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1110a 디도서3장8절(선한 일)-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71110a 디도서3장8절(선한 일)-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8절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미쁘도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 확고하다, 뭐 그런 뜻이죠. “원컨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는 말은 확고하니까 주저하지 말고 자신만만하게 하라, 이 말이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는 구별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구별되어야 되는데, 사도가 디도에게 보내는 이 디도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구주예수를 보내시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고 고대했던 것이 아니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선이 없어서 그렇게 안달부리고 애타고 가슴치고 통곡하고 애걸복통하고, 뭐 그러지는 않죠. 사람들이 자살할 때 뭐 선이 없어서 자살합니까? 뭐가 없어서 자살해요? 돈이 없어서 자살하죠. 힘이 없어서 자살하고 그리고 외로워서 하고.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는 이 하나님의 일은 끝까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그야말로 새롭게 하심이거든요. 새롭게 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데다가 추가해서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식이 아니에요. 새롭게 하심이란 세상을 보는, 또는 세상을 사는 모든 관점 자체가 획기적으로 완전히 다른 겁니다. 누가 봤으면 “저 인간 미쳤나? 왜 저러지?”라고 할 정도로. 자,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상인으로 봅니다. 정상인. 정상인으로 보는데, 자기를 정상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철학이랄까? 세상 보는 태도, 살아가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의도, 뭔가 노리는 것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죠.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절대화라고 하는 것은 견줄만한 대상자가 안 보일 때까지를 말합니다. 예선 본선 준결승 결승, 끝까지 남을 때 제 일인자가 되는 겁니다. 일인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말고 다른 견줄 대상이 없는 것. 어떤 분야든 간에 최고가 되는 거예요. 최고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자존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특히 종교분야에서 이러한 본성을 인간들이 접지를 않아요. 이걸 포기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에게 전도 열 명 했다고 칭찬을 하게 되면, 아홉 명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두 명만 전도하면 자기가 최고가 되죠. 어떤 교인이 새벽기도를 일 년 동안 다섯 번만 빠지고 다 나왔다고 칭찬하게 되면, 그러면 몇 번만 빠지면 일등을 할 수가 있습니까? 네 번만 빠지면 되죠. 어떤 교인이 교회에 봉사하는데 일주일에 세 번 나와서 봉사한다면 자기는 몇 번 나오면 돼요? 네 번 나오면 되죠. 세 번 나와서는 영 성이 안 차요. 기분이 나빠서 안 돼요. 사람은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최고의 자리에요. 견줄 대상이 없는 최고의 자리까지 이르는 겁니다. 그래서 노벨상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거예요. 최고의 자리니까. 재벌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도달해야 될 목표, 회사를 자기 회사로 만들어야 될 그 목표가 되는 겁니다. 그 드라마에서 자기가 재벌총수가 되는 것과 킬러영화에서 사람들을 자기가 다 쏴 죽이는 것하고 차이점이 다를까요? 같을까요? 똑같죠. 그리고 대통령 선거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두 명입니까? 단 한 명이죠. 최고의 하나로 목표가 있는 이상 사람은 어떤 역경과 수모도 감내 해내가면서 기어이 사는 이유와 목적을 자기는 확고히 가졌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자라고 하는 것은, 견줄 대상이 없다고 했으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경쟁자가 없다는 겁니다. 경쟁자. 그럼 경쟁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힘과 힘의 마주침이죠. 힘과 힘의 마주침이에요. 싸움이죠. 오랜만에 학교 동창생들 만나보세요. 힘과 힘의 마주침입니다. 동창회에 나오면 꼭 못난 것들이 자랑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소주 일곱 병 먹는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다른 동창생들은 차 자랑하는데, 이번에 차 바꿨다고 자랑하는데, 자기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소주 일곱 병 먹는다는 것. 