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1110b약1장14절(육과 영의 경계)-이 근호 목사
안양20171110b약1장14절(육과 영의 경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두 번째 시간은 상당히 난해합니다. 뭐가 난해한가 하면 사람들이 쉬쉬하고 모르니까 그냥 넘어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그리고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그 문제. 넘어간 문제는 흔히 알지요. 주께서 하신다. 성령께서 하신다. 아는데. 고 변화 있잖아요. 변화. 넘어갈 때 나타나는 특이성이 뭐냐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줬으면 하는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오늘 강의에 있어서 미리 정해놓은 제목은 ‘변화’라는 겁니다. 변화. 자, 월요일날 대구강의에서 ‘자아와 주체’ 강의 했거든요. 자아는 존재고 주체는 사건이라 했습니다. 존재란 말이 어려우면 덩어리라 하죠. 덩어리. 나라는 덩어리. 그런데 사건은 뭐냐, 쪼개기에요. 쪼개기.
그러면 덩어리는 변화가 아니지요. 존재니까. 덩어리는 그냥 있잖아요. 덩어리가 있잖아요. 이게 존재라고요. 존재인데 이걸 쪼개는 건 사건이 되는 겁니다. 쪼갠다는 말은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왔을 때 야곱은 존재였습니다. 자기 색시감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 사다리를 통해서 뭐가 왔습니까? 천사가 내려왔잖아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지요. 주님의 계시를 받았잖아요.
그러면 지금 노선이 존재에서 그대로 천국까지 가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성도의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천국은 이 존재가 들어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과의 존재가 만나버리면 이게 저주받아 죽게 되어있어요. 이 존재로서는 천국에 못 갑니다. 흔히 교회에서는 예수 믿으면 간다 하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에요. 이 존재는 안돼요. 오죽했으면 십자가에 같이 죽자는 이야기 했겠어요. 로마서6장에 나오거든요. 나랑 같이 죽지 아니하면 나랑 같이 못 산다는 이야기 했다 말이지요. 함께 죽어야 함께 살아요. 그냥 예수 믿는다고 사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는 분과 함께 있어줘야 돼요. 그분의 전문직이 뭐냐 나를 죽이는 기능을 해요.
나를 죽인다는 말은 주님께서 전기톱으로 해서 날마다 머리부터 완전히 혐오스럽게 내 몸을 완전히 세포를 쪼갠다고 해서 쪼개는 게 아닙니다. 쪼개봐야 육의 조각밖에 더 있겠어요. 육의 조각도 육이니까 이건 쪼개도 소용없어요. 그렇게 쪼개는 게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쪼개야 되는 거예요. 존재 자체를.
그럼 존재 자체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만든 이 존재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과거의 자기 기억의 집대성이에요. 인간의 경험한 것이 자기가 경험했다고 해서 그게 다 존재가 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현재 필요한 것. 아까 이야기한 내가 편하게 사는데 필요한 그런 기억들의 집대성인 자아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십년 전에 내가 그 때 살던 앞집 애를 내가 때려가지고 그 애가 코뼈가 부러졌다. 같은 애이니까 그 때는 용납이 됐다 말이죠.
그런데 40년 만에 우연히 시장바닥에서 만났다. 기쁩니까? 아니면 도망치고 싶어요? 내가 때렸으니까 미안하잖아요. 아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아이고 참, 내가 패가지고 코뼈 나갔는데 아직도 코뼈를 수술했는지 모르겠다. 가자. 도망칠 거 아니냐 말이지요. 왜 자기 존재 덩어리가 그 사람 앞으로 왜 못 지나갑니까? 왜 도피합니까? 중간에 뭐가 왔어요? 자기가 때려서 코뼈 부러진 애를 40년 동안 꾸준히 생각해 왔습니까? 아니라니까요. 안 그래도 딴 거 기억할 거 많은데 쓸데없이 왜 그런 걸 기억해요? 그런데 갑자기 맞닥뜨리는 순간 그 잠복되어있던 과거의 순간이 들어오면서 내 현재 있는 존재 덩어리에 균열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옛날에 다 첫사랑 있었지요. 소나기 올 때 같이 피하고 그런 거 없었어요? 다 늙어빠져서 만나면 그 때 그 모습 가지고 만나면 괜찮은데 어이~ 숙자! 부르면 곤란해요. 나 너 그리웠었어. 나는 이선희의 부를 때마다 매일 J 니 기억하며 불렀어. 이리 되면 곤란하다 말이죠. 지금. 이리 한다 말이지요. 왜 그런데요? 생각하지 않고 싶은 존재 기억덩어리에 이게 들어와 버리면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때렸던 사람을 만났던 그 만나기 전의 존재와 만난 후의 존재가 달라져버립니다. 그게 존재의 균열입니다.
