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3a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
20171113a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편 5절부터 보면,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4절부터 6절까지 보게 되면 왕 세우는 계기가 하나님께서 비웃으시고,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결과로 시온에 왕을 세운 것으로 돼있습니다. 그러면 시온에 나타나신 왕은 사람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왕이 세워졌다면 여기서 시온 산에 오신 왕에 대한 믿음, 사랑은 애초에 인간에겐 없지요. 인간 쪽에서 제시된 게 아니거든요. 만약에 아프리카 어느 주민들이 생전에 카스텔라를 구경한 적도 없고, 카스텔라란 용어도 들어본 적도 없고, 맛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선교사에게 카스텔라 먹고 싶다는 말이 성립될까요? 안 되지요. 제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내신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이 인간에겐 있을 수 없단 말이죠. 하나님 쪽에선 메시아만 보내고 인간은 믿고 하는 그런 관계는 애초부터 성립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메시아를 보내고 예루살렘 시온에 왕을 보내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지 인간이 요청한 게 아닙니다. 요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인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연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연 상태란 방금 이야기했듯이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게 자연 상태에요. 자연 상태는 자연스러워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미가 뭐냐 하면,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믿는다는 것은 본인이 사전에 알고 있는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해요. 한국에서 카스텔라를 많이 먹어본 사람이면 이미 맛을 보고 카스텔라가 뭔지 아는 사람에게만 그걸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을 어려운 말로 “나의 범주”지요. 나의 삶의 범주에서 이미 익숙해진 것은 다시 그리워하고 찾을 때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부가 결혼했는데 남편을 엉뚱한 짓을 한다. 그럴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나는 당신을 믿어.” 할 때는 이미 부부라는 걸 전제로 믿는다는 게 돼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믿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범주가 확장되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믿음이란 내가 알고 있는 범주의 확장, 또는 확대가 되겠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서도 아니에요. 알아서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데 죽어서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 이유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여기 존재한다. 여기 있지만 죽어서도 어느 나라에 또 있고 싶다는 나의 있음을 전제로 해서 거기서 나의 범주가 확장된 겁니다. 확장된 것에 필요한 것을 상상력이라 합니다. 상상력은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굉장히 강조한 거예요. 인간은 창의성이 있는데 그 창의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시킬 때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고 네 창의성을 발휘하라고 하지요. 창의성이란 네 상상력을 극대화시켜봐라, 키워봐라. 남과 똑같이 하면 남을 앞설 수 없잖아요. 상상력이 발휘될 때 앞설 수 있는 겁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력이 뛰어난 거죠. 칸트는 말하기를 그 상상력이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보는 겁니다. 현재 인공지능, 산업의 기술발달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다 상상력에서 나왔습니다. 일단 일반 공장에서, 회사에서 훈련시키는 게 있어요. 품질관리지요. 품질관리란 현장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하면 단가를 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능률을 높일까, 어떻게 공정을 줄여서 절약할 수 있는가? 그런 것에 성과를 내면 인센티브를 지급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만약에 롯데마트에 아줌마가 입사했는데 하는 일이 불합리하다 하면 건의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말고 장소를 이렇게 배치하게 되면 훨씬 더 편리합니다. 그게 품질관리에요.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지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니까. 그게 상상력이란 말이죠. 그게 인류의 발전을 시켜온 겁니다. 미사일, 달나라까지. 따라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아쉽지 않아요. 인간에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보다 나의 범주가 하늘까지 닿는 것, 이게 바벨탑 심보지요. 우리 이름이 하늘까지 닿는 거예요. 하나님을 이 땅에 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 속에 그런 건 없어요. 