소주회사 홍보하러 나왔나? 그걸 왜 자랑해요? 기어코 자랑하려고 하는 오기가 그런 오기가 있는 겁니다. 자, 그럼 한 번 물읍시다. 동창회에서 소주 일곱 병 먹는다고 자랑하는 것하고 목사들 모임에서, 우리교회는 교인 오천 명 모인다고 자랑하는 것 하고 같아요? 안 같아요? 똑같죠. 똑같아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하셨는데, 중생이라는 뜻 자체가 새롭다는 뜻이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도 새로운 거죠. 새롭다 하는 것은, 어느 자리에서 새롭냐 하면 인간들이 웅성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인간들과 다른 새로운 사람의 등장을 말하죠. 그럼 오늘 본문에서 선을 행한다고 할 때에 이미 선은 선으로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악과 짝을 이뤄요. 그러면 악이 뭐냐는 이미 여기서 결정이 났죠. 악이 뭡니까? 중생도 없고 새롭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악이 되겠죠. 그렇죠. 사모님, 옆집 가게 아줌마가 선입니까? 악입니까? 중생이 안 됐죠? 새롭게 성령의 거듭남이 없죠? 그러면 그거는 어두움이고 악이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중생, 거듭났다고 자부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다고 자부하면서도 단골 많은 그 옆집아줌마가 부럽다면, 그러면 어딜 봐서 새로운 겁니까? 그렇게 되면 어딜 봐서 새로워요? 어떤 목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했다, 그런데 신학교 동기 모임에 가니까 동기는 오천 명 목회를 하고 있다, 아, 부럽다! 그게 부러운 겁니까? 도대체 어딜 봐서 거듭났어요? 거듭난 티가 안 나는데? 오천 명이 그렇게 부러워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부럽더냐? 새롭게 되었으면 새롭게 된, 이거는 남이 봐도 도저히 인간 힘으로 달성 할 수 없는 다른 게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8절에 보게 되면 “선한 일을 힘쓰게 함이라” 선한 일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 성령 받은 사람의 선한 일과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선한 일과 다를까요? 같을까요? 같죠. 같다는 말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선한 일은 이미 예수님의 재가를 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선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까? 악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까? 아니면 중성입니까? 몇 번 입니까? 중성도 아니고 중립도 아니고 선한자도 아니고, 악한자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 안에 뭐가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악한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죠. 작용해서 예수님을 떠밀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올 때는 성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의 성질이 들어있거든요. 그러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을 예수님처럼 떠밀 수밖에 없는 그 요소가 그 사람 속에 가득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 아비의 그 자식이라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안 미워할까요?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근거로 해서해야 돼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를 하게 되면 선한 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미워해서 죽인 그 분이 진정 선한 분이었다. 의인이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그것만이 선한 일이에요. 지난 시간에 강의했던 디도서 3장 5절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주님의 선행에다가 우리의 선행까지 보태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될 텐데, 왜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차버리느냐 이 말이죠. 배격하는 이유가 뭡니까? 참 그게 상당히 따지기 힘든 일이에요. 또 디도서 2장 14절에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하지 않고 불법에서 구속하지 않으면 왜 선한 일이 안 되느냐 이 말이죠. 왜 인간이 좋은 말로 하면 선한 일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좋은 명령과 좋은 교훈과 좋은 지시에 고분고분 순종하면 그게 왜 선한 일이 아니냐 이 말이죠. 그게 왜 불법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희한하죠. 디도서 3장 5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우리는 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이거는 주님보시기에 이것이 불법이 되는 겁니다. 