존재가 균열돼 버리면 아까 전기톱가지고 세포 자른다고 이게 존재균열 아니지요. 어떤 사건이 와버려야 돼요. 그런데 내가 얘기한 예는요, 예가 적절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가 옛날 있었던 사건이잖아요. 옛날 과거의 내가 코뼈 때렸던 사건인데.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면서도 보편적인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공히 적용된다고 선포한 사건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내가 저질르지도 안았는데 십자가 구경도 못했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하고 싶은데 그 구경도 못한 사건이 현재 지금 2017년 11월달 지금 내 존재에 찾아왔다. 그럼 나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졸지에 죄인 돼버려요. 죄인 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야 되겠지요.
주께서 피리를 부를 때 이제 웃을 수 있고 주님이 애곡할 때 울 수가 있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금식기간이었는데 바리새인이 금식했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당신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하니까 “혼인잔치에 신랑이 함께 있으면 웃어야지 그걸 왜 울어? 왜 금식하는데?” 다만 금식할 때가 있는데 언제냐 하면 신랑이 떠날 때 운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의 기억 속에 그게 주체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주인공이 되어서 주님이 함께 있으면 웃고 주님이 떠나버리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런 주님에게 종속된, 예속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데 그 주님의 찾아옴이 내 존재를 깨기 때문에 저는 이걸 사건이라 하는 거예요. 어렵지요? 이게.
지금 뭐가 어려우냐 하면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들어가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갈 때 그 중간의 경계선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 나는가 지금 그걸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에요. 제가. 그걸 생각하자는 거예요. 예수 믿어 구원 받겠지. 해놓고 일상생활로 빠지지 마시고. 내가 여러 번 물었던 이야기인데. 지금 내가 살아있습니까? 주님이 살아있습니까? 제발 둘 다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건 성경적 아닙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왜 내가 살아있는데 주님이 안 살아있으면 내 사는 게 급급하기 때문에 주님은 살아도 내 산다는 그 리스트 항목에 저 밑에 처지기 때문에 주님이 있어도 나한테는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이게 주님이 죽은 게 돼요. 만약에 주님이 살아버리게 되면 반대로 되어가지고 주님이 있으면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왜냐, 주께서 나를 살려내시니까. 그것을 뭐라 하는가 하면 두 자로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사랑 앞에서는 내가 작아지고 등 뒤에 서면 눈에서 눈물이 나지요. 그렇지요? 등 뒤에서 눈물이 나올 거 아니에요. 까꿍! 애들이 그런다고요. 애들이 엄마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보라는 거예요. 여기 있다고. 엄마가 만약에 등 돌리고 딴 일을 하면 TV를 보고 딴 거 하게 되면 자꾸 방해를 놓지요. 마구 잡아당기고. 독특한 학습체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한다고요. 날 보라고 얼굴을 잡아당기고 그러잖아요. 사랑은 얼굴을 마주보는 겁니다. 얼굴을 보는 거예요. 왜 봐야 됩니까? 당신이 있으매 내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쪽이 살아있으면 좋냐 하면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만 천국갈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게 로마서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에요. 과감한 용기 있는 거죠. 나는 내 백성이 회개해서 구원이 있다면 제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감수하겠다. 그런다고 사도바울이 지옥 가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나는 내가 전한 이 복음이 너희들이 그렇게 귀히 여기는 돈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 마음이 사도 마음에 있어요.
상태를 볼 때에 지난 낮 설교에서 첫 번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런 인간의 평가에 귀 기울 필요 없다고요. 왜? 그건 인간도 아니니까.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뭐냐 그 속에 십자가의 피가 들어있고 용서가 들어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고 성도가 보기에도 인간이고. 그래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반드시 뭐를 경유해야 돼요?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래서 뭐든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 말이에요. 사람을 볼 때에 돈 있나, 없나를 보지 말고 돈을 매개체로 하지 말고 주님으로 매개체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말이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나한테의 사건이 당신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주어졌냐 말이죠.
그 동일한 사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동일한 사건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바로 인간은 뭘 해도 구원 못 받는데 오직 뭐로 구원받는다? 십자가 믿음으로도 구원 못 받아요. 무엇으로 구원 받아요? 십자가 피로 구원 받아요. 내가 십자가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믿는다는 말은 내가 그 피를 소유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그 피가 나를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 피가 작용하니까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용서가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피 입니다. 피. 피가 진리에요.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여러분이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피라는 것은 주님께서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의 존재를 말하고 주님의 존재라 하는 것은 주님의 모든 하는 일이 복합체가 주님이 존재가 된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주가 아니고 이 땅에 무슨 할 일이 있어 완성을 해야 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건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사건을 우리에게 표창 던지듯이 던지겠지요.
