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3b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
20171113b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자체가, 시온 산이 보통 산이에요. 그런데 시온 산을 지정했다는 말은, 시온 산과 관련된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만족과는 다른 특수한 민족인 것을 알아라. 특수하다는 말은, 그들의 원하는 존재의 확장에 의하면 무조건 나한테 잘해주고, 무조건 나를 위해주고, 건강해야 되고, 오래 살고, 복 받고 이렇게 특수하게 다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에 옮길 때 어떻게 특수한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에요. 말씀을 완성시킨 분이 이 땅에 와서 특수하게 살았잖아요. 특수한 마지막 꼴을 보세요. 어떻게 끝났습니까? 그냥 아파 죽은 게 아니에요. 맞아 죽었어요. 심지어 아버지한테 저주받아 죽었지요. 사람에게 버림받고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양쪽 다 버림받았는데 그것으로 말씀을 이루는 거예요.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오직 율법을 묵상한다 했지요. 그 율법이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화로 실제로 전쟁을 통해서 이 땅에서 율법의 완성이 뭔지 남기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시편 1편에서. 오늘은 시편 2편이잖아요. 말씀이 고요히 눈 내리듯이 자고나면 하얗게 눈이 쌓이듯이 쌓이는 게 아니고 시편 2편에 보면, 열 왕이 어찌하여 분노하면, 벌써 반대세력이 있지요. 이 세상은 그러한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착한 이웃사촌들이에요. 아플 때 도와주고 돈 없으면 빌려주고, 대출해주고. 4프로로. 은행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들이 필요한 건 이 세상에 다 있어요. 병원 있지요, 법원 있지요, 아이들 놀이터 있지요, 학교 있지요. 그게 하나님 좋으라고 있는 겁니까? 군대 있지요. 군대 있고 군목 있고, 병원 있고 원목 있고, 학교 있고 교목 있고. 그것 전부 다 하나님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회사가 왜 있습니까? 인간에게 필요하니까 있는 거예요. 의료보험제도, 국가. 나라 없어서 난민 꼴 나면 나라가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군함도>란 영화에서 조선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학대받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나라가 잃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 없으면 그렇게 설움 받는 거예요. 어디 가도 한국영사관이 없으면 얼마나 설움 받겠어요. 맞아도 다 빼앗겨도 호소할 데 없잖아요. 역시 나라에 충성해야 돼. 외국 나가서 태극기 보고 눈물 철철 흘리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다가 또 한국에 와선 헤헤거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간들에 필요해서 하는 겁니다. 이것은 범주 확장의 일부에요. 전혀 특이할 것 없고 특별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의 범주 확장으로 보고 싶은데 중첩돼있어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 이스라엘 이름을 지은 이름값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 땅의 신들과 싸우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있어야 믿지, 없는 데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특이한 현상입니다. 자연스러운 게 아니에요. 만약에 예수님을 내가 하는 것 있고 내 몸도 있고 여러 가지 아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알게 되어서 우리 가정이 예수 믿는 가정이라서 예수까지 알게 되었다면, 이건 자기 범주의 확장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지금 머리 터져 죽어도 괜찮다고 나와요. 감사해요. 고마워요. 이렇게 돼요. 왜냐하면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식당에서 밥 하나 추가하는 식으로 예수 하나 추가해서 나도 살아있고 예수도 살아있고. 이런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물귀신 작전이라니까요. 함께 죽지 아니하면 함께 사는 게 없어요. 주님이 들어왔다는 것은 죽이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신 것은 우리를 목 졸라 죽이는 거라고. 이래도 안 죽어. 목 졸라 죽이는 거예요. “죽여주옵소서.” 이러면 될 텐데 왜 이러십니까? 하필이면 많은 사람 가운데 저한테 아픈 병이 왜 있습니까? 감기 몸살이 웬 일입니까? 감사 안 나오면 성령의 일 아니에요. 그런데 이빨 아픈데 감사 나오느냐? 안 나오죠. 그래서 이론적으로 아파도 감사하겠다. 이러면 하나님 상대로 장난질치는 거고요. 하나님이 속아 넘어갑니까? 일종에 하나의 오기고 오기는 더 심오한 반항입니다. 이렇게 감사헌금까지 했는데 원상회복 안 해주면 진짜 당신 나빠, 하는 식으로 반항의 수법이 상당히 소극적이지만 더 못 된 반항이, 일 잘못 되면 감사 헌금하는 이런 못 된 버릇, 이것 없애세요. 