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1208b 디도서3장9절(자기 증명)-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71208b 디도서3장9절(자기 증명)-이 근호 목사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적 영역과 비종교적 영역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매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죠. 바리새인들의 사상도 그거에요. 말씀을 실천하자. 그래서 자기들이 모범을 보이죠. 어떻게 모범을 보이느냐 하면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방법이 토라에게 있다고 본 겁니다. 내가 결심한 것이 하나님의 결심이고, 내 행위가 하나님의 행위가 되고, 내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가 되는, 그렇게 일치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사회가 신성화, 거룩한 사회가 된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사탄이 이야기한 “신처럼 되리라” 뭐, 이걸 그대로 구체화 한 거죠. 그래서 그들은 이 신성한 작업을 위해서 무엇을 강요하느냐 하면 ‘식탁’을 강요해요. ‘밥상머리’ 밥상머리,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식탁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 또는 예배를 드린다고 보면 돼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정통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해서, 뭐 그냥 아침, 점심, 저녁이라기보다 온종일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그렇게 해서 자기들은 하나님 일의 대행자로서 자신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성경에는 그것이 일일이 구체적으로 안 나와 있잖아요. 안 나와 있으니까, 토라를 확대시킵니다. 모세오경을 성문토라라고 해요. 글로 쓰여 있는 것, 성문 토라.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은 거기다가 구전 토라를 집어넣습니다. 구전토라라고 하는 것은 성문 토라를 해석하기 위해서 계속 역사적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누가 만든 겁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만든 역사기 때문에, 이 성문 토라의 내용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에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줬으니까. 이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된 그 내용, 그 지혜를 성문 토라의 해석법으로 계속 첨가하고 추가해야 된다는 거죠. 이 해석을 랍비들이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 랍비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본 거예요. 랍비여!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도 랍비여! 라고 했죠. 랍비여! 라고 하니까 뭐는 아니라는 겁니까? 최종적인 메시야는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합디다. 보통 랍비라고 하죠. 그래서 산상설교를 다 하고 난 뒤에 사람들이 그걸 듣고 놀라죠. 그 권세에. 가르치는 것이 기존에 가르치는 것하고 좀 다르다. 이 말입니다. 제가 많이 듣던 소리죠. 기존에 가르치는 것하고 다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기존에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헛되고 무익한 것을 가르친 거예요. 헛되고 무익한 것을. 하나님의 행위를 자기 행위로 증명하려고 한 겁니다. 그렇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더 치밀하게 율법을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내고 그렇게 하죠. 그런데 사람들의 문제는 이렇게 자기들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로 같이 보는 것에 있어서 뭐가 문제냐 하면, 그들이 이 짓을 한다는 겁니다. 생략한다. 생략. 생략하는 이유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잖아요. 그릇을 씻는다. 행동하면서 그냥 행동하는 게 아니고 이 행동으로 인해 생긴 어떤 결과를 상상하겠죠. 물로 깨끗이 씻으니까 우리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 되겠다. 성경, 토라에 의하면 말씀을 지킨 자에게 뭐가 주어집니까? 복이 주어지죠. 이 복을 은근히 기대하겠죠. 그럼 뭐가 생략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상상한 여기에 그들은 일방적으로 생략해버렸어요. 왜 생략했느냐 하면, 이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 주어진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잖아요. 변수들. 예를 들면 어느 교회에서 가스 배달하는 어느 집사가 예배시간에 늦었다. 그럼 목사님이 “예배시간이 11시인데 왜 자꾸 11시 10분에 오십니까?” “가스 배달하는데 오늘따라 차가 밀려서 늦었습니다.”라고 하면 목사는 “앞으로 일찍 오세요.”라고 하겠죠. 자, 그럼 11시 예배시간에 참석했다고 한다면, 뭘 상상하는 겁니까? 11시 참석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 되고, 지켰으니까 복이 오겠죠. 근데 11시 10분에 오면 어긴 것이 되니까 어긴 자에게는 무엇이 상상이 됩니까? 