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강-YouTube강의(분노)171219-이 근호 목사
215강-YouTube강의(분노)171219-이 근호 목사 제215강, 제목은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분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 현장에 주님께서 당도하신 겁니다. 사람들은 늘 분노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늘 분노하지는. 자기에게 웃음을 야기하는 일들이나 예상 밖의 어떤 복이 굴러들어오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이 왔을 때는, 웃지 말라고 해도 아마 껄껄껄 웃고,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웃죠. 웃는 그 이유를 정리하게 되면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웃습니다. 남들로부터 내가 인정받을 때와 남들로부터 내가 사랑받을 때, 이 두 가지죠. 사실은 같은 거죠. 제가 둘로 나누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뭘 돌려줘야한다는 그런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둘로 나누는 거예요. 사람은 우선적으로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 샤이니 종현처럼 연탄 피워놓고 죽을 수 있죠. 그 자살이, 자기는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는데, 뭐 딱 깨놓고 말해서는 마음이 높아져서 그래요. 물론 마음이 왜 높으냐, 그것은 사탄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마음을 낮출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높여온 겁니다. 이 정도 되는 위치가 딱 나라고 정할 때, 누가 그렇게 정합니까? 그것은 남들이 나에게 그걸 요구한다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이 하는 기대에 자기가 부응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으면,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을 내가 충분하게 속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요. 남은 100을 요구하는데 자기가 1도, 5도, 10도 못했을 때, 자기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거예요. 근데 사람들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것이 괴롭다고 하는데, 앞뒤의 논리가 이게 잘 안 맞죠. 인정 못 받으면 못 받는 대로 살면 되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한 대로 살면 되잖아요. 사랑 안 받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외롭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근데 외로우면 그 외로운 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 보세요. 엄마 없이 혼자서 있으면 되잖아요. 근데 엄마 없다고, 엄마가 시장에 갔는데 엄마 없다고 곧 죽을 것처럼 고함치고 고통스럽게 누구 꼬집는 것도 아니고 누굴 발로 차는 것도 아니잖아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잠이 와서도 아니에요. 자기 곁에 누가 없다고 해서 앙탈부리면서 크게 우는 겁니다.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점을 주목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점을 주목한 사람들. 왜 인간은 혼자서 안 되는가? 심리학자들이 이걸 하는 겁니다. 심리학자들은 탄광에서 탄 캐는 사람들이 아니고, 식당에서 서빙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지금은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고, 남의 머리 해주는 이발사가 아닙니다.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를 연구해보니까, 인간은 외로운 것을 상당히 참기 힘든 것으로, 외로운 것을 고통으로 간주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이렇게 들어보게 되면 결론은 딱 나옵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나라는 것은 이미 남들이 거기다가 담아준 것이고 남들이 양육한 것이고 교훈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미숙하기 때문에, 육체로서는 떨어졌지만 정신적으로서는 엄마와 함께 있다가 떨어져 나온 지가 얼마 안 됐잖아요. 그래서 옆에 보호자가 필요하고, 커서도 엄마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그 엄마나 아빠로부터 너는 이래이래야 사랑받는다는 것을 계속 그런 식으로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심지어 키우는 개, 고양이에게 자꾸 잘해주다가 잘 안 해주게 되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도 있잖아요. 개도 우울증 걸린다고요. 개가 그냥 개가 아니에요. 사람이 만들어준 개로 달라지고 있다 이 말이죠. 주변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지면 영원히 그 사람은 주변사람들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같은 경우에 보호받기 위해서 결혼했는데 안 해줄 때는 그 보호자 자리의 빈터가 그렇게 나에게 힘든 자리고, 결핍을 유발하는 자리고, 마음이 허하게 만드는 자리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엉터리다 이 말이죠. 종교라고 하는 것은 나 좋아라고 믿는 겁니다. 내 허한 것, 내가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누구로부터 인정받고 싶을 때에 아무도 나에게 만족할 만한 사랑과 인정을 안 해줄 때에 예수를 초청하는 겁니다. 내 마음 달래달라고. 초청할 때 아주 간곡하게 초청하는 것을 간구라고 하죠. 간구. 통곡하면서 “주여! 주여!” 해가면서 계속 요청하는 거예요. “집 사 주세요. 주여!” 계속 요청하는 거예요. 집을 사줘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는다 이 말이죠. 그게 가짜거든요. 가짜가 뭐냐 하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 아니고 우리를 떠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마태복음 12장 39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주기 위해서 어떤 보호자, 영웅 같은 분을 우리한테 파견해달라는 겁니다. “신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살펴주옵소서! 나라는 덩치를 지켜주옵소서! 임마누엘 해주시옵소서!” 함께 있어서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함께 해 달라는 그들의 종교열정. 함께 있으매 그 증거물을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눈에 띄게 실적으로 남겨달라고 할 때, 주님의 표적은 뭡니까? 요나의 표적입니다. 곁에 있다가 갈라서서 떠나는 겁니다. 떠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과연 너가 지킬만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 하나님과 함께 있을 존재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그런 버림받을 존재인지를 니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요나의 표적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보호자가 왔다고 좋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그 결말은 그 사이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빠이빠이 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들과 헤어지겠다고 자부한 것은 그들이 생각했던, 원했던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떠날 때 떠나주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느끼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기회를 잡은 거예요. 자진해서 우리는 가출해야 되고 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때, 재회할 때는 탕자의 몸으로 재회하세요. 잃어버린 자로 만나시면 그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와 강도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자에요. 예수님의 증거를 흠뻑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