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12. 22) 46-1
광주 강의(2017. 12. 22) 46-1 마가복음 11장 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절,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장 9절에서 10절을 보게 되면, 찬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를 의식 안 하죠. 자기의식이 없이 자기 말고 앞에 있는 특정인에 대해서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우리에게 굉장히 난해한 것은, 지금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죠. 그런데 막상 지금 그 대중들이, 그 백성들이 찬양하는 그 대상자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고 구체적인, 자기하고 키가 비슷한 특정인물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대해서 찬양하는 겁니다. 이게 성립이 될 수 있느냐. 사실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 그 분에게 찬양을 해야지,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 찬양을 하면 안 되죠. 하나님이 받을 찬양을 사람이 접수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에서는 예외가 있어요. 메시야가 왔을 때는 찬양받아도 되는 겁니다. 메시야가 왔을 때는. 근데 메시야가 왔을 때는 지상과 천상의 높이가 일치가 돼요. 이게 같이 돼버리는 겁니다. 하늘이 내려앉았다고 할 수도 있고, 그 분이 하늘만큼 높아졌다고도 할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지극히 높으신 분과 지상의 메시야가 같이 찬양의 대상이 되는 그 순간이 오는 겁니다. 눈꺼풀이라고 해도 되고 입술이라고 해도 되는데, 입을 벌릴 때는 아랫입술, 윗입술 두 개로 입술이 벌어지잖아요. 근데 입을 다물면 두 개의 입술, 위아래의 입술이 하나가 되죠. 서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대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찬양을 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마땅히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과 지상에 오신 분이 그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것이 합치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가 되어 나타났을 때, 어떤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게 9절에 나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그 다음에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메시야인데,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늘을 향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응답 되는 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면 뭐냐 하면 그 통로라는 것이 있어요. 통로. 지정된 사람, 지정된 장소, 그 분을 경유해서 하나님께 찬양도 받으시고 하늘에서 복도 내리시는 겁니다. 그게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가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그걸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야곱 이후에는 누가 유명 하느냐 하면 모세가 유명하죠. 그래서 모세가 그 유대사회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겁니다. 모세는 떠났어도 모세가 남겨준 율법이 있는 한 하늘과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유대나라와의 관계는 돈독하다. 끊어지지 않는다. 접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율법에 의해서 메시야가 와야 되는데, 메시야가 오게 되어 있어요. 메시야가 올 때 그들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어요. 시편 118편 26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 하였도다” 오실 분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데, 주의 이름이라는 말을 해도 되고 다른 말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해도 된다는 겁니다. 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어쨌든 간에 여기서 이방민족인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유대인들은 뭘 믿느냐 하면,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 일을 추진시키고 그 모든 일의 추진에 끝장을 보고 완성을 보게 되면 그냥 완성했다고 하늘에서 고함지르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어떤 분을 이 땅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일이 끝났다고 보는 겁니다. “아하! 