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12. 22) 46-2
광주 강의(2017. 12. 22) 46-2 주체체계를 이룬다. 주체체계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나는 나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세상을 내 위주로 다 바꾸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다 바꾸고 있어요. 웃는 것, 즐거운 것, 기쁜 것, 전부다 자기 이익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 행복과 자기 불행과. 남들한테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데 본인한테는 그렇게 심각하다는 말은 벌써 주체체계에 자기가 말려든 겁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렸다고 이렇게 하거든요. 왜 참새는 우울증에 안 걸리죠? 왜 들풀은 우울증에 안 걸리죠? 인간이 그만큼 사탄에게 가깝게 밀착되어 있고, 사탄의 부림을 받고 있다. 이래보면 돼요. 아, 그놈의 우울증이라는 단어 세 개 가지고 모든 것이 정당화되어 버렸어요. 마치 안 나쁜 것처럼. 옳은 것처럼. 동성애와 똑같은 거예요. 나쁜데, 그거는 성적취향이 어떻고, DNA가 어떻고, 이래가지고 안 나쁜 것처럼. 무슨 퀴어 축제가 어떻고, 아휴, 정신병자들이. 미쳤다 하면 그냥 미쳤다고 해라. 차라리 그게 낫죠. 뭐가 부모 탓이고, 유전자가 어떻고, 동성애하고 유전자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뭐든지 유전자로 다 돌리면 안 돼요. 이 주체체계가 열 살 때, 스무 살 때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동합니다. 주체이동이에요. 계속 주변을 잡아먹습니다. 점점 커지다가 부도나면 조금 쪼그라들겠죠. 주체체계가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가 그 주변에 따라서 괴물처럼, 암세포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늘어났다 쪼그라들었다가 하는 거예요. 많이 늘어나면 삼성그룹, 쪼그라들면 한강에 뛰어내리기. 파산. 비트코인. 뭐 이런 것. 비트코인 왜 합니까? 비트코인 해놓고 뭐 세상 탓이라고 하고. “부자 되세요~!”라는 그 말에 왜 말려드느냐 하면, 평소에 주체체계의 방향이 부자라는 방향으로 이미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픽셀이라는 게임이 있죠. 다 잡아먹는 것 있잖아요. 인간이 꼭 이래요. 돌아서면 잡아먹고 또 돌아서면 잡아먹고. 띠띠띠띠리릭~♬ 잡아먹으면 50점, 100점. 그냥 놀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해가지고 잡아먹고. 그러다가 또 잡아먹혀가지고 난리가 나고. 이러한 주체가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 이용하고, 하여튼 이용할 것은 다 이용해먹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일이 불러가지고 “니 이래 살면 안 된 데이~ 알았지. 가!” 또 불러가지고 “이래 살면 안 돼! 알았지.” 이렇게는 할 수 없잖아요. 그들 보기에 도대체 예수님은 뭐하시는 분이냐, 라고 대표자로 보이실 어떤 징조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겁니다. 거기에 재수 없이 걸린 게 무화과나무에요. 그냥 하나의 무대 세트장에 서 있을 뿐인데, 스타일~! 해가지고 그냥 서 있을 뿐인데. 열매도 없어요. 열매가 있으려면 아직 몇 개월 남았어요. 근데 “보자~ 열매가 있는가 보자. 어? 열매가 없구나! 니는 영원토록 사람들 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주체로서 무화과나무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근데 이유가 있어요. 앞에 보면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성경에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1장 13절 끝에 되어 있죠. 자, 이거하고 아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열매를 얻고자 했잖아요. 열매를 얻고자 했어요.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체체계 안에서 나온 활동이 되겠죠.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이. 근데 열매를 얻고자 했을 때, 얻게 되면 이 주체는 그만큼 범위가 더 커지겠죠. 더 강화되고 힘이 더 모아지게 된다 이 말이죠. 이 테두리에는 마귀가 딱 있으니까. 근데 없으면 쪼그라들겠죠. 이미 누수가 일어나 주체체계가 쪼그라들겠죠. 예수님께서 때가 안 됐는데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누구를 흉내 내고 있느냐 하면 인간들의 주체적 행태를 지금 흉내 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니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얻고자 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얻고자.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잃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맞고 빼앗기고 그렇게 왔다는 거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어요. 