재수 없는 저주, 징벌이 또 상상이 되겠죠. 근데 뭘 생략했다는 말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차가 밀리게 했는지, 이런 것들은 다 생략해버렸죠. 모든 발걸음, 심지어 가스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가스가 중동지하에서, 사막지하에서 오잖아요. 그러면 뭘 생략한 거예요? 땅속에 있는 가스를 파내서 운반하는 파이프라인, 그 파이프라인을 조립하는 그 조립법까지 다 생략한 거죠. 그렇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들 아시겠습니까? 지금 그 사람이 가스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가스 배달로 생계를 하려면 가스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가스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스는 중동사막 지하에 있거나 안 그러면 우즈베키스탄 지하에 가스가 있다 이 말이죠. 시베리아에도 가스가 있잖아요. 있으면 뭐합니까? 그걸 미국의 금융투자회사에서 거기에 투자를 해가지고, 기계 돌려가지고, 어느 구멍에 있는지 모르니까 백군데 파다가 하나 나오면 횡재한 거잖아요. 그 백 군데를 팔 때, 그것을 팔 때 목사는 돈 얼마 냈습니까? 가스 배달하는 집사가 예배시간에 늦게 온다고 닦달하는 그 목사는 가스 뽑아내는데 얼마 투자했어요? 투자했어요? 투자한적 없죠. “내가 투자해서 가스 뽑아냈는데 왜 예배시간에 늦게 오느냐?” 뭐 이래야 생략이 되도 중간에 약간 덜 생략이 되잖아요. 근데 무조건 예배시간에 늦게 왔다고 하잖아요. 그 가스 배달 때문에. 그럼 그 가스 배달하는데 자기가 뭐 보태준 것 있어요? 가스를 수입했다. 대리점에 가스가 있다. 자기가 가스통 메고 3층까지 올라가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법이라는 것이 뭐냐 전부다 생략한 거예요. 생략. 어디까지 생략했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내가 상상한 데까지 그 중간은 다 생략한 거예요. 개구리가 뛰는 것 같아요. 펄쩍뛰는 거예요. 펄쩍. 펄쩍뛰어서 이정도 왔으니까 벌은 안 받겠지, 예배시간 11시 참석했으니까 벌은 안 받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가스 배달하는 집사가 정말 11시에 예배참석을 해서, “목사님. 예배시간 1분전에 왔어요.”라고 하니까 목사가 화를 내면서 “오늘 주차담당이잖아요. 10시 30분까지 와야죠.” 가스 배달하는 집사는 생략했어요. 지난주에 하도 닦달을 해서 11시까지 참석해야 된다는 거기에 집중하다보니 뭘 놓쳤느냐 하면 주차당번이라 10시 30분까지 와야 된다는 그걸 또 놓쳐버렸어요. 그러면 도대체 이 법이라는 것은, 결국 법을 제정하고 구전 토라와 성문 토라를 자꾸 만들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소경이 안 되고, 절름발이 안 되고, 문둥병자 안 되고, 창기 안 되고, 저주 안 받고, 지옥 안 가려고 지금 몸부림치는 거죠. 지옥 안 가려고 몸부림친다는 것은, 잘만하면 지옥 안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인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지옥 안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는 물세례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보자~보자~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착한가 한 번 보자~” 그냥 지켜보기만 했을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 친히 여기에, 죄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너의 일상에 어떤 처참하고 망가지는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거는 원래 너한테 일어나야 될 합당한 조치라는 거예요. 큰 낭패, 엄청난 큰 낭패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니가 상상한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모든 것이 처참하게 바닥을 쳤던 그러한 악한 사태라 할지라도 너는 거기에 대해서 입을 열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에 나오는 욥기라는 거예요. 욥기. 그리고 욥기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욥의 사정과 솔로몬의 사정이 반대잖아요. 욥은 살면서 다 빼앗겼죠. 솔로몬은 모든 걸 누렸습니다. 모든 것이 금으로 치장된 마당에서 여자가 천명이 넘어요. 그것도 남방여왕이 찾아올 정도로. 노는 레벨이 달라요. 여왕이 찾아오는 거예요. 여왕이. 요새 같으면 영국 수상이 찾아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랬는데 솔로몬 말년에 한 이야기가 뭡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늘 본문 디도서 3장 9절의 이야기에요. 모든 것이 무익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 이게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의 자기존재 증명은 할 필요도 없는 것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배후에서 시키겠어요? 내 행위가 주님의 행위와 일치된다고 우기고 싶도록 누가 배후에서 장난질을 칩니까? 누가 부추깁니까? 사탄이죠. 악마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일종의 우상 같은 거라서, 구약에서 헛되다고 하는 거예요. 우상을 헛되다고 하는 거예요. 악마도 헛되고. 유다서에 나오죠.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1장12-13절). 그게 바로 악마다 이 말입니다. 잡초. 나훈아가 부른 잡초. 그렇게 잡초 같은 거예요. 