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17 부산강의 (50인의신학자) 3 삼위일체논쟁
20040517 부산강의 03 - 삼위일체 교리의 배경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한윤범 목사
삼위일체, 그리고 헬라철학과 영지주의 !!
오늘은 지난 시간에 약속한 대로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라는 것이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그게 "삼위일체를 만들자. 삼위일체 이론을 조직하자" 라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삼위일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두 가지의 외부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영지주의고, 또 하나는 헬라철학이었다는 겁니다.
헬라철학과 영지주의, 이 두 틈바구니에서 기독교는 "저것과도 다르고, 이것과도 다르다" 라고 내세우다가, "다르기는 뭐가 달라?" 라고 하면서 그만 붙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논쟁을 붙어보니, "이러니까 다르지" 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이론들을 거기서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내놓으니까 그것이 그만 삼위일체가 돼버렸다는 겁니다.
이런 삼위일체 형성과정에서 교회가 신경을 쓴 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겁니다. 특별히 영지주의를 의식해서 말이죠. 그러면 영지주의에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 그러면 그 교회의 말이 무엇인지, 그것을 한 번 내놔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뭔가 규격화된, 즉 "성경은 이렇고, 하나님은 이렇고, 예수님은 이렇다" 라는 것을 일단은 내놓고 나서, 그리고 나서 "이것을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는 소리를 하든지 해보라는 말이죠. 하지만 교회가 어디 한 두 군데도 아니고, 그러니 의견도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삼위일체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교회가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즉 "교회에 가입하라. 교회에 들어오너라. 교회는 믿을 만하다" 라는 것인데, "너희들이 교회 바깥에서 따로 연구해봐야 실패할 확률이 많은데, 하지만 교회만큼은 안정성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교회가 안정성이 있다고 하는 이론이 무엇인가? 어떻게 안정성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라고 하니, 그러자 교회가 "그래,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뭔가를 내놓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서, 교회 바깥에서의 싸움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너희가 내놓은 것이 맞기는 맞는 것인가?" 라고 하면서 안디옥 신학과 라틴신학이 제대로 붙었다는 말이죠. 이러한 "누구의 것이 맞는가?" 라는 정치싸움에서, 안디옥 신학은 패배하고 라틴신학이 승리하게 되었는데, 결국 라틴신학이 정립한 신학이 옳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 삼위일체뿐만이 아니고, 교회의 예배, 제사, 제도 등등, 그런 모든 것이 라틴 신학에서 출발해야 정통이 된다는 겁니다. 마치 전자제품은 삼성에서 만들어야 정통인 것처럼 말이죠. 아닌가요? (ㅋㅋ)
이제 정통은 라틴신학 !!
아무튼 모든 것은 라틴신학이 되는데, 그렇게 한 번 승리를 하자, 그 승리한 자가 지금까지도 승리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중세신학은 이런 라틴신학에 대한 회귀인데, 즉 "라틴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자" 라는 운동이란 말이죠. 그렇게 돌아감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루터와 칼빈의 경우에도 "우리가 바로 라틴신학과 맥을 통하는 진짜 정통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뒤에 교회가 중세철학을 하나의 관념론으로 여겨서 밀쳐버리고, 이제 중세신학은 확립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칼빈과 루터에 의해서 말이죠. 그래서 신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건드릴 것이 없고, 그때부터는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발달시킬까?" 라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학을 어떻게 발달시키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중세신학을 얼마나 자세히 푸느냐?" 라고 하는, 그리고 그 나머지 여력이 지금 21세기 신학까지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신학은 루터와 칼빈의 틀을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물론 칼빈은 루터에게서 배웠고 말이죠.
그래서 소위 과학을 주장하고 철학을 주장하는 자들도, 전부 신앙에 관해서는 루터주의고 칼빈주의를 그대로 추종하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천주교도 칼빈과 루터와 똑같은데, 그리고 교회관도 마찬가지인데, 놀랍게도 말이죠. "우리가 너무 독선적이었다. 그러니 회개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과학시대는 개혁주의가 대세 !!
왜냐하면 지금 대세가 과학시대인데, 이미 과학시대에 들어갔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이런 과학시대에 적합한 것은 개혁주의이고,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신학이나 루터까지 합쳐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런 개혁주의 신학이 과학시대에 맞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오늘 처음 참석한 분들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언급하면, 그게 다음과 같은데 말이죠.
개혁신학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의 구원받는 계시는 성경에서, 그리고 사회를 문명을 발전시키고 진보하는 것은 성경 바깥에서이다. 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미 끝난 문제인데,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길을 내놓았는고 하니, 칼빈이 그렇게 냈다는 말이죠.
칼빈은 말하기를,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 세상에 나가서 하라" 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하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각자의 직업이 바로 소명이라는 겁니다. 목사라는 것은 성경의 전문가지만, 과학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말이죠.
아담 스미스, '시장이 곧 신이다 !!
이게 18세기부터 본격화가 되는데, 사실은 그 이전부터지만, 18세기부터 이미 단언한 것이 "진보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모든 게 진보한다는 말이죠. 18세기 중엽에, 아마 1776년이지 싶은데, 아담 스미스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땅에서 무엇이 신인고 하니, 시장이 곧 신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시장, 마켓, 이런 것이 신의 흔적들이라는 말이죠.
그 이전까지는 무엇인고 하면, 국가가 곧 신이었는데, 그러면 "국가가 발전한다고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옛날에는 국가가 발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망발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발전하면 안 되는데, 국가는 산처럼 푸근히 안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죠.
국가는, 신의 대리자 !!
