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강-창 30장 9-13절(시녀를 통한 자식들)171213-이 근호 목사
118강-창 30장 9-13절(시녀를 통한 자식들)1712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장 9-13절입니다. 구약성경 43페이지입니다.
 
창 30:9-13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 언약이라는 것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세기 22장에서 또는 그 전에 언약을 제일 먼저 받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놓고도 그 약속의 축복된 자식이 시녀의 출신인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으로부터 된다는 것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시녀의 자식은 언약에 가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시녀를 통해서 경쟁적으로 자식생산에 나서는 겁니다. 라헬은 빌하를 통해서, 그리고 언니 레아는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계속 자식을 만들어냅니다. 기본적으로 이 아내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본인들이 자식이 없어야 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자식이 없어야 할아버지한테 이삭이라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거든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자식은 원래 없어야 될 자식입니다. 이삭이라는 자식이 태어나면서 뭐가 계속 같이 옆에 동행해야 되느냐 하면, ‘내 자식은 없습니다.’가 계속 동행하면서 이삭의 의미가 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을 때 먼저 아브라함과 사라 안에 들어 있는 비언약요소를 유출해 냅니다.
창세기 21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합니다. 5절에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이렇게 웃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웃음은 그 전에 농담으로 주어진 이삭의 이름이에요.
18장에 보면 천사 세 명이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입니다. 10절부터 보면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사라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농담인데 이 농담적인 요소가 언약 속에 필히 주된 내용으로, 요소로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한 죄인과 한 조를 이루어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복음이 되어버리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돼요. 이것은 엉터리에요. 내가 예수를 믿어버리면 천국 가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 예수 믿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라고 계속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안돼요. 예수를 믿으면 안 되고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끝까지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 계속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동행해야 돼요.
그렇게 될 때 그 둘을 합치는 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십자가 피, 또는 십자가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 사건 속에서 구원받은 인간은 뭐로 가입되느냐 하면, 믿지 못한 자, 아니 믿을 능력도 없는 자, 전혀 믿을 가능성도 없는 자.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자라면 인간은 뭐하고 있느냐?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거지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는 그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없는데서 만들었다, 하는 말은 대단히 부족한 말이에요.
하나님이 없는데서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있음을 창조했다는 말,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창조하지요. 하나님이 없는 것을 창조해요. 이게 이사야 45장 7절에 나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하나님이 없는 것을 창조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없는 것을 창조했다면 그 없는 것을 무(無)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없는 것 그 이전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인간하고 있는 하나님하고 같이 결부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이라는 것이 예수님도 훌륭하지만 믿는 인간들도 훌륭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용납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공로만 드러내려면 뭐가 반드시 천국에 포함되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일방적 공력에 대해서 티를 잡고 반대하고 반항했던 자들이 천국에 백성으로서 가담이 되어줘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자가 천국에 들어가 줘야 돼요. 안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 줘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어차피 믿는 자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안 믿는 자가 들어간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아닌 비언약적 요소가 언약을 형성하는데 필수요건으로 삽입이 되어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농담으로 여긴 겁니다. 언약이 계속 진척되면서 농담적인 요소가 병행해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농담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내가 한 몫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납득이 되는 한 하나님께 적극 협조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가 농담으로 응축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은 받아놓고 그 약속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내가 적극 가담하고 싶은데 지금 우리 태가 죽었다는 말이지요.
