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1b 울산강의-레위기 16장 : 대 속죄일
20171201b 울산강의-레위기 16장 : 대 속죄일(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국지적으로 종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계시가 마지막 때 예수님 오셔서 전 우주로, 전 지구적으로 확산됐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이스라엘 자체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느냐 하면, 믿음에 실체가 없다고 했잖아요. 없는 실체를 안 믿는 실체가 대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줬지만 그들은 믿지 못해서 망했다는 이스라엘 자체가 믿음의 실체로 등장하게 돼요. 그러면 믿음의 대표자가 돼야 될 이스라엘이 불신의 대표자가 된 겁니다. 불신의 대표자에 의해서 밀침을 당하고 죽게 된 그분이 이 땅에 나타난 믿음의 실체가 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몸을 믿는다면 신장은 얼마, 체중은 얼마나 되고,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느냐? 이런 것으로 믿음의 실체를 보려하는 데 그게 안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거거든요.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에요.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의 이름, 다른 말로 주의 이름을 믿어라. 예수 자체가 이름인데 이름의 이름을 믿어라? 또는 주의 이름을 믿어라. 이 말이 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의문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실만한 곳에 그 자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겁니다. 제단을 위해서 한다든지, 하늘의 하나님을 위해서 맹세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실체 없는 신앙의 내용을 성경을 통해서 보충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렇게 보충하고 애를 썼던 그들이 결국은 불신앙의 대표라고 했지요. 바로 그것이 대표적인 불신앙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새롭게 알아야 될 것은 불신앙이라 해서 교회 유리창 깨는 게 불신앙이 아니고 교회 충실히 다니고 하나님 열심히 믿고 예수 믿는 그들이 불신앙의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육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하라 하면, 나도 내 행함으로 똑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믿게 되면 그게 바로 대표적인 불신앙이에요. 감사헌금해서 복 받았다. 그럼 나도 감사헌금해서 복 받고. 십일조 해서 복 받았다면 십일조해서 복 받고. 이게 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했던 대표적인 육이 되는 겁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영을 육으로 규정되고 규명이 된다면 처음부터 영이 아니었고 육이었다는 거예요. 영의 결과, 이렇게 하면 영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영은, 육의 변양, 육을 주무르면 영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육이 또 등장하는 거예요. 육은 계속해서 성령의 일, 예수님의 일을 발명해내요. 제작해낸다고. 그래야 사업이 되니까. 종교 사업이 돼요. 그 일을 이스라엘이 해왔던 겁니다. 지금껏. 성전을 말하니까 성전 보존했고, 율법 주니까 율법 지켰고. 인간이 너 하면 나도 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함을 전부 다 거기다 집대성한 겁니다. 그런데 그 행함 중에서 영은 없었던가요? 없었습니다. 왜 일괄적으로 누가 봐도 영적으로 보이는 데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일방적으로 육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그 근거가 로마서 9장에 나와요. 이스라엘은 법을 쫓아간 이유 때문에,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중요해요.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그 부딪칠 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게 해서 영을 유발해내는 모든 육은 결국 육일뿐이고 행함일 뿐이라는 것을 딱 걸려 넘어뜨리게 만들었어요. 마태복음에 보면 모든 행함을 깨어버리고. 모든 행함을 다 깨버리니까 내가 행했음이 나와요. 나의 의지, 나의 결심, 나의 선택, 나의 각오, 나의 집착, 나의 집념, 나의 경건, 나의 거룩됨, 이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은 바로 중보자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거기에 도발하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은 없어요. 우리 각자의 이름, 나의 이름, 집단의 이름, 인간의 이름을 인하여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는 그 이름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을 부르려면 뭐가 전제돼야 됩니까?