다섯을 잃었을 때, 다섯이나 일곱이나 열이나 여섯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그것이 정작 얻었다는 것을, 얻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아는 순간이에요. 잃어버림으로서 나는 주님 앞에 얻은바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잃었기에 그 빈자리를 마저 채우는 것이 마저 채우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잃어버리면 안 돼!’라는 그 욕심에 가리어진 게 있는데, 그게 뭐냐 이미 우리는 주님의 주체를 위해서 주님 앞에 삼켜져 있는 존재, 이것이 주님 앞에 얻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그동안 내 욕심 때문에 가려졌고 몰랐던 겁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그동안 몰랐던 얻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가 더욱더 증폭되는 겁니다. “주여, 지난번 잃어버린 그것까지 저한테 그냥 주신 거죠. 이제야 감사하다고 말을 하겠습니다.” 이러는 거죠. 감사를 얻는 거예요. 고마움을 얻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주체가 중심이 되어 버리면, 이 주체체계의 중심이 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잃어버리면 누락된 걸로, 결핍된 걸로 간주해버려요. 빵꾸난 걸로. 그래서 기를 쓰고 더 착한일 해가지고 이것을 마저 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성도라면 이것을 마저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잃어버리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주여, 언제든지 이것도 주께서 가져가셔도 그것이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태도가 바꾸어지는 겁니다. 무화과나무가 주께서 원하는 주체체계행태에 부응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잖아요. 근데 제대로 된 무화과나무 같으면요, 주님하고 잘 짝이 맞는 한조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저주받는 역할을 하는 무화과나무. 그리고 열매의 때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없다고 화를 내신 주님의 취지를 그대로 고스란히 잘 보여준 역할에 충실했던 무화과나무. 짝짝짝! 오늘 제목은 짝짝짝! 주님께서 나는 얻으러 온 게 아니고 잃어버리려 왔다고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하고 나하고 한패라고 자랑질 하지 말고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 쓴 잔을. 아무도 마신다고 하는 사람이 없죠.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반드시 너희가 마시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너희의 모든 것은, 너희의 주체체계행태에서 나온 모든 것은 나로 인하여 다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치 내가 잃어버리고 목숨까지 다 잃어버리고 피까지 다 잃어버린 것처럼. 다 잃어버려요. 제가 가락 유튜브 동영상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찾아와주는 기적이 아니고 헤어지는 기적이라고 했어요. 요나하고 뱃사람이 헤어지듯이, 요나하고 세상 사람이 헤어지듯이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헤어질 때, 비로소 그것이 예수님은 누구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는 표적이 돼요. 표시를 하는 기적이 돼요. 예수님이 내가 시킨 대로 오게 되면 우리는 마치 내가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있어요. 근데 주님께서 나와 점점 떨어져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자신이 내 생각을 할 자격조차 없는 그런 존재이면서 주님과 떨어지면서 아는 거예요. 단절의 중요성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림이 없으면 뭐가 없어요? 얻음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내가 알아서 되찾아온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잃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되찾는 몫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잃어버리게 하신 그 분이 잃어버린 채로 되찾아요. 그걸 채워줘서 되찾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채로 되찾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육을 영으로 바꾸는 것은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뭘 죽이냐, 이 주체를 죽이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마는, 잃어버림으로 얻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잃어버림으로.