풀의 꽃같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살다가 늙으면 뿌리 채 뽑히잖아요. 뽑히면 다른 사람이 내가 살던 자리에 또 살아요. 나는 이미 뽑혀서 없어지고 광풍에 날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존재는 처음부터 잡초였어요. 갑자기 오늘 제목을 잡초라고 유혹을 받네. 인간은 처음부터 잡초로 태어나서 잡초로 살다가 잡초로 가는 겁니다. 헛되고 무익한 거예요.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헛되고 무익해요. 신자 인생이라고 뭐 오래가는 것이 아닙니다.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신자라고 해서 몸 건강하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잡초에요. 그러나 신자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가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죠.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남한테 우사당하고 수치당하고 놀림당하고 욕 얻어먹고,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살은 하지 마세요. 신자가. 당연한데 왜 자살해요. 살아있으면서 그 수치스러움을 계속 보여줘야지. 지가 뭐 잘났다고 자살합니까? 왜 삐져서 자살합니까?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니 원래 그래. 원래.” 아니,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한 뒤에 자살했습니까? 자살했어요? 아니면 감사했습니까? 그런 짓해서 복 받았어요? 저주받았어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복 받았기 때문에 간음한 그 여인 밧세바에게서 누가 태어났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잖아요(삼하12장 24-25절). 그 짓해서 사랑받았어요. 그 짓해서. 그게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방향이에요. 겉에 있는 것을 속으로,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주님의 강제력에 의해서 다윗은 속에 들어있는 것이 겉으로 나왔고, 나오는 그 과정에서 간음했고 살인했던 거예요. 겉으로 나오게 된 사람, 그게 바로 복된 사람이에요. 자기 주제를 아니까. 그런 사람이 또 있죠. 바로 사울.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잖아요. 스데반 죽일 때 죽이라고 선동했고. 그런데 그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어요? 복 받았죠. 복 받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자랑삼아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헛되고 무익한 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이제는 뭐다? 전부 다 배설물이에요. 배설물.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면 계속해서 우리 몸에서 뭐가 나오느냐, 우리 마음에서 ‘내가 착하다 내가 의롭다. 나는 수치 안 당해야 해. 나는 칭찬받아야 해.’라는 이런 배설물들이 계속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런 더러운 똥오줌에 근거해서 복 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그 생활들이 배설물로 나오게 했던 그 육이에요. 육이 녹아서 배설물이 된 겁니다. 근육이 녹아서. 뭐 어지간하면 다 녹았을 텐데 계속 나오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꾸 생략하죠. 자기 상상을 자꾸 생략하는데, 주님께서는 생략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제거를 해버려요. 제거하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 제거하면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제거하면 죽어야 되죠. 근데 제거해도 살아있네요.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하면서 계속 살아 있잖아요.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나는 날마다 죽으면 죽은 자가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근데 날마다 죽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게 계속해서 펄펄하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당신은 죽었다고 하면서 왜 살아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를 해요? “니 눈에는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걸로 보이냐?” 나한테는 누가 살아 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살아있다? 예수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예수님이 나를 죽이는 작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자기가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결국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준 것만을 우리가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준 것만을 우리가 증거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준 것에 의해서 우리의 옛날 육적인 고집이 계속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준 것이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죠. 