인간의 상상력에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건 없어요.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는 거기 계셔요. 우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갈 때 어떻게 간다고 합니까? 물론 집사님은 욕 얻어먹었다고 하지만 착하게 살았다는 거죠. 착함은 우리 안에 내장돼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해서는 지옥 가고 선하면 천국 간다. 그런 논리입니다. 패션디자인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거에요. 미술계통도 마찬가지고. 색감을 볼 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에서 보라에 가깝고, 빨강에 가까운 색 스펙트럼을 설정하지요. 그래서 이쪽이 선이고 이쪽이 악이라면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스펙트럼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선악구조를 갖고 있는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당신은 선에 가깝다. 나는 악에 가깝다. 악에 가깝다면 사업하다 잘 안 돼서 사기 쳐서 물건을 팔아먹었는데 미안하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회에 헌금해서 선으로 잡아당겨야 되는 거예요. 이쯤 되면 강의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음성 듣고 동영상 보는 사람들은 싫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기초부터 어렵기 때문에. 시편 2편 4절에서 6절에 보면,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데 그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비웃으시고 진노하사 분을 발해서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요청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화를 내서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거예요. 그게 중보자인데 그리스도거든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자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게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믿을 수 있는데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것은 인간을 생각도 못한 거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추진에 의해서 시온 산에 왕을 세운 거예요. 따라서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중보자,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프리카 밀림 속의 원주민이 생전에 카스텔라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맛 본 적도 없는데 선교사 만나자마자 카스텔라 달라고 할 일은 없지 않겠느냐?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준 메시아를 믿는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뭘 알아야 믿지 생판 낯설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통용하는 믿음이란 자기의 상상력과 연결돼있는 것만 믿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다. 죽어선 좋은 데 가야지. 좋은 데 가려면 나를 위해주고 나를 천국에 보내주는 그런 메시아를 믿고 싶다. 자기가 구상할 수 있고 연결성 있는 것만 믿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아를 인간은 못 믿고 인간 내부에서 만들어진 구세주나 메시아나 이름이 예수든 부처든 관계없어요.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를 유리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것과 관련된 메시아를 믿게 돼있지요. 그러니까 전부 다 그런 메시아는 엉터리지요. 엉터리인 근거를 대라면 시편 2편 4절에서 6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짜 메시아는 인간세계의 그러한 흐름에 대해서 분위기에 대해서 분노하고 진노하고 화를 내고 있다는 증거로 시온 산에 왕을 세워요. 좋은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화가 낸 입장에서 보낸 분이 시온 산의 왕인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좋게 보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추진에 대해서 믿을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도 믿지 못했다는 증거를 갖고 주께서는 도로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 열두 제자 다 떠나고 말았지요. 맞지 않았던 거예요. 인간들이 원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메시아와 맞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진짜 하나님 뜻과 합치된다면 대환영을 했을 거예요. “기다렸습니다. 오실 분이 당신이군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강의할 때 그렇다면 인간에게 메시아가 없는 상태를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자연 상태. 인간은 자연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알려면 교회 와서 열심 내는 것으론 분간 안 되고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야 돼요. 자연 상태란 되게 아플 때 얘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남편이 말썽을 부릴 때, 자기 몸이 아플 때처럼 만사 귀찮을 때 그게 딱 자기다워요. 예수고 뭐고 다 귀찮아. 교회 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몸도 감당이 안 돼요. 