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단독적인 주체체계에 놓여있지 않고 이미 어디에 삼켜버렸어요? 주님의 주체체계를 확장시키는 확장작업에 우리가 이미 삼켜버린바 된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호산나로 돌아와 봅시다. 호산나가 이게 만만치 않아요. 예수님께서 왕이시면서 나귀 탔다고 했죠. 여기 나귀에 의미 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어요. 스가랴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겸손하셔서 나귀를 탔다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볼 사람은 누구만 알아보느냐 하면 예수님만큼 낮아진 사람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를 알겠죠. 아무도 모르죠. 아무도 몰라요. 그만큼 예수님이 나귀를 타심으로서 인간들의 방향은 낮아지려는 방향이 아니고, 인간들을 테두리 지었던 이 사탄이 인간들을 높이고, 높이고, 높이고, 계속 높이는. 높이고~ 높이고~♬ 높이고, 높이고 하는 그 식대로 가는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인간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내려가니까 거기에 그 어떤 접촉점도 형성될 수가 없죠.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자기를 잃어버리려 함이라.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대속물로 줬다는 그 결과를 내 주체의 행태 때문에 그걸 딱 내소유화시키려고, “믿습니다. 예수의 피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얼마나 얄팍한 마귀적 성품이에요. “날 무시하지 마라. 나도 예수 믿는다.”라고. 그게 동일시하는, 동일시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괜찮으면 작업하고 나한테 필요 없으면 내갖다 버리는, 그 작업을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자기를 구축하는 거예요. 악마의 얼굴이 돼가는 겁니다. 인간은 갈수록. 그래서 성도한테는 어떻게 합니까? 인간의 소원을 반대로 하다보니까 하는 일마다 막고 끊죠. 그렇게 끊으면 감사가 나와야 될 텐데, 잃어버렸다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잃어버렸다고. 자기 딸 죽고 난 뒤에 “주체를 불로 만들었다. 잘했다. 잘했어.”라고 이러면 진짜 머리에 해바라기 하나 꽂아야 해요. 진짜 미친 여자기 때문에. 완전 그 짝이죠. 왜 내 딸을 죽게 하느냐, 그게 내 딸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내 딸이 아니었어요. 내가 낳았다. 그래, 니가 낳았다. 육으로서 난 내 딸이지만, 육으로 그렇게 고집을 부려버리면, 그러면 영의 요소가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어느 구석에 지금 처박혀 있는 거예요? 없잖아요. 육을 도와주는 것은 영이 아니에요. 육과 비켜가는 것이 영이지. 왜 자꾸 내가 하는 육의 일을 신이,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그렇게 자꾸 고집을 부리느냐 이 말이죠. 얼마나 고집을 부렸으면 악에 받쳐서 기도를 해요. 그것도 좀 잘 안 되면 목돈 내가면서 기도를 한다고요. 돈 받아먹는 그 인간들만 좋다고 감사하죠. 근본적으로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 시간의 상실, 시간의 마감을 몰라요. 지금 주체행태가 돼버리면 인간은 자기가 살 길을, 지금까지 살았지만 더 살 길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무엇을 자꾸 고대하느냐 하면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내 시간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 계속 길게, 길게 뻗어나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시간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겁니다. 예민해진다니까요. 시간에 대해서. 그래서 제가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개인사, 인생사라고 했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가 이런 꼴 보려고, 내가 죽는 마당에 너희들 내 유산가지고 싸우는 꼴 보려고 내가 90까지 살았나! 너희들 다 나가!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 내 재산 안 내놓았지.” 이렇게 악을 쓰는 그런 집안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 다 필요 없다.” 그럼 뭐가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돈이 최고야! 자식보다 돈이 최고야! 자식은, 물론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내 주체형성에 역겹고, 더럽고, 꼴 보기 싫으면 자식이라도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자식 셋 가운데서 고운자식 따로 있고, 미운자식 따로 있고, 뭐 중간쯤 되는 자식이 따로 있죠. 세 명이나 되니까. 저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골라잡을 것도 없어요. 그렇죠? 내 취향에 맞으면 좋고 내 취향에 안 맞으면 말은 못하지만 밉잖아요. “에잇, 떡이나 먹어라!” “어머님. 