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살아계심이 내가 부인할 수 없는 내 명예와 위신과 체면과 나의 개인사, 인생사 모조리 그것을 죄로 규정시키면서 나오는 결과물로 주님께서 하셨다고 할 때 이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절대로 인간의 능력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이걸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했어요. 이 과정을 거쳐야 돼요. 다른 사람은 똑같이 들립니다. 성령에 의한 예수 부르는 거나, 육으로 까짓 것 예수 부르면 되지, 라고 부르는 것을 분간 못해요. 하지만 열매를 보면 압니다. 자기의 모든 것이 죄라고 아는 사람은 성령이 온 사람이고, 나도 인정해달라고 요청할 때 자기는 믿음 있다고 요청할 때 남들의 평가와 견해를 아쉬워하면서 자기 신앙, 자기 구원받음을 과시하는 것, 구원파가 대표적이죠. 구원파내지 청교도, 이런 자들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에요.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됩니다. 그런 사람이 가짜에요. 가짜의 특징은 뭐냐? 항상 구원에 집착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남의 구원에 집착하는 게 아니고 내 구원, 아무리 해도 자기 구원을 포기 못해요. 나를 잃어버리면 모든 걸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설교자들의 문제점이 단순히 복음을 모르는 정도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은 이 땅에서 자기가 살 권리가 있다고 강변하는 그것이 문제에요. 우리가 정말 성령이 와서 죄인 같으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자기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으로 살아가는 거죠. 성령을 받았으면, 살고 죽는 것이 내 손에 달린 게 아니에요. 집에 가다 졸음운전 하는 차가 받으면 난데없이 죽어버리잖아요. 살고 죽는 것이 내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소원 때문인데 교회 오는 사람들 특징이,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까, 라고 마치 자기가 그런 권한이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고 교회 나와요. 꼭 절에 가는 사람과 똑같아요. 다를 바 없어요. 우리 목사님 시키는 대로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구나. 그걸 몰라서 하나님한테 벌 받았구나. 이제부터 시키는 대로 해서 복 받아야지. 그 복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가 더 줄기차게 이 바닥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커졌다는 그거잖아요. 지옥 같은 세상에 살아서 뭐 할 건데? 왜 살려고 하는데? 살 이유도 없는데 무조건 살겠다는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교회가 문제가 뭐냐? 복음을 모르는 건 기본이고 사람들을 계속 살려주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니까 그 사회가 예수님한테 복수한 것이 십자가 사건. 성령은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을 앞장세우고 오는 겁니다. 네가 한 짓을 네가 알아라. 대 속죄일은 주께서 만든 장치에요. 이 장치에 사적인 모든 의견이나 개인적인 주장은 다 묵살됩니다. 회막에서 꼼지락거리는 단 한 사람만 주목해야 돼요. 그 사람에게 운명이 달렸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대 속죄일에 실패한다면 전체가 실패해요. 죄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대 속죄일 이름 자체도 그렇지만, 아까 아셀라 염소가 있지요. 만약에 염소가 광야로 갔다가 집이 그립다고 도로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단 나는 거죠. 완전히 대 속죄일 난리 나는 겁니다. 이건 대 속죄일 자체가 파토 난 거예요. 파토 난 것에 대해서 이웃 민족이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을 보면서 뭐라고 핀잔하겠습니까? 저 이스라엘은 참 희한한 나라다. 지들이 만든 법 못 지켰다고 안달이고 웃긴다. 그렇게 못 지키면 법 바꾸면 되지. 어차피 신이든 법이든 다 인간을 위해서 있는 건데 인간이 이 땅에서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법이 있고 신이 있고 제사도 있는 것인데 저들은 제사 못 지내 죄 용서 못 받았다고 벌벌 떠는 꼴을 봐라. 웃기는 인간 아니야. 저 민족 속에는 저들 말고 뭐가 있는 거야? 생각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저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실체가 뭐가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속죄일에 염소 보냈는데 도로 왔다고 난리친다고 이상하게 여기겠지요. 그걸 오늘날 21세기에 똑같이 적용시켜봅시다. 나는 내 죄가 당최 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면서 기도할 때 옆에 사람이, “내가 보니까 아줌마 죄 진 것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운전도 참하게 하고 얘도 잘 키우고. 무슨 죄를 졌다고 죄, 죄 합니까? 별 걱정을 다하고 있네.” 이렇게 되면 대 속죄일 제사 기능 자체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옆에 사람이 그것 날아가면 날아가는 거지 밥이나 먹고 살면 되지 뭘 걱정하느냐? 