이제 끝났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시간의 마감이라고 합니다. 모든 시간의 마감. 시간의 마감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마감도 돼요. 시간의 마감이라는 말을 풀이하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진척시킬 모든 이유는 없어졌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더 끌어갈 하등의 필요성은 다 없어졌다. 손 털었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하면 “끝났네.”하고 손 터는 것. 그걸 유대사회에서 유대인들이 굉장히 고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힘들고 힘든, 이렇게 로마한테 배척받는 이 고난의 길, 이제 메시야가 왔으면 손 턴 거죠. 예수님께서 이정도의 평가를 받을만한 그러한 이유는 돼요. 왜냐하면 갈릴리에서 워낙 유명했으니까.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이정도로 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감히 흉내도 못내는 엄청난 일들을 했어요. 귀신 쫓아냈죠. 특히 유명한 게 오병이어에요. 오병이어. 오천 명을 먹였을 때,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키고도 남잖아요. 이 어려운 경제사정, 생존에 필요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윗의 자손 메시야만 온다면, 주의 이름으로 온다면 그 모든 것은 이제는 본인들이 걱정을 안 해도 되죠. 특히 이 다윗의 자손에게 담긴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다윗의 직업은 왕입니다. 직업이 왕이죠. 다윗 왕이잖아요. 그러면 다윗이 왕 노릇 했을 때, 그때 이스라엘 사회는 주변에 다른 민족들에게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대단한 위치에 있었죠. 그 다윗의 위세는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아들 된 솔로몬까지 이어져서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영광을 지향하겠다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여망과 하나님의 뜻이 그들은 동일하다고 본 겁니다. 자신들의 유대나라가 크게 번영되는 그것이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같은 뜻이라고 본 거예요. 쉽게 말해서 메시야만 오시면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아도, 떵떵거리고 사는 그 번영의 사회, 번영의 시대가 들이닥칠 거니까 그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고대했겠습니까?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어린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죠. 에덴동산보다 더 멋있는 낙원의 상태를 예고했을 때, 그 모든 예고는 누구하기 나름입니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때의 그 번영을 그대로 다시 회복시킬 그 자손을 뜻하거든요. 다윗의 자손. 그러니까 이런 분을 얼마나 학수고대했겠습니까? 좋아들 하죠. 근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메시야도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만 알고 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알고 있죠. 그들은 알고 있어요. 지금 대중들이, 민중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대중들은 왜 착각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오병이어,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했기 때문에. 그 소문이 어디서부터 부풀어졌다? 갈릴리에서 이만큼 팽배해졌다 치고, 그것이 드디어 어디로 옵니까? 유월절 맞추어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오니까, 예수님 혼자만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기대는 많은 대중들이 이미 소문을 많이 들었잖아요. 그래서 대환영일변도의 자세로서 자기들이 속내, 메시야를 간곡히 기다린다는 것,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그 메시야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예수님께 노출이 되었겠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이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이 원하는 낙원은 오지 않습니다. 자,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에 뭘 기대하느냐 하면 말끔하게 때 벗기고 피부를 보송보송하게 해가지고 나오는 것. 여자들은 한두 시간씩 하잖아요. 두 시간 후에 그렇게 되어서 나가기를 기대하겠죠. 근데 목욕탕에 들어갈 때에 불에 타죽는 것을 기대하면서 목욕탕에 들어갑니까? 그렇지 않죠. 들어갈 때부터 나갈 것을 예상하잖아요. 근데 이들이 하늘의 유황불을 맞는다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스티로폼의 불덩어리가 지하의 차 위에 떨어진다면, 그걸 떨어지기를 간곡히 기대하면서 차 주인이 거기에 댔겠어요? 