의롭지 않은 행동, 악한 행동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이 굉장히 많아요. 왜 우리가 하는 일이 불법이고 악한 일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부터 따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기 흐름을 전혀 파악을 못하게 됩니다. 자칫하게 되면 이런 게 돼요. 나는 선하다, 라는 것을 자랑하게 돼버려요. 내가 선하다. 내가 선하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고 중생의 씻음이 없는 사람의 전매특허처럼 내쏟는 것이 바로 그거거든요. 아까 경쟁이라는 말을 했죠. 견줄 대상이 없는 것. 인간이 교회에서도 선함과 착함의 경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분명히 있죠. “내가 선하다.” “아니야 내가 선해.” “내가 의로워!” “아니야 내가 의로워!” 그렇게 경쟁이 됐다는 자체가 둘 다 다 가짜라는 뜻이에요. 둘 다가 다 가짜에요. 만약에 그 중에 한 사람이 진짜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니가 내세우는 행위가 그렇게 의로우면 나는 반대로 갈게. 나는 불법이고 악하다. 됐냐?” 그렇게 나온다니까. 그렇게. “예. 나 개입니다.” 세리처럼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죄인이라고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의롭다는 그걸 유지하는 것이 힘듭니까? 나는 죄인 맞습니다, 라고 하는 그게 힘듭니까? 어느 게 힘들겠어요? 나는 이래서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이 힘들겠어요? 나는 뭘 해도 못났다, 라는 것이 힘들겠어요? 어느 쪽이 그걸 유지하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하는 것은 덜 힘들죠. 왜냐면 평소에 하는 행세가 그거거든요. 근데 그거하고 반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강의를 다시하게 되면 사람이 행동할 때 다 노림수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뭐라고 했던가요? 그 목적은 견줄 대상자가 안 보일 때까지 자기를 절대화 하는 거예요. 자기 절대화. 낚시 노는 데 가면 낚시고수 따로 있고 바둑 두는 데 가면 바둑고수 따로 있고 등산하는 데 가면 등산고수 따로 있고 물리학상식이야기하면 그 바닥에 고수가 따로 있고 교회사 공부하러 가면 교회사 도사가 따로 있고 성경봉독 했다고 자랑하면 성경 다 외운다는 동네가 따로 있고. 그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하면 그게 사는 목적, 자기 절대화가 되는 밑천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님. 나는 절대화되기 싫어요. 나는 그런 목적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보편화시키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묻고 싶어요. 그럼 왜 사는데? 꼴찌 되려고 살아요? “꼴찌는 아니고 3등 하려고요.” 4등 앞에 3등은 절대자에요. “나는 한 25등요.” 26등 앞에 25등은 절대자에요. 딴 사람보다 못하고 24등한테 밀리지만 나는 너하고 비교해서 낫다는 이게 있단 말이죠. 나는 너보다 낫다는 자체가 나를 책망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 너보다 나으니까. 책망하지 말라는 요소를 품고 있다는 말은, 지금은 25등이지만 보라! 언젠가는 나는 24등, 23등으로 차츰차츰 나아가겠다. 어디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그런데 2등까지 올라갔는데, 1등 안 돼서 좀 속상했는데, 1등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야호! 하고 이젠 신나하겠죠. 모든 인간은 사탄의 정신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신이 되고 싶은 이 마음을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다 갖고 있습니다. 자, 꼭 일등, 이등이 안 되도 이미 그런 잠재성을 다 갖고 있어요. 일등이 안 되도 견줄만한 대상이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시도를 하는데, 시도하는 그 과정 속에서 이미 일등이 안 되도 절대자 행세는 다 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날 건드리지 마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날 무시하지 마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요즘 목욕 값(모욕감)얼맙니까? 팔천 원입니까? 요 앞에 육천 원입니까?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부가 결혼했다. 절대자 두 명 만난 거예요. 그래서 호시탐탐 관찰합니다. “니가 나에게 모욕감을 줬나?” “니는 나에게 안 줬나?” 호시탐탐 이거 노리고 있어요. 만약에 아내가 차를 몰고 갔는데 바쁜 일이 있어가지고 딴 데 정신을 팔다가 신호위반으로 범칙금 오만 원짜리 하나 끊어왔다. 그러면 그건 이미 아내는 범칙금 끊게 된 것을 인정하죠. “내가 바보같이 과속했어.”하고 아내가 인정하는 그것에 남편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됩니까? “그까짓 것 오만 원 가지고 마음 상하지 마. 내가 열심히 일해서 오만 원 더 벌어줄게. 나는 돈 오만 원이 아까운 게 아니고 오만 원 때문에 마음 상하는, 당신의 마음에 생채기 나는 그게 난 더 아쉽고 아까워. 