저 양반은 속에 귀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정답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말고 성령이 함께 있어요. 보통 사람은 본인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주도권 쥡니다. 내 인생은 자기하기 나름이에요. 신도 하나에 거래니까 흥정이니까 신도 나한테 뇌물 받고 복 줄 것을 약속했으니까그러면 된다고 본 거예요. 정성 드리면 복 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정말 성령이 찾아온 사람은 이미 주도권은 내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고 정말 실체는 바로 그분 앞에 꼼짝도 못하는 내 몸 자체가 신앙의 실체가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주의 이름이 그렇게 보고 싶어요? 그러면 주의 이름에 의해서 붙잡힌 신체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이죠. 그렇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꾸만 이야기해요. 너희들 보기에 내가 인물도 못 나고 말도 못하고 너희들이 보는 것처럼 나를 보는 데 나는 누구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성령과 함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믿음의 실체가 뭐냐 하면, 성령은 눈에 안 보입니다. 주님의 이름도 눈에 안 보입니다. 성령에 이끌림 받고 주의 이름에 이끌림 받는 사도 바울의 신체, 육체만 눈에 보이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지만 예수님만 보이고 성령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평소에 잘못 되게 보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본 거예요. 여러분이 혹시 오해하고 계신다면 그 오해를 중지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할 때 예수를 대상으로 여겨서 믿는다 하잖아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평소에 다른 사람을 믿는다 할 때 “나는 당신을 믿어?” “큰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내 앞에 대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버릇을 하다보면 내 앞에 예수님이 계시고 나는 예수님을 바라본다. 자꾸 상상을 하는데 제가 언젠가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군에서 훈련 나가서 다른 부대를 만났는데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분이 계신데 밤중에 보초 서다 이야기해보니까 그 사람이 천주교 신학생이에요. 신학생이니까 프로잖아요. 그때 나는 아마추어니까 물었어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면 됩니까?” 그때는 하나님에 꽂혔지 나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그러니까 그 신학생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와 교제하면 된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신학생이 상상한 거예요. 지가 상상한 걸 실제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상상은 환상,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건 영이 아닙니다. 그런 영은 육으로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어요. 만약에 사귀던 여자가 미국에 이민 갔다. 그 여자가 보고 싶다. 그러면 밤중에 상상하겠지요. 지금 같은 하늘에 있는 걸 생각해서 달을 보면서 상상하고.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과 교제입니까? 주님 저기 있다 치고 님 그림자, 달 보듯이 상상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 해왔지 않습니까, 혹시 찔리지 않습니까? 그건 엉터리에요. 다 폐기처분하세요. 그건 다 나의 소설 쓰고 있는 겁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겁니다. 천주교 신학생도 역시 마찬가지고.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아요. 있다고 치고, 존재가 아닙니다. 기능이에요. 기능이 담는 실체가 있어요. 그 실체가 내 몸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남에게 신앙을 으스대거나 증명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마세요. 똑같은 인간끼리 알아주면 뭐 하겠어요. 나한테 속아 넘어갈 뿐이지. 정작 본인이 본인을 속일 수 없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내가 내 원대로 기능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만 알아요. 세상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나도 잘난 척하고 싶고, 돈 자랑하고 싶고, 남한테 인정받고 싶고, 부러움도 사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게 육이 돼서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게 죄라는 것, 이게 바로 이전에 몰랐던 죄가 된다는 인식이 나올 때는 우리가 말릴 수가 없어요. 왜? 