제천화재현장에서. 아니죠. 이 세상이 메시야에게 불 심판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기대했겠습니까? 분명히 세례요한은 뭐냐 하면 회개하라고 했고, 너희들이 기대한 메시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에요. 메시야가 오는 날은 무슨 날입니까? 심판의 날입니다. 누굴 심판해요? 바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들을 심판하는 메시야에요. 세례요한이 그걸 외쳤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들을 때 자기가 기대한 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기대한 것, 필요한 것만 들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안 들리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딴 데 팔면 식구가 와도, “왔나?”하고 누가 온지 몰라요. 정신을 한 곳에 팔면, 거기다가 집중하다보면 다른 사람, 누가와도 몰라요. 자기들이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지금 문제는 뭐냐 하면 본인들이 구원받을 그런 사람들입니까? 그럴 자격이 돼요?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의 일은 이중적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본질에 맞는 그러한 이벤트를 벌이면서 나귀 끌고 와가지고, 다윗이 왕이니까 그 자손도 뭐가 돼요? 왕은 세습제니까 왕이잖아요. 만군의 왕으로 오는 것을 충분히 하면서도, 이게 돈키호테 같은 그런 느낌 때문에, 그런 왕이라면 최고 좋은 말을 타고 와야 하는데, 말은커녕 몇 번 가다가 푹 넘어질 그런 연약한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 말이죠. 그럼 대중들이 뭘 타고 오긴 오니까 메시야가 맞긴 맞는데, 그 행색을 보니까 이거는 뭐 이도령 거지꼴도 아니고. 뭔가 자기들이 생각한 메시야이고 싶은데, 소문을 듣기로는 메시야가 맞는데, 딱 메시야인데, 오천 명 먹였으니까, 물 위를 걸었으니까, 소문은 또 부풀려지잖아요. 고대했던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스가랴의 예언대로 감람산에 오게 돼요. 그러면, 몇 미터 안 남았으면, 그대를 만나는 곳 백 미터 전, 몇 미터만 있으면 완전히 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늘나라, 거룩한 제사장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왕으로 와야 하는데, 이게 왕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나귀를 타고 왔다 이 말이죠. 그나저나 대중들은 나귀를 왜 탔는지 의미도 모르고 그냥 호산나! 하면서 자신의 기대를,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그냥 억지로 예수님한테 퍼붓는 겁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면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왕의 모습이 아닌 이중적인 양태를 가지고 이벤트를 계속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왕이 아닌 것은 아니되 너희들이 기대한 그런 메시야는 아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잘못되었는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내 쪽의 잘못이 아니고 너희들이 잘못된 것이다. 자, 너희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이야기입니다. 무화과나무이야기. 무화과나무이야기가 때가 되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만드신 창조주로부터 저주를 받아요. 바짝 말라버립니다. 누가 놀랐겠어요? 제자들이 깜놀! 깜짝 놀랐습니다. 무화과나무 때도 안 됐는데 마르게 했다. 말라비틀어진 속도가 유난히도 빨랐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 무화과나무가 저주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그것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는데, 예수님이 와서 약간의 짜증을 내면서, “어! 내가 시장한데 왜 열매가 없지?”라고 하실 때, 제자들 중 그 누구라도 이야기 안 했겠습니까? “주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무화과열매를 찾으십니까? 주님 아직 때가 아닙니다.” 때가 안 된 것을 예수님이 모를까요? 알면서도 열매를 요청했던 그 의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의도. 무화과나무가 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보자~ 열매가 있나.” 그럴 때 갑자기 바빠야 돼요. 갑자기 성장호르몬이 나와 가지고, 비아그라를 먹든지 간에 “주님 여기 있습니다.”해가지고, 그것도 두 개나 필요 없어요. 한 개만 먼저 시범적으로 만들어내면 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는지 무화과나무는 그냥 저주받는 겁니다. “열매 맺을 때가 안 되었습니다.”라는 것이 인간들 생각하고 무화과나무 생각. 무화과나무 생각이 뭔지 모르지만. 그리고 예수님 생각은, “이것이 열매 맺을 때다.” 이것이 예수님 생각이에요. 