태가 죽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뭘까? 하나님의 약속에서 네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다고 했고 내가 거기에 협조할 사항은 내가 이 몸 가지고 뭘 하지? 그런데 내 아내는 이미 태가 죽었는데 시녀가 있는 거예요. 그 시녀가 하갈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남편에게 하갈을 줘서 자식을 낳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약간이라도 협력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거기에 동원하는 것이 시녀, 하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녀들을 동원했다는 이 말은 지금 두 여자가 옛날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농담했던 그 농담의 요소가 여기에 확장이 된 겁니다. 더 심화된 거예요. 언약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간이기에, 있을 수도 없는, 참 웃을 수밖에 없는 그 요소가 필수요건으로 언약구성에 들어가야 되기에 그 다음 언약, 그 다음언약에도 웃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요소가 반드시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시녀까지 동원시켜서 뭘 하느냐 하면,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겠다고 경쟁하는 거예요. 8절에 보게 되면,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알기에는 언약이란 거룩하고, 고상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나왔기 때문에 순결하다는 생각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
그 순결하다는 생각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본 사람은 상당히 의아해 할 거예요. 순결한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많이 지저분합니다. 여자 둘이 남편 하나를 두고 사랑하겠다고 질투하는 경쟁을 벌이면서 거기에 자식 이름을 ‘경쟁에서 이겼다.’ 해서 납달리라 붙였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자식은 엄마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엄마가 남한테 지고는 못산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면을 자식의 이름으로 굳혔다는 말은 자식의 운명이 곧 엄마의 지저분한 마음을 그대로 답습하게 될 팔자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그렇게 되니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하고 경건해야 될 그 언약, 막상 만두나 찐빵 속을 뜯어본다 할까요, 그 언약이라는 고상한 것의 내부를 뜯어보니까 인간적인 야망과 야욕, 그리고 그 자식 낳는 경쟁의 취지가 한 남자의 사랑을 두고 두 여자가 서로 싸워서 독차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이좋게 나눠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독차지하겠다는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야곱에게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내려온 하나님의 뜻이, 아, 세상에,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사람들 입장에서 납득이 안 되는 거지요. 대체 뭘 배우라는 말인가? 뭘 본받아야 되는가?
고상하기 짝이 없는 하늘의 것, 그런데 그 하늘의 것이 지상에 펼쳐지면 지상에서 고상하고 거룩의 극치를 보여줘야 되는데 거룩의 극치가 아니라 인간의 지저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하나님의 뜻이 기껏 이 정도냐 이 말이지요. 하나님의 고상함은 어디로 날라 가버렸습니까?
적어도 언약을 받은 가정 같으면 언약의 모습, 경건의 모습을 보이고, 거룩의 모습을 보여줘야 타의 모범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라는 자들이 서로 남편 사랑 차지하겠다고 자식 낳는 경쟁을 벌였다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첩이라도 하나 둘까요? 그렇게 할까요?
그럴 능력, 돈이 있어야 하지요. 돈도 없는 주제에 그럴 능력도 없고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그리고 돈이 안 따라주니 되지도 않을 이야기고요.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언약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을 고상하다, 순결하다, 언약의 내용은 순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 언약이 하늘에서 왔기에 깨끗할 것이라는 생각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봐야 되느냐? 삐딱하게 봐야 돼요. “하나님, 없는데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지요?” “그거 틀렸거든.” “어? 그게 왜 틀립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고 우리는 더러운데 하나님께서 깨끗한 것을 주셔서 하늘나라 만드는 그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네가 네 자신을 상당히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좀 삐딱하게 봐라.”
그 삐딱하게 봐야 될 대표인물이 야곱이에요. 야곱은 여기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애 낳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야곱은 언약에서 없는 존재에요. 이게 사실은 오늘 설교의 핵심 되는 이야기입니다. 없는 존재. 없는 존재라는 말은, 언약구성에 있어서 야곱은 사라져도 상관없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사라져야 되고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언젠가는 한 90 살다가 사라집니다. 그 때 우리가 사라지면서 우리는 왜 사라져야 되는가를 언약 앞에서 물을 줄 알아야 돼요. 그냥 남들과 비교해서 물으면 안 됩니다. ‘너도 죽으니 나도 늙어죽겠지.’ 이러면 여전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누구 앞에서 하느냐. 십자가 앞에서, 피 앞에서 자기 자신을 비출 때 “주여, 왜 저를 없애십니까?”라는 말을 할 때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망상 속에서 허황되게 잘못 보고 있다.”는 거예요. 너 자신을 삐딱하게 봐야 되는데 너는 너 자신을 보면서 제대로 된 놈이라고 보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고맙게도 야곱은 두 아내와 결혼했는데 두 아내가 야곱을 대신해서, 야곱의 속성을 대변해서 삐딱하게 자식들을 낳으니 야곱은 사실은 땡 잡은 사람입니다. 우리 언약 집안은 하나님이 인정해주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너는 복된 가정이다.”라고 지칭할 때, 우리는 분명히 복 받을 요소나 권리가 있기에 복 받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 해체시키고 삐딱하게 보게 하십니다.