걱정하지 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바쁜 일 있는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라는 하춘화 노래 있잖아요. 이렇게 되기를 상대방한테 기대를 하는데, 남편은 그걸 잘됐다 해가지고 “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오만 원어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차 몰고 다닐 때 당신이 한 두 번이야?”라고 이렇게 나와 버리면, 이거는 상대방이 모르는 상태도 아니고 이미 아는 상태에다가 윽박지르는 것이죠. 왜 윽박지릅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서 갑을관계를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아내 쪽에서 실수 했다고 해서 갑을 관계가 바뀝니까? 일단은 작전상 후퇴를 하죠. ‘그래! 니 어디 한 번 두고 보자!’하고 노리죠. 그러다 카드 값 나오게 되면 살핍니다. “나는 오만 원 했지만 당신은 오십만 원이야.”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이거는 뭐 부부가 아니고 원수 간에 전쟁하려고 결혼한 것처럼. 이거는 심지어 부부뿐만 아니고 자식과 부모사이에도 마찬가지에요. “성적 한 번 보자. 성적 꼬락서니하고는! 내가 반드시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라고 하니까 빈둥대며 누워만 있고. 이러다 빌어먹는 거야.”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나도 안다. 답안지 하나씩 밀려 써가지고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죠. 인간들이 말을 내뱉거나 행동을 할 때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자기의 속내를 한 걸음 더 성취성에 가깝도록, 한 발짝 더 업그레이드되는 절호의 찬스로 이용하기 마련이에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쑤셔놔야 나는 그거보다 덜 약점이 있는 것처럼 올라가죠. 이렇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불연속성이 아니고 결국은 의와 선함의 연속성을 추구하는 셈이 됩니다. 어디까지? 그 목표는 어디까지입니까? 나는 의로움과 선함에 있어서 남하고 견줄 대상이 없을 정도로 나는 내 나름대로 나는 최고다, 라고 자랑질 할 때까지.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여러 사람 상대를 하면 이거는 윤리가 되고, 개인적으로 이걸 가지고 양심을 거론하면 도덕이 되는 거예요. 도덕과 양심은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도서 3장 5절에 보세요. 거기를 보면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연속성이에요? 불연속성이에요? 불연속성이죠. 끊어져있죠. 단절되어 있죠. 본인 스스로 단절됩니까? 인간 스스로 단절할 수가 없어요. 단절하겠다는 그 의지 자체가 이미 단절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요. 단절했는데 그 사이에 내 의지가 포함되어 버리면 그거는 단절이 아니고 연결이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뭔가 바라는 거예요. 단절을 하고, 일단 내가 죄인이라고 하고, 그 죄인에 대해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나는 다시 이어져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내가 미리 사전에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이 결국은 불연속성이 아니라, 그 생각 자체를 소위 스스로 단절했다는 자리에다가 자기 생각, 의지를 집어넣어버리면 이게 바로 윤리와 도덕이 되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웅서사구조라고 해요. 쉽게 영웅이야기라고 해요. 영웅이야기를 보면, 영웅들의 특징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반전이 있어요. 영웅인데 그냥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실패를 겪어요. 역경을 겪고. 하지만 영웅은 어떻게 된다? 그 실패와 극복을 통해서 오히려 그동안 몰랐던, 자기에게 갖추어지지 않았던 그러한 에너지가 역경과 실패를 통해서 전환되게 되면, 그 놀라운 에너지를 가지고 적들을 부수고 기어이 산 넘고 물 건너서 마법의 성에 갇힌 자기 애인을 건져내잖아요. 영웅구조가 심청전도 그렇고 춘향전도 그렇고. 자기 신랑이 거지라고 여겼는데, 단절되어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거지가 아니라 그 마을에 암행어사로 나타난 거예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은 그 단절너머에 있는 그 존재가 단절 이쪽에 있는 내 존재와 같은 존재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포기하면 안 되고, 고집이 보통고집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안 되더라도 내가 절대자가 되려면 이 정도 수모는 내가 감당을 해줄 때, 나는 오히려 절대자 되는 것을 앞당길 수 있다. 나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영웅설화, 옛날 모든 설화가 영웅설화에요. 단군도 마찬가지고. 단군도 사람 되기 위해서 곰이 뭘 먹었어요? 쑥과 마늘을 먹었죠. 어벤져스라든가, 지구를 지키는 인류의 영웅들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악당들에게 져요. 