고맙습니다.” “미운자식 떡 주는 거야. 쟤는 어떻게 된 게 눈치도 없어. 눈치도.” 호산나라는 것이 뭐냐 하면 시간의 마감상실이에요. 호산나가 되려면 모든 시간은 드디어, 땡땡땡땡~♬ 수업이 끝난 종소리처럼, 모든 게 종이 친 상태로 호산나에요. 이 인간들은 뭣도 모르고 호산나를 외치고 있다고요. 뭣도 모르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뭣도 모르는 그 호산나를 여지없이 자기에게 그냥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래! 호산나다. 그래! 내가 다윗의 자손이다. 그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왔다.”라는 말은 “너희는 이제 죽었어. 너희는 이제 혼났어. 그 찬송 내가 받아 마땅해.” 하지만 너희들의 뜻대로의 그런 메시야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모든 주체행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저주의 안목으로 바라보고 계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감질 할 일은 뭐냐 하면 한 명, 한 명 남기지 않고 전부다 몽땅 다 저주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저주해버리면 인간의 뭐가 죽느냐 하면, 주체니까 주체를 한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나’죠. 주체와 주체로 있을 때 서로에게 뭘 불러주죠? 나와 나끼리 서로 뭐로 부릅니까? 이름 또는 관계를 부르죠. 그 이름과 관계는 주체에서 나왔던 그물망, 자기 주체의 영역을 서로 교환하는 거예요. 이제는 쉽게 하기는 틀렸으니까 제 마음대로 할랍니다. 언약, 다른 말로 계약, 또 다른 말로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교환의 의미에요. 교환의 의미. 상호교환. “이렇게 하면 뭐 해주시렵니까?”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들이에요. “이렇게 하면 뭐 해주시렵니까?” 서로 교환하죠. 동등한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한쪽이 한쪽의 명령을 하달 받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계약, 언약,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주체가 없으면 몰라도 이미 주체가 있는 이상은, “내가 주의 십계명을 지킬 테니까 주님은 이 주체한테 뭘 해주렵니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주체는 자기의 원인이 없어져버리죠. 본인이 본인의 원인이 되고 본인이 본인의 원인이 된 주체의 결과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오늘날 나처럼 된 결과물을 낳았다고 보는 겁니다. 나가 나를 낳은 거예요. 이 말이 좀 이상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렇게 안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기를 의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 나답게 했다는 이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여기에다가 언약, 계약, 약속, 무슨 소리를 해도....., 그렇다면 이것 지킬 테니까 뭘 해주렵니까? 예수님 믿었으니까 천국 넣어주실 거죠? 이게 교환개념 아닙니까? 교환개념. 주고받는 개념. “이만큼 해줬으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거예요. 주님은 그 이름, 너희들의 이름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은 주의 이름에서 나온 거예요. 주의 이름에서. 그러면 인간의 모든 이름은 주의 이름에 종속되는 겁니다. “You belong to me. 당신은 내게 속했다.” 이 말이죠. “당신은 내게 속했어.” 모든 것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있어서 이름인데, 주의 이름이 전체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쥐고 있으니까 주의 이름이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새겨 넣어야 할 거 아닙니까? 새겨 넣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아까 잃어버렸다, 뺏었다,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이겁니다. 핫도그. 핫도그가 뭐냐 하면 나무막대기에 소시지를 끼운 후에 그 겉을 밀가루반죽으로 여러 번 두껍게 입혀서 튀겨낸 것. 또는 안에 막대기가 끼워있는 소시지가 들어있는 길쭉한 빵. 자, 그러면 이 소시지를 주께서 뽑아내면 어떻게 될까요? 소시지를 확 뽑아버리면 이거는 허물만 남죠. 껍질만 남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름은 속에서 자기 주체가 바깥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이 주체를 빼내고 여기다가, 원래 핫도그가 소시지인데 그동안 인간들은 오뎅, 오뎅을 집어넣은 것이 사탄인데, 오뎅을 집어넣어놓고 핫도그로 우기고 있었던 겁니다.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주의 이름이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가장 높은 곳의 계획은 뭐냐 하면 모든 세상만물을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놨는데, 그게 사탄이 자기의 더러운 성질, 사탄의 성질은 뭡니까? “우리를 심판하지 마소서”가 아닙니까? 