이게 예수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을 때다.” 인간들은 “아이고,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안 됐습니다.” “아니야. 열매 맺을 때야.” “이유가 뭡니까?” “내가 왔거든.” 예수님은 오심 자체가 시간의 마감을 같이 몰고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니는 그 모습 자체가 드디어 모든 시간이 이제는 더 이상 진척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시간 자체가 흘러가는 것이 시간의 임무가 아니에요. 시간이 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것은 무화과나무 일이다.” 그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죠.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의 할 일은 예수님이 열매를 요구했을 때, 열매를 드리는 그것이, 예수님이 열매를 요구했을 때 그때에 맞추는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할 일이라는 거예요. 귀신 씻나락(볍씨, 경상전라방언)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이거 뭐. 이거 제 탓 아닙니다. 저보고 닦달내지마세요. 1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를 하나의 인간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처럼 다루고 있어요. 이게 일종의 징조가 되는데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실 일이 뭐냐 하면, 하실 일을 무화과나무에게 시범적으로 보인 겁니다. 무화과나무를 뭐했습니까? 저주했죠. 예수님이 하실 일은 인간에 대해서 저주하시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시간이 마감이 되려면 저주작업을 시행하는 그것이 제대로 된 시간의 마감작업이라니까요. 저주하는 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 지상에 올 때 인간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자기들은 멀쩡하고 자기들은 건전하다고 보는 겁니다. “하늘에서 사다리 보내주시면 사다리 타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 생각은 뭐냐 하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그냥 빈손으로 내려왔겠느냐 하는 겁니다. 빈손으로 내려왔겠어요? 예수님께서 나귀를 부르고 난 뒤에 나귀에 올라탔잖아요. 그 나귀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귀를 왜 탔느냐 하면, 왕이라면 뭘 타야해요? 말을 타야 하잖아요.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탔다는 말은, 이런 변화에 대해서 그 책임은 누구한테 있다? 바로 이 세상이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정상적으로 메시야를 메시야로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을 알아볼 수 있는 그렇게 되는 세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 하소서”라는 뜻인데, 우리를 구원하라는 그 말은 취소하느냐? 아니죠. 그건 이중플레이라니까요.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인간들 생각은 뭐냐 하면 “멀쩡하니까 데려가주세요. 이것이 구원입니다.”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아니야. 너희들 멀쩡한 게 아니야.” 너희들을 저주하는 그것이 구원의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들이 구원을 받겠다는 그 심보가 더러운 심보가 되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세례요한이 도끼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들이라고 했잖아요. “너희들이 어딜 들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에라! 이 돌멩이가 들어간다. 이 돌멩이가.”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뭐 보다 못하다? 돌멩이보다 못한 거예요. 대한예수교장로회돌멩이교회. 그런 평가받아도 굉장히 그들은 고맙다고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지금 그걸 아마 생각을 못하고 있을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그냥 하나의 나무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그렇게 갈궈야 되겠어요? 목마르면 시장에서라도 판다고요. 나무 그게 뭔데 상대해서 나무를 갈구십니까?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체체계에요. 그래서 오늘 호산나하고 둘이 연관시키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체체계. 주체도 중요하지만, 주체는 많이 이야기했죠. 체계라는 말을 제가 오랜만에 쓰는 것 같습니다. 주체체계, 주체가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 스스로 나는 나다, 라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체계가 있는 거예요. 