그 자연 상태가 가장 자기 자신답습니다. 그 자연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몸이 아파도 하나님 안 믿고 몸이 건강해도 놀러가기 바쁘지 하나님 챙기는데 바쁜 게 아니거든요. 컨디션 좋겠다, 돈 있겠다, 친구 만나주겠다. 뭐 때문에 교회 나와서 이해도 안 되는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래도 믿음이 아니고 저래도 믿음이 아니란 걸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아는 인간세계에서 굉장히 외롭습니다. 외로운 데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이야기해버렸어요. 그러니까 못으로 박고 창으로 찔러버렸어요. 찔린 창 자국을 도마에게 보여줄 때 문득 떠오른 노래가 있어요. 백지영 씨가 불렀던 <총 맞은 것처럼> 노래가사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세상의 진리를 잘 이야기했는지. 본인은 가사 쓰고 그것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 푹 찔렀는데 구멍 난 가슴에 추억이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진실은 창으로 찌른 구멍이 없으면 진리는 막히게 돼있어요. 찌르기 때문에 그 구멍 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지금 인문학강좌가 문제는 뭐냐 하면, 찌르질 않는다는 거예요. 듣기는 듣지만 진실을 쌓고 덧붙이고 추가시키는 것이지 구멍을 내지는 않아요. 지혜를 모으자, 이거잖아요. 지혜를 모아서 소통하자는 것이지 서로 갖고 있는 선한 것과 정의로운 것과 나름대로 많이 공부한 지혜를 계속 모으면 종합하면 거기서 새로운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나와서 인류를 더욱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희망을 걸고 하는 것이 인문학강좌에요.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인문학 중에서도 감을 잡은 사람이 있어요.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것, 지식 자랑밖에 안 된다. 분명히 문제 있다고 감 잡은 사람이 라캉, 지젝이에요. 확실하진 않지만 인간이 자연을 만든 신을 살해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가? 니체는 신을 죽었다고 했지만 라캉은 죽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신을 죽였느냔 말이죠. 왜 이 세상은 신이 없는 세상이고 신이 없는 대신 우상적인 신만 장난감 병정 같은 신들만 각자 자기 맞는 걸 내놓고 교회 세우고 성당, 천주교 다니고 왜 이런 식이냔 말이죠. 아무 해결책이 없는, 근원적인 것을 터치 못하는. 근원적인 것을 터치하려고 바닥을 파내면 안 돼요. 찔러야 돼요. 왜? 십자가가 그러니까. 주님은 나를 죽여 버리란 겁니다. 그게 네 자연스러움에 맞는다는 겁니다. 자연스러움은 내추럴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분노 요소가 들어있으니까 가장 자연스러운 게 하나님을 찌르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 천지를 만드신 분을 보고 싶으냐고. 메뚜기, 해바라기, 산, 강, 하늘에 달, 별, 달을 만드신 분을 정말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귀싸대기 맞고 있어요. 그 당시 제사장 병정들한테.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귀싸대기 맞아요. 휘청거릴 정도로 맞았어요. 그분이 우리까지 포함해서 천지를 만드신 분이에요. 예수님이 그러한 세상인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겁니다. 마치 왕자가 거지로 변장한 것처럼. 하늘의 영광됨을 포기하시고 거지꼴로 오신 거예요. 자기가 만든 세상에 자기 백성에게 왔음에 요한복음 1장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영접하는 자가 없었어요. 영접하는 자가 있기는 있었는데 오직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되고 사람의 의지로도 안 되고, 뜻으로도 안 되고, 교회라는 종교분위기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 그게 요한복음 6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나한테 올 수가 없고. 가까이 가면 오는 것 아닙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당시 오병이어 할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가까이 했습니다. 같이 식사하고. 그런데 자기 딴엔 가까이 했는데 주님은 가까이 한 게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반드시 그 과정이 설정돼야 되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 자만 예수님께서 쑥 들어올 수 있어요. 주님 품 안에 쑥 들어오는 거예요. 집사님, 손자 키울 때 어떻습니까? 할머니 안 좋아할 때는 사무적으로 하다가 좋아하게 되면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품 안으로 쑥 들어오지요. 누구든지 주한테 쑥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이게 인간에게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가정이 우환이 있다? 아무 문제도 안 돼요. 몸이 아프다. 문제 되지 않습니다. 쑥 들어오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요소도 없습니다. 쑥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의 상상력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상상력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니고 내 상상력 바깥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가 완전히 자길 포기하고 부모 품에 안기는 것처럼 그냥 당긴다는 것으로 보면 돼요. 능력에 당겨서 일방적으로 쑥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아까 이야기했지만 자연 상태에서 메시아라든지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범주의 확장이라고 언급했지요. 