만화영화에 그런 게 있잖아요. 적들이 와서 표창을 팍! 팍! 던지면 막 꽂이잖아요. 그것처럼 주님께서 살아있어서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표창을 던집니다. 막 던지지요. 그러면 그 표창을 나만 받았는줄 알았는데 똑같은 표창을 받은 사람이 누가 등장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갖겠어요?
우리 둘 다 못난 놈. 못났는데 형제가 된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다?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우리는 성도는 용서의 운반체니까.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보석 운반한다 했잖아요. 그 용서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건 분명히 여러분이 동의하시지요? 강요하는 거 아닙니다. 동의하시지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거 어려운 거 묻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 땅에서 고요하게 유지하게 합니까? 아니면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게 첫 째 강의였습니다. 그게 미혹이고 그게 시험이라고요. 시험은 누가 한다? 마귀가 하는 걸로 되어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사탄이 그냥 가만히 활동하는 게 아니고 사탄은 영적 존재인데 그냥 무작정 일하는 게 아니고 뚜렷한 목적이 있어요.
우리에게서 뭐를 제거해버리는 겁니까? 우리에게 집어넣어준 그 십자가 피의 위력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제거하는 겁니다. 제거하려면 평소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의 성령을 못 받은 사람들을 사탄이 다루었던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사건을 던집니다. 항상 우리보기에 우리가 존재라면 사탄은 비존재거든요. 우리가 존재라면, 저쪽은 무슨 존재? 비존재. 비존재라는 말은 무 존재와 달라요. 무 존재는 아예 없는 걸 무 존재지만, 비존재라 하는 것은 있으면서도 존재에 발각되지 않고 우리 원하는 대로 포착이 되지 않는 걸 비존재라 합니다. 비존재.
예를 들면 꿈같은 것. 분명히 매일 밤마다 나타나지만 어디 있나 하면 벌써 날아가 버렸지요. 비존재의 특징이 뭐냐 이게 전부 다 사건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존재는 그냥 존재에요. 존재가 뭘 만난다? 사건을 만나지요.
불쑥 불쑥 우리는 복음을 가리기 위한 사건을 악마로부터 계속 표창 던지듯이 받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니 그러다 죽는다.” “니 그러다가 망한다.” “니 그러면 사람대우 못 받아.” 특히 이 존재는 우리 존재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소유로 되어있습니다. 그동안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바벨탑이 있거든요. 악마가 이야기합니다. “니 그리하다가 쌓아올린 거 와르르 다 니 무너지면 어떡할래?” 이리 나오지요.
16절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지 말라 했습니다. 속지 말라는 말은 날마다 성도라고 해가지고 고요하게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고 성도를 향하여 집요하게 성도조차도 속아 넘어가게 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있다는 이야기고 거기에 그 환경 속에 우리가 지금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아아~ 속지 말라. 마귀한테 속지 말라. 마귀한테 속으면 뭐냐, 내가 건강을 잃어버리고 마귀에게 속으면 돈을 잃어버리고, 마귀에게 속아 버리면 내 위신과 체면 다 깎이고 가정에 우환이 있구나! 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 때문에 속지 말라 했구나! 그러면 복 줄게.’ 이런 식으로 막 해석하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고 목사가 그런 식으로 풀이해 주고 싶고 하는 인간의 심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소유를 붙들고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이런 짓하다가 내 소유 다 날아가게 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게 뭐냐 하면 두려움이에요. 두려움. 공포. 두려움과 공포가 왔다는 것은 그 순간 뭐를 잊어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건. 모든 걸 용서한다. 를 그걸 무효로 돌려버리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예를 들었잖아요. 철거된 담벼락에는 선과 악의 줄을 그을 수 없다 했지요. 기억나십니까? 이미 철거해버렸는데요. 허구에다 그을까요? 그런데 철거 안했다 하기 때문에 마귀가 이렇게 긁게 되면 “그래, 나 조심해야 돼. 주의 해야 돼.” 이리 된다고요. 그게 무슨 체계냐 하면 선악체계에요.
그러나 선악체계는 선악체계로 해결 안 됩니다. 해결 안 되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선악체계로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니가 한 악보다 선이 더 많아지면 너는 합격이라고 우리에게 계속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착한 일. 오늘 나중에 강의 마치고 서울에 가면 의존교회 강의합니다. 거기도 나와요. 선한 일에 힘쓴 참 백성, 또 선한 일 나오잖아요. 내가 너희에게 은혜주신 것은 선한 일에 종사함이라. 선한 일 하게 함이라. 그 선한 일 나오고.