주님이 우리같이 죄인 된 것. 우리가 문둥병자인데 주님께서 문둥병자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그 사실을 주신 거예요. 피죠. 피. 십자가 피. 피인데, 우리의 평소 모든 행동이, 육의 입장에서 본성이 뭡니까? 뭘 가려요? 자기의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죠. 자기의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예수님은 니가 못난 놈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럼 두 증명이 상충되잖아요. 그럼 성령께서 뭘 바깥으로 내보냅니까? “내가 이렇게 잘난 맛에 살았다가 완전히 개피(완전히 얻어터짐)봤습니다.”라는 그 점을 자꾸 바깥에 내놓는 거예요. 그 말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그 안에 내 잘남을 쫓아내는 힘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 힘이 뭐냐, “니는 오직 나의 피의 공로야”라는 원리가 계속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원리가. 자, 다 같이 배설물로 나가는 원리가 뭐냐 하면 자기존재 증명을 하고 싶어서 내가 이만큼 산 것은 누구 덕이다? 내가 열심히 산 덕이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이고, 그것이 주님 앞에서 착하다고 인정받아서, 주께서 복을 주셔서 살아있다는 것.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나는 착해서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결국은. 내가 의로워서, 의로운 만큼 이런 의로운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것 때문에 교회에 가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가 살아있는 것은 니 덕이 아니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예수님께서 너에게 계속 복음적인 일을 벌인 결과로 니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말이 참 어렵죠. 쉽게 하기 위해서, 흔히 아는 노래가사 하나 적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적어보겠습니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김민우가 불렀던 <사랑일뿐야>라는 노래입니다. 자, 이 대목을 한 번 보세요.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대를 만난 게 지금 현재지점이죠. 현재. 현재지점에 와서 그동안 많은 이별을 한 것이 누굴 위함이다? 지금의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선택적인 이별을 당했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주부노래교실 같으면, 다 같이 따라 해보라고 하겠는데 제가 지금 참습니다. 여기 그대에다가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얼마든지 찬송가처럼 되죠. 억지다 그죠. 내가 봐도 억지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별한 사람이 가족들이죠. 가족들. 친구들. 예수님의 피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런다고 이 노래가 찬송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억지는 하지 마세요. 누가 봐도 억지에요. 노래제목도 <사랑일뿐야>에요. 오직 남은 것은 사랑뿐이다 이 말입니다. 자, 이게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자기의 육적인 것을 배설물로 내보냈잖아요. 그럼 내보냈다는 말은 안에 뭐가 가동이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동이 되고 있죠. 그러면 이 가상내용대로 라면 이 사람이 이별을 하고 싶어서 이별을 했습니까? 이별도 한 두 번 하게 아니라 많은 이별을 했잖아요. 이별을 할 때마다 얼마나... 여자한테 명품가방 사주고, 놀러가서 음식 값 다 내고, 그런 것 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습니까?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내가 이렇게 했는데,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드나? 결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드나?’라고 하면서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 아!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그동안 자기가 예상을 못한 거죠. 그러니까 주께서 하신 일은 뭘 못한다? 예상을 하지 못하고,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뒤돌아보고 소급해보니까 주께서 좁은 길, 영생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가슴앓이 했던 숱한 세월을 소모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물론 이 여자가 최후의 여자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여자하고 또 이별하고 그 다음 여자를 만났을 때 이 노래를 또 불러요. 사랑은 항상 마지막 사랑밖에 없어요. 지나 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는 그것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항상 마지막 사랑이 사랑인데, 그 마지막 사랑은 항상 현재에 본인이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될 때,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어요. 