감사는 그냥 감사가 안 나오고 속의 본색이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원망과 원통과 부르짖음이 나오고 난 뒤에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감사로 바뀔 때 감사 되는 능력마저도 나의 종교적인 기술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전에 강의에서 공식 하나 제시했거든요. 육에서 영으로 돌아왔다, 끝. 이게 아니고 수시로 영이 육으로 건너가요. 육에서 영, 영에서 육. 성도의 생활이란 이런 겁니다. 계속 육과 영을 반복하면서 내가 어떻다, 내가 구원받았다, 난 믿음 없다, 믿음 있다, 나는 믿음 없다고 한 참 너무 냉정하다. 이런 게 아니고 그 속에서 뽑아내는 게 있다고요. 왔다 갔다 하면 역시 나 같은 인간 피로서만 구원하는군요. 피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나오게 하는 겁니다. 사탄은 이걸 제일 싫어해요. 잘난 네가 있는데 네 행함으로 영광으로 돌리지 않고 예수님한테 수입하느냐? 너는 줏대도 없고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에 속한 사람들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 있지만 주께서 일부러 지우개로 지워버려요. 달랑 두 사람만 남깁니다. 하나는 바리새인, 한쪽은 죄 많은 세리, 나머지는 다 지워버려요. 중요한 포인트 두 개만 남깁니다. 어차피 세상은 둘로 갈라지니까. 이쪽에 지옥 가는 대표자가 바리새인이에요. 십일조 하지요, 금식하지요.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겠다는 종교적인 자기 낮춤을 의미하는 겁니다. 구제한다는 것은 예레미야나 이사야에 보면 너희들이 이웃사랑을 안 해서 망했으니까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 받지 않고 사랑받는 나라 되겠다는 취지가 바로 구제에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내에서는 인간이 다 합니다. 십일조도 역시 구제의 범주에 들어가고,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나는 바람도 안 피웠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을 부각시키는 겁니까? 저게 마귀라는 거예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마귀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인간들로 하여금 독려해서 종교란 이름으로 인간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수시 불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쪽 세리는?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죄인이라 할 때 수시합격이에요. 수시는 실기만 봅니다. 이론은 안 봐요. 삼위일체 아느냐, 조직신학 몇 년 했는지 안 물어요. 실기가 뭐냐 하면, 죄인임에도 그동안 살려주셨잖아요, 라고 모든 원천과 원인을 주님 몫으로 돌리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고.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거든요. 율법의 끝이 뭐냐? 시편 1편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라” 이 대목이 설명하는 데 어려워요. 왜냐하면 사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이 나중에 주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시편 1편에서 뒤바꿔버립니다. 율법이 먼저 있고 율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두 종류의 사람을 나중에 창조하죠. 의인과 악인. 의인은 율법의 운반책이에요. 율법을 묵상하니까 안 율법 들어있는 사람이고, 악인은 율법이 없는 사람이에요. 율법이 없으면서도 율법의 저촉을 받아야 될 사람이에요. 율법이 없는 사람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쭉정이 같다. 이게 마태복음 13장에서 쭉정이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하늘창고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골리앗 크레인 아시잖아요. 울산도 있고 거제도에도 있는데 엄청나게 크잖아요. 여기에 컨테이너 같은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이게 율법이라면 율법에 접촉이 되는 자들이 인간이에요. 율법의 체제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란 보조 역할이에요. 인간이 중앙에 있는 게 아닙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결합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모든 세상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보이는 것들과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라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범주에 포착이 안 돼요. 그래서 인간은 바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룰 줄 몰라요. 물리학이 뭡니까? 물리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겠다고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잖아요. 하지만 그것까지예요. 전자현미경으로 안 보이는 건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과학이 진리가 아닙니다. 