네가 삐딱하고 복 받을 권리나 자격도 없는데서 비로소 복이 복 다운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땡 잡은 것은 뭐냐? 자기가 뭔가 알지 못하는 것을 두 여자가 들쑤셔서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근원을 폭로시켜주는 혜택을 입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고민이 많습니다만 인간의 근원적인 고민이 뭐냐 하면,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발견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입니다. 내게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분명히 내게는 없는데, 그것을 내가 뭔지는 모르는데 뭐가 내 앞에 새삼스럽게 나타낼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찝찝하지요.
굉장히 찝찝해요. 지금 이 모습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그런데 뭔가 다가 아니라.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그 낯선, 내가 모르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성급하게 자기 목숨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번개탄 피워놓고 죽는 그것이 자살이잖아요. 늘 미흡해요. 취미생활도 해보고 등산도 해보고 온갖 것을 해보는데, 내가 뭔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리는 그것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만약에 수능을 쳤는데 만점을 먹었다. 대구 어느 재학생이 수능 만점 먹었대요. 자, 여러분 본인이 수능 만점 먹었다고 봅시다. 수능 만점 나왔을 때 인생이 그게 다입니까? 기껏 그게 다예요? 방송이나 신문에서 사진 찍어 가고 유명해지는 그것이 다입니까? 수능 만점 그 지점에서 찝찝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이 기껏 수능만점, 이게 다일까? 아니야. 뭐가 있는데.’ 그걸 모르겠다니까요. 야곱언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하나지만 그림자가 열 두 개라는 거예요. 나는 하나인데 그림자가 열두 개에요. 우리의 상식에서 내가 하나같으면 그림자가 하나여야 되는데 그것은 언약 없이, 십자가 앞에 나서지 않을 때, 너는 항상 거울 앞에 서 있는 네 모습이 너의 전부라는 말이지요.
전부가 아니지요. 전부라고 내가 우기지요. 전부라고 우기는데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되면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내가 미처 아직도 발견 못한 이런 면이 있었나?’ 그런 것은 상황이 들이닥쳐야 ‘야, 내가 꼬리가 열 두 개도 더 되는, (아니 불여우는 꼬리가 열 두 개 더 되지요) 내가 꼬리가 2백 개도 더 달린 불여우였었나?’
그런데 2백 개뿐이겠어요? 2백 한 개는 어떻게 하고. 2백 개 달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2백 두 개가 그리워지고 2백 세 개가 되는 순간 2백 네 개가 그리워지는데요? 인간은 당최 자기 자신을 몰라요. 왜? 있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 없음을 창조하되 그 없음 이전부터 뭔가 있어서 없음을 창조하고 그 없음에서 있음을 새롭게 창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하는 그것은 사탄이 와서 이미 망쳐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디로 돌리는가? 없는데서 다시 있음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없음보다 더 작은 것, 아무것도 없는데 찝찝하게 뒤에 뭐 남아 있는 것, 그것으로 인도하는데 언약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거든요. 예수님에 의해서라고 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된 것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무를 창조했고 그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예요. 예수님이 없음을 창조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와 함께 있을 때, 범죄하지 않았을 때 그 때 아담과 하와의 상태는 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죄 있는 상태도 아니에요.