좀 밀려요. 하지만 우우웅~~하고 내부발동기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나오면 이거는 감당도 못할 정도로 파워가 나오죠. “파워 레인저!”하고 쭉 나오면 전부 다 무너트리죠. 남자아이들이 이걸 왜 좋아합니까? 결국은 정의는 이긴다. 그거 아닙니까? 정의가 이기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이 땅에서? 졌죠. 이번 주일 낮 설교가 그겁니다. 약하신 그리스도. 이게 팩트fact입니다. 이게 사실이에요. 조금이라도 힘주시는 주님이 나오면 백퍼센트 사탄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 악마에요. 예수님은 버림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도 이 땅에서 어떻게 돼야 해요? 같이 버림받아야 해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잖아요. 양쪽 다로부터 버림받았죠. 성도도 양쪽 다에서 버림받아야 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왜? 버림받을만하잖아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인데 뭐 거기에 서글픔과 서러움과 분통함이 있어서는 안 돼요. “나를 지옥 보내다니!”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지옥갈만 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실 때 구원받은 세리가 예수님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5미터 가까이 오신 것을 엿보았다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이에요.”하면서 꺼이꺼이 울면서 할 때 “그래. 니가 죄인인 걸 알았구나. 너 같은 인간이 의인 된다”고 하니까, 흑흑흑~히히히 울다가 웃으면서 ‘성공했어!’라고, 이렇게 혼자 까불고 그랬습니까?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그 단절이, 천국과 끊어짐이 하나님의 조치인데, 그 조치에 대해서 이제야 합당한 조치 맞습니다, 라고 동의를 하는 거예요. 죄인은 천국 못 간다는 것에 대해서 전에는 조금 불만이었는데, 이게 불만을 품을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나도 정말 하나님다운 당연한 처리였습니다. 행정조치였습니다, 라고 수용하게 되면 그 수용한 그것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 그 조치, 내가 멸망 받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는 그 당연한 조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죄를 위해서 대신했다는 것과 결합이 되는 거예요. 그 조치와 대신함이 결합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고개를 내밀면 안 돼요. “구원은 무슨 구원 나 같은 인간에게...내가 구원 못 받는 것은 당연하지.” 그 당연함과 예수님의 대신하심이 결합이 되어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이 사전에 노림수나 꼼수나 조작이 거기에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좀 쉬운 거거든요. 그럼 이제부터는 좀 난해하게 접어들어야 되겠죠. 아까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선한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짝을 이루는 무엇이 악한 일이냐를 알아야 된다고 했죠. 아까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어떤 인간이 만약에 지옥 간다면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개인적인 죄 때문에 지옥 간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나는 이 땅에서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어느 쪽이에요?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나만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니면 다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죠. 그걸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디도서나 신약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역사, 구약역사를 배제하면 안 돼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죠. 갈 때 하나님께서 개입합니다. 풍랑이입니다. 그때 요나는 물에 빠지잖아요. 강제로 물에 빠졌죠. 사실은 반강제죠. “자진해서 내가 죽을게.”라고 해서 빠졌지만. 그것도 뭐 어쩔 수 없이 빠졌지만. 그럴 때 요나가 물에 빠진 것을 쳐다보던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요나 덕분에 자신들은 살았다고 생각하겠죠. 그렇죠? 그럼 어느 쪽이 산 쪽이에요? 어느 쪽이 하나님의 성전을 알고, 어느 쪽이 주님의 깊은 은혜를 아는 쪽입니까? 물에 안 빠진 쪽이에요? 물에 빠진 쪽이에요? 요나 쪽이에요? 아니면 자기들은 좋다고 휘파람 불면서 여행했던 그쪽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요나 쪽이죠. 요나 쪽. 하나님이 일하는 기둥이 요나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 이 말이죠. 요나죠. 