주님이 기능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고요. 이건 본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선하고 싶지만 선보다 더 우세한 게 나오는데 그게 말씀을 하나도 지킬 수 없는, 하라 하면 안 하는 방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하라는 방식으로 우세한 힘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을 본인이 솔직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사람 속에 다른 유령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남들에게 설명이 됩니까? 본인만 아는데. 주님, 저는 그런 게 안 느껴지거든요? 안 느껴지면 그 사람은 지금 신앙인처럼 연기를 하고 연기를 피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따라 잡으려고 이게 신앙일까? 하고 행함으로 영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교회에서 박수치는 것도 앞자리에 은혜 받았다고 우기는 권사님은 해병대 박수를 치고. 그럼 그게 믿음 좋은 줄 알고 같이 해병대 박수 치는 거예요. 앞에 있는 전도사가 “쭈여, 쭈여.” 쌍 ㅉ을 넣어서 하니까 믿습니다, 하는 것도 “믿씁니다” 해야 그게 믿음 좋은 줄 알고 배우는 거예요. “믿씁니까? 할렐루야.” 그래서 장로들이 앞에 기도하게 되면, 그 장로 기도를 10년, 20년 계속 습득한 장립집사들이 나중에 돈 주고 장로 되고 난 뒤에는 지도 대표기도하면 앞에 선배들 따라서 그대로 기도해요.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남북통일, 온갖 시사문제 다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해주시고, 하늘나라 확장되게 해주시고. 그런 식으로 해놓고 예수 이름으로 아멘 해요.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고, 베낀 걸 또 베끼고, 베낀 원천도 어딘지 몰라요. 그게 집단자살입니다. 거기다가 그게 아니다. 교회가 이래선 안 된다고 비판합니다. 함께 썩었다고. 너부터 썩었다. 교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선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건지잖아요. 주님을 믿어야지 한국교회의 개혁성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한국교회는 똑똑해서 기도발로 다시 개혁된다고. 인간의 기도발 그걸 믿으면 안 돼요. 믿음의 실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절대로 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게 바로 믿음이 있는 실체가 내보이는 선언입니다. 믿음의 고백이에요.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 도대체 우리가 뭐가 문제냐는 그 문제. 아이 둘 낳아 잘 키우고 공부시켜서 아들 결혼할 때 집 사라고 2억 주고, 딸한테 혼수로 5천 주고, 딸이 딸 낳으면 허리 아프도록 봐주고, 거기다가 외국 가면 또 봐주고. 나중에 온 몸이 종합병동 되도록 했는데 뭐가 죄인인데? 성경에 죄인이라 하니까 죄인이라고 일단 받아놓지만 내 몸이 죄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데. 그건 신앙인 척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니거든요. 행함으로 겸손으로 조작해낸 영이란 말이죠. 그건 영이 아니죠. ~인 척하는 거니까. 뭐가 죄냐 하면, 바로 수송아지, 이런 게 어려워요. 대 속죄일에 수송아지 잡고 두 염소를 잡는데 염소를 잡을 때 유일하게 제사장이 두 손으로 안수하는 대목이 20절에 나옵니다. 이걸 흉내 내서 목사가 장로머리에 두 손으로 하는 거예요. 흉내 내는 데 도사들이에요. 순서가 수송아지가 1번이고 2번이 숫염소 잡고 하나는 아사셀 양이라 해서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는 겁니다. 죄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리 가버리는 거예요. 죄 속죄하기 위해서 이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을 확정지었다는데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뭐가 죄인 줄 모른다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죄보다 선한 일이 더 많고 중간적인 일이 더 많거든요. 오줌 누는 이런 것. 누고 싶어서 눕니까? 방광이 터질까봐 누는 거죠. 수송아지를 왜 잡느냐 하면, 부정하다. 더럽다는 말이에요. 뭐가 더러우냐 하면, 백성들 하나하나가 더러운 게 아니고 너희들 때문에 제단이 더럽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 본인 생각부터 먼저 합니다. 장례식 참석한 사람은 그냥 성전에 들어오면 안 돼요. 성전에 못 들어옵니다. 부정한 것을 만났기 때문에. 부정하다는 말은, 정류소에서 차오길 기다리면서 담배 피우다 버스 타면 버스 안에 담배 냄새 퍼지지요. 인간이 이 세상 살면서 자기가 보기에 전혀 죄가 없어요. 자식 낳고 키우느라고 고생만 했지 그건 죄가 아니에요. 남한테 욕심 부린 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천국 가는 버스 타보세요. 대번에 발로 차버리지. 어딜 담배 냄새를. 