범주의 확대입니다. 인간은 신마저 정복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범위를 넘어서요. 나에서, 가족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나중엔 어디까지 상상하느냐 하면, 지구를 벗어나서 우주까지, 우주 넘어서서 신의 세계까지 인간의 상상력이 안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우주까지 넘어서서 신을 예술이라 하고, 우주까지 미치는 것을 천문학, 현대물리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술은 과학을 훨씬 더 능가하지요. 물리학만 해도 인간의 언어를 초월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과학선에서 멈추지만 물리학은 언어를 숫자로 바꿔야 돼요. 슈뢰딩거 방정식을 말로 못하잖아요. 설명할 순 있어요. 설명하면 책 한 권이에요. E=mc² 이건 물질이 에너지로 변하는 그 원리에요. 일반물리학을 공부 안 한 사람은 이건 숫자 2고, m, c 이게 뭐 어떻다고? 광속이고 뭐고 집어넣어도 왜 이 둘이 붙어야 되는지 설명하려면 몇 년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방언이에요. 숫자라는 게. 아인슈타인 영화 보면 칠판에 온통, 수학과 공부하는 것을 다른 과 학생들이 보면 수학인데 숫자보다 문자가 더 많아요. 숫자가 나오는 게 수학인데 문자가 숫자를 대신합니다. 집합론 해서 이상한 문자들 끄집어내고. 이게 자기들끼리 하는 방언인데 이게 범주의 확장입니다. 이렇게 범주가 확장되게 되면 새로운 창의성을 개발해서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술은 기존에 있던 단어로 일반 사람들이 못 알아먹게 만들어요. 남성용 변기를 전람회에 전시해놓고 “샘”이란 이름을 붙여서 유명한 작품이 됐잖아요. 설명해보라 하면 간단한 거예요. 예술 작품은 작가의 물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장소가 결정한다는 이런 소리하는 거예요. 그게 화장실에 있는지, 변기 파는 가게에 있는지, 전람회에 전시돼있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거예요. 그 뒤에 그걸 보고 많이 흉내 냈잖아요. 그건 작품 아니에요. 왜? 한 번으로 마감됐어요. 그 방법은 그 사람으로 끝났어요. 그 다음에 해봐야 안 쳐줍니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의미를 사용할 때 이게 물이라면, 물리학자는 H₂O로 물이라고 보지만 예술가는, 이걸 물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물이란 단어가 갖고 있던 많은 추억들과 물과 얽힌 어릴 때 기억들을 품고 물이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의미는 본인만 알아요. 순간적이에요. 사람들이 흘러가는 일상이 너무나 지루하고 권태롭고 참기 힘들어서 그 순간 흐름을 쪼개서 종교적 해탈의 경지까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입니다. 예술은 기쁨을 주지 않으면 안 돼요. 무조건 기쁨을 줘야 돼요. 기쁨을 주려면 파격이고 탈선이고 일탈이어야 돼요. 흔히 아는 것 하면 안 돼요. 재미없어요. 그래서 요새는 과학과 예술을 접목시켜서 경제적으로 새로운 아이템이 되어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어요. 이게 범주의 확장이에요. 계속 범주를 확장해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절이라 하지만 범주의 확장이 연속성을 가진다는 겁니다. 단절을 포함한 연속성이 돼버리면 결국 단절이 있었더라면 결과적으로 연속성이 돼버려요. 정-반-합, 반이란 부정적인 게 있다 할지라도 결국 합이잖아요. 합에 도달하면 부정적인 것이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에요. 예수님이 출생했다. 고귀하신 분, 동방박사가 찾았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래 우리 죄가 많아.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지요. 십자가 죽음이니까 존재의 반대는 반이죠. 부정. 존재한다. 긍정에서 부정했다, 부활로 합이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고난 받고 힘들어도 부활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 오셔서 십자 지고 부활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 방해 없이 순순하게 믿습니다가 돼버려요. 이게 가짜 복음이거든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이게 복음이 되는 거예요. 핀셋으로 부활을 집어내면 십자가와 출생은 지나간 일이 돼버려서 굴비 잡을 때 제일 윗대가리 쥐게 되면 아래쪽을 별 의미 없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딱 집는다고.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십자가를 집으면 출생과 부활이 십자가를 보여주는 이면, 또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있는 건 귀한 거야. 난 죽으면 안 되는데. 사흘 만에 다시 생겨났네. 이게 천국이잖아. 잠시 내가 깜짝 놀랐지만 결국 내가 있으니까 이 복음 받아들여야 되겠다. 제가 잘못됐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시편 2편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은 이걸 최종적으로 올려버리면 결국 출생과 부활도 십자가를 받쳐주는 이면, 환경, 배경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철저한 부정이 되죠. 이 부정 속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살았다, 할 때 나라는 것을 부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일거에 부정해버립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하다, 우리 가정에 우환이 있다, 내 몸이 아프다 할 때 그 모든 것을 성경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앞에 내가 붙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것 믿음 아니에요. 