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강-YouTube강의(대기자들)171219-이 근호 목사
214강-YouTube강의(대기자들)171219-이 근호 목사 오늘은 214강, 제목은 ‘대기자들’입니다. 대기한다는 것은 현재 자기자리가 온전한 자리도 아니고 영원한 자리도 아니다 라는 그런 뉘앙스가 있죠. 대기한다는 것은 임시로 있는 것,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영원히 이동할 준비단계를 ‘대기’라고 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을 ‘대기자’라고 하죠. 성경에서는 성도를 대기자로 봅니다. 어디에 대기하고 있는가? 무덤 속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베드로의 설교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설교 중에서 2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미 죽은 사람의 묘까지 거론을 한다는 것은 다윗이 죽어서 그 묘에 들어간 것으로 다윗의 인생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게 마감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제가 대기자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것이 다윗의 모든 운명의 끝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다윗의 묘가 있었는데, 다윗은 누구하고 비교가 되어야 할 인물이냐 하면 대기자에 있는 사람들, 대기자들은 그냥 외부에서 자기의 손을 잡아당기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대기된 상태에요. 그런데 어떤 분이 와서 대기자 속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게 된다면 그것은 이제 대기생활이 끝났다는 거죠. 누구하고 비교가 되느냐 하면, 3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를 시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설교를 하면서 인간을 먼저 거론해요. 사람을 거론하고. 그 사람과 같은 사람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사람이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과 비교를 시키죠. 다윗이 훌륭하냐, 예수님이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다윗이 갔던 인생 코스는 사실은 모든 인간도 예외 없이 가야할 그 코스를 다윗이 품고 있고 부각되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길은 이런 대기 속에 있는 대기자들과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31절에 나오는데,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예언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언하고 있는데, 그 예언한 내용이 누구를 예언했느냐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미궁에 빠졌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보니까, 옛날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예언한 그 당사자가 드디어, 그 당시 현재에 벌써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설교를 한다고 해서 어떤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팩트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게, 이게 아무소용이 없는 거예요. 종교를 갖는다는 게. 이미 인간은 하나님이 벌이신 이 팩트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 존재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윗이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 보통사람 같으면 내가 늙어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생각을 안 했다 이 말이죠. 그건 장차 오실 다윗과 예수님과 연결체제가 되어 있어가지고 자기가 무덤에 들어가는 것까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주께서 자기를 쓰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자기가 죽는 일까지. 늙어죽는 일까지 이게 다 버릴 게 아닌 거예요.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는 일을, 그 기능을 자기가 앞당겨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는 어디까지냐 하면 자기는 그냥 무덤에 대기하고 있는 그 일까지 자기가 할 일이고. 그리고 자기와 대조되면서 자기 일보다 능가하는 일은, 그것은 자기와 관련된 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무덤, 음부에 있지 않고, 육신은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부활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진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럼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설교를 보게 되면 무덤에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덤에 있지 않고 부활된다는 그것까지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렇다면 왜 다윗 본인이 알아서 부활될 수 없는가? 하는 그 문제. 에녹처럼 아예 죽음을 안 볼 수도 있는 문제인데, 다윗은 이렇게 실제로 죽음을 겪게 되는 것과,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될 때 무슨 근거로 부활이 되느냐, 그 내용은 안 나와 있어요. 그 내용은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누구의 설교냐 하면 사도베드로의 설교가 아니고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다윗이 무덤에 있어야 될 이유는 늙어서 무덤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죄인이기 때문에 무덤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괄적으로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이 죽는다고 할 때는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서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 역시 교회도 아니고, 이것 역시 종교도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죽음으로 간다는 말은 매일같이 뭘 짓는다는 말입니까? 매일같이 죄를 품어내고 있고, 죄를 드러내고 있고, 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죄를 짓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자기 죄책감에 힘들어하죠. 왜 힘드냐 하면 나는 죄를 안 지어야 되는데 죄가 나왔으니까 내가 책임져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다윗은 자기에게서 죽을 정도로 죄가 나온다는 말은,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나와야 될 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나온다는 것까지 무엇과 무엇의 재료가 되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는데 충족될 조건으로서 죄가 나온다는 거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봅니까? 우리는 조금만 불편해도, 조금만 사는 게 힘들어도 우리는 원망부터 먼저 하잖아요. 원망. 원망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나는 착한데 왜 나에게 벌을 주십니까?”라고 원망하죠. “나는 성실한데 왜 내 인생을 고생스럽게 만드느냐?”라고 하죠. 이것 때문에 원망하죠. 그 앞에, 그러니까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말은 평소에 뭐가 깔렸다는 말입니까? 나는 성실하고, 벌 받을 짓을 안 했기 때문에 벌 안 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행복해야 될 권리가 있는 사람이고... 그런 게 쫙 깔려있는 겁니다. 누가 그런 마음을 줬겠어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탄이 그렇게 인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몰아간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게 몰아가죠. 행복을 찾아서 교회 왔기에 그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충분합니다.”라고 하죠. 근데 우리는 사랑받기위해서 충분한 사람들이 아니라 저주받기위해서 충분한 사람들이죠. 저주받는데. 사랑받으려면 아예 이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고생을 안 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식 사랑한다면서 밥 굶기고 고생시키는 그런 부모가 어디에 있어요? 사랑한다면 사랑의 값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힘들지 않게 살게 해야죠. 우리가 지금 교회 다니면서도, 또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대하면서도 어느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지, 우리가 어느 장단을 더 좋아하고 있는지, 그게 바로 우리가 죄를 또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도바울의 심판이라는 것, 이 심판 속에 놓여있을 때, 그 자리에서만 구원이 보이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