창조과학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물리학, 생물학을 통해서 증명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창조과학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 먹이는 거예요. 그렇게 알아 버리면 믿음이 아니고 지식이 돼버려요. 주 예수를 지식으로 알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것 없거든요. 믿는다는 말은, 나의 믿음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게 믿음이에요. 여러분, 동전으로 긁는 복권 있지요. 복권에 긁으세요, 라고 돼있고 덮쳐 있잖아요. 그러면 동전으로 긁어본다고요. 긁어본다는 것은 하나가 아니고 이중으로 중첩돼 있잖아요. 밖의 것을 긁어내야 본색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너의 믿음을 긁어내란 말이죠. 나의 믿음을 긁어내면 우리는 불신자가 되죠. 불신자가 세리에요. 이 사람이 수시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했잖아요. 그 사람들 불신자라 하면 화냅니다. 그 사람들은 신자로 행세하지요. 아버지 신앙입니까? 본인 신앙이죠. 나의 신앙이 있다는 말은, 나의 신앙은 위선이에요.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아요. 이것이 어려운 말 아닙니다. 굉장히 쉬운 말입니다. 우리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계신데 꼭 아내를 부를 때 여보라 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요. 그걸 듣고 제게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 하면,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 성함이 이태정이에요. 제가 아버지라 부르면 되는데 이태정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겠어요? 화내겠지요. 제가 믿습니다, 하면 주님이 화내는 거예요. 내 믿음을 긁어내야 그게 진짜 믿음 아닙니까? 얼마나 믿었으면 따로 내 믿음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돼야 되지 않습니까? 철학적으로 내 믿음을 거론한다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발생되면 여기서 반드시 ‘너’가 발생돼요. 하나님을 너라고 부르겠다는 거예요. 이승기 노래에 있지요. 누나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너라고 부르겠다고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너라고 부르겠다는 것은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아에요. 자아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주체만 있지 자아는 없어요. 자아가 있으면 타자가 있겠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정하는 데 너라고 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확정짓게 돼있어요. 이게 물리학에서 운동을 측정할 때 같이 운동하는 쪽이 있어야 변화가 있어야 시간도 정해지고 공간도 정해져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뭔가 있어야 변화가 있어야 시간이 흘러감을 알지 가만있는데 무슨 시간이 흘러갑니까?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무려 3일 동안 있었는데 구출해주니까, 한 10시간 지났어요? 10시간 지난 게 아니고 3일 동안 있었어. 생체리듬이 3일인데 본인은 10시간으로 느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자기 잘남, 자기를 뽐내기 위해서 꼭 옆에 누가 붙어 있어야 돼요. 나는 이제 죽어도 예수 안 믿겠다. 산에 가서 혼자 하지 왜 자기 아내 보고 이야기합니까? 날 알아줘. 내가 이런 심정인 것을 알아달라는 거거든요. 내가 누구한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인간은 혼자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남의 가치를 존중해야 되는데 그건 싫어. 처음부터 자기 위주에요. 남을 이용하면서 역시 나는 나다워. 그걸 하겠다고 붙어있는 겁니다. 이 버릇이 예수, 하나님, 부처 어떤 걸 남의 자리에 집어넣어도 여전히 자기뿐이에요. 그러니까 불신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여,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것으로 뭐 하려고? 지 자랑하려고? 천국 문 두드리면서 예수님 사랑했습니다. 그 짓하려고? 믿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안 믿는 예수 믿는 걸 포기하는 넉넉한 자신감이 있어야 돼요. “내가 당신을 알기 전에 먼저 나를 알고 있잖아요, 주님.” 그런 게 있어야 돼요. 웃시야 왕과 친척과 같은 사이, 웃시야 왕과 말이라도 조언이라도 할 수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웃시야 때 영토가 솔로몬, 다윗 때 영토만큼이나 컸어요. 그런데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기 일을 차분히 했다고 생각했지요. 자기가 망할 자란 생각은 못한 거예요. 전부 다 자기보다 못한 자니까. 전부 다 자기보다 지식이 모자라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지는 맨날 가르치는 입장이었단 말이죠. 지는 잘난 줄 알았어요. 멋있는 줄 알았어요. 웃시야 죽던 해야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 성전에 천사들이 있어요. 천사는 지금 한창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가리면서 찬양하면서. 