내가 믿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반대로 이야기하죠. 너희를 나를 사랑하지 않아야 된다. 요한일서 4장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 아니요, 이걸 확실히 하자. 요한일서를 보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한 적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바로 출생도 아니고 부활도 아니고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 이미 구원이 된 사람이에요. 뭐든지 성경대로 가야 돼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성도라면 이 내용이 우리 안에 계속 살아있어 줘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가 붙인 것은 다 탈락이죠.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는 방법은, 내가 자살하면 죽일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죽이는 방법은, 남이 나를 죽여야 되거든요. 이게 물귀신 작전이라는 겁니다. 혼자 죽으면 되는데 같이 껴안고 죽는 것, 그게 로마서 6장에서 물귀신 작전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이것과 비슷한 경우가 진주 촉석루에서 논개가 왜군 장군 붙잡고 뛰잖아요. 그걸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의 세례가 뭐냐 하면, 주님이 논개고, 우리는 왜군 장수에요. 붙들고 뛰어내린 순간 그 도착지점이 천국, 아들의 나라에요. 이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코스, 출생, 십자가 이게 개인적인 공정이에요. 개인적인 절차를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답습시킵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집에서 남자들이 창문틀 갈아 넣는 예를 들었어요. 문틀아 빠져라, 하면 빠집니까? 문틀을 바짝 들고 홈의 끝을 맞추고 궤도에 밀어 넣으면 원위치로 가는 겁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의 궤도에요. 내 쪽에서 백날 밀어도 안 맞습니다. 우리를 바짝 들어서 주님의 궤도에 출생부터 십자가 궤도에 딱 맞춰야 돼요. 그 맞추는 걸 이름 바꾸기입니다. 전에는 출생하면서 부모가 내 이름을 불러줬기 때문에 우리는 육입니다. 부모가 이름 붙인 건 다 육이에요. 인간으로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 다 육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말은, 제가 어제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서로 마주 보는 것은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고 서로 존중하고, 헤겔에 의하면 상호 인정하는 거예요. 서로 존중하고 서로 대접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만약에 목사님한테 이름 바꾸세요. 이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면 이름 짓는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종속이 돼요. 이름 짓는 관계와 상호 만나는 관계가 달라요.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아담이란 이름을 지음 받은 존재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같이 만나려고 시도해요. 어떤 사람이 말하듯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나님이 친구입니까? 내가 아무리 해도 예수님 안 믿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혀가 있어야 돼요. 그 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빨과 혀, 구강구조가 형성돼야 말을 하거든요. 그것 누가 만들었어요? 이건 어려운 것 아니에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완제품이라 생각하고 이름 짓는 거예요. 중간제품에 이름부터 짓는 경우는 없어요. 다 만들어놓고 이름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부 다 이미 소유권이 하나님께 넘어간 거예요. 이 말은 “너한테 잘해줄 게”가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는 정보를 온전히 다 담아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게 피조세계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는 두 종류로 돼 있잖아요. 하나는 사탄 쪽에 하나는 예수님 쪽에서,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하나는 저주, 하나는 축복.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구원하는 속성도 있고 심판하는 속성이 있어요. 이 속성을 에덴동산에 두 개의 나무로 표현해 심어놨어요. 죽음이라고 돼있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생명나무는 이름 자체가 생명이잖아요.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 이게 에덴동산에 심은 하나님의 자기 표시에요. 그게 구석에 있는 게 아니고 중앙에 있어요. 그러면 피조물은 살고 죽는 걸 통해서 주님만 표현하는 거예요. 그 원형이 하나님이지만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써 모든 세계를 만드신 만유의 주가 그런 목표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분에 의해서 말미암아 만들어진 거예요. 만들어졌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거예요. 왜 나를 아프게 합니까, 죽이십니까,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자기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야 돼요. 내 이름은 엄마가 지어줬는데요? 엄마, 아빠는 어디서 왔어요? 그게 육의 코스에요. 