혼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혼돈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은 무질서로 보잖아요. 무질서. 대표적인 것이 어린손녀, 손자들이 노는 것. 상당히 무질서해요. 근데 어린손녀, 손자보다도 더 무질서한 게 뭐냐 하면 엄마 뱃속에서 아직 잉태하지 않은 그러한 형국. 그게 아주 무질서해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순수인데, 순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에요. 만약에 잡채를 만들기 전에 시장에서 오이, 당근, 버섯, 시금치, 고기, 당면을 사오잖아요. 그게 하나하나가 순수하잖아요. 순수하지만 그게 잡채입니까? 그냥 재료죠. 재료. 재료잖아요. 재료. 이 재료는 순수한데, 이게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에 그 모습이에요. 제가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취지를 아담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어요. 더욱이 더 이해가 안 되는 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죠. 죽음이 뭔지를 뭐 경험한 사람 같으면 그게 경고가 되는데,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두 살 애한테 “니 자꾸 어질러 놓고 말 안 들으면 너한테 주식배당 안 해준다.” 그럼 두 살 먹은 애가 “엄마 그것만은 안 돼!” 이럽니까? 애들한테 지갑주면 돈은 다 버리고 지갑만 들고 가요. 돈 다 버리고. 돈을 보기를 물같이 봐요. 지갑이 중요한 거예요. 지갑이. 그게 순수에요. 의로운 것도 아니고 죄 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냐, 따먹지 말라는 금지를 준 거죠. 그러면 신약 때 법칙은 뭐냐, 금지라는 법은 무엇일 경우에만 주어진다? 사전에 뭐가 형성되어 있을 때는? 죄죠. 죄가 있을 때는 법이 주어져요. 죄와 법이 만나는 거예요. 죄가 더욱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창세기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았죠. 하나님 나름대로 이게 법이 되고 말았어요. “나는 니 제사를 금지한다.” 가인은 왜 내 제사를 안 받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그 뒤에 추후적으로 뭐냐 하면, 바로 죄가 누굴 덮칩니까? 가인을 덮쳐요. 그러니 이게 지금 인간세계가 뭐냐, 내가 죄를 짓고 난 뒤에 내가 벌 받잖아요. 그게 아니고 벌 받는 사람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왜 벌을 받아야 되는지를 추후 확정짓기 위해서 죄가 덮치는 겁니다. 희한하죠. 에서나 야곱이 이 땅에 태어나서 뭘 꼼지락꼼지락해서 사랑 받고, 뭘 해서 미움 받는 것이 아니에요. 미움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둘 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한쪽은 미움 받고 한쪽은 사랑 받아요. 그리고 에서가 한 것은 그냥 우리가 보기에는 일상의 일인데 하나님 보기에는 뭐로 보이느냐, “그러니까 꼭 밉상이지. 미움 받을 짓을 하는구먼!” 이렇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려요. 근데 인간은 유, 있음부터 시작하잖아요. 있음부터 차근차근 따져서 나가기 때문에, 자, 있음부터,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있음의 윤리도덕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따진다. 이게 인간의 이성이에요. 칸트의 이성은 따지는 거예요. 누가 따지느냐 하면 주체가 있어서 내가 따지는 거예요. 내가 따질 때 목적이 있어요. 내가 따지는 것이 뭐냐 하면 악은 악 쪽에서 멀어지고 선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 내가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 선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그게 원래 무죄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죄 짓고 난 뒤에 생긴 겁니까? 선하게 살겠다고 하는 그게? 선하게 살겠다는 자체가 이미 죄 속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혼돈, 여기 혼돈이라는 의미를 서로 싸운다는 개념 때문에 그냥 순수, 고요라고 봅시다. 이게 있는데 그걸 동그랗게 테두리 치는 거예요. 테두리 치고 난 뒤에 이것이 체계인데, 체계가 있고 난 뒤에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다들 담배 안 피우시니까 잘 모르시죠. 옛날 우리 집에서 담배 가게를 해서 잘 아는데, 담배 한 갑에 스무 개비가 들어있어요. 공장에서는 담배 개비가 수 백 개가 있죠. 근데 그게 포장과정에 들어가서는 스무 개비씩 딱딱 테두리를 치게 되면 이걸 한 갑이라고 합니다. 한 갑.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순수로 나와요. 순수로 나오면서 그 테두리의 윤곽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겁니다. 그게 1년 6개월부터 해서 2살 정도면 드디어 자의식이 생깁니다. 라캉은 1년 6개월부터 보거든요. 1년 6개월부터 왜 자의식이 생기느냐 하면 거울을 보면서 저게 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전에는 뭐냐 하면 엄마가 시장에 가버리면 이거는 자기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안 느껴지고 엄마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럼 나는 뭐냐, 엄마의 육체의 연장이 나에요. 