이 구원이라는 것을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동행하신 분의 몫이에요. 그분의 숙제고 그분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그분 곁에서 덤으로 얻을 수밖에 없어요. 천국가기 위해서. 여러분 지난 온 세월을 한 번 보세요. 지난 세월이 오늘의 삶과 복음을 위해서 그동안 반드시 주께서는 배설물을 내쫓아야만 될, 내가 예상한 모든 것들은 다 십자가를 가린다는 이유 때문에 주께서 다 내쫓아야만 했다면, 지금의 사정에 대해서 우리는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것을 찬미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지금 현재 어떤 사람이냐 하면 복음에다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목숨을 계속 챙기려고 한다면 이 노래는 이조차도 무익하고 헛된 거예요. 아직 다 도달하지 않았어요. 아직은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마감이라고 하면 더 이상 내 생명, 내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지경이 되어야 돼요. 그 정도의 자리에 있어야 돼요. 내가 나를 위해서 살면 나는 개다. 이정도가 되어야 해요. 이 말은 뭐냐, 죽여주옵소서! 이제는 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억지가 아니고, 억지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고, 만세를 부르는 거예요.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이제는 주님을 바라는 것 이상 더 바라면 나의 바람은 죄가 됩니다. 더는 소용이 없어요. 더 바라면 죄가 됩니다. 어떤 지경이냐 하면 옛날에는 나를 위해서 사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사랑이 사랑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기에 이제 내 목숨은 내가 손 놔도 된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내가 이 시간 죽는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 십자가 옆에 있던 어떤 강도. 사랑이었죠.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사랑하기에 자기의 모든 것, 귀한 향수를 아낌없이 다 깨트려서 울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깁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반드시 상대가 있습니다. 결국 동행하는 주님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노래가사처럼 일어나지 않겠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16장 22절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이해되시죠. 그 이야기가. ‘아, 사랑이 사랑 앞에서 내 목숨, 내 생명을 따로 챙길 수 없는 지경이 돼야 그게 사랑이구나.’ 그리고 난 뒤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세요. 이해가 다 돼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 게 없으니까, 자기 것을 배설물로 다 내놓아버렸으니까, 그 순간에 사랑은 오래참고 성내지 아니하고, 성낼 건덕지가 있어야죠. 자기 게 따로 있어야 성을 내죠. 자기 게 없는데 뭐. 내 게 없는데 무슨 성을 내요. 누가 나를 욕하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우리는 기뻐하리로다. 자기 게 없으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오리를 가라고 하거든 십리를 가라. 겉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까지 줘라. 이게 이해가 돼요. 맹세하지 말라. 자기 게 없는데 뭘 맹세해요. 오른 손이 범죄 하거든 잘라버려라. 다 잘라버리세요. 죽겠다는데 뭐. 죽겠다는데 이렇게 자르면 아프고 저렇게 자르면 아프고, 뭐 그런 것 없어요. 죽겠다는데 이리 자르던 저리 자르던 관계없어요. 다 가져가세요. 죄 덩어리 다 잘라서 가져가세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죽겠다는데 뭘 염려해요. 죽겠다는데 굶어죽으면 감사하죠.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야기하는 그 기준점은 이미 이 세상에 주님은 떠나도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충분하게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자기 것을 지키는, 족보이야기나 변론, 분쟁, 율법의 다툼, 이런 것들은 다 무익하고 헛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한테 노골적으로 묻는 분은 없지만, 보통 그런 것들을 묻고 싶을 거예요. “목사님. 무엇이 법입니까?” 그러면 저는 늘 지금껏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냥사세요. 그냥 사는 게 그게 사랑의 법입니다. 그냥 사는 것. 왜 사람들은 그냥 못살까요? 내가 다칠까봐 겁나서 못살아요. 내가 다칠까봐. 내가 다칠까봐 겁나서 못산다는 것은 법을 지킬 때 또 생략해버려요. 나한테 유리한 것만 지키고 불리한 것은 다 생략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를 자기가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게 돼요. 주님의 은혜를 누락시키면 남는 것은 뭡니까? ‘역시 내가 정신 차려서 제대로 행동하니까 이런 복을 받지.’ 결국 모든 공로가 자기 잘난 맛에서 나와요. 