내가 알고 있는 자연 상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확장 안에서만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확장이라면 그건 육입니다. 이미 관계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상 그리고 에덴동산으로 갈 수 없도록 차단시켰으면 인간이 생각하는 상상력의 범주 확장은 결국 그 안에서 영원히 갇혀 있으란 말이에요. 인간은 인간 내부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 상태를 다시 설명해드리겠어요. 그래서 인문학강좌를 보는 건 좋지만 그게 인간에게 생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죽음 세계에서 유통되고 순환되는 겁니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심판, 죽음. 이런 것은 빠지고 그들이 했던 범주의 확장 순서를 밟아요. 여러분 우리는 태어났지만 일단 가족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건전해야 행복합니다. 사회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국가도 사회고, 직장도 사회고, 일반 모임도 사회니까 우리는 서로 이 땅에서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사회, 직장을 세웁시다. 범주를 여기까지 멈추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철없는 뇌 과학자가 범주의 묵계를 위반해서 인간의 죽음의 원리가 어떻고 하면, 그건 편집되는 거예요. 방송에 못 나가는 겁니다. 종교 문제 나오면 방송에 못 나가는 거예요. 이것까지. 결국 놀자는 이야기에요. 힘 있을 때 놀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 끝에 예수님을 죽인 것은 문화다. 문화는 다 인간을 위해서 하는 거고 이게 놀이거든요. 호이징가란 사람이 주장했듯이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떻게 하면 놀 수 있는가? 노는 것의 특징은 무정형, 무질서, 무논리에요. 디오니소스라 하죠. 디오니소스는 축제를 벌이는 겁니다. 포도주 진탕 마시고. 디오니소스와 반대되는 것이 아폴론, 질서정연한 거예요. 사람 미칩니다. 기계도 아니고. 아폴론 세계에서 살다가 놀자! 일본으로 제주도로 해방되고 다시 악착같이 돈 벌고. 또 놀자. 그런데 직장이 없으면 계속 놀고 술이나 마시고. 이게 인간의 자연 상태,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바닥. 돈을 왜 버느냐 하면 원 없이 쓰기 위해서, 원 없이 놀기 위해서. 이게 자연 상태에요. 그럼 어떤 교회에 다니겠어요? 잘 노는 교회에 교인이 많아요. 잘 노는 교회기 때문에 숫자가 많을수록 더 노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용납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아요. 다 노는데, 뭐. 그래서 교회는 놀이시설을 많이 만들고 노인 70대 이상 노는 장소, 50대 노는 장소, 30대 노는 장소, 20대는 드럼과 기타만 사주면 되고. 이왕 노는 것 신도 같이 놀 것이라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겁니다. 노는데 비용이 필요하니까 십일조를 실적처럼 내야 돼요. 그것이 인간의 범주였습니다. 이 자연 상태를 시편에선 그냥 산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 땅. 이 산에 메시아가 온다, 이 땅에 메시아가 온다고 보면 돼요. 땅이니까 산, 들, 호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시편 2편 6절에 보면 무슨 산이라 했습니까? 특정 지점을 지정합니다. 시온 산이라고. 시온 산은 격전지거든요. 인간의 범주와 하나님의 범주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소. 인간이 범주를 확장하고 하나님도 범주를 확장하다가 정면충돌해서 인간과 신의 전쟁의 속성과 성격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최종적이니까 그전에 이미 수시로 전쟁이 있었단 말이죠. 그 전쟁사가 사사기, 그전에는 여호수아입니다. 시온 산이 예루살렘에 있거든요. 시온 산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이 전쟁의 특징이 뭐냐?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참 이상하죠. 이게 민수기, 신명기에 예언 돼있어요. 계속 네게 붙여줄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너는 가만있어. 놀래지도 말고 겁내지 말고 벌벌 떨지도 말고 가만있어. 내가 붙여줄 거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국가이름이죠. 이름을 붙였다는 말은 이름을 붙임을 받은 쪽은 이름에 담긴 속성과 기능을 담아내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이니까 아까 공식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육으로 돼있지요. 여기에 자연스런 자기의 범주가 있을 거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붙였으니까 하나님의 범주가 이스라엘 내부에 함께 있겠지요. 하나님이 이름 붙여줄 때는 사람의 범주를 동의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했단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 개개인이 육으로 돼 있잖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일반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보기에 모든 산은 그냥 일반적인 산이에요. 거기서 뛰놀고 들판 있고 농사짓고 끝. 이겁니다. 요새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가고 저녁 먹고 티브이 보고 <황금빛 내 인생> 보고. 그 다음 날 또 직장 가고 그런 거예요. 자연 상태니까 내가 여기 있다. 가정 행복 우선, 그 다음에 가정 행복을 위해서 국가가 안정돼야 되고. 이게 우리 범주의 전부라니까. 여기에 무슨 믿음이 있어요. 돈만 벌고 놀면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지적해버린 겁니다. 네가 성전이다. 네가 시온 산이다. 일방적으로. “주님,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왜 그런 거예요?” 