그래서 엄마가 아프면 내가 울어요. 자의식이 생기기 전에는. 이게 분화가 안 됐다 이 말이에요. 주체가 없기 때문에 타자, 남이라는 것도 없어요. 그저 어디가도 같이 붙어있어야 되고. 물론 그게 급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고 차츰차츰 그렇게 되어가요. 서서히. 그러다가 좀 크면 엄마랑 안 자려고 하고 자기 혼자 자려고 하지만. 지금은 뭐냐, 두 살 애는 전부 다 잠이 오면 엄마보고 재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 몸이니까 알아서 해달라는 거죠. 내가 지금 잠들고 싶은 것은 엄마가 잠들고 싶어 하는 것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주체가 형성되는 이걸,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일한 작업이라고 합니다. 동일한 작업. 동일한 작업 또는 동일화라고 하는데,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질적인 것, 역겨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 이런 것을 골라내요. 이런 것을 본인이 분류를 시키면서, 그 결과로써 나는 이정도의 동그라미 안이 바로 나다. 이게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합산하면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죠. 그래서 목사가 그렇게 교회를 아끼는 거예요. 복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몇 십 년 동안 공들였던 교회를 지키는 겁니다. 그게 자아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불나면 ‘주님의 교회니까 주님이 알아서 불냈구나.’라는 이 생각이 안 든다니까요. “아이고, 내 교회 어쩌나! 어쩌나!”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아이고, 이 교회 불났으니 어쩌나! 지금 그쪽에 가려고 작정한 사람도 있는데 교회 불나면 안 돼! 부담되고 어쩌나!”하죠. 부모에게는 뭐가 지키고 싶은 거예요? 자식이죠. 자식이라니까요. 자기 장모, 자기 아내, 자기 딸, 오랜만에 부여 사는 사람이 친정 제천에 와서 다 죽었어요. 한 목욕탕에 갔으니까 다 죽은 거예요. 통곡을 하는 거예요. 그 남편이. 특히 아내 죽고 장모 죽은 게 뭐 그리 통곡이 되겠어요. 자기 딸 죽은 게 아까운 거예요. 평생에. 죽었다고 통곡한다는 말은, “주님 자식을 주님이 불에 태웠는데 뭐. 이 세상은 저주받아 마땅한데 뭐. 그게 주님의 할 일이잖아.” 근데 이런 사람 봤어요? 주체가 경계가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안목이 나와요. 세상 보는 안목. 현실규정을 본인이 해요. 나를 위한 현실이에요. 나를 위한 현실. 그래서 제천에 불났을 때 체천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은 그다지 정신적인 충격이 없어요. 충격이 없습니다. 그저 문재인 팬들은 말합니다. 박근혜가 규제를 풀어가지고 저렇게 됐다고. 낚싯배 그렇게 된 것도 박근혜, 제천에 불난 것도 옥에 곱게 가두어져 있는 박근혜 탓이라고. 그런데 제천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이 있다고요. 제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요. 백형진(?)강도사. 그분은 남자기 때문에, 남자목욕탕은 문이 잘 열렸었나 봐요. 그 시간이면 남자들은 직장에 가있으니까. 그게 오후였거든요. 그 시간에 누가 목욕탕에 가냐면 여자들이 가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있는 겁니다. 팩할 것 팩하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사모님도 직장에 가기 때문에 ‘아휴! 안심이구나!’했죠. 이게 뭐냐 하면 세상은 왜 내가 아는 사람 위주로 보느냐, 그런 안목이 왜 있느냐, 이게 선입견이거든요. 선입견. 인간은 주체가 있기에 선입견도 같이 동반해서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지금 누굴 믿는다고요? 다윗의 자손요? 뭐 주의 이름으로 호산나? 자기 딸 죽여보세요. 호산나 하는지. 주님이 오셔서 제천에서 우리 딸 죽였다고 하면, 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뭐 감사합니다? 그 소리 나오겠어요? 만약에 그렇게 자기 돈 떼먹고 가고 욕하고 했던 놈이 제천에서 헬스 하다가 죽어보세요. “정의는 살아있다. 정의는 살아있어! 주여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합니다. “그 사람만 죽이지, 다른 사람 죽인 건 아깝다마는. 나한테는 그 놈만 죽어야해. 혼자서 가서 혼자 헬스 하다가 혼자 죽어야 돼. 1명 죽고 나머지 부상. 이래 돼야 돼.”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나와 얼마나 밀도 있는 관계를 형성하느냐, 그걸 따지게 되어 있어요. 나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 그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인간들은 스파이더맨처럼 전부다 자기를 중앙로터리로 잡고 쫙쫙 뭘 쏘고 있다는 거예요? 거미줄을 쏘면서, 거미줄을 쏘고 난 뒤에 상상했던 거미줄의 망. 멀리가면 나와 관계가 좀 적고, 가까운 데는 나와 늘 주고받고 하는 가까운 사이고. 