그러니까 뭘 씻어내야 하느냐 하면, 담배 냄새를 씻어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건 본인이 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와 대비가 될 때 밝혀지는 사항입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담배 피워도 둘 다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담배 안 피우는 사람한테는 너무나 추하고 구역질나는 냄새인 것처럼 너무나 깨끗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착실하게 살고자 한 그것이 주님한테 역겨운, 부정한, 더러운 짓이 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함께 있어봐야 성령이 와야 아는 겁니다. 똑같은 더러운 것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하는 건 소용없어요. 이걸 씻어야 되지요. 씻는 방법이 민수기에 나와요. 민수기 19장 9절에는 암송아지가 나와요. “이에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 데 쓸 것이니 곧 속죄제니라” EM세제에요. 막걸리, 요구르트, 뜨물에다 설탕, 소금 넣으면 천연세제 만들어집니다. 손에 주부습진 안 걸리고. 세제를 만들어서 부정할 때마다 씻어내면 되겠지요. 암송아지를 통째로 잡아서 재와 물을 섞어서 사용하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제가 성경구절을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해보세요. 시편 49편 7절에 보면,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인간이 인간의 죄를 속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디어는 뭡니까? 인간이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죄가 된다는 말 아닙니까? 죄가 되기 때문에 내가 형제의 죄를 아무리 간곡하게 기도한들, 헌금을 바친들, 교회 봉사를 하고, 내 몸을 선교사로 바친들 내 딸, 내 아들, 내 형제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못 씻습니다. 그 다음에 욥기 9장 30절,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내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아도 이 몸을 주님 앞에 깨끗한 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무엘상 2장 25절에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제단이 더럽게 됐다면 그 책임을 인간 쪽에서 질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 2장 22절,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아무리 죄를 씻어도 죄는 있다.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죄를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 죄를 죄로 아는 그런 순간이 옵니까? 옵니다. 언제 옵니까? 세상이 불 심판 받을 때 옵니다. 존재 자체가 죄였던 겁니다. 그래서 제사는 인간의 모든 생각을 없애버리고 모든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과거에 확정된 규정입니다. 그리고 완성된 십자가의 규정은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모든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성경책을 준 거예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성경 볼 때 태도. 하나님의 책이다. 순종하면 복 받겠지. 왜? 순종하면 복 받고 순종 안 하면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까짓 것 순종하는 쪽을 택하자. 뭘 모른다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자기 존재를 기정사실, 자기 존재의 잘남과 나는 죽어선 안 된다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기정사실화 시켰어요.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우리 조상이 범죄 했다는 사실조차도 완전히 외면하는 겁니다. 우리 조상이 범죄 했다는 사실을 변경시키지 않고 죄 있는 육신의 몸에 하나님이 그 속에 들어오셔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들이 이런 형편에 있다는 거예요. 어둠에 있다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나는 죄 진 적도 없이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게 기쁜 소식이에요. 처음으로 자기의 본색을 알고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이게 성령께서 매일같이 하는 일이에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네가 한 일로 살 생각 말라. 지난 수요일에 설교할 때 교회 선택하는 법, 어떻게 선택하느냐? 여러분,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서 열심히 삽시다. 이것 이단입니다. 어느 교회 갔더니만 우리는 그만 살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리하고 죽읍시다, 라고 설교를 맺는다는 이건 성령이 외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 없다면 집에서 혼자 하세요. 교회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한지 우리가 이 죄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속죄일 취지로 아까 이야기했지만 심판에 나섭니다. 이사야 63장 4절에 보면,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대 속죄일을 근거로 해서 지금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겠나? 