자기 잘난 맛에서. 항상 자기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이 어려울 때는 행동을 조심하게 되고 성경도 보고 그러는데, 뭐든지 넉넉할 때는 ‘야, 집안의 돈이 이렇게 남아도니까 어지간한 벌은 좀 받아도, 몇 천 만원 날아가도 몇 십억이 있으니까 농땡이 부려도 괜찮겠네. 좀 매 맞아서 없어져도 괜찮겠네.’라고 하죠. 그럼 교회 안 나오죠. 왜? 교회 안 나가서 매 맞아도 여유분이 있기 때문에. 느긋해요. 아쉬운 게 없어요. 아쉬운 게 없다는 말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스스로 법 만들어서 그 법을 지켜가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그다지 피해보지 않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죄인 됨을 가려버리는 행동이라니까요. 그게. 10절에 봅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왜 멀리 하느냐 하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누가 허락했습니까? 주님이 허락했어요. 그러면 이단이 왜 발생되고, 이단이 왜 설치고, 사탄의 종들이 왜 설쳐댑니까? 그거는 우리가 이 세상에 미련두지 않기 위해서, 이 세상한테 나 알아달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내가 또 부각돼요. “나 바른 복음 전한다. 알아 달라.” 이러면 내가 지금 억울해서 못 죽어요. 남이 좀 알아주고 괜찮은 존재되고 난 뒤에 죽어야 한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단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꾸 유명해지려고 하는 거예요. 유명해지려고.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거잖아요. 유명해지는 거예요. 사탄이 예수님한테 이단 되라고 부추긴 장면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두 번째 시험이 뭐냐 하면 니가 위에서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진짜 말씀대로 하는 메시야가 왔다고. 사탄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유혹하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사탄의 마음을 그대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아, 메시야가 와서 진짜 하늘을 날아다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안 아프고 천사들이 말씀대로 탁 받쳐주게 되면, 그런 메시야 같으면 내가 진짜로 정말로 믿는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 메시야관을, 사실은 일반인이 아니고 일반인 뒤에 숨어있는 악마가 개인적으로 다 그걸 심어준 거예요. 심어주니까 소위 교회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평소의 생각이 뭐냐 하면, 아, 살기 빡빡한데 주께서 뭐 기적적으로 해서 어디 취직자리 좋은 데 안 주나, 월급 많이 올려주지는 않나, 지금 내 딸이 시집을 안 갔는데 누가 멋진 남자, 키 크고 성격 좋고 돈 되고, 3종 세트 아닙니까? 키 크고 성격 좋고 돈 되고. 키 커야 자식들이 키 크고 성격 좋아야 자기한테 푹 빠지고 돈이 돼야 자기는 돈 쓰는 재미로 살 게 아닙니까? 이 세 가지 아닙니까? 키성돈(키 크고 성격 좋고 돈 되고). 키성돈 말고 뭐 있어요?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 관계없이 여자들이 시집갈 때, 지금 여자들을 말하는 것은 20대, 30대, 40대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50대, 60대 다 마찬가지에요. 70대 할머니가 새롭게 시집가고 싶은데 어떤 할아버지를 원합니까? 키성돈. 70대 할머니라고 다른 게 아니라 마찬가지라니까요. 마찬가지. 남자는 무조건 이이이~! 이쁘고! 이쁘고! 이쁘고! 육의 본성이거든요. 육의 본성. 이단이라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남들의 욕망에 짝을 이루고 싶은 거예요. 왜? 자기 증명이 되려면 증명 받을 타인들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킬리만자로 산에 혼자 가서 결혼할래요? 혼자서 살림할래요? 하필 그 멀리 가서 아무도 없는데? 또 몰라? 세상 버리면 그리 될지. 대부분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돈 꽤나 자랑질 하는 곳에 살아서 남에게 부러움을 사고 싶은 거예요. 이게 악마가 심어준 본성이 그거에요. 우선 안 죽어야 되고, 이왕 사는 것 인기가 있어야 되고, 이왕 사는 것 세상 모든 것을 내 소유로 삼고 싶은 것이,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의 내용입니다. 마귀가 시험했다는 말은, 그 마귀 말을 듣지 말고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공유된 이데올로기로 보면 돼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념이라고 보면 돼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와요. 아까 잡초라고 했잖아요.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오면 그냥 못 빠져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못 빠져나온 데에 합류하신 분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원이 되면서 내 속에 있는 그러한 악마적인 심성, 속에 있는 죄가 이제는 어디로 나온다? 밖으로 나오죠. 밖으로 나오면서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다윗처럼. “하나님. 