이런 두꺼운 거미줄로 형성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의 장이라고 해요. 주체의 장場. 이걸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념이라고 합니다. 아까 식사하면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여튼 북한사람들은 그렇게 당하고서도, 김정은한테 그렇게 놀아나고서도 무지한지 바보인지 모르겠다고 하거든요. 이 북한주민들은 지금 이념의 장이에요. 그게. 가장 이 세상에서 행복한 나라에요. 월드컵 못 나가도. 그렇게 행복해요. 나가면 더 좋고. 어버이 수령 모시고. 김정은 지나가면 눈물이 죽 흘러요. 여군들은 모자 삐딱하게 쓰고서 막 달려들어. 이건 뭐 방탄소년단 팬클럽보다 더 해. 샤이니 팬클럽보다 더 하고. 우린 안 그렇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혼돈인데,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둘러쳐있는 거예요. 뭐가 둘러쳐있는가,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사탄이 둘러친 거예요. 악마가. 악마가 둘러쳤는데 세상에서는 악마라는 존재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변의 상황과 경제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과 태어난 가정의 분위기가 그 사람을 주체로 만든다고 이야기해요. 그러한 세상적인 견해, 가정의 주변 환경이 그 사람의 주체를 만든다고 하니, 성경에 동의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동의합니까, 동의 안 합니까? 동의 안 하죠. 그걸 한자로 육이에요. 육. 그리고 성령이오지 않으면 자기가 육인 줄 알지 못해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인식된 주체가지고 거미줄을 쏘아서 호산나를 찬양하고,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렸고, 떡 주니까 좋다고 메시야가 왔다고 우기고,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니까 진짜 메시야인줄 알고. 그런 식으로 으쌰! 으쌰! 으쌰! 하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길을 비켜라! 비키세요!”라고 하면서 도왔던, 세례요한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했던 그들의 견해에, 이 주체형성에, 예수님께서는 이 테두리를 보는 겁니다. 사탄이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의 주체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인간들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못 벗어날까요? 이 테두리에서. 못 벗어나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겠습니까. 갈수록 이 주체, 자아가 강화됩니다. 강화되면서 역겹고 더러운 것은 다 떠밀죠. 그 떠밀 때 그 떠밀리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 떠미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누구한테 떠밀린 줄 알아요? 열두 제자들한테 떠밀렸어요. 엄마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시신이나 잘 거두어 장례나 잘 치르자.” 그래서 들어간 거예요. 뭘 안 게 아니에요. 육이 육을 못 벗어난다니까요. 육이 육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령세례 받는 경우 외에는 없어요. 육에 영이 찾아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육에서 영을 못 벗어납니다. 감사할 일은 이 유대사회가 육에서 영을 흉내 냈을 때, 어떤 것이 극한의 모습을 보이느냐를 아주 시범적으로 잘 보여줬다는 점에서 오늘날 유대사회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면 율법 잘 지켰다고 하니까, 남한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죠. 율법에 흠이 없는 자는 누구였습니까? 사도바울이죠. 사도바울에게 영이 찾아오니까 지킨 그게 뭐가 돼요? 배설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설물. 육을 사탄이 둘러싸면서 이 주체가 있는데, 몰아세웠다고 할까요, 물고기 정치망(한곳에 쳐 놓고 고기 떼가 지나가다가 걸리도록 한 그물)같은, 그물에 폭 싸여버렸다. 이렇게 했을 때, 여기서 가해진 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 2장 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따먹었으니까 죽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죽으면 안 돼요.”라고 피라냐, 식인고기. 영화로 봤지만 입을 벌리는데 아주 이상해요. 인상이 못되게 생겼어요. 고기가 인상 나쁜 건 처음 봤어요. 얼마나 못돼먹게 생겼는지. 이빨도 날카롭고. 입을 쩍쩍 벌리고 있어요. 먹잇감을 찾아서. 인간들이 꼭 피라냐 같아요. 입을 벌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이면 안 돼요.”라고 반항하는 거예요. 반항. “쌤요! 때리면 안 돼요.”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반항하는 거예요. 그 반항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작용하겠어요? 