그런 선한 일이 있으니까 마귀가 그러니까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라는 말도 있고, 성경에서는 막 온통 선한 일로 거룩한 일로 포장을 해놨지요. 그 해석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 되는데 예수님 관점이 없이 마귀 들린 관점에서 선악체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가락모임에서. “이웃사랑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인이 안 믿고 있는데 부인은 선악체제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성경에 봐라. 이웃을 사랑하라 했잖아. 사랑하는데 뭘 그렇게 성경 보는 게 복잡 하냐, 성경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 그러면 되는데 그거 뭐 이단이고 그거 뭐 아니고 그게 나는 납득이 안 된다.” 라는 그런 자기 부인에게 뭐라고 해야 되느냐? 그쪽에서 분명히 이웃사랑 하라 하면 이웃 사랑하면 될 텐데. 뭐라 하면 되느냐, 저한테 답변을 구했어요.
답변해줬어요. 사랑이라 할 때 지키는 사랑의 표준은 누가 표준이냐 하면 우리가 표준이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표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중보자에요. 모든 성경은 누굴 겨냥한다? 예수님을 겨냥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웃사랑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다.’ 의 가장 정확한 행동은 “독사의 새끼들아!” 하는 욕 소리에요. 왜?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 본인 입으로 원수를 서로 사랑하라. 해 놓고 예수 본인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서기관보고 독사의 새끼들아 욕설을 해서 그러니까 예수 당신이 자기 한 말도 못 지키는 당신은 엉터리잖아.” 라고 하겠지요?
또 우리가 노골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예수님이 앞뒤가 안 맞네. 우리 어떻게 살라고? 헷갈리네.” 이렇게 될 게 아닙니까? 고게 바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우리가 엉터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원수사랑 이야기해놓고 그 원수 사랑의 절정은 “독사의 새끼들아!” 그걸로 한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지금 인간들은요, 나는 괜찮고 나보다 못 난놈 가지고 사랑하더란 말이지요. 자기는 관점 괜찮다는 거예요. 이게 일상생활이고 이게 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문제없고 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문제거리는 되지 않고 주의 말씀하면 지키겠습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선하라 하면 선하겠습니다. 그 선한 사랑이 문제점이 뭐냐, 선악체계에서 나온 거예요.
이 선악체계가 있는 반면에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거든요. 하나는 선악체계가 만든 세상이 있는데 그건 마귀가 만든 세상이고, 또 하나의 세계는 뭐냐 하면 생명나무 체계에서 만든 세계가 있어요. 이건 긍휼입니다. 예수의 희생이고, 예수의 피고, 용서의 세계고 거저주시는 값없는 사랑의 세계에요.
이건 우리보고 뭘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이거 믿어야 되는데..., 우리보고 뭘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그보다 더 큰 선은 없어요. 그냥 내 행동으로 선을 가려버리면 그보다 더 악한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생명나무 관점에서 그게 악하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이러시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거저주시는 용서를 지금 마귀가 가려버리는 유혹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표창,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매일같이 우리는 맞고 다닙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아이고, 목사님! 마귀가 선악을 쏘는 표창은 안 맞고 싶고, 주님의 용서만 받고 싶습니다.” 또 우리 생각은 같은데. 여러분, 문제성 없는데 어떻게 용서가 있습니까?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있어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죄 지어야 용서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냥 일상생활 귤 까먹는 것도 죄라니까요. 참아야 하느니라. 아니야, 먹고 싶어! 왜 귤 먹습니까? 맛있으니까. 맛있으면 왜 좋습니까? 맛있으면 내 존재가 맛있다고 이야기하니까. 결국 사건이 아니고 도로 어디로 갑니까? 도로 존재로 가요. 그걸 도로남이라고 해요. 도로남이 되지요. 도로 가버려요.
이 경계선에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육과 영에서. 육과 영에서 항상 육은 영으로 가고, 영은 육으로 오고.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영이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육과 영 넘나들면서 여기서 빠져나온 게 있어요.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용서가 나오고 또 하나는 저주가 나옵니다. 왔다 갔다 뛰면서.
우리는 영에 갔을 때는 우리는 무슨 존재다? 사건적 존재지요. 사건이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니라. 사건이지요. 이 사건이란 말은 내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고 누구의 존재? 주님의 존재가 우리한테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사건으로 주어져요. 그냥 존재로 와버리면 우리는 죽어요. 우리가 죽는다고요. 그럼 내가 죽는다 할 때는 주님이 지금 그 앞에 존재로 등장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때 주님은 큰 존재가 되는 거고 내가 조각, 조각 나가지고. 내가 크게 의식돼 버리면 주님은 작아져서 날아가 버려요. 주님의 존재는.