인생 꼬라지가 뭐고? 내가 인생을 허비했구나. 하나님께서 우리 형편 챙기고 거기에 관심 두는 걸 용납하지 않아요. 우리 때문에 하나님 뜻이 더러워졌다는 하나님 챙기는 것이 우선이에요. 인간들의 자기 관심사에서 주님 관심사로 돌리는 방법은 원수 갚는 날입니다. 모든 걸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래서 대 속죄일의 특징은, 결국 이 원리가 심판의 원리로 확산되는 겁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이런 게 있어요.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 월 곧 그 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스스로 괴롭게 하라. 이게 인간으론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괴롭게 하면 얼추 됐다고 자부하는 그 순간 그게 자기 기쁨이 되고 말아요. 이게 마태복음 6장에서 가식적으로 금식하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질책이 그겁니다. 금식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일부러 찡그리고 머리 흩트리고 굶은 티내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하니까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날에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술 먹는다고 욕했잖아요. 유대인들은 성경 말씀 순종하기 위해서 그들은 완전히 철저에 철저를 기한 거예요. 이사야에 보면 성회 날 금식하지 않고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고 이웃을 구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망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유대인들이 뭘 했느냐 하면, 성회 날 마음을 괴롭게 하고 금식했고 그 다음에 구제를 했어요. 왜? 과거 역사 속에 잘못된 전철을 또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서 회개 안 하고 금식 안 하고 구제 안 했다고 자기 백성을 멸망시켰다면 멸망하지 않는 방법은 뭡니까? 구제하면 되고 금식하면 되고 회개하면 되잖아요. 그게 인간이 육에서 육으로 나오는 방식이에요. 그 바리새인 지옥 갔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주여, 제가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다가 잘렸어요. 아예 지옥 갔지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스스로 괴롭게 하는 방법이 뭡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괴롭게 하게 되면 스스로 괴롭게 됐다고 여기는 그 수준을 자기가 상상하게 돼요. 자기가 자기를 꾸며서 머릿속에 그린다니까요. 만화에 그런 것 나오잖아요. 내가 금식하고 있고 눈물 흘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고. 주여 부족합니다. 그러면 싱긋이 웃지요. 내가 그 정도까지 회개할 수 있다니 나는 얼마나 장한 인간인가. 교회 가서 자랑해야지. 나는 일주일 굻었다. 제거 어느 강의에서 했지요. 십일조가 왜 문제냐 하면, 9퍼센트와 11퍼센트 그 중간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에요. 왜? 10퍼센트 해야 되기 때문에. 십일조니까. 그 중간의 경계선을 기억한다는 말은 항상 법을 기억하고 있지요. 일주일 금식한다는 말은 뭡니까? 6일과 8일을 기억한다는 거예요. 8일하면 안 되고 6일하면 하루 모자라니까. 이걸 기억하는 거예요. 9.9% 헌금? 아니야. 이건 십일조, 10%. 월급 백만 원이다. 계산 딱 나오네. 계산기 필요 없지요. 십만 원. 십만 원 봉투에 넣고 보람찬~ 오늘 끝내노라면. 인간은 법적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데 환장한 인간입니다. 누가 뭐라고 할 때 “이것 지키고 이것 지켰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을 더욱 더 뭐 되게 한다? 그게 바로 지옥 갈 모습이에요. 사랑이 나올 자리에 법이 나오고 심지어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가방 두 개 사주고, 머플러 사주고 뭐도 사주고.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지가 해준 것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랑입니까? 더러워, 가져가라. 이게 사랑이야.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말로 사랑하는 것 말고, 봉투, 봉투 열렸네. 돈으로 이야기해. 말만 말고.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괴롭게 하면 할수록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자기가 점점 더 위대해져요. 세상에 나 같은 20일 동안 밥도 안 먹었다니. 내가 그 정도였어? 자기 자화자찬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자기 부인입니까. 자기 자랑만 늘어날 뿐이죠. 그럼 어떻게 애통하느냐? 스가랴 12장 10절에 보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애통하는 방법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도한테는 애통하는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짊으로써 애통하는 대상을 제시한 거예요. 