날개로. 그런데 그 천사와 비교해서 이사야 자신은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고 그렇게 성전을 드나들었지만 너무 초라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나는 주어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걸 술어라고 한다면, 내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사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망할 자 속에 일부라고 본 거예요. 뒤에 나옵니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왜 생겼느냐 하면, 하나님은 성전 안에 있어요. 자기는 성전을 왔다 갔다 했지만 성전이 자기를 위한 대상물에 불과하지 여전히 성전 가도 내가 돛대고 집에 가도 자기 그러던 이사야가 된 통으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고 주인공 입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된 백성들 중에 하나인 관계에 있단 말이죠. 이게 시편 2편 4절에서 6절까지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시온 산에 왕을 보내는 것은 성전 안에 있는 여호와가 이 땅에 구체화로 오시는 겁니다. 그럴 때 왜 오셨는가? 하나님이 분노하고 진노한 증거로 예수님을 보낸 거예요. 심판하려고 보낸 거예요. 하나님이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화내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거예요. 세례요한을 앞서 보냈지요. 세례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멘트, 모든 문장들을 보세요. 그게 좋게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화내는 이야기입니까? 화내고 심지어 욕설까지 했잖아요. 이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분리시킨 사람들이 누굽니까? 진짜 막 가는 인간들에게 그랬습니까? 세례요한의 인식이 뭐예요? 이 세상에서 막 가는 더러운 인간들, 성폭행이나 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는 그런 인간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 한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착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 하나님과 누구보다도 가까이,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으려고 나한테 오냐?” 지금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할 때 인간들의 아는 그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요엘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캄캄한 날이고 심판의 날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까진 몰랐지만 예수님 쪽에선 알아요.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할 것은 지옥의 증거만 찾으면 돼요. 집사님은 좋은 증거 챙겼습니다. 우리는 사람 좋으면 복음 이야기해도 좋은 사람 되는 줄 알고 있잖아요. 복음을 안 전해야 좋은 사람 돼요. 제가 지난, 지난 낮 설교에 들릴라와 삼손 이야기 예를 들었습니다.들릴라란 여인이 삼손을 좋아했고 서로 동거했잖아요. 삼손의 모든 게 좋았을 거예요. 힘세지, 남자 힘세면 최고 아닙니까. 비아그라 먹을 필요 없잖아요. 다 좋은 데 그 삼손에게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있다는 걸 빼놓고 나머지 다 믿은 거예요. 흔히 그걸 사랑이라 하잖아요. 그러나 삼손은 사랑하는 여자의 말도 안 듣고 본인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삼손을 삼손 되게 했던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삼손의 인생을 몰고 갈 때 결국 둘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갈라서는 거죠. 너는 너 갈 길, 나는 내 갈 길. 한쪽은 지옥에 살면서 지옥 바닥 그대로 있고, 한쪽은 지옥에서 추방되어서 가는 곳이 어딥니까? 천국이잖아요. 천국은 알아서 선택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꼭 예수님 코스와 똑같아요. 밀쳐서 가야 천국이죠. 내가 자진해서 알아서 가게 되면 내 믿음으로 가기 때문에 위선입니다. 좀 기다려 보세요. 밀어낼 때 옵니다. 감사해야 돼요. 버지니아 머리 피 난다 하니까 이건 아마 주께서 밀어내신다고 생각하시고, 인간은 위로 받을 자격이 안 돼요. 위로한다고 하지 말고 팩트,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돼요. 지옥에서 제대하라고 하신 모양이다. 이것 보면 이 목사 비정하다고 ……. 그래도 할 수 없지만. 밀어줘야 돼요. 밀어줄 때 그냥은 안 되고 신자에서 불신자로 바뀌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 앞에서 주여 나는 믿음도 없는 세리입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 그런 고백 자체가 합격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길 부인합니까? 나올 수 없는 자기 부인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한테 발산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의 증인이에요. 