여러분, 이런 경험 많잖아요. 목사님 설교 은혜 받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와가지고 차 빼달라고 할 때 있지요? 차 빼야지 어이 하겠습니까. 차 뺄 때 차는 누구 소유다? 내 소유다. 갑자기 내 소유라 느낄 때. 내 소유와 결부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고 뭐와 관련되어있습니까? “누구의 소유입니까” 할 때 “저에요.” 할 때 저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자아가 되는 거예요. 자아. 자아라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특히 남자들한테 민감한 문제인데. 남자들이 자기 몸을 치는 것은 용납해도 자기 차를 치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여자들이 자기 몸을 치는 것은 용납이 되도 자기 명품가방을 치면 용납이 안 되듯이. 왜? 내가 온 몸을 다해서 산 가방이고 내가 온 몸을 다해준 차기 때문에. 어떤 집에는 강아지 함부로 먹이다가는 혼납니다. 어떤 집에는. 나를 건드리는 거예요. 소유는 나의 연장이에요. 내 신체의 연장입니다. 소유가. 저 멀리서도 나를 건드리는 것 같아요. 남편이 아내를 안 때리고 아내 안경을 벗겨서 팍 건드려 보세요. 대번 남편 안경 아주 폭발합니다. 니도 한 번 당해봐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예상하기는 여자들은 미장원에서 머리 잘 못나오면 그렇게 기분 나쁜 이유가 자기 모든 신체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머리카락이지만 신경을 그만큼 쓴 거예요.
어려우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존재가 갑자기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건으로 바뀌면서 이 사건 누가 일으켰어요? 라는 나 존재 말고 주님이 보일 때 이게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방향이 이렇게 되지요.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에서 육으로 넘어올 때는 반대로 됩니다. 주님의 존재는 시답지도 않아요. 시시해. 주님의 복음, 주님의 말씀 그다지 반갑지 않아. 왜냐 내 애가 곧 수능치기 때문에. 수능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수능 잘 치면 내가 그 때 헌금 더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중요한 것은 내 자식, 내 자식은 누구의 연장입니까? 나의 연장이지요. 갑자기 내 존재가 되면서 다른 존재와 비교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이 비교대상이 내 존재와 다른 존재로 비교한다는 것은 이미 뭐로 굳힌다? 내 자랑거리는 뭐로 굳혔다? 내가 잘되는 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굳힌 거예요. 요게 영에서 육으로 넘어온 겁니다. 그러나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면 내 애가 차에 처박던 뭘 하든 오직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해는 되지요? 그런데 요게 몇 초 안 간다는 거예요. 몇 초가. 좀 더 갈라 싶으면 차 빼 달라 해서 안 돼. 요거 좀 더 갈라치면 전화오고 메시지 오고.
그래서 어떻게 방법이 뭐냐, 안되더라도 낌새는 알아야 돼요. 낌새가 뭐냐 하면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이고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뭐냐 하면 “자기에게 불신앙을 적용시키세요.” 왜냐하면 왔다 갔다 하는 요걸 마귀가 알고 있어요. 알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육으로 왔는데 ‘아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어쩌고 저쩌고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때 마귀가 쓱 들어오는 거예요. 건너오면서 저주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들어와서 “그러면 니가 봐라. 육으로 변했잖아. 니 그러면 안 돼. 그러니까 여기서 더 경건해야 되고 더 기도를 빡시게 해서 다시 영으로 돌려야 되니까 애를 써야 돼.” 라고 마귀가 그런 시험을 해버리면 이건 내 존재를 파괴시키는 게 아니고 내 존재를 더욱 더 빛내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헌금하고 기도 잘됐다면 결국 자랑거리가 누굽니까? 나는 내 기도해서 헌금해서 내 존재를 영적 존재로 오랫동안 유지시키겠다는 이야기를 할 게 아니겠어요. 그게 마귀의 시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의 최고의 시험이라 할 수 있어요. 이 일을 누가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의 자식이라 한 거예요. 막 돼먹은 자식보고 마귀의 자식이라 하지 않고 가장 최고로 말씀대로 산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바로 마귀의 새끼들이에요.
왜냐, 마귀는 바로 마귀가 인간에게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시험은 뭐냐 마귀의 마지막 결정적 무기는 뭐냐, 자기의 의로움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되려면 내 존재를 더욱 더 굳건히 해야 돼요. 이게 얼마나 아까운 건데. 여러분, 아까워요? 여러분의 존재가. 아깝습니까?