'국가'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영토를 신의 대리자로서, 그러면 국가가 신의 대리자라는 게 어디에 나옵니까?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오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신의 대리자인데, 로마서 13장을 보세요. 국가의 권세자는 신의 사자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니 국가가 발전한다는 것, 국가가 변화해서 앞으로 발전할 여지를 갖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만약 국가가 발전하고, 그럴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잡혀왔는데, "당신을 국가의 법에 의해서 처단하노라" 라고 하면, "웃기고 있네. 국가가 발전한다면서? 너희들이 알기는 무엇을 알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조순형씨는 "역사가 승리할 것이라"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러니 국가라는 것이 권위를 가지려면, 신적 권위가 있어야 권위를 가지는 것이고, 이 신적 권위라는 것은 유동성이 아닌데, 즉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중세시대의 국가는 턱하니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십자가 운동을 왜 벌렸습니까? 가짜 국가와 진짜 국가와의 싸움인데, 진짜 국가를 위태롭게 할 것 같으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의 국가는 결코 둘이 될 수 없는데, 물론 그 당시에도 영주들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프랑크 왕국과도 같은 무슨 무슨 왕국들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 왕국들은 결국 어디에 매이느냐 하면, 영원한 왕국, 즉 '교회' 라는 왕국에 다같이 매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시장'인가?
그런데 이것이 근세에 들어오게 되면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를 했듯이, 신이라고 하는, 즉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것은 마켓, 즉 시장이라는 겁니다. 그가 왜 시장이라는 말을 했냐하면, 각국이 식민지를 개발하다 보니까, 그것은 국가를 신이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경영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왜 국사를 경영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종의 회사처럼 경영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다 보니까, 힘의 우위에 있어서 밀리는 쪽의 나라가 생기고, 앞서 가는 나라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밀리는 쪽과 앞서 가는 나라가 생겨버리면, 여기는 뭐냐 하면, 물론 자급자족하게 되면 남들이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게 교역이 돼버리면, 저쪽에 나라에 있던 값이 싼 물건들이 이쪽 나라에 오면 고가로 팔리게 되는데, 그러면 돈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점점 더 선진국과 후진국이 차별이 심화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국민들 입장에서는, 같은 외국의 제품을 사는데 영국에서는 5달러 주고 사는데 프랑스에서는 10달러 주고 산다면, 그러면 프랑스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왕은, 그 당시의 국가 경영자 !!
그 당시가 되면 왕이란 개념은 뭐냐 하면, '경영자'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영자를 지목하는 사람은 상공인들이 중심이 된 의회인데, 그게 민주주의인데, '의회 민주주의' 라는 말이죠. 그 당시에 남자들이라고 해서 투표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투표권은 의회에 있는데, 그들이 투표해서 왕을 쫓아내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무엇을 봅니까? 왕이 국가경영을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본다는 말이죠.
스페인의 경우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금을 캐서 금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런데 독일의 경우에는, 물론 그때는 독일이 아니고 보헤미아인데, 그리고 덴마크와 같은 경우에는, 공사를 하려면 일꾼들에게 임금을 줘야하는데, 그런데 그때는 돈이 곧 금이라는 겁니다. 돈의 가치가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금 덩어리의 함량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에 금이 많다고 하면, "여왕님, 돈을 좀 빌려주세요. - 이자는 얼마를 줄 건데? - 예, 10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 알았어" 라고 하면,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점점 더 종속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하면서 왕에 달려들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러니 국가경영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시장에서 제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교역을 하는지, 즉 "어떤 위치에서 교역이 되는가?" 라고 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국가경영의 문제 때문에라도 진보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진보를 하려면 기술과 과학이 발달해야 한다는 말이죠.
과학의 발달과 종교개혁 !!
그렇게 기술과 과학이 최초로 발달한 나라가 프랑스였고, 그 다음이 영국, 그렇게 나오거든요. 그렇게 기술과 과학이 발달해서, 그것이 나중에 자본으로 형성이 되고, 그렇게 자본을 가진 나라는 진보하게 되어있는데, 반드시 발전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발전하면서, 그러면 종교개혁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바깥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다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되, 그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현장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보의 제일 끝에 있는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진보에 진보를 거듭해서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는데, 지금은 그 중간과정에 놓여있다고 하면, 그 중간과정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작용을 합니까?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작용을 하는데,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디입니까? 그게 교회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시장' 이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손, 시장 !!
그래서 시장과 가까이 결부되어 있는 사람은 돈을 벌고, 시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시장과 무관한 사람은, 즉 촌에서 농사만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적게 받기 때문에, 그래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상공인이 된다는 것, 기술자가 된다는 것, 과학자가 된다는 것, 전부가 다 돈과 결부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가 하나의 자본가가 되는데, 중세 때는 교회가 지주가 되지만 이제 중세를 넘어서 근대에 들어가면, 교회가 돈놀이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돈이 있는 것이 곧 축복이기 때문에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돈이 있어야, 그게 축복이라는 겁니다.
칼빈의 신학에 의하면, 열심히 근면하게 절약해서 돈을 버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신의 축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부자는 축복을 받은 자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서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 차별성을 무시하지 말고, 이것을 계속 권고하는 쪽으로 국가행정이 움직이게 될 때, 그 국가는 대다수가 아닌 100퍼센트 신자인 그들로부터 호응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왕은 무엇이 되느냐 하면, 백성들로부터 신의 사자로서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는 겁니다. 즉 카리스마를 인정받게 된다는 말이죠. "왕이 하나님의 뜻대로 국가경영을 잘 했더니만, 이렇게 우리나라가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사는구나. 그러니 당신이 바로 신의 뜻이요, 당신이 바로 신의 사자요, 신의 대리자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얼마든지 그렇게도 이야기할 수가 있기는 있는데, 대관식을 할 때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이 신의 대리자가 아니고, 국가를 얼마나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고, 진보시키느냐에 따라서, 그런 것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진보' 라고 하는 것은 그냥 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