사탄은 누구로부터 심판받기 싫다는 거예요. 왜? 자기도 신이니까. 바벨탑의 목적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 이름을 어디까지 높이느냐, 하늘까지 닿죠. 그럼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께 당했던 것은 뭐냐 하면 하늘과 공격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랬으니까, 하나님의 이름까지 딱 닿아버리면, 이제는 굳건하게 인간으로 구축되어 있어버리면, 이건 뭐 인간도 신이 되었으니까, 뭐 같이 놀자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자.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어요. 높아질 때까지 높아져보자는 겁니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하듯이 계속 높아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사탄이 계속 높잖아요. 사탄이 어느 정도로 높으냐면 고관대신 급이 아닙니까? 천상회의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오뎅을 꽂아놓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뎅을 빼고 소시지, 예수님 자신을 집어넣는데, 집어넣을 때 어떤 물리적인 표시가 있어요. 물질적이고 실체적인 표시가 뭐냐 하면 ‘피’입니다. 죽음이에요. 피 흘림. 피 흘렸다는 말은 인간이 죽인 게 아니고 누가 죽였다? 뱀의 자손이, 뱀의 후손이 누구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었다. 이렇게 되죠. 근데 그 피가 나오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심판이죠. 그래서 심판한다는 말은, 제대로 심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이름, 속성, 하늘까지 높아지겠다는 그것을 심판하겠다는 이것이 곧 뭐가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호산나가 되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우리를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함으로써 어디까지 몰아붙이시는가, 끝까지 몰아붙여요. 어디까지? 우리를 죽기까지 몰아붙여요. 왜? 주님 자신이 순종할 때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마지막 모습은 어떤가하면, 이제 그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날마다 죽노라”에요. 날마다. 날마다 늘 죽이고 날마다 늘 살리고. 날마다 죽이고 살리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처음에 선풍기에 종이가 빨려 들어갈 때는, 빨려 들어간 3분의 1정도만 파닥파닥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멀쩡하잖아요. 그런데 선풍기 날개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갔다. 선풍기 날개 돌아갈 때마다 종이가 퍼드득퍼드득하죠. 지금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까라하면 까고. 그냥 퍼드득거리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라고 퍼드득거리면서 계속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뭐 이렇게 퍼드득거리면서. 근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마귀가 알아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시킨 대로 사는 거예요. 지금 시킨 대로 안 살아버리면 방금 제가 한 그것이 우리한테 뭐가 되느냐 하면 심각한 고민거리가 돼요. 심각한 고민거리. ‘지금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 지옥 갈지 싶으다.’ 성경은 이렇게 호산나 찬양했던 이 사람들, 정치적인 이슈도 못 살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호산나를 왜 죽입니까? 아무소리도 못하고, 끽도 못쓰고 그 세력에 의해서 별로 도움도 못주었던 이 사람들이에요. 어린아이가 무슨 도움을 줘요. 예수님 재판하는데. 중요한 것은 힘이 중요하지, 환영하는 이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엑소나 방탄소년단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인기 있는데? 외국에서도 인기가 있다는데? 방탄하니까 뭐 탱크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수이야기에요. 샤이니 국무총리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옛날에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아이돌 가수가 대통령이 되고 국무총리가 되는 영화. 그래서 망했어요. 그걸 폭망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사람 같으면 아낌없이 거기다가 표를 던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왔습니까? 역겹다는 그런 모습. 