계속 해 봅시다.

성도가 돈을 사랑한다. 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기능입니까? 주님의 기능입니까? 답변 나오는데. 간단한데. 주님의 기능이라니까요. 이게 중요한거예요. ‘주여 내가 돈을 사랑하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하면 주님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 멀었다. 돈 사랑 제대로 돈 사랑을 못했구나. 더 살아봐. 80까지 살아봐. 제대로 돈 사랑하는 것을 알 거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에 위반된 자리, 그 죄인의 자리는 죄인의 자리를 계속 내려가면서 어떤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느냐 하면은 옛날에는 말씀을 위반하면 죄 였잖아요. 예수님의 성령 오고 난 뒤에는 십자가와 관계가 끊어지면 죄가 되요. 십자가와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왜냐하면 옛날에는 율법으로 죄냐 의를 규정하는 규정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그것이 철폐되고 말았어요. 이제는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그리고 아들을 믿는 자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던 묻거나 따지지 않고, 생명의 나라의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게 되면 그 질문 조차 바꿔야 되요. 주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겁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되는데, 내가 무엇을 할수 있습니까? 하는 것은 이게 어디에 위반되느냐 하면은 하나라고 있는데 아직도 나를 따로 빼내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질문한 질문이 되는 겁니다.

‘주여! 예수 믿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나를 주님을 위해서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수정되어야 되요. 질문 자체가. 거기에 적당한 예가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하고 뭐 주고 받고 주고 받고 이야기하다 끝 부분이 되니까 신봤다 하는 식으로 나는 메시아를 봤다하고 자기가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갖다 버려두고 동네방네 너무 놀라운 소식을 전했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이 그 여자를 뭐라고 칭찬하느냐 하면은 니 속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마르지 않는 생수가 나오죠? 그러면 그 여자는 어디서 뭘 하던지간에 움직이는 우물이예요. 예수님의 성령이 작용하는 우물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따로 뭘 하느냐는 의미 없어요. 그 여자가 애를 낳던지 또 시집을 가던지 관계 없어요. 계속해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착함이 나오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나오지요.

나는 남자 5명 사귀고 6번째 사귀었다 뭐 이런게 나오는게 아니예요.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고 별 의미 없는 문제예요.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은 옥경이한테나 중요한 문제이지 주님나라 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제가 여러번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식상하다고 하는데 제가 산장의 여인 이야기를 또 해야 겠어요. 산장의 여인. 그 산장의 여인 유명한 노래 아닙니까?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 가사 내용이 뭐냐 하면은 좋아했는데 그만 차여가지고 세상 버리고 조용하게 산장에 와서 가사에 보면 마지막 생애를 산장에서 보내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은 모양이예요. 그 가수가 얼마전에 죽었지만. 중요한 문제 아니고 사소한 문제고.

거기에 보게되면 뭐냐 하면은 사랑을 원했는데 사랑이 안 이루어짐으로서 너무 상처가 깊어서 나는 외로운 산장에 살겠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그런 사고방식은 뭐가 없는 거예요?

주님 아들의 자리가 아니고 아들 바깥의 자리예요. 아들 바깥의 개체의 자리고 개별자의 자리예요. 입자예요 입자. 그냥 하나의 입자로와서 자리다 이말입니다. 그 불렀던 가수가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예요. 그런 불교신자 이야기를 제가 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모든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이거든요. 개체적으로 다 신이다 말입니다. 신이니까 죽어서 천당 갈려고 하니까 뭐 뾰족한 수 없나 보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 하니까 ‘어 잘됐네. 그 피 내가 믿습니다.’ 해가지고 피 믿으면 천당 간다고 우기는 겁니다.

가겠습니까? 못가지요. 천사가 피~ 웃어요. 합류해야 되요. 혼자라서 뭘 믿고 믿는것도 법 아닙니까? 믿는 것도 법 이거든요. 왜냐하면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지키는 주체자가 자기가 되기 때문에 법이되요. 내가 예수 믿으면 그게 법이 된다 말이예요. 이게 믿음이 아니고 법이 되요. 율법이 행함이 된다 이 말이죠.

갈라디아서에 보면 나와요. 항상 성령이 나올 때는 반드시 뭔가 경유를 해요. 뭐냐면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죽이는 그것을 경유를 해서 성령이 나와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같이 나오는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벌려요. 어떻게 일을 벌리냐 하면 우리 주둥이에다가 ‘너는 가만 있어라. 내가 만들어 준대로 인생 살면 되.’ 라고 자꾸 가만 있으라고 발길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던간에 그게 누구 인생이냐 하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날 이걸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한거예요.

내가 실체인줄 알았는데 주님이 실체이고 보이지 않는 분의 실체고 보이는 것은 나 라는 그림자가 생기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성도끼리는 서로 연락을 취하라고 했어요.

그게 성도끼리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끼리. 성도끼리는 자기가 실체가 주님에 의해서 규제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나 자기 자랑같은 것은 내세우면 교제가 안되지요. 성도끼리 교제는 뭐냐하면 ‘주께서 어떻게 하라 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뭐 이런 이야기가 나올거예요. 아마. 강의 끝나고 난 뒤에 쉬는 시간에 집사님께서 주가 하라 하신데로 아마 이야기 하실겁니다. ‘당신이 생각했잖아. 뭐 생각했잖아.’ 개별자로 하면 안되요. 거기에 동의 하라는 말이 아니고 각자 성령 받은데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아주 중대발표가 있습니다.

나의 생애는 없고 주님의 생애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세계가 없고 라고 했을 때에 그러면 나는 여기 있는데 왜 없다 하느냐? 내가 전에 육으로 있을 때 나라고 생각하는 나 가 그게 뭐냐하면 자아라는 겁니다.

다시 매번 수십번해도 또 해 봅시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남을 경유해서 만든다. 남이 갖고 있던 그것이 내가 욕망을 내가 욕심을 내서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계속해서 정보가 유입되어서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부모지요. 부모가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안해도 되고 라고 우리에게 지적을 하게 되요. 지적을 하게 되면 이것을 약간의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게되면 이렇습니다.

인간사이에는 뉴런과 뉴런이 있는데, 뉴런과 뉴런사이는 연결이 안되요. 시냅스라는 것이 있어서 시냅스를 통해서 여기서 전기신호로서 전달되게 되면 뉴런하고 연결되어서 여기서 정보가 나오는데,

이 시냅스는 그냥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시각에 의해서 시냅스가 켜졌다가 꺼졌다 하면서 시냅스가 부풀어지고 커지고 이것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다는 그것을 결정짓는 것이 계속 변화를 일으켜요.

그 어린아이들의 두뇌에다가 ‘이거 지지!! 그것하면 안되. 퉤퉤해!’ 하게 되면 그 부모의 요구에 따라서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자기가 스스로 결정짓는 시냅스와 뉴런사이에 어느것이 구성이 되게 되어 있어요. 과학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는 누가 키워요? 부모가 그 부모 집안에 맞는 문화로 서서히 색깔을 고정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자아라는 거예요. 자아. 이게 나예요. 자연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예요. 자연은 무성이예요. 어떤것도 없어요.

없는데 여기서 인간의 언어가 들어가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 문화가 되요. 문화. 그런데 언어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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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1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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