그러면 그들은 구원받으려면 어디를 가야 돼요? 요나 뛰어내릴 때 그들도 같이 뛰어내려야죠. 저게 살길이라고. 근데 미쳤어요? 뛰어내리게? 바닷물도 차가운데. 물이 좀 온도가 따뜻하면 수영겸 하겠는데, 뭐 튜브도 없고. 혼자 죽으면 되지. 다른 사람들은 살아야 될 게 아닙니까? 왜 죽는데 같이 따라 죽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요나는 바로, 예수님의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에요. 아무도 예수님을 따라 죽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악하다는 겁니다. 자, 악하다는 것의 정의가 나왔어요. 악하다는 것은 모든 생각과 행동들은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다? 누를 위함입니까?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행동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악한 거예요. 왜냐하면 중심 기둥이 누구기 때문에? 나이기 때문에. 요나도 마찬가지고 자기 살기 위해서 갔는데, 근데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물속에 풍덩하고 던져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근데 그걸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하나님의 은혜로 보겠습니까? 아니면 참 당신 인생도 기구하다고 보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어요? 참 처량하고 가련하게 보겠죠.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잖아요. 그것도 젊은 나이에. 그래서 아플 때 긴급호출해서 119불렀는데, 119가 듣고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오빠가 죽죠.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얼마나 애통해했는지 몰라요. 많이 울었어요. 그것도 젊은 나이에. 나이도 뭐 사십 오세인가 하는 그런 나이에. 물론 사십 오세라고 안 나왔지만. 사십 오세에 죽은 사람은 김주혁이고. 하여튼 젊은 나이에요. 결혼도 안 한 것 같아요. 올케언니 없는 것 보니까 결혼도 안 한 것 같아요. 김주혁 아닙니까? 결혼도 안 했다, 나이 사십 중반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까 얼마나 처량하겠어요. 세상의 좋은 맛도 보지 못하고. 그것도 예수님을 뒤에서 욕했습니까? “예수 죽어라!”라고. “예수 당신 싫어!”라고 이랬습니까? 경쟁에서 우수상 받았죠. 예수 잘 모신다고. 그 여동생 마리아는 턱 밑에 앉아 말씀 들어서 우수상 받았고. 언니 마리아는 요리 잘해가지고, 잡채라든지 고추튀김이라든지, 백날 해야 드시지도 않는데. 그런 것 해가지고 또 칭찬받고. 그리고 올 때마다 숙소를 정해가지고 잘 대접하고. 이거 뭐 더할 나위 없이 충성봉사 다 했는데, 돌아온 상이 뭡니까? “에라 죽어라!”가 아닙니까? “죽어라!”가 상이었어요. “죽어라!”가. 마리아도 실망했고, 마르다도 실망했고, 일가친척 유대인들 다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그 나사로를 죽이는 것은, 바로 마리아로 하여금 나중에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을 때 마리아가 향수병을 깹니다. 뭔가 눈치를 챘어요. “지금은 따라 죽을 수 없지만 내가 귀히 여기는 향수, 향수 같은 존재가 예수님 당신의 존재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 앞에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내가 구원되고 안 되고의 모든 권한은, 결정권은 우리가 주님 앞에 얼마나 섬겼는가, 대접했는가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집에 방문하신 것도 우리가 대접 잘 해서 방문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간택이었고 채택이었습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있음 자체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중심기둥으로서 여기 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중심기둥. 그럼 그전까지의 모든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고, 누가 중심이었습니까? 각자가, 내가 선악의 중심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내가 선악의 중심이 돼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건 칼빈의 커다란 오류가 발생돼요. ①번. 선한 것이 있고 ②번. 악한 것이 있고 ③번.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 또는 중립적인 그런 가치관도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①번 ②번만 있는 게 아니고, ①번 ②번 ③번 세 개가 있는 거예요. 도둑질하는 것은 악한 것이고, 남을 구제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집에서 오줌 싸는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칼빈의 이야기에요. 이게 이단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이단이잖아요. 이게. 결국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이(①번②번③번)앞에 관찰자의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각자 본인들이 있는 거예요. 