역겹고, 꼴 보기 싫고,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세상 권력에 대해서 매 맞고 있고, 누가 뺨을 치는지 알아맞히라고 해도 못 알아맞히고, 그렇게 도사, 도사하면서도 뺨치는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은 안했지 사실은 알아맞혔지만. 어떻게 하는 일들이 예수님을 안 죽이는 방향으로 그렇게 애를 써도 기어이 죽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요. 빌라도부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남편한테. “당신 누구 재판하지? 그거 내가 힘들어죽겠다. 내가 어젯밤 꿈에 너무 힘들었다. 그러니까 당신 좀 대충해라. 대충해서 살려 보내라.”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또 남편들이 마누라 잔소리는 못 이기잖아요. 자기 나름대로의 수를 쓴 게 뭐냐 하면 그중 제일 흉악범, 풀어주면 또 성폭행하는 나쁜 놈. 바라바를 딱 세워놓고, 이거 극과 극이잖아요. 누굴 풀어주고 누굴 살릴까. 나름대로 수를 쓴 거예요. 살려주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래놓고 끝나고 난 뒤에서 세숫대야 물에 손 씻고. 자기가 이대목동병원장도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슈퍼박테리아가 없어지겠습니까? 죄가 없어지겠어요? 자기 나름대로 하는 행동을 보세요. 자, 세숫대야 물에 손을 씻는 이유가 뭡니까? 주체체계의 행태에요. 인간은 자기한테 더러운 것, 역겨운 것, 재수 없는 것, 귀신 막 달라붙는 것을 다 떼어내는 식으로 평생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때 제자들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뭐야! 우리? 지금 우리의 주체는 뭐가 돼?” 아무 죄도 없어 보이는 무화과나무를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무슨 저주받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주해놓고, 저주시켜놓고, “보자~ 저주할 게 뭐가 있나? 옳지! 열매가 없었구나.” 하나의 억지, 억지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정상적인 우리의 사고방식 가지고서는 뭐로 보인다? 억지로 보이는데, 억지로 보인다는 말은 둘 중의 누가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무화과나무가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이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객관식 둘 중의 하나잖아요. 무화과나무가 잘못됐죠. 왜? 까라면 까야 해요. 잘못됐으면 잘못된 거예요. 이유도 없이. 제가 지난 주일이 설교했잖아요. 우리가 죄인인데 이유가 없어요. 이유도 없이 죄인 됐는데 주님 좋아라고 이유도 없이 죄인 된 거예요.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해요? 뭐, 주님하고 거래할 생각이 있습니까? 거래해서 뭘 얻겠다고 거래해요. 누구 좋으라고 거래해요. 마귀 좋으라고 거래합니까? 지금껏 살아온 것도, 우리가 뭐 시설 좋고 괜찮은 목욕탕을 골라서 살아온 게 아닙니다. 저는 목욕탕에 얼마나 다니는지 몰라요. 들어갈 때 문 한번 두드려보고 또 사우나실 안 막혔나 그거 보고 들어간 게 아니에요. 그냥 복불복이다. 다 죽으면 할 수 없고. 다 죽더라도 때는 벗겨야겠다. 그래서 간 거예요. 우리는 그냥.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심정으로 그냥 간 거예요. 목욕탕에. 지금 저만 그랬나? 다른 사람은 안 그런 것 같아요. 더 살고 싶어서 간 것 같아요. 저는 죽음의 장소로 생각하고 앞으로 갈 거예요. 이참에 유언 써놓고 가든지 무슨 조치를 해야겠어요. 아까 빼먹은 커피 한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혹시 독이 있을지. 있어도 상관없지만. 왜? 죄인이니까. 죽어야 되지만. 그래도 살려주시면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만. 이런 비장한 각오로 사약 먹듯이 먹어야 돼요. 이거 뭐 하늘보리인가 뭔가 이거 간접광고다. 제발 심각한 걸 두지마세요. 우리가 심각할 그런 잽이 됩니까? 그런 자격이 돼요? 뭐가 그렇게 심각해서 촛불 들려고 나갑니까? 광화문 앞에.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심각하다는 말은 주의 이름을 거부하는 거예요. 주님께 반항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무화과나무라면,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받아서 말라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마 불타서 죽을 거예요. 왜? 열불 나서. “주님! 아직 3개월 남았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열불이 나서 주님한테 막 따지려고 하다가 자기가 타죽을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주님의 저주를 수용했습니다. 왜? 이게 주님이 저주한 저주니까. 우리는 군소리 말고 그 저주를 받아들여야 돼요. 매일같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매일같이 저주받아도 합당하구나. 주께서는 그 합당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줬습니까? 법, 율법을 줬죠. 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뭘 받는다? 저주받죠. 