제가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 말은 맞지만 그것은 십자가로 한 번이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거든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냐? 여러분 법이라고 하는 것은요, 갈수록 점점 더 세밀해져요. 갈수록. 예상 못한 세밀함이 어떤 현장에 가면 또 거기서 새롭게 또 만들어져요. 죽을 때까지 계속 만들어져요. 아주 세밀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떤 집에 불이 났는데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뛰어들어서 불난 집에서 열 명을 건져내고 자기도 시커멓게 되어서 나왔다고 칩시다. 마지막으로 살아 나와서 사람들이 카메라 찍고 열 명이나 건졌다고 환호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사람이 힘들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실 게 아닙니까? 물을 마신다고 칩시다. 물을 마셨는데, 옆에 있는 부인이 하는 말이 고함을 지르면서 “내가 물 마실 때 흘리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물 마실 때 흘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 그걸 지금 따질 군번입니까? 그걸 따질 상황이에요? 지금 죽을 뻔하고 사람을 열 명이나 구했는데? “그러니까 남들 앞에서 물 하나도 흘리지 말고 똑바로 마시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데!”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 열 명 구하고 그 다음에 정신 바짝 차려서 물 흘리지 말아야 된다. 흘리지 말아야 된다. 이래야 온전한 의를 이루는 겁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큰일을 하고 훌륭한 일을 해도, 그걸 파고 들어가 보면 변변치 않고, 법에 위반되는 것이 20개 100개 1000개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MBC기자가 “어떻게 열 명이나 구했습니까? 힘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아이고, 정말 힘들었지만 한 명이라도 구하는 것이 내 목숨보다 중요했습니다.”라고 이렇게 했는데, 그걸 보고 CBS기자가 당신 말할 때 행동을 왜 똑바로 안 하고 옆으로 했냐고 또 말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목사님 너무 과장 아닙니까? 남이 어떻게 그렇게 따지겠습니까?”라고 하는데, 남이 따지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따진다니까요. 본인이. 그때 열 명 구하고 물 마실 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드디어 어떤 사람이 열 명 구했다고 나올 때에, 그 사진 찍을 때 각도가 48도였어요. 45도면 인물이 괜찮게 나오는데. 본인이 그걸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약간만 옆으로 돌릴 걸.’ 이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이게 심리에요. 잘했는데 뒤돌아보게 되면 후회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한두 가지가. 그때 이왕 잘난 것 좀 더 잘날 수 있었었는데. 공부 잘해서 졸업식 때 우등상 받을 때 엄마는 우리 딸 잘했다고 하고 있는데, “야야! 기쁘지?” “엄마. 안 기뻐 화가 나.” “왜?” “평소에는 바지 입었는데 오늘은 내 다리가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치마 입혔어?” 이러고 있다고요. 생각이 딴 데 가 있어요. 다리가 예쁘지 않아서 평소에는 바지 입는데, 지금 엄마가 우겨서 치마를 입었는데, 자기가 그 사진을 아무리 봐도 다리가 안 예쁘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예수님은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찾아왔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신경을 어디에다 쓰고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예쁠까?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하면 내가 갖고 있는 명예는 추락이 되고, 내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꺼리가 박탈되면 나는 우째 살지? 이렇게 나한테 손가락질 하면 나는 못산다. 못살아.’ 지금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 이게 마귀가 우리한테 심어준 거예요. 니가 신처럼 되리라고. 그게 이단이에요. 그러니까 이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단을 멀리하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이 돼요? 정말 복음을 위해서 목숨 던진 사람만 이단이 나와요. 다른 사람은 이단인지 삼단인지, 자기도 이단이면서 무슨 남을 이단이라고. 똑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이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11절,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여기 죄라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 다시 말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예수님 피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죠. 그 다음에 12절,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내게 보내리니” 여기 두기고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사도바울의 편지배달부에요. “그때에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니고볼리는 지명이고, 과동, 거기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했다. 