쪼가리가 나서 주님의 사건으로 완전히 전부 다 부스러기 먼지가 되어, 완전히 먼지 같아요. “목사님, 어떻게 압니까? 죽은 사람 봤으니까.” 제가 죽은 사람 시체보고 입관예배 할 때 하거든요. 가족들과 저 같은 목사니까 절차보고 본인 맞습니까, 확인하고 보는데 제가 놀란 것은 시체의 피부 색깔과 산 사람의 피부 색깔과 같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 알았어요. 이틀 된 시체의 색깔과 산사람과 똑같아요. 아직 썩지는 않았으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걸어 다녀도 곧 시체에요. 누구나 시체될 거예요. 갓난 애기도 시체될 거예요. 이게 펙트입니다. 이거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 이게 사실인데 워낙 마귀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평생토록 우리한테 세뇌시키다 보니까 죽으면 안 되는 내 존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마귀를 통해서 뭘 비취게 되느냐 하면 자기 의로움이 계속해서 비취게 되는 거예요. 자기 의로움이.
주님의 사건은 결국 뭘 깨느냐 하면 자기 의의 집합체가 존재기 때문에 존재를 깨기 위해서 뭘 깹니까? 우리의 의를 깨는 거예요. 우리의 의를 깨는데 하나, 하나 깨는 방법이 아니고,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했지요. 우리의 상황, 우리가 태어날 때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일괄적으로 뭐다? 빛이 아니고 뭐다? 어두움이다. 속지 말라 말이죠. 먹물이다. 먹물 안 묻히고 다니는 사람 봤어요? 어느 강의에서 신사임당이 문란하다고.
이 세상에서 죄인 아닌 자가 있어요? 이게 생명나무 체제입니다. 생명나무의 다른 방법이에요. 이건 예수 그리스도 오셔서 그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원수 사랑하는 것은 마귀새끼라고 하는 것이 원수 사랑이에요. 아무도 그 논리를 이해 못합니다.
그 논리를 이해 못하기 때문에 그 이해 못한다는 존재를 주님의 사건으로 쪼개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존재가 우리의 존재를 대신하기 때문에 비로소 뭐가 이해되느냐 하면 주님이 옳다면 그게 바로 옳은 겁니다. 주님이 진리라면 주의 입에서 나온 게 진리라면 그게 진리입니다. 우리는 몸이 천개 백 개라도 입을 다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욥기 아닙니까.
안다고 껍죽대다가 결국 하나님 만나 뭐라 했습니까? 제가 개코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걸 누가 알겠어요?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악한 어두움 세계에서 자기 만큼은 빛이 되고자 소박하게 빛의 세계로 따로 이렇게 만든다 이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날 성냥팔이 소녀 했지요. 햇빛이 솟아져 나오는 넓은 창문 그 안이 그렇게 다복하고 행복해 보이지요. 성냥팔이 소녀는 고아기 때문에 추운데 발발 떨면서 마지막 세 개의 성냥개비하고 죽어서 엄마 만나러 가는데 그 장면에서 그 동화가 하는 이야기가 어려운 사람 도와줘. 이리 되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야고보서에 의하면 어느 쪽도 다 어두움이에요. 다만 성냥팔이 소녀는 어두움인 줄 알기 때문에 구원받고 그 안에 크리스마스 파티 벌리고 있는 그 다복한 안정된 중상층 가정은 설마 이게 어두울까? 이렇게 행복한데. 설마 우리 집까지 마귀가 들어왔을까? 이렇게 행복한데. 신의 축복이지. 라고 그것을 소유화시키고 그걸 존재화 시키는 거예요.
뭐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예수님 가신 길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가신 길과 그렇지 않은 길 상황을 보세요. 다른 사람들 다 도망간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 가신 길이 어떤 길입니까? 세상에 다복하고 전혀 상관없는 길이고 사도바울 가는 길도 세상의 다복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사도바울은 결혼도 안했어요.
아까 해 본거 해 봅시다. 어려운 거. “불신앙을 자기에게 적용시켜라.” 제일 중요하니까 잘 들어보셔야 돼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일단 존재가 있어야 돼요. 이미 신앙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미 존재를 상정한 거예요. 존재를 상정하니까 여기에 누가 들어앉는다? 표창이 주님의 사건도 있지만, 누구 사건? 마귀의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귀는 뭐냐,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지를 않습니다. “니 귀한 거야. 니가 구원받아야지. 남 구원 받으면 소용없어. 니가 구원 받아야지. 니한테 귀하지.” “귀하지” “그러니까 남은 다 지옥가도 니는 천당 가야지.” 계속해서 우리한테 표창을 날리면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지키기를 원하지요. 부자 청년도 그랬고.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이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신앙이 나오지요. 이 존재에서 신앙이 나오면 주님 존재에서 나온 신앙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게 진짜 구원하는 신앙이잖아요.