본인들에게 선과 악과 중성이 있다는 이 자체가 뭐냐,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연속성, 이 자체가 바로 악인 거예요. 이 자체가. 중성으로 있을 수가 없어요. 선악과지, 선악중과가 아니잖아요.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이에요. 인간의 윤리도덕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관계없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요소를 인간들이 자꾸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마귀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게 잘못이라면,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 중심은요, 세상에! 중성도 없어요. 일어나는 모든 일이, 파리 한 마리가 방에서 날아다닌다, 파리 한 마리 날아다니는 것도, 모든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되심과 복음과 다 연관성이 있어요. 연관성. 근데 인간이 따지는 윤리도덕은, ‘요거는 나의 선한 것과 관련되어 있고, 이런 짓은 내가 악하게 되고, 아, 요것은 선도 아니고 중간쯤 되네.’ 본인이 선과 악과 중립을, 연관성을 본인이 정해버려요. 본인이 정해버리면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이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중성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중성 자체, 중성적인 가치관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 만들 때 처음부터 없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고 할 때, 이미 안 따먹으면 선이고 따먹으면 악이 되죠. 근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문제 출제를 어디 아담 본인이 제안했습니까? 하나님과 협의해서 된 겁니까? 일방적으로 에덴동산에 꽂은 겁니까?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주셨죠. 일방적으로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본인이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 이 말이죠. “하나님! 선악과 그 문제 말고 내가 따로 문제를 내겠습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문제보다도, 니는 잠 잘 때 오른쪽으로 누워라! 뭐 이런 문제를 제가 내서 저는 오른쪽으로 눕겠습니다.” 뭐 이런 식이라. 자기가 출제내고 자기가 판단하고. 실제로 이게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의 일상이 다 그렇잖아요. 우리 일상이. 고아원 방문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 친한 친구의 엄마가 아프다고 내가 그 친구를 위해서 내가 아끼던 돈을 주겠다. 이것은 누가 봐도 선한 것이다, 라고 자부했던 울산의 한 청년은 그 돈 때문에 자살했어요. 오늘 뉴스에 나왔어요. 제가 그걸 가지고 안양강의에서 깊이 많이 다루었어요. “이 청년의 문제점을 발견하라.” 뭐 이런 것. 친구의 엄마가 아픈데 왜 도와줘야 해요? 왜 도와줘야 합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엄마가 아픈데 도와줬습니까? 안 도와주잖아요. 근데 친구 엄마가 아픈데 왜 도와줘야 합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니까 도와준다는 거예요. 누구 친군데? 내 친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관계를 누구 중심으로 돌립니까? 내 친구, 나죠. 내 친구니까 도와주는 거예요. 자식한테 도시락을 싸줬다, 왜 싸줍니까? 내 자식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 선입니까?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라고 하죠. 예수님은 갑자기 개입해서 “그 귀한 자식이냐? 나냐?”하고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인생에다가. “아이고, 자식 귀한 것은 선과 악을 초월해서 본능입니다.”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그걸 본능이라고 하면 안 돼요. 죄라고 이야기를 해야죠. 자식한테 나쁜 짓시키는 것이 죄가 아니고,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아이고, 그거는 죄 짓고 싶어서 짓는 것이 아니고 본능입니다.”라고 하는데, 죄라는 것은 짓고 싶어서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남의 자식 죽는다고 해서 그렇게 가슴 아프면 자기 자식은 안 죽어도 가슴 아파요. 본능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중심이 내 중심이라서 그런 거예요. 말을 분명히 해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내 자식 사랑하고 하는 그게 나쁩니까?”라고 화를 내면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이야기를 하면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발작을. 점잖은 체 해도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그게 나쁩니까? 나쁘죠. 