자, 이것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편리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건 복음을 위해서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는 주의 사도라고 명백하게 밝혔어요. 자기가 주의 사도라고. 그리고 사도가 하는 이 모든 일은 사실은 사도가 아니고 주께서 장기 알을 옮기듯이 이리저리 지금 옮기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들도 자기가 하는 행위를 이거는 내 이익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말이죠. 이 사도바울을 보면서. 그 다음에 13절,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교법사 세나는 누군지 모르고요. 아볼로라는 사람은 말씀을 잘 증거 하는 사람.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을 한 번 볼까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이래 되어 있죠. 이 사람을 이번에는 어디로 보내느냐, 14절,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시 그레데에 파견시켜가지고 사도바울 대신 복음을 전파하도록, 디도를 돕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15절,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자, 디도서가 끝나는데요.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은혜가’ 그 다음에 무슨 말이죠? ‘너희’죠. 너희가 누구냐 하면, 그러니까 누구, 누구를 지칭하지 않고 너희라고 한 것은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일임하느냐 하면, 너희 됨을, 성도의 성도됨을 이거는 주님께 일임하는 거예요. 다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사도바울이나 성도들은 공통점이 있다는 게 뭐냐 하면 항상 주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은혜가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다? 속에 있는 죄가 바깥으로 노출된다는 뜻이죠. 그건 다른 사람은 몰라요. 본인만 알아요. ‘내가 이렇게 죄인인구나.’ 그래서 이 세상 어떻게 살더라도 칭얼대지 말고 분내지 말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게 아니라, “참 내가 봐도 지루하지만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살리는 것도 주의 복음을 위해서, 죽이는 것도 주의 복음을 위해서 하시옵소서.”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나 죽으나 누구 것이다? 살아있어도 내 것 아니고 죽어있어도 내 것 아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을 그렇게 바꿔야 돼요. 살아있을 때도 내 것 아니고 죽어서도 내 뜻대로 죽는 것이 아님을 믿는 거예요. 오늘 밤에 죽더라도 낙원가면 되니까. 늘 우리는 갈 데가 있어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죠. 그럼 지금 이 땅에 사는 것은 남의 동네에요. 남의 동네에 사는 거예요. 남의 동네에. 예를 들면 저기 멀리 동탄에 아파트가 하나 있다. 예를 들어서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가 하나 있는데 이 동네 신월동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러면 아는 사람이 보고 “왜 너희 집에 안 가고 여기에 있느냐?” “갈 거야. 갈 거야. 해지면 버스타고 동탄까지 갈 거야.” 이게 뭐냐 하면 “니 예수 믿고 왜 그리 사나?”할 때, “갈 거야. 갈 거야.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 하늘에 갈 거야.”라는, 그런 넉넉함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모세가 애굽에 살았습니까? 아니면 광야를 지냈습니까? 모세는 애굽에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그러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상, 약속의 땅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약속의 땅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라고 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가 있던 그 장소에.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 마지막으로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기도제목으로 내걸었던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세상을 농담으로 살아야 돼요. 농담으로.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심각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동네거든요. 여긴 신월동이잖아요. 자기 집은 동탄에 있고. 우리의 시민권은,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땅에서 구경이나 한 번 해볼까?’ 이렇게 어슬렁거리면서 살아야 되는데, 오늘 어슬렁거리지 않고 바쁜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어차피 잘 살아봤자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