하나라도 어기면. 그것도 매일같이 한시도 쉬지 않고 하나라도 어기면 우리는 저주받아요. 우리는 그런 육의 몸이에요. 육은 저주의 지배아래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하갈처럼 저주아래 있는 것이 육이에요. 저주를 저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먼저 모세의 법을 보여주고, 인간들이 법이 오니까 저주받아야 될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야! 신난다. 지켜야지! 이참에 내 의를 가지고, 내 이름가지고 어디까지 간다? 주의 이름이 와야 될 그 경로를 자기 이름으로 더덕더덕 붙여가면서 그걸 기어 올라가서, 결국 하늘에 올라가서, “제 이름으로 왔는데에~” “한 뚝배기 하실래에?” 하는 것처럼. “제 이름으로 왔는데에~ 여기까지 제 의가 있는데에~” 이런 식으로 이제 천당 가려고 하는 겁니다. 갑자기 로버트 할리가 생각나네. 예수님께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은, 시편118편으로 모든 것을 끝장내버려요. 그 대목 한다고 시간이 너무 많이 갔는데, 시편 118편 26절에 나온 말씀이지만 22절을 봅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누구 오뎅이 없나? 자기 이름을 빛내보세요. 건축자의 그 다음에 무슨 돌입니까? 버린 돌이죠. 그렇죠. 다 버려야 돼요. 예수님에 대해서 제자부터 모든 인간이 다 버려줘야 시간이 마감이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자기 숙제가 돼요. 제발 예수님을 좀 버려줘야 돼요. 예수님을 밀어내줘야 해요. 자기주체체계의 형성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고 밀어내야 하고, 예수님의 모습도 밀어낼 수밖에 없는,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그런 행색을 하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없어요. 믿음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미리 앞당겨서 저주받는 것도 감사한 사람이 있었죠. 12년 동안 혈루병 앓던 사람,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밉상 받는 사마리아 여인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예수님한테 칭찬받은 특징이 뭐에요? 이미 그들은 기존의 유대사회에서 나가놀아라~ 라고 해서 다 배제된 사람들이잖아요. 세리와 창녀, 그리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여인아! 너와 내가 같은 입장이다.” 같은 입장이다. 예수님께서 글씨를 쓰니까 그들이 뭘 느꼈습니까? 죄책감을 갖고 다 갔죠. 돌을 놓고. 글이라는 것은, 법이라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죄를 죄 되게 확 올라오게 하는 거예요. 확 올라오는 것. 저는 이 경험이 없어서 잘 몰라요. 근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술 한 잔 먹으면 열기가 확 올라온다면서요. 여긴 술 먹는 사람이 없으니 말도 못하겠네요. 혹시 이 방송을 듣거나 보는 사람 중에 열기가 확 올라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술 먹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열기가 확 올라온답니다. 얼굴이 갑자기 벌개 진대요. 주님의 법을 보는 순간 우리가 확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근데 왜 사람들이 안 올라오는데요? 복음을 안 전했으니까 안 올라오죠. 복음 전해보세요. 확 올라오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 뜻을 다 꺾어버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한 길로 안 가요. 예상한 길로 가지를 않습니다. 예상한 길은 우리의 주체체계가 발사되는 그러한, 스파이더에서 나온 줄, 거미줄이 이미 같이 따라가기 때문에, ‘역시 난 잘 선택했어. 역시 내 예상대로야. 역시 난 기도응답 받았어.’ 이래 돼버리면 이거는 확 올라올 게 없어요. 이거는. 성질날 게 없다고요. 우리가 주님을 미워해야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이 잃어버릴 대상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미워해야. 우리가 주님을 안 미워하는 것은 아직까지 뭐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뭐 예수님한테 관심 없어도 뭐 있는 돈 가지고 숨은 트고 살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정말 막다른 길로 갔을 때는 찬양보다도 뭐가 나오겠습니까? 미움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호산나 찬양은 사실은 진짜 십자가 질 때, 그때 불러야 할 찬양입니다. 근데 이것을 못 부르고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호산나 찬양하죠. 자기 몸을 구원해달라고, 자기 육을 구원해달라고 할 때 부르는 호산나 찬양이나 주의 이름하고, 나중에 심판받아도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아는 상태에서 부르는 호산나 찬양이나 주의 이름하고 뭐가 다릅니까? 한쪽은 자기를 위한 찬양이고. 자기를 찬양하는 자기 이름을 하나님께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는 찬양이고. 