사탄이 “짖어! 짖어! 니 죽으면 니 주체도 날아가! 그러면 안 되잖아.” 안 되는 이유도 모르는데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되는 그 모습이 뭐냐, “예수 잘 믿을게요. 십자가 믿을게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하나님 순종할게요. 이 성경말씀 지킬게요. 선교할게요.” 이 소리의 뒤 배후는 뭐냐 하면 ‘그래 이래서라도 살아남아야지. 이래서라도 나 죽으면 안 돼. 나도 가오(자존심)가 있고 위신이 있지. 이래서 죽으면 안 돼.’ 이런 것이 피라냐처럼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뭐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걸 획기적으로 완전히 뜯어고칠 필요가 있죠. 획기적으로. 획기적인 뜻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왔다는 것은 시간이 마감된다고 했고, 시간이 마감됐다는 것은 시간이 더 이상 진척될 이유가 없다고 했죠. 그러면 시간이 마감되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향하여 하신 일이 있어요. 그게 심판입니다. 그게 저주거든요. 그러면 주님은 구원자 이전에 무슨 분으로 오셨다? 심판주로 온 거예요. 심판주로 오심에 대해서 동의한 사람만 구원받는 겁니다. “드디어 저를 치시려고 오셨군요. 반가워요.” 이래 되어야 돼요. “드디어 저의 죄 값을 저주하려고 오셨군요. 이제야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이래 되어야 된다니까요. 악마가 쳐놓은 이 테두리, 주체라는 이 테두리, 이것가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 곡해하고 오해했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주체체계, 체계라는 말을 집어넣은 이유를 아시겠죠. 체계라는 말은 주체를 구조화시키는 이 작업을 말합니다. 주체체계가 계속 이어지게 되면 바깥으로 뭘 보낸다? 나한테 안 맞는 역겨운 것, 더러운 것, 다시 말해서 순수, 나의 착함과 의로움에 표방되는 것은 다 바깥으로 밀어내는 성향을 보이는 겁니다. 밀어내면서 뭘 합니까? 내 것 지키면서, 죽기 싫어서 더 살고 싶어 하는 자기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아직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그러면 제천에 불나서 죽은 사람들은 전부다 죽으려고 갔습니까? 때 벗기려고 갔죠. 때 왜 벗깁니까? 이왕 사는 것 말끔하게 살라고 하는 거잖아요. 불났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돼요. 불의 원인이 뭡니까? ① 차량. ② 스티로폼. ③ 부실한 마감재. ④ 예수님의 진노. 몇 번입니까? 우리는 불쏘시개 주체에요. 불타고 나니까 우리는 재료에요. 재료. 지금 많이 봐주고 있었던 거예요. 지난주 목욕탕에 갔을 때, 그때 불났어야 해요. 할 말이 없어요. 광주 어느 목욕탕. “아휴! 광주는 안 나서 좋다.” 이러면 안 됩니다. “목포는 빼주세요.” 뭐 이래 나오면 안 됩니다. 왜 우리는, 참새도 키우고 하듯이 우리를 매일 살린다는 사실을 왜 못하고 있습니까? 주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미줄 망이, 그 거미줄 망이 항상 탱탱하게 안 닫히고 보존되기를, 우리 속에 악마가 그걸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은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그런데 악마가 제각각 그런 소리를 다하게 하고 있어요. 어떤 분이 이야기했어요. 우리교회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 오니까 느닷없이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악의 구조와 영의 구조가 같습니다.” 그분이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이신데, 그냥 함부로 이야기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체를 보세요. 악(육)의 주체가 혼돈을 테두리 쳤죠. 예수님도 똑같은 방식이라는 거예요. 주체체계. 악(육)의 구조, 영의 구조가 같으니까. 예수님을 영으로 체계(테두리)를 쳐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체가 되죠. 그러면 주체에서 뭐가 나온다? 주체에서 영향력, 거미줄처럼 영향력이 나오겠죠. 어느 것이 현실이냐를 묻는 겁니다. 이 현실이 누굴 위한 현실이냐는 겁니다. 제천에 불이 난 게 누굴 위함이냐 이 말이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주체체계가 뻗어나가는 것은 예수님의 주체와 우리의 주체가, 누가 누구를 상호 흉내 내는지 모르지만 인간에게서 이게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사탄이 그런 짓을 했고, 그 사탄이 하는 것과 같은 주체로서 예수님이 사탄이 하는 짓거리를 같은 구조의 몸으로서 같이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구조가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를 배제하고 태어난 자식.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남자를 소외시키고 나온, 그러한 여자의 자식이죠. 남자 없이. 왜 남자가 없어야 되죠? 이미 남자는 어디에 속했다? 흙이니까, 이미 죽음의 힘 앞에 맥없이, 꼼짝 마라는 식으로 잡혀 있잖아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