예수님의 신앙으로 구원받거든요. 우리의 신앙은 구원받지 못해요. 예수님의 신앙으로 구원받고 그게 성령의 선물로 주어짐으로서 구원받습니다. 에베소서2장8절. 신앙은 선물이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 존재도 신앙이 나오잖아요. 이 신앙은 수상한 신앙이에요. 왜냐하면 누굴 지킨다?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신앙이잖아요.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뭘 해버려라? 불신앙을 집어넣잖아요. 불신앙을. 뭐라고? “주님, 저 예수 안 믿습니다. 저 믿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말이 거짓말 하는 게 아니고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 없어요.
우리 그냥 방치해버리면요, 우리는 0.1초도 헤가닥 존재로 바뀌어가지고 “누가 나를 건드려? 나 믿음 좋아.” 이렇게. 주님 자랑할 내 몸이 주님 자랑할 사건이 나와야 할 내 몸이 사건도 안 나오고 내 존재로 들이미는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이미 마귀 있는 세상, 이런 마귀 있는 세상 시험 안 받을 수 없는 세상 같으면 차라리 자진 신고를 하는 거예요. 자진 신고. 왜 웃는지를 모르겠다만 하여튼 웃을 일이거든요. 자진해서 알아서 긴다는 말이 있지요. 오늘 제목을 알아서 긴다. 할까요. 알아서 기는 거예요.
저는 개코도 믿음 없습니다. 이걸 지지난 낮 설교에 안에 회전 모터가 돌아버리면 바깥에 뭐가 붙느냐 하면 불신앙과 온갖 죄들이 다 나오는 거예요. 이게 왜냐, 아담의 육이기 때문에 그게 다 나오게 돼있어요. 차라리 지가 알아서 믹서기 표면에 붙는 거예요. 나 믿음 없습니다.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나와요.
다른 사람 같으면 뭐냐 하면 “아이고, 평생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12년동안 귀신 들려가지고 무슨 난리입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쁜 짓해도 멀쩡한데 나는 특히 착하며 살았는데 왜 죽습니까?” 아까 26살 청년보세요. 친구 도와주려하다가 지가 자살했잖아요. 친구도 죽고. 친구를 왜 좋아해요? 분명히 교회를 안 다녔을 거예요. 교회 안 다녔으니까 외로워서 친구가 내 유일한 행복의 바탕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닙니까.
20대 다 그래요. 부모 말 안 듣고 매일 밤11시 12시에 들어오는 이유가 친구 만나거든요. 친구 위해서 간 떼 주고 다해요. 그리고 친구한테 해주는 것이 나름대로의 선악체계에서 진리고 선이에요. (교회 나가서도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이렇게 가르쳐요.) 요한일서3장16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래서 그 변호를 잘 이야기하셨는데, 그래서 불신앙인데 근거가 있어야 돼요. 뭐냐, 성경을 보면 어느 성경도 나는 내가 지킬 수가 없나이다. 라고 빈 손들고 나오면 그게 바로 강도요, 세리고, 창기고, 그게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사건에 부합되는 거예요.
그러니 요점은 뭐냐 하면 본인을 신앙인으로 보지 말고 뭐로 보자? 불신앙으로 보자 말이죠. 불신앙으로 보게 되면 가볍고, 자유롭고, 감사되고, 신나고, 휘파람 못 불어도 휘파람 나옵니다. 나 못 났는데 뭘. 나 못났다 하잖아요. 마귀가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뭔가 꼭 지켜야 되고 마귀에게 미혹되어야 되는데 그걸 성경에서는 나는 못났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간단하게 했어요.
이미 너희는 죽은 자요. 갈라디아서, 로마서. 이미 나는 죽은 자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고린도 후서도 나오고 고린도 전서에도 나와요.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나는 죽고 주님의 생명이 나오게 함이라. 그리고 나는 사실은 죽은 자지만 나는 산자고, 특히 고린도전서4장13절, 만물의 찌끼 같이 상대한다.
지금 이 강의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신앙생활 굉장히 편하지요. 내 존재를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지고 갈 수밖에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 나를 불신앙자로 내가 그렇게 촉구하는 거예요. 독촉하는 거고. 불신앙자로. 근거가 뭐냐 성경 말씀 어디로 들춰봐도 성경 말씀대로 못 살아요. 예수님은 피리를 부르는데 너희는 춤추지 아니하고, 딱 나네. 우리는 갑자기 어디서 로또되고 돈 들어오게 되면 그 때 춤출 줄 알지 주님 말씀에 춤출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르박을 출지 뭘 출지 그것도 우리는 몰라요. 주님의 말씀에 기뻐 춤추지 않아요. 말씀대로 사니까 돈이 들어올 때, 내가 십일조가 좋은 게 아니고 십일조 했는데 백배나 들어올 때 그 때가 좋은 거죠. 그 때가. 딸이 시집가는데 뭐 어떻게 잘못돼가지고 재벌3세하고 결혼할 때 그 때가 좋은 거죠. 아무것도 해오지 마라. 너희 집에 못 사는 거 아니까 친정집에 내가 집 사줄게. 가게 내 줄게. 요럴 때 물론 드라마이야기입니다마는. 그런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애가 안 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굳이 불신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을 못 속이거든요. 눈만 뜨면 편한 것. 눈만 뜨면 내 자랑할 것. 남이 나를 터치 안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 그냥 이대로 편한 데로 사는 것. 뭐 예의상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축복입니다. 복음 알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겠습니다. 말은 하지만 결국은 자기 존재등치를 자기가 감당을 못합니다.