저쪽은 뭐냐, 오직 주님 이름만, 주님 혼자 다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제대로 찬양하는 것이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가 유사한 거예요. 술 취하면 확 올라오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죠. 자기 자신을. 대충 말고 아예 취해버리면. 비틀거리면서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죠. 성령에 취해버리면 관심사가 자기한테 없고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오직 주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 분주하게 하고 있는 주님의 일에 관심이 있죠. 성령에 취해버리면. 그럼 성령에 취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그냥 감사와 고마움만 나오죠. 이 말은 심각한 게 없다 이 말입니다. 타이어에 빵꾸가 났다. 차가 가다가 스톱했다. 평소에 찬양하다가도,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뻥 소리가 나서보니까 운전 중에 타이어가 빵꾸가 난 거예요. “에이씨 내 차.” 방금 뭐가 나왔죠? 에이씨 그 다음에 주체 차. 내 차. 내 차 바퀴 4개를 바꾸는데 일제로 15만원 줍니다. 4개하면 60만원. 바꾸다 보면 라이닝 하나 바꾸라고 해요. 라이닝 하나에 40만원. 이건 현찰로 달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휠도 바꿔야 돼요. 20만원. 찬양하다 120만원 날아갔어요. 내내 기분 나쁘죠. “타이어뱅크는 어디가도 60킬로만 타면 다 다시 바꿔줍니다.” 온갖 소리를 해도 소용없다가, 성령을 받는 순간 ‘아! 주께서 지켜주셨구나.’ 내 이름을 지켜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켜왔던 것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지킨다고 가려졌던 주의 이름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120만원의 돈을 날아가도록 잃어버리게 하셨던 겁니다. 호산나 찬양하리로다. 시편 118편은 절대로 이 말씀은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가릴 뿐이지 취소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22절을 다시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면서 시간이 중지가 됩니다. 이제는 그날이 그날이에요. 여기는 공간적으로 되어 있죠. 근데 24절을 보면 시간적으로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감 날이다. 그래서 안식을 기대하는 날이 안식이 아니고 안식이 완성된 날. 안식일이 완성되면 날짜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와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선풍기 날개에 종이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뭘 해도 심각함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데 왜 우리는 심각합니까? 차 빵꾸나는 것. 그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우리 속에 육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육이 있잖아요. 육이 살아줘야 영의 고마움을 알죠. 내가 그냥 딱딱한 시멘트라면, “뭐 시멘트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시멘트 때문에 피를 흘려?” 이래 되잖아요. 육이 있어줘야 죄가 나오고, 그 죄는 율법에 의하면 우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또 다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근데 이걸 누가 벗어났어요? 이미 시간을 정지시켰어요. 시간을 정지시켰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할 게 없다는 겁니다. 현재 지금이 하나님의 나라에요. 이 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성령이 함께 있어 그리스도의 처소와 함께 있는. 세상의 시간이 마감된 거예요. 마감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오늘밤에 죽어도 괜찮아요. 하루 더 살아도 괜찮고. 이틀 봐 줍니다. 이틀 살아도 괜찮고. 수십 년 살아도 괜찮아요. 어쨌든 간에 그거는 우리한테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가 없고, 주께서 우리를 주도적으로 주의 이름을 위해서, 호산나 찬양을 위해서 우리를 계속 살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육에서 영이 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올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 “이미 구원은 끝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호산나의 작업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고 저주했던 주님의 철저한 그 구원의 작업, 그게 저주가 아니라 곧 축복인 것을 저희들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