내가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되게 하기 때문에. 이름 지어준 당사자가 본격적으로 자기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자연 상태에서 불신자나 똑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손 걷어붙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너를 통해서 보이겠다고 나서신 겁니다. 사사기나 여호수아에서 보면 여호와 전쟁의 특징이 철기로 된 무기가 없어요. 그 당시 블레셋, 지금은 팔레스타인이죠. 농기구 하나 구입해도 철기문화 발달된 블레셋 민족에 가서 다듬어야 됩니다. 블레셋 민족은 지중해 해양민족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정착했고. 그쪽은 해적들인데 지중해 돌아다니면서 각종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서 철기문화가 형성됐어요. 고고학적으로 그렇게 돼요. 그렇다면 전쟁을 하나마나에요. 이건 게임이 안 돼요. 아프리카 흑인들과 미군과 싸우면 되겠어요? 람보 따발총과 새총이 무슨 게임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전쟁을 붙이는 거예요. 적들과 상대하기 전에 하나님과 네 자신과의 싸움을 적들을 동원시켜서 이스라엘 내부 전쟁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적들을 동원시켜서 온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담을 수 있는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일에 나서는 거예요. 그 전쟁을 무슨 전쟁이라 했습니까? 일부러 원치 않더라도 다가오게 만들고 붙여주는 겁니다. 아까 집사님도 아는 권사님한테 맞아 죽을 뻔했다고 했는데 그게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마귀에 속한 사람을 안 붙이면 우리는 자기 믿음이 괜찮은 줄 알고 정리도 안 돼 있으면서도 마치 제대로 잘 믿는 것처럼 합니다.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믿음이 정리가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유도등이라 했잖아요. 밤에 활주로에 등을 설치해서 비행기 착륙을 유도하는 것처럼 주께서 양쪽 다 압박을 가해요. 이쪽도 마귀고 저쪽도 마귀에요. 마귀와 마귀 사이에서 길이 없는데 좁은 길이 나오도록 영생 길이 나오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게 귀찮아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어. 돈 되고 오래 살고 인물 되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빨리 나열했잖아요. 제일 먼저 나온 게 돈 되고 키 크고 인상 좋고 성격 좋은 의사, 건강하고. 바람 안 피우고. 우선은 돈 돼야 되고. 돈을 못 써서 환장한 그런 품위 있는 여자 되고 싶은. 재벌 회장에 붙어서 예쁜 입으로 그렇게 못된 말하면 안 되지요, 하면서 충청도 사투리 쓰면서 옆에 붙어서 알랑방귀 뀌면서 <품위 있는 여자>에 나오잖아요. 꽃뱀이에요. 그렇게 해서 내 위주로 살고 싶은데 주님께선 옆에 똑같은, 우리가 자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연 상태는 내 범주 확장이죠. 나의 범주 확장은 바벨탑 속성인데 내가 신처럼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최고 되는 거고 내가 보기에 만족스런 상태가 되는 게 자연 상태에요. 그런데 주님께선 옆에 이스라엘과 똑같이 닮은 자연 상태의 이민족을 붙여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들은 전쟁할 때 자연 상태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의 개입을 거부하기 때문에 주의 뜻이 찾아오는 것을 본인이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사사기 같은 경우에 실컷 당하지요. 마지막에 뭐라 합니까? 하다하다 빼앗길 것 다 빼앗기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왜 저를 힘들게 못 살게 구십니까? 그걸 성경에선 너무 단순하게 표현했어요. “부르짖음”이라 해요. 부르짖음의 해결책이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이런 단어, 부르짖음, 붙여주는 전쟁 자체가 자연 상태 인간에게 굉장히 낯설고 이상해요. 우리한테는 일상생활에 전혀 필요 없는 단어가 나온단 말이죠. 부르짖음이란 출애굽의 원리는 소멸하지 않았다. 반복한다, 답습한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부활했잖아요. 그것이 예수님으로 끝난 게 아니고 성도에게 답습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게 싫어요. 나는 남들처럼 내 인생 살고 싶어요. 주님의 이름이 나를 주도하는 것이 싫어요. 나는 내가 가꾸는 내 이름, 내 인생, 내 자존심, 내 체면과 품격과 품위가 따로 있어요. 이걸 지키고 싶어요. 이걸 지킬 때 내 이름이 빛나니까. 내 영광이 빛나니까. 우리 가정이 빛나고. 내 자식 잘 키웠다. 나 이렇게 오래 산다. 어제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제발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라고. 분명히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했건만 오래 사는 것 자랑하고 잘 키운 자식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했는데 같은 성령 받았으면 고백이 왜 다른지 모르겠어요. 그게 아직까지 부르짖을 상황이 아니고 아직 견딜만하고 견디고 있는 거예요. 자신이 할 도리 다하고 처방을 내려 보는 거예요. 달래도 보고, 돈도 줘보고, 내쫓아도 보고, 온갖 것 다해보는 거예요. 아직까지 안 답답해. 내 힘으로 가정이란 범주를 지키다가 그러다가 출애굽기에 오면 출애굽기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것만 할게요. 출애굽기 원리에 의하면 어린양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은 다 죽을 사람들이었어요. 이미 죽었던 인간을 살려내는 그것도 모르고 옛날부터 살아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10분 쉽시다.