열두 제자가 주님한테 얼마나 많이 배웠습니까? 참 많이 배웠거든요. 결국 갈라섰어요. 다시 올 때는 십자가 앞장 세워서 왔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도마가 예수님 알 때 손가락을 창 자국에 집어넣고 알았어요. 아까 했잖아요. 구멍 난 가슴에 내가 모르는 추억이 흘러 넘쳐요. 인간으로 죄인으로 만들었던 선악과의 추억이 우리는 다 잊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구멍 난 창 자국을 통해서 출애굽을 잊지 않았고, 선악과 잊지 않았고 그걸 그대로 지상에 구체화, 역사화시키는 겁니다. 여기서 문장을 적어보겠습니다.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백성 없다. 왕으로 오시는데 백성이 없어요. 왕만 달랑 와요. 왕이라는 지위, 왜 왕으로 오시는가? 이 세상 왕의 지위 특징이 있어요. 귀환이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왕에 대해서 제가 보기엔 이게 가장 적절한 개념이에요. 그냥 말로 최고 자리, 절대적 자리라 해서 너무 식상해. 왕이란 교환 불가능한 위치에요. 법철학에서 언급합니다. 왕의 신체는 세포로 구성된 게 아닙니다. 모든 백성의 초월적인 상상력으로 구성된 게 왕의 신체기 때문에 왕이 손을 대는 것과 일반인이 대는 것과 같이 보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인간들의 국가관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왕에게 손댄다고 왕이 다치고 그런 건 아니지만 백성들의 이상이 그 순간 다 허물어져요. 아무리 왕의 부인이라도 볼펜 찾는다고 왕의 신체를 더듬으면 안 돼요. 물론 지금은 대통령이 왕은 아니라서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대통령을 교환 불가능한 위치라고 생각하고 투표한 사람한테는 김정숙 여사에 대해서 아주 짜증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를 신처럼 받드는데 어떤 까불이 집사가 목사님 좋다고 하면 다른 여자 집사들이 머리카락 잡아당겨요. 우리의 신을 네가 왜 건드리는데? 교환 불가능한데. 건드린다는 말은 내 몸과 네 몸을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상상력의 극단, 믿음의 내용이 다 깨져버려요. 나보다 더 나은 뭔가 있어야 교회 가는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함부로 대하면 저렇게 시시하다면 내가 뭔데 믿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논리를 이어봅시다. 주님이 내 정성, 내 십일조를 받는다? 그러면 믿지 맙시다. 왜 내 행위를 받습니까? 세리처럼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일체 나의 것을 안 받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지요. 그럼 헌금도 안 받으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는가? 그건 죄 짓는 행위로 운영을 해요. 헌금이 뭐냐? 죄 짓는 거거든요. 죄 좀 지어줘야 교회 운영이 된다고요. 제가 새순교회 강의에서 했잖아요. 피아노 고장 나면 피아노 기증하는 죄를 지라고. 어제 오후에도 그걸 인용했습니다만. 우리는 뭘 해도 죄를 내놓는 그 모습에 대해서 정말 감사해야 돼요. 내가 죄 짓는 것을 웃으면서 지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에 감사해야 돼요. 웃으면서 불신앙 행동하는 것을 고마워해야 돼요. 우리는 얼마나 태고 난 위선자입니까? 믿습니다, 이러다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편하게 웃으면서 믿음 하나도 없어요. 요즘 점차 제 주변에 늘어나고 있어요. 좋은 증거에요. “목사님, 저 믿음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인간의 힘이 아니다. 제가 너무 오버해서 좋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믿음 없어서 믿음 없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포장질하는지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 땅은 지옥입니다.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살다보면 지옥 가요. 뭐가 이상하냐 하면, 같이 지옥 가야 되는데 그것도 박자 맞추어서. 마귀가 치는 북소리에 맞추어서 지옥 가야 돼요. 마귀의 소리에 세 종류가 있습니다. 돌이 떡 되는 것과 인기 있는 것과 세상에 모든 걸 가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이게 인생의 보람이잖아요. 만약에 집안에 남편이 돈도 너무 많아. 골프 쳐도 해도 돈을 다 못 써. 크루즈 여행해도 다 못 써. 또 좋은 친구가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가족들 존경해. 그러면 술 퍼먹겠습니까? 아니거든.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악마에 길들여지니까 악마 속성과 같은 속성이라 그게 없으면 허전한 거예요. 거기서 다고, 다고, 달라는 겁니다. 악마가 평생 동안 제시한 그것 없어서 미치겠다는 거예요. 일종에 마약 쯤 되는데 마약해서 마약중독자가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악마가 준 사료에 길들여진 사료중독자들입니다. 우리도 포함해서. 교회 와서 인상 찌푸리고 있을 때 분명히 이번에 고3인데 떨어졌어. 그런데 교회 와서 뭔가 활짝 폈어요. 말도 안 걸었는데 지가 알아서 말 걸고 인사해. 