죄 있음의 상태도 아니고 의 있음의 상태가 아니라 죄 없음의 상태고 의 없음의 상태에요. 그 없음의 상태인데 선악과는 있었고 생명나무는 있었는데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믿으라고 한 게 아니고 “네 죄를 알렸다.” 하는 거예요.
네 속에 예수님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90까지 살면서 점차 색이 탈색되는 것처럼, 또는 모기약 뿌려놓으면 점차 옅어지는 것처럼, 안개가 피었다가 낮이 되면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나라는 이 자아가 엷어지고 사라져야 돼요.
전도서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우리가 있다고 우기는 그 나가 점점 더 그 두께와 폭이 엷어져서 습자지처럼 되었다가 나중에 나이 들면 군데군데 구멍 뚫리면서, 중력에 의해서 척추가 무너지면서, 우리는 결국은 숨도 헉헉거리면서 제대로 못 쉬고, 드디어 그동안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렸던, 예수님의 언약을 가렸던 우리는 여기서 사라져야 되지요.
사라지게 되면 남는 것이 뭐냐? 남는 것은 우리 속의 삐딱함, 어두움, 죄만 남아요. 구원받기는 내가 구원받아요. 하지만 어떤 나냐 하면, 죄가 있는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가 고개를 숙이고 내가 죄인이라면서 감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한테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사실은 죄가 있었는데 우리는 뭐라고 우기는가 하면 내가 있다고 우긴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를 자꾸 끄집어내거든요. 그 끄집어내는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사탄에 물든 이 자아가 극구 그것을 틀어막는 거예요. 예수 믿어줄게요, 교회 나가 줄게요, 십일조 할게요, 선교헌금 내겠습니다, 이제부터 순종하겠습니다, 자꾸 막다 보니까 누가 힘드냐 하면, 주님이 힘든 거예요.
그 막는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시녀를 통해서 약속의 자녀도 아닌 것을 자꾸 이스마엘로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없는데서 태어나게 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어떤 태도인가? “농담하십니까?” 웃음, 이름 자체가 웃음인데 아내까지도 둘 다 “농담하십니까?” 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설교할 때 그것을 심화시키고 더 깊이 있게 나간다고 했지요. 깊이 있게 나가버리면 이 시녀로 나온 농담요소가 아예 열 두 아들 속에 같이 섞여 버려요. 이젠 다 섞여서 그 전체가 언약구성체, 언약으로 구성이 되어버립니다. 언약으로 구성되면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인데 이스라엘나라는 처음부터 잠재적인 폭파성을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나라꼴이 처음부터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왜? 거기에 불길한 요소가 이미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요소가 바로 오늘날 우리를 대변해주고 있어요. 언젠가는 파괴되고 언젠가는 무너지는데 주께서 무너지라고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거룩한 율법을 준겁니다. 계속 법을 준 거예요.
어떤 분이 낮에 그런 질문을 했어요. 참 좋은 질문을 했어요. 십계명 열 개 중에서 다른 것은 좀 이해가 되는데 제 3계명,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그 계명이 뭡니까? 아주 나와 가까운 사람인데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일단 참 좋은 질문이라고 답변을 하고, 십계명은 밑에 보면 홈통이 있는데 그 십계명을 홈통으로 전부 다 모아보면 열 개가 아니고 하나의 계명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탐내지 말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 두 개의 사이에 다 끼어드는 겁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 다른 신이 어떤 신이고 어떤 신이 여호와인지 이야기를 안 해줬어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습니다. 사건만 있지요. 애굽에서 너를 건져낸 나 여호와, 라고 해서 사건만 있습니다.
사건이라 하는 것은 지나가면 그만이에요.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탐내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은 뭐냐? 네가 여호와를 믿고 싶어도 네 속에서 이름만 여호와지 다른 신이 뭘 보기만 해도 계속 탐을 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마저 다른 신으로 변경시키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요. 십계명 자체가 있는 현장에서 새로운 언약사건들이 그 다음부터 발생이 돼요.