저분의 죽음은 나 때문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대 속죄일 안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왜? 그 날에는 애통하는 날이기 때문에. 이미 전 우주로 확대된 대 속죄일에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시고 십자가 지심으로서 찾아올 때 누가 저분을 저렇게 죽게 했는가? 내 죄를 가져갔기에 내 대신 아버지로부터 받을 저주를 심판을 저렇게 받는구나, 라고 하면서 마음속에 애통하는 거예요. 애통한다는 것이 운다, 통곡한다, 엎어진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 주도권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내 인생 주도권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애통이에요. 뭔가 홈이 파이고 구멍이 파인 거예요. 아예 뚫어져야 돼. 저게 나한테 어떤 이익을 줄까, 생각했다가 이익 주는 밑구멍에 빠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바람이 확 불어서 구멍이 났어. 총 맞은 것처럼, 대포 맞은 것처럼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거예요. 전에는 내 안에 내가 있어서 누가 뭐라 하면 동굴 속에 기어들어가기 바빠요. 그래도 잘했는데, 뭐. 자꾸 피해요. 변명과 핑계로 일관해요. 그래도 나는 너보다 나아, 하다가 성령을 받으면 여기에 구멍이 나버려요. 구멍에 성령의 바람이 오니까 내가 없어요. 내가 없는 나를 주님 자신이 내 자리를 차지해버렸어요. 나는 그분을 위한 똘마니가 되고 나는 그분의 증인이 되고 나의 주도권은 그분이 몽땅 파내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가져가버리죠.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요,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무슨 흉악한 짓을 하든지 간에 남들로부터 비난받을 짓을 할지라도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져선 안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참 끝에 말은 정말 위험한 말이에요. 목사님, 오늘 강의에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말은 기억나네요. 은행 강도짓을 해도 내가 했나, 주님이 했지. 그렇게 되면 핑계가 되지요. 그러면 주께서 준비한 분들이 있어요. 경찰이 오게 돼있어요. 경찰이 온 것도 주의 은혜고. 경찰이 패서 이빨 두 개 부러지고 교도소 들어갔는데 이상한 깡패들한테 매일같이 얻어맞을 때 한 대 맞을 때마다 이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거든 그렇게 하세요. 교도소 간 사이에 자식들이 엇나가서 집안이 개판 됐을 때도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인데 내가 관계있나. 그 정도 믿음 같으면 하세요.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고 주님 시킨 대로 성령께서 했는데 나나 건드리지 자식은 왜 건드립니까? 그럼 주님께서 네 자식은 누가 책임지는데? 내 자식은 내가 책임져야 되지요. 그것 봐. 네가 책임지는 게 있잖아. 니 구멍, 자식으로 막혀있다. 구멍 난 것처럼 바람 숭숭 분다고? 바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니 자식이 그 바람을 막았네. “주여, 다른 건 건드려도 자식만큼은 건드리면 안 되잖아요.” 이런 것. 믿음 좋다. 비꼬는 거죠. 나를 믿어? 십자가를 믿어? 차라리 솔직하게 십자가를 이용했다고 해. 하나님 존재를 이용했다고 해. 내가 희생해서 우리 집안 일으키겠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하고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또다시 그 순간 구멍 나지요. 내가 어느 정도 죄를 안다고 여겼는데 막상 사태가 벌어지니까 내가 나도 누군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선 반복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육이 되게 합니다. 반복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만들고, 복음 아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반복적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자꾸 뒤로 물러서면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면서 물러가면서 얻어터지고 구멍 뚫리고.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란 말은, 도대체 이게 뭔 일인가?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이 과거에 십자가로서 창세전에 확정됐기 때문에. 주께서 다룬 인생, 우리 손으로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이건 천국 가는 게 팔자입니다. 왜? 성령이 그렇게 우리를 확정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대 속죄일이 날마다 반복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원칙, 우리는 옛날이야기로 처리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주여, 이러한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바람구멍 생기도록 대 속죄일이 구멍을 뚫어 주시옵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