마지막입니다. 자, 육에서 영으로, 영에서 육으로 갈 때 정말 성령이 갑자기 사건으로 와가지고 육에서 넘어가게 되면 나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해요. 주님 감사하다가 한 3초, 2초. 긴 사람은 2초, 짧은 사람은 0.2초. 다시 곧장 존재로 와버릴 때 이거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육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기 때문에 자살하고 이러면 안돼요. 신앙도 없는데 자살은 왜 해요. 미쳤어요. 그냥 육으로 왔으면 스스로 불신앙을 하되 이것이 근거가 있어야 돼요. 말씀에 근거해서 불신앙이 되게 되면 가볍고 감사하고 기뻐요.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한테 향하도록 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분한테 행해서 그분이 우리에 성령 줬기 때문에 내가 죄인 맞구나! 라는 것을 사건화된 고백을 나오게 했으니까 이 고백마저 주님의 솜씨지 내 솜씨 아니거든요. 누가 얼마나 IQ가 높아요? 이런 고백이 나오겠어요? 나 믿음 하나도 없어요. 나 지금 지옥가도 마땅하지요. 그것도 아주 벌벌떨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편하게 이야기하니까 둘 다 비꼬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요.
근거가 말씀인데, 마지막으로 말할 것은 근거가 말씀이라고까지 나왔어요. 말씀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그렇게 왔다 갔다 한다는데, 그 말씀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요거까지 이야기해야 돼요. 그 다음에 나옵니다. 17절에 속지 말라 해놓고 각양 은사와 모든 은사는 어디서 옵니까? 위에서 오지요. 위에서 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완료된 체 온다는 거죠. 완성된 체. 더 추가하거나 더 보탤 게 없이 와요.
더 추가하고 보탤 게 없으니까 나 존재를 깨는 겁니다. 한 예를 들게 되면 12개월 어린애가 귤을 하나 먹는데 귤 썩은 것도 모르고 귤이 좋다고 먹습니다. 그럴 때 마침 엄마가 보니까 썩은 귤을 먹기 직전이에요. 엄마가 화들짝 놀라면서 이 귤을 벽에다가 던져서 이걸 깨버립니다. 깨버리지요. 각양 좋은 것은 엄마한테 오기 때문에 애는 이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미혹 받아가지고 우리는 늘 미혹 받잖아요. 편한 것, 내 자랑. 이걸 “업이야!” “안 돼!” 이런 뜻이에요. “어딜? 어딜?” 이런 뜻이다 말이죠. 업이야! 하고 이걸 깨버릴 때, 이건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것이 합당하지 이건 합당치 않아. 라는 식으로 할 때 우리는 요 날아가는 귤과 함께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불신앙을 느끼는 거예요.
불신앙을 가볍게 느낀다는 말은 뭐냐, 이미 뭐가 왔다? 내가 뭘 해도 말씀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야고보서2장에 나오거든요. 주제넘게 남한테 비판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하면서 나왔어요. 우리는 뭐든지 못 지켜요. 그런데 그걸 기쁘고 즐겁고 가볍게 고백해야 된다 말이에요.
그걸 만약에 그럼 그렇게 고백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리 되어버리면 그건 마귀의 시험이에요. “업이야!” 이걸 던짐으로서 더 보탤 것도 없고 추가될 남아있는 행동도 없어요. 다만 뭐만 하면 된다? 나는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이런 고백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사건화 되어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씻어낸 주님의 본인 솜씨 아닙니까? 본인이 뻔히 알면서도 또 묻네.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 다 하셨잖아요. 저 못하지요. 라는 식으로 말씀이 우리를 이렇게 근거를 잡아서 주는 겁니다.
1강을 다시 하게 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는 것은 우리가 손대라는 말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그 형편에 있는 것처럼 주께서 주시겠다는데 안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다만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흩어진 열 두 지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야고보서의 한 말, 한 말씀이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지간히도 많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내 말씀 지켜서 주께 영광 돌렸다는 핑계를 돌리지만 따지고 보니까 내 영광이었습니다. 마귀의 솜씨에 미혹에 또 넘어갔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께서 늘 역사하셔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십자가의 공로만 더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