그렇게 되면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는 또 다른 법이 있어요. 그게 제사법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이고 모세에게 또 다른 법이 있는데 그게 제사법이에요. 제사법은 피가 중심입니다. 죄 짓고 피로 용서받고, 죄 짓고 피로 용서받고, 이게 십계명 내용이에요. 십계명은 열 개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에요.
십계명 어떤 대목을 보더라도 너는 이미 다른 신을 쫓아가는 삐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5계명 지키고, 7계명 지켰다고 우기고, 4계명 지켰다고 우길 것이다. 그러면 결국 우상은 뭐냐? 나를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다 우상이 되고, 나를 위한 우상 같으면 옆에 있는 그 피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같이 잘났는데 피가 왜 필요합니까?
제사법에서 하나님의 이름, 주님의 이름이 제사법에 오기 때문에 피 흘림, 그 죽음의 현장에 하나님이 어린양으로 오셔야 되는 이유는 주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준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반대로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사도 지키고 십계명도 지키고, 바빠요.
이런 요소,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인간자체가 글러먹은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될 수도 없는, 글러먹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따라서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 속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죄를, 우리는 죄의 운반체니까, 내 속에 있는 죄를 의로 바꾼 그분이 우리 안에 있어야 돼요.
그분의 이름이 창세전에, 이 세상 있기 전에 있었던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줘놓고 그 아들과 차별을 두는 겁니다. 자식은 아들이 아니에요. 자식은 가짜 아들들이에요. 여기 열 두 명이 다 아들이잖아요. 다 아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자식이에요. 어떤 자식? 육의 자식들입니다.
시녀가 설쳐대서 나온 그런 자식들이에요. 이 말은, 반드시 인간은 시녀를 통하지 아니하면 자식이 될 수 없다. 시녀의 자식이 아니면, 종의 자식이 아니면 결코 아들의 자식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8장 14절, 15절에 나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기 전에 먼저 환경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뭐냐? 율법이었고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종의 자녀인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킵니다. 왜 우리가 시녀의 자녀라고 확정지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사람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음이 영원불멸적으로 있어야 된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런데 이러한 성질이 어디서 나왔는가? 두 여자 라헬과 레아가, 나는 자식이 있어야 남편의 사랑을 얻고 남편의 사랑을 얻어야 남편에게 주어진 복의 아내라고 자기 자신을 좋게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남편 야곱은 사라진 입장에 있습니다. 야곱이 사라지고 그 배후의 이스라엘이 태어나는 그 과정에 있는 것도 모르고 이 여자는 남편 사랑 얻겠다고 싸우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남편은 벌써부터 있으나마나 한 존재에요.
남편인 야곱은 어찌된 일인지 시녀를 주면 시녀하고 관계해야 되고, 본처는 또 본처하고 관계해야 되고, 끽 소리도 못해요. 끽 소리 한 것이 하나 있기는 있다. 라헬이 자기에는 자식이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보고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래서 야곱 입장에서는 뭘 아느냐? 그 대목 30장 1절에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언약의 내용이 지저분하다니까요! 순결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욕망과 욕망의 충돌이에요. 경쟁의 장이에요.
복을 따내는데 자기가 협조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천당 가는데 자기가 협조하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했어요. 야곱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수문 역할을 해요. 수문을 열면 자식이 생기고 하늘에서 문을 닫아버리면 물 안 흐르듯이 자식이 안생기고.
야곱은 하나님과 여자 사이의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여자 둘은 질투심으로 서로 싸우고 난리에요. 집구석이 희한하지요. 야곱은 사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은 받아놓았다고 치고. 그런데 무슨 축복이 자식이 전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서 네 명 준 거예요.
하나님이 태를 열어서 네 명 줬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태를 안 열어줬으면 결국은 무자식인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무자식이어야 해요.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보게 되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이게 언약의 최종완성단계입니다. 최종내용이에요. 그리고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언약의 이 최종상태를 알지만 모른다고 치고 오늘 본문 30장에 들어가게 되면, 여자 둘이 내가 자식을 낳겠다고 서로 경쟁하는 이 모습이…….