분명히 이건 상대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기대했던 바가 충족되어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했던 바가 자신이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잘났다고 기대했는데 아다리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왔을 때 무엇으로 감사하고 충족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긴 한데 왜 죄인인 줄 모르겠다고 왔다가 목사 설교를 통해서 정말 죄인 맞음을 알았을 때 얼굴 활짝 피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돼요. 올 때부터 문제 있다고 가지고 나와야 돼요. 문제 있어도 괜찮아요. 왜? 십자가 피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과 영, 육과 영,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주께서 십자가만 뽑아내는 겁니다. 설탕 넣고 돌리면서 밑에 페달 밟을 때 설탕한테는 아무 이익 없는데 없는 솜사탕 생기잖아요. 주께서는 십자가란 솜사탕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육과 영, 육과 영 부리고 마귀 보내고 힘들게 하고 깜짝 놀라게 전화 오게 하고 모든 게 솜사탕 하나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네가 의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가 너라는 작품이라는 것을 주께서 스스로 우릴 앞장 세워서 예수님이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어차피 구원은 해야 되는데 지금 안 데려가는 이유가, 온 지옥을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미국에 보냈다, 한국 보냈다, 다시 미국 갔다. 봐, 이렇게 살잖아. 죄인이라는 걸 나팔 불면서 살잖아. 왜 믿음 없음을 우리는 편하게 그걸 자랑 못합니까? 죄인 부르러 왔다면 죄인 되면 되지요. 우리 역할이 죄인 역할이라면 서슴없이 손들고 나서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말라는 거예요. 책임자가 있는데 왜 내가 책임져야 됩니까? “하여튼 인간 뻔뻔스러워. 인간의 기본 양심도 없어. 어떻게 그런 짓해놓고 책임도 안 져?” “그래 성경 말씀에 위배자가 나야. 양심에 화인 받았어. 됐냐? 여기다 주홍글씨로 A 크게 쓸까? 집에 가서 문신을 할까?” 너새니얼 호손이 지은 [주홍 글자] 소설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청교도 분위기에서 간음한 게 들키면 그 동네에서 저주받은 여자가 된다는 거예요. 붉게 A(Adultery)라는 주홍 글자로 간음자라 하는 겁니다. 이게 청교도 소설이거든요. 그걸 뒤집으면 복음 돼요. 알아서 새기면 돼요. 그게 주님이고 성도들이고 사도들이에요. 마귀가 갈지 못합니다. 마귀가 더 이상 심령을 긁을 데가 없어서 동전으로 다 긁어서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십자가 나오는 바닥까지 다 보여주니까 갈굴 게 없어요. 그래서 간음한 여인 잡아놓고 하는 말이 뭐냐? 여기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거예요. 마리아 자기 향수를 다 깼거든요. 욕 되게 얻어먹었어요. 비싼 향수를 예수님 앞에 한꺼번에 날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이, 이 향수병을 깨는 행위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영원토록 사람들에게 회자 되리라.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자기를 깨니까 위선 깨면 자기 죄인 됨을 자연 상태의 죄인 됨을 아담의 상태가 그대로 나오지요. 그게 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긁어버려라. 그러면 네 짐이 훨씬 가벼워지리라. 끝으로 어제 낮에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자연 상태는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역시 벌거벗은 상태에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은 상태지만 수치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아무 달라진 게 없는데도 수치를 느꼈거든요. 이게 바로 죄에요. 자기가 머리 깨진 상태가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 이게 바로 숨겨진 사탄의 죄였습니다. 나는 남한테 보이기에 안 수치스럽게 살고 싶은 자기 죄는 생각 안 하고 잘나고 싶은 그 충동이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가죽옷으로 가렸다는 말은, 가린 것 밑에서 뭘 해도 죄가 되어서 십자가 피가 돋보이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완성이고 이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사랑이라는 가죽옷을 입혔잖아. 그렇다면 네가 자랑할 것은 나 구원받았다, 앞에 나를 집어넣지 말고 주님께서 못난 놈 사랑해줬다는 십자가만 자랑하라.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겠노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팩트입니다. 이게 사실이에요. 이게 역사고. 다음 시간에 할 것은 주께서 이것 남기기 위해서 다른 것 다 부셔버립니다. 시온 산에 있는 메시아의 사랑 남기기 위해서 율법적 작용을 계속 이어가면서 율법은 모든 것을 심판하는 작용이 다음 내용에 나옵니다. 질그릇처럼 깬다고 나올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안 좋은 소식, 불행한 소식, 아픈 소식을 이제는 수치라 여기지 않게 하여 주시고 차라리 그것이 하나님 복음의 일부라고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