왜 나쁩니까? 세상의 모든 중심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니는 거기다가 건방지게, 주님의 중심의 관계에다가 니가 함부로 거기에 끼어든다는 그 죄를 짓는 것이니까. “이거는 내 자식입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내 자식이라고. 주님 복음을 위해서, 주님 영광을 위해서 만든 자식인데, 존재인데,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이거 내 자식이라는 거예요. 그럼 뭐 아프면 자기 것 다 되겠네요? 버스에 발 집어넣어서 발이 아프면 그 버스 자기 것 되겠네요?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세세한 움직임을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움직인다고 되어 있어요. 그 소용돌이가. 그런데 우리는 그 중에서 자기 몫을 따로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걸 뽑아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그리스도 중심이 싫어. 요거 뽑아낸 만큼은, 이건 내 중심이고 싶어.’하고 끼어드는 거예요. 주님께 영광 돌리는 그 현장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짜증나서, “와? 내 건 없노?” 하고 끼어드는 겁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열왕기하 5장에 보면 게하시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고치러 온다고 선물을 가득 들고 왔거든요.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그냥 명령만 하고. 명령만하니까, 지금 게하시는 병 낫는 것에는 관심도 없어요. 아이고, 저 가져온 선물을 그냥 가져가면 아깝다고 해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이 게하시가 그 선물을 가로챈 게 되죠. 지금 엘리사는 선지자잖아요. 선지자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고쳐 줄 병은 아무것도 없어요. 엘리사는 아무 병도 못 고칩니다. 다만 엘리사는 주님이 친히 하시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변사죠. “옛날 그때에~” 목소리 깔고 하는 변사 있잖아요. “김중배 하고~” 이렇게 하는 변사에요. 변사.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하는 변사인데, 그 변사의 내용이 뭐냐 하면 “주님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모든 것이 예수 중심으로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변사 역할을 하는 거예요. 변사역할. 오늘날 선지자가 누굽니까? 성도가 선지자죠. 성도가 이 땅에서 변사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도 주님은 머리카락 세 개를 희게 했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했던 것이었습니다.” 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염색을 했는데 염색약이 독해서 다음부터는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주님을 증거 하는 변사가 되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왜? 중심이 자기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심지어 나한테 일어나는 일도 내 중심하라고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이 세상이 주님 중심으로 돌아감을 증거 하라고 나한테서 일어나는, 그런 주님과 성도의 관계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중심이거든요. 자기중심밖에 없는 세상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바로 그 새로움이에요. 더러운 내가 깨끗한 내가 되는 것이 새로움이 아니고, 더러운 내가 주님 중심의 나로 바뀔 때 그게 새로운 거예요. 나 중심이 뽑혀버리고 거기다가 주님 중심의 기둥이 박히는 것, 이게 새로운 거예요. 다른 새로움은 없어요. 선과 악의 중심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하나님 중심이었는데 선악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훼손됨으로 말미암아 그 중심이 마귀나라, 인간중심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중심이. 인간이 선악과를 아는 자기를 중심으로 삼아서 신처럼 되겠다고 설쳐댔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중심의 중심을 그 다음에 뭐로 옮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옮겨야 되겠죠. 옮기는데, 그냥 옮겨지는 것이 아니에요.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으로 바뀝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이 됩니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선이 되고,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악이 되는, 그 가치의 전적인 바꿔치기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일어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