제가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것이 지저분한 것이고, 추잡한 것이고, 비언약적인 요소고, 육적이고 죄입니다. 이것은 농담의 요소가 개입되어서 그렇습니다.”라고 계속해서 일관되게 말을 하지만 성경 덮어버리고 갈라디아서 모른다 치고 우리 가정을 한 번 봅시다.
우리 가정에서 여자가 결혼해서 애를 가지겠다는 것, 여자로서 내 자식을 내가 갖겠다는 것, 그런데 자기자식을 못 낳아서 첩 들이고 첩이 자식을 가지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들의 가장 자연스러움이에요. 이걸 가지고 죄니 욕심이니 삐뚤어졌느니, 이렇게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왜? 자연 상태에서는 이 두 여자의 행동은 지적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 인간은 믿음이 없어요.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인간은 원래 믿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두 여자의 욕구나 우리의 욕구나 똑같습니다. 누굴 욕합니까?
여자가 시집와서 자식 많이 낳으면 남편사랑 받을 것이다. 남편은 자식 많이 낳은 여자를 사랑하고 그래서 그 여자가 주도권을 쥔다는 것.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것은 고개 끄덕이고 동조할 수 없잖아요. 두 여자의 투쟁에 대해서 우리가 동조한다는 말은 우리의 생각이 같다는 이야기에요.
이 여자들의 레벨과 우리 레벨이 같은 레벨이에요.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들과 사고방식이. 그래서 애 낳고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그 뜻을 담아서 이름을 계속 짓잖아요. 얼마나 고상합니까? 경쟁해서 이겼다, 억울함을 풀었다, 이런 것도 있지만 기쁘다, 복되다, 좋은 것은 다 갖다 붙여놨어요.
이게 바로 오늘날 교회 다닌다는 우리의, 신앙이라는 껍데기 뒤에 있는 우리의 욕망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식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자식이 없어야 마땅함을 알려면 나는 이 땅에서 자식은커녕 나 자신이 사라져야 돼요.
그리고 고맙게도 사라져주고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점점 더 나라는 존재가 엷어지고 있어요. 왜? 우리가 엷어져야 될 이유가 엷어지라고 우리 내부에 약속이 이미 장착이 되어 있으니까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나 자신을 뒤에서 발길로 차서 추방시키는 겁니다.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리고 우리 속에서 뭘 끄집어내는가? 죄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우리는 죄 짓는 기계였고 그 죄짓는 기계역할이 끝나면 우리를 없애고 죄를 끄집어내서 그 죄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언약, 이삭, 다시 말하면 약속의 아들이 그 죄를 뭐로 바꾸는가? 의로 바꾸면서 우리는 언약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흙에 속한 형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데요. 그렇게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는가?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그렇게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는가?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는데 우리는 평생 가도록 하나님의 사자 못 만나고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는가? 안 해주면 내가 과연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됩니다.
그 증거가 뭐냐? 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이렇게 시합을 하게 해놓고 나중에 그 열두 아들이 어디를 거치는가? 둘이 경쟁하다가 한 여자가 먼저 죽어요. 먼저 죽을 때 언니는 드디어 자식을 안 낳습니다. 하나가 죽었을 때 그것도 끝이나요. 죽으면서 낳은 자식 이름이 베냐민, 하나님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죽이는 작업인으로서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 내가 나이 많아서 죽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죽인다는 사실, 그분이 십자가를 모델로 삼아서 그 십자가의 작용을 내 안에서 반복시키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작업을 반복시킨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야곱처럼 언약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야 되고 그 죄 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인 것을 아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순결하고 고상해 보이던 언약의 내부를 살펴봤습니다. 인간적이라도 너무나 인간적이고 육적이고 욕망과 욕망이 마주하고, 욕심과 욕심이 충돌을 일으키는 그 현장이 바로 거룩한 언약의 내용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 작업을 일으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